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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남일 金南一
1957년 수원 출생. 1983년 『우리 세대의 문학』으로 등단. 장편소설 『청년일기』 『국경』,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등이 있음. bayon@dreamwiz.com
오생의 부활
만물의 배후에 와습1이 있다고 주장하여 평지풍파를 일으켰던 오생을 더러 기억하실 것이다. 그가 홀연 기세(棄世)했다고 알려진 것이 민국 59년 엄동 엊그제였는데, 오늘 아침 사지육신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민생에 바쁜 세인은 뜬금없이 개헌안을 발의한 대통령 대하듯 그를 대하였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만큼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오생의 부친은 오생이 외투, 지갑(빛바랜 당원증도 들어 있었다), 구두 다 잃어버린 채 나타나자,
- 전동차에 치였는데 살아나셨다고? 허, 그것 참…… 그러니까 언필칭 부활했다 이 말이시지? 다시 부, 살 활? 불알은 그대로 있으시고? 에라, 이놈아!와습은 뭐해? 이런 놈 안 데려가고?
하며 왼고개를 틀었고, 평소 오생을 마뜩하게 여긴 적이 거의 없는 누이는 여전히 지구의 화석연료를 엄청나게 소모하는 6기통 외제 승용차를 타고 와서 일전에 빌려갔던 김치보시기를 돌려주며,
- 얘가 이젠 소설까지 써요. 아나, 소설!에꾸니 가오리처럼 재미나 있으면 몰라? 써도 꼭 민국 소설을 써요, 흥.
하며 데퉁맞게 지청구를 놓았으되, 다만 식구 중에 오생의 모친도 있어,
- 에구 가엾어라. 그래, 밥은 먹고 다녔니?
하며 불변의 측은지심으로 제 새끼 얼어붙은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이다.‘부활’한 오생이 그런 모친의 손을 붙잡고 딴 식구들이 들을세라 조곤조곤 말하였다.
- 어머니,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어요. 인류는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아야 해요. 그건 자유라는 이름으로 뭐든지 집어삼키는 괴물이어요. 민제(민국과 제국)FTA는 시작에 불과해요. 장차 자유가 스스로 더 자유하고 시장이 스스로 시장을 더 넓히면 보건, 소방, 철도, 우편, 전기, 통신 등 모든 게 다 무한경쟁에 휩싸이게 되어요. 그럼 아마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 얘, 어떤 일? 그땐 어미가 제 새끼 밥도 못해 먹인다니?
- 자유시장 경제원리에 어긋나면 그럴지도 모르죠. 가령 민국의 어머니들이 신토불이 구호 아래 제 새끼들에게 지극정성으로 하얀 이밥만 해 먹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제국의 LMO, 즉 유전자조작 생물체를 수출하는 업자들이 눈곱만큼이라도 타격을 입는다고 계산이 나오면 말이어요.
오생은 평생 밥만 하다 늙어서 어쩔 수 없이 이해력이 부족한 모친을 위해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머지않은 미래의 비극적인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민영 집배원은 딴 우편회사(특히 제국계)와의 경쟁력을 고려하여 산간 오지와 낙도에는 가급적 편지를 배달하지 아니하였고, 민영 소방관은 화재 신고를 받고 불을 끄러 가기 전에 피해 고객의 신용카드가 연체되어 있는지 재빨리 확인하였고, 민영 강력계 형사는 국제 형사노조의 결정대로 비정규직 경비원이 별도로 있는 빌딩 내 소매치기 검거는 의무계약사항이 아니라며 팔짱을 낀 채로 보고 있던 「CSI과학수사대」(마이애미편)를 계속 보았고, 심지어 이라크에 파견된 민영 졸병은 야간 초과근무수당과 위험수당을 100프로 인상하여주지 않으면 보초를 서지 않겠다며 소대장의 기를 꺾었다. 오생의 모친은 귀까지 나빠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애만 태웠는데, 그 순간 귀밝은 오생의 부친과 누이는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심전심 뜻을 나누었다.
대충 이런 뜻이었다.
- 간 거지? 확실히 간 거 맞지?
- 당연하죠. 저래도 안 간 거라면 지구상에 누가 가겠어요? 근데, 아버지, 이게 혹시 얘 말대로 와습 때문일까요?
- 뭐, 와습? 얘, 너 박서방 앞에서는 농담이라도 행여 그런 말 말아라. 고지식한 박서방이 너까지 간 줄 오해하겠다.
어쨌거나 오생은 다시 학문에 매달렸으니, 애오라지 진리를 궁구하는 열정만큼은 부활 이전이나 여일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당과 조합과 연대마저 민생이라는 근시안적 이익에 눈이 멀어 외면한 진실을 폭로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오생이 망(網)언론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가 되기로 굳게 다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오생, 다시 라면을 먹다
세상에는 다짐하고 결심하고 각오한다고 해도 되지 않는 일이 많은 법이니, 오생이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는 번번이 잉걸뉴스에도 오르지 못하였다. 오생은 관타나모 제국기지에 9·11 이후 몇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초법적으로 감금된 이른바 테러 용의자들이 수백명이나 있고, 더구나 그들은 언제 재판을 받을지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손발목을 쇠사슬로 묶인 채 잔인한 고문과 야비한 조롱을 당하고 있으며, 지구의 대기를 오염시키는 이산화탄소를 하염없이 배출하면서도 대부분의 문명국들이 애써 합의한‘기후변화협약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목표에 관한 의정서’, 즉 쿄오또의정서에 서명하기를 악착같이 거부하며, 끝없는 생산과 끝없는 소비에 기초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조금만 바꾸면 최소한 굶주림과 거기서 비롯한 예방 가능한 질병만으로도 전세계적으로 매일같이 다섯살 이하 어린이가 평균 3만 4천명이나 죽는 끔찍한 현실을 너끈히 개선할 수 있는데도 제국의 중량을 줄이려는 뚜렷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며,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가는 것은 문화의 종다양성을 인정하여 그렇다 치더라도 침대에까지 버젓이 신발을 신은 채 턱 누워버리는 관습을 완강하게 유지하는 등 제국의 문제점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당당히 맞서지 못하면 민국의 민생쯤은 모래로 쌓는 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줄기차게 폭로하였으되, 금주 들어 벌써 일곱번 퇴짜를 맞았다. 오생은 적잖이 실망하였으나, 불현듯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어도 그 뜻을 펴는 재주가 부족하다면? 사실 오생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두루 허술한 바, 그중에서도 글씨와 문장이 특히 허술하기는 하였다. 스스로 슬펐지만 오생은 학인답게 부족한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쉬이 또 결심하였다. 생각난 김에 리모컨을 들어 EBS교육방송을 틀었다. 상업광고가 부족한 교육방송이 프로그램 막간에 광고인 양 내보내는 지식꽁뜨였다.
한 청년이 라면을 박스째로 사왔다. 어찌된 일인지 뜯는 것마다 스프가 없었다. 청년은 기가 막히고, 방바닥에는 스프 없는 라면만 널렸다. 이튿날 청년은 회사에 나가 동료들과 점심을 먹는다. 스프가 없이 포화지방산만 둥둥 뜬 멀건 라면이었다. 청년은 미칠 것만 같았다. 동료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후루룩 후루룩 잘만 먹었다. 조직인데, 청년도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장면은 바뀌어 화장실 안. 청년은 변기에 얼굴을 박고 웩웩 먹은 것을 토해낸다. 화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진다.
‘당신의 스프는 무엇입니까?’
오생은 제가 토하고 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돌연 배가 고파졌다. 그러자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오생이 라면이라니!그건 마치 물과 기름, 오생과 세상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니, 대학시절 자취를 할 때 빈한한 가정형편을 생각하여 값싼 라면을 질리도록 상식(常食)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라면의‘라’자만 들어도 속에서 무엇인가 매우 불편한 기운이 솟구쳐 귀를 막곤 하였다. 그런 오생이 스스로 라면을 떠올리다니!오생은 혹시 와습의 음모가 어느새 호모 싸피엔스의 미각마저 장악해들어오는 게 아닐까 의심하였으되, 라면을 향한 간절한 욕구는 그런 의심마저 쉽게 장악하였다.
오생은 중국제 아디도스 추리닝 바람으로 냅다 달려나갔다. (뛰면 안돼, 오생!에너지, 에너지!지구를 생각해!)
스프가 진짜 없다
놀라운 일은 거듭 일어났다. 오생이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을 무릅쓰고 달려나가 사온 라면에는 면만 있고 스프가 들어 있지 않았다. 오생은 죽어도 스프 없는 포화지방산 덩어리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뜀박질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할 때 불가피하게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것을 보충하려면 불가불 화석연료를 포함하여 지구의 유한한 에너지를 다시금 적잖이 소모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는 오생이었으나, 한번 불붙은 라면에 대한 욕망은 합리적 이성의 모든 작동기제조차 훌쩍 뛰어넘었다. 오생은 냅다 달려나가 다시 라면을 사왔다. 이번에는 다섯개들이 한포장을 사왔다. 하지만 오생 앞에 쌓이느니 순 알맹이 라면들뿐이었다. 스프는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기가 좀 막힌 오생은 망을 통하여 진실을 궁구하고자 네이버 검색창에 이렇게 쳤다.
스프.
먹통 표시만 떴다. 스으프인가? 오생은‘스으프’라고 쳤다. 별무소용이었다.‘스우프’라고 쳐도 마찬가지였다. (‘수프’라고 치자 온갖 종류의 국물요리가 이미지들과 함께 떴다. 거기 어느 구석에도 라면‘수프’는 없었다.) 오생은 자신이 16년간 의탁했던 민국의 교육제도에 대한 예의가 있지 차마‘수푸’라고는 치지 않았다. 오생은 학인답지 않게 씩씩거리며 다음, 드림위즈, 네이트, 파란 등 다른 포털싸이트에 들어가 또 각각 그렇게 치고 Enter↲키를 눌렀다. (오생은 구글과 야후는 애당초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와습의 완벽한 지배영역 하에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결과는 여일하였다. 오생은 두려워졌다.
아아, 적은 있으되, 적이 보이지 않는다!
(와습인가, 군산복합체인가, 빈 라덴인가, 우리 안의 파시즘인가, 열심히 일하는 당신인가, 열심히‘까먹는’나인가!)
불길한 징조를 예감한 오생은 심호흡을 하고 나서 EBS교육방송에 전화를 걸었다.
-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저, 방송프로그램을 확인하고 싶어서요.
- 네, 고객님, 어떤 방송프로그램 말씀이십니까?
- 「스프가 없네」라는 꽁뜨를 봤는데요.
- 「스프가 없네」 말씀이십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확인해드리겠습니다.
기다리는 데 익숙한 계급 오생은 기다렸다.
- 죄송합니다. 고객님이 말씀하신 프로그램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네? 내가 봤는데요?
- 고객님, 아, 「내가 봤는데요」 말씀이십니까?
- 아, 아뇨. 진짜 없어요?
- 고객님, 「진짜 없어요」 말씀이십니까?
- 아, 아닙니다. 됐어요.
- 됐습니까? 고객님, 교육으로 미래가 행복한 세상, EBS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저는 상담원 이, 말, 희였습니다. 고객님, 나중에 감사실에서 전화가 가면, 상담원의 태도가 아주 좋았다고 한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오생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그런데도 당은, 당산동에 있는 당은, 소농과 영세상인과 빈민과 저임금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동성애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장애인, 노인, 이혼가정,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이따금 상영하는 아일랜드 혹은 북아일랜드 배경 영화 광팬, 독립영화인, 『실천문학』 정기구독자, 신용불량자, 노숙자, 지리산두꺼비사랑연대 등)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당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민생을 챙긴다는 미명 아래 현생 인류의 식생활 자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할지 모를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혹여 당비 체납자들을 솎아내는 데만 정책역량을 집중하는 건 아닌지, 오생은 죽어도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으되 이미 그렇게 의심해버리고 말았다.
오생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과 조합과 연대가 포기한다고 해서 가야 할 길을 접을 수는 없었다. 오생은 일찍이 그 길을 간 소수파를 떠올렸다. 심지어 제국의 복판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으니,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때 매국노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북폭을 중지하라며 홀로 하노이로 떠난 배우 제인 폰다며,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민중가수 메르세데스 쏘사와 함께 「캄보디아」라는 노래를 불러서 제국도 크게 책임져야 할 인도차이나 반도의 비극적 현대사를 상기시킨 조안 바에즈, 인디언 학살과 흑인노예의 역사로써 제국의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 하워드 진 등등!오생은 어떤 비방과 외압에도 굴하지 않은 그들을 기억하자 새삼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감격을 느꼈다.
하지만, 장차는 진리가 오생을 자유케 할 터이지만, 당장은 방바닥에 널린 맨알맹이 라면들이 오생을 속박하였다.
다들 맛있게 라면을 먹다
이틀에 걸쳐, 미작농업의 근간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어떤 식량도 주식으로 삼기를 거부하는 민족주의적 부모의 눈을 피해, 제가 뜯은 맨라면들을 간신히 씹어 해치운 오생은 배탈이 나서 약국에도 다녀왔다. 그래도 제 몸 실핏줄 하나하나까지 포화지방산이 스며든 듯 불쾌한 느낌마저 말끔히 지우지는 못하였다.
꿈을 꾸면 스프들이 지금은 얼굴도 희미한 옛사랑처럼 중천 허공중으로 포르르 사라졌다.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고,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가슴 떨리는 한줌의 추억도 없이 어찌 인간이겠는가. 참담한 실연인들 어떠랴. 눈을 감으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가슴 떨리는 그 실연의 추억마저 없다면? 사랑이 가도 아스라한 추억만이라도 남는다면, 오오, 구질구질해도 생을 이어가리니! 하지만 스프는 사라졌고, 스프의 기억마저 가물가물하였다. 오생은 스프가 사라진 중천 허공중을 미친 듯 헤매는 제 자신을 보다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옳지, 이제야 반성하는 거니, 너? 그래, 네 말마따나 와습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우리 세대가 문제지 전후세대인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니?어쨌거나 고맙네. 해도, 이놈아!퍼뜩 일어나 전화 안 받아?
부친이 오생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오생은 슬픔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정신머리로 휴대폰을 받았다. 제가 사는 동네에 난데없이 한류우드(Hallyuwood)라는 게 생기게 되어 대책위를 만들어 일단 기를 쓰고 반대투쟁을 하였더니 나중에 예상치보다 두배나 높은 가격으로 땅을 팔게 되고 저는 또 한류우드 조성사업단에서 자재관리 일을 맡게 된 초등학교 동창생 갑상이였다.
- 임마, 너는 불알 프렌드들을 무시하는 거니? 투데이가 반창회 준비모임인 거 몇번을 말해줬니? 어지간하면 그 브아이피 얼굴 좀 씨하자.
얼마 후, 오생은 약속장소인 분식집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남편이 인천 앞바다에 조성될 예정인 IEI, 즉 국제영어섬에 주상복합건물 분양권을 따냈다고 입만 열면 자랑인 숙자, 남편은 놀고 저는 공인 부동산중개인 자격증을 따서 개나리, 뻐꾸기, 현대, 삼원 등 시시한 이름을 단 아파트는 말고 주로‘-빌’‘-타워’‘-움’등 명품만 전문으로 중개한다는 영숙이, 남편은 분명히 먹고 노는 처지이건만 무슨 재주가 넘쳐나는지 심심하면 BMW를 몰고 아파트나 오피스텔 청약신청을 하러 간다는 민경이가 총무 갑상이와 함께 오생을 맞이하였다. 오생은 두서없는 이야기 속에 끼어들기도 전에 주인집 딸이 내오는 라면을 먼저 받았다.
두서없던 이야기는 금세 또 노총각 오생의 결혼으로 두서를 잡아나갔다. 오생의 누이가 허구한 날 집안에서‘뒹굴다가’남 다 가는 장가조차 못 간다며 오생을 닦달하다 마침내‘집 잘 보고 도망 안 가는’베트남 처녀 이야기를 꺼냈다고, 갑상이가 운을 떼었다.
- 베트남이라고? 야, 너 복 터졌다. 스무살짜리 베트남 처녀한테 장가간단 말이야?
- 에구, 내가 다 부럽다, 야. 얼마나 눈부실까? 솜털도 보송보송 났을 텐데……
- 지난번 시골 우리 시댁에 갈 때 보니까 길가에‘베트남 꽃처녀 맞선 무료’라고 써 있더니, 그래, 우리 오생이 그런 꽃처녀를 얻는단 말야? 헌데, 우리 오생이 하도 안해봐서 제대로 하기는 할까 몰라?
여자 동무들은 살판났다는 듯이 웍저그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오생은?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게 평소 오생의 신념이었다. 결혼하면 부득불 쎅스를 하게 되고, 그러면 과도한 에너지를 분출하고, 그러면 또 그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한한 지구 에너지(소고기, 지네, 용봉탕, 보신탕, 붕어즙, 해구신 따위)를 소비할 수밖에 없는데, 그 쎅스라는 것이 월드컵 열리는 해마다 한두번 하는 것도 아니고 자칫 하루에도 수차례 할 수 있으니(오생은 실제로 그런 동무를 알고 있다. 갑상이!) 결과적으로 지구의 에너지는 엄청나게 고갈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오생은 라면을 보자마자 이미 충분히 넋이 나간 상태였기에, 딸 같은 베트남 처녀에게 도둑장가를 가든 CIS(독립국가연합) 출신 케이블TV모델을 아내로 맞이하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멀건 포화지방산 국물이 가뜩이나 약한 오생의 비위를 건드렸다.
- 스프, 스프는 없냐?
오생이 겨우 이렇게 입을 열었다.
- 응? 뭐라고?
- 이 집 라면엔 스프가 없냐고.
오생의 말에, 동무들은 게정스러운 눈으로, 마치 휴대폰, 반도체, LCD, 조선, 자동차 이외에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하여 대오각성 불철주야 노력하지 아니하면 민국의 운명은 참으로 암담하다는 모 재벌총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애국심이 부족한 일부 몰지각한 국민 보듯 오생을 바라보았다.
스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분식집을 나설 무렵, 오생은 스프로 인해 현생 인류에게 닥칠 위기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느라 포화지방산이 자신의 신체에 미친 영향을 깜빡 잊어먹을 뻔하였다. 욱!오생은 입을 틀어막은 채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오생은 좌변기에 얼굴을 박고 웩웩 속엣것을 토해냈다. 눈물이 핑 돌았고, 코끝에 시큼하니 쉰 김치군내가 매달렸다. 오생은 손등으로 쓰윽 입가를 훔치면서 거울에 비친 저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지독히 슬퍼 보였다. 그 슬픔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스프는 시작에 불과한 것. 오늘은 한갓 스프에 지나지 않지만, 내일은 다른 무엇이, 모레는 또 어떤 무엇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세인은 더듬이도 없이 태어난 곤충처럼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오생은 토한 뒤끝의 처참한 상태에서도 학인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그때였다. 옆 화장실에서 웩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생이 귀가 번쩍 뚫려 후다닥 달려 나갔다.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한사람이 나왔다. 얼굴이 쇠수세미로 박박 밀어버린 무처럼 창백하였다.
- 갑상아!너 토했지?
- 왜, 오마이뉴스에 제보하게?
- 라면 때문이지?
- 애꿎은 라면은 왜?
- 토한 게 라면 때문이냐고.
- 뭐야? 천만에!어느 염병할 놈이 똥을 한데 싸놔서 엊저녁 마신 술기운이 확 하고 올라와버렸다. 에, 드런 놈!이런 놈은 똥구녕을 그냥……
밖으로 나오자 여자 동무들도 한결같이 창백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화장실에 한번쯤은 들어가서 변기와 대면하고 난 듯한 표정이었다. 오생이 물색없이 또 묻자, 숙자, 영숙이, 민경이가 한결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래, 왜들 토했어?
- 똥!
- 변!
- 분!
세 여자 동무는 간결하게 대답하고 성큼 발길을 돌렸다. 갑상이도 얼른 그 대열에 끼어들었으되, 오직 오생만이 똥, 변, 분을 밟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얼마 후 오생은 궁리한 바 있어 도서관을 찾았다.
책 제목에‘스프’비슷하게라도 들어가 있는 책은 딱 두 권이었다. 『개구장이 스머프』 『이니스프리의 호도』. 실망한 오생은 좀더 검색 범위를 넓혀‘라면’자가 들어간 책들을 찾았다. 『라면의 역사』 『내가 너라면 그렇게 사랑하지는 않았어』 『한국이 일본을 침략했더라면』 등 모두 백일흔세권이었다. 오생은 멍청하게 딸려나온 불필요한‘라면’들은 제외하고 『라면의 역사』 등 열일곱권만 대상으로 삼았다. 묘하게, 찾는 책마다 대출중이었다. 그래도 오생은 줄기차게 물었고, 담당사서는 줄기차게 없다고 대답하였다. 오생의 집념은 열일곱번째 가서야 빛을 발하였다.
- 아, 그건 있네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오생은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기다렸다. 사서가 두툼한 책 한권을 가지고 나왔으되, 어쩐지 표정이 밝지는 못하였다.
- 관외대출은 불가입니다.
- 네? 어째서요?
- 관외대출 불가본으로 분석, 분류, 분리되었으니까요.
- 언제부터요?
- 알고 싶으시면 정식으로 신청하세요. 문서번호 K-2356 양식에 맞춰서요. K-2356 양식은 도서관 보안규정상 K-2355 양식을 먼저 기재하셔서 도서관장의 결재를 받은 이후에……
- 아,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볼게요.
오생은 『식생활의 혁명: 라면』의 어느 구석에서도‘스프’자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무언가 의구심을 품을 만한 증거, 즉 지난 시대 흔한 금서에서 흔히 보던 검은 잉크로 지워진 흔적만 무려 백이십이개를 발견하였을 뿐이다.
돌아나오는 길, 오생은 지인의 부음을 들은 것처럼 하늘이 노래졌고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 아저씨, 괜찮으세요?
분식집에서 나오던, 분명히 스프도 없는 라면을 먹었을 초등학생 두명이 다가와 친절하게 물었으되, 오생은 오히려 인류의 미래인 그 아이들이 장차 감당하여야 할 끔찍한 운명에 마음이 저려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스프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하다
사나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오생은 꿈속에서 쏟았던 눈물을 기어이 현실로 끄집어내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깔깔거리며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오생은 교육인적자원부가 저 아이들이 장차 소중하게 간직하여야 할 일상의 기억들을 보전하는 문제에 대하여 제7차는 이왕 늦었으니 제8차 교육과정에서라도 어떤 대책을 마련할 것인지 조바심이 났다. 턱도 없어라!그들은 아이들을 오직 차세대 성장동력을 연구·개발·생산·발전시킬‘인적자원’으로만 간주하지, 스프도 없는 라면을 먹은 기억이 아이들의 미래를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하여는 도무지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여유도 능력도 의지도 없을 터였다.
미안하구나, 아이들아!
오생은 마침 다가온 노란 학원버스 안으로 홀딱 삼켜져버린 아이들이 남긴 쓸쓸한 그림자를 애써 외면하였다. 자책과 회오, 비탄과 분노가 쓰나미처럼 몰아닥쳤다.
나에겐 내가 너무 하잘것없어,
나는 나를 자꾸 떠나려 하네.2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는 지극히 짧은 순간 자연의 섭리조차 당당하게 삼켜버렸다.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도시 한복판에 땅거미와 노을과 어둠이 들어설 공간은 없었다. 오생은 갑자기 또 어질병이 나고 정신이 황망하여 제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잊어먹었으니, 당연히 또 어디로 가야 할지도 잊어먹고 말았다.
보이나니, 오직 사람들의 물결과 그들이 찾아들어갈 빌딩과 오피스텔과 아파트뿐이었다.(육중한 콘크리트 더미 아래서 땅은 얼마나 아플까!) 저 무수한 세인이 호모 싸피엔스의 이름으로 꾸역꾸역 생을 영위해나간다는 것을 생각하자니, 스프 없는 라면이 라면에는 원래 스프가 없다는 듯 뻔뻔하게 유통되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을 내일을 천연히 구가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자니, 눈물이 마를 겨를이 없었다. 그때였다.
- 저, 시간 좀 있으세요?
지하철 입구(이자 출구)를 빠져나온 한 젊은 처자가 오생에게 다가와 물었다. 오생은 인류가 뭣도 모르고 낭비하는 이른바 풍요의 시간에 대하여는 아무런 미련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워낙 젊은 처자가 예쁘기도 하여, 결국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는 편이라고 대답하였다.
- 서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젊은 처자가 서명용지를 내밀었다. 오생은 일단 정성껏 서명을 한 다음 내용을 읽어보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윤리적 상품을 아십니까? 공정무역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오생은 순간적으로 부끄러움을 느껴 입을 떼지 못하였다.
- 혹시 입고 계신 옷이 인도나 모잠비크 아이들의 야만적 노동착취를 통해 생산된 건 아닌지 따져보지 않으셨나요? 신발은요?
- 장차 따지려고 하다가……
- 선생님께서 매일매일 입고 신고 쓰고 마시고 먹는 것들이 혹시 그런 야만적 노동착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실까요? 꼭 선생님을 비난하자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저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살펴보고 반성하고 그걸 막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 지구상에는 그따위 비윤리적 상품들이 흘러넘쳐, 아름다운 우리 생의 기억들은 송두리째 사라질 겁니다.
- 그, 그렇겠지요?
- 내가 바로 지구입니다!아시겠어요? 내가 바로 인류입니다!아셔야 해요. 도대체 우리 생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입니까? 휴머니즘의 미명 아래 화식을 하고, 풀과 나무를 살해하고, 연약한 땅에 아스팔트를 깔아버리는 것도 모자라, 동물동반자의 가죽을 벗기고 아이들까지 착취해서 탐욕을 채우는 것? 이럴진대, 아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내가 처녀의 몸으로 부끄러움도 무릅쓴 채 이 비정한 거리에 나선 것도……
젊은 처자는 이제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단 채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오생은 파르르 떨려오는 손으로 젊은 처자의 손을 꼭 잡으며 겨우 한마디 건넸다.
- 장하십니다.
오생은 당과 조합과 연대가 외면한 마당에도 희망의 불씨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사실에 사뭇 고무되었다. 하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었을 때, 수입 소맥분을 주원료로 하는 라면이 혹시 비윤리적 상품은 아닌지, 스프 자체가 비윤리적 방식으로 기획 개발되었던 것은 아닌지 (라면을 맛있게 하여, 가령 잔치국수와 같은 토종면류를 즐길 때 얻을 수 있는 건강한 공동체의식을 해체시키고, 상업적 이익에 부합하는 경쟁의식만 고취시킬 의도?) 은근히 걱정이 되어 제대로 갈길을 갈 수 없었다.
사방팔방에서 온통 난리굿이었다.
- 오 예, 지금 당장 황급히 서둘러 들어와보시와요. 여러분을 위한 특별감동사은이벤트가 마련되어 있사와요.
팔등신의 늘씬한, 또다른 젊은 처자들이 인공바람에 펄럭이는 허수아비 막대풍선 앞에서 엄동에도 불구하고 맨허벅지를 번쩍번쩍 치켜들며 세인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 오 예, 좋은 게 좋은 거고, 매부 좋고 누이 좋고, 또랑 치고 가재 잡고…… 자, 새로운 식생활의 혁명!라면을 대체할 캘리포니아산‘스파-게리’가 지금 여러분의 입맛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꿀 때가 됐습니다. 과감히 바꾸십시오. 라면이 아니라도 여러분은 얼마든지 행복해지실 권리가 있고, 또 그럴 수 있습니다.
라면 없이도 스프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무수한 세인이 젊은 처자들의 허벅지를 힐끔거리면서 초대형 마트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갔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인데
얼마 후, 오생은 무작정 버스를 타고 도시를 빠져나갔다. 종점 부근에도 규모는 작지만 도시 만만치 않게 화려한 또다른 불빛 천지가 자리잡고 있어, 오생은 몇십개의 모텔과 몇십개의 가든과 몇십개의 교회, 사찰, 성당, 점집을 지나쳐서야 가까스로 어둠이 지배적인 공간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놀랍게도 거기서 오생은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별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오생은 해 있는 동안에 벌어졌던 무수한 일들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슬픔, 모든 악다구니, 모든 파렴치…… 하지만, 아니었다. 오생은 어느 순간 불쑥 (그러나 필연적으로!) 또 제 존재를 감싸는 인연의 넝쿨을 새삼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별은 사라졌다. 꿈도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무수한 어린아이들이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채석장에서 돌을 쪼고, 바늘에 연방 찔려가며 축구공을 만들고,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가며 융단을 짜고, 마천루보다 높은 쓰레기 더미에서 빈 깡통과 빈 병을 골라낼 터인데, 돌은 없어도 될 길을 만드는 데 함부로 깔리고, 축구공을 만드는 아이들은 그 공을 뻥뻥 차보지도 못하고, 융단은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빈 깡통과 빈 병을 팔고 팔아도 빈 배를 채우지 못하나니! 그런데도 지구 곳곳에서 식구들은 여전히 식구들을 낳고, 전쟁은 전쟁을, 계급은 계급을, 종족은 종족을, 야만은 야만을, 파렴치는 파렴치를 낳을지니, 이럴진대, 지구 어느 구석에 어떤 희망이 남아 있을진저!
오생은 제 발 아래를 고요히 흐르는 어두운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미련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테러를 낳을 터였다. 오생은 합리성을 미덕으로 여기는 학인이었다. 수학천재로 열일곱살에 하바드에 입학하여 3년 만에 졸업하고 버클리대학에서 종신교수직을 따냈음에도 기계문명의 야만적 창궐과 그에 대해 정신없이 순응하는 세인의 무감각에 절망하여 보장된 미래를 거침없이 걷어차고 유타주의 밀림에 숨어 홀로 산업체제의 완전한 붕괴를 목표로‘전쟁’을 전개한 유나바머(UnABomber)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오생은 근본적인 문제를 궁구한다는 것은, 헤겔이 일찍이 『법철학』에서 갈파하였듯, 사물의 핵심을 파고들기 때문에 기존의 지배질서와 충돌, 결국 급진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오생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급진적 선택, 진정한 진보주의자의 마지막 선택이 남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가는 수밖에 없지.
오생이 바야흐로 결혼도 하지 않고 가더라도 인류는 악착같이 종의 번식과 진화를 거듭해나갈 것이며, 식구들은 식구들끼리 오순도순 유한한 지구자원의 약탈과 파괴에 근거한 자신들의 행복을 거리낌없이 즐길 것이며, 경부대운하가 뻥 뚫리고 도심 곳곳에 뉴타운이 건설되면 셋방에 사는 세인조차 마치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게 되는 양 기뻐할 것이며, 교육인적자원부는 차세대 성장동력을 창출할 인적자원을 양성하기 위하여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며, 출판업자는 열대우림을 왕창 파괴하면서 재미있어 죽겠는 책을 찍어내고, 성직자들은 그런 현실에 대하여 회개하자고 신도들에게 어쩌다 호소하고 대부분 외면할 것이고,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이럴진대 사는 게 남는 거냐고 따지는 환자에게 문제는 신경전달물질의 비정상적 작동에 의한 것으로, 그것만 정상으로 돌리면 다 해결된다고 감히 진단을 내려 만물의 배후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거대한 음모를 (모르니 당연히) 무시할 것이며……
아나, 내가 비정상이닷!에잇!
오생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발을 휙 뗄 찰나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오생의 허리를 붙잡았다.
- 참으시게!여긴 상수원 보호구역이라오.
오생의 눈앞에 웬 쭈글쭈글한, 1대 19대 80 사회의 80에서도 가장 바닥권에 있을 법한 노인이 뜰채를 들고 서 있었다.
- 이왕 발품 팔아 예까지 온 거, 조금만 더 고생하시우. 저기 저쪽으로 가면 수질도 오염시키지 않는 꽤 괜찮은 명당자리가 있는데, 엊그제도 어떤 방송국 사람이 하나 찾아와서 내 가르쳐줬지.
- 아저씨!
오생은 기가 막히고 약이 오르고 무언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솟아 기어이 또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어이구, 미안!굳이 자네 결단을 막을 생각은 없네만, 날도 추운데 우리 일단 뜨거운 라면 국물이라도 마시고 나서 차후를 의논하더라도 해봅세.
- 라면이오? 제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아시나요? 말하자면 바로 그 라면 때문이어요.
- 라면? 허 참, 그 방송국 양반하고 똑같은 얘길 하네. 하지만 보게, 라면에 무슨 죄가 있어? 있다면, 라면을 잡아가둘 거야? 어떻든 내 라면은 달라요, 달라. 내가 이래 뵈도 수질감시원 이십년에 라면 맛있게 끓이는 데는 도가 텄거든?
노인이 다짜고짜 오생을 끌었고, 오생은 하는 수 없이 노인을 따라 가까운 감시초소로 들어갔다. 얼마 후, 오생은 눈앞에 차려진 라면을 보고 감격하여 예의도 잊은 채 허겁지겁 제가 먼저 손을 뻗었다. 짜장 황홀하였다.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감당 못할 생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는 자서전을 쓴 철학자 알뛰쎄르가 얼핏 떠올랐다. 오생은 양은냄비 바닥까지 남김없이 핥아 미래를 좀더 지속시켰다.
- 이거 비법이 뭐예요?
- 비법? 하하, 정작 그렇게 물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굳이 말하자면……
- 굳이 말씀해보세요. 스프도 없이 어떻게 이런 국물맛을 내실 수 있죠?
노인은 입가에 빙그레 웃음만 머금을 뿐 속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밤은 이슥해지고, 초소 밖 하늘에 별이 더 총총해지고, 멀고 가까운 기억들이 두서없이 뒤엉켜 무엇인가 간단한 듯 복잡하고 복잡한 듯 간단한 의미를 일깨워주려는 듯싶게 시간이 더 흐르자, 오생은 이미 라면 따위는 잊고 노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홀딱 빠져버렸는데, 노인의 막내아들이 학교 다닐 때 말썽만 피우더니 기어이 소년원에 갔고 일전에 면회를 갔더니 글쎄 하는 말이,
- 아부지, 이번에 나가면 오토바이 한대만 사주세요.
- 왜?
- 내가 한번만 딥따 폭주족 하고 나선 딱 맘 잡을게요.
하더라나.
- 그래서 뭐라셨어요?
- 뭐라긴, 그러자구 했지.
- 왜요? 그러다가 또 무슨 사고 치면 어쩌시게요?
- 사고 무섭다고 안 사주면 더 큰 사고 칠 거 아냐? 그것보다…… 봐, 얼마나 폼 나겠어? 나는 평생 어깨 펴고 한번도 다녀보지 못한 서울 한복판을 빠라바라밤 요란 망측한 경적을 울리며 내달리는 우리 막둥이를!
노인은 그쯤에서 킥 하고 웃음을 삼켰다. 오생은 그 오토바이가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며 대지와 인간과 역사,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새롭게 발견한 청년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의 모터싸이클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자신있게 말할 지적 능력은 없었다. 게다가 오생은 한때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며 국가보안법, 민제동맹법까지 어겨 남도의 배소(配所)에서 오년 세월을 썩은 전과자‘주제’였다. 하지만 도로교통법을 어겨 많은 이들의 안락한 통행권을 방해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하였다.
- 그거 그래도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니어요?
- 문제? 하긴 문제가 있긴 좀 있겠지? 폼나게 달리는 것도 그래. 그래 봤자 맨허공을 가르는 거지, 빽도 없는데다가 벌써 별까지 단 그애가 뭘 잡을 수 있겠어? 하지만…… 글쎄, 산다는 게 말이지……
노인은 이제 발달장애가 있는 당신의 큰아들에게 필리핀에서‘기꺼이’시집왔다는 첫째 며느리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였는데, 오생은 (굳이 노인네를 지적해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국제결혼이라는 명목으로 약탈혼이 버젓이 용인되는 민국의 현실에 대하여 도대체 합리적이고 아시아인이 두루 납득할 만한 해결책은 있는 것인지 따져보니, 농촌을 죽여서 도시를 살리는 민국의 기본 아젠다가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 도무지 안되겠어요, 아저씨.
- 왜 기어이 가시게?
- 네, 이 수밖에 달리 길은 없는 것 같아요.
오생은 차마 “내가 더 버티면 버틸수록 테러의 위험성은 더 커져요. 말하자면 나는 숨쉬는 시한폭탄이어요” 하는 말을 보태지는 아니하였다.
- 하긴, 그렇지. 뭐 뾰족한 수가 있겠어? 하지만…… 그래, 갈 땐 가더라도 말이야, 우리 그 며늘아기가 말이지, 접땐 장에 갔다 오면서 이쁘게도시리 시아버지 드시라고 무얼 사왔는데, 그게 말이야……
노인은 공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아예 건드리지도 않고 지극히 사적이고 말초적인 이야기만 지루하게 늘어놓았다. 오생은 하품을 참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돌연 이 야심한 시각에 젊은 처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일은 또 어떤 서명용지를 들고 비정한 거리로 나설까 궁금해졌고, 자기가 결혼해서 곁에서 거들어주면 훨씬 힘이 나지 않을까 생각하였는데, 그러다가도 곧 (쎅스! 에너지!) 결국 안되는 건 안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박차고 강가로 달려나갈 기회만 엿보는데,
- 졸리지? 근데 이거 아시나? 필리핀에도 우리 잔치국수하고 비슷한 게 있다던데, 한번은 우리 며늘애가 그걸 만들다가 다짜고짜 우는 게 아니겠어? 보는 내가 더 짠하데…… 뭐, 옛날에 엄마가 만들어준 걸 옹기종기 모여앉아 먹던 기억이 나서 그랬겠지.
- 그래서요?
- 내가 그랬지. 아가, 프란체스카야. 실컷 울어라. 그래야 자꾸 기억하게 되고, 우리 같은 사람들, 나중엔 그 힘으로 버티면서 살아가는 거란다. 헌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듯 노인의 이야기는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져서 먼동이 터오고 해장으로 다시 끓인 라면이 불어터지도록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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