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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영문 鄭泳文
1965년 경남 함양 출생.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 『꿈』, 연작소설 『달에 홀린 광대』, 장편소설 『핏기 없는 독백』 『중얼거리다』 등이 있음. moll65@naver.com
동물들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 2
동굴 생활자
동굴의 입구는 서쪽을 향해 있었고, 그래서 저녁 무렵이면 때로 장엄한 석양을 볼 수도 있었다. 해는 수평선에 가까워지며 더욱 크고 붉어져 장엄하게 침몰하며 수면 아래로 사라졌는데 그것을 보고 있을 때면 나는 조용히 물속으로 걸어들어가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상상을 하곤 했다.
동굴의 입구는 보통의 문 크기였고, 그 깊이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천장의 높이가 3미터 정도 되는 홀 같은 공간 너머로 동굴은 높이와 너비가 점점 작아졌고 결국에는 사람이 통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좁아졌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구멍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좀더 넓은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나의 추정에 따르면 동굴은 상당히 깊게 나 있는 것 같았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맞은편 구멍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이 안쪽의 구멍을 통해 들어간 후 더욱 깊은 곳에서 소멸되는지, 아니면 일부가 막다른 곳에 이른 후 다시 밖으로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바람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느껴보려 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떤 때에는 바깥에서 불어들어온 바람과는 상관없이 바람이 안쪽에서, 비록 미약하기는 하지만, 나오기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동굴에 살게 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유랑의 한 시기를 거친 후 동굴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 셈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내가 동굴에 정착하게 된 것은 일종의 자의 반, 그리고 타의 반이었다. 아니, 거기에는 누구의 의지도 작용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연의 의지가,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만, 작용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동굴이 내가 지내기에 아주 괜찮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추위와 습기가 때로 문제가 되긴 했지만 동굴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으며 맹수들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한 곳이었다—물론 일대에 맹수들은 없었고, 맹수들의 위협 또한 없었지만 나는 동굴이 맹수들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수백만년, 혹은 수천만년이 된 동굴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었다. 한때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동굴에 살던 때도 있었다. 그 당시 동굴은 맹수들의 위협을 피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말년을 동굴에서 보낸 그리스의 철학자도 있었는데 나는 그 철학자가 왜 말년을 동굴에서 보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년을 보내기에는 동굴이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나의 말년이라고 생각되는 시기를 동굴에서 보내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사는 동굴에 박쥐는 없었다. 하지만 그전에 박쥐가 살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같은, 박쥐의 배설물처럼 보이는 것은 있었다. 나는 박쥐떼가 돌아온다면 우리가 함께 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동굴에서 지낸 초기에 나는 다양한 통조림 식품으로 연명했다. 동굴 한쪽 구석에는 통조림 깡통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정어리와 고등어와 꽁치와 청어 그리고 참치 통조림을 번갈아가며 먹었다. 매일같이 정어리와 고등어와 꽁치와 청어 그리고 참치 통조림을 번갈아가며 먹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는 비교적 그것을 잘 견뎠다. 어떤 통조림은 유효기간을 훨씬 넘기기도 했지만 그것을 먹고 탈이 난 적은 없었다. 한 정어리 깡통에 들어 있던 정어리는 정어리의 형체도 맛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정어리를 먹으며 정어리를 먹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며, 그것을 먹고 난 후에는 정어리를 먹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동굴에서 생활하는 나의 소지품은 많지 않았다. 내게는 약간 의외로 여겨질 수도 있는 토끼가죽 코트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잠잘 때 깔개로 사용하거나 추울 때 입거나 방석처럼 사용해 그 위에 앉아 있곤 했다. 토끼가죽 코트는 내가 결코 벗지 않는, 담비가죽으로 만든 모자와 잘 어울렸지만 길이가 어중간해 약간 차림이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일부러 그런 차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옷이 없었던 나로서는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코트는 검은색이었는데, 수십마리의 토끼 가죽으로 만든 그것은 본래 검은색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흰색이나 회색의 토끼가죽을 검은색으로 염색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코트에는 내가 한때 기르던 흰색 토끼의 가죽은 들어 있지 않았다. 코트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고, 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한때 같이 살던 여자의 코트였는데 나는 그것을 빼앗다시피 해 얻었다. 한데 나는 내가 한때 같이 살았으며, 코트를 빼앗다시피 해 얻은 그 여자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아니 행방뿐만 아니라 그녀의 생사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우리가 함께 살던 마지막 시기에 그녀는 미친 듯이, 그리고 끝없이 첼로를 연주했는데 실제로 그녀는 미쳐 있었다. 그녀가 가장 즐겨 연주한 곡은 「핑갈의 동굴」 서곡이었다.
나는 흰색 토끼를 한마리 기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의 이름은 램지였다. 나는 램지를 자주 안아주었는데, 그것은 내가 그것을 안아주기 위한 토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안겨 있기를 좋아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랬다. 램지는 내가 안아줄 때면 그것에 대해 불편해하며 벗어나려고 버둥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잠자코 안겨 있었고, 그럴 때면 나는 그것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럴 때면 그것은 약간 겁을 먹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그럴 때면 나는 그것을 다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약간 겁을 먹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면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느꼈다. 아니,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얼마간 이해하는 존재라고 느꼈다.
램지는 별로 활동적이지 않은 토끼였다. 주로 그것은 내가 살던 집 마당 한쪽에 있는 풀밭 속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엎드려 있곤 했다. 풀밭에는 풍뎅이 같은 벌레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가끔은 마당의 연못가에 가만히 앉아 연못을 바라보곤 했다. 어딘가 병약해 보였던 램지는 이른 나이에 죽었다. 램지는 어느날 금붕어들이 사는 연못에 죽어 떠 있는 채로 발견되었는데, 왜 그 토끼가 연못에 죽어 떠 있는 채로 발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램지를 건질 생각을 하지 못했고, 며칠 동안 물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았다. 물 위에 떠 있는 램지는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 어느날 그것을 보고 있자 문득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야산에서 토끼를 한마리 잡아온 기억이 났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토끼를 발견했을 때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쳐놓은 올가미에 걸려 이미 죽어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훔친 것이었다. 죽은 토끼의 귀를 잡은 채로 집에 오는 동안 아버지는 어떤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은 죽은 토끼의 귀를 잡은 채로 집에 오는 동안 부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노래로 여겨졌다.
토끼를 집에 데려온 아버지는 내가 보는 앞에서 가죽을 벗기며 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보며 나 역시 그를 따라 웃음을 지었는데, 어쩌면 정말로 그것이 우스워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토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머리 쪽부터였는지 혹은 꼬리 쪽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가죽을 익숙한 솜씨로 모두 벗겼고 가죽이 벗겨진 토끼는 빨간 살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내게 토끼의 가죽을 벗기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어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신의 아이에게 토끼의 가죽을 벗기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버지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토끼가죽으로 내게 작은 모자를 만들어주었는데, 그 모자에는 토끼의 귀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나는 감히 그 모자를 쓰고 밖을 나다니지 못했지만 내 방에 혼자 있을 때면 그것을 살며시 써보곤 했다.
동굴 벽에는 보통 집의 벽에 걸어두는 벽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다. 누군가의 집 벽에 걸려 있었을 그것을 나는 바닷가 바위 위에서 발견했다. 벽시계는 더이상 가지 않았다. 하지만 시침과 분침과 초침으로 이루어진 세개의 침은 움직였다. 그렇지만 저절로 움직이는 법은 없었다. 내가 시계를 흔들 경우, 침들은 아무렇게나 흔들렸다. 그런 다음 조금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멈춰 섰다. 나는 정지한 침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계를 다시 벽에 걸어놓곤 했다.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행위는 나로 하여금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으며, 시간에 대해, 시간과 관련한 뭔가에 대해 나로서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막연한 생각을 갖게 해주었고, 그래서 그렇게 쓸데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동굴에서 지내는 내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가장 큰 과제였다. 시간을 가게 하는 것, 그래서 나의 시간이 다하게 하는 것, 그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데 대체로 나의 하루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그리고 어떻게 해도 좋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는, 그럼에도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상태에서 지나갔다.
나는 동굴 안에서 많은 시간을 바다를 바라보며 보냈다. 가끔 작은 어선들이 지나갔고, 나는 그것들이 나타나 사라지는 것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특히 밤에 어둠속에서 등을 밝힌 어선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것들은 오징어잡이 배였다. 하지만 거대한 유조선이나 군함 등은 볼 수 없었다.
한번은 짙은 안개 속을 날아가는 부리가 큰 어떤 새도 보았는데 그것은 내가 펠리컨과 비슷하긴 하지만 펠리컨과는 다른 어떤 새라고 생각하며 생각한 어떤 새와도 다른 새였을 수 있다.
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을 했고, 어떤 나의 생각들에 대해 논평을 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던 것 중에는 내가 키우던 고양이도 있었다. 그 고양이는 추정컨대 어떤 암으로 죽었는데 마지막 날들을 고통스럽게 보냈다. 또한 그것은 약간 미쳐버린 듯한 모습도 보였는데,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것을 미치게 만들 생각으로 어떻게 하지는 않았다. 눈이 먼 고양이는 시각장애인처럼 이상한 눈으로—시각장애인들은 자신들이 뭔가를 쳐다볼 때면 이상하지만 인상적인 눈으로 쳐다본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나를 쳐다보곤 했다. 한데 그것이 그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볼 때면 가끔 그것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고양이의 이름 역시 램지였고, 나는 그것을 램지 양 또는 미스 램지로 불렀는데, 완전한 이름은 리틀 미스 콜로라도 존 버넷 램지였다. 램지는 여섯살 때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는데, 끝내 살인자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 사건에 대해 알게 된 나는 고양이에게 미스 램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 이름은 오드 아이(odd eye)에 털이 흰 그것에게는 너무도 잘 어울리고 자연스런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신문의 사진 속의 리틀 미스 콜로라도의 왕관이 램지에게 너무도 잘 어울렸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고양이는 내게 오기 전에 그것을 기르던 주인이 부르던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내가 새로운 이름 램지로 그것을 부르기까지 고양이는 한동안 이름의 공백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램지는 램지로 불리기를 마다했다. 내가 램지라고 부를 때면 그것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램지, 이리 와, 하고 내가 말해도 그것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내가, 램지, 그런 표정으로 있지 마, 하고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주인이 램지라고 부르지만 스스로는 램지라고 생각지 않는 고양이와, 그럼에도 그것을 램지로 부르는 주인과 그럼에도 스스로를 램지라고 생각지 않는 고양이의 관계, 그것이 우리의 관계였다. 그리고 대체로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지나쳐갈 때면 낯선 사람들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리틀 미스 콜로라도의 왕관이 너무도 잘 어울렸던 램지. 나는 그녀의 립스틱을 램지의 입술에 발라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매니큐어를 고양이의 발톱에 칠하는 일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매니큐어를 바르기에는 고양이의 발톱이 너무도 작았다. 한데 일년 중 어느 시기가 되면 램지는 발톱이 새로 생겨나면서 전에 있던 발톱이 빠지곤 했다. 나는 그 빠진 발톱들을 주워 종이에 싸 서랍 속에 보관했다.
고양이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고양이가 보인 가장 이상한 행동은 거실을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참 동안 아주 규칙적으로 그렇게 왔다 갔다 했다. 그에 따라 침실에서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보면 똑같이 생긴 수많은 고양이들이 끝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램지를 마리 앙뚜아네뜨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사람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마리 앙뚜아네뜨가 살던 18세기 프랑스의 궁전은 고양이뿐만 아니라 애완동물들의 천국이었으며, 궁전의 어디에나 고양이가 있었다. 베르싸유에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잉꼬와 원숭이, 개 들이 들끓었고, 나는 베르싸유를 떠올릴 때면 늘 갑자기 뭔가에 놀란 동물들이 공포에 질려 짖거나 울어대며 미로 같은 건물 내부를 달려가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대 이집트의 궁전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생각 또한 했다.
램지는 말년을 장님으로 보냈다. 평생을 눈이 멀 수도 있을 거라는 불안과 기대를 갖고 살아온 것은 나였지만 정작 눈이 먼 것은 내가 키우던 고양이였다. 나는 고양이에게 느껴 마땅한 질투를 느끼기까지 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점진적으로 시력을 상실했고, 생활에는 커다란 불편이 없었다.
나는 눈이 먼 고양이에게 가끔 「검은 고양이 네로」라는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대는 귀여운 나의 검은 고양이 새빨간 리본이 멋지게 어울려
그러나 어쩌다 토라져버리면 얄밉게 할퀴어서 마음 상해요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귀여운 나의 친구는 검은 고양이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이랬다 저랬다 장난꾸러기
랄랄랄랄랄랄랄랄라
멋쟁이 그대가 사뿐히 걸어가면 무서운 고양이 뒤따라와요
달콤한 꼬임에 속아서 간다면 후회를 한다 해도 나는 몰라요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귀여운 나의 친구는 검은 고양이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이랬다 저랬다 장난꾸러기
랄랄랄랄랄랄랄랄라
밤이면 온세상 캄캄하게 되어도 그대의 눈동자는 반짝이는 별
외롭고 고요한 어두움 속에도 그대만 있어주면 마음 든든해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귀여운 나의 친구는 검은 고양이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이랬다 저랬다 장난꾸러기
랄랄랄랄랄랄랄랄라
외롭고 고요한 어두움 속에도 그대만 있어주면 마음 든든해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귀여운 나의 친구는 검은 고양이
그러나 너무 너무 장난만 친다면
고등어 통조림은 주지 않겠어요
랄랄랄랄랄랄랄랄라
나는 이 노래가 눈이 먼 고양이에게 불러주기에는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그것을 불러주었다. 내가 그 노래를 불러줄 때면 고양이는 눈이 먼 눈으로 나를 쳐다보거나 보지 않거나 했다.
내가 「검은 고양이 네로」와 관련해 좋아한 점은 가사의 반복과 변주에 있었다. 나는 미나리밭의 거머리나 어느 순간 갑자기 집 안에서 발견하게 된 지네에 관한, 반복과 변주의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반복과 변주는 존재와 의식의 가장 근원적인 작동방식이었다.
동굴에서 생활한 내게는 테니스 라켓과 공 몇개도 있었다. 테가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라켓의 줄은 몇개가 끊어져 있었지만 나머지 줄들은 이상할 정도로 팽팽했으며, 공들은 약간 바람이 빠지긴 했지만 어느정도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가끔 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라켓으로 동굴의 벽을 향해 공을 날리곤 했다. 하지만 벽에 튕겨나오는 공을 다시 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벽이 울퉁불퉁해 공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튕겼기 때문이다. 한데 그 때문에 튕겨나오는 공을 치는 것은 재미있기도 했고,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날 나는 테니스공을 치는 것에 싫증이 났고, 그래서 그것들을 바다에 모두 던져버렸다. 나는 초록색 테니스공들이 파도에 떠밀려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그 작은 공들은 아직도 바다를 떠다니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나는 그것들이 여전히 대양을 떠다니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초록색 테니스공들을 바다에 던지고 싶었다.
나는 동굴 속에 누워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리곤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끝내는 「핑갈의 동굴」 서곡을 마음속으로 불렀다. 그럴 때면 가파른 절벽 아래로,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차가운 바다 위로 밀려오는 하얀 포말과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검은 동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핑갈의 동굴」 서곡은 내가 마음속으로 욀 수 있는 몇 안되는 곡 중 하나였다.
또한 내게는 망원경이 하나 있었고, 나는 그것으로 바다를 보곤 했다. 나는 배율을 이리저리 조정하며 뭔가에 촛점을 맞추곤 했지만 이미 렌즈가 모두 깨져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뭔가에 촛점을 맞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배율을 이리저리 조정하며 뭔가를 바라보았다. 렌즈가 깨진 망원경은 사물을 확대해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뭔가를 집중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동굴 벽에는 누군가가 그린 그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전에 누군가가 바위에 새긴 암각화는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그다지 오래지 않은 과거에 한 낙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바닷가 동굴에 씌어져 있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가끔, 주로 낚시꾼들이 동굴에 오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런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또는 길을 잘못 들어 그곳에 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어둠속에서 토끼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입고, 담비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쓴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들은 내게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게 통조림 같은 먹을 것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한 낚시꾼은 친절하게도 내게 낚싯바늘이 달린 낚싯줄을 선물했는데 나는 그것을 물속에 드리워놓았다. 하지만 바늘을 무는 물고기는 없었는데 그것은 내가 아무런 미끼도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심심풀이로 돌멩이로 동굴 벽에 뭔가를 그리기도 했다. 한데 내가 그린 것들은 조형적인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한자 같은 표의문자나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가까운 것이지만 정확히 그런 것들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그림과 글의 중간적인 형태, 즉 어쩌면 글로 진화하고 있지만 완전히 진화하지는 못한 그림에 가까웠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내 나름의 문자언어였지만 어떤 체계를 갖고 있지는 못했다.
한때 나는 터무니없게도 글을 쓰고자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쓰고자 했던 글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미나리밭의 거머리나 어느 순간 갑자기 집 안에서 발견하게 된 지네 따위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했다. 그것들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일은 멋진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나는 내가 경험한 다양한 환각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내가 동굴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어느 여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가 여름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앞바다를 지나가는 배도,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도 계절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지 않았다. 밤하늘 별들의 위치를 좀더 정확히 관찰했다면 그것을 알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별들의 위치를 통해 계절을 파악하는 법을 몰랐다. 그럼에도 내 기분으로는 여름이었고, 나는 여름을 즐기는 사람처럼 혹은 고통스럽게 나는 사람처럼 그 계절을 보냈다.
나의 동굴과 관련해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그것이 내는 소리였다. 대체로 동굴에서는 아무 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동굴 밖에서 바람이 불 때면 동굴은 천연의 악기가 되었다. 동굴은 바람소리에 따라 제각기 다른 소리를 냈다. 때로 동굴은 하프 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냈고, 그래서 그것이 거대한 하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가끔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않았다. 동굴 근처 바닷가에는 한때 어떤 요새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발걸음을 돌려 돌아왔다. 하지만 그곳은 실제로는 돌들이 모두 무너지고 그 위에 흙이 쌓여 한때 어떤 요새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일 뿐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한때 어떤 요새였지만 이제는 폐허가 되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그럼에도 요새였던 게 분명한 곳에서 감도는, 혹은 감돌 것 같은 느낌이 감돌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한때 어떤 요새였다면 철저하게 파괴된 그곳은 이제 잡초와 야생화가 뒤덮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곳이 한때 어떤 요새였다는 생각을 하기를 좋아했고, 그곳을 나의 요새로 불렀으며 마치 그곳을 지키듯 서 있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나의 동굴에서 나와 나의 요새로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떤 일행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들 일행은 얼굴에 주름이 심하게 파인 노인과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어린 소년과 몸에 점이 많은 개 한마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소풍을 나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소풍을 나온 사람의 차림도 아니었고, 그런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을 법한 것을 손에 들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소풍을 나온 사람 같은 차림을 하고, 그런 사람이 손에 들고 있을 법한 것을 손에 들고 있던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토끼가죽 코트는 입지 않은 대신 담비가죽 모자를 쓰고 있었고, 정어리 통조림 깡통 하나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개였다. 그것은 점박이 개로 온몸에 점들이 있었는데 점들은 아무렇게나 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점들의 배치에서 어떤 규칙을 찾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개는 점이 아무렇게나 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점이 없는 개였다. 갑자기 개가 나를 향해 마구 짖기 시작했지만 노인은 개를 제지하지 않았다. 마구 짖게 내버려두었다. 개는 실컷 짖은 후에야 짖기를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노인이 개를 쓰다듬었다, 마치 그 개가 쓰다듬기에 좋은 어떤 것이라도 되는 듯 아주 천천히. 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쓰다듬어지는 것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꼬리를 흔들지도 귀를 쫑긋 세우지도 않았다. 아니면 그 개는 기분 좋을 때면 가만히 있는 것으로 그 좋은 기분을 드러내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혼자서 두 사람과 개 한마리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그때 노인이 갑자기 지팡이를 들었고, 나는 그가 나를 때리려 한다는 생각에 몸을 피했지만 그는 다시 지팡이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아무래도 나를 때리려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체구가 작았고, 품위가 없어 보였다. 얼굴에는 점들이 있었는데, 개에 있는 점들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그리고 그는 본래 챙이 약간 비뚜름한 모자를 비뚤게 쓰고 있었다. 그의 모자가, 모자를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이 영 거슬렸다. 아주 가당찮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의 모자를 고쳐 쓰게 할까 하다가 참았다. 그때 그가 무슨 말인가를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윗니 몇개가 빠져 발음이 샜다. 그가 발음이 새게 하면서 하는 말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소년이 나서서 그를 거들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모자를 벗어 손에 들었다. 모자 속에 갇혀 있던, 머리에서 나는 좋지 않은 냄새가 바람에 실려 순간적으로 강하게 풍겼다. 나는 우리가 서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서로의 머리에서 나는 좋지 않은 냄새를 실컷 맡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혼자서 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머리에서 나는 좋지 않은 냄새를 모두 날려보내기라도 한 듯 다시 모자를 썼다. 하지만 좋지 않은 냄새는 그의 머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나는 오랫동안 벗지 않은 내 모자를 벗을 경우 내 머리에서 날 좋지 않은 냄새에 대한 생각을 잠시 했다. 내가 그 생각을 하는 사이 그는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소년과 개는 좀더 있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 나는 내가 그 순간 그들을 좀더 붙들고 있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얼굴과 몸에 점이 많은 그 일행이 언덕 너머로 작은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조우는 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동굴에 사는 동안 내게 드물게 일어난 인간적인 접촉 중 하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동굴로 돌아온 나는 한동안 그 사건을 잊지 못했고, 어쩌면 내게 인간적인 접촉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곧 그 사건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나는 나의 몸상태를 점검하는 일을 소홀히하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는 그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시간이 너무도 많았다. 다른 소일거리가 별로 없던 내게 그것은 훌륭한 소일거리였다.
가끔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불쾌감—뭐라 말할 수 없어 더욱더 불쾌한—이 찾아와 잠시 나를 차지해 휘저어놓은 후 빠져나가는 것 외에는 어떤 감정도 일지 않았다.
나는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져 점차 유인원에, 동물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통조림이 모두 바닥난 후에는 나는 바닷가에서 주운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본래 어부가 사용했을 그물은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나 있었지만 그 구멍보다 큰 물고기를 잡을 수는 있었다. 또한 나는 굴과 홍합 같은 패류들을 채취해 먹기도 했다. 내게는 돋보기가 하나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이용해 불을 피워 어패류들을 익혀 먹기도 했다.
나는 가끔 환한 대낮에 동굴 밖 바위 위에서 불을 피워 가만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뭔가를 굽기 위해서도,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도 아닌, 그냥 불꽃을 바라보기 위해 불을 피우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의식처럼, 주술행위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내가 불을 피운 데는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어떤 시인이 장미 한송이를 태운 후 밤새 장미의 유령이 나타나기를 심각하게 지켜본 일과 비슷한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나의 몸의 모든 관절이, 어떤 것들은 정상적으로, 또다른 어떤 것들은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중장비, 가령 굴삭기의 팔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보는 것과 비슷했다. 내 몸의 어떤 관절들은 아주 훌륭하게 작동했다. 가령 내 오른팔과 오른손은 뭔가를 들어올리는 일을, 가령 돌멩이 하나를 들어올리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나는 내 오른손 손가락들이 돌멩이를 집는 데 필요한 동작을 취하며 돌멩이를 집은 후 오른팔이 돌멩이를 집은 오른손을 들어올리는 데 필요한 동작을 취하며 결국에는 돌멩이를 들어올리는 것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또한 나는 나의 성하지 않은 왼팔과 왼손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며 왼팔과 왼손으로는 돌멩이 하나도 들어올리지 못하는 것 역시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나는 왼쪽 눈이 완전히 먼 것은 아니었지만 오른쪽 눈에 비해서는 시력이 형편없이 약했다. 오른쪽 눈을 감은 상태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귀 또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귀는 왼쪽 귀가 오른쪽 귀에 비해 나은 편이었다. 나는 비교적 잘 들리는 왼쪽 귀와 비교적 잘 들리지 않는 오른쪽 귀로, 그 두 귀를 다양한 정도로 막으며 다양한 소리를 들었다. 가령 나는 왼쪽 귀를 완전히 열고 오른쪽 귀를 완전히 막은 채로 어떤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왼쪽 귀를 완전히 열고 오른쪽 귀를 조금 막은 채로 또다른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왼쪽 귀를 완전히 열고 오른쪽 귀를 완전히 연 채로 또다른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왼쪽 귀를 완전히 막고 오른쪽 귀를 완전히 막은 채로 또다른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왼쪽 귀를 완전히 막고 오른쪽 귀를 조금 막은 채로 또다른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왼쪽 귀를 완전히 막고 오른쪽 귀를 완전히 연 채로 또다른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왼쪽 귀와 오른쪽 귀를 다양한 정도로 막거나 여는 방식으로 계속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두 눈과 두 귀를 다양한 정도로 막거나 여는 방식으로 계속되었다. 나는 영상과 소리의 수용에 대한 그 복잡한 실험을 무척이나 진지하게 행했다. 그 복잡한 실험을 통해 나는 내 왼쪽 눈이 완전히 먼 것은 아니지만 오른쪽 눈에 비해서는 시력이 형편없이 약하다는 사실과 왼쪽 귀가 오른쪽 귀에 비해 청력이 나은 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안개가 짙게 낀 날 아침, 보이는 것이라곤 안개밖에 없을 때 갑자기 그 안개 속으로 환영처럼 불쑥 나타나 사라지는 갈매기들이 토해내는 울음소리는 나를 어떤 환각상태에 빠지게 하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을 때면 곧 내가 갈매기로 변해 안개 속을 날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갈수록 골격이 드러날 정도로 몸이 마르게 되었으며, 나의 몸은 어떤 정성을 다해 가꾼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신열이 날 때면 여러가지 환영들을 보았다. 나는 풀밭에 누워 있는, 이끼가 낀 석조 입상과 북극점을 향해 홀로 걸어가는 북극곰, 그리고 무덤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 등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연못 위에 떠 있는 피아노의 희고 검은 건반들과, 내 어림짐작으로 족히 오층 높이에서 십층 높이 정도는 되는 거대한 나무의자들이 무수하게 널려 있는 것—그것은 나무의자들의 숲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그 환영을 보았을 때 나는 실제로 나무의자들의 긴 다리 아래를, 내가 무척 작아졌다는 이상한 작은 느낌을 느끼며, 나무의자들의 숲을 산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을 보기도 했다.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는 늘 많은 의자들이 배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한번은 어떤 평지에 무수한 의자들이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보는 꿈을 꾼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꾼 꿈들 중 가장 유쾌한 것 중 하나였다.
나는 오래지 않아 나의 끝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은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죽어 동굴 속에 해골로 누워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때가 되면 박쥐들이 나를 대신해 그 동굴에 살게 될지도 몰랐다. 또한 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위에, 이미 시신이 되어 누워 있는 나 자신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 배는 중간에 좌초하지만 않는다면 남극이나 북극에까지 이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는 나의 동굴을 떠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동굴이 그대로 나의 무덤이 되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별로 활동적이지 않았던 토끼 램지는 풀밭 속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엎드려 있곤 했다. 그리고 그 풀밭에는 풍뎅이 같은 벌레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램지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풀밭 속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엎드려 있곤 했다. 한데 램지는 정말로 풀밭을 돌아다니는 벌레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한때 같이 살던 여자는 우리가 함께 살던 마지막 시기에 미친 듯이, 그리고 끝없이 첼로를 연주했다. 그녀가 가장 즐겨 연주한 곡은 「핑갈의 동굴」 서곡이었다. 어쩌면 내가 동굴을 찾게 된 것은 그녀가 연주한 그 곡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실제로 미쳤던 것일까?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은 내게 동물들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처럼 들렸다.
시간을 가게 하는 것, 그래서 나의 시간이 다하게 하는 것, 그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굴의 입구는 서쪽을 향해 있었고, 그래서 저녁 무렵이면 때로 장엄한 석양을 볼 수도 있었다. 해는 수평선에 가까워지며 더욱 크고 붉어져 장엄하게 침몰하며 수면 아래로 사라졌는데 그것을 보고 있을 때면 나는 조용히 물속으로 걸어들어가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상상을 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