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2

 

좌담: 우리 문학의 현장에서 진로를 묻다

 

 

김영희 金英姬

문학평론가,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저서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 gnosis@cais.kaist.ac.kr

김영찬 金永贊

문학평론가, 성균관대 강사. 평론집 『비평극장의 유령들』 youngmarx@naver.com

박형준 朴瑩浚

시인. 시집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agbai@korea.com

이장욱 李章旭

시인·소설가.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oblako@hanmail.net

 

사진ⓒ이영균

사진ⓒ이영균

 

2006년 10월 21일 오후 2시

세교연구소 회의실

 

 

이장욱

이장욱 사실 90년대에도 신세대 논쟁이란 것이 있었고, 새로운 징후들을 둘러싼 논쟁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논쟁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부분도 있겠고, 아마 연속성과 변별성을 세심하게 짚어가다보면 문제가 극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장욱(사회)•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좌담은 『창비』 여름호와 겨울호의 연속기획인 ‘2000년대 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의 연장선상에서 마련되었습니다. 개별 글들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우리 문학의 몇몇 논점들을 살피고, 되새겨볼 만한 최근 작품들을 자유롭게 읽기 위한 자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중견 및 신진 소설가와 시인들을 둘러싼 논의를 다루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이런저런 징후들과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후자의 일부 주제에 대해서는 여름호의 특집 글들이 실마리가 될 수 있겠습니다. 참여해주신 선생님들께서는 창비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는 분들이지만, 같은 의견만 가지신 건 아닐 테니 자유로운 발언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많은 경우 문학사를 말할 때 10년 단위로 묶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런 방식은 대단히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구분이라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래도 계속 쓰이는 걸 보면 필요악이랄까 그런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일단 ‘2000년대 문학이라는 표현은 가능한가’ 혹은 ‘2000년대 문학의 변별인자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해보지요.

 

‘2000년대 문학’이라는 표현은 가능한가

 

김영희

김영희 주체의 자명성에 대한 회의가 2000년대 이전에는 없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가 아닐까요. 90년대는 그만두고 80년대만 해도 인간에 대한 탐구에는 개인 속에 들어와 있는 여러 힘들, 그로 인해 왜소해지거나 찢겨나가는 주체에 대한 인식이 함께 있었지요.

김영희• 이제 2000년대 중턱을 넘어선 싯점에서 이 연대의 문학을 단정해 말하기는 이르지만 그 조짐은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서는 10년 단위로 구분해도 큰 무리가 없게끔 획기적인 사건들이 때맞춰 발생하곤 했지요. 그만큼 한국사회가 역동적이라는 얘기일 텐데, 최근 역시 1997년 IMF사태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및 6·15공동선언으로 일단 문학을 둘러싼 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고 보입니다.

문학적으로도 새 연대 어름해서 신인작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고, 보통 8, 90년대 작가라고 불리는 분들이나 새로 복귀한 황석영을 비롯한 중진작가들도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는 역작들을 내고 있지요. 최근에 문학생산이 무척 왕성한 가운데, 역시 사회적 변화가 준 영향도 감지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IMF위기 이후 자본주의체제의 위력과 폭력성에 대한 실감이 전과 다른 바 있고, 그러면서 90년대에 특히 담론상으로 부각됐던 8, 90년대의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는 조짐들이 나타나는 듯합니다. 자본주의 등 ‘큰 이야기’를 기피하는 금기가 깨져가는 것도 그 하나겠지요. 6·15는 북한에 대한 금기를 포함하여 여러 사회적·정신적 금기들을 허무는 데 있어 87년 이후 가장 두드러진 분기점으로 보이고요. 한결 자유롭고 활달한 창작적 탐구의 가능성이 열린 느낌을 주는데, 이런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면서 실제로 나온 다양한 성과들을 짚어본다는 취지에서라면 ‘2000년대 문학’을 말해도 무방하다 봅니다. 그러나 단서를 굳이 달자면, 8, 90년대에 대한 고정된 상을 그대로 둔 채 그것과의 차별성을 내세우면서 2000년대라는 또다른 ‘정형’을 만들어가는 식의 과잉구분은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영찬

김영찬 주체의 약화라는 부정적인 현상이 외려 문학에서는 새로운 어법의 개발과 소설문법의 다양화라는 활기로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일종의 역설이지요. 제가 최근에 ‘탈내면의 상상력’이라고 부른 것이 그 일면입니다.

김영찬• 큰 틀에서 2000년대 문학을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잘 정리해주신 것 같습니다. 다만 2000년대 문학의 차별성을 크게 부각시킬 때 따를 수 있는 부작용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것까지도 무릅쓰고 감수해야 이후의 더욱 활발하고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게 꼭 부정적인 의미에서 또다른 정형화로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지요. 방금도 지적하셨지만, 저는 지금 우리가 2000년대 문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크게 보면 ‘포스트IMF시대’의 징후라고 생각합니다. IMF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질서가 급격히 전면화되고, 그로 인해 삶의 질은 갈수록 악화되고 믿음이나 확신은 배반되는 현실이 닥칩니다. 때문에 고립된 개인으로서는 오로지 어떻게 품위를 잃지 않고 견딜 것인가를 고민하거나 아니면 그 모든 현실을 모른 척하고 피해가면서 그와는 전혀 다른 자족적 영역에서 자아의 확장과 개인의 윤리를 찾을 것인가가 문제시되는 시대라는 말이지요.

크게 보면 2000년대 문학은 그 시작과 더불어 이제 내면성의 문학이 끝났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때 내면성의 문학이란 루카치의 표현을 빌리면 제 영혼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문제적 주인공들의 문학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부정적 현실과는 대립되는 모종의 진정한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처소로서 개인의 내면이 전경화되었던 90년대 문학은, 80년대 문학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그런 근대 내면성의 문학 전통을 잇습니다. 80년대 문학에 대한 반발이나 개인의 일상과 욕망에 대한 당연하고도 새삼스러운 발견들도 내면성의 전통이 90년대적 상황과 만나 돌출한 특수한 발현형태였지요. 이렇게 볼 때 통상 90년대 문학이 80년대 문학과는 판이하다고 얘기되지만 실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어요. 내면성의 문학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말이지요. 한편으론 반발하고 적대하지만 그 둘은 본질을 공유하는 쌍생아였다는 겁니다. 2000년대 소설의 면면들은 크게는 부정적 현실에 상처받고 좌절한 내면을 의미와 가치의 거점으로 삼아 의식적으로 현실에 대립각을 세우는 문학이 이제는 끝났다는 걸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내면성의 문학이 아닌 다른 문학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또다른 문제일 테지만요.

박형준

박형준 과거와 현재의 경계짓기에 골몰할 일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시에 대한 새로움만 강조하지 말고 그 이면에서 단절뿐 아니라 서로 이어질 수 있는 통합의 고리 같은 것을 모색해보는 것도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장욱• 현실과 대립각을 세우는 내면성이 끝났다거나, 내면성의 문학이 아닌 다른 문학이 시작되고 있다는 표현은 부연이 필요하겠네요.

김영찬• 앞에서 말했던 예의 시대감각이 이 지점에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대 문학에는 작가들이 의식하든 않든 현실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이미 운명처럼 주어진 견고한 실체라는 의식이 선험적으로 전제돼 있어요. 변화의 여지도 없고 또 그래야 한다는 절박함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세계보다 우월하다는 보증도 없고, 그러니 대결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거죠. 물론 이건 부정적인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부인할 수도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현실과 맞서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다른 방향으로 길을 돌아가는 거지요. 요즘 소설의 지배적인 요소인 유머나 환상, 유희와 공상 같은 게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건 이전까지 현실에 대해 우월성을 지녔던, 그래서 현실과 대립각을 세우는 거점이 되었던 내면의 부피와 질량이 확연히 축소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다른 글에서 주체의 약화 혹은 왜소화라고 말했던 현상이죠.

그런 주체의 약화라는 부정적인 현상이 외려 문학에서는 새로운 어법의 개발과 소설문법의 다양화, 자아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탐구와 소설의 자기확장이라는 활기로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일종의 역설이지요. ‘탈내면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 일면입니다. 이를테면 내면으로 침잠하거나 숙고하기보다 현실이 주는 상처와 무게를 각각 나름의 특이한 방식으로 분산시켜버리고 유희하면서 그 속에서 문학적 개성을 얻는 문학이 그중 하나입니다. 박민규, 윤성희, 이기호, 김애란 등의 소설이 그렇지요. 그리고 삭막하고 피폐한 현실을 그리면서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인간주의적인 시선을 배제하는 소설들, 즉 강영숙, 편혜영, 백가흠 등의 소설들이 다른 하나로서 거기에 포함됩니다. 그밖에 현실에 아예 무관심한 자족적인 소설들, 김숨이나 한유주, 김유진 등의 소설은 특히 내면이 없는 소설입니다. 거기에 있는 건 철저하게 가공된 이미지이거나 텍스트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내면일 뿐입니다. 어찌됐든 이런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개성이 90년대 문학과는 대별되는 2000년대 문학의 실체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셈이지요.

김영희• 저는 좀 어정쩡한 이야기를 한 셈인데, 김영찬 선생은 확실한 입장을 패기있게 펼치시니 부럽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탈내면’이라는 말썽많은 표현의 취지가 뭔지 더 이해도 되고요.(웃음) 그런데 역시 8, 90년대 문학에 대해서는 기왕의 통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전제들이 있는 게 아닌가요. 가령 첫번째 작가군으로 거론하신 박민규, 김애란, 윤성희만 봐도 내면의 축소라고 하는 게 타당할지, 그보다는 내면과 현실의 관계맺는 양상의 변화라는 설명에 더 수긍이 가고, 나아가 과연 ‘내면’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들거든요. 이른바 90년대식 ‘내면’과의 차이를 우선 염두에 두신 것 같은데, 80년대 문학은 사회와 역사, 90년대 문학은 일상과 개인, 내면이라는 게 통념처럼 되어 있지요. 그러나 80년대든 90년대든 제대로 된 문학적 업적은 이런 식의 구도로 잘 잡히지 않는다고 봅니다.

8, 90년대가 쌍생아라는 이야기는,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건하거나 두터운 내면성이라는 점에서 둘이 통한다는 뜻이고,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말씀과도 연관된 것으로 들리네요. 사실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을 이야기할 때 8, 90년대가 한통속이라는 주장들을 접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식의 익숙한 구도를 80년대, 90년대, 2000년대에 적용한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탈근대라는 관점에서 보면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이나 다 근대주의란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논리 말이지요.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유행했던 점을 생각하면, 썩 새로운 논의도 아닌 거고요.

분류 자체에도 의문이 없지 않은데, 하나만 말씀드리지요. 현실에 대한 태도를 보면 거론하신 세 작가군 사이에 상충하는 대목도 있고요. 가령 한유주 같은 작가들이 현실에 무관심하다고 한다면 박민규 같은 첫번째 작가군은 거의 그 반대고요. 현실의 상처를 그만큼 절실하게 그려내기도 어렵잖아요? 그렇다면 ‘탈내면’이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이 둘을 한데 뭉뚱그리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2000년대 젊은 작가들도 선입관을 떨치고 볼 필요가 있고, 그들한테서 발견되는 새로움을 곧장 2000년대 문학의 특징이나 성취와 동일시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봅니다.

 

2000년대 시, 모색의 도정에서

 

이장욱• 여기서 일단 시 쪽으로 화제를 돌려서, 2000년대 문학의 연속성이라든가 변별성에 대해 박형준 선생께서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형준• 말씀들을 들어보니까 2000년대 문학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거를 잊어버리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근대적인 것을 특징짓는 것은 새로움이며 이질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근대적 전통이라는 게 여러개의 단절로 이루어진 전통이고, 그래서 단절의 하나하나가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고 정의하는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 같은 시인의 견해도 있지요. 특히 우리 시대의 키워드가 차이, 분리, 이질성, 복합성, 새로움 등일 텐데, 이런 것이 응축되면서 미래로 혼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결코 완성되기도 힘들고 그럴 수도 없는 완전함을 ‘2000년대 문학’에서 보려는 시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우리 문학이 너무 시대에 민감한 건 아닌가, 그래서 매 세대가 등장할 때마다 자기 기원을 찾기보다는 기원 만들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시대의 변화를 시의 변화로 대입하는 이런 성급한 인식론적인 단절이 저는 불만입니다. 앞세대와 단절되면서도 역설적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형성이 부족해, 늘 ‘다른 새로움’에 대한 갈급증에 시달리는 것이 우리 문학 풍토가 아닌가 해요.

굳이 2000년대 시의 특징이라고 하면 탈이데올로기적인 담론의 구축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건 앞에서 김영찬 선생께서 정리해주신 것과도 맥이 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실참여를 통한 이데올로기적인 방법론의 시는 이제는 낡은 것이 됐고, 사실상 비주류로 밀려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시에서 리얼리즘 시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형국이고,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워진 풍토도 있는 것 같고요. 포스트모더니즘이든 모더니즘이든 현실문제에 개입하는 실험의식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제는 현실에 괄호가 쳐지고 무정형의 실험이 큰 목소리를 내는 것도 간과될 수 없는 현상이지요.

이장욱• 지금 하신 말씀에서 여러 부분 동의합니다. 다만, 우선 새로움에 민감해서 단절성을 너무 강조하는 것 아니냐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사실 90년대에도 신세대 논쟁이라는 것이 있었고, 새로운 징후들을 둘러싼 논쟁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논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마 연속성과 변별성을 세심하게 짚어가다보면 자연히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어요.

전통이라는 것은 지금 말씀하신 대로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연속체이기도 하고, 여러개의 단절들이 무한하게 이어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요. 2000년대 시라는 것도 물론 완결될 수 없는 이 무한한 연속체의 일부겠고, 끊임없는 자기갱신은 그 자체로 계승의 방식이기도 할 것 같아요. 여기에 어떤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우리 시대의 역사적·정신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대화의 산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탈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시도 말씀하셨는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봐요. 오늘날 미시담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시담론이 필요하고, 그것들의 경쟁이 필요한 상황임을 감안할 때,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몸으로 체현한 시들에 대해 그 의미와 가능성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물론 이 경우 단순히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또다른 맥락과 차원을 지니게 되겠지요. 또한 탈이데올로기적 흐름이더라도, 그 안에서 오늘의 시들이 체현해가는 윤리적 지평이라든가, 숨겨져 있는 현실적 맥락들을 찬찬히 살피는 작업도 중요하겠고요. 이와 관련해서 요즘 시에서 현실이 괄호쳐진 것 아닌가, 무정형의 실험이 아닌가 하는 말씀도 하셨는데, 저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시에서 오히려 시와 현실의 연결고리가 풍부해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 여러모로 단순한 형식실험 차원은 넘어서지 않나 싶어요.

박형준• 그러자면 요즘 시의 언어실험이 그런 인식의 확대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살펴봐야겠는데요. 그럴 때 최근 폭넓게 나타나는 산문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이것은 젊은 시인이든 아니든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고,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운문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사회의 복잡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 젊은 시인들의 산문시에 나타나는 특징이라면, 뭐니뭐니해도 산문시와 산문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는 운문적인 것, 산문적인 것이 아니라 산문시와 산문의 구별도 모호해져서 사실상 어떤 경우에는 이것을 시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개인의 잠언으로 읽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유추나 유사성이라는 전통적인 시작법의 원리로는 포착되지 않는, 현대사회의 돌발적이고 우연한 현상들에 대한 시적 반응이 산문시라는 형식의 해체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산문시는 현대사회의 복잡성과 방향 부재에 대한 반응이 되는 셈이지만, 그 분열이 분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도 어떤 모색점에 대한 열망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러한 정신의 팽팽한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리듬을 보여줘야 하는데, 요즘의 환상파나 미래파에 등장하는 산문시는 놀이나 유희에만 지나치게 경도되어서…… 사실 그런 것들이 너무 반복되다보니까 이제는 지루한 느낌마저 듭니다. 어떤 때는 한편 한편으로 보면 개성적인데 모아놓고 보면 한 시인이 쓴 여러편의 시집이나 시로 읽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그러니까 주체의 해체라는 것이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기 목소리의 생생함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저는 방법적 모색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전망의 새로움이 드러날 것으로 봅니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짓기에 골몰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2000년대 문학이 이런 경계짓기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문화사회학적인 방법이나 개인적 무의식을 넘어선 공동체적 삶의 활력을 모색할 수 있는 신화에 대한 관심, 과거의 소외된 영역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적 방법론을 모색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자기들의 시에 대한 새로움만 강조하지 말고 그 이면에서 단절뿐 아니라 서로 이어질 수 있는 통합의 고리 같은 것을 모색해보는 것도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요즘 비평가들이 하나의 화자로 된 서정시를 권력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하잖아요. 그러면서 복수의 화자를 내세우는 새로운 서정시, 다른 서정시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런 것은 재래적인 서정시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화자로 된 서정시라고 해서 다 권력적이고 일인칭에 봉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새롭게 표출된 과거나 새롭게 의미부여된 과거, 새롭게 의미작용을 하는 과거들도 지금 다시 한번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장욱• 중요한 논점이 여럿 나온 듯하군요. 우선 시의 산문화 경향을 짚고 가보도록 하지요.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시적 가능성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도 있는 듯해요. 가령 시적으로 공인된 언어나 리듬이 제 경계를 넘어 일상의 언어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씌어지는 경우도 있겠고요. 물론 이런 때에도 시적인 긴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시적 긴장이라는 것은 단순히 운문성의 차원이 아니라, 산문 언어의 일차적 지시성을 넘어설 수 있는 어떤 정신, 혹은 감각의 힘과 관련되겠습니다. 놀이나 유희적 측면 역시 마찬가진데, 그것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면, 시적 가능성의 일환으로 볼 부분도 있겠지요.

이와 관련해서 주체의 해체가 생생한 목소리들을 지우는 것 아니냐는 말씀도 하셨는데, 사실 이건 매우 복잡한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주체가 해체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90년대 이래 사회적·정신적 변화의 맥락 속에서 진행된 현상이기도 합니다만, 이른바 주체의 자명성이라는 것에 대한 넓은 의미의 회의가 나타난 건 사실인 듯합니다. 이런 회의가 악무한적 해체와 동일한 것은 물론 아닐 것이고요, 단순화해서 말하면, 시적 주체의 단일성이 회의된다거나 열린 주체의 모색이랄까 하는 차원에서 지금 시들의 다양성을 가능성의 일환으로 봐야 하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가령 시적 주체가 어떤 발언을 할 때, 그 발언조차도 그것이 어떤 진리치의 불완전한 판본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아이러니의 형식으로 내면화한 주체라든가, 전체적이고 완결적인 판단 대신 자신의 균열을 통해 역설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시적 주체라든가, 이런 다양한 경우들을 더 폭넓게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문학의 사회적 차원이 좀더 고려되어야 하고, 공동체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에는 물론 동의하고요, 이런 부분들을 고려하면서 우리 시대에 씌어지는 시들을 읽을 때에 비로소 시단 전체의 본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서정’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이 표현에 대해서는 얘기가 길어질 듯하니, 하나의 화자로 된 서정시를 ‘권력’이라고 표현한 건 아니었다는 점과, 화자가 하나냐 여럿이냐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점만 일단 말씀드리죠.(웃음)

 

중견작가들의 내적 변모는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장욱• 초반부터 열기가 넘치는데요,(웃음) 이제 좀더 구체적 맥락에 들어가보죠. 90년대나 그전부터 작품활동을 하던 작가나 시인 들이 이제는 중견의 위치가 되어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작품들에 대해 일관성 위에서도 어떤 변화를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에 기초해서 시대적 징후 등을 연관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해보지요. 우선 소설 쪽에서는 구효서, 윤대녕, 은희경, 공지영, 방현석, 유재현, 김영하 같은 분들이 떠오르는데요.

김영찬• 좀전에 사회자께서 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주체의 자명성에 대한 반성을 지적하셨는데, 그것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지금 호명한 중견작가들, 특히 은희경, 윤대녕, 구효서, 김인숙 등의 경우는 그 점이 특별히 두드러집니다. 그에 반해 젊은 작가들은 처음부터 반성해야 할 자명성을 누려보지 못한 세대가 아닐까 싶고요. 어쨌든 이들 중견작가들의 변화를 조금 통속적으로 얘기하자면 반성적 인생파 소설로의 변화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제가 앞에서 포스트IMF시대의 현실감각이라고 얘기했던 자본주의적인 삶의 버거운 무게에 대한 뒤늦은 실감,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거대한 현실과 시간의 힘 앞에서의 비애, 이런 감각들이 변화의 배경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이들의 소설에서 ‘육체’와 ‘시간’의 재발견으로 나타나는 것이고요. 그래서인지 최근 발표되는 이들의 작품에는 예전과 비교해서 자기 자신의 하찮음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이나 허무가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언뜻 눈에 띄는 변화라고 한다면, 윤대녕 소설의 주인공은 이제 낯선 곳을 떠돌다 만난 낯선 여자와 자지 않아요.(웃음) 아니, 못 자지요. 은희경 소설의 주인공은 더이상 냉소하지 못하고요. 최근 구효서 소설에서 보이는 담담한 허무도 같은 맥락입니다. 중요한 건 이런 모습들이 아까 얘기했던 주체에 대한 반성적 물음과 연계되어 나타난다는 점이고, 또 그에 힘입어 문학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이런 것들을 갱신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의 문학에 비해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이 깊어지고, 허무주의라 하더라도 그냥 허무주의가 아니라 인간과 삶에 대한 발견을 이끌어내는 반성적 허무의 경지를 보여준다는 점이 근본적인 변화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이들의 소설이 어느 순간 시적인 울림을 얻는다는 것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김영희• 저로서는 제대로 따라 읽지 못한 작가들도 있고 해서, 흥미롭게 경청했습니다. 사회자가 거론하신 방현석을 비롯해 정도상, 정지아 등 이른바 ‘민중문학’ 진영에 속하던 작가들의 자기쇄신도 주목할 대목이라고 보고요. 그런 전제 아래 말씀드리면, 주체의 자명성에 대한 회의가 2000년대 이전에는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된다면 지나친 단순화가 아닐까 싶은데요. 90년대는 그만두고 80년대만 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탐구에는 개개인 속에 들어와 있는 여러 힘들, 그로 인해 왜소해지거나 찢겨나가는 주체에 대한 인식이 함께 있었지, 무슨 자명하거나 탄탄한 주체만은 아니었잖아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은희경의 『비밀과 거짓말』로 국한해서 말씀드리죠. 이 장편에는 이전 은희경 소설투와 달라진 면이 분명 있지만, 여기서 냉소로부터의 탈피와 2000년대 문학의 시작을 읽어내는 것은 좀 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냉소적 시선이 절제되기는 했지만 적잖이 드러나고, 작가의 90년대 작업 또한 냉소에서 그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라든가 관계맺음의 어려움을 다루되 거기 개입되는 젠더 체계 같은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탐구가 함께했고, 그러면서 자명하고 확실한 주체에 대한 회의도 자연히 끼어들지요. 냉소라는 것은 이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자 나름의 대응방식인데, 이번에 다시 읽어본 「타인에게 말걸기」도 그렇고 은희경의 좋은 작품들은 그걸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반성적 성찰까지 아우른다고 봅니다. 『비밀과 거짓말』은 작가가 즐겨 다루어온 냉소적 인간형을 그 역사적 기원으로 소급해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재점검하고 조심스럽게 새 지점을 타진해보는 작품으로 읽혔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로서는 차라리 연속성에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사실 전 이 장편에 이런저런 유보도 없지 않은데, 거기서도 기왕의 작품세계와의 연속성을 볼 수 있는 것 같고요.

김영찬• 제가 변화를 강조하는 게 이전까지의 문학적 성취를 부정하는 관점은 아니고요. 이 작가들이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또 그것이 문학적인 변화와 성숙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얘깁니다. 또 이전 작품들에서도 자아에 대한 반성적 거리두기가 없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90년대 은희경 소설의 핵심은 냉소입니다. 김영희 선생이 말씀하신 반성적 성찰도 그런 바탕 위에서야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요. 은희경 소설에서 많이 얘기되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의 분열이라는 것도 정신적인 ‘나’를 세상 속의 ‘나’와 절연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세상에 침윤되지 않는 자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비밀과 거짓말』을 결정적인 단절의 지점으로 볼 수 있는 건 그랬던 ‘나’가 결국은 시간과 육체의 힘 앞에서 왜소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진실에 대한 비애어린 자각이 작품의 기조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금의 변화가 의미심장한 것은, 실제로 작가 자신이 그 변화와 단절에 대해 스스로 작품 속에서 자의식적으로 발언한다는 데 있어요. 『비밀과 거짓말』이 대표적인 경우이고, 윤대녕의 최근 단편 「제비를 기르다」도 마찬가집니다. 그 소설은 이를테면 90년대 윤대녕 소설의 모티브에 대한 씁쓸한 자의식적인 패러디로 볼 수 있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작가들 스스로가 이전까지 자신의 문학세계를 정리하면서 새로운 문학적 성숙을 모색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영희• 문학적 성숙의 양상이라는 데는 저도 같은 생각인데, 한가지만 다시 묻자면, 세상에 침윤되지 않는 자아……

김영찬• 않아야 할!

김영희• 예, ‘않아야 할’과 ‘않는’은 상당히 다른데, 역시 그런 자아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침윤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그 불가능성에 대면하고 마는 자아의 곤경이라고 하면, 제 생각에 더 가깝겠네요. 냉소에 대한 성찰이란 바로 ‘바라보는 나’ 식의 자세에 대한 성찰을 말씀드린 거고요.

 

우리 시대 중견시인들의 성취, 그 깊이와 넓이

 

이장욱• 이제 시 쪽으로 얘기를 옮겨보겠습니다. 작년에는 김명인, 조정권, 문인수, 허만하, 이시영 등 중견시인들이 예의 깊이있는 언어를 선보였고, 고은 시인의 연작도 계속되고 있는데요. 올해도 역시 고형렬, 김사인, 최정례 등 뚜렷한 성취를 보여주는 시인들의 작품이 많이 나왔습니다. 변별성 문제와는 무관하게 이 시집들을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박형준• 김영찬 선생께서 90년대 문학을 상처받고 좌절한 내면이 현실과 대립각을 세우는 문학이라고 규정하셨는데, 과연 그런 것만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제가 90년대라는 공간에서 시를 썼던 사람이기 때문이죠.(웃음) 오히려 저는 90년대 문학이 어떤 면에서 보면 폐허와 상실에서 다시 출발하기, 그러니까 자기 내면으로 세계를 감각하려는 머나먼 여행을 떠났고, 거기에서 새로운 미적 성취도 많이 거둬들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금 2000년대로 들어오면 내면을 향해 여행을 떠났던 그 시인들이, 특히 중견시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역(逆)으로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나라에서 KTX를 타면 넉넉잡아 서너시간이면 고향에 다 돌아갈 수 있는데요. 시인들은 이런 직선적 사고로 자기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멀리 우회해서 고향에 돌아가죠. 자본주의적 삶에서 보면 고향이 바로 저기인데 시인들에게는 그것이 힘들게 감각되거나 성찰되는 기원인 거죠. 그런 태도 속에서 새로운 시적 성찰이 많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형렬의 여섯번째 시집 『밤 미시령』은 아주 시사적이고 빼어난 시집입니다. 이 시집에 나타나는 것 중 하나는 고향이 불편해도 근원에 닿게 하는 줄기 같은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그것이 ‘간다’라는 모티브로 많이 나타납니다. 시집에 보면 속초에서 서울 가기도 보이는데, 정작 자신은 서울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심정이 드러나 있습니다. 서울에 적응해서 살고 싶지만 여전히 서울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심리 속에는 어떤 상실감이나 미도착 현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떠남의 미도착 현상은 다시 기원으로 돌아가는 행위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떠나거나 돌아옴 모두가 미도착이라는 이 역설이 이 시집의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요.

허수경의 시도 고형렬의 시집처럼 기원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지요. 이 시집의 많은 달 시편들은 달이 상처의 치유도구일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독일에서 바라보는 달을 먼 기억 속 유년의 달과 결합시키며 서로 바라볼 수 있는 통로를 개설하는 것 등이 고고학적이며 신화적인 상상력과 만나 우리 본래의 모습을 환기시켜줍니다.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흔히 보는 전혀 다른 두 사물을 깊은 통찰과 인식을 통해 연결하고 드러내 보이는 것이 한편 낯설면서도 아주 새로워요.

빈민의 삶을 주로 노래했던 김신용의 최근 변화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작품들을 보면 자신이 험난하게 살아온 이제까지의 빈민의 삶을 짐짓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환상통으로 감각하는 것에서 새로움을 줍니다. 자연과 자연 너머 파문 지는 것들, 그 흔들림을 통해 자연이 환상화되고 있어요. 거기서 자신을 본다는 점이 도시풍경에서 고립화되고 유희화되는 자연의 환상을 보는 젊은 시인들의 자연관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죠.

마지막으로 90년대의 대표 서정시인 중 하나인 장석남의 변화도 눈길을 끕니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는 이전의 장석남 표 서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자(亭子)의 정치학이라고 할까요? 일상이라는 낡은 틀을 허무려는 생각이 시에서 시멘트로 된 마당을 깬다든가 가족과 일상의 굴레 같은 계단을 부수려 한다든가로 나타나는데요. 즉 일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려는 정신으로서의 정자를 지향하고 있어요. 나름대로 정치와 현실에 관여하려는 이 미적인 정자의 시가 어떻게 변모할지 자못 궁금합니다.

이장욱• 그와 함께 아주 오랜만에 나온 김사인 시집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무려 19년 만에 나온 시집인데요. 고요하면서 시의 품이 아주 넓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어 「조용한 일」이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가 전문인데, 사실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인다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있고, 그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간신히 말하는 자가 시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시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체적으로 임우기 선생의 해설에 나온 대로, “세속적인 동시에 초월적인, 인간적이면서도 귀신적인”이라고 할 만한, 어떤 이중성에서 오는 매력을 느꼈습니다.

최정례 시인의 네번째 시집 『레바논 감정』도 중요한 시집이 아닌가 싶어요. 최정례 시인의 시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힘은 역시 일상화된 구어체에 있지 않나 싶은데, 행간을 규율하는 본능적인 감각도 뛰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이 시인의 화자에 매력을 느끼는데요, 미묘하게 개별화된 화자의 구어체가 시를 이루는 거죠. 일상적인 사건과 사람들 사이에서 시적인 관계들을 포착해내는데, 쉽사리 의미부여를 하지 않지만 시를 다 읽고 나서 바깥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시가 이런 말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유연한 힘이랄까 하는 것을 느낍니다.

김영희• 최정례 시집은 저도 잘 읽었습니다. 감정과잉을 절제하면서 일상에 스며 있는 인생의 비의를 주섬주섬 끌어안는 시편들이 좋았어요. 이번에 몇권의 시집들을 읽어보면서, 아무래도 서정성 논란을 염두에 두게 되더군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전통적 서정시에 대한 문제제기는 결국 자기동일적 주체가 모든 대상을 자기화한다는 비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정례가 보여주는 감정의 단련이라는 것도 이런 위계적 주체나 단일한 목소리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김신용의 『환상통』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노숙자, 정리해고자, 이주노동자, 매매춘 여성 등 최하층(underclass)에 속하는 사람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안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려내지요. 삶의 폐허를 끈질기게 견뎌낸 끝에 얻은 달관이랄까 아름다움까지 담아내되, 이런 달관이 환상이자 오욕이 되는 지점도 놓치지 않는데, 자연이나 서정성과 직접 관련된 대목들에서도 이런 시적 긴장이 잘 나타납니다. 이 시집에는 나무를 길게 묘사한 끝에 문득 노숙자가 겹쳐지는 「고사목」이라든가 자연에 대한 ‘시적’ 혹은 ‘서정적’ 접근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현실에 대한 단호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바람의 입」처럼, 자연풍물과 인간사를 이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것이 ‘전통적 서정시’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 시인이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관찰은 단순하지가 않고 현실과의 길항이나 간극도 놓치지 않습니다. 가장 단적으로 「나비무덤」에는 인습적인 서정, 인습적 ‘자연’의 허구성에 대한 냉연한 인식이 나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도 않습니다. 인습화된 ‘자연’만이 그나마 일시적 위안이 되는, 화자 자신을 포함한 대다수 사람들을 다시 감싸안지요. 이런 복잡한 시선이 담긴 시들을 읽으면서, 요즘의 서정성 비판이나 ‘다른 서정’ 등의 논의들이 ‘전통적 서정시’의 실제 다양성을 지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범박한 생각도 들더군요.

 

우리 시대 서정시의 행로

 

이장욱• 최근 서정성을 둘러싼 논의와 연관된 말씀을 해주셨네요. 사실 논의의 쟁점이 여러가지라 정리하기도 쉽지 않지만, 여기서는 지금 나온 ‘다른 서정’이라는 표현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이 표현은 지금 언급하신 좋은 서정시의 그런 면들이나 전래의 뛰어난 서정시들을 부정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었고, 오히려 우리 시대의 조건 아래서 그런 면들이 시적 생명력을 얻는 지점을 탐색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서정시에 대한 논의가 단순히 좋은 서정시를 쓰면 되지 않나 하는 차원은 아닌 듯하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오늘날 서정시 장르의 시대적 가능성들을 어느 지점에서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우리 시대의 서정시에 나타나는 다양한 내적 변화를 조망해보고, 일반적으로 서정시 개념의 핵심으로 생각되는 서정적 전유의 구조에서 일탈하는 부분들, 단일성이 어떤 실재들과 만나는 지점들을 미시적으로 살펴본 것입니다.

김영희• 제가 이해하기는 ‘다른 서정’을 말할 때 양면이 다 있었던 것 같아요. 전통적인 서정시 양식의 다른 측면을 읽어내는 섬세한 시선도 있고, 또 기왕의 서정시와 다른 새로운 양식에 주목하기도 하고 말이에요. 전자의 경우에는 받아들이기가 훨씬 원만해지는 반면에, 재래의 서정이라는 것이 무언지 실체가 좀 막연해져서, 굳이 ‘다른 서정’이라고 말할 필요가 과연 있나 싶어지네요. 대립각이 잘 안 선다고 할까요?

이장욱• 대립이랄까 차이가 미세한 것에서 아주 넓은 것까지 다양한 양상들이 있겠지요. 제가 그런 표현을 쓴 것은 기존 서정시 개념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양상들이, 특히 90년대 이래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 작년 무렵에 첫 시집을 출간한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학 차원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 글에서 다룬 것도 90년대 이래 시를 쓰던 분들의 작품이었지요. 사실 최근의 전위적인 시인들을 말할 때 서정성 패러다임은 생산적이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원론적이기도 하고, 폭이 너무 넓으니까요.

여기서 이 표현의 취지를 다시 말씀드린다면, ‘다른 서정’의 문제의식에는 서정시라는 장르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적 세계의 실상과 어떻게 조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비평가들이 소설은 근대적 장르의 중심으로 언급하면서도 서정시 장르는 주변화하는 경향이 있었지요. 이유는 다양하지만, 소설과 달리 객관성의 계기가 다양하고 풍요롭게 들어오기 어려운 측면도 있겠고, 서정시가 가지는 자아의 구심력과 관련해서 대상이 단성적인 의미로 환원된다든가 하는 장르의 인력 등도 거론할 수 있겠죠.

이런 서정적 환원의 지점, 대상과 삶과 타자들이 이질성이나 복합적 맥락, 그리고 실재하는 차이들을 잃고 서정시 안에서 단일한 의미맥락으로 환원되는 순간을 서정적 원환(園環)이 완결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지점을 저는 ‘서정적 소실점’이나 ‘서정성의 일점원근법’ 같은 비유를 써서 말한 것이고요. 그런 측면에서 서정적 전유의 구조가 하나의 단일한 전체를 이루는 패턴을 두고, 여기에서 일탈해 있는 시들을 살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래도 개인의 정념과 파토스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서정성은 남겠지만 말이죠.

여러분이 지적해주신 대로 여기서 유기적 세계에 대한 시적 사유라든가, 비판적 이성의 위치, 불가능한 동일성과 그것에 대한 희구의 의미 등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다른 서정’이라는 표현에는 서정성에 기반한 시들이 우리 시대에 좀더 풍부한 맥락을 취하기 위한 조건들이 무얼까 하는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가령 전체성의 담지자인 전래의 ‘시인’을 회의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도 여기에 포함되는데요,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시인이란, 전래의 ‘시인’과 개별화된 ‘시민’ 사이에서 우울한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이 ‘시민’으로 온전히 떨어지면 물론 시 자체가 안 나오겠지만, 과거 ‘시인’의 관념에 고착되어서도 오늘 우리 시대의 삶의 다양한 양상들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어떤 것을 느끼고 꿈꾸는 방식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시는, 세계의 운행을 직관하는 ‘시인’과 개별화된 실제 ‘시민’ 사이의 긴장 같은 것들을 예민하게 자각하는 가운데서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나 다 인정하듯이 문학장르는 역사적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요. 그런 맥락에서 서정시 장르의 시대적 맥락과 의미를 다시 되돌아보고, 이와 관련해서 역설적인 가능성의 모색이랄까,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박형준• 이장욱 선생의 독법에 공감하는 바가 많습니다. 물론 어차피 시라는 건 당대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으니까 거기에서 재래의 서정시 규범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많은 세계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질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재래적이면서도 끈질기게 밀고나가는 방식의 사유에 의해서 표출되는 게 사실이죠.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이장욱, 권혁웅씨 등에 의해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평들이 나오면서 사실 시보다 평론이 앞서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독법에 기대서 그들의 시를 읽게 되는 현상도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시를 그런 독법으로 읽다보니까 나름대로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 같은 것들이 배제되는 측면도 있어요.

그런 면에서 저는 80년대 시나 90년대 시가 2000년대 시에서 차지하는 비중 같은 것들도 간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80년대 시를 ‘우리’의 세계라고 하는데, 제 생각은 달라요. 일례로 민중시의 여러 층위들, 노동자나 그밖의 계급들에서 과연 민중해방의 목소리만 있었느냐, 그 안에 민중해방에만 구속될 수 없는 또다른 주체의 목소리가 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90년대는 우리 안에 있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치고 나와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의 목소리를 들려준 시기이고, 2000년대에는 그 ‘나’조차도 분열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 ‘나’의 분열이 꼭 2000년대에만 있었던 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지났다든지 진정성의 시대가 끝났다든지 이렇게 단정하지 말고 그 분열된 ‘나’가 어떻게 보면 새로운 우리들을 만들어내는 토대가 될 수 있을지 살펴보자는 거죠. 사실 새로운 시대의 시를 새로운 시의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새로운 독법에만 기대다보면, 반대로 고형렬이나 김사인 시인, 이런 분들의 시가 오히려 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장욱• 다시 대답을 안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웃음) 연속성의 측면을 보아야 하고, 변별성만 배타적으로 강조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에 공감하고요, 새로운 ‘우리’의 가능성에 대한 말씀에도 역시 동의합니다. 다만 젊은 시인들의 시에 공명하는 바가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면들이 있겠고요.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연속성과 변별성이 자연스럽게 정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운 독법’에 대해서도 역시 유효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구분되어가겠지요. 개인적으로는 평론 성격의 글을 쓰지 않은 지도 일년이 넘었습니다만, 고형렬 김사인 시집을 보다보니 뭔가 끼적거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웃음)

 

신진작가들의 환상성과 소설적 자질의 확장을 둘러싼 논란

 

이장욱• 아직 갈 길이 먼데요, 신진 소설가와 시인 들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분들을 둘러싸고 2000년대 들어 소설 쪽에서도 논의가 분분했죠? 개인적으로는 김애란, 박민규, 편혜영, 한유주, 이기호, 백가흠 등 많은 분들의 소설을 인상적으로 읽었는데요. 일단 소설적 자질의 확장이랄까, 『창비』 여름호 특집에서 차미령 선생이 다룬 환상성 문제 등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죠.

김영찬• 방금 젊은 작가들의 환상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박민규 소설 『핑퐁』은 그게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차미령 선생의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현실에 대한 우울한 체념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실이 아닌 다른 곳, ‘나’만의 상상공간, 유희적 환상세계,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심리적 근원은 거기에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한편으로 체념이란 여하간 현실에 대해 일정한 관심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태도잖아요. 어쩌면 이제 더 나아가 그런 체념조차 없는, 현실을 아예 회피하거나 무시해버리는 태도가 많은 젊은 작가들 소설의 바탕에 깔려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체념이나 방기의 태도는 물론 비판적인 시선에서 바라봐야 할 사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관하지 말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다루라고 요구하는 것도 바른 대처방식은 아니라고 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지만 현상이나 사태는 한쪽 면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나오게 되는 문학의 새로운 변화, 그것이 또다른 방식으로 갖는 가능성, 그런 것들에 주목하고 숙성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지금 젊은 작가들이 주도하는 문학적 변화의 배경에는 리얼리티 개념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해요. 젊은 작가들의 의식에는 현실은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진부한 허구일 뿐이고 환상이나 감각, 이미지, 텍스트 등이 오히려 현실보다 더 리얼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런 생각이 현실은 다시 숙고해볼 필요도 없는 그저 그런 것일 뿐이라고 전제하는 일면 이데올로기적인 태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일 텐데, 흥미로운 건 그런 생각이 외려 현실에 반발하면서 새로운 가치와 윤리를 추구하고 그러면서 현실을 새롭게 보게 만들기도 한다는 겁니다. 소설문법의 다채로운 갱신과 활기도 그런 바탕 위에서 나오는 것이고요. 특히 박민규나 김애란의 작품에서 환상과 상상이 돌출되는 지점을 가만히 보면 그것이 자아나 주체에 미치는 현실의 막강한 영향력을 의식적으로 차단하거나 닫아버리는 지점에서 나오거든요.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현실과의 긴장을 환기하면서 강한 감성적 호소력을 발휘하지요. 소설도 더 재미있어지고요. 강영숙이나 박민규, 편혜영, 김애란 등의 소설이 이 흐름 위에 있겠지요. 김숨이나 한유주, 김유진 등처럼 소설이 현실과는 아예 무관한 자족적인 이미지와 텍스트의 세계로 구축되어 있는 경우도 그들의 소설이 한국소설의 어법과 문법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김영희• 워낙 소설에서 환상이 아주 새로운 요소는 아니고 우리 소설에서도 가깝게는 최인석의 『아름다운 나의 귀신』 연작 등이 떠오르는데요. 물론 신진작가들의 작품에서 환상이 두드러진다는 것 자체는 2000년대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주목할 점이라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환상이 소설에 들어오거나 활용되는 방식이 지금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기에는 이르지 않나, 하여간 좀더 봐야 할 것 같네요. 환상이란 한편으로는 막막한 현실에서의 도피 같은 성격이 있지만, 그런 현실과 대결하고 돌파하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역시 현실인식의 깊이나 혁신 여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실 신진작가들 사이에서 환상이 성행한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참 다양하고 또 뜻밖의 효과들도 발견되지 않나요? 김애란 경우는 환상이라기보다는 공상인데 이게 현실에 탄탄히 발을 디딘 채 펼쳐지는 상상력이고, 강영숙도 딱히 환상이라기보다는 사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일체의 환상을 떨쳐버린 기록자적 문체와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지요. 『리나』는 이런 경계의 영역을 활용해서 탈북자나 이주현상, 동아시아 자본주의화의 이면을 파헤치는데, 이것을 꼭 환상에의 경도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것은 아닙니다. 물론 편혜영처럼 좀더 전면적으로 환상을 차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악몽 같은 현실의 숨은 억압구조를 떠올리게 하지요.

박민규의 『핑퐁』을 두고 김영찬 선생은 우울한 체념의 표현이라고 하셨는데, 물론 지금 이 세상을 어찌해볼 방도가 없다고 보는 것은 맞지만, 그렇건 아니건 지금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그러니 어디 한번 언인스톨(uninstall)해봐? 하는 반발 내지 저항이 더 강하게 느껴져요. 게다가 인류의 ‘다수’에 절망하면서도, 이들을 정말로 다수라기보다 스스로 다수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보잖아요. 심지어 왕따의 주범 치수에 대한 시선도 복잡하고요. 이런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단순한 비관이나 체념과는 다른 차원이고, 그게 바로 박민규의 활력이 아닌가 합니다.

이 점에서는 김애란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데, 「달려라, 아비」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듯해요. 물론 화자의 공상에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현실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면이 있긴 하죠. 그렇지만 이른바 ‘결손가족’을 보는 시각이 독특합니다. 빈곤층 모녀가족을 이만큼 바깥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낸 경우도 별로 없지 싶어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사소하게 넘길 줄도 알고, 그래서 오히려 아버지를 두고 따뜻한 공상을 펼칠 수 있는 거죠. 이에 비해 「사랑의 인사」는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공상이라는 동일한 모티브를 활용하지만, 방어적이고 자기위안적인 반응에 훨씬 더 가까운데, 역시 결말은 “문득, 지겨운 생각이 들었다”로 끝나지요. 그야말로 김애란다운 처리입니다.

두번째 작가군에서 그나마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유주인데, 이 작가도 나름의 현실 환기력이 아주 없지는 않지요. 그런데 시적인 서사랄까, 이미지와 심상들이 너무 파편화되어서 난해시를 읽는 느낌이에요. 난해시 중에도 잘 모르지만 공들여 읽고 싶은 작품이 있는데, 이 경우는 제가 둔감해서 그런지……

이장욱• 한유주의 시적인 감각과는 반대의 측면에서 강영숙의 『리나』를 볼 지점도 있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가상에 가까운 공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모호한 위치에서 현실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객관적인 시선과 문체가 이 현실감에 기여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도 서술 차원에서 인상적인데, 여러 단편들에서 구연소설적인 요소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서사를 이야기로 환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이야기의 가능성에 폭이 넓어지는 부분이 있고, 이런 화법이 전반적으로 패러디적이거나 카니발적인 힘을 부여한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소설, 우리 시대의 경계들을 횡단하다

 

이장욱•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들과 연관되는 것이지만, 최근 우리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여러 특질들을 포괄할 수 있는 표현으로 이른바 타자성과 윤리의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여름호 특집에서 김형중 선생이 주제로 삼은 것이기도 합니다만, 우리 시대의 타자성이랄까, 경계넘기랄까, 이런 것이 문학적 차원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고 또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겠습니다. 전성태의 『국경을 넘는 일』이나 김연수의 단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같은 작품은 제목 자체가 상징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또 배수아의 단편 「회색 時」 같은 소설의 제목도 상징적으로는 이런 경계에 대한 얘기로 읽을 수 있겠습니다.

김영희• 요즘 문학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타자’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늘었다는 점이지요. 국경이나 민족, 성별 등 여러 차원에서 기성 ‘주체’와 ‘타자’의 경계선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그리고 세계적인 현실이기도 하고요. 이럴 때 타자의 정치나 윤리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절대적인 타자를 설정하기보다는 내가 곧 타자인 지점이라든가 타자와 나의 관계를 틀지우는 동일한 구조에까지 시선을 돌리는 것이 타자화의 늪이랄까 오리엔탈리즘 같은 데서 벗어나는 길이라 봅니다. 타자를 본격적으로 그리고자 할 때는 이런 돌파가 중요할 텐데, 역시 쉽지 않은 과제인 것 같습니다.

언급하신 전성태나 김연수, 배수아 그리고 이미 거론된 강영숙을 비롯해서 천운영, 이명랑, 유재현, 김재영 같은 젊은 작가들도 그렇고, 황석영, 박범신, 김인숙 같은 작가들도 그렇고, 소재나 문제의식에서 다양한 경계넘기의 시도들이 있습니다. 그중 거명하신 김연수와 배수아에 대해서만 말씀드리죠. 김연수의 경우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가 특히 흥미로운데, 중국교포 여성과 한국인 남성의 결혼이라는 국경넘기의 어두운 이면을 그리면서, 여기 맞대면한 화자의 자기심문 과정을 함께 담아냅니다. 그 가운데 역사는 허구이고 진실은 사소하고 우연적인 것이라는 화자 내지 작가의 관념이 매우 단적으로 진술되는 듯합니다. 한기욱 선생도 이렇게 보는 모양인데, 그러나 관념과 작품 자체의 관계가 그리 간단치는 않아요. 무슨 보편적 진실이라기보다 화자가 스스로 해명하기 힘든 곤경을 맞닥뜨리면서 그런 역사관에 짐짓 의지하려는 것처럼 읽히거든요. 화자가 교포여성과 동생의 결혼을 막는 것도 동생의 편지를 보았다는 우연 때문만은 아니겠고요. 결국 이 작품에서는 작가 자신이 지닌 경계마저 넘어가게 만드는, 이를테면 ‘소설의 승리’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나 싶습니다.

배수아의 경계넘기는 정말 다각도로 이루어집니다. 국경도, 모국어의 경계도, 성별도 넘어서려 시도하고, 단편 「훌」에서는 고유명사의 경계도 넘어서지요. 성별 넘기에 대해 말씀드리면 『동물원 킨트』의 경우 성별 지우기가 낳는 독특한 효과가 이국적인 배경이라든가 작품의 주제 및 정조에 잘 어울린다고 보았습니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성별 문제는 이미 여러차례 거론되었지만, 현실과의 길항을 드러내는 처리가 제게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어요. 성별을 그냥 넘어버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한 성별의 위력을 함께 보여줄 필요도 있는데요. M이 여성이라는 점이 분명하게는 드러나지 않다가, 점잖던 독일어강사의 난폭한 언사에서 확 밝혀지잖아요. 젠더 체계의 폭력성 및 그것을 뛰어넘는 일의 어려움과 의미를 함께 부각하는 인상적인 장면이지요. 실제로 이 일이 화자와 M의 관계를 바꿔놓는 전환점이 되고요.

김영찬• 저는 일반적인 얘기를 하면서 논의를 보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타자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지금 한국문학의 특징적인 경향은 주체/타자의 완강한 이분법이 알게 모르게 흔들리고 해체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가령 ‘나’가 타자와 다르지 않은, ‘나’ 자신이 이미 타자라는 인식과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흔히 사회적 타자라고 불리는 주변부 마이너리티의 존재는 더이상 ‘나’ 바깥에 있는, 접근하고 영접하거나 공감해야 할 존재가 아니고, 그럼으로써 한편으로는 대상화되어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나’ 자체가 이미 타자성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 이를테면 강영숙, 박민규, 편혜영, 윤성희, 손홍규, 이기호 등의 소설이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복잡한 요인들이 얽혀 있지만—자꾸 반복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주체의 약화라는 요인도 여기에 가세하는 듯합니다—한국소설의 ‘윤리’가 여기에서 비롯된다는 데 대해서는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 같아요. 어떤 측면에서 한국소설에 대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더불어 지금 한국문학에서는 유무형의 굳어진 경계를 넘어서는 한편으로, 자아의 완강한 경계와 동일성이 갖는 자명성을 의심하고 반성하며 해체하는 작업들, 그럼으로써 나아가 문학 자체의 동일성마저도 의심하고 해체하는 작업들이 조용하면서도 활기차게 진행되는 중입니다. 그리고 좋은 문학이 갖는 자질은 많은 부분 거기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 논의되는 탈경계의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배수아 소설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의식이 그런 것인데요. 그런 문제의식과 거기에서 비롯된 도발적인 실험이 인간의 존재조건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로 이어지고 있다는 면에서 배수아 소설의 의의를 사주고 싶습니다. 세계의 고통과 한몸이 되면서 자아의 동일성을 윤리적인 방식으로 해체하는 강영숙의 소설이나 도달할 수 없는 진리와 진실이라는 이름의 불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하는 김연수의 소설 등도 그 예로 거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영희• 예, 김연수 작품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일관된 태도는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라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한 대목으로 요약해도 좋겠지요. 원론적인 이야기를 좀 보태면, 우리가 경계넘기의 의의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경계넘기 자체가 당연한 목적처럼 설정된다면 그것도 문제라 봅니다. 전성태의 「국경을 넘는 일」이 애매하게 귀결되는 데도 이런 당연시가 좀 작동하지 않았나 싶더군요. 경계넘기의 의미를 근원부터 계속 묻는 일이—윤리라는 말이 제겐 썩 편하지 않습니다만—윤리적 태도에 필수적일 것이고, 이 점은 문학장르의 굳어진 틀을 깨치고 나올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배수아가 근자에 소설에서 에쎄이로 넘나듦을 실험하고 있는데, 저로서는 「회색 時」처럼 좁은 의미의 ‘소설적’ 측면이 에쎄이에 담긴 관념과 길항하기도 하는 작품들이 흥미롭습니다. 화자는 선형적 시간에서는 과거가 고유성을 잃고 회색으로 물들어버린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이 묘한 게, 그래서 비선형적인 다른 시간성의 상상적 체험을 이야기 형식으로 끝까지 밀고나가보니 그것 역시 종국에는 회색 시간으로 드러나거든요.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소설이 지닌 객관화나 자기성찰의 힘마저 아예 폐기한다면, 에쎄이와의 결합도 작가가 이미 지니고 있는 생각을 좀 색다른 형태로 표출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하겠지요.

 

우리 시의 정치성, 그 양상과 가능성

 

이장욱• 바로 시 쪽으로 넘어가서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형준• 좌담을 준비하면서 젊은 시인들의 시를 다시 읽었는데, 또다른 의미에서 황병승의 시가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그전까지는 정말 낯설고 기괴한 풍경을 이 시대의 최전선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꼼꼼하게 읽어보니까 여러 페르쏘나에 감춰져 있던 황병승의 진짜 목소리가 느껴지는 듯하더군요. 황병승의 시에는 이 시대의 여러 비주류적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좀 엉뚱한 비유지만 70년대 신경림의 『농무』에 나오는 시골 사람들, 비주류적인 인물이나 소외된 풍경들과 유사한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우연히 1973년 『신동아』 7월호에 실린 「시인과 현실」이라는 좌담을 읽고 나서였는데요. 이 좌담은 백낙청, 김우창, 김종길 선생이 신경림의 『농무』 출간을 계기로, 한권의 시집을 통해 당대 시단을 진단하는 내용이었어요. 여기서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 중에 김종길 선생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자신도 농촌 출신인데 신경림의 시는 직접적으로 호소해오는 것이 없고, 그 이유는 신경림의 시에 나오는 ‘나’가 종래 시단의 ‘나’와는 다르고, 시가 단편소설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경림의 시는 어딘가에 가설된 무대에 동원이 되어서 구경하는 느낌을 준다는 평이었습니다. 제가 엉뚱한 비유라고 한 것은 신경림 시를 비판한 김종길의 근거가 되는 이런 작위성이 새로운 시대의 시인인 황병승에게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황병승은 자신의 시에 정치적·사회적 메씨지를 담지 않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또 역설적이에요. 왜냐하면 자기 나름의 가설무대를 만들어서 일반적인 인물들이 아닌 인물들, 가령 거세한 남자, 여장남자, 게이를 등장시켜서 뭔가 이전과는 다른 사회성, 혹은 자신의 정치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시구절을 빌리면, 이제까지 사람들에게서 보이던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진짜의 나, 뒷통수의 나를 보여주겠다(「커밍아웃」)는 것이죠.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도 인상깊게 읽었는데, 이 시인은 한국어를 다루는 솜씨가 아주 능숙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재래적 서정시의 맥을 잇는 듯한 느낌도 많아요. 재래적인 서정시에서는 금기어라고 할 수 있는 어머니의 꽃무늬 팬티나 낮잠 드신 아버지의 귀두 같은 것을 살짝 비틀어 시의 소재로 삼는데, 그런 것이 뒤틀린 것으로만 와닿지 않고 새로운 감각으로 전달되더군요. 또 시인은 음악에 대한 관심, 청각에 대한 관심도 많은데 그런 것을 묘하게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이미지가 참신했습니다. 이제는 복합적인 문화적 삶을 자기 나름대로 의미화하고 사회화하는 태도가 실제 삶과 자연에 대한 탐구만큼이나 중요해진 것 같아요. 그런데 불만이 있다면 생각보다는 잘 들어오지 않는 대목이 많았다는 건데, 자신들의 문화에 접근할 때 보이는 잠언투의 낭만성과 나르씨시즘 때문이었어요.

어쨌든 일부 시에서 드러나긴 하지만 아직 시는 소설처럼 직접 베트남 등에 가서 경계넘기를 하거나 북한의 탈북자 문제를 전면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죠. 젊은 시인들이 상당히 비정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에는 이렇게 딱딱하게 틀지어진 경계를 언어로 풀려고 시도하는 정치적인 측면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볼 때 이런 아방가르드가 정치성을 획득한다면 분명히 우리 시에서 새로운 보편성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습니다.

김영희•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에서도 정치적 맥락은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요. 구타, 난자, 관통당하는 여자들, 자해와 폭력과 가학적 반응으로 가득한 도착적 상상력의 시라고 해야 할 텐데, 전체적으로 전 아직 판단유보지만,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태를 드러내고 대면하려는 듯하고, 과감한 한판 뒤집기의 뒷심이랄까 해학적 어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표제작의 경우에도 난폭한 언어와 이미지가 과하다 싶게 난무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길러지고 꾸며지고 팔려나가는 딸들의 반발 같은 것도 절실하고, 발랄한 만화적 상상력 덕분에 끔찍하면서도 웃음과 통쾌함을 자아내는 역설적인 효과도 있더군요. 새로운 방식의 정치적 시쓰기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장욱• 동감합니다. 작년 무렵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을 또 일반화해서 말하는 게 걸리긴 하지만, 의식적인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넓은 의미의 정치적 맥락들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대단히 유연한 체제를 갖고 있는 오늘의 세계를 감안할 때 하위문화든 전위든 미시적 정치성이든, 이미 체제 안에 편입되어 있는 ‘내속된 외부’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듯하고, 이런 부분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사회적 소수자의 의식이라든가 가부장적 위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 등이 지닌 의미는 좀더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친연성을 느끼는 정서라든가 미성년의 시선, 아이러니의 감각 등도 같은 맥락에서 논의해볼 수 있겠고요.

사실 시를 두고 정치성을 얘기하다보면 대체로 과잉이나 결핍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황병승 시인의 경우도 그렇고, 김경주, 김언, 김이듬, 이근화, 정영, 조연호 등 여러 시인들에게 나타난 시적 성취들은 정치성 외에 여러 맥락에서 풍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요.

아무래도 시적 정치성을 말하는 문맥에서는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노동의 가치랄까 하는 것을 구현하는 시편들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 박형준 선생께서 80년대 시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노동의 새벽』 등 당시의 이른바 ‘노동시’들에 나타난 현실감있는 육성은 다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실제 노동의 조건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데, 일하는 것과 시쓰는 것의 사이가 멀어진 시대라고도 할 수 있고, 이럴 때일수록 일하는 사람들의 시가 담당해야 할 부분이 소중하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최종천, 김신용, 유홍준 시인 등의 시에서 자기 몸으로 일하는 사람 특유의 정정당당한 열정이랄까 진실 같은 것이 느껴져 부럽기도 하고요. 특히 최종천 시인의 경우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적으로 거친 부분도 있고 유려한 시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힘있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외에도 이기인, 장석원 시인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독특하고 묘한 위치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정치성의 영역은 더 넓은 관점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령 문태준의 시에서 우리가 이 세계의 틈새 같은 것을 통해 어떤 아릿하고 유현한 세계를 만날 때, 그것 자체가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세계에 대한 시적 발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손택수, 장철문의 시가 도시적 삶과 농경적 삶의 경계에서 어떤 삶의 가능성들을 포착해낼 때도 역시 그런 차원의 이해가 가능하겠죠. 여기에 대해서 더 자세하고 풍부한 논의가 이어질 수 있을 듯합니다.

 

‘6·15시대의 문학’이라는 규정은 타당한가

 

이장욱• 이제 우리 좌담 가운데서 가장 추상도가 높은 얘기를 할 때가 왔습니다. 6·15시대의 문학과 민족문학론에 대한 것인데요, 『창비』 여름호 한기욱 선생의 평론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6·15시대와 IMF시대라는 두 축을 기점으로 놓고 둘 사이의 연관관계를 전제한 상태에서, 전자에 무게중심을 두고 ‘2000년대 문학’을 논의하는 글이었습니다. 먼저 6·15시대라는 시대인식의 유효성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좌담을 진행하는 이 싯점에서는 북핵문제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입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6·15와 연동된 분단체제 문제가 좀더 두드러지는 느낌도 있습니다.

김영찬• 시대규정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하게 여러 사항들을 고려해야 하니 일단 이 자리에서는 6·15시대라는 규정을 중심으로 2000년대 한국문학을 분석한 한기욱 선생의 글을 읽고 느낀 점을 말씀드리는 걸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6·15시대라는 시대규정 속에서 여러 작품들을 경계넘기라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분석하셨는데, 제가 볼 때 어떤 작품들은 굳이 이러한 시대규정을 들이대지 않고도 분석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시대규정에 얽매이지 않아야 작품의 성취를 더 설득력있게 보여줄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 이유 때문에 시대규정과 작품에 대한 분석이 긴밀한 관련성을 갖기보다는 괴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글이, 6·15시대라는 규정이 지금의 현실을 규정하는 하나의 틀일 수는 있지만 지금의 문학을 설명하는 틀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걸 몸소 증명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의 한국문학을 설명하는 그런 방식의 거대담론 자체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 거대담론이 현실의 실감, 문학현장의 실감, 작가의 실제 문제의식이 있는 지점 등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그 글에서 한기욱 선생이 저와 김형중 선생을 비판하면서 하신 말씀이, 역사나 현실을 보는 눈이 너무 작거나 커서 중간치의 시야를 확보치 못한다는 것이었는데요. 그런데 문제는 안타깝게도 지금 문학현실에서 ‘중간치의 시야’가 포착할 수 있는 영역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그보다 지금 문학의 문제의식이나 그 표출방식은 오히려 크게는 포스트IMF시대가 강요하는 자본주의라는 삶의 큰 틀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반응으로 설명할 수 있거나 아니면 작게는 문학 자체의 존재방식과 관련한 탐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죠. 그런 측면에서 너무 크거나 작은 눈이 역으로 문학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부득이 유효한 틀일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경계넘기라는 주제도 세계화의 현실을 반영한, 문학 자체의 내부에서 촉발된 문학적 자기갱신의 일면이라고 보는 게 외려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이거든요.

김영희• 저로서는 2000년대 문학에 작동하는 여러 변수와 6·15라는 핵심적인 계기를 연관지어 사유하려는 시도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기욱 선생이 사용한 ‘6·15시대 문학’이라는 표현도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약칭이 아닐까 싶고, 그렇다면 꼭 선험적인 규정이랄 것은 없고 차라리 실천적 개념화인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호 『창비』에서 한 젊은 필자가 요즘 세대에는 “6월은 6·25가 아니라 6·15로 기억된다”는 말을 하던데, 정말 이렇기만 할까 싶지만, 6·15가 대중적 감수성에 미친 영향은 사실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북핵 국면은 분단체제의 불안정성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지만, 가령 86년 금강산댐 소동과 비교해보면 그간의 변화 또한 실감이 납니다.

문제는 문학읽기에서 이것을 어떻게 원만하게 풀어나가느냐인데, 이 점에서 한기욱 선생의 글에 아쉬움이 있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시대인식과 문학적 적용 사이의 불가피한 괴리라기보다는, ‘6·15시대’ 자체에 대한 좀더 다면적인 해명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경계넘기에 6·15가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는 말은 저도 했습니다만, 좀더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은 아무래도 한국사회가 자본주의적 세계화 속에 한결 긴밀하고 예전과 좀 다른 방식으로 포섭된 것일 텐데, 한선생은 세계화라는 변수를 언급하고 지나갈 뿐, 6·15와 관련짓지는 않지요. 양자의 관련성과 길항을 다 짚어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럴 때 시대와 문학의 연결도 더 설득력이 있고, 경계넘기 자체에 대해서도 좀더 복합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작은 눈이냐 큰 눈이냐 중간치냐 하는 시각의 크기 논란에 끼고 싶지는 않습니다만(웃음), 얼핏 드는 생각으로는 포스트IMF시대라는 규정 자체도 실은 중간치 시야가 될 수 있지 싶네요.

박형준• 분단체제론이나 근대 극복과 적응의 이중과제는 여전히 우리 시대에 생산적 고민을 던져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운동성이나 민중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되고 어디까지나 예술성과 균형을 맞추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창비의 문학론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과학에서 말하는 객관성과는 다르게 이것과 저것을 다함께 살리면서 현상과 사물을 변화시키는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문학이 제시되어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문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상층부의 거대한 합의에 의하기보다 사회 각 부문의 민중이 다양한 차원에서 교류, 상호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것, 그것이 통일의 초석이고 참다운 민중적 방식의 통일과정일 텐데, 6·15는 그 방식의 획으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6·15시대의 문학이 문학현장에 너무 입론적으로 제시된다면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6·15에 과도하게 방점을 찍지 말았으면 합니다. 6·15가 우리 문학의 거대한 상층부가 아니라 문화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생산적 문학양식이 될 때 저 같은 소박한 작가나 문학독자들도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새로운 틀을 인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김영찬•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과 모순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한기욱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창비가 예전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 90년대 문학에 대해 보여주었던 비판적 방관이나 무시, 비판의 태도와 비교해보면 특히나 그렇습니다. 사회적 의제에 뒷전으로 밀렸던 탓인지 어쨌든 한국문학의 생생한 현장을 소홀히 방치했던 예전의 정황에 비해서도 그렇고요. 그런데 방금 6·15시대의 문학이라는 문제설정이 실천적인 입론이라고 말씀하셨지만 한기욱 선생의 글은 지금의 문학현실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징후’를 논하는 한편으로 그 속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찾아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글이거든요. 지금의 문학에 대해 오히려 저보다도 더 관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창비의 문학론이 좀더 유연해지고 품을 넓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좋은 느낌도 받았습니다.

김영희• 고마운 말씀인데, 그렇다고 예전 방식이란 것이 꼭 시대적 과제에 대한 미리 마련된 답이 있고, 작품이 그에 부합하느냐 아니냐 하는 차원에서 접근했느냐 하면, 물론 이런 발상이 80년대에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겁니다. 당시 창비는 문학주의라는 비판도 받았잖아요?

 

민족문학론을 둘러싼 쟁점들

 

이장욱•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지금은 6·15시대이자 북핵시대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인데요. 이런 때일수록 분단체제 및 분단체제론과 관련된 사유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민족문학론을 둘러싼 논점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민족문학론에 대해 기존에 제기된 비판의 논점을 몇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큰 틀에서 보자면, 첫번째로는 왜 아직도 ‘민족’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텐데,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견해도 있고, 민족국가가 지닌 억압의 기제들을 비판하는 담론들도 언급됩니다만, 이런 시대에 왜 아직도 ‘민족’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고요. 두번째로 분단체제 극복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씨스템이 지닌 다양한 문제들, 그러니까 계급, 성, 평화, 환경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결여되거나 억압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 있겠고요, 세번째로는 문학과 관련해서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지만, 민족문학론이 현실적으로 작품에 대한 비평적 유효성을 잃은 것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논의들에 대해서 김영희 선생께서 말씀해주시죠.

김영희• 엄청난 문제들인데요. 저보고 한꺼번에 다 해결하라는 건 아니겠지요?(웃음) 사실 그간 응답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이 계속되는 상황 자체가 문제적이라고도 느껴집니다. 하여간 질문을 주셨으니 제가 이해하는 바를 간단히 말씀드리는 것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터야겠네요. 첫번째 비판은 민족국가의 위상이나 억압성과 관련된 문제인데, 민족국가나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면모에 대한 비판의식은 70년대 민족문학론의 태동부터 스스로 분명히했고, 남한 자본주의의 성격 변화에 따라 민족주의의 이중성 및 폐해에 대한 비판도 심화되어왔다고 봅니다. 다만 민족 경계가 약화되고는 있지만, 민족국가 단위의 세계질서는 아직 굳건하고 민족국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담당하는 몫이 크다는 것이지요. 사실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이야기도 그렇다고 해서 쉽게 넘어설 수 있다거나 혹은 순전히 부정되어야 한다는 취지는 아니라고 이해하는데요. 좋든 싫든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하고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민족주의라기보다 이런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이라고 보면 어떨까요?

두번째 분단체제론이 다양한 문제제기를 결여하거나 억압한다는 비판은, 단순한 분단극복론이나 통일론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고, 분단체제를 세계자본주의체제의 하위체제로 위치시켰던 분단체제론으로서는 억울한 비판일 거예요. 자본주의체제 자체가 계급적 구조임은 물론이고 근원적으로 반여성적, 반환경적이잖아요? 따라서 분단을 이런 문제들과 분리할 때 진정한 분단체제 극복은 불가능하다는 것, 거꾸로 남한의 계급문제, 여성문제 등도 분단과 관련지어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분단체제론의 계속된 주장이자 지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지는 고민해봐야 할 텐데요. 입론상으로 다양한 문제제기에 열려 있지만 각론적인 논의들이 한결 풍성했다면 이런 오해를 얼마간은 줄일 수 있었겠지요. 각론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만, 저 같은 경우는 직무유기라고 해도 유구무언일 뿐이라……(웃음) 

이장욱• 사실 민족문학론에서 중요한 것은 민족론뿐만 아니라 문학론의 측면일 텐데요. 현실적으로 민족문학론이라는 담론이 실제로 작품을 쓰거나 읽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됩니다.

김영희• 예, 이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겠지요. 그런데 작품세계가 다양해지면서 민족이나 분단이 더이상 대다수 작가나 비평가 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지적이라면, 이에 대한 응답은 이미 앞에서 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문학론이 배타적으로 그런 데에 집중하자는 것은 아니니까요. 민족문학론의 기여라…… 한두가지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는 민족문학론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 현실에 즉해서 작품을 쓰고 읽자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현실이 과연 뭐냐 하면 또 어려워지겠지만, 민족문학론의 한 축인 분단체제론이란 지금 이곳의 실상과 면대하게끔 추동하는 입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만큼은 ‘민족문학’이라는 말을 쓰든 안 쓰든 견지되어야 할 것이고요. 또 하나, 창작은 물론이고 비평에서 정해진 지침이나 방법론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민족문학론의 문학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확실히 제시해야 민족문학론의 유효성이 증명된다고 보고 그게 아니면 시효 상실이다, 이런 견해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영찬• 민족문학론은 비판하는 입장이나 그 비판에 대응하는 입장이나 공히 곤란하고 간단치 않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민족문학론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오해에 대한 답답함과 억울함이 있을 수도 있겠고…… 저는 그 비판에 대응하는 입장에 서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하는 입장에서 얘기를 하자면 비판을 하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허방을 찌르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들고……(웃음) 아니, 정말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사실 앞에서 이장욱 선생이 세가지 측면에서 민족문학론에 대한 비판의 논점을 정리해주셨는데, 사실은 지금 민족문학론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근데, 있는 건가요?(웃음)

김영희• 다 어디 가기야 했겠어요?(웃음) 전 민족문학론이 자기 위치를 조정했다고 판단합니다. 완전 해소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를 그대로 고수하는 것도 아니어서 애매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변화에 대응하면서 자신을 갱신해온 결과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김영찬• 예, 그렇다면, 저는 이런 방식으로 제기되는 비판을 그 안에서 모두 녹여버리면서 무력화하고—그런 문제의식은 민족문학론 안에 이미 있다,라는 대답이 그런 거죠—그걸 바탕으로 논리의 폭을 넓혀나갈 수 있는 엄청난 유연성이 바로 민족문학론의 장점인 동시에 역설적인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유연함은 어느 면 완강함의 다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유연하기 때문에 모든 걸 통괄하고 포용할 수 있는 논리라는 자신감이 문학적으로는 오히려 모든 것을 일관된 특정한 논리로 환원하는 반면, 그 환원에 한사코 저항하는 것들을 배제하지 않고 어떻게 그 자체를 인정하면서 끌어안고 갈 것인가 하는 자기반성적 질문을 결여하는 걸로 나타난 것 같아요. 밑으로 잘 내려오지 않았던 거죠. 민족문학론의 갱신이 말과는 달리 계속 지체되어온 것도 거기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가령 민족문학론에 대해 비판을 하면 그건 오해다, 민족문학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라는 대답이 항상 나오잖아요.(웃음) 민족문학론의 유연성이 표현되는 방식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런 오해를 빚어내는 당사자에게도 있는 거거든요. 어찌됐든 계속 교정을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왜 끊임없이 그런 오해가 그치지 않고 제기되는지는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분단체제라는 최종심급의 중요성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 오히려 거꾸로 작고 미세한 것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하나씩 위로 쌓아올라가며 증명하려는 겸허한 노력의 축적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민족문학론의 유연성이 장점일 수 있다는 건 바로 그 유연성 때문에 스스로의 완강한 자기동일성을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열어놓고 있다는 거거든요. 문제는 그게 지금 한국문학의 변화양상에 유연하지만 미세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적응력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 것일 텐데요. 백낙청 선생이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문학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사실 그건 ‘좋은 문학’이면 된다는 거잖아요. 한국사회의 인간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문학이면 된다는 말씀인데, 이건 딱히 민족문학론이 아니더라도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김영희• 너무 유연해서 내용이 상실된다는 얘기처럼 들리네요.

김영찬• 어찌됐든 저는 민족문학론이 지금의 문학적 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비평적인 적응력과 효율성은 잃었지만 그것이 가진 기본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영희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문학과 현실의 실천적 관계에 대한 관심이라든가, 좋은 문학은 문학과 현실의 긴장 속에서 나온다는 판단 같은 것들 말이죠. 중요한 건 지금 민족문학론은 스스로의 동일성을 긍정적으로 해체하면서 딱히 민족문학론이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더라도 그런 정신을 문학현장 속에서 펼쳐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전과 사뭇 달라진 지금의 문학과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이론을 밑바닥에서부터 발전시켜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김영희• 잘 들었습니다. 새겨들을 말씀도 많고요. 유연성이 장점이자 함정이 될 수 있다거나, 지금 문학현장에 좀더 밀착한 논의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런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심도있는 대화를 위해서도, 민족문학론이 해온 것에 대해 피차 좀더 곡진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분단체제가 무슨 최종심급이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또한 미세한 현실에 대해 관심을 닫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다시 지적하고 싶군요. 구체적인 문학논의에서도 얼마나 제대로 해왔느냐 한다면 부족함이 많겠지요. 그러나 정작 미세한 읽기를 하면 그것은 ‘창비독법’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고정관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민족문학론 자체가 변화된 상황과 의미있는 문제제기에 대응하면서, 갱신의 지체보다는 오히려 갱신에 갱신을 거듭해왔다고도 볼 수 있잖아요. ‘민중·민족문학’으로, ‘국민문학을 겸한 민족문학’으로, 그리고 ‘분단체제 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반성적 질문’의 부족이라면 몰라도 결여라고 하시면 너무 박한 말씀인 것 같고, 어떤 이론이든지 자기 해체의 지점까지도 과감히 밀고나가는 모험을 감당해야 제대로 된 이론이 아닐까 합니다만…… 그런데 그러다보면, 결국은 ‘인간화에 기여하는 좋은 문학’과 뭐가 다르냐 하는 말씀도 해주셨는데, 민족문학론은 그게 뭐냐는 것까지 묻자는, 그러니까 어떤 게 좋은 문학이고 어떤 게 인간화냐, 이런 걸 계속 구체적으로 물어나가자는 것이잖아요. 그런 물음 속에서 유지되는 것이 민족문학론 아닌가 합니다.

김영찬• 역시, 비판하면 손해라니까.(웃음)

김영희• 글쎄요. 그래도 계속 비판도 하고 응대도 하면서 서로 발전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도 어떻게 같은 이야기를 안해보나 고심하곤 있지만, 제 역량으로선 버거운 문제라서요.(웃음)

 

생산적인 토론과 실천적 고민을 기대하며

 

이장욱• 이제 마무리할 때인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기 어려운 얘기가 진행되었는데, 지금 우리 문학작품들과 이런저런 쟁점들을 살핀 데서 만족할 수밖에 없겠다 싶습니다. 다만 리얼리즘, 모더니즘 문제라든가, 근대문학 종언론 등의 주제가 다루어지지 못해 아쉬운데, 다른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제에 상관없이 덧붙이거나 보충하실 얘기가 있으면 한말씀씩 해주시기 바랍니다.

박형준• 좌담이 끝날 때까지 소설에 대해서 별말씀을 못 드렸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좋은 소설을 많이 읽게 되어서 즐거웠고요. 또 소설의 즐거움을 선생님들의 식견으로 확인하고 배울 수 있어 유익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소회랄까 뭐 그런 것을 말씀드리면, 문학, 특히 시는 동일성을 지향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시대의 시가 다양성 속에서 뭔가 의미있는 것을 발견했으면 싶고, 또 그런 것을 창비가 지속적으로 수용해나갔으면 합니다. 이 시대에서 서로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합하거나 결합해서 다원적 현실에 효율성을 부여할 수 있는 시 말이지요. 그런 열린 개념으로서의 ‘나’들이 이룩하는 시, 나와 우리가 함께 생생하게 살아있는 관념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구현하는 감각은 도무지 유사성이 없는, 그래서 세계를 온통 가로지르는 무지개와 같은 시의 다양함을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 구현했으면 합니다. 시대마다 그에 맞는 정서와 가치관이 존재했고, 그 시대에 맞는 깊이를 찾아냈습니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은 더 나아가 시대에 맞는 가치관과 정서를 뚫고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성에 도달하기 위해 통증을 수반하는 변화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찬• 저로서는 특히 배운 것이 많은 자리였습니다. 2000년대의 소설에 대한 제 생각이 지나친 일반화의 위험이 있다고 하신 김영희 선생의 지적은 고민거리로 겸허하게 품고 가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화 없이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제 소신은 굽히지 않으면서요. 개인적으로는 평소에 그다지 열심히 읽지 못했던 시도 덕분에 많이 읽고 고민해볼 수 있었다는 게 수확 중 하나입니다. 2000년대의 시와 소설의 문학적 흐름이 언뜻 많이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고 많은 부분이 한 흐름 속에 있음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한국문학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대립되는 지점들도 확인하고 또 이후의 토론거리를 모아보았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창비의 문학토론과 실천적 고민이 더욱 활기차게 전개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김영희• 저 역시 좌담을 준비하면서나 오늘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서 배운 게 많고, 숙제도 많구나 싶습니다. 최근 들어 창비의 문학행로에 대해서 창비 안팎으로 논란이 있어왔는데, 이번 좌담 역시 창비가 스스로를 열어나가는 실험을 부단히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리가 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다른분 말씀에는 꽤 토를 달기도 했는데요, 큰 틀에서 이견이 있는 경우에도 구체적인 작품읽기에서는 공감하는 대목이 평소 많았고, 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으로도 토론과 대화가 좀더 활발해지기를 바라고, 그러자면 각자 끊임없는 정진도 필요할 텐데, 제가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까지는 못하더라도 ‘다들 열심히 하십시다’ 정도는 말씀드려야겠네요.(웃음)

이장욱• 선생님들 말씀대로, 역시 좌담을 하다보니 이런저런 차이도 드러나지만 공유하고 이해되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 논의들을 통해 접점들을 찾아가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고, 그런 면에서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창비』는 우리 문학장 안에서 사회성과 역사성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었던 문예지이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경향이 좀더 치열해지면서 현장성을 지니면 좋겠고, 범박하게 말해서 역사적 진보성과 미적 진보성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공간이기를 바랍니다. 미숙한 진행에도 불구하고 좋은 말씀을 해주신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