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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갈등과 불신의 시대에 남북현대사를 다시 읽는다

 

 

김성보 金聖甫

연세대 사학과 교수. 『역사비평』 편집주간. 주요 저서로 『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 『화해와 반성을 위한 동아시아 역사인식』(공저) 등이 있음. kimsbo@yonsei.ac.kr

 

 

 

1. 역사문제가 갈등의 원천이 되는 사회

 

국제적으로 냉전이 해체되고 안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에는 상호 불신과 갈등의 골이 깊다. 어쩌면 냉전해체와 민주화로 인해 오히려 정치사회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하겠다. 갈등이 없으면 발전이 있을 수 없지만, 그 갈등의 정도가 지나치면 내적 발전의 에너지를 소진시켜 그 사회의 퇴행과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현재 한국사회의 갈등은 도를 넘어선 느낌이다.

갈등의 한복판에는 역사인식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과거를 성찰하여 더 나은 미래를 전망하는 혜안을 얻고자 함이 역사학의 본령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 역사의 담론은 갈등을 치유하는 지혜의 샘이기보다는 갈등을 증폭하는 진앙지가 되고 있는가? 친일반민족행위,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민주화운동과 의문사사건 등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해 국회 차원에서 합의가 이루어져 법률에 의거한 위원회들이 만들어졌고, 광범한 조사가 진행되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과거사 정리 자체에 대한 불신과 회의적인 시선이 여전히 뿌리깊다. 이대로라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의 취지대로 ‘진실과 화해를 통한 국민적 통합’이 과연 가능할지 우려된다. 한편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을 바로잡겠다고 뉴라이트측에서 최근 별도의 교과서 시안을 발표했지만, 역사를 균형적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역편향을 드러내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탈근대담론이 유행하면서 민족·민중 중심의 근대적 역사인식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일본의 우경적 역사해석과 교과서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동아시아의 역사갈등을 장기화하는 중이다. 이러니 역사분쟁, 심지어는 역사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각에서는 동아시아의 평화, 한국사회의 통합을 위해 역사문제를 차라리 접어두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역사를 논하는 것 자체를 외면하는 대중적 현상도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를 덮어둔다고 갈등 자체가 해소될지는 의심스럽다. 이 모든 문제들이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 냉전이라는 국제적 환경 속에서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후대에 이월되어 누적된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 시점에 또 이 문제를 덮어버린다면 장차 갈등의 양상이 더 심각해질 것이다. 속으로 썩지 않게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드러내어 진지하게 논의하고 갈등을 치유할 지혜를 찾을 때이다.

 

 

2. 탈근대론적 역사인식 등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최근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기존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면서 다른 방식의 접근법을 제시하는 두툼한 책들이 나왔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박지향·김철·김일영·이영훈 엮음, 책세상 2006)과 『근대를 다시 읽는다』(윤해동·천정환·허수·황병주·이용기·윤대석 엮음, 역사비평사 2006)가 대표적이다. 이 책들의 편집진은 공통적으로 지금까지 주류를 형성해온 한국근현대사 연구경향을 민족주의와 민중주의 또는 좌파민족주의로 규정하며 그 도식성을 비판한다. 제시하는 대안은 두 책이 서로 다른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는 반공주의와 성장주의를 축으로 한 뉴라이트의 역사인식과 탈민족·탈민중을 주창하는 탈근대론의 역사인식이 동거하고 있다. 이 동거를 불편해하는 탈근대론적 역사학자들이 따로 모여 새로 펴낸 책이 『근대를 다시 읽는다』이다. 이 책은 뉴라이트와 민족·민중 중심의 역사인식을 함께 비판한다. 양쪽 모두 “민족과 국가를 나눠 가진 채 또는 공유한 채 근대를 특권화하는 지적 실천의 일환”임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근대를 다시 읽는다』의 편집진은 국가와 시장의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근대적 삶을 성찰하고 그 극복을 추구한다.

뉴라이트측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집착하고 독재의 역사를 합리화하는 데 매몰되어 있다. 과연 그런 논리로 민주주의의 시대에 걸맞은 역사인식, 남북화해와 분단극복의 길을 제시하는 역사인식이 정립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전히 과거회귀적이며 이분법적인 냉전의 역사인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뉴라이트의 논리가 과거회귀라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라면 탈근대론적 논리는 현실의 요청을 무시한 채 미래로 너무 멀리 나아간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근대에서 탈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아니라, 특수 근대에서 보편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속해 있다. 식민지 피지배와 분단이라는 한국적 특수성 때문에 주권회복과 통일 같은 워낙 거대한 담론이 사회의 의제를 압도해온 터라 개인의 인권, 자유, 개성, 다양성 존중 같은 좀더 보편적인 근대적 가치는 주목받지 못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는 분단극복 같은 한국적 특수 가치와 더불어 개인의 인권과 자유 등 인류 보편의 가치를 함께 실현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역설적으로 현재 한국 탈근대론자들의 논의는 본격적으로 근대를 해체하기보다는 한국적 특수 근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류 보편의 근대적 가치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1 탈근대론의 또다른 문제점은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물결,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양극화,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의 자국중심적 외교 등 현재 한국사회가 국내외로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설득력있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탈근대론은 비판의 무기이지 대안의 무기가 되지 못한다.

앞의 책들과 함께 한국근현대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는 책으로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신기욱·마이클 로빈슨 엮음, 도면회 옮김, 삼인 2006)과 『대중독재』(임지현·김용우 엮음, 책세상 2004~5)도 주목된다. 식민지근대성론은 서구적 근대를 근대성의 유일한 지표로 설정해놓고 한국의 근대성은 왜곡되거나 미실현된 상태로 파악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통해 형성된 근대성 역시 서구적 근대와 대비되는 또다른 근대의 유형이라는 견해이다. 이는 근대성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뛰어넘어야 한다는 탈근대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대중독재론은 파시즘과 나찌즘에 대중이 열광했던 사실에 착안하여 근대적 독재가 강제보다는 동의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견해이다. 『대중독재』 편집진은 박정희독재도 대중독재의 한 사례로 본다. 이 또한 민주주의와 독재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기존의 통설에 반대하고 양자 모두를 근대의 유형으로 보며, 따라서 이 근대성 자체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탈근대론적 사고방식과 연결된다. 식민지근대성론과 대중독재론은 ‘근대성’의 문제에 대해 좀더 폭넓은 시야를 제공해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두 이론은 한국근현대사를 설명하는 데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여러 한계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둘 다 한국사회를 내면의 시각, 아래로부터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기본적으로 외부의 시각, 위로부터의 시각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지근대성론은 한국의 근대란 결국 식민지 지배자로부터 근대성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음을 전제한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 조선사회 자체의 근대화 지향,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과정 속에서 형성된 근대성에는 주목하지 않고 오직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에서만 근대성을 파악하는 외인론적 한계를 보인다. 대중독재론 역시 독재에 대한 대중의 능동적 지지라는 측면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결국 독재자의 의지가 어떻게 대중에게 침투하여 대중이 동원되는지에 촛점을 둠으로써, 독재에 대한 민중의 투쟁은 인정하더라도 소극적 의미를 부여할 뿐 지배권력의 그물에서 벗어난 대중의 자율적 공간은 간과하는 한계를 지닌다. 탈근대론 및 그와 연관된 식민지근대성론, 대중독재론은 한국근현대사의 흐름을 내면에서부터, 아래로부터 이해하는 데에는 아직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으며, 그 점에서 민족사학·민중사학이 여전히 저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기존의 한국근현대사 인식을 대표하는 민족사학·민중사학은 문제가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시대변화, 즉 소련·동유럽 공산권의 붕괴와 탈냉전의 조류, 신자유주의의 확산, 남한(대한민국)의 민주화,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위기, 남북관계 개선의 흐름이 누적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민족 대 반민족, 민주 대 반민주,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민중 대 지배층 같은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이념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가치의 상대성이 존중되는 오늘날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민족과 민중이라는 거대담론 아래에서 그외의 다양한 가치들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해온 점도 사실이다. 이제 민족과 민중의 담론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외의 가치들이 함께 존중되는 역사관이 요청된다. 남북한이 걸어온 현대사의 궤적을 이념적 편견에서 벗어나 냉철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역사인식, 이분법적 도식이 아닌 역사의 복합성과 다양성 그리고 상호관련성을 중시하는 역사인식, 이상과 현실이 조화되는 미래를 전망하는 데 적합한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3. 역사적 사실의 복합성

 

1980년대 이후 정치학·경제학·사회학·역사학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현대사에 대한 연구성과는 놀라울 만큼 광범하게 축적되어왔다. 이 성과를 통해 우리는 이제 한국현대사를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 다양한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언론이나 인터넷싸이트에서 벌어지는 한국현대사를 둘러싼 논란을 들여다보면, 논쟁구도가 지극히 단순한 이분법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반도를 분단시킨 책임은 미국과 소련 중 어느 쪽에 있는가’‘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인가, 분단정부 수립에 앞장서고 독재로 일관한 인물인가’‘박정희는 한국근대화의 지도자인가, 독재의 화신인가’‘김일성의 항일운동 경력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등 양자택일적인 논쟁들이 상당수이다. 이를 놓고 사회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양극단의 견해뿐이며 신중한 제3의 목소리는 관심을 끌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만다. 이러한 논란은 대부분 막상 지금까지 축적된 역사연구의 성과만 찬찬히 들여다보아도 해소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역사에서 객관성을 가지는 것은 파편화되어 있는 개개의 사실들이다. 그 사실들을 엮어서 하나의 상(像)을 그려내는 과정, 즉 역사화의 과정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관을 매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앞의 질문들에는 모두 여러개의 대답이 가능하다. 다만 그 대답들 중에서 아예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는 오답으로 처리해야 한다. 한국근현대사에서는 ‘객관적 사실’만 명확히 밝히더라도 불필요한 논란 없이 ‘역사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예가 무수하다. 객관적 사실 그 자체가 역사적 진실의 충분조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필요조건임은 분명하다. 만약 탈근대론자들의 견해처럼 아예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역사왜곡도 역사해석의 다양성이란 명분 아래 용납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적어도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답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관점에 서 있더라도 하나의 가능한 답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다양성의 존중 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며, 이 점은 역사인식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김일성 가짜 논란을 예로 들어보자. 수많은 관련 문헌자료가 공개되어, 이제 더이상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가짜설은 설 땅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북한에서 강조해온 조선인민혁명군의 역사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중국공산당이 지도했던 동북항일연군 역사의 한 부분임도 이미 20여년 전에 밝혀졌다. 김일성 가짜설이나 김일성의 독자적 항일무장투쟁설 모두 남북대립의 조건 속에서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되거나 신화화된 주장임이 객관적 사실의 확인을 통해 드러났다.2 일단 드러난 객관적 사실은 북한의 역사서술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자료들이 풍부히 공개된 뒤에 작성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전8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98)에는 김일성 스스로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역사학계의 논의는 김일성 항일운동 여부 자체가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한인들이 펼쳤던 활동들을 한국의 전체 민족운동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의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1950년 10월에 일어난 신천(信川)학살사건의 경우도 남북의 냉전적 대립 속에서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필자는 4년 전 신천박물관을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박물관의 내부는 미국을 ‘살인귀 미제’로 규정하고 그 만행을 규탄하는 전시물로 가득했다. 불에 타죽은 어린아이와 여성의 시신 사진들, 보존된 학살현장과 피학살자들의 무덤은 과연 인간보다 더 잔인한 동물이 있는지 자문하게 했다. 북측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인 3만 5천여명이 미군에게 학살되었다. 그러나 황석영 장편소설 『손님』(창비 2001)에 그려졌듯이, 이 사건은 황해도 현지 주민들간의 좌우익 분열과 대립의 결과였음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3 이를 북측에서는 반미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미군의 소행으로 간주하여 반미교육에 사용하고 있고, 남측에서는 좌익의 소행으로 돌리거나 사실 자체를 감추는 데 급급해왔던 것이다. 한국사회가 전쟁시기에 벌어진 그 끔찍한 학살사건의 객관적 실체에 가까이 다가설 용기를 가진다면, 이 사례는 남북분단의 비극이 준 상처가 얼마나 깊으며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남북간 화해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깨달을 수 있는 귀중한 소재가 될 수 있다. 언젠가는 신천박물관이 분노의 교육장이 아니라 화해의 교육장이 되어야 함이다.

다음으로 한반도 분단의 책임문제를 짚어보자. 38선 분할과 미국·소련 양국의 군대주둔, 좌우대립과 분단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분단의 비극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국내외 학자들간에 무수한 연구와 논의가 있어왔다. 38선 분할을 미국이 먼저 제안했고 이를 소련이 동의한 점은 객관적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분단의 책임소재가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38선 분할 제의에는 단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적 편의 때문이 아니라 전후 동북아시아의 주도권 확보 및 일본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어 있었음은 추정 가능하지만 명백히 실증되지는 않았다. 그 제안에 소련이 왜 선뜻 동의했는지, 38선 이북에 주둔한 소련군이 처음부터 친소적 정부를 수립할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불명확하다. 다만 지금까지 학계에서 연구된 성과를 종합해보면, 2차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주도한 것은 미국이며 소련은 이에 수동적으로 동참했다. 동북아시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미국이 태평양과 일본의 안보를 위해 한반도의 분할을 추구했으며 소련은 그 구도에 동참하면서 국경이 맞닿은 한반도의 북부지역에 친소적 권력을 수립하기 위해 사회주의세력을 후원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에 제약을 받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국가이익 차원에서 한반도문제에 접근한 것이다. 두 국가 모두 처음부터 분단국가를 수립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군대를 주둔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줄 통일국가가 들어설 가능성이 없다면 그 대신 분단국가 수립을 지원한다는 내부방침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 점에서 분단의 주된 책임은 미국에 있되 소련도 책임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4

이승만과 박정희 등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도 사회적 논의가 학계의 연구와 상관없이 얼마나 단순하게 진행되는지 보여준다. 이승만의 치적으로 꼽히는 1950년의 농지개혁을 예로 들어보자. 농지개혁을 실행하는 데 이승만의 의지가 작용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주제가 해체되는 거대한 사회변화에서 이승만이라는 개인의 역할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전근대 이래 유지되어온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정서, 농민운동의 전통, 일본제국주의의 급속한 붕괴, 먼저 토지개혁을 실시한 북한과의 체제경쟁, 체제안정화를 위해 토지개혁을 실시해야 한다는 미국의 압력, 초대 헌법에 농지개혁을 명문화하고 농지개혁법안을 관철한 진보적 국회의원들의 노력 등 많은 요소들이 결합하여 농지개혁이 실시된 것이지, 어느 개인의 업적일 수는 없다. 1960년대의 산업화 역시 박정희라는 개인의 역할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산업화과정에서 박정희의 카리스마가 크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의지가 실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근대적 관료층의 형성, 1950년대의 자본축적, 세계 자본주의경제의 변동, 미국의 동아시아정책, 일본의 한국정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업화의 역군으로서 경제성장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노동자들의 열성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산업화는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학계의 연구성과와 괴리된 단순 이분법적인 역사논쟁은 언론과 인터넷에서 중단되어야 한다. 그동안 학계가 연구성과의 대중화를 위해 좀더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전문가처럼 논쟁에 뛰어드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한다. 학자로서의 자세를 버리고 역사문제를 단순화하여 갈등을 지나치게 증폭시키는 일도 이제는 극복되어야 한다.

 

 

4. 남북현대사 다시 읽기

 

오늘날 남북한에서 현대사를 냉철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 최대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뿌리깊은 냉전적 인식으로 인해 여전히 양쪽에서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는 정통성 경쟁의식이다. 남북한 두 국가 중 어느 쪽에 정통성이 있는지 논하는 것은, 정치현실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세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었고 그 분단상황을 주체적으로 타파할 능력이 부족하여 결국 두개의 분단정부가 세워진 것인데, 그중 어느 쪽에 정통성이나 정당성이 있는지 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는 쪼개진 사과 두쪽을 놓고 어느 쪽이 진짜 사과인가 고르라고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정통성을 논함은 왕조 중심의 전근대적인 역사서술에서나 있는 일이다. 정치현실을 놓고 보더라도 남북간 정통성 경쟁은 각 체제의 존속을 위해서 양쪽 집권층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남북간 화해공존의 길에는 걸림돌일 뿐이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자신의 역사적 정당성을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에서 찾으며 그에 비해 남한정부를 친미·친일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절하한다. 반면 남한은 공식적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역사적 정당성의 뿌리로 삼으며 북한정권을 소련이 주조한 집단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상반된 두 논리는 어느 쪽도 역사적 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남북 모두 미국과 소련의 강력한 개입에 의해 형성된 국가권력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은 군정을 실시하고 유엔의 권위를 동원하여 남쪽에 친미적 국가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은 형식적으로는 북쪽에 군정을 실시하지 않았지만, 1990년대부터 공개되기 시작한 자료들에 의하면 북한의 정부수립과정에서 모든 중요한 사안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소련은 적어도 한반도의 북부지역에서 친소적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 자국의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것이다. 다만 분단국가 형성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은 후원자의 위치에 있었지 직접적인 권력주체일 수는 없었다.

두 강대국의 분할점령이라는 조건을 활용해 자신들이 지향하는 국가를 건설한 주역은 이승만과 김일성으로 대표되는 좌우익 정치인들이었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모두 항일운동 경력이란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 소련 각각의 이념과 국가이익을 대변함으로써 그들의 후원을 적극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결국 두 인물을 대표로 하여 일제하 자본주의국가 건설의 흐름과 사회주의국가 건설의 흐름은 각각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힘과 결합하여 남북에서 두개의 국가로 현실화되었다.

남북 국가형성기의 두 집권층을 단순 비교해볼 때, 북한의 집권층이 남한의 집권층보다 항일운동의 경력 면에서 우위에 있음은 사실이다. 입법기관을 비교해보면, 북한의 제1기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 중에서 항일운동으로 체포·감금된 경력자가 248명으로 전체의 43.3%이며, 이들이 감금당한 총 기간은 957년 4개월에 달한다.5 이에 비해 남한의 제헌국회의원 200명(보궐선거로 206명) 중에서 신간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공산당, 조선어학회사건 등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경력자는 33명이며, 항일운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경력이 있는 의원은 35명이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하거나 공무원, 판사, 금융조합 간부 등으로 일제 식민정책에 봉사한 경력의 소유자는 55명에 이른다.6 행정기관과 입법기관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지며, 이승만정권하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이 좌절되면서 남한정권의 정당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국가형성기 집권층의 경력이 곧 국가의 성격을 전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북에서는 보수적 민족주의 인사들과 박헌영 계열의 사회주의자 상당수가 점차 권력에서 배제되었으며 결국 김일성 중심의 항일무장투쟁 세력만이 권력의 핵심을 독점했다. 남에서는 정당성의 근거를 이루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인사 대다수가 막상 권력에서 배제되었지만, 정부에 참여하지는 않으면서도 국가로서의 남한을 선택한 중도 또는 보수 성향의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적 인사들이 상당수 있었다. 또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표상되는 ‘독립정신’이 초대 헌법에 명시된 이래 현재까지 민족운동의 전통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헌법적 권위를 유지해왔다. 이는 민주주의의 당위성과 결합하여 어떠한 정권도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부정할 수 없게 했으며, 이를 손상한 정권에는 정당성의 결여로, 반정부세력으로서는 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자산으로 작용해왔다. 국가형성기 권력 정당성의 한계와 장기간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더불어 민주화가 실현되고 대미종속성이 점차 해소되고 있는 것은 결국 남한이 단순히 친미·친일세력의 국가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권력 차원의 정당성과 국가 차원의 정당성은 이런 점에서 구별되어야 한다.7

북한에서는 집권층이 처음부터 정당성을 독점하여 그들의 항일운동 경력을 유일한 혁명전통으로 고정시키고 다른 어떠한 세력의 도전도 배제했다. 이는 체제의 경직화와 연동되는 문제이다. 이에 반해 남한은 집권층이 지닌 정당성의 한계 속에서 민족주의·민주주의 지향세력의 줄기찬 도전이 이어져 체제의 역동성이 유지되어왔고 그 과정에서 점차 국가로서의 정당성이 확대되었다. 최근 정부와 국회가 추진하고 있는 각종 과거사 정리작업은 훼손된 국가의 정당성을 확보해가는 하나의 절차에 다름아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반공적 보수인사들이 국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절차를 강력히 반대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필자는 과거사 정리의 의미가 남한의 국가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통과의례로 축소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과거사 정리는 현재의 조건에서는 남북이 따로 진행할 수밖에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남북의 화해라는 거시적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남한의 국가적 정당성 확인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 차원의 화해와 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역사인식 형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1876년 개항 이래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까지 130여년간 한국의 근현대사는 숱한 격변의 연속이었다. 그 역사를 단순명쾌하게 몇마디로 정리하기는 힘들다. 잠시 중국 현대사상사를 ‘계몽과 구망(救亡)의 이중변주’라는 맥락에서 정리한 리 쩌허우(李澤厚)의 논지를 빌려보자. 그는 근현대 중국이 시종일관 강국의 핍박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반제국주의의 임무, 즉 ‘구망’이 ‘계몽’(사상계몽, 인권과 자유, 개성, 민주주의와 과학, 반봉건)을 압도해왔다고 해석하면서, 앞으로는 중국사회에 ‘계몽’의 가치가 존중되기를 희망했다.8 이 논지를 원용하여 필자는 잠정적으로 한국의 근현대를 자주적 개혁과 종속적 실용의 이중변주로 정리해보고 싶다. 19세기말 내우외환의 시기 이래 한국사회는 반제국주의·반봉건의 자주적 개혁을 추구하는 집단과 제국주의·자본주의 세계질서의 현실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점진적인 주권회복과 경제성장을 꾀하는 집단이 대립·충돌해왔다. 두 흐름의 대립이 너무나 강력하여 이 둘을 절충·조화시킬 지도자나 중간집단은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로 인해 분단과 전쟁을 막지 못했으며, 남한 내부에서도 독재하에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쪽과 민주화를 추구하는 쪽이 끊임없이 대립했다. 그러한 갈등·대립은 때로는 한국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순간의 머무름 없이 역동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두 흐름의 갈등·대립을 축으로 하는 한국근현대의 역동성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설명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남한 내부적으로는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이중과제를 동시에 실현한 지 20년이 지났으며, 한미관계도 점차 대등한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남북관계도 상호대립을 딛고 점차 화해와 공존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갈등과 대립이 아닌 상호 이해와 존중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오늘날의 실용적 건설의 토대 위에서 자주성과 개혁을 점진적으로 실현해가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압축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미처 어느 쪽도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 개인의 인권과 자유, 다양성 존중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한국적 근대의 완성을 기해야 하지 않을까?

 

 

5. 맺음말

 

검은색과 흰색이 대립할 때 회색의 대안을 제시함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무채색임에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무채색 이외에 유채색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줄 때 인식의 진전, 시야의 확대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한단계 더 높은 차원에서 낮은 수준의 갈등을 치유할 혜안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주류를 점해온 민족사학·민중사학은 지금 도전에 직면해 있다. 1987년 민주화를 통해 냉전과 독재의 시대에서 탈냉전과 민주주의의 시대로 넘어온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여전히 과거의 이분법적 도식에 얽매이거나 작은 실증에 만족하는 방식으로는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이제 이념의 편견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야로 분단극복과 민주주의의 정착에 기여할 새로운 역사학이 요청되고 있다. 물론 민족과 민중, 민주주의 같은 거대담론은 여전히 유효하며 따라서 민족사학·민중사학의 생명력은 남아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흐름에 적극 부응하지 못한다면 미래를 열어가는 진보적 역사학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며 도그마화하는 퇴행적 역사학이 되어버릴 것이다.

민족주의 고수냐 탈민족주의냐 하는 극단적인 논의는 비생산적이다. 두 극단을 피하면서 민족주의의 점진적 지양, 극복을 통해 한민족이 세계와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민중은 선험적인 변혁주체가 아니라 실로 다양한 개개인의 삶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총체로서 역동적으로 포착해야 한다. 탈냉전과 민주주의의 시대에 객관적 사실을 더욱 풍부히 밝혀내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을 찾으며, 갈등과 대립보다는 화해와 상호존중의 가치관이 반영되는 ‘민주적 역사학’, ‘역사인식의 민주화’가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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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졸고 「근대의 다양성과 한국적 근대의 생명력」, 『역사비평』 2001년 가을호, 189~96면.
  2. 이종석 「북한 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 『해방전후사의 인식 5』, 한길사 1989; 와다 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아세아문화사 1999.
  3. 박명림 『한국 1950-전쟁과 평화』, 나남출판 2002, 623~32면.
  4. 졸고 「소련의 대한정책과 북한에서의 분단질서 형성, 1945~1946」, 『분단 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 역사비평사 1995;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5. 『북한최고인민회의자료집 1』, 국토통일원 1988, 100면.
  6. 김득중 「제헌국회의 구성과정과 성격」(성균관대 석사논문), 1994, 94~99면.
  7. 정권과 국가의 관계, 정당성의 문제, 분단과 민주주의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이미 백낙청·강만길·최장집·김동춘·박명림 등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다. 워낙 연구성과가 방대하여 여기서 구체적으로는 거론하지 않는다.
  8. 리 쩌허우 지음, 김형종 옮김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지식산업사 1992)의 역자서문과 제1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