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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문학에 대한, 타자를 향한 변론

박민규론

 

4

강동호 康棟皓

연세대 경제학과 4. 1984년생. finhir@naver.com

 

 

 

1. 문학의 위기에 서서 박민규를 부르다

 

이 땅에서도 문학이 실종되었다는 괴소문이 횡행할 무렵 터져나온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한국문학에 대한 뇌사선언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학의 힘겨운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역시나’라는 절망의 탄식을 뱉어내게 하였다. “문학에 아무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86면)는다는 저명한 평론가의 체념적인 말 한마디가 그렇게나 큰 상실감을 안긴 이유는 어쩌면 이미 시대적 징후로 스며나오기 시작한 죽음의 징조를 애써 감추려던 이들의 자기기만과 그로 인한 무기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증상들은 한사람의 독자로서 요즘을 반추해볼 때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베스트쎌러 목록의 수위를 차지하는 작품들이 지닌 가볍고 피상적인 주제들, 그리고 유희 수준을 넘지 못하는 상상력은 이러한 우려를 더욱 현실화하고 있다. 유명한 시의 제목을 빌리자면 실로 ‘쉽게 씌어진 시’와 ‘흔해빠진 독서’만이 남아버린 실정이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해 보이는 카라따니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내가 쉽사리 문학에 대한 고루한 기대를 거두지 않는 이유는 이제껏 문학이 점유해온 어떤 특수한 위치에 대한 향수와 냉혹한 현실에 대한 인식 사이에서 나 스스로도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나는 박민규(朴珉奎)를 이야기하려 한다. 왜 하필 박민규인가. 첫째는 그가 대중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는 작가 중 하나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서사가 기대고 있는 모더니즘적 비판의식이 카라따니 코오진이 문학에 기대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박민규의 작품이 카라따니의 흉흉한 선고를 전복할 만큼 완벽한 대답이 될 수도 없고, 박민규 스스로도 한국문학의 부활이라는 어쩌면 숭고하기까지 한 사명을 띠고 글을 쓰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쾌하게 때로는 힘겹게 써내려온 글들에 녹아 있는 현실 대항의 일관된 몸부림에서 문학이 뇌사상태에서 벌이고 있는 힘겨운 내적 투쟁을 읽는 것이 지나친 오독은 아니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 증거를 포착하기 위한 박민규 소설에 대한 접근법은 어떠해야 할까. 최근 대중이 ‘소설’가 박민규에게 보낸 열광에 가까운 관심의 배경에는 우선 쉽고도 개성적인 문체에서 오는 신선함과 전복성이 자리잡고 있다. 기존의 ‘리얼리즘’ 소설이 지닌 일상성의 엄숙함이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이 독자로 하여금 생각의 속도를 늦추게 한 것에 비추어볼 때 박민규의 텍스트가 지닌 문체의 개성과 서사의 속도는 확실히 지금의 대중에게 여러모로 매력적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무규칙적 상상력이 지니는 키치적 감수성은 만화 주인공, 프로야구단, 대왕오징어, 야쿠르트 아줌마 같은 익숙한 캐릭터들을 소설공간으로 호출하였는데, 이런 점 역시 독자들에게는 엉뚱하면서도 엽기적인 코드의 일환으로서 퍽 인상적인 것이다. 게다가 기인(奇人)처럼 보이는 그의 외모와 삶의 이력마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얻게 된 소설‘’로서의 존재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박민규의 참신성에만 과잉 집중된 관심은 역으로 박민규 문학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에 장애로 작용한다. 그의 문학이 일관되게 발화하는 주제의식이 깊이 논의되기보다는, 일반 독자층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평단에서도 그의 문학 혹은 작가적 이력이 지니는 무규칙성이라는 신선함에 촛점이 맞추어지는 듯한 인상이다. 이는 또 박민규의 작품 스스로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박민규가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박민규도 그것에 호응을 하면서 그의 도발적인 문체와 엽기적인 소재 선택은 계속되었다. 기존 본격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이같은 실험적 글쓰기는 단편집 『카스테라』(문학동네 2005)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는데, 이는 외계인, 야쿠르트 아줌마, 날 수 있는 오리배, 모든 것을 삼키는 냉장고 등의 소재들이 지닌 실험적 면모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언어가 사고의 전복과 더불어 형식 혹은 이미지의 전복을 통한 ‘낯설게 하기’ 효과에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낯설음을 경험하게 하는 소재와 서사방식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그 효과는 체감된다. 그러므로 낯설음을 형식적 차원에서만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문학이 소재의 문제에만 골몰하게 된다면 그 수명은 길지 않을 것이다. 같은 형식이 계속될수록 생동하던 언어의 생명력이 화석화됨으로써 언어는 공허한 기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민규 소설을 형식상의 차이나 신선함만으로 규정할 때 그것이 지닌 한계는 명백해진다. 아무리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해체와 회의주의가 지적 유행이 되었더라도 문학마저 표류하는 기표로 받아들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문학이 문학일 수 있는 기반은 바로 그것이 담고 있는 통렬한 자기반성적 사유와 자기호명적인 문제의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민규의 문학이 더 멀리 나아가고 오래 읽히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작품들에 담긴 일관된 주제의식을 잡아내어 비평적 사유의 지평에 올려놓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평에서 펼쳐지는 박민규만의 몸부림을 통해 그의 문학이 여전히 모더니즘적 현실의 모순을 전복하고자 하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음을 밝혀내야 한다. 이러한 소망이 독자의 눈앞에 현현(顯現)할 때 그리고 이 소망의 서사가 더 멀리 나아갈 가능성이 엿보일 때, 박민규 소설에 대한 온당한 평가와 함께 문학의 죽음에 대한 대답이 어렴풋하게나마 마련될 것이다.

 

 

2. ‘포스트모던’ 타임의 ‘포스트’ 「모던 타임즈」

 

근대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로 자본주의를 비난하지 않은 문학의 시대가 있었을까. 자본주의로 인해 소멸해가는 인간성을 비판한 수많은 글쓰기는, 때로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고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발기를 촉구했으며,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도피로 나아가기도 했다. 이 모든 경향이 문학이라는 영역 안에서 서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카라따니의 말대로 근대 들어 윤리적 소명의 호출에 문학이 적극적으로 응답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적 상상력은 ‘공공의 상상력’으로 탈바꿈하여 현실의 모순에 대항적 포즈를 취함으로써, 플라톤적 언표를 빌리자면 이데아를 가리키는 서사적 의무를 안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현실의 부조리함을 꼬집는다는 점에서 박민규의 소설은 근대문학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일관된 대항체로서의 세계는 자본주의 질서와 그로 인해 파생된 약육강식의 모습이다. 『지구영웅전설』에서는 그것을 슈퍼맨과 배트맨 등의 ‘마운틴의 체계’로 상징하였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는 프로의 세계로 대변되는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244면)가 서사의 안티테제로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단편집 『카스테라』는 자본주의 내에서 소외받고 있는 개인들의 소소한 삶을 더욱 초현실적이고 자아분열적인 서사를 통해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1

그렇다면 박민규의 눈에 비친 자본주의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가 인식한 세계는 흡사 ‘헐크 호건’처럼 우리에게 어느새 “와락, 헤드락을 걸어”(「헤드락」 248면)오기도 하는데, 그때 우리는 호건의 근육이 가하는 거대한 압박감에 “픕쁩 쁩 브쁩에 가까운 소리”(250면)만 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우리의 현존 앞으로 다가오는 방식을 우회적으로 그리고 그만의 독창적인 유머로 표현한 것인데, 급작스러운 호건의 등장에서 발현되는 비실재감은 우리의 실존의 부조리성을 압축하고 있다.

「너구리」는 자본주의로의 편입과정을 좀더 상세하고 친절한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닥쳐 개새끼야!”(50면)라는 전복적인 말 한마디로 일약 스타 로커가 되어버린 주인공이 어느새 ‘매사에 긍정적’인 인간이 되어간다는 서사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다. 그래서 인류는 이 자본의 관계망 속에서 적응하게 되는데, 그들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라는 “경제학의 아버지가 남긴 이 수려한 문장”(「야쿠르트 아줌마」 153면)에 안심하는 존재들로 탈바꿈한다. 그리하여 시장의 논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산수의 법칙’을 주입하게 되고 이들에게 산수는 ‘생존을 위한 최대효율 산출의 산수’를 의미한다. 요는 “짧고 굵게 번다”(「기린」 71면)이다.

 

나는 그렇게 어려운 걸 바라진 않을걸세. 그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그런 일이라고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뭔가를 얻기 위해선 자신도 뭔가를 내줘야 하는 게 인생의 법칙이라네. 심각한 문제가 아니란 얘기지.

-「너구리」 61면

 

그렇게 자본주의사회에서 통용되는 등가교환의 원리는 현사회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논리가 되어버렸다. 「너구리」에서 주인공 인턴사원 ‘나’가 남색을 즐기는 인사부장에게 배우는 것은 이 교환의 원리가 ‘인생의 법칙’이라는 뻔뻔한 진리이다. 따라서 인사부장과 주인공은 성(性)과 일자리를 교환한다. 현대 경제학에 의하면 이 교환의 법칙에서 왜곡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손해보는 장사 같으면 교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합리성의 작동기제가 우리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사부장의 말대로 교환을 굳이 그리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계약의 관계에 참여할지 말지는 결국 개개인의 자율적 의사에 달려 있으니 누구도 강요당하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교환체계 내에서 인간이 지니게 되는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박민규의 언표를 빌리자면 프로가 되기 위해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는 자본증식의 움직임은 결국 인류의 삶을 경쟁의 코드로 박제해버린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나에게 알려주는 인생의 아포리즘은 “경쟁은 이제부터 시작”(『삼미』 29면)이라는, 어떤 도덕적 뉘앙스도 풍기지 않는 살벌한 생태계의 생존경쟁 법칙이다.

박민규 소설에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존경쟁에서 뒤떨어진 존재들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따라서 모두 의도된 서사전략이다. 매번 꼴찌만 하는 삼미 프로야구단(『삼미』), 일흔세번의 지원서를 작성하고 낙방한 취업준비생(「펠리컨」), 손바닥만한 공간에서 새우잠을 자는 나(「고시원」), 정신병원에 갇힌 바나나맨(『지구』), 시급 1500원을 받고 일하는 푸시맨(「기린」) 등은 그들이 가진 예외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어떤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생리적인 동질감, 즉 익숙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다지 충격적일 것 없는 반전의 서사는 단순한 주제의식으로 환원되어 익숙한 대상을 우리 눈앞으로 호출한다. 그 주제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이라고 하면 너무 진부한 설명일까. 그러나 이 진부한 인식이 박민규 문학의 새로움 뒤에 숨어 있다는 것은 비교적 명백한 사실이다.

 

피부가 견딜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수치의 온수를 머리끝부터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증기가 피어오르는 그 물줄기 속에서 나는 갑자기 혼자란 느낌이었고, 쓸쓸했고, 눈물이 났다.

-「너구리」 63면

 

교환의 관계 속에서 주인공은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만다. 박민규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러니 무엇인가, 이상하다 느낄 법한데, 아, 누군가한테 속은 느낌이 들어서, 살펴보니 그 사기범은 인류였고 사기의 내용은 자본주의의 등가교환 원리였다. 결국 등가교환 내에서 등호의 존재와 인간의 자발성이라는 것은 존재론적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사람들에게 원할 때만 교환에 참여하라며 점잖게 말하는 듯하지만, 실상 인간은 이 관계에 참여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슈퍼맨에 의해 만들어진 “사과상자”(『지구』 67면) 같은 곳에 살고 있어서 이 교환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데, 그래놓고 “덥기만 덥고, 짜디짠, 지구”(「기린」 70면)는 이 인류와 항상 왜곡된 관계만 맺으려고 한다. 주변부에 속한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인류의 대부분이 주입받은 “노예의 산수”를 사용하면서 “마운틴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눈물이 나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 결과 인간의 실존은 박탈된다. 찬란하고 정치한 자본주의의 생산과 교환 체계에서 인간으로서의 주체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방이라고 하기보다는, 관이라고 불러야 할 사이즈”(「고시원」 280면)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가 죽음에 이르는 세태는 자본의 무한증식에 실존의 공간이 침식당함으로써 계속된다. 따라서 교환관계에서 인간의 실존은 언제나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너와 나는 세계가 <깜빡>한 인간들이야.

-『핑퐁』 219면

 

최근작 『핑퐁』은 이러한 억압의 관계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변환되어 현상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의 두 주인공은 왕따 중학생으로 학교라는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이름마저 가질 수 없는데, 한명은 맞는 모습이 못과 같다 하여 ‘못’이라 불리고 다른 한명은 이스터섬의 모아이라는 큰바위 얼굴을 닮았다 하여 ‘모아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치수’라는 학교 짱에게 매일 신체적인 폭력에 시달리지만, “스스로 구원할 생각도” 없으며 “구원할 수도” 없다는 허무주의에 젖어 잔존하고 있다. 어차피 인류가 경쟁을 하고 있고 담임선생의 말대로 세계가 “2%의 우수한 인간”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것이라면 여기서 착취관계는 이미 인류의 근본적인 관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관계에서 자신이 2%에 속하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기에, 그들에게 “육십억과, 오만구천이백사명과, 천구백삼십사명과, 육백삼십육명과, 마흔한명에 둘러싸인 중학생”(26면) 같은 게 보일 리 없다. 이미 이같은 관계는 고착화된 상태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현재 상태는 “소외가 아니라 배제”(58면)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와 박민규의 소설이 지닌 감수성은 둘 다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와 반감에 기반한다. 그리고 블랙코미디적인 서사양식을 통해 직간접적인 메타포를 사용하여 그것을 보고 읽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때로는 엉뚱하고 엽기적인 작품 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처음에는 작위적이고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그것이 곧 독자들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섬뜩한 은유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박민규 소설을 읽고 터져나오는 웃음 뒤에 씹히는 쌉싸래한 비애감에서 우리는 작가의 유머에 도사린 만만치 않은 서사의 전략성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박민규의 서사가 만화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들의 집합인 것처럼 보여도, 그의 문학적 자의식의 자양분은 바로 포스트모던한 시대에서도 여전히 존속하는, 아니 더더욱 맹위를 떨치고 있는 ‘모던 타임즈’의 삶과 논리이다. 이는 올해로부터 꼭 70년 전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상영되던 시대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하고, 그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모순으로 현실을 압박하고 있다는 뜻이다. 박민규의 서사는 이처럼 ‘모던 타임즈’의 삶을 반어적 상상력으로 모자이끄처럼 붙여간 포스트모던한 서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 포스트모던이라는 기표로 박민규의 문학을 규정하고자 한다면,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포스트’ 「모던 타임즈」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3. 배제된 공간으로의 말 걸기

 

여기서 다시 카라따니 코오진이 등장한다. 그의 말대로 ‘윤리’와 ‘도덕’에 대한 의무감은 근대적 서사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문학의 소명의식은 문학 스스로가 단순한 유희에서 더 훌륭한 무엇이라는 존재가 되기 위한 자기지시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민규의 소설을 카라따니가 내린 문학의 사망선고에 대한 반증으로 삼기 위해서는 근대적 세계에 맞서는 대안적 상상력, 즉 윤리적 지평이 그의 소설에 얼마나 깊이있게 서술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문체와 소재의 차원에서만 분석하던 것에서 벗어나 작가의 사유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인식의 ‘현존’을 문학의 서사적 맥락에 근거해 발굴하는 작업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박민규가 이전의 두 소설(『삼미』와 『지구』) 후반부에 선보인 대안적 상상력은 여러모로 아쉽다. 『지구』는 너무 직접적인 알레고리 때문에 그의 문학적 역량을 어느정도 평가절하하게 만든다. 『삼미』의 경우 초반부의 유쾌한 이야기들 속에 알레고리와 주제의식이 적절하게 내포되어 있지만, 후반부에 드러나는 평면적이고 도식적인 알레고리 및 지나친 낙관주의는 그의 대안적 상상력을 의심케 만든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삼미』 279면)지만 그 새로운 공간이 소시민적 개인주의에 기반하기에 현실에 대한 전복의 가능성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박민규 스스로도 “산업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역사적인 시합”(같은 책 285면)이라고 비꼬듯 부른, 슈퍼 올스타즈와 한 야구 동호회의 시합에서의 나르씨시즘적 자기위안의 행위들은 새로운 윤리를 끌어안으려는 문학의 적극적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행복할 수 있”고 아들에게 “아버지의 야구를 보여주고 싶”다는 말로 끝나는 그의 낙관적인 결말에 독자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가 끊임없이 문제제기해온 자본주의의 모순성에 대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의 문학은 유머러스한 폭로를 넘어서지 못한 고급오락에 머무르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박민규에게 종종 깊이를 강요하는 것이고, (비록 그가 그럴 때마다 “조까라 마이싱이다”라고 외친다 해도) 이는 정당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편집 『카스테라』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장편소설들이 지닌 알레고리의 도식화와 피상성이 짧은 내러티브를 통해 응축되면서 훨씬 세련되게 감추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농담은 강도가 높아졌고 세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욱 반가운 현상은 그의 소설에서 현실에 대한 대안적 상상력의 징후들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지구』에서 자조적 독백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삼미』에서 경쟁의 체계를 벗어나려는 시도가 섣부른 개인주의적 공간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과 비교해볼 때, 이는 더욱 근원적인 인식론적 전회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변화의 조짐은 「야쿠르트 아줌마」의 이야기구조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변비에 오래 시달리던 주인공은 시장이라는 거대한 메커니즘을 편집증적인 농담으로 재구성한 상상의 세계로 펼쳐놓는다. 그러나 실상 이 주인공의 망상이 펼쳐지는 곳은 화장실인데(변비로 인한 망상이 극에 달하는 장면은 들뢰즈가 진단한 자본주의의 정신분열증을 떠올리게 한다), 어쨌거나 그 환상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현대 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억압을 변비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도 해결하지 못한 변비에 걸린 수많은 인간군상을 떠올리면서 편집증적 상상의 극한으로 치닫던 주인공을 화장실이라는 현실로 귀환시킨 것은 야쿠르트 아줌마의 “건강한 대답”이었다.

 

누구세요? 내가 소리쳤다. 실로 건강한 대답이, 그래서 들려왔다.

 

야쿠르트예요.

 

문을 열고 내다보니 한 사람의 야쿠르트 아줌마가 서 있었다. (…) 가방을 부스럭거리던 아줌마가 난데없이 야쿠르트를 내밀었다. 저, 저는… 돈 받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요. 학생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그럼 수고해요.

-「야쿠르트 아줌마」 177면

 

「야쿠르트 아줌마」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농담경제학 백과사전’이나 소설 속 주인공의 상상이 기존의 박민규가 보여준 유희적 서사를 비유하고 있다면, 야쿠르트 아줌마의 건강한 목소리는 초현실적 서사를 현실로 끌어오는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과 그것을 이끌어낸 타자와의 관계를 동시에 환유한다. 그렇게 마신 야쿠르트의 “새콤하다고도 할 수 있고, 달콤하다고도 할 수 있는 맛” 때문에 “내일부터, 나도 야쿠르트를 마실 전망”(178면)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의미심장하게도 문학에 대한 박민규의 전망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박민규 문학의 전환점은 기존의 나르씨시즘적 서사에 머물던 그의 언어가 이같이 타자의 목소리에 응답함으로써 자기애에서 탈(脫)하는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박민규는 더이상 비애감에 젖어 있거나(『지구』), 자폐증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서 만족하지도(『삼미』) 않는다. 박민규의 세계인식이, 아니 외부세계를 대할 때의 포즈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조금씩이나마 변화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기도 하지만, 「야쿠르트 아줌마」 이전의 단편에도 고립과 단절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식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발견된다는 점에서는 어느정도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너구리는 말끔히 때를 민 내 등의 전역(全域)에 시원스레 비누칠을 먹였다. 이럴 수가. 그것은 말하자면 너무나 환상적인 플레이여서, 마치 비행기를 타고 오하이오 주의 창공을 날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아, 나는 그만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뻔했지만. 결국 나라는 인간은-그래서 울컥 뒤를 돌아보며, 겨우 이런 말이나 하는 게 고작이지만.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너구리」 64~65면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주인공에게 조용히 다가와서 등을 밀어주는 너구리는 생존을 위해 인사부장과의 거래를 받아들인 ‘나’의 실존적 아픔을 달래주는 새로운 차원의 말 걸기를 하고 있다. 그 발화의 중심에는 타자의 존재가 위치하며, 배제된 존재에 대한 관심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같은 배제된 자리로의 말 걸기는 박민규 소설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는 타자를 직면하는 방법이자 윤리로 나아가는 길이다.

 

 

4. 윤리적인 탁구를 위하여

 

진정한 선물 행위의 행복은 선물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한 상상에 있다. 그것은 선택하고, 시간을 지출하고, 자신의 길에서 나오는 것, 다른 사람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건망증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아도르노 『한줌의 도덕』(솔 1995) 63면

 

타인을 주체로 받아들이려는 인식론적 노력은 교환관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그 가능성이 발견된다. 『핑퐁』에서는 그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하는데, 박민규가 말하는 형식은 바로 탁구에서의 관계이다. 탁구를 치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상상하는 행위인 동시에 타자에게 무엇인가를 건네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선물 행위는 자본주의의 속성인 타자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건망증을 치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핑퐁』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박민규 소설에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꽤나 의미심장하다. 치수라는 거대한 폭압적 존재에게 눌리고 있는 ‘못’과 ‘모아이’가 처음으로 소통하게 된 계기는 “너 와보래”라는 기능적 소통이 아닌 ‘모아이’의 “탁구 칠래?”(23면)라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못’이 “모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비록 “못!이라고 부르지 않아 반응이 늦긴 했으나”(같은 곳), 그들은 서로의 진짜 이름 따위를 묻는 서툰 행위도 없이 탁구를 치면서 무언의 대화를 해나간다. 이 탁구가 기존의 관계와 다른 점은 플레이어 한 사람이라도 관계의 우위를 점하려고 하면 랠리가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탁구는 항상 타자의 리씨브가 존재해야 한다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하지만 우리가 항상 잊고 살아가는 존재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처음엔 말없이, 그러다 한참 동작에 익숙해지자 어느 순간부턴가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체험이었다. 공을 받는 순간 말이 나오고, 공이 네트를 넘는 순간 말은 끝이 난다. 한 소절 한 소절 정확한 템포로, 그래서 마치 노래를 주고받는 기분이었다. 긴 말을 하기 위해선 또다시 한 박자를 기다려야 했다. 신체의 동작에 따라 뱉는 것인데다, 상대의 동의 없이는 절로 말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공평한 느낌이었다. 아, 이것이 대화구나.

-『핑퐁』 59~60면

 

그래서 ‘아, 이것이 대화구나’라는 타자로 인한 감동을 얻게 되고, 그 대화의 현상학적 증거인 ‘핑! 퐁!’이라는 가볍고 건강한 소리는 이 공간을 공명시킨다. 자본주의적 교환이 관계 바깥에 있는 어떤 목적, 즉 효용 증대라는 다분히 의도적인 무언가를 전제로 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왔다는 것과 비교해볼 때, 탁구에서의 관계는 다분히 인간중심적이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게다가 탁구에서의 대화에는 기다림이 있다. 자신이 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리씨브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주체와 타자 사이의 소통에 소요되는 시간을 견뎌낸다. 이 기다림은 양자에게 동시에 그리고 공평하게 주어진다.

 

실은 공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쪽의 다듬은 폼을, 자세를 보내는 거야.

-『핑퐁』 141면

 

기다림은 결국 타자에 대한 응시이고 그 응시가 우리의 시선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쪽의 다듬은 ‘폼’을 보낸다는 것은 나의 현존을 던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폼을 보낸다는 메타포는 결국 공이 지니는 도구적 특성에 매몰되는 근대성에서 벗어나 ‘나’와 ‘당신’이라는 실존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설파하는 것이다. 탁구에서의 관계에 내재된 타자지향적 특성은 인류의 운명을 건 탁구시합을 앞둔 탁구계에서 “원근감에 변화가 있다”(210면)는 것을 제시한 장면에서도 잘 표현된다. 멀리 있을수록 더 크게 보이는 탁구계에서의 원근감 역전현상은 바로 타자가 차지하고 있던 좁은 공간을 의도적으로 확대하려는 메타포이다.

 

럭키!

 

그렇지, 바로 이 순간 자신의 득점에 운이 따랐을 뿐이라고 외쳐주는 거야. 탁구의 중요한 예절이지.

-『핑퐁』 142면

 

따라서 탁구계의 예절, 그것은 잊혀져가는 타자를 부활하고자 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상징한다. 이러한 탁구에서의 관계가 단순한 대화 혹은 소통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이 대화의 방법론으로부터 다양한 함의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물을 맞고 넘어간 공 덕분에 점수를 얻은 나는 상대방의 존재를 배려한다. 이때 교환의 관계에서 배제되었던 타자는 배려의 말 걸기로 이 공간에 호출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박민규의 서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진정한 의미의 타자로 인해 그는 필연적으로 윤리의 정립이라는 문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박민규의 윤리에 대한 사유는 철학적으로 레비나스(E. Levinas)의 타자성 윤리가 거쳐왔던 노선과 겹쳐 있다. 한편으로 박민규의 탁구에 대한 메타포는 인간의 관계를 자본주의적 교환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받기-되갚기’라는 소통행위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정치·경제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마르쎌 모스(Marcel Mauss)의 ‘증여론’과 묘하게 닮아 있다. “자원의 희소가치에 기반을 둔 적자생존의 냉엄한 생존규칙의 비인간화에 대항하며, 인간을 소외시키고 물상화하는 상품경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연관성과 경제에 있어 인간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도덕적 감수성에 기반을 둔 경제”(김성례 「증여론과 증여의 윤리」, 『비교문화연구』 11권 1호)라는 대안경제의 정의와 그것을 위한 실천적인 움직임은 탁구의 윤리학이 아직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지 못한 비전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해야겠다. 이렇듯 타자의 윤리에 대한 문학적 감수성과 인문학적 담론 안에서 흔적처럼 발견되는 경향을 병치시켰을 때 양자 사이를 가로지르는 어떤 유사한 흐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박민규의 탁구가 단순히 문학적 유토피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현실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어렴풋한 확인을 도와준다.

 

 

5. 종언의 수사학

 

그러나 ‘못’과 ‘모아이’가 탁구를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관계에 대한 희망은 곧 이어지는 종말의 서사 앞에서 무기력하게 좌절된다. 읽는이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반함으로써 박민규는 인류의 존재를 낯선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아두는데, 이는 기존의 박민규 소설들에서 주변부적 존재들이 고통을 감내한 끝에 도달하게 된 낙관주의적 감수성을 가차없이 깨뜨리는 것이다.

 

화가 나버리고 말았다. 칠 수 없었던 거야. 대답을 한 것은 모아이였다. 인류의 구조는 탁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거든.

-『핑퐁』 224면

 

애당초 문학에서 무리하게 윤리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대문학의 종언』 53면

 

인류의 존속 여부에 대해 언인스톨 결정을 내린 박민규의 결단과 카라따니의 문학에 대한 이같은 불신 사이에는 문맥적 상동성(相同性)이 존재한다. 마치 카라따니가 문학으로 윤리와 도덕을 세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자조 섞인 니힐리즘적 인식을 바탕으로 문학에 대한 기대를 거둔 것처럼, 박민규 역시 인류가 앞으로 탁구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 요원해 보이기에 인류라는 종의 존속을 거부하였다.

둘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세계에 대한 씨니컬한 인식은, 그러나 박민규의 경우 그것이 상상력의 종착점이 아니라는 데에서 카라따니와 인식론적으로 분기(分岐)한다.

 

이 삶을 생존이라 생각한 채

그간 당신에게 큰 해를 끼쳐왔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모쪼록 탁구를 치며

그 죄를 갚아나가겠다. 

-『핑퐁』 257면

 

「작가의 말」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이런 표현은 그가 소멸시킨 인류에 대한 예의의 제스처가 아닌 진심어린 내면의 고백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박민규는 인류를 언인스톨했는가. 마치 기존의 작품에서 해학 뒤편에 자리한 비애감을 보여줌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에 반어적으로 강조의 방점을 찍었던 것처럼, 『핑퐁』의 종말의 메타포 역시 인류 종말에 대한 선연한 두려움을 안겨줌으로써 반성적 사유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된 전략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멸종되어도 별 상관이 없다는, 아니, 오히려 인간은 더이상 “잔존해선 안될 생물”이라는 지독한 비관주의는 인류가 타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아프게 꼬집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인류가 멸종해서는 안될 어떤 실존적·윤리적 근거도 없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윤리의 정립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인류 종말의 수사법을 통해 그가 힘을 실어주려고 한 것은 타자의 목소리이다. 부패한 자본주의적 주체들의 폭압과 일방적 논리를 분쇄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인식론적으로 확장되고 윤리적인 목소리로 변환되어간다. 박민규에게는 그것이 탁구이며 배제된 공간으로의 말 걸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탁구의 윤리는 인간사회의 내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인류의 객체로 여겨졌던 자연세계의 수많은 타자들에게도 적용되어야 온당하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그의 문학은 인류와 세계에 대해 하나의 ‘폼’을 형성해가는 것이다.

탈근대적 서사가 발딛고 있는 지점은 어디까지나 단단한 근대적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박민규의 초현실적 서사는 자본주의 현실과 교환관계라는 명확한 대상을 디딤돌로 삼아 세상 위로 도움닫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오른 문학은 본래 날개가 없기에 다시 이 단단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 만약 문학이 나르씨시즘이나 자기기만이라는 허구의 날개를 가지고 영원한 부상을 시도한다면, 카라따니가 말한 대로 우리는 그 공허한 언어놀이에서 문학의 죽음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박민규 소설에 대해 문학이라는 제도가 보냈던 신뢰는 그의 서사에 내재된 추락의 운동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문학이 자발적으로 추락하려고 노력하는 한, 혹은 카라따니의 말을 빌리자면 문학에서 “인식적이고 실로 도덕적인 가능성이 발견되”(『근대문학의 종언』 51면)는 한, 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여기서 카라따니의 써브를, 그의 폼을 리씨브할 우리만의 폼을 생각해보게 된다. 문학의 죽음을 하나의 메타포로서 생의 건너편, 즉 대자(對者)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 다시 말해 박민규식으로 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역설적으로 문학의 삶을 지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사뭇 변증법적인 인식으로 나아갈 때 유행처럼 번진 문학에 대한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인류의 폼이 반격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순간 이런 행운이 따라줬기 때문이지. 그래서 실은, 인류는 다 함께 <럭키>라고 외쳐야만 해. 공이 왔던 곳을 향해, 자신들의 자세를 받아주는 곳을 향해서 말이야.

-『핑퐁』 142면

 

인류가 다같이 숙연하게 ‘럭키’의 윤리를 외칠 때 박민규의 상상력은 현실이 될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박민규는 『핑퐁』에 이르러서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주면서 대안 모색을 위한 이 시대의 윤리적 지평을 끌어안고 있다. 물론 그가 새롭게 개척한 혹은 이제야 눈뜨기 시작한 인식론적·윤리적 지평이 상상을 넘어 현실에 적용되는 것과 실제 현실 사이의 경계에서, 문학은 자신이 힘들게 사유하던 주제에 대해 손을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말대로 현실에 대한 변혁은 문학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제와 사회를 전면적이고 철저하게 변혁하고 새로운 형식의 집단적 삶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이 여전히 사유의 영역에서 타자를 인식하게 하는 상상력과 감수성을 제공한다는 사실, 그것이 아직 문학이 끝나지 않았다는 박민규만의 문학적 몸부림이다. 그러한 몸부림은 앞으로 벌일 그의 탁구판을 통해 더더욱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그게 다냐고, 결국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매우 익숙한 테제로 끝이 나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탁구에 비유해 변명할 수밖에 없다. 박민규의 탁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따라서 타자의 물자체(物自體)적인 속성 같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고. 박민규의 진실한 폼은 점점 나아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와의 탁구가 재밌지 않은가. 이렇게 재밌으면서도 진실된 탁구를 마음놓고 즐겨보는 것도 그리 책망받을 만한 일은 아닐 듯싶다. 이제 그의 진실한 써브에 대해 우리의 폼으로 리씨브를 날리는 일만 남아 있다. 그렇게 우리에게 써브될 박민규만의 멋진 폼을 기대해보자.

 

 

심사평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 응모작은 총 13편으로 예년에 비해 빈약했다. 그 바람에 심사도 혼자 감당한데다, 양적인 빈곤에 대응하는 것인지 전반적인 수준도 높은 편이 아니어서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평범한 작품론과 작가론은 차치하고, 나름의 문제의식을 세워 입론을 전개하는 평론가적 안목이 번뜩이는 글들의 경우, 문장의 불안과 논리적 일관성의 부실로 중동무이하기 일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 가운데 「문학에 대한, 타자를 향한 변론: 박민규론」을 만난 것은 적지않은 기쁨이다. 더러 비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장이 대체로 건실하고 논리적 구성력도 비교적 탄탄한 점이 미덥다. 그런데 무엇보다 논지를 세우는 방식이 문학평론의 정석에 대한 이해의 폭을 짐작케 한다. 물론 카라따니 코오진의 한국 당대문학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말머리를 풀어나가는 것은 진부하지만, 그 뇌사선언에 박민규의 작업들을 마주세워 검증하려는 태도는 신인답게 도전적이다. 더욱이 박민규의 기존 문학에 대한 전복적 성격에만 맞추어 자칫 고급오락으로 그칠 가능성이 농후한 그의 자질을 오히려 높이 평가하는 평단의 일반적 흐름에 거슬러, 그곳에서 “모더니즘적 현실의 모순을 전복하고자 하는 소망”을 읽어내는 안목은 독창적이다. 박민규의 낯선 실험에 수동적으로 감응하여 그저 찬양에 급급하기보다는 그 심층에 깔린 “대안적 상상력의 징후들”을 발견하고 그를 설득력있게 논증하는 분석력이 그래서 더욱 돋보이는 터다. 특히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최신작 『핑퐁』에서 “주체와 타자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 즉 새로운 윤리에 대한 욕구를 짚는 것은 흥미로운 독법이 아닐 수 없다.

비판 없는 해설 또는 신판 인상비평이 비평을 대체하는 경향이 만연한 세태에서 오랜만에 보는 드문 재목이다. 모쪼록 정진하여 우리 평단의 새로운 들보로 성장하기 바란다. 축하한다.

│최원식│

 

 

당선소감

 

글쓰기가 ‘글’ 자체에만 매립되어버린다면 ‘쓰기’는 곧 박제된 행위와 같다는 어설픈 믿음을 가져왔던 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언제나 언어의 외피 아래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내 언어의 골방은 늘 공명 없는 목소리들로 가득 찼고, 나의 눈은 곁눈질하듯이 세상을 가늘게 의식하면서 엉거주춤한 자폐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나는 여태껏 제대로 된 ‘쓰기’를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소통과 대화 그리고 타자를 염두에 두는 내 생각의 성긴 넝마조각들에 비춰봤을 때 이러한 고백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굳이 변을 달자면, 내 폐쇄성의 원인은 나와 나의 글쓰기에 날인된 저 가난함에 있었는데, 이 가난함의 뼈를 들키는 것 또한 내게는 너무나도 두렵고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원체 가난한 존재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중에라도, 그 결핍의 골(骨)을 드러내는 것에 겁을 내지 말았어야 했다.

덜컥 날아든 당선소식은 이러한 나의 용기없음에 대한 질책인가 보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벙벙했던 어안이 곧이은 두려움과 현기증으로 더욱 벙벙해졌다. 그래도 당선이 되는 바람에 나의 글도 오랫동안 겹겹이 쳐놓은 자의식의 반투막을 뚫고 세상과 즉(卽)하게 되는 행운과 기회를 얻었다. 고마운 일이다. 비록 자력은 아니었으나, 이제야 조금은 내 뼈를 드러내는 것에 용기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의 글쓰기가 가난함을 거짓 풍요로 탈바꿈시키는 언어의 수사가 아니라, ‘날것의 결핍’을 직시하고 긍정하는 언어 그 자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된 연후에, 나의 뼈를 들어올리고 그 뼈로 당신들의 뼈를 겨누겠다. 뼈와 뼈의 부딪침, 그 접점에서 나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꿈꾼다.

부족이라는 말로 다 설명키 어려운 불모의 글에 격려의 단비를 내려주신 최원식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내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칭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와 나의 글을 아껴주는 벗들에게 내 부족한 글쓰기는 큰 빚을 지고 있다. 고맙고도 고맙다. 앞으로 더 많이 읽고 생각하며 그 빚을 갚아가겠다.

│강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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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은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 이하 『지구』)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신문사 2003, 이하 『삼미』) 『핑퐁』(창비 2006) 이렇게 3편의 장편소설과 함께, 단편집 『카스테라』에 수록된 6편의 단편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이하 「너구리」)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이하 「기린」) 「아, 하세요 펠리컨」(이하 「펠리컨」) 「야쿠르트 아줌마」 「헤드락」 「갑을고시원 체류기」(이하 「고시원」)을 대상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