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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종

김종은 金鍾銀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장편소설 『서울특별시』, 소설집 『신선한 생선 사나이』 『첫사랑』 등이 있음. youturn1@hanmail.net

 

 

부디 성공합시다

 

 

열여섯명이 모였다.

종이컵에 건네받은 커피는 지나치게 달았다. 고맙습니다, 하고 덥석 받은 것이었는데 한모금 만에 생각이 바뀌었다. 애초에 심정은 이랬다. 향이 좋은 커피를 한모금 들이켜면 지독한 냄새가 조금이나마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어디서 똥물이라도 퍼나르고 있는 것인지 정문에 도착했을 때부터 코를 찔렀던 악취가 자리를 옮겼음에도 여전한 까닭에서였다. 대체 이 형언하기 어려운 냄새의 정체는 뭘까. 실은 문제의 악취에 반응하는 사람이 나뿐인 것 같은 기묘한 외로움이 무엇보다 고역이었다. 다들 태연한데 혼자 코를 틀어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커피나 한잔 줬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만 간절했던 참이었다. 그렇게 반가운 마음으로 들이켠 커피였건만 대뜸 머리부터 띵하니 고마울 이유가 없었다. 앞니에 설탕가루가 엉기는 느낌이어서 절로 인상이 써질 뿐이었다.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커피를 대접받아보면 단박에 알 수 있기 마련이다. 어떤 잔을 사용하는지 향은 어떤지 또 온도는 어떤지 무엇보다 원두와 시럽과 크림의 조화는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한데 이 커피는…… 종이컵에, 지독한 악취에, 미지근한 온도에, 원두의 품질은 고사하고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설탕가루뿐이다. 이건 뭐 안 봐도 비디오다. 어떤 곳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조화라는 것을 도무지 찾을 수 없을 곳임이 빤했다. 조화란 이를테면 룰인데. 어찌됐든 그것은 최악이라 여기기에 충분한 맛이었다. 문제의 조화롭지 않은 커피는 양도 많아 손가락만 살짝 움직여도 흘러넘쳤다. 홀짝이기조차 어려운 커피를 핥다 조심스럽게 건넨 물음에 돌아온 대답 역시 커피의 맛과 다르지 않았다.

“전부입니까?”

“전부입니다.”

“………”

“어떻게, 그렇게 됐네.”

말했지만 앞니에 엉긴 설탕덩어리 탓에 머리가 띵한 참이었다.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애써 혓바닥을 굴려대고 있노라니 정말이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입은 달았고 마음은 썼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반갑게 덥석 받아놓은 터라 버릴 수도 없어 난감한 판인데 열여섯이 전부라니 기가 막히지 않겠나. 마음 같아서는 확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한약을 들이켜는 기분으로 단숨에 삼키기로 하고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삶이란 게 본디 고통을 감수하는 시간의 연속인 법이래도 이런 것까지 삼켜야 하나 싶었다. 성공은 인내의 다른 말일 것이라 여기면서 이 사회가 연단에 선 자에게 원하는 도덕이란 이론과 실천의 균형일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물 한모금 없이 돌멩이를 넘기면 딱 이러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야, 커피 좋아하시나 봐.”

비죽비죽 튀어나온 턱수염을 소리나게 문지르면서 그는 그렇게 대꾸했다. 우리 김대리가 달달하게 잘 탄단다. 띵한 머리로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 수염난 사내의 눈과 마주한다는 것은 더없이 답답한 일이었다. 도무지 룰을 모르는 사람과는 실로 오랜만의 조우였다. 때때로 어떤 일들은 예상과 다르게 벌어진다지만 성공에는‘카오스’랄지‘버터플라이 이펙트 이론’을 적용할 수 없어야 옳았다. 한데 이건 어떻게. 시작부터 일이 꼬이면 마무리도 어설프게 되곤 했던 기억 때문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초장부터 일은 그렇게 꼬이고 있었다.

그래, 진심으로 실망했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자신만만해하고 있었다. 솔직히 죄송합니다만 정도는 붙여줄 줄 알았다. 한데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됐어요,가 아니라 당당하게 그렇게 됐단다. 흔치 않은 경우였다. 소도시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하나같이 뻔뻔한 구석들이 있다. 물론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축구도 할 수 있고 야구도 할 수 있는 숫자였다. 신세기를 이끌어낸 지저스와 제자들, 까짓 마리아까지 합쳐줘도 열넷이다. 그렇게 진심으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숫자라고,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차 둘러봐도 200명 정원 강당 안에 줄조차 맞추지 않은 채 띄엄띄엄 자리잡은 열여섯은 지나치게 초라할 뿐이었다. 누군가 먹다 버린 삶은 옥수숫대에 가까스로 매달린 옥수수 알갱이를 본 기분이랄까. 흙마저 군데군데 붙어버린 느낌이어서 그야말로 처참할 따름이었다. 한데 저걸 다 삼켜야 한단 말이다. 연단에 선 자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청중을 삼킬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 에취, 하고 재채기를 했을 때 에취…… 에취…… 에취…… 에취…… 하고 메아리가 퍼져나갔다. 메아리라니. 절망의 끝에 서게 되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소리가 처연하게 가슴을 파고들고 있었다.

“어떻게, 더 드려?”

“됐습니다. 닥터가 카페인하고 상극이랍니다.”

“누가?”

“의사가요. 그런데…… 좀 기다려볼까요?”

“전부라니까.”

다시금 전부라니까…… 전부라니까…… 전부라니까…… 전부라니까…… 하고 메아리가 울렸다. 고교시절의 동시개봉관이 떠오르기에 충분한 고전적 에코였다. 영화가 시작되려는 찰나면 어김없이 스크린에 등장했던 괴이한 뿔테안경의 여자를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마주 앉은 사람 온몸의 힘을 쪽 빼버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사거리 ○○안경원…… 안경원…… 안경원…… 안경원…… 전반적으로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장은 조회시간에 짝다리를 짚는 녀석까지 골라내 머리를 박게 했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너무한다 싶어 그를 악의 화신쯤으로 여겼다. 강당 교장 사진의 눈을 파버린 것이 나였다. 이제는 이해가 간다. 그때는 연단 위의 시선이라는 것을, 그 고독함을 알지 못한 나이였다. 얼씨구. 뒤에서 두번째가 벌써부터 졸고 있다는 뜻이다. 돌려놓은 의자에 다리까지 올려놓은 채였다. 벗어놓은 신발에서 고린내가 풍기는 듯해 역시나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혹시 지독한 냄새의 근원이 저곳이진 않을까. 거기 아저씨, 이리 나와서 머리 박으세요, 하고 싶을 만큼. 순간 눌러두었던 짜증이 벌컥 났다. 하지만 다시금 참기로 했다. 아무래도 인내는 쎅스와 닮아 있는 것 같다. 처음이 어렵지 하다 보면 쉽다. 것뿐인가, 자꾸 참다 보면 무덤덤해지기까지 한다. 강조하지만 연단에 선 자라면 누구나 삼켜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참았다.

“의외로 다들 성공에 관심이 없나 봅니다.”

불평처럼 내뱉은 혼잣말이었는데 귀는 또 밝은지 사회를 맡기로 했다는 그가 눈을 크게 치켜뜬 채로 우악스럽게 되물었다. 이제 보니 그의 수염에는 괜히 주눅이 들 만큼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뭐요?”

“이게…… 강당이 굉장히 큽니다.”

“가끔 족구를 하니까.”

“족구가…… 좋죠.”

“어떻게, 선생님도 뽈 좀 차시나?”

“구기종목에 약한 편입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를 따라가고 있노라면 대화는 그렇듯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묘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아, 이 대답은 아닌데 싶었으나 이미 때가 늦은 것이었다. 끝을 조금 힘주어 말했더니 약한 편입니다…… 약한 편입니다…… 약한 편입니다…… 약한 편입니다…… 하고 예의 메아리가 돌아왔을 뿐이었다. 온몸에 힘이 쪽 빠져버리더니 그에 맞춰 조금씩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한 것이 전부였다. 뭐랄까 닿을 수 없이 까마득한 봉우리를 산소통 없이 등반하는 기분이었다. 별안간 눈이 부시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알 수 없는 메아리가 귓가를 맴도는.

그랬다. 정상에 오르는 길이란 누가 뭐래도 고난의 길임이 분명했다.

성공하는 사람의 화법이라는 것이 있다.‘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이론’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기도 한데 포인트는 상대방의 말에 적절히 화답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그것을‘대화의 하모니’라 했는데 타인과 대화할 때 지나치게 자신의 목표만 내세우다 보면 대부분 화자의 말투가 공격적이 된다는 것으로, 따라서 적절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가령 누군가 저는 홍합을 먹으면 이상하게 정수리가 가려워요,라고 대화를 시작했다면 일반상식 따위 생각하지 말고 그를 기묘한 눈초리로 바라보지도 말고 똥 씹은 표정도 물론 짓지 말고, 설사 아닐지라도 한때 저도 그런 적이 있었죠,라고 되받아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거짓말이라 규정지을 수 없는 것으로, 뭐랄까 어렵다면 한차원 높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대체 한차원 높은 것이 또 무엇이냐 묻는다면 노코멘트라밖에 말할 길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쉽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공학의 영역이 아니라 철학의 영역이므로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음을 너그럽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강조컨대 모르는 것이 아니고 성공에 철학은 대부분 걸림돌이기 마련이라 철학이라면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그나저나 이 남자와는 도무지 하모니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니 이것 참. 솔직히 뽈 좀 차시나?에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멍하니 있을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인데 그가 짐작할 수 없는 누런 얼룩이 가득한 장갑을 벗어 뒷주머니에 욱여넣고는 말을 이었다.

“말 참 이상하게 하시네.”

“예?”

“어제 당직했던 사람들이라. 조는 사람 있어도 신경쓰지 말라고.”

“예. 피곤들 하실 텐데 되레 영광입니다.”

“이런 거 왜 하나 몰라. 나는 시간 되면 이거 그대로 읽으면 되나?”

“그렇죠.”

“강사 선생님 테레비도 나오셨다며?”

“예. 몇번.”

“못 봤는데…… 몇번? 칠번?”

“예?”

“칠번?”

“아. 칠번에도 나왔고 십일번도 나왔고.”

“우리 집은 비오면 칠번이 잘 안 나와.”

“그러세요?”

“어떻게, 여긴 엠비씨가 십일번 아닌데. 똑 소리 나신다더니 암껏도 모르네.”

“예?”

“에이, 칠번 잘 안 나온다고.”

“예에~”

“서울 사람들은 엠비씨가 다 십일번인 줄 알아.”

“아, 예.”

아아, 다시금 이 대답은 아닌데 싶었지만 또 때가 늦었다. 말을 마친 그는 대뜸 앞섶에서 껌을 꺼내 씹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릇이 돼놓아서 이해해달라 했지만 대체 어쩌자고. 역시 별안간 눈이 부시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알 수 없는 메아리가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다. 별수 있었겠나. 아무래도 8장의 내용을 수정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인 것 같았다.

언젠가 자고로 성공이란 시크한 것이라 말한 적 있었다. 물론‘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이론’의 12장에는 좀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찌됐든 지방의 소도시라면 아무래도 성공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어서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초장에 커피로 짐작은 했다 이 말이다. 그러니 사람은 제아무리 배가 고파도 가려 먹을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곧 자고로 대한민국인이라면 서울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서울 본사직원들은 달랐다. 그렇게 본사쪽 일만 했으면 좋았겠지만 서울 사람들은 대신 또 셈에 밝아서 이왕이면 사업장까지 해달라는 부탁이었으니 또 어쩔 수 없기는 했다. 세상사 일장일단이라는 게 있다. 사실 부탁이라기보다는 애초 계약이 그랬다. 마트서 끼워 파는 요구르트처럼 본사에다가 사업장까지 하는 걸로 하자기에 사실 조금 황망했지만 아무렴요 그렇게 해야죠, 한 것이었다. 강의료를 깎이느니 한군데 더 하는 것이 나았다. 그래서 덥석 손목까지 쥐고는 서둘러 악수를 나눈 것이었고 계약은 그제야 성사됐다. 근 40일 만이었던 터라 그것도 진심으로 좋아서였다. 첨언하자면 마트서 끼워 파는 물건 결코 싸지 않다. 이 경우에서 보듯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라 할까. 그다지 상관없는 이야기 같지만 성공하려면 그런 사소한 것들도 메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준다면 좋겠다. 어찌됐든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또 도착해 시작부터 주고받은 대화란 게 대부분 그렇듯 황망한 것들뿐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대화는 그렇다 치자.

 

Untitled-1

 

조는 사람은 둘째 치더라도 현수막부터가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잖은가. 부담스러운 강당에 걸맞게 부담스러운 현수막이었는데 전반적으로 삼도쯤 기울어져 달려 있었고 글씨는 빨간색인데다가 오자치고는 심했다. 그래서 다시금 조심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현수막을 내릴 수는 없겠냐고. 수염난 사내의 똑 떨어진 회신. 불가하단다.

“저거 내리려면 네명 있어야 되는데. 뭐 오타 하나 났어요. 선생님도 참. 의외로 쫀쫀하시네. 어떻게, 차세대나 차새대나 읽으면 똑같잖습니까?”

‘비주니스’는 진심으로 모르는 투였다. 그 앞에 설 생각을 하고 보니 역시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지만 하긴 주제와 제목을 저렇게 잡은 내 잘못 아닌가 하는 생각에 또 참기로 했다. 오늘 참 여러번 참는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는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겸허한 자세라는 것도 있다. 그런 다음 그 문제를 발벗고 앞장서 해결하는 것인데 그것 역시 일종의 룰이라면 룰이라 할 수 있겠다. 이메일 첨부로 보낸 파워포인트 파일의 스케줄표에 사실‘비즈니스’와‘리더’는 영문이었다. 새 시대의 키워드 컨트롤 씨(Ctrl+C)를 모르는 것일까. 갖다 붙이는 것도 못하나 싶은 참에 길 건너 현수막 하시는 박사장이 낼모레 일흔이라며 친절히 일러주기까지 하니 역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도리가 없잖은가. 역시 아무것도 몰랐던 내 탓인 것이다. 그래서 파워포인트 파일을 불러낸 사실만으로도 대견하다 생각하기로 했다. 노인양반한테 차마 일처리가 이게 뭐냐 어쩌구 할 수는 없었단다. 사람은 자고로 양심이 있어야 한단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 박사장이요, 제 돌잔치에도 오신 양반입니다. 우리 아들 돌 말고 내 돌.”

그러고는 대뜸 호탕하게 웃는데 대화의 하모니고 뭐고 진짜 뭐라 더이상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어찌나 크게 웃었던지 그의 입속에 들어 있었던 껌이 쏙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는 또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 입에 넣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고 싶어도 시크하지 않은 행동임이 틀림없었다. 한데 그는 이번에는 급작스레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더니 엄마는 연필을 잡았으면 했는데 자신은 실을 잡았다면서 그래서 건강 걱정이 없다는 말을 하더라. 어쩌라고요.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짝짝 씹어대며 말을 잇는 사내의 눈과 다시금 마주하니 대체 어찌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모니 따위 잊은 지 오래였고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6년 만에 손톱을 물어뜯게 됐다.

“어떻게, 선생님은 돌 때 뭐 잡으셨나?”

“둘째라 돌잔치 안했습니다.”

그런 다음 손톱을 뽀드득 뽀드득. 그렇게 십분은 지나치게 길었다. 부장님 오셔야 되니까 십분만 있다 합시다, 하기에 재차 예 그래야죠, 한 것을 후회했다. 십오분이 지나도 부장이라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아주머니가 출입구를 열고는 난데없이 등장해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이곳 사람들은 등장의‘타이밍’이란 것을 통 모르는 모양이었다. 뭐랄까 씨트콤을 찍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김반장!부장님 못 온다네.”

“자알한다.”

“빵꾸!”

“진작에 말을 해야지. 여기 선생님이 얼마나 기다리셨어. 그나저나 어떻게, 우리 아줌마들이랑 술 한잔 해야지?”

“반장은 날부터 잡소, 맨 말만.”

참 이곳 사람들은, 오늘 작정이라도 한 것인가. 순간 뒤에서 두번째는 “조오~았어!”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퍼뜩 발작처럼 잠에서 깨더라.‘반장’에 깬 것인지‘부장’에 깬 것인지‘우리 아줌마’에 깬 것인지‘술 한잔’에 깬 것인지 상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뒤에서 두번째는 여하튼 그렇게 “조오~았어!” 하면서 깼다. 이건 또 뭐야. 정말이지 씨트콤이었다. 그나마 에티켓은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올려놓았던 다리를 슬그머니 내린 것은 다행이었다. 그렇게 잠에서 깬 사내가 의자를 돌려놓기 시작했으니 그래 이제 시작이다 싶어 마음도 덩달아 놓였으면 했다. 한데 껄끄러운 쇳소리가 부담스러운 강당 벽을 타고 그야말로 부담스럽게 퍼져나가고 보니 그게 또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절로 이를 악물 수밖에.

그렇듯 우여곡절 끝에 사회를 맡은 그가 박수를 쳐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기까지 10년쯤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숨이 가빠올 지경이었다. 어찌됐든 진짜 시작되는 모양이었고 그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고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이제 시작이다, 바야흐로 열여섯을 삼킬 순간이 도래했다, 뭐 그렇듯 늘 하던 대로 내 이름이 불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다. 어떻게, 사진부터 박자. 일단 나와봅시다, 다들.”

죽겠다. 열다섯이 저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니 강당 안은 더없이 혼란스러워졌다. 슬슬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마에 커다란 점이 있는 사내는 사진을 찍네 마네, 머리를 빗네 마네, 면도를 하고 오면 안되겠네, 해가면서 근 10여분 설레발을 쳤다. 문제의 사내가 머리를 빗은 모습과 면도를 한 모습을 떠올려봤지만 지금과 그닥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나란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단 뜻이다.

“어떻게, 우리 선생님도 박으실까?”

“됐습니다.”

“이게, 제출해야 되는 거라 골치가 아파요.”

“그럼요, 찍으셔야죠.”

그럼 빨리 찍던가, 박던가. 사회를 맡은 사내는 아 놔, 빳떼리!하고 박수를 치더니 강당 출입구를 박차고 달려나가 역시나 근 10여분 후에야 돌아왔다.

한때는 좋았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미소지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얼마나 들떴는지 몰랐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노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나만을 바라보는 눈동자들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타인의 이해와 한편으로 고개를 숙이는 탄식의 회한 따위가 다 내 것처럼 여겨져 짜릿할 뿐이었다. 박수를 받으면 정말이지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연단의 매력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멀쩡한 직장을 그만둘 이유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풀에서 한가로이 배영을 하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평생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20년쯤은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 내게도 휘황찬란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성실해 보이는 청사진이라는 것이 있었다. 세권쯤 책을 내고 강의는 10년쯤. 연구소를 하나 차리고 여름이면‘써머 썩세스 캠프’를 열고 겨울 되면‘사랑의 열매’같은 것도 뭉텅이로 구입해 좋은 일도 하면서. 성공의 기쁨은 아무래도 나눔에 있는 것 같습니다, 헛헛헛,이라는 멘트까지 생각해놓았다. 그렇게 근 2년은 경주마 같은 나날이었던 터라 뒤돌아보기는커녕 옆조차 잘 보이지 않아 전진만 했었다. 앞으로만 달리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질주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책없이 폭주족을 비난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폭주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은 뭐랄까, 내 인생의 너그러운 포인트였다 해도 좋았다. 한데 지금으로선 곤혹스러울 따름이다. 시야가 좁아진 느낌이랄까. 어쩌면 배영이고 뭐고 이제는 가라앉는 모양인지 멀리 보려 해도 작은 것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묘할 뿐이었다. 커피, 수염, 현수막, 바닥에 떨어진 껌 같은.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연신 출입구만 되돌아보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게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어서였을까. 어쩌면 성공이 멀어지고만 있는 느낌이랄까. 새삼 출입구(出入口)가 동시에 비상구(非常口)임을 알았다. 새하얀 바탕 위에 녹색으로 그려진 사내가 내게 말을 거는 듯한 기분이었다. 확 때려치고, 갈까? 그럴까? 그렇게 솔깃한 것이었다. 픽토그램 사내처럼 문을 박차고 뛰쳐나와 무작정 달리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어쩐지 과거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비상구(非常口) 이전에 출입구(出入口)라니까.

아내가 그랬다.

“당신…… 변했어.”

해야 할 말과 또 정리해야 할 말들이 발목만 잡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어찌된 일인지 선뜻 입이 열릴 것 같지 않은 묘한 기분에 아내의 말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프로답지 못하게. 안될 말이었다.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적정 수준의 강의료였다. 어떻게든 엉키기만 하는 생각들을 풀어야 했다. 생각을 정리해 제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니 일목요연할 필요가 있었다. 논리적이지 않다면 타인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바닥의 기본이라 해도 좋았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청중을 삼키려면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찌됐든 그렇게 할 수 없는 입장이었음에도 연신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확 때려치고, 갈까? 힘들어. 대충 그렇게 된 셈이었다.

표지 속 사내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지 않느냐 반문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저 도안을 만들었다는 오오따 유끼오(太田幸夫) 교수가 그랬다. 자신의 저서 『픽토그램 이야기』에서 하단을 개방하면 달리는 사람의 모습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 바라보는 사람의 공간과 심리적으로 연결된다고. 그래서 달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저 자세라면 도무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포즈라 할 수 없다. 한데 가만 있어보자, 저 그림, 다급하기보다는 어쩐지 외로운 느낌이다. 어쩌면 오오따씨는 비상(非常)의 순간, 인간은 도무지 침착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까지 상징한 것인지 모르겠다. 무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당황해하고 있었다. 문득 사내가 말했다.

“저걸 이렇게 보고 있으면 말입니다……”

“예?”

“저 비상구 표지, 뽈 차는 거 같죠?”

“예?”

“족구의 상징, 뭐 그런 거.”

그는 다시 소리내 웃었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언젠가 방바닥에 누워 괜히 웃기도 하면서 혼자 구상했던 것처럼 일이 잘 풀렸다면 계속 당당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 적도 물론 있었다. 연구소니 사랑의 열매 뭉텅이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한달에 마흔번 강단에 서는 것과 네번 서는 것의 차이란 시간의 문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여기고 있던 터였다. 무엇보다 아직 실패했다는 생각이라면 하고 싶지 않았다.

비즈니스에는 오르고 내리는 그래프가 존재한다. 그것을 부드럽게 타지 못하면 추락의 순간에 좌절하게 되는 법이다. 대책없는 청중과 함께하는 이런 터무니없는 곳에서의 강의도, 가뭄에 콩 나듯 찾아드는 기회까지 훗날 신화의 소박하고 그래서 더 멋진 에피쏘드가 될 수 있다. 나는 성공을 좇는 사람이다. 실패는 없다. 여의치 않던 순간에 에디슨도 번역일을 하거나 심지어 점원까지 했다. 늘 전구만 붙잡고 살았던 것이 아니란 뜻이다. 에디슨을 위대한 발명가라 하지 말자. 실은 위대한 사업가 아닌가. 그는 그래프를 유연하게 탈 줄 아는 사내였을 뿐이다. 반짝이는 강당의 전등알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할 만했다. 아니, 해야 했다. 아내가 늘 하는 말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게 강사일은 뭐 하러 붙잡고 있느냐고 꽃가게나 같이 하자며 툭하면 다마스의 열쇠고리를 흔들어댄 아내가 늘 야속했었다. 남대문시장에 들러 꽃을 사오고 배달도 시작하잔다. 내가 하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흔들어대는 성공열쇠의 실체는 그렇듯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운송과 배달, 거기에 다마스라니. 메트로폴리스의 글로벌 리더와는 100광년쯤 떨어져 있는 단어였다. 그래서 혹하는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근 40여분에 걸쳐 능력계발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설명해야 했다. 꽤 진지하게 경청한 그녀에게 알겠어? 라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꾸는 짧았다.

“그럼 한달에 백만 벌어와라. 더도 덜도 말고.”

아내는 능력계발학과 간부학, 성공학, 문서관리요령 일람표와 경력관리 수칙, 시간관리 백서와 화술학, 협상원론과 각종 프레젠테이션 매뉴얼로 빼곡한 책장 위에 보란 듯이 다마스 열쇠를 올려놓고는 뒤돌아섰다. 안될 말이었다. 자본주의로 외피를 꽁꽁 동여매고 있는 시크한 국제도시 서울에서의 성공이 기껏 프리지어 한단만도 못하다니 말이 되나. 에디슨도 벌떡 일어나 통곡할 소리였다. 그럼에도 아내의 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꽃은 향기도 나고 무엇보다 받는 사람이 즐거워한단다. 게다가 그걸 크게 욕심내는 사람도 없단다. 플라워숍 관리요령을 시간 되면 정리해줄게,라 대꾸했지만 아내는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였다.

“개구리 얘기 아냐? 욕심 너무 부리면 배 터져. 애도 아는 걸 왜 모르냐?”

성공이란 욕심이 아니라 목표라는 것을 아내에게 설득시킬 수 없었다.

“작은 사업이라도 요령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엔 차이가 있어.”

“자기가 옮겨주고 배달하면 된다니까. 그걸 꼭 배워야 아냐?”

맙소사. 뭐랄까, 제자리를 빙빙 도는 느낌이 좋지 않아 말을 말자고 했던 기억이었다. 한데 이 강당의 연단에서 어째서 그 말이 자꾸만 떠오르냐 하는 말이다. 매끄럽게 논리적 설명을 마쳤는데도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 목이 졸린 느낌이 들곤 했다. 어쩌면 지금의 처지가 비슷한 것일까. 정말 그래서일까.

“거, 할 거면 빨리 합시다.”

아니 지금 누구 때문에 늦고 있는데. 근 580여회 이상을 한 강의가, 곧 600회 기념강의를 준비하고 있는 내가 오늘은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이놈의 악취. 누군가 카메라의 플래시를 터뜨렸을 때에는 움찔 놀라 그만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시크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시작도 하기 전에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괜찮다. 쫄지 말자. 일목요연하다면야 가능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시금 다잡았다. 비상구의 사내는 비로소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고 나는 연단의 마이크와 하나가 되기 위해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프레디 머큐리도 그랬다. 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애써 연이어 복식호흡을 한 다음 셔츠의 깃을 정리했다.

전부 다 삼켜버리겠어!연단의 사내가 이윽고 잡음이 심한 마이크로 익숙한 이름을 발음했다. 그래, 다들 기대하시라. 보란 듯이 삼켜주지. 이제 시작이었다.

“자아, 병신의 귀재!”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변신!변신!”

사내는 애써 정정했다. 그랬다. 나는 변신의 귀재였다.

모 프로그램에 그렇게 소개된 이후로 문제의 닉네임은 연신 공중파를 타고 전국으로 송출됐다. 명색이 귀재라 모두들 인정한 판에 대체 하지 못할 게 뭐 있었을까. ○○대학 경영학부 졸업, 시카고 랭귀지스쿨 6개월 수료, ○○전자 공채, 기획조정실 근무, 자진 퇴사(상세히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기는 한데 구조조정의 압력이 조금 있긴 했다), 터무니없이 때늦은 노래방 창업, 예견된 대실패, 편의점 세곳, 주유소 네곳, 김밥 전문점은 무려 여섯곳, 만화대여점, 9000원 치킨집, 1000원 마트, 죽 전문점 등등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 시작, 이후 홈페이지 NMF(No More Fail, 더이상 실패는 없다) 개설, 회원수 2만 돌파, 홈페이지 연재 「성공을 확 잡아라」로 세간의 시선 집중, 능력계발, 간부학, 성공학 자체 연구 및 강의 시작, 팬 블로그 성아사(성공만 아는 사나이) 운영(해당 포털 일반인 개설 블로그 사상 최단기간 최고 방문자수 기록). 그것이 오르고 내린 내 비즈니스의 굴곡이었다. 화려하기보다는 굴곡이 심한 그 이력을 사람들은 변신이라 칭했다. 김건모의 「사랑이 떠나가네」와 PCS전화기보다 스펠링 이해조차 버거운‘IMF’라는 단어가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생각만으로도 지긋지긋하다는 1998년은 내게 영혼을 걸고 돌아가라 해도 선뜻 베팅을 할 수 있을 만큼 황금기였다. 알겠지만 성공은 위기에 불현듯 벌컥 문을 열며 찾아드는 법이다. 사람들은 초조해하고 있었고 나는 자신에 가득 차 있었다. 위기와 실패로 점철된 그들에게 성공은 산뜻한 향의 비타민이었고 그런 이유로 나는 보기 좋은 알약을 그들에게 건네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때는 만인이 모두들 내 그래프 위에 올라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기획실 근무 경력을 앞세워 수많은 대기업의 강당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소개됐으며 한달뿐이긴 해도 모 일간지에 칼럼까지 연재했다. 그‘알쏭달쏭한 성공수칙’이라면 아직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꽤 됐다. 나름 이를테면 필살기라 불러도 좋을 내 이성과 경험의 총체‘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이론’이‘누군가 옮겨놓은 치즈 이론’에 밀린 것은 사실이었으나 한번도 주눅든 적 없었다. 다행히 이제 표절논란은 사라졌다. 사실 애초부터 논란이 일 이유도 없었다.‘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이론’은‘누군가 옮겨놓은 치즈 이론’보다 시기도 앞섰거니와 내용 자체도 더 실질적이었다. 성공에 우화라니 말이 되나. 성공은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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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똑떨어지는 실체를 우화의 표절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강조컨대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손에 쥐어지지 않는 성공은 자기기만인 것. 마스터베이션과 다를 게 없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 영광입니다. 성공학 강사 김형준입니다.”

어제 저녁 몇군데 신문사와 포털싸이트를 뒤지던 중 흥미로운 사진을 발견하고는 강의에 포함시켜보기로 했다. 웹써핑은 강의에 유효했다. 남의 것을 슬쩍 훔치는 기분이긴 했지만 하기 싫은 일이라도 억지로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지는 꽤 오래였다. 대중은 트렌드에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라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물론 사실이든 아니든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일반적인 처지에 빗대 설명해야 비로소 알아먹는 사람들에게 리더의 성공 운운하는 것 자체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부터가 문제 아니겠나. 어찌됐든 시카고공원 잔디에 누워 있는 사내의 사진이었기 때문에 괜히 옛 생각도 났고 그래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문제의 사진은 사내를 기준으로 특정 부위의 축소와 확대가 지속되는 슬라이드 형식이었다. 사진은 열장 남짓 이어지고 있었다. 축소와 확대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백배, 이백배 줌과 차원이 달랐다. 사진은 사내의 손등을 지나 1미터에서 1옹스트롱, 1피코미터를 거치면서 세포와 핵과 분자를 차례로 보여줬고 또 그 반대로 나아갔다. 그래서 나는 단 두번의 클릭만으로 사내의 DNA구조에서 시작해 사내가 누워 있었던 잔디를 지나 10미터에서 1억킬로미터, 10억광년을 거쳐 태양과 태양계와 은하까지 볼 수 있었다. 굉장했다. 실제 눈으로 봐도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어떤 카메라를 쓴 것일까, 기술이란 게 이렇게까지 좋아졌나 싶은 생각이나 이게 사실일까 싶은 의심에 앞서 웃음이 났다. 뭐랄까 굉장하기는 한데 마음이 편해져 절로 지은 미소였다.

 

인간의 몸과 우주는 거짓말처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말이라면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칼 쎄이건의 『코스모스』를 떠올리면서 물리학이란 결국 상상력이다,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을 뿐이다. 한줄의 시답잖은 격언이 어째서 한 인간의 지식의 척도와 됨됨이까지 가늠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연단에서 그것이 효력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럴 때는 따라야 한다. 말했지만 대중은 트렌드에 관심을 보이니까. 게다가 광대한 우주니 무한한 시간 따위 생각하다 보면 성공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 될 것이 너무도 빤하잖은가. 리더가 되려면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원고 준비는 그리 어렵지 않아 꽤 만족스럽게 끝났던 터였다.

 


이 사진들을 보세요. 칼 쎄이건(발음 유의!)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물리학도 결국에는 상상력의 문제라는. 그게 인간의 욕망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닿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욕심을 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목표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것이 돈임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으며 동시에 그것을 비난할 이유도 없긴 합니다만, 꼭 돈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모쪼록 깨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그것만 깨닫고 돌아가신다 해도 저로선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일 것 같습니다. 당신이 곧 우주라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이 부분에서 청중에게 눈을 감게 하도록 유도!) 성공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니까요. 성공학, 리더십, 어렵게 말해봐야 사실 뭐 있습니까. 돈 벌자. 그래서 폼나게 살아보자. 그거잖아요. 우리 툭 까놓고 얘기해봅시다. 그거 듣고 싶어서 여기 모여 앉아 있는 것 아닙니까. 돈 벌고 싶으시죠? 저도 그렇다 이 말입니다. 사실 말이죠, 요즘 제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재테크, 부동산, 웰빙 운운하는 수준미달 강사들이 이상하게 더 인기를 얻더라 말이죠. 순서 좀 지킵시다. 재테크, 부동산, 웰빙, 그거 돈 없이 무슨 수로 하겠습니까. 가당키나 합니까. 성공은 그래서,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도시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시간은 지나치게 짧았다. 연단의 카리스마로 열여섯을 삼켜버리려던 계획이 성공인지 아닌지의 판단은 유보하기로 했다. 성공에 있어 자기반성이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나 섣부른 판단은 또 도전정신의 걸림돌이 되는 까닭에서였다. 솔직히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똥내 나는 족구전용 강당에서의 성과로 치면 이 정도도 썩 훌륭하지 않느냐고 의심하는 내 스스로에게 반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차세대 리더의 마음가짐’이라면 적어도 6시간 이상은 강의해야 어느정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그런 주제이기도 했다. 그러니 전혀 아쉬울 이유가 없었다. 열다섯이 이해하기에 주제 자체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열다섯은 시종일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실패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 말이다. 불과 몇년 전이었다면 내 스스로의 소양부터 한탄했을 결과였으나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된 지 오래였다. 그것을 이 일의 아이러니라 부르면 어떨까. 어차피 성공은 소수의 것이기 마련이었다. 슬슬 나 역시 이 일에 기계적으로 빠지기 시작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말이다 한명, 끝까지 내 눈을 피하지 않은 한명이 있었던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더없이 뿌듯했다. 책이 출간되면 싸인본으로 하나 건네야겠다 싶은 마음이 절로 일 만큼 그는 끝까지 바람직한 자세를 유지해줬다. 반면 이런 것을 또 성공의 매력이라고 하면 어떨까. 어떤 집단이든지 리더의 소양을 갖춘 사람은 있었다. 반쯤 남겨둔 생수를 비우며 멋쩍은 박수를 받은 다음 원고를 정리하는 내내 나는 그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이 룰조차 없어 보이는 팍팍한 공간에서 말이다. 당신은 조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 뭐 그렇게 응원하면서.

“질문 있으시면 간단히 몇개만 받겠습니다.”

침묵과 딴청으로 일관했던 열다섯이 그제야 저마다 입을 열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종일관 쥐죽은 듯 조용했던 강당은 순간 장터로 돌변했다. 그다지 바른 자세도 아니었으면서 우두둑 허리를 꺾는 사람이 반, 나머지 반의 별 얘기 아니네, 지난번 수지침이 더 나았네, 뭔지 말끝마다 영어를 붙이네, 테레비 나왔다더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는 법이지, 영양가가 도무지 없네, 등등의 말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형형한 눈빛을 지우지 못했던 문제의 바람직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드는 저 아름다운 풍경을 보라. 나는 비로소 승리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때때로 연단은 단 한명의 청중을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고.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 아랫도리가 싸한 것이 제법 긴장됐다.

“예, 말씀하세요.”

“진촌중학교…… 장상철이 아닌가? 삼십팔회.”

“아닙니다. 저는 서울서 중학교 다녔습니다.”

그래서 조금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말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공에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내가 성공이란 것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이러니 지방의 소도시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분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문득 사회를 맡았던 그 사내가 다시금 마이크를 손에 쥔 채로 입을 열었다. 고마웠다. 그가 입을 열지 않았다면 눈물을 쏟았을지 몰랐던 까닭에서였다.

“어떻게, 다 부질없는 말이고 뽈이나 찹시다.”

그래서 열여섯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자를 치우고 네트를 걸고 테이프로 라인을 붙이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솔직히 나는 감탄했다. 이 사람들이 아까 그 사람들 맞나 싶어 그랬다. 문제의 아주머니가 시간을 정확히 맞춰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으며 막걸리와 홍어무침, 잔치국수를 내려놓고는 돌아갔다. 사회를 맡았던 사내의 주머니에서 거짓말처럼 작고 빛나는 호각이 나왔다. 그 모두는 서울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는 호각을 불었고 족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나도 그냥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는데다가 족구의 룰이 의외로 단순해서였다. 그의 말대로 뽈을 차다 보면 근심이 사라질까 싶은 마음이 든 까닭도 있었다.

탕…… 탕…… 탕…… 탕…… 뽈은 그렇게 튀어올랐다.

그러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주고받게 됐다. 뭐랄까 기적처럼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모두가 솔직해졌다고 하면 어떨까. 그것은 그다지 일목요연하지도 않았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말들이었지만 상쾌한 구석이 있는 대화였다.

“오랜만에 땀을 흘렸습니다.”

“이런 거 하면 돈 많이 벌고 그래요?”

“실은 좀 어려워서 다른 거 할까 합니다.”

“다꽝에 약을 치는데 그게 좀 껄쩍지근해서 껌을 안 씹으면 좀 그렇습니다. 이 버릇 고치는 그런 건 없나 몰라?”

“아, 몰랐습니다. 단무지 만드는 회사였습니까?”

“이 양반 암껏도 모르고 왔다니까.”

“죄송합니다.”

“우엉도 하고 오뎅도 하고 저 아래서 두부도 하고, 아무래도 선생님 같은 사람들 먹는 게 아니라.”

“아닙니다. 잘 먹습니다.”

“잘은 몰라도 말은 참 잘하시데. 근데 발은 개발이야. 군생활 어떻게 하셨나?”

“행정병이었습니다. 구기종목에 좀 자신이 없습니다.”

“간만에 공부하려니 죽는 줄 알았네. 아니, 그런데 진짜 장상철이 아냐? 삼십팔회? 요기 점 난 거까지 장상철인데.”

“아닙니다.”

“전 그 말이 참 좋더만요. 사람이나 우주나 매한이다. 뭐 그랬던 거.”

“그렇습니까?”

“그 삼각김밥이 책으로 나와요? 나오면 하나 사야지.”

“계획은 있는데 아직 출판사에서 연락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조만간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다들 당직이셨다면서 피곤들 안하십니까?”

“인제 자야지.”

그런 말들이 때때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튀었던 축구공처럼 탕…… 탕…… 탕…… 탕……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오간 것이었다. 이제 보니 이 강당은 가을 하늘처럼 높은 천장을 갖고 있지 않은가. 비로소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고 사이사이 우리는 얼음이 동동 뜬 막걸리를 들이켜면서 조화를 이뤘다. 그때 사회를 맡았던 그가 대접을 들고는 별안간 짠!하자 한 것이었다.

“짠!이요?”

부디 다들 성공하잔다.

순간 마음 같아서는 성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고 묻고 싶었다. 하나 그냥 손들어 나도 짠!만 했다. 어쩐지 그래야 될 것 같아서였다. 짠! 하던 순간에 무수한 꽃들을 한아름 안고 있는 아내가 짠! 하고 떠올라 기분이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마빈 게이의 「하고 싶은 대로 합시다」라는 노래를 들었다. 전반적으로 짠 짠짠 짠 짠짠 짠 짠짠, 하는 리듬이었다. 6개월짜리 짧은 영어실력이었지만 가사가 지나치게 가슴 어딘가로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성공하고 싶기는 한데 성공이 뭔지 잘 모르겠다, 했던 대머리 사내의 말을 곱씹던 순간에‘어서 오십시오, 여기서부터 서울입니다’란 문장이 재빠르게 등 뒤로 사라졌다. 전혀 아쉽지 않았다. 아내로부터 다마스 열쇠를 낚아챌 요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