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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민족과 민족주의
조관자와 김철의 글을 중심으로
하정일 河晸一
문학평론가, 원광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저서 『분단 자본주의 시대의 민족문학사론』 『20세기 한국문학과 근대성의 변증법』 『민족문학의 이념과 방법』등이 있음. jeonghi@wonkwang.ac.kr
* 이 글은 세교포럼(2006. 9. 15)에서의 발제문을 재정리·보완한 글이다. 토론과정에서 소중한 조언을 해주신 백낙청, 임형택, 최원식 선생님을 비록한 여로분께 감사드린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은 그 자체로만 보면 대단히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책이다. 이 책은 최원식(崔元植)이 지적했다시피 “편자들과 필자들 사이에 균열이 가로지르고 있”는,1 말하자면 총론과 각론이 따로 노는 형국을 보여준다. 하지만 『재인식』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비교적 수미일관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정치적 보수주의로 요약된다. 이 책에 실린 문학논문의 필자들은 탈근대론 혹은 해체론에 가까운 학자들이다. 탈근대론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지만, 이들의 학문적 경력을 생각하면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먼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인식』 전체의 이데올로기적 지향과 효과가 진보담론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정치적 보수주의인 것도 분명하다. 어떻게 탈근대론이 정치적 보수주의와 공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정치적 보수주의라는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산출하게 되었을까.
1990년대에 탈근대론은 민족문학론을 대체할 새로운 급진주의 기획으로 각광받은 바 있다. 그래서 당시 적지않은 맑스주의자나 민족문학론자 들이 탈근대론을 적극 수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탈근대론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더이상 급진적이라거나 진보적인 담론이라고 불리기 힘든 퇴행상을 노정(露呈)하고 있다. 이 점은 특히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무기력한 모습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필자는 이러한 현상이 근대성과 민족(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맞물려 있다고 생각한다.2 『재인식』에 실린 문학논문들 또한 마찬가지다. 필자는 그중에서 조관자(趙寬子)와 김철(金哲)의 글을 대상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의 글은 탈근대론과 탈식민론의 강력한 자장 아래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두 글은 근대주의와는 정반대편에 이론적 입각점을 잡고 있다. 하지만 두 글의 결론은 근대주의와 묘한 거울관계를 이룬다. 이는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두 글의 유럽중심적 사고방식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따라서 필자는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두 글의 입장을 중심으로 이들이 어떻게 유럽중심적 민족(주의) 인식과 관계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인식이 어떤 연유로 근대주의와 은밀한 공모를 형성하게 되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조관자의 글을 먼저 보고 김철의 글을 그 연장선에서 분석하는 순서로 논의를 진행할 터인데, 그 까닭은 조관자의 글이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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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자의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는 민족주의가 “관제 민족주의나 저항적 민족주의 둘 다 대중의 생존 욕망을 자극하고 동원하고 통합하려는 권력의지”3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이광수(李光洙)의 친일논리를 규명하고 있다. 이광수의 친일론 자체에 대한 해석은 전반적으로 지극히 상식적이고, 기왕의 전통적인 연구들과 대동소이하다. 이 글의 특징은 이광수의 친일논리를 민족주의의 필연적 결과로 이해하는 데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식의 시각 역시 이제는 상식처럼 되었으니 새롭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런만큼 상식 뒤에 웅크리고 있는 편견과 고정관념 또한 완강하다.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조관자의 시각은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권력의지의 산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먼저 이러한 시각이 199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민족주의를 비슷하게 설명했다. 맑스주의 쪽의 학자들이 그랬는데, 특히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대해 그렇게 비판했다. 민족주의를 부르주아의 지배를 위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 비판이 탈근대론이나 탈식민론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이와는 다른 해석은 제3세계 맑스주의에서 촉발되었다. 이른바 침략적 민족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민중적 민족주의의 구별이 이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제3세계의 특수성에 대한 재인식이 가로놓여 있다. 피식민 혹은 종속이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저항적이고 민중적인 민족주의가 반체제운동의 주요 분파로 기능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민족주의 내부의 차이에 주목한 것이다. 제3세계의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는 담론 자체만 보면 제국주의의 침략적·부르주아적 민족주의와 비슷한 면도 많다. 하지만 그 ‘비슷한’ 이념이 상이한 역사적 맥락에서는 서로 다른 효과를 낳는다. 이는 민족주의가 이념이기 전에 운동이었다는 점과 함께 이념/담론이 언제나 구체적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실천’이라는 사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한국의 진보적 학자들이 80년대에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래서 80년대의 진보학계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의 극복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를 포용하려는 자세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관자가 80년대 한국의 진보적 연구자들과 다른 점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대한 규정을 민족주의 일반으로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내셔널리즘이 ‘민족’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권력운동”(553면)이라는 규정은 이로부터 나오게 된다. 따라서 논점은 ‘모든’ 민족주의를 대중동원의 권력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에 있다. ‘모든’ 민족주의를 등가적으로 보는 시각이 갖는 문제점은 구체적으로 신채호(申采浩)와 최남선(崔南善) 혹은 이태준(李泰俊)과 이광수(李光洙)의 차이를 설명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이들은 ‘모두’ 민족주의자이지만 행로는 달랐다. 친일과 반일, 협력과 저항, 동일화와 반/비동일화로 갈라진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 민족주의 내부의 차이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친일과 반일, 협력과 저항 양자가 칼로 무 베듯 확연하게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 확연하게 갈라진다고 본 80년대 많은 논객들의 시각은 그런 점에서 ‘도식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 효과 내지는 결과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민족주의의 겹침과 갈라짐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가장 온당한 자세일 터인데, 조관자의 시야는 지나치게 단선적이다. 조관자처럼 민족주의를 대중동원을 위한 권력의지의 산물로 일률 규정하는 한, 한국근대사의 수많은 반식민·반체제 민족주의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민족주의를 대중동원을 위한 권력의지의 산물로 이해할 때의 또다른 문제점은 민족을 동원의 대상으로 못 박는다는 데 있다. 전통적 민족주의는-친일 민족주의든 저항적 민족주의든-민족을 주어진 것, 생래의 것, 선험적인 것으로 규정해왔다. 그리고 그에 근거해 개개인을 통합하고 민족에의 충성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 규정은 민족을 피로 상징되는 종족집단으로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민족이 종족집단이라면 개개인의 주체적 판단과 선택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하든 민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초월적 대주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관자의 민족 규정은 이러한 종족주의적 민족관이 갖는 전체주의적 억압성을 비판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민족을 이렇게만 규정하면 민족주의는 전체주의나 파시즘과 변별되기 힘들어진다. 실제로 조관자는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동질적인 이데올로기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조관자뿐 아니라 탈근대론이나 탈식민론에 매료된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주의를 일률적으로 타파해야 할 부정적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은 동원의 결과인 동시에 결사(結社)의 산물이기도 하다. ‘매일매일의 국민투표’라는 르낭(E. Renan)의 정의처럼, 민족을 자발적 동의와 적극적 참여에 기반한 결사체로도 이해할 때 민족에 대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는 민족의 이러한 속성을 반영한 이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신채호에게서 잘 드러나듯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 또한 종종 민족을 생래적 종족집단으로 이해하곤 했지만, 그와 동시에 민족을 평범한 민중이 만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민족을 엘리뜨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 본 이광수와 신채호가 갈라진다. 가령 최서해(崔曙海)의 가장 중요한 문학사적 업적이 바로 민족을 민중적 결사로 그려낸 점이다. 부르주아 민족주의 문학은, 심지어 염상섭(廉想涉)마저도 민족을 언제나 ‘위로부터의 민족’, 즉 부르주아 헤게모니에 바탕한 민족으로 상정했다. 반면에 최서해의 문학은 ‘아래로부터의 민족’, 곧 민중이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에 의거해 만들어가는 민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4 이때 ‘민족’은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설정한 민족과 분명하게 구별되는데, 이러한 ‘민족’의 상은 조관자식의 민족관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한국의 민중적 민족주의에 반영된 민족은 바로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민족’이고, 여기에 민중적 민족주의의 ‘맥락적 적실성’5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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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자는 이광수의 딜레마가 “주권 없는 민족을 대상으로 하여 힘있는 국민의 형성을 목적한 데 있다”(533면)고 말한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민족주의가 일본의 민족주의를 ‘대리 수행’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일본 내셔널리즘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의 내셔널리스트는 전도된 형태로 ‘민족역량’의 확대를 욕망하게 된다.”(같은 곳) 그런 점에서 이광수의 적극적인 친일은 “단순히 민족주의운동을 포기한 결과가 아니며 식민지 자본주의가 생존하기 위한 전진적인 투항”(536면)이다. “종속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을 우선시하여 독립의 목표를 상실한 것은 확실히 패배적인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친일 내셔널리즘의 자본과 권력운동이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인 귀결이다.”(537면)
이 인용문은 글의 핵심에 해당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조관자는 이광수가 친일로 나아가게 된 경위를 국민을 형성하기 위한 전도된 형태의 실천이자 자본과 권력운동의 생존방책으로 설명한다. ‘자본과 권력운동의 생존방책’은 식민지시대 이래 맑스주의가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대해 일관되게 설명해온 내용이고, ‘국민 형성을 위한 전도된 실천’은 최근의 탈식민론이 애용하는 논리이다. 전통적 맑스주의와 해체론적 탈식민주의가 결합된 형국인데, 이 두 측면이 이광수의 친일담론에 공존하는 것은 틀림없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궁극적 목적이 ‘자본의 존립’에 있고 자본을 존립시키려면 ‘국민의 형성’이 필수불가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물론 좀더 정치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자본운동이나 국민 형성과의 관련성은 이광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족주의 전체와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가령 동양주의, 특히 유교적 전통과의 관련성이 빠진 것은 아쉽다. 이광수가 내선일체,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이데올로기로 나아가게 된 저변에는 동양적 가치관의 현재화라는 문제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해명해야 이광수가 친일로 나아가게 되는 고유한 내적 논리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광수가 받아들인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방식이다. 조관자는 “‘내선일체’가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허구”라고 못 박으면서 “이러한 허구의 실체화가 음모될 때에 삶의 세계는 폭력적인 광기의 장이 된다”(544면)고 기술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민족주의가 “‘파블로프의 개’와 같이 허위능력을 상실한 인간을 창조”하려는 파시즘과 만난다고 조관자는 본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이광수가 말한 “‘일본정신’은 언어적 수사로서만 현전”(546~47면)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존의 이익을 도모하는 친일 내셔널리즘의 힘에 대한 욕망을 숨기고 가상된 동포애의 집단 도취적인 희생을 찬미하는 파시즘의 낭만적인 수사”(547면)와 똑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전형적인 허위의식론에 입각해 있다. 말하자면 민족주의가 모순을 은폐하고 동원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조관자는 민족주의를 “‘국민감정’에 기생하여 대중적인 권력을 낳으며, 민족 동일체에 대하여 ‘아니오’를 허락하지 않는 절대권력이 되고 있다”(554면)고 비판한다. 민족주의에 이러한 허위의식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전적으로 허위의식으로만 보는 한, 대중의 자발적 동의 기제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이글턴이 말한 ‘맥락적 적실성’이 고구되어야 한다. 요컨대 민족주의에는 현실의 어떤 부분 또는 대중의 특정한 욕구를 반영한 특정 국면에서의 적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령 내선일체론에 대한 이광수의 반응이 그러하다. 내선일체론이 헤게모니담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거기에 조선인이 받는 민족적 차별에 대한 일정한 보상이나 교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바로 그 점에 주목했던 것이다. 다만 내선일체론이 차별과 평등의 길항관계를 해결할 수 없는 양가적 담론이라는 것이 문제인데, 차별을 포기하는 순간 내선일체론의 궁극적 목표인 헤게모니적 지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광수가 『동포에 고함』에서 징병제 실시 결정을 보고서야 비로소 내선일체론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요컨대 징병제 실시란 조선인도 진정한 일본국민이 되었음을 뜻하고, 따라서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광수의 민족주의에는, 그것이 명백한 친일담론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단계에서의 조선민족의 특정한 욕구를 반영한 ‘맥락적 적실성’이 담겨 있는 셈이다.
물론 내선일체론이 발휘하는 효과는 헤게모니적 지배, 즉 구조적 차별과 착취의 틀 내에서만 가능한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선일체론 자체가 일제의 헤게모니적 지배를 위해 고안된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민족주의가 일정한 ‘맥락적 적실성’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에의 투항으로 귀결된 것은 내선일체론의 이러한 양가성과 그에 따른 봉합 불가능한 모순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저변에는 조관자가 언급한 예의 ‘자본과 권력’의 관점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반면에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는 민중의 관점에서 민족문제를 바라보려 노력함으로써 내선일체론을 포함한 일제의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 내재한 모순을 통찰할 수 있었다. 필자가 ‘아래로부터의 민족’, 곧 민중적 결사로서의 민족을 강조한 것도 그래서인데, 말하자면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는 민중이 주체가 된 민족의 가능성에 주목한 결과, 이광수류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와는 달리 식민주의와 분명하게 선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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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자는 결론에서 “모두가 권력을 욕망하는 사회에서는 권력의 신민이 아니라 권력의 주체로서 권력의 횡포에 대하여 ‘아니오’를 말하는 힘이 필요하다”(555면)고 말한다. 이는 너무도 지당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말은 비단 민족주의에만 해당하는 발언은 아닐 터이다. 따라서 이런 식의 발언으로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막연하기 이를 데 없다. 모든 민족주의가 “‘피와 혼’의 논리로써 ‘우리’라는 자연의 귀소, ‘원초적 합의’를 마련하고 있”는(554면)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한국의 민중적 민족주의는 민중이 주체가 된 ‘아래로부터의 민족’, 즉 민중적 결사로서의 민족을 도모했다. 그것이 일본의 민족주의, 더 멀리는 독일의 민족주의에 빚진 바 적지 않지만, 그와 동시에 거기에는 개인의 실존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발적 결단과 선택이 담겨 있기도 하다. 최서해나 강경애(姜敬愛)의 문학에서 그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거니와 후기 신채호에게서도 그러한 경향이 일정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제3세계의 탈식민 민족주의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이 두 측면-대중동원적 측면과 민중결사적 측면-을 동시에 조망해야 한다. 하지만 조관자는 이광수의 친일 내셔널리즘을 ‘민족주의 일반’으로 환원함으로써 모든 민족주의, 나아가 모든 민족담론을 등질화한다. 조관자의 민족주의 비판이 이렇게 단순화되고 만 것은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피식민 민족주의의 동일시→친일 민족주의와 저항 민족주의의 동일시→모든 이념을 권력의지로 환원하는 해체론적 환원론의 결과로 보인다.
피식민 민족주의에 대한 단순화는 김철에게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김철은 「몰락하는 신생-‘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에서 이태준의 「농군」(1939)을 “‘만주 경영’이라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편승한, 다시 말해 당대의 ‘국책(國策)’에 적극적으로 부응한 소설”(481면)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한다. 그렇게 보는 이유로 김철은 “만주사변 이후 폭증하는 ‘만주 유토피아니즘’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485면)를 지적한다. 김철에 따르면, “만주는 피식민지인으로서의 조선인이 제국의 ‘일등국민’으로 도약할 수 있는 현실을 제공하는, 또는 그런 현실을 꿈꾸게 하는 공간으로 작용”(같은 곳)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 농민을 야만적인 ‘토민’으로 바라보는 제국주의적 시선이 「농군」에 스며들어 있다. 김철은 「농군」이 만보산(萬寶山)사건의 진상을 왜곡하면서까지 “‘수난당하는 피해자로서의 조선 농민 대 야만스러운 가해자로서의 중국 군벌과 농민’이라는 구도로 사건을 형상화하는 데에는, 실은 가해자인 자신의 미묘한 위치를 부정하고자 하는 욕구, 피해와 가해의 이중적 위치가 동시에 혼재하는 데에서 오는 의식의 착종을 수난자로서의 자기 확립을 통해 방어하고자 하는 욕구가 매개되었던 것”(497면)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농군」은 “‘왕도낙토(王道樂土)’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바탕으로 하는 ‘만주 이데올로기’의 문학적 구현”(508면)에 불과하며, “‘유사(類似) 해방감’과 ‘의사(擬似) 제국주의자’로서의 포즈”(522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작이라는 것이 김철의 결론이다.
김철의 「농군」 비판은 피식민자의 저항 민족주의가 식민자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동일한 담론구조를 갖고 있다는 전제에 바탕하고 있다. 「농군」에서 드러나는 종족주의(ethnocentrism), 문명 대 야만의 인종차별적 이분법, ‘의사 제국주의’적 포즈 같은 것들에서 그 점이 확인된다고 김철은 말한다. 말하자면 조관자와 마찬가지로 피식민 저항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철의 주장과는 반대로 「농군」은 오히려 피식민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다른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농군」이 만주 토착민에 대한 인종차별적이고 종족주의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농군」이 식민주의에 굴복한 국책소설은 아니다. 이런 식의 논법은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재단하는 전형적인 침소봉대(針小棒大)다. 이와 관련하여 작품의 배경이 ‘장 쭤린(張作霖)정권 시대’라는 부기(附記)는 중요한 맥락적 의미를 갖는다. 이 부기에 따르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이다. 이는 「농군」에서 그리는 시대가 만보산사건 이전이라는 ‘소설적’ 의미를 갖는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농군」과 만보산사건의 ‘사실적 합치’ 여부를 따지는 것은 작품의 서사논리와 맞지 않는다. 「농군」의 시대적 배경이 1920년대라는 사실은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역관계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만주국 건국 이후에도 조선인은 일본인에 이은 ‘이등국민’이 아니었지만, 만주국 건국 이전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요컨대 1920년대의 조선인 이주민은 중국인에 비해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모든 면에서 열등하고 차별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만주 토착민에 대한 인종차별적이고 종족주의적인 태도가 식민주의적 폭력이 되려면 조선인이 중국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식민주의란 기본적으로 ‘강한’ 민족과 ‘약한’ 민족 사이의 지배와 착취 관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1920년대의 조선인은 중국인에게 식민주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가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사실적 합치’ 여부는 식민주의와의 관련성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도 없다. 이 점은 가령 만보산사건을 소재로 한 안수길의 「벼」(1940)와 비교해보더라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벼」는 만보산사건 때 발포도 없었고 사상자도 없었다고 사실과 합치되게 기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식민주의에의 포섭 징후를 농후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나까모도라는 일본인을 곡식도 사주고 학교도 경영하면서 오족협화에 적극 기여하는 긍정적 인물로 묘사하고, 더 나아가 그를 중국인의 억압에서 조선민중을 벗어나게 해줄 구원자로 설정함으로써 일제와 조선민중 사이의 모순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과 만보산사건의 ‘사실적 합치’ 여부가 식민주의에 포섭됐는지 아닌지를 구획하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이태준은 「만주기행」(1938)에서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이태준이 종족주의자도 인종차별주의자도 아니었음을 뜻한다. 조선인과 중국인의 처지와 관계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런 이태준이 「농군」에서 「만주기행」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만주기행」을 쓸 때의 이태준이 일년 만에 표변한 것일까. 그렇게 보는 것은 그후의 글들이 종족주의나 인종차별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적절한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보다는 시대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다. 만주국 건국 이전과 이후의 조선인 이주민 대 중국인의 민족적 역관계가 달랐다는 사실이 「농군」과 「만주기행」의 차이를 낳은 주요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두 글에 담겨 있는 시대가 1920년대와 1930년대로 달랐기 때문에 서사의 논리도 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소설의 첫부분, 그러니까 기찻간 장면이다. 특히 ‘양복쟁이’ 형사가 윤창권에게 어째서 일가 모두 만주로 이민 가는지 캐묻는 대목은 조선인의 만주 이민이 일제 농업정책의 총체적 실패에 따른 결과임을 은밀하게 환기한다. 심문을 방불케 하는 형사의 질문에 대한 윤창권의 답변에 따르면, 윤창권 일가는 자작과 소작을 겸하는 자소작농이었지만 먹고살 수 없어서 아내까지 ‘방적공장’에 나갔고, 그래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만주 이민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주에만 가면 잘살 수 있다는 말에 논 팔고 집 팔아 왔건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중국인들의 차별과 억압이었으니, 토착민들의 폭력에 맞서 “덤벼라! 우린 여기서 못 살면 죽긴 마찬가지다”라는 창권의 절규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기찻간 장면은 형사와 윤창권의 긴장어린 대화를 통해 일제와 조선민중의 대립상을 날카롭게 암시한다. 이 대목을 소설 첫머리에 넣은 의도는 식민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이 없었다면 조선 농민들이 만주에 이민 가야 했던 역사적 연원에 대한 해명이 생략되면서 「농군」은 제국주의와 조선민중의 모순을 다룰 수 없었을 터이다. 그랬다면 서사의 축도 조선인과 중국인의 갈등으로 단선화되면서 민족적 저항이 식민주의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찻간 장면은 조선인 이주민들의 종족주의적인 행태가 일제의 식민주의적 착취와 무관하지 않음을, 즉 수탈과 착취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환기함으로써 식민주의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시켜준다.6 그런 점에서 만주의 조선인 이주민 공동체는 일제와 중국인에 의한 이중의 억압에 맞서 자신들의 실존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구성한 민중결사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족’, 곧 피식민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민중을 주체로 하여 형성된 민족인 것이다.
이처럼 「농군」의 서사에서 우리는 피식민 민족주의가 담론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피식민 주체가 처한 맥락의 특수성으로 인해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다른 저항적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김철의 「농군」 비판에는 맥락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수행적(performative) 효과의 차이에 대한 분별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오독은 일차적으로 경험적 현실까지 상호텍스트성으로 환원하는 텍스트주의적 독법이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김철이 “제국주의 지배 아래에서의 민족운동이라는 것은 제국의 체제 안에서 민족 영역을 분절하고 명료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제국의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대담」, 『재인식』 2권, 626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족과 제국은 서로 그렇게 길항하면서 협조하는 관계”(같은 곳)지만, 그러한 ‘길항과 협조’ 역시 ‘제국의 체제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어떠한 민족운동도 결국에는 ‘제국의 체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피식민 저항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파생물’이기 때문에 식민주의의 헤게모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김철처럼 생각하는 한, 식민주의에 대한 어떠한 저항도 무망(無望)한 일이 된다. 제국주의 체제의 ‘안’에 있는 한, 식민주의의 헤게모니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험적 현실 속에서 제국주의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탈식민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차터지(P. Chatterjee)가 적절히 규정한 바 있듯이 피식민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에 지배되면서도 구별되는’ 이념이자 운동이다.7 이는 피식민이라는 역사적 조건의 차이가 낳은 결과거니와 이 점에 바로 피식민 민족운동의 탈식민적 가능성이 있다. 식민주의 내부로부터 식민주의를 극복해가는, 이른바 ‘내적 저항’을 피식민 민족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태준의 「농군」은 그러한 의미에서의 내적 저항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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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자와 김철의 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유럽중심적 사고방식이다.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접근방식은 제국주의의 중심이던 유럽의 역사에서는 통용될 수 있다. 민족주의 일반에 대한 유럽 좌파의 부정적 시각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관자와 김철은 일본에서의 민족주의 비판으로부터 크게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유럽 좌파의 민족주의 비판을 적극 수용한 것은 일본의 역사적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본은 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로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고 내부적으로는 천황제 파시즘을 밀어붙이면서 민족주의를 정당화 이데올로기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민족주의가 일본 보수우파의 핵심 이데올로기라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민족주의를 극력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피식민 지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대부분의 유럽 좌파나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지만,8 조관자와 김철 역시 이에 대한 역사적 분별력이 부족하다. 침략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피식민 지역에서는 민족주의가 종종 저항의 담론으로 작용했다. 물론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 또한 억압과 동원의 권력담론으로 변질되는 장면들을 우리는 숱하게 목격했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는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다. 민족문제나 분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의 극복이 절실한 것은 그래서이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대중동원과 민중결사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 또한 놓쳐서는 안된다. 이 양면성이야말로 피식민 민족주의의 역사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는 피식민이라는 맥락적 특수성으로 인해 반제국주의적 민중결사라는 측면을 좀더 강하게 보여주곤 한다. 「농군」에서 그 점을 확인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관자와 김철이 피식민 민족주의에 비판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아마도 민족주의의 대중동원적이고 종족주의적 측면에 대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분명 일리가 있다. 하지만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유럽중심적 단순화는 그것들의 역사성 전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면서 자신들의 주관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식민주의를 묵인하는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낳는다. 여기서 ‘묵인’이라고 말한 것은 조관자와 김철이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가능성을 원천 부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식민주의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식민주의에 대한 묵인은 근대주의와의 묘한 유착을 통해 이루어진다.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김철과 조관자의 이해는 근대주의자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근대주의 역시 민족과 민족주의를 유럽적 의미로 이해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근대주의는 세계사적 근대를 유럽적 근대의 확장과정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탈근대론의 근대 인식 또한 비슷하다. 그에 따라 탈근대론에서 제국주의적 근대와 식민지적 근대는 동형관계로 이해된다. 식민지적 근대란 유럽적 근대의 이식이자 모방이기 때문이다. 조관자와 김철이 피식민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일률 규정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따라서 이들은 유럽적 근대와는 다른 근대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며, 당연히 유럽적 근대의 대안도 탈근대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민족과 민족주의의 탈근대적 대안은 민족을 지우는 것이다. 민족이 존재하는 한, 근대를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한국판 탈근대론의 맹목적 비난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 지점에서 탈근대론은 신종 근대주의인 신자유주의와 만난다.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전지구화만큼 민족을 지우는 효과적인 방략은 없거니와 탈근대론의 민족과 민족주의 비판이 정치적 보수주의의 정당화라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낳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민족 지우기’를 공통분모로 탈근대론과 근대주의가 손을 잡은 셈이다.
『재인식』에 실려 있는 한국어문학 관련 글들 가운데 이혜령(李惠鈴)과 최경희(崔暻姬)의 논문도 비슷한 시각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서는 상세한 비판이 이미 나온 바 있기 때문에9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두 글 역시 피식민 민족을 유럽적 의미의 민족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만은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이혜령은 제국과 피식민 민족운동을 일종의 공생관계로 일면화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최경희는 민족 혹은 민족주의를 여성을 억압하는 동원 이데올로기로 단순화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결과 이혜령은 조선어학회운동에 담겨 있는 ‘내적 저항’을 읽지 못하며, 최경희는 거꾸로 최정희(崔貞熙)의 「야국초(野菊抄)」를 친일로 위장한 페미니즘소설로 해석하는 심각한 오독을 범한다. 이는 공히 피식민 민족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유럽중심적 민족 인식에서 비롯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특히 최경희의 글은 피식민이라는 역사적 조건에서 민족과 매개되지 않은 현실인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글의 분석대상인 「야국초」는 성차별을 일본의 ‘국민’이 됨으로써 해결하고자 한 ‘명백한’ 친일소설이다. 최정희가 친일협력이라는 해결방식을 선택한 것은 여성문제를 민족문제와 분리해 고립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 ‘국민’이 된다 하더라도 피식민상태에서는 영원히 이등국민, 이등여성일 수밖에 없는데, 최정희는 그 엄연한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작가가 피식민이라는 역사적 조건에서 민족문제가 갖는 전략적 선차성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경희가 그 점을 엄정히 짚지 않은 채 ‘표층서사’와 ‘하위서사’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작품의 페미니즘적 측면만 따로 떼내어 강조하는 것은 최정희가 범한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다. 이러한 독법은 민족 혹은 민족주의의 가부장주의적이고 엘리뜨주의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는 단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니와, 여기서 우리는 조관자나 김철과 비슷한 문제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재인식』은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를 동시에 넘어 민족의 역사성과 복합성을 입체적으로 통찰하는 일이 참으로 화급한 과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환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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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식「다시 찾아온 토론의 시대」,『 창작과비평』2006년 여름호, 351~52면.↩
-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으로는 졸고「탈근대 담론: 해체 혹은 폐허」, 민족문학사연구소 2006년 학술심포지엄 발제문 참조.↩
- 박지향·김철·김일영·이영훈 엮음『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 책세상 2006, 526면. 이하 면수만 표시.↩
-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졸고「민족과 계급의 변증법」,『 한국근대문학연구』11집, 2005 참조.↩
- 맥락적 적실성’과 관련해 이글턴(T. Eagleton)은 이데올로기란“단순한 허위의식이 아니라 역사발전의 특정한 단계와 특정한 국면에 적합한”담론이라고 설명한다. 테리 이글턴 지음, 여홍상 옮김『이데올로기 개론』, 한신문화사 1994, 160면.↩
- 이태준 문학의 탈식민적 성격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는, 졸고「1930년대 후반 이태준 문학과 내부식민주의 성찰」과「친일의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이태준을 중심으로」(문학과사상연구회『이태준 문학의 재인식』, 소명출판 2004) 참조.「 농군」과「만주기행」에 대한 해석은 두 글에서 관련 부분을 요약·보완한 것이다.↩
- P. Chatterjee, Nationalist Thought and the Colonial Worl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5, 42면.↩
- 유럽과 일본 좌파의 민족주의 비판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졸고「탈민족 담론과 새로운 본질주의」,『 민족문학사연구』25호, 2004 참조.↩
- 이혜령의 글에 대한 비판은 최경봉「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활동의 역사적 의미」『( 민족문학사연구』31호, 2006), 최경희의 글에 대한 비판은 김양선「탈근대·탈민족 담론과 페미니즘 문학연구」(민족문학사연구소 2006년 학술심포지엄 발제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