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6월항쟁 20주년, 진보개혁세력의 재결집을 위하여
어느덧 6월항쟁 20주년을 맞는다. 역사의 중요한 사건일수록 10년 단위마다 그 의미를 되새기고 각오를 다지는 일은 으레 있는 일이지만, 올해는 남다른 감회를 갖게 된다. 민주화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 미래의 큰 흐름을 규정하게 될 한미FTA의 비준과 12월 대통령선거가 앞에 놓여 있지만, 그 전망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 노무현정부는 진보개혁세력의 대대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독단적으로 한미FTA를 밀어붙여 타결해냈고, 다른 한편 진보개혁세력은 침체와 분열에 허덕이는 가운데 그 누구도 여론지지에서 보수세력의 대선 예비주자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간 힘겹게 가꾸어온 민주주의가 퇴보하지 않을까, 또 97년 이래 심화된 사회적 양극화가 한층 악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그런 분위기 때문에 87년 6월과 그후의 민주화과정이 이룬 그간의 성과에 대해 인색하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폭압적 군사독재를 종식시킨 6월항쟁은 전쟁을 겪은 분단체제하에서 억압구조가 유독 강고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현대 세계사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성취였다. 한국현대사에서 극적인 전환점을 이룬 87년 민주화는 그뒤로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결정적 후퇴 없이 꾸준히 지속되어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었다. 물론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이 지체되었다는 지적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절차적’이라는 표현 때문에 사회 전반에 두루 미친 민주주의의 발랄한 기운을 간과할 수는 없다. 사실 참여정부의 탄생 자체가 그런 과정의 소중한 결실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 사회는 과거 체제에서 형성된 낡은 틀을 갱신하지 못한 채 모종의 교착상태에 있는 불안정한 체제에 머물러 있고 따라서 새로운 전환을 이루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과거의 발전모델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적 모델을 창출하지 못해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올봄 내내 뜨거웠던 소위 ‘진보논쟁’도 이런 상황 인식과 무관치 않으며, 본지도 ‘87년체제’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하에 새로운 발전모델을 모색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87년체제의 다른 체제로의 전환은 입장에 따라 그 전망을 달리하겠지만, 대선을 앞둔 현실에서는 침체와 분열에 시달리는 진보개혁세력의 재결집 또한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노무현정부의 한미FTA 타결이 진보개혁세력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음은 역설적이다. 심지어 FTA에 문제를 제기하는 모든 집단을 개방 반대의 쇄국주의로 몰아붙이는 정치는 구태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그간 한미FTA의 졸속타결을 비판해온 세력에는 협상과정과 내용을 문제삼는 신중론과 좀더 근본적인 반대론이 공존하나, 이들 모두 개방 반대의 쇄국론자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협상타결이 이루어진 현재, 졸속타결 저지를 위한 양자의 연대는 졸속비준을 저지하는 연대로 이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 진보개혁세력의 재결집이 모색되어야 한다. 한미FTA의 의사결정과정과 협상과정 모두 비민주적 독단과 비밀주의 등 갖가지 문제점이 있는 만큼, 협상문의 완전공개 이후 전문가들의 객관적인 분석과 독소조항을 따져보는 작업은 당연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세력간의 최소한의 합의점을 졸속비준을 저지하는 데서 찾는 광범위한 연대는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지금처럼 세계화와 개방에 대한 진보세력의 합리적 대안제시가 필요한 시점에서, 신중론과 반대론 양자는 대중의 욕구와 상식에도 부응하는 진보적 개방전략을 논쟁을 통해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현재 한미FTA 찬성과 반대를 12월 대통령선거의 주 전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있게 대두하고 있다.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전면에 내세운 일부 진보진영 입장에서는 이런 구도가 후진적 정당구조를 서구적인 보수/진보 대립의 ‘정상화’된 정당구조로 바꿀 호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선의 정치지형이 한미FTA 찬성과 반대의 두 진영으로 대립되는 구도는 진보세력의 대선패배에 이어, 현 보수세력의 퇴행적 행태를 볼 때 실질적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우리 현실에서 그간 중도적 지향의 광범한 진보개혁세력이 독자적인 급진세력보다 정치적 다수의 우위를 점한 것은 단지 후진성의 징표가 아니라 그럴만한 한반도 분단체제라는 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말하자면, 주어진 한반도 현실의 조건이 평화-개혁-진보세력의 광범위한 연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복되어야 할 87년체제가 분단체제라는 독특한 지배체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주목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평화-개혁-진보세력의 유기적 연대에 기반한 재결집이야말로 87년체제의 새로운 갱신과 전환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번호 문학특집은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라는 제목으로 우리 장편문학에 대한 기대와 응원을 담고자 했다. 장편소설의 활기를 되찾는 것이 지금 우리 문학 전반을 위해서 긴요한 일이라는 점은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본지는 이 과제의 진척을 위해 본격적인 조명과 탐구의 계기를 마련하기로 하고, 대담 및 평론을 비롯하여 작가들의 목소리를 싣는 등 다채롭게 특집을 꾸렸다.
최원식과 서영채의 대담은 이러한 기획에 부응하여 우리 시대의 장편소설을 둘러싼 문제점과 가능성을 풍요롭게 짚어내고 있다. 동서양의 서사전통은 물론 192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한국소설들을 종횡하며 이루어진 이 대담에서는 최근 문단과 독서계에서 화제가 된 젊은 작가들의 근작 장편을 논의하는 가운데 ‘창조적 장편의 시대’를 열어나가야 함을 역설한다. 대담에 뒤이어 중견 황석영에서 신진 이기호에 이르기까지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섯분의 소설가들이 장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창작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가들의 육성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 장편소설이 처한 위치와 의미, 그리고 가능성들을 짚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어 실린 글에서 최재봉은 장편소설 장르를 둘러싼 제반 환경요인들을 심층 분석한다. 단편 위주의 문단풍토와 문학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는 물론, 장편소설이 활성화됨으로써 우리 문학이 얻을 수 있는 장점들까지 두루 지적하고 있다. 정호웅은 김원일, 조정래, 이문열, 한승원 등 중견작가들이 최근에 내놓은 장편소설을 사려깊게 살피며 우리 문학이 나아가야 할 새 길을 탐색한다. 진정석은 2000년대 한국문학이 처한 조건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김영하와 김연수의 최근 장편을 조명하며 역사와 이념이라는 거대서사와 단절된 이야기가 지닌 의미와 한계를 짚는다.
특집과 관련하여 읽을 만한 문학란의 글들도 여러편 실렸다. 백낙청의 평론은 ‘외계인 만나기’라는 모티프를 통해 최근의 비평담론들을 비판적으로 되새긴다. 이 ‘외계인 만나기’는 ‘지금 이곳의 삶’에서 배제된 진실과 타자들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문학적 실천의 일환이기도 하다. 젊은 비평가들과의 비판적 대화가 돋보이는 글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소설 『요코 이야기』를 다룬 손종업의 글은 이 소설의 문제점이 단순히 역사왜곡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전쟁의 주체가 구성하는 ‘상상의 거래’와 교묘한 은폐전략임을 설득력있게 지적한다.
문학지의 본령은 역시 시인과 소설가 들의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호에 실린 창작물들은 시와 소설을 아울러 우리 문학의 활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성부 시인에서 정영, 박후기 등 신진시인에 이르기까지 열세분의 시편들이 시란을 빛내주었다. 소설란에는 김남일, 권지예, 김종은, 천명관 등 네 작가의 작품을 싣는다. 서로 다른 시선과 발성법으로 우리 사회와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묘파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문학특집이 실리는 호라 정론에 할애되는 지면이 다소 줄었으나 이번에도 생산적 토론을 위한 소중한 글들이 많다. 먼저 이정우-최태욱의 도전인터뷰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유효적절한 비판이 인상적인데, 특히 최근 체결된 한미FTA와 관련하여 중요한 논점들이 제기된다. 참여정부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냈던 이정우는 청와대의 경험과 학자로서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미FTA의 문제점을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밝혀내고 있다. 이와 함께 노무현정부의 총체적인 공과를 진단하고 이후의 대안적 사회체제에 대한 전망을 들려주어 독자들에게 좋은 읽을거리가 되리라 믿는다.
도전인터뷰와 관련하여 읽으면 좋을 글이 ‘논단과 현장’란에 실린 김종엽의 ‘87년체제의 궤적과 진보논쟁’이다. 이 글은 87년체제를 ‘민주화 프로젝트’와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의 병존과 충돌로 특징지으며, 왜 체제의 동력이 소진되어갔는가를 분석한다. 더불어 ‘87년체제론’에 대한 최장집과 손호철의 이해를 비판하면서, 87년 이후의 역사과정에 대해 한반도적 시각에서 적확하게 인식해야 함을 역설한다. 함께 실린 미야지마 히로시의 글에서는 일본 내의 일본사 연구를 평화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특히 근세사 연구의 ‘탈아(脫亞)’적 경향이 현재 평화논의를 질곡하는 역사적 연원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문화 꼭지로 이른바 미드(미국 드라마)와 미드족 현상의 배경과 영향을 꼼꼼하게 짚은 김봉석의 글을 싣는다.
끝으로 촌평란에서는 은희경의 신작 소설집을 비롯해서 최근에 발간된 아홉권의 책들을 다루었다. 깊이있는 글을 보내주신 필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부탁드린다.
柳在建·李章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