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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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金惠順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등이 있음.

 

 

 

화장실

 

 

어찌나 높이 솟아 있는지

서울이 싫어 죽을 지경인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는 밤하늘의 침을 받을 수 있는 집

나는 한밤중 일어나 먹구름 속에 숨은 초승달 같은

두 눈을 번쩍 뜨고 화장실부터 간다

당연히 공중 높이 치솟은 화장실

그 높은 배관 위에 걸터앉아 나는 생각한다

오늘은 내 시집이 출간된 날

일평생 나를 빨아먹은 내 시들

레버를 당겨 시가 왔던 그곳으로

이름없는 것들 우글대는 그곳으로

흩어 보낼 수 있다면

 

나는 산속에서 길 잃은 사람처럼

구름들이 쏟아붓는 분노를 받고 싶다

높디높은 하늘에서 내려오느라 얼어붙은 침들을 목덜미에 맞고 싶다

 

엊저녁 잠들기 전 흘린 눈물은 어디로 갔는가

작년 이맘때 내 온몸을 휘감던 빗물은 어디로 갔는가

저녁마다 발톱 끝까지 감전시키던 두통은 어디로 갔는가

저 아래 지붕들마다 올려진 물탱크들이

밀봉된 우물처럼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서울의 벼랑에 매달려 나는 몸을 씻는다

세척 솔을 들어 말끔히 몸속도 닦고 싶다

빨래처럼 스카이라인에 걸려 흔들리는 집에 산다는 것

시집 출간일의 화장실도 부르르 떨고

높이 솟은 배관들도 덩달아 부르르 떨고

이름 붙인 자의 이름은 여전히 더럽다

 

몸을 다 씻고 나오자 베란다 창밖엔

말을 배우기 이전의 내 혀가

침을 줄줄 흘리며 붙어 있다

내게 전해줄 슬픈 말을 평생 참은 것처럼

 

 

 

민들레

 

 

나 할미 적에, 나 똥오줌도 못 가릴 적에, 나 눈멀어 내 님 얼굴도 못 알아볼 적에, 나 귀멀어 저승 다녀온 내 님 목소리도 못 알아들을 적에, 나 꼬부랑 할미 적에, 아무도 나 눈속에 안 넣고, 아무도 내 목소리 귓속에 안 넣게 되었을 적에, 밤마다 북두칠성 업고 다니느라 허리 구부려져 비척비척 울기만 할 적에, 나 삼신할미보다 더 늙어버렸을 적에, 머리칼이 희다 못해 실비보다 가늘게 온 둥 만 둥 할 적에, 나 할미 적에, 갑자기 봄바람 불어올 적에, 봄바람이 내 치마를 훌러덩 걷어가버려 내 이 빠진 입술이 척 벌어지고, 나 웃음을 참지 못해 얼굴에서 주름이 다 쏟아질 적에, 바로 그 적에, 내 몸속에서 내가, 내가, 이 내가 막 밀려나올 적에, 내 귓속에서, 콧구멍 속에서, 눈구멍 속에서 엄지보다 작고 깨알보다 작고 개미알보다 작은 아가들이 눈썹보다 가는 머리털 길러 자꾸자꾸 쏟아져나올 적에, 하도 하도 아가들이 많이 쏟아져나와 두 손으로도 다 받지 못하고, 온몸으로도 다 받지 못해 봄바람에 마구 마구 허우적거릴 적에, 그 아가들이 천지사방으로 봄꽃 메아리라도 터진 것마냥 마구 마구 터져나갈 적에, 옛날 옛날, 그 옛날 적에, 나 호호할미 다 벗어버리고 바알간 대머리 아기 되었을 그 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