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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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상웅 白象雄

우석대 문예창작과 1. 1981년생. bluepostman@naver.com

 

 

 

꽃 피는 철공소

 

 

철공소 입구 자목련은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망치질 소리가 앞마당에 울려퍼지면요

목련나무 우듬지에 남은 살얼음에 쨍 하고 금이 가요

내 친구 스물일곱살은 강철을 얇게 펴서 봄볕에 달구죠

 

한잎 한잎, 끝을 얌전하게 오므려 묶어서

한송이 두송이, 용접봉 푸른 불꽃으로 가지에 붙여요

 

내 친구 스물일곱살의 팔뚝에도 꽃이 벙글거려요

팔목에 힘을 줄 때마다 자목련꽃이 팽팽하게 열리죠

자색 화상 위에 푸른 실핏줄이 돋아나요

그걸 보고 여자들이 봄날처럼 떠나기만 했대요

 

용접봉을 손아귀에 쥔 내 친구 스물일곱살

오늘은 철공소 마당에서 철목련을 매달아요

가지마다 목련꽃이 벌어져서 햇볕을 뿜어대죠

꽃 핀 철문은 허공에 경첩을 달고 식어가고 있고요

밤에는 하늘에다 꽃잎을 붙이느라 잠도 못 자요

 

 

 

코끼리 무덤

 

 

이 노란 코끼리는 지축을 쿵쿵 울리며

걸어오지 않았다, 숲에서 숨을 거둔 뒤에야

대형트럭에 혼자 실려 왔다

늪으로 걸어가서 스스로 가라앉지 못한

기름진 심장은 마지막 두근거림까지 뜨거웠다

주인이 흥정을 끝내고 숲으로 돌아간 뒤

백제폐차장 앞마당, 코끼리는

딱딱한 땅에 코를 박고 깊은 잠이 들었다

코끼리가 여기까지 끌고 온 육중한 길이

땅에 내려놓은 코끝에서 마침내, 끝났다

아름드리나무의 옆구리 때려 쓰러뜨리고

하늘 속의 번개를 끌어내리고

무허가 판잣집의 처마를 귀뺨 치듯 날려버리던

이 길쭉한 코는, 아파트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고

주름진 들판을 반듯하게 잡아 펴던

고독한 손이었다, 고독해서

아무도 잡아주지 않아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코끼리의 손,

그렇다고 진흙 위에 물렁한 발자국을 새겨

대지에 심장의 엔진소리를 들려줄 수도 없는

코끼리의 발은 이제, 녹슬고, 뻣뻣하고

거무튀튀하다, 이 노란 코끼리는 울고 싶을까

혈관을 잘라내고 뭉클했던 오장육부 떼어내기 전에

크게 한번 울어 지평선을 자욱하게 물들이고 싶은 것일까

땅에 자신의 무덤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데

제 코를 한치도 들어올릴 수 없어

작고 까만 눈 감을 줄 모르는 이 노란 코끼리를

그렇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구동성

포클레인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터널 

 

 

공주에서 천안 사이, 아버지가 뚫었다는 터널을 지나간다.

 

산의 늑골 속으로 고속도로를 집어넣던 아버지, 속도가 없는 터널 속에서 길은 늘 바위 속에서 똬리를 틀고 꼭꼭 숨어 있었다.

 

어느 겨울에는 뒤돌아보니 눈발이 둥근 출구를 쇠창살처럼 가리고 있었다고 한다. 감옥, 속에서 오히려 환한 아버지의 눈은 석달쯤 벽만 보고 살았다. 맞은편 쪽으로 나가기 위해 밤낮으로 허공에 백열등을 매달고 구멍을 뚫었는데, 터널이 마침내 뚫린 날, 감옥에서도 밀려난 아버지의 눈에 터널은 한마리 거대한 구렁이로 보였다고 한다.

 

속도는 금세 아버지를 잊었다. 늙은 두더지의 말린 가죽처럼 마루에 앉아 볕을 쬐는 아버지, 나는 창호지 구멍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방 안에서 훔쳐보고는 했다. 아버지는 저렇게 평생 갇히기 위해 전전긍긍 살았나?

 

터널을 통과하니 폭설이다. 아버지의 터널에서 나는 서서히 멀어져야 한다. 눈발을 파헤치며 버스가 두더지처럼 기어가기 시작한다.

 

 

 

폭설의 기억

 

 

1

 

북받친 사람처럼 눈 쏟아졌다. 녹슨 용골 드러낸 어선은 급한 마음에 뱃머리 항구로 돌리고 육지를 밀었다. 눈발은 그대 아픈 곳에 관심도 없어 척추 부러진 어선을 껴안았다. 뼈마디 뚫고 솟아오른 엔진이 늙고 비릿하였다. 눈덩이가 기름때 낀 심장을 철퍽 삼키며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파란 페인트칠 벗겨진 앙상한 배를 하얗게 씹으며, 눈발은 고장난 어선의 멱살을 잡던 쇠줄을 깨물어 끊었다.

 

 

2

 

백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다. 마을 바깥에 그리운 이 있었지만, 발신음은 산을 넘지 못하고 귓바퀴에 차가운 신호음만 뿌렸다. 귀지 파내면 짠한 이름만 묻어나왔다. 주먹 쥐면, 길은 튼 손등처럼 툭 끊어졌다. 그리움도 백년 만에 부러졌을까? 혼자 남을 때, 내 사랑의 방식은 바닥에 깔려 출항을 기다리는 그물이었다. 겨울볕에 누워, 얼고 젖기를 반복하며 어선의 등에 업히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것. 발자국은 방파제 끝까지 질질 끌려다녔다. 눈덩이가 바다로 떨어질 때 배의 후미는 출렁 가라앉았고, 폐선의 굽은 등에 꽂힌 깃발은 외로운 이의 발자국을 내놓으라는 듯, 하얀 쇠창살에 갇힌 수평선을 그만 놓아주라는 듯, 온몸으로 울며 눈송이의 귀싸대기를 올리고 있었다. 허공 속에 오롯이 찍혀 있는 눈송이의 발자국, 오래 서 있었기에 단단한 발자국이 먼 바다로 밀려가고 있었다.

 

 

심사평

 

대학생의 시에서 기대하는 것은 기성의 시에서 맛보기 힘든 활력과 경탄할 만한 신선미로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삼투하는 시적 감수성과 완성도이다. 이번 응모작 중에선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한 작품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최근 시단의 흐름을 반영하듯 환상과 내면의식이 교직된 시에서부터, 인생의 낙오자에게 연민을 느낀다든가 사회적인 사건에 공명하는 등의 서정과 현실인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시의 위기가 갈수록 확산되는 불확실성의 세계 속에서 우리 시의 전위에 해당되는 대학생들은 여전히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민하는 패기에 찬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사회가 어려워질수록 강해지는 시의 위력을 새삼 실감케 하는 일이다.

2006년 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응모자는 모두 470명이었다. 심사에서는 이 상이 젊은 대학생들이 벌이는 시의 축제임을 고려해 패기와 독창성을 최우선에 두었으나, 그것 또한 완성도가 뒷받침되었을 때에만 시적 울림을 획득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심사는 2차에 걸쳐 이뤄졌다. 심사위원 세 사람이 응모작들을 나누어 1차 심사를 본 뒤 각각 본심에서 논의할 10명 내외를 선정했다. 2차 심사에서 24명의 후보자는 8명으로 압축되었고, 최종으로 4명이 당선을 놓고 각자의 솜씨를 뽐냈다. 이들은 저마다 쓰레기통 속에서 주워낸 넝마조각으로도 자기를 표현해낼 수 있다는 듯 직관에서 샘솟는 상상력의 향연을 보여주었다.

「게발」 외 4편(이용헌, 방송통신대)은 우리들의 삶에서 지속하고 확산하는 이미지를 풀어내는 솜씨가 장점이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이주노동자의 삶을 묘사와 진술의 적절한 배치로 현장감있게 전달하는 등 현실과 결합된 상상력이 높이 사줄 만하다. 하지만 여타의 작품에서는 현실인식이 깊이를 획득하지 못하고 말놀이나 상투적인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때로는 서정의 외피에 슬며시 몸을 맡기곤 한다.

「푸른 뼈」 외 4편(손병걸, 경희사이버대)은 꾸미지 않은 진솔한 목소리가 돋보인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나오는 육성은 심해에서 울려퍼지는 고래의 울음을 연상시킨다. 자신이 겪고 있는 육체의 장애를 정신의 단단한 ‘푸른 뼈’로 발라내는 통증의 미학은 재기발랄한 대학생들의 시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감동을 안겨준다. 그러나 당선작으로 뽑기에는 언어의 밀도가 부족하고 자신의 감정이 정련되지 못한 채 드러난 아쉬움이 있다.

「말벌 집」 외 4편(이광청, 대진대)은 당선작과 끝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 작품은 나이 들면 없어지기 쉬운 젊은이만의 찬란한 감수성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짧은 시행 속에서 자연과 사물을 개성적인 언어감각으로 채집하는 흡인력이 매우 빼어나다. 하지만 지나치게 섬세한 언어의 부력(浮力) 탓에 메씨지가 약화되고 있는 것이 적지않은 흠결이다. 좋은 시적 자질을 잘 살려 앞으로 수공예적인 언어미학에서 벗어나 한달음에 시적 주제의식을 압축해내는 ‘감각의 깊이’를 획득하리라 믿는다.

당선작 「꽃 피는 철공소」 외 3편은 젊은 시들이 빠지기 쉬운 소재 편향성이나 단순한 유희, 말장난에서 벗어난 균질감을 보여준다. 메씨지와 그것을 표현한 언어, 이야기와 전개 등 다양한 시적 요소들이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젊은 시인은 일상과 자기 주변의 체험을 바탕으로 설득력있게 상상력을 전개한다. 특히 자연과 인간이 빚어내는 노동의 힘센 아름다움을 표현한 「꽃 피는 철공소」에는 여러모로 그러한 시적 자질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는 봄날의 철공소 풍경을 리듬감있게 그리고 있는데, 망치질과 용접의 이미지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 빚어내는 노동의 무늬를 복합적인 형상으로 전해준다. 나머지 응모작에서 산문화로 인한 설명적인 대목이 다소간 눈에 띄었으나 전반적으로 시적 수준이 고른 점이 선자들을 안심케 해준다. 이번의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리듬은 단순한 운율이나 설명적인 이미지를 탈피한 구체적인 내용물에서 나온다는 점을 명심하여 대성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본심에서 논의된 「폐지 줍는 여자」(임난미, 순천대) 「맨발」(진유례, 서울예대) 「거미」(정해빈, 한양대) 「달은 단번에 돌아눕는 법을 모른다」(전희진, 서울시립대) 등도 쉽사리 손을 놓을 수 없었음을 부기해둔다.

│김광규 황인숙 박형준│

 

 

당선소감

 

저는 키가 작고 말랐지만, 제 안에는 코끼리가 살고 있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도 코끼리 심장만하죠. 고마워요. 당신 때문에 제 심장은 첫사랑을 만나듯 두근거렸습니다. 쿵쿵, 당신의 귓속으로 옮아갈 것만 같았던 불그스레한 말,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했지만 이 자리를 빌려 말하겠습니다. 당신 때문에 제가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저의 전부는 사람입니다. 지긋한 웃음만으로도 힘이 되어주시는 정양 교수님, 넉살좋은 선배 같은 송준호 교수님, 시의 비밀을 만화방에서 만난 동네형처럼 알려주시는 안도현 교수님, 나태했던 저를 끌어주셨던 강연호 선생님. 터널 속에서 일하시는 아버지, 저의 늦은 대학 입학에 속상하셨을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여공인 동생. 시시한 컴퍼니‘문학공갈’동인들, 김성철, 고태관, 최민영. 지쳐갈 때마다 멀리서 독이 되어주는 김미란, 영사기를 돌리며 시집을 읽는 성우형,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나에게 힘을 주던 영철형, 책 만드는 외계인 정유민. 제게 시라는 마약을 가르쳐준 승철선배, 저 앞에서 걷고 있는 석정형, 시의 샅바를 잡는 관우선배.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발전소,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식구들과 동아리 시륜 동인들. 중국 칭따오(靑島)에서 외로이 맥주를 마시고 계실 강희선배, 유부남 시인 박성우형. 벽을 사이에 두고 함께 시를 쓰고, 아프고, 웃어주던 지음, 나나. 당신들 때문에 제가 살고 있습니다.

 

못난 시를 예쁘게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좋은 시집으로 저에게 공부를 시켜주신 김광규, 황인숙, 박형준 선생님.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히 쓰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코끼리처럼 걸어가겠습니다. 쿵쿵,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할 나라로. 쿵쿵.

│백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