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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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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연 吳受姸

1964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 장편공모에 『난쟁이 나라의 국경일』이 당선되어 등단. 소설집 『빈집』 『부엌』, 산문집 『아부 알리, 죽지 마』 등이 있음. sohoj71@hotmail.com

 

 

 

재칼과 바다의 장(章)

 

 

옛날에

재칼 두마리가 살았습니다. 한마리의 이름은 칼릴라였고 다른 한마리의 이름은 딤나였습니다. 두마리 모두 지혜와 지식과 교양을 겸비했습니다.1 어느날 딤나가 칼릴라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진실을 말할게.”

“이제?”

칼릴라는 피식 웃었습니다. 딤나는 말했습니다.

“입은 비뚤어져도 바른말을 할 때가 급기야 도래했다. 봐라, 이 부서지고 깨진 기왓장들을!”

어디선가 기왓장이 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두마리는 흠칫 떨었습니다. 딤나는 침통하게 읊조렸습니다.

“아, 또 한장의 기왓장이 지붕에서 떨어져, 찍 소리도 못하고 짹 소리도 못하고, 엄마 나 가요 한마디 남기지도 못하고, 박살이 나고 말았구나!”

“저런!”

칼릴라는 속삭였습니다. 딤나가 말했습니다.

“침략자는 나쁘다!”

“계속해.”

칼릴라는 마지못해 속삭였습니다. 딤나는 힘주어 말했습니다.

“나쁜 침략자는 망하고 마침내 만사가 잘될 것이다!”

“늘 하는 말이잖아.”

칼릴라가 눈살을 찌푸리고 항의했습니다. 딤나가 드디어 새로운 말을 하겠다는 시늉을 하고는 목청을 돋우어 외쳤습니다.

“나 같은 인재를 이다지도 함부로 썩히는 건 국력 손실이다!”

칼릴라는 아무 대꾸 없이 뒷발로 등을 긁었습니다. 딤나가 으르렁거렸습니다.

“이번엔 달라!”

“뭐가?”

“내가. 이 말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너는 상상도 못할 거야. 하지만 대단원이 있으면 그전에 위기가, 위기 전에 전개가, 전개 전에 발단이 있었던 것 아냐. 괴로워도 누군가는 이 언어도단의 사태를 수습하여 줄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어디선가 기왓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바닥에 하얗게 깔렸던 꽃잎들이 날아올라 규칙 없이 무질서하게, 또 규칙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떠돌았습니다. 칼릴라는 코끝을 스치고 동동 떠가는 꽃잎 한점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습니다.

“맘대로 해. 네 입이 괜히 비뚤어졌겠니. 토끼마을의 돼지처럼 아래턱과 위턱이 아예 어긋나버린다고 해도 네 인생이지.”

“뭐, 뭐?”하고 딤나가 묻자 칼릴라는 등을 실컷 긁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받는 이 인터넷잡지 경리담당

제목 해명서

첨부파일 해명서.hwp(0.01MB)

방금 은행직원하고 통화를 했는데, 그 사람도 잘 모르더군요. ‘뉴욕은행’에서 짧은 통보만 받았답니다. 그 직원 말로는 자기 은행을 통해 잡지사가 돈을 보낸 ‘서쪽은행’의 본사가 뉴욕은행이므로 (그런 줄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원래 돈이 동쪽 태평양 건너 지구를 반바퀴 돌아가게 돼 있답니다. 하지만 자기도 고객이 송금한 돈이 ‘테러자금’이라고 걸린 경우는 처음이라, 뉴욕은행이나 서쪽은행에서 왜 그 돈이 테러자금이라는 혐의가 있다고 하는지, 그리고 테러자금 혐의가 있는 돈을 은행이 다섯달이나 묵혀두었다가 왜 이제 와서 통보를 하고 오늘 안에 송금자가 해명하지 못하면 국가가 몰수하겠다고 하는지 모르겠답니다. 30만원이 테러자금이라니 어이가 없습니다. 제가 그 돈을 몰수한다는 국가가 어느 나라냐고 묻자, 그 직원은 서쪽자치지구로 송금한 돈이니 당연히 서쪽자치정부가 아니겠느냐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올초 서쪽자치지구 총선에서 점령에 저항하는 급진정당이 집권했는데, 자기 시민한테 송금된 돈을 테러자금이라고 몰수할 리가 없습니다. 아마 미국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점령국이 몰수하겠다는 말일 겁니다. 서쪽은행인지 뉴욕은행인지, 국가인지에 제출할 영어 해명서를 첨부합니다. 하지만 은행이나 국가나 하필 그 돈에서 테러자금 냄새를 맡은 이유를 알려줘야 제가 해명을 해도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그 돈을 받을 사람은 문인이고 돈은 원고료다, 이것밖에 쓸 말이 없습니다. 이게 사실이고 전부이니까요.

 

검색   서쪽자치정부

한참 지난 뉴스

특히 미국이 서쪽자치지구의 은행들에 대해 미국의 제재를 받지 않으려면 자치정부와 거래하지 말라고 경고함에 따라 새 내각의 곤경은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새로 집권한 정당이 점령국에 반대하며 싸워온 역사 때문에 워싱턴에 의해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서쪽지역에 기반을 둔 ‘서쪽은행’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서쪽자치정부의 모든 계좌를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은행들도 이같은 조치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2

 

보낸 이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기 전 서쪽 문인

보낸 날짜 5개월 전

받는 이 동쪽 친구

제목 Re: 친구로부터

나는 괜찮습니다. 사람은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걱정해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스트레스는 여기서 내가 받는 걸로 충분하니까 당신까지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봄을 감사히 여기고 즐기십시오. 편지 쓸 때마다 내가 언짢은 소식을 전하나 봅니다. 나도 제발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요.

윤회라는 게 있다면, 나는 내생에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내 뿌리로 물을 긷고 내 잎으로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때가 되면 보는 이 없어도 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꽃이 지더라도 소리없이 웃고 싶습니다.

-그 며칠 전 동쪽 친구 wrote:

지금은 밤입니다. 검은 장막 안에 갇힌 듯 답답하군요. 당신의 아파트 작은 정원에 서 있는 아몬드나무에는 아직도 꽃이 피어 있는지요. 내가 그쪽에 잠깐 들렀을 때는 아직 점령국의 장벽이 완성되기 전이라, 나중에 장벽 사진을 보고 나는 그 크기와 높이에 질렸습니다. 자기들이 수천년 동안 천대받고 학살당했다고 떠드는 점령국이, 그런 고난에서 남을 천대하고 학살하는 기술 말고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그 장벽 때문에 노을을 볼 수 없게 됐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조금은, 장벽이 실감났습니다. 장벽이란 그런 것이군요. 노을마저 막는 것.

당신의 시도 그렇지만 특히 산문을 읽어보면 당신이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칠 때면 광야로 나가 바위 위에 눕는다는 구절도 생각나네요. 이제 당신은 아무리 지쳐도 광야로 나갈 수가 없겠군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이 창문을 열고 단 한그루 아몬드나무의 꽃잎을 만져보았다는 답장을 받고, 나는 여기에 온갖 꽃이 만발했다고 자랑한 이전 편지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말에 꽃이 서로 다투어 벌어지는 모양을 ‘폭죽 터지듯 피어난다’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금 실제로 뭔가 터지는 것 같습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바람 불 때마다 위로 솟구치며 흩날리는 꽃잎들이, 폭발음 같습니다. 꽃잎들이 소리의 파편이 되어 내게 들립니다. 봄새가 웁니다. 저 새는 늦은 봄에, 그리고 주로 밤에 슬프게 웁니다. 그러나 내게는 새가 온 힘을 다해 어둠에 구멍을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새가 공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소리로 울 때마다 어둠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하얀 이면이 보입니다. 내게 흩날리는 꽃잎이 들리고, 새 울음소리가 보입니다. 세상이 예전 같지 않네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네요.

추신: 당신의 글을 실은 인터넷잡지사에서 원고료를 보냈다고 합니다.

 

옛날에

돼지 한마리가 토끼마을에 가서 택시를 탔어. 택시는 새로 지어진 멋들어진 건물을 지나쳤어. 돼지가 묻기도 전에 운전사는 친절하게, 그 건물 이름이 토끼영웅의 이름을 딴 거라고 설명해주었어. 그리고 영웅의 이름이 안 좋다고 투덜거리는 거야. 성씨도 어머니 성까지 붙여 잡다하게 만드는 시대에 이름이 좋고 나쁜 게 어디 있겠느냐며 돼지는 껄껄 웃었어. 운전사는 양해를 구하고는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워물더니 털어놓았어.

“어차피 주행거리가 꽤 되니 말씀드리지요. 저는 그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려요. 아마 그 토끼는 이 동네 나타나면 몰매 맞을걸요? 자기가 영웅된 거 말고 그 토끼가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하나 있긴 있지요. 자기 동네에 도로 낸 것. 차라리 우리가 다른 편을 들었다면 나을 뻔했어요.”

“영웅의 경쟁자 토끼요?”

돼지는 고지식하게 물었어. 운전사는 담배연기를 내뿜고 담담히 말했어.

“검은토끼요.”

“네?”

돼지는 어이가 없었어. 왜냐하면 그 흰토끼들은 오랫동안 검은토끼들의 횡포에 시달리다가 영웅의 지도 아래 용감히 싸워 가까스로 숨통을 텄거든.

“우리 동네가 검은토끼 편을 들었더라면, 검은토끼와 영웅 측이 서로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우리에게 더 많은 이득을 주었을 거예요. 우리는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흰토끼영웅은 다른 동네에서 나와봤자 소용없어요. 우리 동네에서 나와야 해요. 다음부터 우리는 우리 동네 본토박이만 믿을 거예요.”

“실망스럽군요! 당신들이 맨몸으로 검은토끼들의 군홧발과 쇠사슬, 회칼에 맞설 때 나는 깊이 감동받았어요. 그런데 그게 자기 동네 이득을 위해서였다구요? 그렇다면 자기 이득 때문에 당신들을 짓밟은 검은토끼들하고 뭐가 다릅니까? 할 수가 없어서 못할 뿐이지 당신들도 할 수만 있다면 남을 얼마든지 짓밟겠네요. 내 못 들은 걸로 하지요. 필시 당신은 예외적인 경우일 게요. 나는 당신들을 믿어요. 왜냐하면 당신들은 약자고, 강자가 나쁜데 약자까지 이상하다면 도무지 말이 안되기 때문이오.”

돼지가 근엄하게 말했어. 운전사는 한숨과 함께 대꾸했어.

“그래도 우리 동네하고 옆 동네는 영판 다른걸요.”

돼지는 입술을 비죽이며 한껏 고개를 저었어.

“도대체 여긴 왜 이래요? 산보삼아 넘기 좋은 언덕이라도 하나 있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라도 있으면 그 이쪽저쪽이 죄다 원수지간이요, 동네끼리 패싸움에 골목마다 골목다툼, 신물나지도 않아요? 같은 골목 안에서 번지수끼리 이득이 갈리면 번지수끼리 싸울 거요? 같은 번지수 안에서 또 홋수끼리 이득이 갈리면요?”

“희한하게 외부인들은 정치이야기만 해요. 자기 마을에서도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한테 충고할 때는 자기가 우리 영웅 입장이 되어 영웅처럼 말한다니까요. 아니 검은토끼들하고 아주 비슷하게 말해요. 검은토끼들도 늑대들한테 지배당할 때 우리가 뭉쳐야 한다고 말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늑대들도 힘을 합쳐 사자한테 대항하자고 말했죠. 사자들도 어떤 사자들은 우리한테 늑대에게 저항하라고 부추기고 다른 사자들은 늑대들을 부드럽게 달래려면 토끼들은 잠자코 엎드려 있어야 한다고…… 손님, 손님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라면 우선……”

돼지는 말을 잇지 못했어. 왜냐하면 자기가 토끼라면 이민 갈 것 같았거든. 운전사는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어.

“제가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돼지는 몇시인지 알면서도 손목시계로 확인하며 “그러시든지” 하고 대답을 흘렸어. 토끼 운전사는 이야기를 시작했어.

옛날에

숲속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집에서 벌들이 행복하게 살았대요. 그런데 어느날 인간들이 숲을 불태워 마을을 세우고 밭을 개간해나가기 시작하니, 나무와 꽃들이 줄어들어 벌들은 굶주리게 되었대요. 여왕벌이 불평하는 벌들을 다독였대요.

“한마리당 배급량을 반으로 줄여 나눠먹고 올해만 견딥시다. 내년에는 햇살이 쨍쨍 나서 꽃술마다 젖과 꿀이 흘러 우리가 부른 배를 두드리며 격양가를 부르리오.”

그러나 다음해에 숲은 더욱 줄어들었대요.

“한해만 더 참읍시다. 배급량을 또 반으로 줄여 만방에 우리의 저력을 보여줍시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숲이 줄어들어 벌들의 배급량은 또 반으로 줄었대요. 그 다음해에도 마찬가지였대요. 그런 식으로 7년이 지나니 배급이 일절 끊겨 벌들은 벌집의 밀랍 벽을 뜯어먹고, 이슬 먹고 솔잎도 맛보고, 그러다가 도가 트든지 아니면 굶어죽어갔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간이 와서 연기를 피우고 작대기로 벌집을 들쑤셨대요. 벌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력을 다해 날아올라 인간을 공격했대요. 뜻밖에 벌들의 저항이 거세자 인간은 도망갔으나 다음날 더 많은 장비를 갖고 들이닥쳤대요. 이번에도 벌들은 인간의 콧잔등에 벌침을 빽빽이 박아주긴 했지만 기진맥진했대요.

“내일 인간이 더 많은 장비를 갖고 쳐들어오면,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여왕벌이 눈시울을 적시며 말했대요.

“여러분들의 수고와 희생을 생각하매 짐의 가슴이 찢어지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포기하면 조상을 뵐 낯이 없지 않겠소? 우리에게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세상에 둘도 없는 우리의 보금자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은 없소.”

벌들은 수군거렸대요.

“그래, 둘도 없는 벌집에서 우리가 행복하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복하다는 단 한마디밖에는 할 수가 없잖아. 말이 많아서 ‘덜’ 행복하다든지 ‘조금’ 행복하다고 수식어를 붙인 벌들, 혀가 짧아 행복을 잘못 발음한 벌들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잖아. 먹을 것을 달라고 입을 오물거리는 애벌레들도 그 작은 입 모양은 ‘행복’‘행복’이고, 개똥이 굴러가는데 느닷없이 우리 눈에서 행복의 눈물이 흐르고, 그 눈물이 지나치게 짠 것 같아서 얼른 침 섞고, 행복한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우면 너무나 행복해서 이대로 영영 눈을 뜨고 싶지가 않잖아.”

여왕벌은 침착하게 말했대요.

“서로 존중하고 합의를 중시한다는 큰 짐승들이 작은 짐승들은 얼마나 무자비하게 잡아먹소? 우리 같은 작은 짐승들을 짐승만도 못하게 볶고 찌고 난도질하여 비계는 쓰레기통에 버린 덕분에, 그들은 자기들끼리는 격식을 차릴 수 있는 것이오. 그들이 남녀노소 차별 없이 다함께 팝콘을 먹는 선거축제와 우는 노인 떡 주고 바람난 여편네도 신사적으로 북어 주는 복지를 구가하는 한, 우리는 우리끼리 절실하고도 기본적인 삼강오륜조차 지킬 여유가 없소. 천지가 뒤집어져 음지가 양지 되고 가장 작은 우리가 세계 최강으로 등극하는 그날이 오면, 참았던 양심과 품위를 유감없이 발휘하리다.”

벌들은 여전히 수군거렸대요.

“오, 그런 날! 그런데 지금은 어쩌고? 그때가 되면 다 괜찮아진다고 관자놀이에 드릴이 드르르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은, 정수리에 드라이버가 박혀 뇌를 휘저으며 삑삑 돌아가는 것 같은 당장 이 순간도 괜찮은 걸까?”

 

칼릴라가 문득 이야기를 멈추고 귀를 쫑긋거렸습니다. 딤나도 코를 치켜들어 바람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또 시작이군.”

“또 시작이야.”

두마리 재칼은 이쪽을 쳐다보았습니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3 서편에서 나서 동편까지 번쩍였습니다.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았습니다.4 산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5 땅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6 가장 아름다운 형상을 가진 이들7만이 아니라 가장 추한 형상을 가진 이들도,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만이 아니라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들도, 슬기로운 자들만이 아니라 미련한 자들도, 충성하고 효도하고 공경하고 본분을 지키고 우애를 다진 자들만이 아니라 역적질하고 불효하고 대들고 시기하고 배신한 자들도, 집주인만이 아니라 도둑도, 거짓말쟁이도 사랑이 식은 자8도 모두모두 허공에 떠서 허우적거렸습니다.

 

받는 이 오늘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은 서쪽 문인

제목 긴급상황입니다.

이른 아침에 전화를 걸 수가 없어서 또 편지를 보냅니다. 당신이 일어나자마자 이 두 통의 편지를 읽기 바랍니다. 여기 시간으로는 은행 마감이 두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은행에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당신에게 보낸 원고료가 ‘테러자금’이라는 혐의를 받은 이유는, 당신이 급진정당이 집권한 서쪽자치정부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자치정부가 테러리스트이므로 정부와 관계가 있는 당신도 테러리스트라는 말이지요. 저야 물론 이것이 괜한 트집임을 잘 압니다. 하지만 당신의 원고료를 국가(!)에 몰수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당신이 자치정부와 관계가 없다는 해명을 두시간 안에 해야만 합니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공무원이 아니며, 급진정당 당원도 아니지요. 그래도 당신의 사회활동 중에 자치정부와 간접적으로라도 관계된 것이 있는지요? 혹시 그렇다면 그건 순수한 문화활동이라는 해명서를 바로 보내주세요. 또 한가지. 당신은 5개월 동안이나 받아야 할 원고료를 받지 못했으면서 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습니까? 이 모든 일이 참으로 미안합니다.

 

검색   서쪽 문인

출처   6개월 전 인터넷잡지

 

거기의 기억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기 전 서쪽 문인

 

(…) 언젠가 내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새삼 깨닫는다. 오래전 무명화가들은 기교가 부족했겠지만, 그래서 그림을 이렇게 터무니없이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우리와 다른 세상을 보았으며, 내 생각에는 그 세상이 우리가 보는 현실보다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깝다. 나무와 바위, 화병과 닭, 그림을 보는 나와 그림의 구분조차 일시적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다. 하나에서 분화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잠시 존재하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거기 박물관에 같이 갔던 친구가 한 이야기를 나는 기억한다. 여백을 잘 보라고, 여백 또한 그림의 주인공이라고. 그때처럼 나는 지금 다시 도록에 실린 그림들을 주의깊게 바라본다. 형체가 뒤로 물러나고 여백이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서랍에서 꺼내 책상에 올려놓은, 여기 사막에 묻혀버린 폐허에 남아 있던 그림의 사진을 바라본다. 역시 채색된 흐릿한 형태가 물러나고 깨진 타일이, 아니 여백이 다가온다. 무명화가들은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만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영원히 질주할 것만 같은 사나운 현대도 언젠가는 끝난다. 갈 데까지 가서 멈춘다. 현대 이전의 인류가 그랬듯이, 현대 이후의 인류도 이 단선적인 현실 너머 진실을 볼 것이다.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사슴떼가 제 발굽보다 작은 산봉우리를 뚜벅뚜벅 넘어가고, 사슴보다 큰 두마리의 새가 엇갈려 서서 고개 돌려 서로 바라보며, 돌돌 말릴 정도로 심하게 휘어진 소나무 옆에 나무보다 작은 건물이 기우뚱하고, 포도나무에 석류와 버섯이 함께 열렸으며, 제 몸보다 큰 술병을 들고 가면서 자칫 넘어질 것도 같은 인간들은 눈 코 입이 없는, 이 상태가 아마도 우리의 원래 모습일 것이다. 이 그림은 내게 거기서 하룻밤 머물렀던 작은 사원을 연상시킨다. 그 사원의 지붕 위로 나무가 고개 숙여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거기서 사원에 두번 가보았는데 두번 다 나무가 사원 지붕보다 높았다. 그 사원들은 누구도 이기려 하지 않고,  압도하지 않았다.9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편안해진다. 거기에도 나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

 

물살에 쓸려가듯, 바람에 날려가듯, 달밤에 체조하듯, 뛰놀듯, 춤추듯, 칼릴라와 딤나는 허우적거렸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딘가를 디디긴 디뎠는데, 앞으로 달려갈 듯, 뒤로 튈 듯, 옆으로 넘어질 듯, 고꾸라질 듯, 뛰어오를 듯 네 발을 조심스럽게 달리 디디고 이쪽을 쳐다보았습니다. 털이 올올이 서고 귀가 예민하게 쫑긋거렸습니다. 잠잠했습니다. 딤나의 이빨 사이로 늘어진 붉고 긴 혀가 거친 숨결에 맞추어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감춘 칼릴라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딤나가 고개 들어 코를 실룩대다가 난데없이 칼릴라의 엉덩이에 코를 갖다댔습니다. 칼릴라는 기겁하여 엉덩이를 틀면서 딤나의 목덜미를 덥석 물어, 털 속에서 고물대는 이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켁켁 기침하고 퉤퉤 침을 뱉었습니다. 딤나는 발랑 뒤집어져 등을 비비적댔습니다. 홀쭉한 배가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칼릴라는 몸을 부르르 떨고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옛날에

벌들이 계속 술렁이자 여왕벌은 걱정이 됐대요.

“아뿔싸! 철없는 아이들이 몸이 무거운 이 엄마만 두고 뿔뿔이 흩어지겠구나. 내가 배 아파 낳아주지 않고 사랑과 은혜로 길러주지 않고, 가르치고 다듬어서 벌 꼴로 만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들이 지금 대가리를 쳐들고 따지지도 못할뿐더러 장차 비바람 몰아치는 한데서 고생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 꼴 못 봐! 다 내 잘못이야. 나 없이 이 아이들이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고, 벌집도 남아 있어서 뭘 해. 내가 곧 벌집이고 이 아이들의 총합의 무한제곱인데. 내가 끝까지 거두어야 해.”

여왕벌은 만일을 위해 인간으로부터 훔쳐둔 불씨로 벌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말았대요. 여왕벌과 함께 벌들은 모조리 타죽고 말았대에요. 그런데 손님, 다 왔군요. 잔돈은 손님 가지세요.

토끼 운전사는 택시를 세웠고 돼지는 내렸어. 돼지는 택시문을 닫으면서 운전사의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했지.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한심하고 서민은 서민대로 탈선했으니 당신들은 아직도 멀었지만, 내 이해는 하오. 약자는 약자 입장에서 이해해줘야지 우리하고 똑같이 생각하면 안되죠. 아무렴요. 이것만 기억하시오. 당신들은 약자이므로 백년이 걸리든 천년이 걸리든 옳기 싫어도 결국은 옳을 수밖에 없으며,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운명이오. 나는 마음으로나마 당신들을 응원하기 위해 가족과 외출할 때는 꼭 여기 토산품점에서 산 토끼모자를……”

그런데 말이 길어지다 보니 돼지는 닫히는 택시문에 주둥이가 끼고 말았어. 돼지는 주둥이를 감싸쥐고 엉덩방아를 찧었지. 가엾은 돼지는 아래턱과 위턱이 아예 어긋나버렸어.

칼릴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땅속을 달려가는 것 같아. 터널 벽에 형광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잖아. 지하철 속도가 빨라질수록 빛도 더욱 빨리 번쩍이지. 핏피피 피핏, 핏피피 피핏. 하나로 연결된 긴 빛이 되기도 하고, 나는 가만히 있는데 빛이 뒤로 빨려가는 듯하기도 하고. 그러다 지하철이 느려지면 빛이 핏 핏 핏 끊기고 내가 뒤로 밀려가는 것 같단 말이야. 지하철이 다음 역에 도착했다가 출발하면 다시……”

“핏피피 피핏.”

딤나가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어둠이 시작되지. 주로 어둠이고, 빛은 짧게 어둠을 갈라놓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나 앞으로 잘될 거라고 믿어서 사는 거 아냐. 잘되는 걸 별로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믿어. 왜 그래야 하는지도 잘은 모르겠지만, 순간적인 빛과 빛 사이 어둠을 숨마저 꾹 참고 통과할 뿐이야. 어둠, 어둠, 어둠.”

칼릴라는 딤나를 가운데 두고 천천히 한바퀴 돌았습니다. 딤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데도 애써 미소지으며 말했습니다.

“잠깐만. 여기, 아니 여기, 아니 여기……”

딤나는 두리번거렸습니다. 반쯤 허물어진 성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칼릴라는 물론 딤나 또한 온몸의 털이 쭈뼛 섰으나, 그럴수록 단호히 물었습니다.

“어떻게 너는 이토록 자연스러울 수가 있지? 응? 우리 앞에 엄연히 있는 이 벽이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안 보이는 것처럼, 보고도 못 본 것처럼.”

“내가? 설마!”

칼릴라는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러나 몸이 뒤로 가지 않았습니다. 성벽에 붙어 있는 빛바랜 포스터에서 손가락 하나가 칼릴라를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 밑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를 원한다!’

“버버 버버버……”

칼릴라는 말문마저 막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다가, 울부짖으며 펄쩍 뛰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뭔가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고 깨갱 하고 말았습니다. 칼릴라는 돌아서서 납작 엎드려 눈을 가리고 우울하게 중얼거렸습니다.

“너는 저걸 눈을 부라리고 쳐다봐야 보이고 굳이 말해야 생각나니?”

“우리가 남들하고 같아? 안 같잖아, 독특하잖아. 우리는 저기에 막히고, 저것 이상은 말 못하고 생각도 하나도 안 나고, 상상도 안되고 무의식도 발동 안하고, 잠꼬대도 술주정도 미친 소리도 저 한도를 넘어서는 안 나오고, 의사가 망치로 건드려도 반응 없던 무릎이 의사가 벽의 비읍자만 발음하면 자동적으로 앞발차기를 하잖아. 내가……”

딤나는 고개를 크게 내두르고 무너진 벽돌더미를 위험스럽게 타올라갔습니다.

“내 발밑의 한점 땅을 지키려고 했을 때, 밀려나고 밀려나서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져들어야 할 지경이었을 때, 내 몸이 있으므로 딛고 설 땅을 스스로 창조해야만 했을 때, 내 기울어진 지붕에 기어올라갔을 때, 기울어진 지붕을 내 가진 모든 것인 몸뚱어리로 덮었을 때, 온 세상이 훤히 보였지.”

딤나는 앞발 하나 접어서 옆구리에 붙이고 꼬리는 수평으로 뻗어, 보이지도 않는 성벽 바깥을 내다보는 체하며 뇌까렸습니다. 칼릴라도 뒤를 힐끗 돌아보았습니다.

“훤히?”

“그들은 나더러 내 지붕을 지키려면 앞의 성벽부터 지키라고 했어. 그 성벽을 지키려면 그 너머 성벽부터 지키라고 했어. 또 그 성벽을 지키려면 그 너머 성벽부터 지키라고 했어. 또 그 너머 성벽부터 지키라고 했어. 여기, 여기, 여기……”

많이 무너지거나 조금 무너진 성벽들이 뚝, 뚝, 뚝 떨어져 내렸습니다. 칼릴라는 앞발로 머리를 감싸고 움칠움칠 떨었습니다. 딤나는 말을 이었습니다.

“지붕 위에서 나는 보았지. 기울어진 지붕들. 모두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인 몸뚱어리로 성벽을 지키러 갔기 때문에, 지붕 위는 텅 비어 있더군. 누구나 제 기울어진 지붕을 지키려면 온 세상을 지켜야 했어.”

“어떻게?”

칼릴라가 속삭였습니다.

“그래서 침략자가 나쁘다는 거지.”

딤나는 의연하게 말했으나 꼬리가 서서히 처졌습니다. 칼릴라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기왓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보낸 이 오늘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은 서쪽 문인

보낸 날짜 방금 전

받는 이 동쪽 친구

제목 Re: 긴급상황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자치정부와 관계가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사는 땅이 자치지구이고 그 정부는 자치지구의 정부이니, 관계 없을 도리가 없습니다. 자치정부와 관계가 없으려면 나는 달에 살아야 합니다. 지구상에는 이 땅 말고 우리를 받아주는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점 말고는 나는 자치정부와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공무원이 아니고, 소속된 단체도 없으며, 별로 사회활동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활동중에 정부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건 없습니다. 이 말이 뉴욕을 만족시킬지 모르겠군요. 점령국 군인들은 검문소에서 우리를 조사한다며 발가벗기다시피 합니다. 우리는 집에 가기 위해 발가벗고 서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뉴욕이 발가벗은 내 사진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보내주겠습니다. 부끄럽지만 어쩌겠습니까, 나는 가족과 함께 살아야 하는걸요.

이건 내 문제만이 아닙니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가장들이 지난 몇달 동안 수입이 없었습니다. 실업률 60퍼센트인 여기서는 정부의 지출이 그나마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인데, 몇달 전에 그 지출이 끊겼습니다. 공무원들은 파업중이며 일반 회사도 닫히고 상점도, 시장도 닫혔습니다. 외국에 돈 벌러 나간 사람들이 가족에게 송금해주는 달러조차 중간에서 차단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 고아, 노약자 들은 외국에서 오는 구호금, 허기를 때울 몇푼의 돈도 받지 못합니다. 나는 더이상 고향마을에 가지 않습니다. 가는 길에 검문소를 몇번이나 통과하기가 힘들어서만은 아닙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창백하고 거의 기아상태인 시골아이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점령국이 적어도 석달이나 넉달은 더 우리를 벌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립니다. 여기서 합법적인 정당, 그러나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당이 민주적인 선거에서 이겼다고 그들은 바로 내게,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우스꽝스러운 건, 내가 급진정당을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참지 못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헐뜯었습니다. 하지만 나도 다음 선거에서는 가장 급진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정당을 찍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일이년 전 한 외국 언론인이 인터뷰를 하자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내가 현대작가들이 지적인 유희에 빠졌다고 말했더니, 그가 대꾸하기를 점령당해 치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여기 상황이 글을 쓰기에는 더 좋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내가 답했습니다. 오, 그건 위험한 생각이오! 시립문화쎈터에 내 작업실이 있었는데, 어느날 아침에 가보니 작업실이 사라졌습니다. 건물 전체와 함께 말입니다. 점령군이 예고도 없이 밤새 시립문화쎈터를 무너뜨려버린 것입니다. 작업실 벽에 붙여놓았던 가족사진을 나는 무너진 벽돌더미 속에서 찾았습니다. 쓰던 원고와 평생 모아두었던 자료는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유를 물어볼 수조차 없습니다. 매사가 그들의 ‘보안사항’이며 보안사항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작가인데, 점령군은 나를 다만 피점령민이 되게 만듭니다. 오로지 점령, 점령, 점령만 생각하게 합니다. 점령당한 모든 이들을 의견도 입장 차이도 없는, 단 하나의 무리로 만들어버립니다.

 

해와 달이, 밤과 낮이, 공기와 흙이, 민물과 바닷물이 뒤섞였습니다. 축복받은 무화과나무10와 올리브나무, 축복받지 못한 무화과나무와 올리브나무, 벼락 맞은 대추나무, 대추나무에 걸린 연, 마당에 널린 고추, 빨랫줄에 걸린 무말랭이, 미닫이문, 여닫이 삼단장, 꼭꼭 싸인 금가락지, 구리, 주석, 탄소, 전자, 모두모두 시원하게, 통쾌하고 호탕하게, 제자리를 박차고 튀어나왔습니다. 그리고 크기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깔끔한 차림새로 보나, 똑같은 입자가 되어 한없이 퍼져나갔습니다. 다시 보면 핏 사라지는 입자마저 아닌 것들이, 규칙 없이 무질서하게 또 규칙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떠돌았습니다. 빛이 없는데 모두 반짝이고 어둡지도 않은데 윤곽이 흐릿했습니다.

칼릴라와 딤나는 어딘가를 디디긴 디뎠습니다. 칼릴라는 곧추서서 꼬리도 위로 세우고, 고개를 틀어 뒷목에 주둥이를 걸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딤나는 뒷발보다 높은 데를 디뎠으나 구부리지 않고 뻣뻣하게 뻗은 앞발이 약간 짧아진 것처럼 보이는데, 있지도 않은 갈기를 부스스 늘어뜨리고 입을 약간 벌린 채 이쪽을 곁눈질했습니다. 잠잠했습니다. 칼릴라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중얼거렸습니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쌍쌍이…… 무섭지도 않을까!”

“내가 왜 이러지? 다리가 후들거리고 부끄럽지? 내 평생 남에게 신세 안 지고 모진 짓 안한다는 신조 하나로 살아왔건만.”

딤나가 고개를 떨구고 뇌까렸습니다. 칼릴라는 중얼거렸습니다.

“꼬리 저어 깊은 물속으로 내려가는 저 잉어, 무섭지도 않을까!”

“발단 다음에 전개, 전개 다음에 위기, 위기 다음에 대단원. 다른 말로 기승전결.”

딤나는 뇌까렸습니다. 칼릴라가 흥얼댔습니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는 저 멧돼지, 무섭지도 않을까!”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쌓아둔 흰쌀이 새카맣게 타버리는…… 고소한 냄새!”

딤나가 검고 촉촉한 코를 실룩거렸습니다. 칼릴라는 흥얼댔습니다.

“머리만 남아 히죽거리는 저 석상, 무섭지도 않을까!”

“바둑아!”

딤나가 발치의 기왓장 하나 골똘히 쳐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집 안에 지린내 좀 나면 어떻다고, 너를 남에게 줘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너는 내 손등을 그리도 다정하게 핥아주었건만.”

딤나는 엎드려 기왓장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가, 살짝 핥아보고는 오만상을 찌푸렸습니다.

“어머, 저……”

칼릴라가 홱 고개를 돌렸습니다. 딤나가 기왓장을 팽개치고 제 머리를 끌어안으며 깨갱댔습니다.

“내가 이런 거 아닌데! 난 남에게 신세지려야 질 수도 없고 모진 짓 하려야 할 수도 없었는데!”

칼릴라가 한숨을 내쉬고 꼬리로 딤나를 톡톡 건드렸습니다.

“저기, 아까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큰일났어.”

“제발! 나를 너무 믿지 마라.”

딤나가 이를 부드득 갈았습니다.

“알았어.”

칼릴라가 꼬리를 거두자 딤나가 벌떡 일어나서 물었습니다.

“뭔데?”

“너와 내가 서 있으라고 명령받은 그 여기가 여기 맞아? 이쪽으로도……”

두마리 재칼은 고개를 숙여 이쪽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이쪽으로 점점 끌려와서 자칫 빨려들 뻔했습니다. 둘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추스르고 반대로 이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쪽으로도……”

이번엔 정말 빨려들 뻔했습니다. 둘은 여섯 방향의 이쪽으로 빨려들 뻔하여 비틀거렸습니다. 그리고 한마리는 이쪽, 다른 한마리는 또다른 이쪽을 턱짓하며 동시에 외쳤습니다.

“여기!”

“여기!”

곱게 물든 은행잎 하나 팔랑거리며 떨어졌습니다. 둘은 각자 반대로 고개를 돌려 은행잎을 바라보았습니다. 은행잎은 둘 사이에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둘은 은행잎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흐물흐물 출렁출렁 넘실넘실, 문들이 첩첩이 들어가고 또 첩첩이 나오고, 들어가는데 나오고 나오는데 들어가고, 가면 오고 오면 가고, 올라가면 내려오고 내려가면 올라오고, 길들이 비틀리고 꺾어지고 팽글팽글 꼬였는데, 그 여기가 어디라는 거야?”

칼릴라가 배를 깔고 누워 몸을 동그랗게 말며 말했습니다.

“이 안쪽. 너는 왜 바깥에 나가 있니, 무책임하게시리!”

딤나가 은행잎을 왼쪽 앞발로 짚으며 말했습니다. 그 순간 부서지고 깨진 기왓장들이 우르르 은행잎 너머 칼릴라 쪽으로 밀려갔습니다.

“앗, 실수! 이쪽이 안이구나.”

딤나가 은행잎을 건너뛰어 칼릴라 쪽으로 가서 오른쪽 앞발로 은행잎을 짚었습니다. 그 순간 부서지고 깨진 기왓장들이 우르르 아무도 없는 쪽으로 밀려갔습니다.

“거봐, 이쪽이 안이고 네가 바깥에 나가 있는 거야.”

딤나는 도로 은행잎을 건너뛰었습니다. 그 순간 부서지고 깨진 기왓장들이 우르르 칼릴라 쪽으로 밀려갔습니다. 딤나는 기왓장들을 잡으려고 허둥댔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기왓장 한장 있을 수 없는 그쪽이 안이라구? 내가 보기에는 네가 바깥에 나가 있구만.”

칼릴라가 인상쓰며 말했습니다. 그 순간 기왓장이 딤나 쪽으로 와르르 밀려갔습니다. 칼릴라도 기왓장들을 잡으려고 허둥댔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딤나가 의기양양하게 외쳤습니다.

“역시 다들 이 안으로 들어오잖아!”

그러자 기왓장은 와르르 칼릴라 쪽으로 밀려갔습니다. 딤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방금 넌 치명적 오류를 범했어! 둘 다 바깥이면 안은 어디에 있니? 우리가 일신과 가문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화살이 되어, 밤하늘을 가르는 혜성처럼 날아가 불의의 정중앙에 깊숙이 꽂혀, 파르르 떨어 지킨 안쪽. 감기바이러스까지 먼지 털어 가꾼, 아깝고 애틋하고 어여쁜 안쪽. 가슴 벅차고 대지에 새끼발가락만 닿아도 온몸에 찌릿찌릿 힘이 솟구치는 우리의 안쪽!”

딤나의 뜨거운 콧김에 은행잎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칼릴라도 가슴을 펴며 되뇌었습니다.

“대지에!”

“우리가 이 안에서 얼마나 보람찼는데! 우리가……”

갑자기 딤나가 돌아앉아 헛구역질을 해댔습니다. 와르르 기왓장이 칼릴라 쪽으로 밀려갔으며 칼릴라는 신음했습니다.

“오, 저 나이에!”

“우리가 바깥에 있지 않고 이 안에 있어서 얼마나 긍지……”

딤나는 말을 이으려 했으나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래? 무섭게.”

칼릴라가 울먹였습니다. 딤나가 비장하게 되뇌었습니다.

“우리가 이 안에서 가증스럽고 역겨운 걸 참느라고 얼마나 죽을 뻔했는데!”

어디선가 기왓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얼른 나와.”

칼릴라가 울먹였습니다. 딤나가 얼굴을 훔치고 돌아서서 칼릴라를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일단 안이 있어야 바깥으로도 나가지! 진저리가 나면 날수록, 구역질이 치밀면 치밀수록, 우리는 이 안을 지켜야 맘놓고 나갈 수도 있게 되는 거야. 나가려면, 나가기 위해서, 나가야만 한다면, 우리는 우선 이 안을 지켜야 해.”

칼릴라가 눈동자를 둥글게 굴렸습니다.

“글쎄, 그 바깥만 지킨다고 바깥이 지켜지겠느냐구. 이건 순전히……”

그러자 기왓장이 와르르 딤나 쪽으로 밀려갔으며 딤나가 말했습니다.

“필연이야, 필연. 바깥이 있는 한 안이 있고, 안이 있으면 바깥도 있지. 우리가 이를 악물고 이 안쪽에 있어야지만 바깥도 헤매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서, 야금야금, 꾸준히, 어느날 갑자기 바깥이 다 안이 되고 안이 곧 바깥이 되는……”

기왓장이 와르르 와르르 밀려다녔습니다.

“다 박살나버리겠어!”

칼릴라가 울먹였으나 딤나는 손가락을 하나 거꾸로 세워 제 발치를 찌르며 선언했습니다.

“불가피한, 안!”

그때 산들바람 불어와 은행잎이 날려갔습니다. 두마리 재칼은 팔랑거리며 멀어져가는 은행잎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섭지도 않을까!”

칼릴라가 흥얼댔습니다. 어디선가 기왓장이 우르르 쏟아져 둘씩, 셋씩, 또는 여럿이 한꺼번에 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받는 이 인터넷잡지 경리담당

제목 해명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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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서쪽자치지구’라고 씌어 있는 주소는 그 돈이 송금된 서쪽은행의 주소입니다. 은행의 주소 때문에 그 은행에 계좌를 둔 손님이 테러리스트라니, 이게 지금 말이나 됩니까? 주소가 문제라면 손님 이전에 그 주소지에 있는 서쪽은행과 거기 자회사를 둔 뉴욕은행 자신이 테러리스트 아닙니까? 저는 정말 더이상은 해명서에 쓸 말이 없습니다. 서쪽자치지구에 있는 은행의 주소를 서쪽자치지구라고 적지, 그럼 뭐라고 적어야 하겠습니까? 서쪽자치지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테러리스트라면 거기 개, 고양이, 돌멩이 다 테러리스트겠네요? 이제 저도, 원고료를 받을 문인도 해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 돈이 몰수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책이 있습니까?

 

“말해주지. 아아아.”

칼릴라가 말했습니다.

“아아아?”

딤나가 따라했습니다. 칼릴라가 다시 말했습니다.

“아아아.”

“아아아?”

“후유! 아아아.”

“후유? 아아아?”

“봐, 말해줘봤자 못 알아듣잖아. 셋 다 다른 겹, 다른 층, 다른 차원이었는데. 가사만 같다고 같은 게 아니라고 내가 백한번은 말했지?”

“다르다…… 치자. 그런데 나는 너한테,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말이냐고 물었거든?”

“가사만 갖고는 도저히 말이 안되니까 뭔가 다른 것, 차이랄까 변주랄까 염불이랄까 타령이랄까, 하여튼 그런 거라도 해보는 거라고 백열두번은 말했잖아. 아무래도 안되겠어. 너랑 끝이야!”

칼릴라는 냉정히 외면했습니다.

“이제?”

딤나가 피식 웃었습니다. 칼릴라는 들은 척도 안했습니다.  

“너 남한테도 이러니? 나한테만 왜 이래?”

불쌍하게도 딤나의 턱이 달달 떨렸습니다. 칼릴라는 쓸쓸히 뇌까렸습니다.

“다 소용없어. 나는 앞으로도 너랑 한 직장에 근무하는 하나밖에 없는 동료이고, 스물네시간 옆구리를 붙이고 같이 서 있는 단짝이고, 네가 화장실에서 휴지가 떨어졌다고 소리 지를 때 휴지를 갖다주겠지만, 내가 좋아서 이런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줘.”

“끝이 아니네, 끝나기 전하고 똑같네.”

딤나가 방긋 웃었습니다.

“이해를 못하는구나. 이게 끝이야.”

칼릴라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습니다.

“싫어! 억지로 하는 거 필요 없어, 좋아서 해!”

딤나가 두 앞발로 양 볼을 누르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칼릴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지겹다! 너, 너랑 정반대로 주장하는 여우들한테 한번 가봐. 너의 진짜 동료는 그들이야. 둘 다 억지 쓰고 뻔뻔스럽기는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그 여우들은 자기들만이 아니라 남들도 모조리, 안에도 밖에도, 어디에도 있을 이유와 의미가 없다고 극구 주장하는데, 그렇다고 자기들이 먼저 사라져버릴 것 같지 않더라구. 지금 당장 자기가 있는 자리에 있는데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더라구. 내가 가본 중에 가장 재수없는 잔치였어.”

“또 어디 갔다 와서 나한테 화풀이야.” 하고 딤나가 희미하게 웅얼거리는데 칼릴라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옛날에

여우들이 큰맘 먹고 잔치를 열어 호랑이들을 초대했어. 호랑이들은 포식하고 샹들리에 늘어진 근사한 극장에 가서 특석에 앉았어. 불이 꺼지자 무대에 여우 한마리가 등장해서 달을 보며 우오오오 외롭게 울었어. 호랑이들은 감탄했어.

“인상적이군.”

“매우 흥미로워.”

그런데 사회자가 쑥스러운 얼굴로 나와 그건 오프닝 공연이었다고 공손히 알렸어. 그리고 구미호들을 소개했어. 흰 소복을 입고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구미호들이 떼로 나와 재주넘기를 하며 아홉가지로 둔갑하는 재주를 보였어. 호랑이들은 감탄했어.

“매우 인상적이야.”

“흥미롭군.”

그런데 사회자가 나와 그것도 역시 오프닝 공연이었다고 쑥스럽게 말했어. 그리고 드디어 본공연으로 무국적, 무종족, 무정부, 무의미의 세계적인 예술을 소개한다며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고함을 질렀어. 호피무늬 조끼를 입은 소수정예 여우들이 거들먹거리며 나와서 매섭게 객석을 노려보았어. 그리고 어흐흥 어흐흥 호랑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어.

“이것 참, 같이 발작해야 맛인 노래를 꼼짝도 못하고 앉아서 감상하려니 고역이네.”

호랑이들은 표정이 굳었어. 무대 위 여우들은 매우 만족스러웠어.

“음, 호랑이들이 얼이 빠졌군. 당연히 놀랐겠지. 이런 촌구석에도 우리 같은 세계 첨단의 예술가가 있다는 걸 이 기회에 확실히 각인시켜야 돼.”

여우들은 어흐흥 어흐흥 목이 터지도록 포효했어.

“귀 아파 죽겠네. 저것들을 확 잡아먹어버릴까.”

호랑이들은 갈등했으나 체신 때문에 끝까지 참고 들었어. 그리고 극장을 나가면서 한 여우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방명록에 갈겨썼어. ‘인상적이고 매우 흥미로움.’

 

보낸 이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아 서쪽에도 있을 수 없게 된 문인

보낸 날짜 방금 전

제목 Re: 친구로부터

삭제하십시오, 그래야만 한다면.

-이 방금 전 동서남북을 헷갈리는 친구 wrote:

아이디어가 하나 있습니다. 사실 이건 아이디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생각하자마자 잊어버리고 싶은 기분 나쁜 잡념입니다. 하지만 들어주십시오. 여기 은행직원이 뉴욕은행으로부터 암시받은 것, 인터넷잡지 경리담당이 어딘가 물어 알아낸 것, 멍청히 앉아 있는 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것, 이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셋은 여러차례 전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뉴욕과 점령국은 ‘서쪽자치지구’라는 말 자체가 싫은 겁니다. 서쪽자치정부가 통치하는 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은행주소를 거리 이름까지만 쓰고, 서쪽자치지구라는 말은 뺍시다. 그 말이 없어도 은행코드가 있으므로 돈을 보내고 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주소를 제출하라는 요구도 받았습니다. 내가 아는 당신의 주소에는 물론 ‘서쪽자치지구’라는 말이 맨끝에 붙어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내가 그 말을 빼고 당신의 주소를 제출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당신의 원고료가 ‘몰수’당하면 우리로서도 막막합니다. 여기 은행에 따져봐야 소용없을 테고, 그렇다고 우리가 뉴욕은행에 따지겠습니까, 서쪽자치지구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거기 있음을 부인하는 서쪽은행에 따지겠습니까? 미국과 점령국의 모든 정책을 지지하는 우리 정부에 따지겠습니까, 미국이나 점령국에 따지겠습니까? 그 돈을 돌려받으려면 긴 시간과 복잡한 과정이 걸릴 거고, 아마 아무리 긴 시간과 복잡한 과정을 거쳐도 돌려받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다시 돈을 보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도 자학적인 사기를 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들이야말로 악랄한 사기꾼이지요. 그래도 제발 이해해주십시오. 여기서 보낸 돈이 가다 막힌 동쪽 태평양 건너 무시무시한 뉴욕이, 당신이 있는 거기서는 빼앗긴 서쪽, 바다에서 온 당신들이 바다로부터 쫓겨난 그 서쪽 아닙니까? 당신과 나는 둘 다 동쪽도 서쪽도 아니고, 그저 언제 몰수당할지 모를 위태로운 장소에 있을 뿐입니다.

 

딤나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정말 재수없구나! 정말…… 서러워. 나는 내 뾰족한 귀가 싫었어. 그런데 수십년 전에 죽은 세계적인 석학이 텔레비전에 나와 수십년 전에 한 강연을 되풀이하다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나를 어찌 보고는 무릎을 탁 치고 혀를 내두르는 거야. 그는 텔레비전 밖으로 손을 내밀어 내 귀를 만지작거리기까지 하면서 완벽하게 아름다운 귀라고 외국어로 단언했어. 그래도 나는 내 귀가 싫었어. 부채로도 쓸 만한 크고 두툼한 귀를 가진 그는, 내 주제에는 얄팍하고 뾰족한 귀나 어울린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나는 내 눈이 동태눈깔 같지 않아서 켕기고, 또 수입 동태가 자기 눈과 달리 또랑또랑하다고 칭찬하면 더 켕겼어. 나는 밋밋한 입술을 가리고 다녔는데, 때깔 좋은 개량 앵두가 내 입술이 개성있다고 위로하면 아예 꿰매고 싶었다니까. 나는 아무 말 못 들으면 불안하고 무슨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빴어. 이래도 저래도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지. 내가 말은 안했지만 하루에도 몇번씩 거울에 이마를 짓찧으며 이 변두리에 나를 낳아놓은 부모를 원망했다구. 그런데 우리는 어디의 변두리일까? 변두리 아닌 세계는 어디지? 따라잡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곱게 죽지도 못할 것 같은 세계, 그런데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자취 묘연한 그 세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찾다찾다 못 찾자 세계를 기어이 발명해버리고 만 가슴 저리는 사연을, 너 한번 들어볼래?”

“짧게”라는 칼릴라의 간곡한 부탁을 채 듣지도 않고 딤나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옛날에

땅 밑에서 한평생을 세계 연구에 바친 고매한 두꺼비 수도승이 있었어. 그에게 세계란 물론 밝고 보송보송한 땅 위였지. 어느날 수도승은 책으로 꽉 찬 서재에서 고민에 빠졌어.

“어렸을 때부터 나는 어려운 번역서들을 줄쳐 읽으며 내 영혼을 살찌웠다. 이런 위대한 역설을 생산했다는 이유만으로 땅 위의 온갖 죄악을 용서했으며, 육신에 스스로 독을 들이붓고 정신을 비틀어 오묘한 사상을 짜내는 네발동물에 내가 속해 있음만으로도 행복했다. 눈을 뜨면 눈에 보이는 캄캄한 무지와 가난이 어이없어 차라리 내 안의 알쏭달쏭 궤변과 대화하고, 눈을 감으면 여기에는 없으되 땅 위에는 분명히 있는 불립문자의 휘황한 빛 속에서 나는 뛰놀았다. 실제로 만난 것보다 내게는 더 친숙한 가공의 인물, 삭풍에 마른 덤불 우우 대는 벌판을 하염없이 헤매는 창백한 암소를 흠모하여 나는 이제껏 독신이 아닌가. 고국에서는 이미 잊혀진 몇세기 전 요설가들이 내게 직통으로 강림하여 아무때나 내 마음을 흙투성이 장화로 왕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요즘 새로 나오는 이 형편없는 번역들은 대체 뭐란 말이냐! 내게 벼락같은 영감을 준 상징과 반어로 점철된 심원한 문장, ‘폭력에 반대한다. 폭력만이 세계 어디서나 발생하고 있는 잔인한 평화를 지연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에 복종하는 힘에 항거하기 위해 비폭력을 시작한다’가 가격이 두배는 비싼 새 책에는 ‘폭력에 반대한다. 오직 폭력이 세계 어디서나 실현되어야 할 평화를 잔인하게 지연시킨다. 그러므로 진리에 복종하는 힘으로 비폭력적 저항을 시작한다’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문장으로 바뀌어 있지 않나. 이따위는 하다못해 이 땅 밑에도 쌔고 쌨어! 내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곱씹어 억지로 이해했던 그 추상적이고 난해한 문장들이, 실은 별로 유별나지 않다고? 창백한 암소가 내가 흠모했던 그 신비로운 암소가 아니라고? 내가 무릎꿇고 귀의했던 세계가 오해였다고? 그럴 리는 없어! 그거야말로 말도 안돼!”

수도승은 힘없이 책상에 엎어졌어. 마침 창밖으로 두꺼비 모녀들이 지나가며 떠들었어.

동생: 옛날에, 아니 지금 당장 미치겠어! 옆집이 복도에 재활용 쓰레기까지 쌓아놔. 내가 청약저축 오년 붓고, 수십번 청약 신청해서 내리 떨어지다 이년 만에 당첨되어, 건축기간 삼년을 기다려 십년 만에 그 임대아파트에 입주했잖아.

언니: 쯧쯧, 그게 수준이지. 우리 아파트도 재건축 허가가 난다는 말이 있는데, 재건축을 하면 단지 안에 임대아파트를 들여야 한다니 골치야. 내 말은 임대아파트를 짓지 말라는 게 아니라, 따로 지으라는 거지. 강제로 섞어놔봤자 일반주민하고 임대주민하고 융화가 안돼서 문제가 심각하다, 너?

동생: (발끈) 어느 산골짜기에 임대아파트를 따로 지으라는 거야? 그게 바로 집단이기주의지.

언니: (흥분)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중산층이 죽도록 일해서 중산층 됐지 강도짓 했니? 이 나라에서 노후대책이 아파트값 오르는 것밖에 더 있어? 자기 재산권을 지키는 건 생존본능이야! 너는 평생 임대아파트에 살래? 살래?

동생: 아이, 무슨 말을 못해.

엄마: 덱, 말이 씨가 된다는데. 네 동생이 평생 아파트 한칸 마련 못하면 어쩌니?

“가난도 자발적으로 선택했고 지병도 운동부족 탓이니 내 누구를 원망하랴마는, 이 적나라한 진담만은 감당이 안되는구나. 여기는 땅 밑도 위도 아니다. 나는 내 투기의 대상에 자신의 몸무게를 얹어놓았다. 땅은 뽀글거리는 숫자가 되어 사라졌다. 천장도 바닥도 벽도 시세판으로 바뀌어 숫자가 정신없이 오락가락한다. 고주망태가 되어도 귀소본능으로 이 단칸방으로 기어들고 혹시 길에서 퍽치기 당해 비명횡사해도 이쪽으로 머리를 향할, 나 또한 뽀글거리는 숫자는 아닐까? 누군가의 허튼소리, 곡소리,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소리 아닐까? 불안 초조하다는 내 푸념 또한 말풍선 속 대사는 아닐까? 내가 있나? 아얏! 아집과 가련한 지방적 허영심11으로 세계를 걷어차버린 우리는, 세계에 유례없는 과격함으로 우리의 작은 지방마저 중금속에 오염된 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 없는 모든 것, 무한히 동경하고 지향할 목표이자 영원한 꿈, 우리를 가차없이 채찍질하여 비루함을 깨닫게 해줄 절대적 세계 없이 우리는 어느 구석에도 비천하게나마 존재할 수가 없다. 땅 위에마저 그 세계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내고야 말리!”

두꺼비 수도승은 고개를 들고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로 써내려가기 시작했어. 말라죽은 나뭇가지가 밤새 신비로운 암소의 유리창을 두드리고, 도처에서 발생하는 잔인한 평화에 비폭력이 폭력적으로 항거하고, 진리에 복종하는 힘이 흙투성이 장화로 온세상을 휘젓고 다닌다는 요령부득의 문장들. 오해하고 오독한 세계.

 

“이제 정말로 진실을 말할게.”

“분명히 말해두는데, 나는 이제껏 하고 싶어서 한 일은 하나도 없고 다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했을 뿐이니까, 그래도 싫다는 말도 한번 안했으니까, 뭐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해본 적 없으니까, 지금도 내가 좋아서 이런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줘.”

“아, 그러나…… 우리 바둑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 그러나…… 까마득한 옛시절 나의 첫사랑은? 첫사랑의 짝꿍은? 담임선생님은? 집앞 골목가게 아저씨는? 그 아저씨의 사돈의 팔촌은? 아, 그러나…… 내 숟가락과 젓가락은? 이웃집 숟가락과 젓가락은? 그 이웃집 숟가락과 젓가락은? 그 이웃의 이웃집의 젓가락과 숟가락은?”

“이게…… 뭐야!”

“그래도 진실을 말할게.”

“이게 뭐야!”

옛날에

재칼 두마리가 살았습니다. 한마리의 이름은 칼릴라였고 다른 한마리의 이름은 딤나였습니다. 두마리 모두 지혜와 지식과 교양을 겸비했습니다. 어느날 산에서 곰들이 어슬렁어슬렁 내려와 재칼들의 가슴을 밀치고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원 세상에, 땅이 좁아터져서 어디 활개를 칠 수가 있어야지. 가서 바다를 밀어내자. 우리가 너희에게도 웅덩이에 갇힌 물고기 한두마리쯤 나눠줄 생각이 날랑 말랑 하다가 혹시 날지도 모르잖아?”

그 말 믿고 칼릴라와 딤나는 바닷가로 뛰어가서 파도와 쫓고 쫓기기 놀이도 하며 바다를 밀어냈습니다. 바다가 화를 냈습니다.

“내 너희와 원한을 진 기억이 없건만, 웬 행패냐?”

칼릴라와 딤나가 변명했습니다.

“저희도 이러기는 싫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요. 무지막지한 곰이 트림만 해도 산천이 벌벌 떠는데, 하필 저희가 어찌 거스르겠습니까요. 저희야 천상 뭍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육지동물인뎁쇼. 아이구, 안됩니다요, 안돼,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붙습니다요. 저희라고 도리를 모르지는 않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상입니다요. 이상, 좋습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이상이 아니겠습니까요. 아시다시피 현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요. 일단은 살고 봐야죠.”

바다가 거칠게 철썩댔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너희의 현실이 내겐 도저히 이럴 수가 없고 이래서도 안되는 악몽이다. 너희의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상이 내겐 기필코 이루어내야만 하는, 지금 안되면 대대손손 최후의 물 한방울까지 달려들어 실현해야 할 엄연한 현실이란 말이다. 썩 물러가거라!”

그러나 칼릴라와 딤나가 보기에 바다는 급격히 기세가 약해져서 점점 더 뒤로 물러날 뿐이었습니다.

“이상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어. 시대의 흐름에 맞게 우리도 발상의 전환을 해야 돼. 가란대서 가냐? 주도적으로 가서 우리의 활동범위를 적극적으로 넓혀야지. 우리도 통이 커지면 곰까지는 안돼도 냄새 고약한 하이에나와 밉살맞은 치타한테 본때를 보여주고, 살쾡이나 오소리쯤은 맘껏 호령할 수 있을 거야.”

칼릴라와 딤나는 민주적으로 투표하여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성명서까지 발표했습니다. ‘생존을 위한 우리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막연한 자기들의 잣대로 비난하는 자들이야말로 종족차별주의자, 반재칼주의자, 내정간섭주의자, 모종의 우월주의자들이다.’ 그리고 모처럼 기마자세로 언월도를 휘두르고 활 쏘는 시늉을 하며 질풍노도의 기세로 갯벌을 휩쓸었습니다. 게는 다리를 떼고 조개는 입을 틀어막아 본때를 보여주고, 갯지렁이와 고둥한테 갖은 까탈을 부리며 맘껏 호령했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밀물 때가 되어 산더미 같은 파도가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칼릴라와 딤나는 깊은 갯벌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보낸 이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는데 어디나 다 있는 문인

보낸 날짜 방금 전

제목 Re: 친구로부터

나는 괜찮습니다. 아까 편지 쓸 때는 울적했으나 이제 괜찮습니다. 나 자신을 분노로 채우지 않겠습니다. 내가 그런다면 저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내가 희망을 잃고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저들이 원하는 바이지요. 내게 희망은 우리의 생존 자체를 차단하고 봉쇄하는 장벽만큼이나 실제적인 것입니다. 비관적인 이들은 인류문명이 가깝거나 먼 장래에 결국은 파국에 이르고 말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비관적인 생각을 할 여유마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수십년 전에 벌써 파국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정의뿐이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희망 없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일분일초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당신 말대로 우리가 부딪힌 벽은 삽과 곡괭이로 무너뜨려버릴 수 있는 시멘트 장벽보다 더욱 강고한 것, 세계적인 팽창의 강박입니다. 이름이야 무엇이든, 점령이든 개발이든 전쟁이든 자원확보든 그것이 휩쓸고 간 땅은 불모지로 변해버립니다. 그러나 땅은 인간이 핀을 꽂으며 점거해나갈 한낱 지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오만함입니다. 나는 당신들에게도 그런 철학이 있으리라고 짐작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보이는 것을 본다’는 현대의 명제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내 의견으로는 그거야말로 합리가 아니라 미신입니다. 땅이 여기와 저기로 갈가리 찢겨 여기건 저기건 곧추서서 한군데만 건드려도 줄줄이 붕괴하는 도미노판이 되어버린 것은, 현대인들이 그렇게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땅은 흙알갱이의 집합 이상의, 우리를 둘러싼 우주의 한 모습입니다. 나도 당신처럼 땅의 변화를 느낍니다. 나는 그 변화가 인간이 고집한 처참한 틀에서 벗어나려는 땅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땅은 이미 ‘폭죽이 터지듯 다투어 피어나’ 제각기 무수한 꽃잎을 가진 무수한 꽃송이들로 개화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중 하나의 꽃잎에 깃든, 이미 완전한 존재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정통 종교인들은 질색하겠지만, 나는 우리의 삶이 태초에 저지른 죄의 댓가를 치르는 형벌이며 세상 끝나는 날 보상받을 시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매순간 끝나고 다시 시작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눈물은 바로 지금 파국으로 달려가는 인류문명을 되돌려 다른 순환을 시작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인간이 세계지도 위에서 폭주하는 장벽들을 막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점령자들과 싸우는 이유는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점령은 불의이고, 불의는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소속이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서 흘리는 눈물 또한 그곳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지구 곳곳에서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눈물, 그리고 앞으로 흘릴 눈물은 같습니다.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은 인간의 눈물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있는 자리가 여기이자 저기이며, 살아 있는 이 순간이 과거이고 미래입니다. 지금 땅이 개화하고 여기가 역사의 완성입니다. 우리 자신이 세계이고 우주입니다.

-이 방금 전 여기와 저기마저 헷갈리는 친구 wrote:

생각할수록 원통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자기가 서 있는 땅과 자신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오나 치부처럼 숨기게 만드는, 그 장난스런 짓거리야말로 악랄한 폭력이지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의 주소에서 삭제해버린 것은 지명만이 아닌 듯합니다. 당신의 아파트가 서 있을 땅, 당신이 살 땅, 어쩌면 당신 자신은 아닐까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분리 장벽 안에 몰아넣고 점점 압박하여 마침내 허공에 띄워버리는 요술이나 마법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이 현실이 오히려 요사스러운 환영 같기만 합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점령당했다는 뜻으로 ‘뿌리 뽑혔다’는 말을 자주 쓰는군요. 생짜로 뿌리가 뽑히는 당신들의 고통이 내게 전해져, 지금 심장이 쥐어뜯기는 듯합니다. 그래봤자 나는 이 순간이 지나면 영화도 보고 친구들이랑 떠들기도 하겠지만, 당신은 사소한 일 하나하나도 방해받고 매순간 자극당해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겠지요.

이제 지구상에 장벽이 실물로 서 있는 곳은 단 두군데, 당신이 사는 거기와 내가 사는 여기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두대의 칼날처럼 우리 목에 걸려 있는 바로 그 벽 때문에 도리어 당신들을 벽으로 가두고 공중부양시켜버린 점령국과 미국의 강경파를 거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논리와 시책은 요술가의 주문이나 마술사의 술수처럼 복잡하고 현란합니다. 그 강경파들이 강하면 강해서, 약해지면 약해졌으므로 더욱, 요구하면 물론이요 요구 안해도 알아서, 설사 거절해도 약삭빠르게 기회를 틈타 곁다리 붙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에 당신들이 복잡하고 현란한 마찬가지 논리로 우리의 목에 걸린 칼날에 걸터앉는다면, 우리가 역지사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나처럼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에게도 분명히 보입니다. 우리의 장벽은 여기서만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장벽 문제에 강대국이 주도적으로 개입하고 다른 나라들도 간접적으로 관여합니다. 거기 당신의 장벽도 마찬가지죠. 거의 모든 나라가 직간접적으로 참견합니다. 장벽은 외양과는 달리 차갑게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물러설 수 없을뿐더러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서도 안되고, 끝없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세계적인 팽창강박이 서로 지속적으로 부딪치고 있습니다. 장벽은 제자리에 있을지언정 한시도 쉬지 않고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쟁이며, 세계적인 분쟁이지요. 당신들이나 우리나 봉착한 벽은 같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 세계의 한계, 또는 인류역사상 누적된 불의입니다. 두 장벽 중 어느 하나가 서 있어야 다른 하나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반대로 어느 하나가 서 있어야만 한다면 다른 하나도 역시 없어지기 힘들 겁니다.

여기는 전세계적인 자본의 격동에 따라 땅이 아침저녁으로 요동을 쳐서 나 같은 무력한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장벽과 국경 못잖은 높고 두꺼운 벽들이 우리 안에도 촘촘히 솟아나 소용돌이칩니다. 벽과 벽 사이의 틈마저 가장 약발 센 주문 같은 경제논리에 녹아 증서로 추상화되어버렸습니다. 나는 발 디딜 데도 없고 나갈 데도 없는데 점점 더 가장자리로 밀려납니다. 여기 있으되 나는 거기서 뿌리 뽑혀 허공에 쓰러져 있는 당신들과 더 가깝다고 느낍니다.

땅이 견딜 수 있을까요? 땅이야 죄가 없습니다. 여기 아니면 저기,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인간이 땅을 쪼개고 갈라 여기도 저기도 삶의 터전이 아닌 죽음의 덫으로 만들었습니다. 돈, 무기, 자원, 상품, 인공위성, 실시간 정보는 머리 위로 휙휙 날아다니되 인간만은, 아니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살 수가 없습니다. 여기도 저기도 우리의 발밑에서 삭제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이 땅을 사랑하지 않는데 땅이 인간을 사랑하겠습니까? 지금 가랑비가 오고 낙엽이 집니다. 모든 것이 여위었습니다. 이 침묵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고, 상상이나 지각조차 할 수 없는 변화의 그림자일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방금 전에 깜빡 스러진 무척 시끄러운 소리의 아주 짧은 여운일지도 모릅니다. 가을이 옵니다.

 

기울어진 지붕에 사이좋게 포개져 있다가 함께 미끄러진 두장의 기왓장처럼, 칼릴라와 딤나는 꼭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지붕에서 떨어져 땅에 부딪치려는 두장의 기왓장처럼, 칼릴라와 딤나는 입을 쫙 벌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입에서는 찍 소리도 짹 소리도, 엄마 나 가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박살나기 직전의 두장의 기왓장들처럼, 칼릴라와 딤나는 으스러져라 껴안고 서로 터질 듯한 심장박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따스한데 진작 껴안을 걸 그랬다고 얼핏 생각했습니다.

왼쪽 구석에서 장면을 들추고 학 한마리가 고개를 꺼떡대며 긴 다리로 걸어나와 부리를 벌리고 웃었습니다.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석상이 머리만 들이밀고 히죽거렸습니다. 산봉우리들이 불꽃처럼 펄럭이고 파도처럼 넘실댔습니다. 자세히 보면 그 속에 손톱만한 탑이 하나 기우뚱했습니다. 사슴 한마리가 매화인지 모란인지, 하여튼 제 머리통보다 큰 꽃을 따먹는데 자기는 뒷발로 버티고 서서 앞발을 들었겠지만 옆에서 바라보는 다른 사슴이 훨씬 아래쪽에 네 발을 디뎠기 때문에, 그 사슴은 꽃을 물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주먹만한 바위에서 아름드리 소나무가 솟아나 쑥쑥 자라다가 꼭대기에 닿고도 모자라 돌돌 말렸습니다. 그 옆에 웬 화병이 그것도 사십오도 각도로 기울어져 있는데, 화병에서 뿜어나오듯 파초인지 싸리인지가 기운차게 뻗었습니다. 그 옆에 또 웬 수탉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서 있고, 파초인지 싸리인지가 수탉의 목과 엇갈려 수탉이 화병보다 앞에 서 있는지 화병이 수탉 앞에 있는지는 애매했습니다. 수탉이 파초인지 싸리인지 사이로 목을 빼고 있거나, 파초인지 싸리인지가 수탉의 목인 듯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나비보다 작은 새들이 날개도 펴지 않은 채 나뭇가지 사이에 떠 있고, 한마리는 뒤집혀 있었습니다. 풍선 같은 물고기들이 연잎 사이로 헤엄치는데 그 틈에 메추라기인지 봉황인지가 두마리 끼어 종종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불꽃 같고 파도 같은 산봉우리들 옆 허공에 오린 종잇조각이나 흐트러진 죽간(竹間) 같은 것이 떠 있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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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랍 동물우화 『칼릴라와 딤나』(바이다바 지음, 이동은 옮김, 도서출판 강 1998)의 두 주인공과 그들에 대한 설명. 이 소설은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나오는 이 우화집의 형식을 빌렸다.
  2. 『프레시안』 2006년 4월 17일 기사 「투쟁인가 투항인가」에서 발췌.
  3.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이다, 마태복음 24:27.
  4.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다, 베드로후서 3:12.
  5. 산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다, 꾸란 81:3.
  6. 대지가 산산조각 나다, 꾸란 89:21.
  7.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창조되다, 꾸란 95:4.
  8.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다, 마태복음 24:12.
  9. 사원 지붕보다 높은 나무는, 자카리아 무함마드 「연꽃 먹는 사람들」, 『아시아』 2006년 여름호 314면에서 변용.
  10. 축복받은 무화과나무, 꾸란 95:1.
  11. 가련한 지방적 허영심, 스티븐 컨 지음, 박성관 옮김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9~1918』(휴머니스트 2004) 5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