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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천명관
1964년 경기 용인 출생.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 소설부문으로 등단. 장편소설 『고래』가 있음. chun_kwan@hanmail.net
프랑스혁명사
역사는 소문을 증류한 것이다
-토머스 칼라일
존이 마지막 원고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을 때 벽난로의 불은 이미 오래전에 사위어 거실엔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몇시간째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느라 뻣뻣하게 몸이 굳어 마치 얼어 죽은 시체처럼 보였다. 푸르죽죽한 뺨은 늙은이의 그것처럼 축 늘어졌고 무릎덮개 위에 놓여 있는 메마른 손엔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창백한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입김만이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털북숭이 촌놈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존은 원고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고를 읽는 동안 그의 마음속엔 냉소와 적개심, 질투심과 열등감 등 그의 건강을 위협하는 잔혹한 감정들이 밤새 불꽃처럼 타올랐다 사그라졌다. 그는 이제 막 서른이 된 나이였지만 밤새 복잡한 상념에 시달리느라 십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낙천적인 사람이었더라면 뜨거운 밀크차라도 한잔 끓여 마시며 추위에 굳어진 몸을 풀고 지친 마음을 추슬렀을 터인데 그는 너무 외곬의 사내여서 눈앞에 놓여 있는 원고 이외에 다른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다.
- 잠깐만 기다리게, 존. 내가 지금 똥구멍이 막혀서 죽을 지경이네.
사흘 전, 존이 첼씨지구 체인로가(街)에 있는 토머스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화장실에 들어앉아 있었다.
- 아직도 그 고생인가요, 토머스 선배?
토머스는 존이 오기 전부터 이미 한시간째 화장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존은 어쩔 수 없이 화장실 문 앞에 서서 그와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 이번에 버밍엄에서 온 그 멍청한 의사놈이 나에게 뭘 먹였는지 아나?
- 뭘 먹였는데요?
- 바로 피마자유야. 사하제라고 해서 그 지독한 걸 여태 두 양동이나 들이켰단 말일세. 끙!그런데도 영 나아질 기미가 안 보여. 젠장맞을!전에 있던 다른 얼간이는…… 끙!사리염을 잔뜩 처먹이더니…… 끙!내가 전에도 얘기했지만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의사놈들만큼 무용지물은 없다니까…… 끙!죄다 똥구멍에 말뚝을 박아서 유황불에 던져버려야 할 족속들이야!
토머스는 변기에 걸터앉아 온갖 저주를 퍼부어댔는데 변을 보기 위해 용을 쓰느라 중간중간 말이 끊겼다. 그러다 마침내 대포를 발사한 것처럼 큰 방귀가 나오고 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 잔뜩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 끙!이제야 겨우 소식이 있구먼. 휴, 망할 놈의 피마자유!
지독한 냄새가 화장실 밖에까지 퍼져나와 존은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틀어막았다.
잠시 후, 화장실 문이 열리고 잠옷만 걸친 채 토머스가 밖으로 나왔는데 몸에서 지독한 구린내와 함께 피마자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 미안하네, 존. 난 변통을 못하면 도무지 일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비탄의 기름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지.
토머스는 잔뜩 지친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그런데 요즘 통 바깥출입을 안하시던데 무슨 글을 그렇게 열심히 쓰고 계세요?
존이 토머스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 몸이 이 지경인데 글은 무슨……
토머스는 피곤한 듯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벌겋게 충혈된 눈은 금방이라도 발작을 일으킬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 또 간밤에 잠을 설친 모양이로군요. 이번에도 옆집 처녀가 밤새 피아노를 쳐댔나요?
- 아냐. 그 화냥년이 피아노를 치든 말든 난 이제 상관 안해. 잠깐만 따라와보게. 보여줄 게 있으니까.
토머스는 빙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앞장서서 이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존은 의아한 얼굴로 토머스의 뒤를 따라갔다.
이층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자 전에 보지 못했던 방이 하나 나타났다.
- 이 방은 뭐죠? 전엔 없었던 것 같은데…… 그새 마술이라도 부린 건가요?
토머스는 말없이 방문을 열어 보였다. 그러자 꽤나 아늑해 보이는 집필실이 나타났다.
- 자, 어서 들어와 문을 닫아보게.
존은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섰다. 창가엔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고 구석자리엔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공사를 끝낸 지 얼마 안된 듯 비자나무 향내가 코를 찔렀다.
- 어때?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나?
- 글쎄, 괜찮긴 한데 너무 높지 않나요? 여길 오르내리려면 다리깨나 아프겠군요.
- 그런 건 문제가 아냐, 존. 자, 보게.
토머스는 손을 내저으며 문을 다시 열었다가 닫았다.
- 이래도 뭐가 다른지 모르겠나?
- 문을 닫으니 조용하긴 하네요.
- 맞아. 조용한 정도가 아니라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왜냐하면 이 방은 방음실로 꾸민 거거든. 자, 보라고. 틈새도 하나 없이 다 메우고 벽도 이중으로 에워싸서 아주 조용해.
과연 존이 직접 문을 열었다 닫아보니 거리에서 들리던 장사꾼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와 시끄러운 마차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흠, 이렇게 만들려면 돈이 꽤나 많이 들었겠군요.
존이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 백칠십 파운드나 잡아먹었지. 망할 놈의 건축가놈들!
토머스는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 그런데 왜 잠을 못 잤다는 거예요? 전엔 피아노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고 하더니……
- 잠깐!
이때, 토머스가 뭔가 소리를 들으려는 듯 창밖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존도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 도대체 왜 그래요?
- 아, 아무것도 아냐. 아무데나 좀 앉게.
토머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존은 의자에 앉으려다 무심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편지로 눈길이 갔다. 편지 겉봉엔‘랄프 왈도 에머슨’1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에머슨이란 친구는 어때요?
존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 아, 랄프? 뭐, 미국인치고는 나쁘지 않아.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썩 괜찮은 젊은이라고 할 수 있지. 예의도 바르고……
토머스는 스스럼없이 랄프라고 불렀지만 뭔가 꺼리는 게 있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것은 에머슨이 영국에 올 때마다 토머스가 여러 학자들을 소개해줬지만 존에겐 단 한번도 그를 소개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 에머슨이란 친구는……
존이 입을 뗐을 때, 토머스는 갑자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 쉿!잠깐 이 소리 좀 들어보게.
존이 귀를 기울이니 과연 창문 밖에서 뭔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저건…… 새소리 아닌가요?
- 그래, 맞아. 저놈의 새새끼가 우는 바람에 밤새 한숨도 못 잤거든. 여기저기 구멍을 다 틀어막았지만 저 나무 꼭대기에서 울어대면 소용이 없어.
- 별로 시끄럽지도 않은데…… 도대체 얼마나 자주 울기에 잠을 못 잤다는 거예요?
- 네번. 밤새도록 딱 네번 울었어. 내가 한숨도 안 자고 세어봤다니까.
- 겨우 네번 운 걸 갖고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세요?
- 바로 그게 문제야. 한번 울고 나면 다음엔 언제 우나 하고 기다려져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단 말이야. 망할 놈의 새새끼 같으니라고!
토머스의 말에 존은 실소가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물었다.
- 그렇게 예민하신 분이 그동안 시골농장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군요. 거긴 온통 새들 천지일 텐데.
- 차라리 그게 나아. 하루 종일 울어대니까 아예 신경쓸 게 없거든.
토머스는 어린애처럼 입술을 불쑥 내밀었다.
- 그런데 에머슨이란 친구가 여길 자꾸 드나드는 이유는 뭐예요?
잠시 후, 존이 다시 편지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 그는 우리의 사상에 관심이 많아. 그걸 배워서 미국에 전하고 싶어하지. 그가 주로 관심이 있는 건 자연이야. 말하자면 인간과 자연의 영적 교감 같은 거 말일세.
- 오라!그러니까 선배가‘신의 의복’2이라고 칭한 그 자연 말이로군요.
존은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비꼬는 말투가 되었다.
- 이제 보니 자넨 내가 랄프를 소개시켜주지 않은 게 불만인 게로군.
- 불만이 아니라 그 친구가 편향된 사고를 가질까 봐 걱정이 돼서 그러죠.
존의 말투가 의도와는 다르게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 그럼 내가 랄프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는 건가? 난 그 친구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랄프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지 않다네.
- 그 친구도 그러던가요? 칼라일은 나의 종교라고?
존의 말에 짐승처럼 텁수룩한 토머스의 수염이 꿈틀 움직였다. 그러자 신경증과 변비로 고생하는 가엾은 병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날카롭고 위엄있는 깔뱅주의자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토머스가 평소 상대의 얼굴에 침을 튀기며 위협적인 몸짓으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신사다운 기품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었지만 열정이 담긴 격정적인 음성과 상대의 영혼을 심판하는 듯한 매서운 눈빛, 그리고 당대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상은 이 지저분한 스코틀랜드인을 단숨에 런던의 유명인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 제발, 자네까지 내 신경을 건드리지 말게. 그러지 않아도 피곤해 죽을 지경이니까.
토머스가 눈을 내리깔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집필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토머스의 부인 제인 웰시가 쟁반에 진저비스킷과 홍차를 담아가지고 들어왔다.
- 존, 밑에서 목소리를 듣고 당신이 온 줄 알았죠. 이이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도무지 손님 접대하는 법을 모른다니까요.
유복한 의사의 딸인 제인은 총명하고 매력적인 여자였지만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남편과의 말다툼과 경제적 불안에 지쳐 어딘가 맥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 그래도 비스킷 냄새 대신에 구린내는 실컷 맡았죠, 하하하.
존이 농담을 하며 웃었으나 토머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 잠깐만, 제인. 방금 밑에서 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지?
- 네. 그런데요?
제인이 홍차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러자 토머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 이런 망할 놈의 건축가놈들!그러면 여기도 제대로 방음이 안된다는 말이잖아.
-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말아요, 토머스.
- 싫어!내가 지르고 싶으면 아무 때고 지를 거야. 그놈들은 다 사기꾼들이야! 의사놈들하고 같이 묶어서 죄다 유황불에 던져버려야 해.
- 여보, 제발 손님 앞에서 무례하게 굴지 말아요.
제인이 아이를 달래듯 토머스의 팔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토머스는 존에게 먹으라는 말도 없이 생강가루가 들어간 비스킷을 게걸스럽게 집어먹기 시작했다. 존은 생강을 싫어했기 때문에 비스킷을 하나 집어들고 끝만 조금 베어 물었다. 역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르자 존은 인상을 찡그리며 비스킷을 다시 내려놓았다.
- 존, 그러지 말고 좀 먹어봐요. 방금 구워서 맛이 괜찮을 거예요.
제인이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 전 속이 불편해서 그만 먹을래요.
- 그냥 놔둬, 제인. 이 친구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고 싶은 친구니까.3 그게 바로 이 친구와 벤섬의 차이지. 그 양반은 돼지와 인간을 구분할 줄도 몰랐거든.
토머스가 수염에 비스킷 가루를 잔뜩 묻힌 채 킬킬대고 웃었다.
- 그러니까 결국 벤섬 선생을 돼지로 만든 게 바로 나라는 얘기군요.4
존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곧 화제를 돌렸다.
- 내가 아는 의사가 그러는데 생강이 들어간 비스킷은 소화장애를 일으킨다더군요. 그러니까 토머스 선배도 너무 많이 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흥, 내 형도 의사지만 의사놈들 말은 믿을 게 못돼.
토머스는 계속 비스킷을 집어먹으며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제인이 매음굴의 여자처럼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 그냥 놔두세요, 저 고집을 누가 꺾겠어요.
그러자 토머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닥쳐!이 여편네야!
- 흥, 주제에 남자라고 큰소리는……
제인이 뾰로통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 지금 나무 위의 새새끼처럼 뭐라고 자꾸 지껄이는 거야?
존은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것을 지켜보며 어쩔 수 없이 런던의 클럽에서 우스갯소리로 떠도는 소문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토머스가 성불구자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인은 아직도 성적 매력이 남아 있지만 어딘가 욕구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토머스의 형편없는 몰골로 보아 존은 그것이 꽤나 그럴듯한 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제인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존에게 말을 건넸다.
- 보세요, 존. 저이는 언제나 저 모양이에요. 그런데 참, 테일러 부인은 잘 지내……!
순간, 제인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화제를 돌린다고 한 것이 그만 말실수를 하고 만 것이었다. 해리엇 테일러는 존의 정부(情婦)로서 남편이 있는 여자였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사년 전이었는데 첫눈에 서로에게 반해버린 후, 두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 남편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겼고 이는 곧 런던 사교계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던 것이다.
당황한 제인은 연달아 담배연기를 뿜어냈고 토머스는 존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해리엇의 이름을 듣는 순간, 존은 당장 바닥에 주저앉고 싶을 만큼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그날 아침 해리엇의 집을 찾았다가 그녀가 남편과 함께 이딸리아로 여행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존은 해리엇이 자신에게 말도 없이 떠난 것에 대해 서운해하는 한편, 그녀가 이제 두 사람 사이의 부정한 관계를 정리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거리를 이리저리 헤매다 자신도 모르게 체인로가까지 와버렸던 것이다.
- 랄프는 나에게 미국에 와서 강연을 해달라고 제안하더군.
토머스는 존과 제인을 재밌다는 듯 빙글거리며 지켜보다 입을 떼었다.
- 네? 뭐, 뭐라고요?
존은 해리엇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느라 토머스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 랄프가 나에게 미국에 와서 강연을 해달라고 했다고. 젠장, 벌써 귀까지 먹었나.
- 그, 그렇군요. 그래서 미국에 갈 생각이에요?
- 아니, 내가 그따위 시골구석에 가서 뭘 하겠나?
토머스는 젠체하듯 턱을 쑥 내밀고 비스킷을 입으로 가져갔다.
- 미국이 시골구석이라고요? 또끄빌5의 얘기는 좀 다르던데……
- 아, 자네의 그 프랑스 친구? 나도 그 친구가 미국에 대해 쓴 책을 읽어봤지. 그 프랑스 귀족은 미국의 겉모습만 보고 와서 마치 거기가 천국인 것처럼 떠벌리더군.
- 그 친구는 미국을 천국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다만 미국의 정치제도와 사회적 평등에 대해 관심이 많을 뿐이죠. 그건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거고요.
- 결국 그놈의 연방제니 선거니 하는 것들 말이로군. 자네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거기에 뭔가 큰 기대를 걸고 있나 본데 그건 완전한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어. 의회에 앉아서 인원수나 세고 있으면 뭐가 해결될 것 같은가?
- 보세요, 선배. 시민들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자유를 가져야 해요. 그건 무정부상태하고는 다른 겁니다.
- 이봐, 나는 무지한 사람들의 집단적인 지혜라는 걸 믿지 않아. 호세아서에 보면‘그 백성에 그 제사장’이란 말이 있지. 그 말을 난 이렇게 바꾸고 싶네.‘그 국민에 그 왕’이라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보통선거가 아니라 나뽈레옹같이 성실하고 진실한 능력을 가진 영웅이야.
- 나뽈레옹이 영웅이라고요? 그래서 그가 프랑스 국민들에게 가져다준 게 고통 말고 또 뭐가 있죠?
- 이봐, 존. 나뽈레옹이 실패했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함께한 경험과 노력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형태의 정부가 아니면 결코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했지. 그 자신의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지금 자네들이 하려는 건 바로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는 거야.
- 하, 역시 선배하고는 말이 안 통하는군요.
존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토머스는 마지막으로 남은 비스킷을 입 안에 털어넣고 홍차로 입을 가시며 말했다.
- 어쨌든 또끄빌의 말을 너무 신뢰하진 말게나. 미국은 완전히 타락한 나라니까. 거기선 아무것도 배울 게 없어. 여자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자고 오쟁이를 진 남편은 달빛 아래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지. 거기서 이제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순간, 존은 토머스의 얼굴을 한대 갈겨주고 싶었다. 은근히 자신과 해리엇의 관계를 빗대어 미국을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그것은 자신이 언제나 토머스보다 더 나은 인간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존은 홍차를 마시며 무심코 토머스의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도 토머스가 집필을 하고 있었던 듯 쓰다 만 페리 펜이 흩어진 원고지 위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 옆엔 두툼한 원고가 쌓여 있었다. 존이 책상 위로 다가가며 물었다.
- 그런데 도대체 뭘 이렇게 열심히 쓰고 있었어요?
그러자 토머스는 당황해서 비스킷을 먹다 말고 달려와 원고지를 수습해 책상 구석으로 안 보이게 밀어놓았다.
- 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심심해서 끼적여본 것뿐이라고.
- 아무것도 아니긴요. 토머스는 지금 일년째 그 원고에 매달리고 있어요, 존. 틀림없이 세상이 깜짝 놀랄 만큼 대단한 저작이 될 거예요. 이이가 요즘 예민하게 구는 것도 다 그 원고 때문이라고요.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제인이 턱을 세우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토머스가 제인을 몰아세우며 불같이 화를 냈다.
- 닥쳐!여태 안 나가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제인?
- 당신이 그랬잖아요. 이번 원고를 쓰면 돈을 많이 벌 거라고 말예요. 원고료도 받고 강연도 다니고……
- 이 여편네가 뭘 안다고 자꾸 종알거리는 거야? 어서 나가지 못해!
- 싫어요!난 뭐 말도 못하는 벙어린 줄 알아요?
제인은 이리저리 구석으로 도망을 다니다 존의 뒤로 숨으며 마주 소리를 질러댔다.
- 그러지 말고 뭔지 얘기 좀 해주세요, 토머스 선배.
존이 중간에 끼어들어 두 사람을 말리며 말했다. 그러자 토머스는 제인을 쫓다 말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할 수 없다는 듯 실토했다.
- 실은 요즘 내가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다네.
- 프랑스혁명이요? 거기에 대해선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셨어요?
- 여기 런던에 온 다음부터.
- 그랬어요? 난 선배가 역사에도 관심이 있는 줄 몰랐어요.
- 난 역사가 신의 경전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신의 의지가 뭔지 알고 싶다면 지나간 역사를 살펴봐야 하지.
- 그럼 인간은 역사 속에서 뭘 한 거죠? 그냥 꼭두각시 노릇만 한 건가요? 신의 섭리는 인간을 전적으로 독립적이지도 전적으로 자유롭지도 않게 만들었다. 모든 인간의 주위에는 누구도 넘어갈 수 없는 숙명적인 벽이 있다. 그러나 그 넓은 벽의 테두리 내에서 인간은 강력하며 자유롭다.6 또끄빌의 책을 읽어보셨다면 이런 구절도 기억나시겠죠?
토머스는 존을 쳐다보다 양손을 들어올리며 지친 듯 말했다.
- 이봐, 난 이제 저 원고의 교정을 봐야 해. 다음주까지 출판사에 넘겨주기로 약속했거든. 그러니까 논쟁은 이쯤 하기로 하세.
아닌게아니라 그는 이미 복통이 시작된 듯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 제인, 존을 나 대신 좀 배웅해줘.
- 흥, 그저 이럴 때나 내가 필요한 거로군요. 존, 난 저이가 단 한마디라도 나를 칭찬하는 말을 들어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제인은 입을 삐죽 내민 채 종알거렸지만 토머스는 대답할 기운도 없는 듯 책상 앞에 앉아 페리 펜을 집어들었다. 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래요, 선배. 나도 이만 늦어서 가봐야겠군요.
존과 제인이 집필실 문을 열고 밖으로 막 나가려고 할 때였다. 나무 위에서 다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 저, 저놈의 새소리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토머스는 창밖을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펜을 힘껏 벽에다 집어던졌다. 칠을 한 지 얼마 안된 깨끗한 벽에 잉크가 흘러내렸다. 존은 측은한 눈길로 토머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토머스와 눈길이 마주치자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존을 불러 세웠다.
- 잠깐만, 존. 미안하지만 자네한테 한가지 부탁이 좀 있네.
- 그게 뭔데요, 선배?
- 제발 저놈의 원고를 가지고 가서 교정을 좀 봐주게. 다음주까지 원고를 넘기기로 했는데 지금 난 너무 지쳐서 더이상 한줄도 손을 볼 수가 없네.
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원고를 바라보았다.
- 처음엔 원고에 대해 애써 감추시더니 이젠 나한테 그 원고를 맡기시겠다고요?
- 자네와 난 생각이 많이 다르지. 하지만 이제 어차피 다 알게 된 마당에 숨길 게 뭐 있나. 존, 내가 런던에서 믿을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게다가 우린 동향 사람이잖나. 자랑스러운 스코틀랜드.
- 그렇군요. 하지만 제가 원고 중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 제 마음대로 고치기라도 한다면 어쩌죠?
존이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고 토머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토머스는 픽 웃으며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 뭐, 자네 같은 신사가 그런 짓을 할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그런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내가 언젠가‘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룩한 역사는 근본적으로 이 땅에서 활동한 영웅들의 역사’7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나? 그런데 지금은‘영웅들의 역사’가 아니라‘건강한 사람들의 역사’라고 말하고 싶구먼. 내가 보기에 자네도 그다지 건강해 보이진 않지만……
존이 토머스를 보며 빙그레 웃자 토머스도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존은 여전히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테이블 위에서 깜박이는 등잔불만이 그의 불안한 영혼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주름이 깊게 팬 미간과 아버지의 질문에 대해 늘 올바른 답을 준비해야 했던 신중한 입술은 그의 완고하고 엄격한 고집과 인내심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불빛에 흔들리는 눈빛은 그의 영혼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에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질책을 감당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부터 그를 끊임없이 몰아붙인 그의 엄부(嚴父) 탓이었다. 덕분에 그는 세살부터 그리스어를 배웠고 어린 나이에 이미 라틴어로 된 호라띠우스의 전 작품을 번역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또래의 친구들과 한번도 어울리지 못한 채 아버지에 의해‘생각하는 기계’로 키워졌다. 그를 혹독하게 교육했던 아버지는 이제 병상에 누워 있는 힘없는 늙은이가 되었지만 엄부의 이미지는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두려움으로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잠시 어둠에 잠긴 창밖을 바라보던 존은 다시 원고지 위로 눈길을 돌렸다. 원고 표지엔 잘 알아볼 수 없는 필체로‘프랑스혁명사’란 제목이 씌어 있었다.
토머스 특유의 낭만적인 문체로 씌어진 원고는 편협하고 무자비하며 성급한 오류와 선동적인 독설 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젊은 학자를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는데, 게다가 그 끔찍한 악필이라니!그의 악필은 조판을 맡은 문선공이 도망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악명높은 것이었다.
학술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운 원고였다. 견해는 단순했고 내용은 관념적이었으며 지나치게 과장된 수사와 난해한 문체에 성급한 보수주의자의 직관적인 사유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때문에‘합리주의의 사도’로 불리는 존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단지 악필로 쓰인 낭만주의 문학작품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다.
혁명을 군주와 귀족계급의 악정에 대한 심판으로 보고 있다는 것과 쌍뀔로뜨8를 혁명의 주체로 놓고 그들이 겪은 굶주림과 억압을 혁명의 원동력으로 보고 있는 점에선 어느정도 존이 공감하는 부분이 있긴 했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시각과 그 전망에 있어선 전혀 입장이 달랐다. 혁명을 지배계급에 대해 신이 내린 천벌로 생각하고 영웅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제창하는 등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요소가 가득했던 것이다.
존은 그 모든 허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혁명사』가 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토머스의 전작 『의상철학』과 같이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킬 게 틀림없었다. 그의 단순한 주장은 논리도 빈약하고 체계도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특유의 뛰어난 묘사와 격정적인 필체, 그리고 일찍이 괴테가 간파한‘도덕적인 힘’9은 분명 학계의 관심을 끌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터였다. 그것이 바로 토머스가 가진 힘이라는 걸 존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때 그도 토머스의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사상에 매료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지만 냉철하고 합리적인 이성은 곧 제자리를 찾아 자유주의 개혁에 반대하는 토머스와 대립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토머스가 자유언론과 보통선거, 그리고 자유방임경제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이 우려하는 것은 토머스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였다. 특히 그에 대한 젊은층의 지지는 신앙에 가까울 정도여서, 계몽주의 이후 정신적 지주를 상실한 그들에게 토머스의 저작은 계시와도 같은 권능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칼라일은 나의 종교’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는 말하자면 하나의 유행이었다.
나약하고 성급하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힘에 쉽게 매료되는 대중의 속성은 그대로 토머스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존 같은 자유주의자들에겐 반드시 대중의 힘이 필요했다. 만일 대중적인 호소력을 가진 그를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존은 토머스의 원고가 미칠 파장과 그에게 쏟아질 찬사에 대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상가로서 정반대편에 서 있는 존에게 매우 고통스런 일이었으며 자신도 모르게 질투심이 솟아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존은 갑자기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마구 주물러대는 듯한 통증에 숨을 헐떡였다. 발작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약병을 찾아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한움큼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잠시 터키융단 위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 위에 있던 원고를 발견하고 갑작스런 분노가 치솟았다.
망할 놈의 보수주의자 같으니라고!
존은 힘겨운 고통 속에서 털북숭이 임포텐츠 환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저분한 인상에 촌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그 우스꽝스런 발음이라니!
이때, 존의 마음속에선 자신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야비하고 음울한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 원고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원고다. 만일 이것이 실수로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면?
존은 섬뜩한 죄책감에 놀라 머리를 흔들었다. 스스로 당대에 가장 뛰어난 지성과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인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런 비열한 상상을 하다니…… 그리고 멀쩡한 원고가 사라질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혹시 원고가 사라진다면? 물론 토머스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사라진 원고를 되돌려놓을 수도 없고.
존의 얼굴엔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곧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학자로서 가당키나 한 생각이란 말인가? 게다가 제인은 원고를 가지고 나오는 나를 배웅하며 이젠 생활비도 다 떨어지고 그 원고밖에 믿을 게 없다며 잘 부탁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곧 악마가 다시 속삭였다.
이런 위험한 원고가 세상에 나돌아다니는 건 좋지 않다. 자유주의자의 사명에서 본다면 마땅히 없어져야 할 불온한 저작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단지 나만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그냥 지켜보고 있으란 말인가.
그는 두툼한 원고를 거칠게 집어들었다. 당장 원고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다 문득 습관처럼,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의 아버지 제임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존은 아직 어린 나이였고 아버지는 무서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바들바들 다리를 떨며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다 뺨을 후려칠 것처럼 두툼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순간,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버지, 제발 용서해주세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곧 원고를 찢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양손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원고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오!하느님, 맙소사!만약에 이 일을 아버지가 아신다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교육을 시킨 결과가 겨우 이 정도라는 걸 아신다면 너무 상심한 나머지 병상에서 끝내 회복도 못하고 돌아가실지 모른다. 어쩌자고 내가 시정의 부랑배들이나 하는 짓을 떠올렸을까. 하마터면 가문의 이름을 욕되게 할 뻔했구나. 더구나 해리엇이 이 사실을 안다면…… 오, 해리엇!당신이 옆에 있었더라면 그런 더러운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을 텐데……
존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음은 이미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잠시나마 자신이 엉뚱한 생각을 한 것에 대해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원고를 추스르며 생각했다.
그래. 토머스 선배도 나를 믿고 원고를 맡겼으니 성실하게 교정을 봐줘야겠군. 그게 바로 올바른 학자의 양심이지. 다음주에 출판사에 넘긴다니 오늘 오후부터라도 당장 일을 서둘러야겠어. 휴,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 요즘 내가 제정신이 아니야.
그가 원고를 수습하는 동안 창밖에는 희붐하게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위즐리 부인은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천식을 앓고 있는 넷째아들 웨인이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병원에 갈 돈도 없었던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즉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겨우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였지만 그녀의 영혼은 늙은이의 그것처럼 기름기가 다 빠져나갔고, 머리 한가운데엔 둥글게 탈모가 생겨 침대에서도 보닛을 쓰고 자야 했다. 날품팔이로 일하는 술주정뱅이 남편과 줄줄이 딸린 여섯명의 자식들……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그들은 일찍이 잉글랜드 동남부의 에씩스에서 일자리를 찾아 런던으로 흘러들어온 이주민들 가운데 하나였다. 위즐리 부인의 가족은 템즈강 하구, 런던항 주변의 슬럼지역에서 살았는데 그의 남편은 항구에서 날품팔이를 하는 하역일꾼이었다. 그 일은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추위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부들에겐 언제나 싸구려 럼주가 필요했고 그는 늘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밑으로 줄줄이 딸린 아이들을 보는 순간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아내를 두들겨 패기 일쑤였다. 위즐리 부인으로선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믿음만이 가혹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혹독한 추위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위즐리 부인은 목도리로 얼굴을 단단히 감싼 채 바삐 걸음을 놀렸다. 아이가 발작을 일으키는 통에 주인집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보다 거의 삼십분이나 늦었던 것이다. 그녀는 주인집에서 해고를 당할까 봐 걱정이 되어 재게 걸음을 놀렸지만 공연히 허둥거리느라 발은 자주 허방을 짚어 눈 위에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위즐리 부인의 입장에서 주인인 존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에 늘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어 한번도 웃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사내였으나 하녀인 위즐리 부인에겐 특별히 까다롭게 구는 것도 없었고 급여도 다른 집보다 후한 편이어서 처음엔 나름대로 만족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의 지저분한 비밀이 밝혀졌다. 해리엇이라고 불리는 한 유부녀를 날마다 집으로 끌어들여 하루 종일 시시덕대곤 했던 것이다.
더러운 화냥년 같으니라고!
위즐리 부인은 해리엇과 마주칠 때마다 마치 자신이 부정을 저지른 것처럼 죄의식을 느껴 마음속으로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 인근 하녀들의 전언에 따르면 해리엇은 아이가 둘 딸린데다 남편이 더없이 좋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거였다. 게다가 남편은 이를 알면서도 부인과 헤어지는 게 두려워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해주고 있다는 거였다. 위즐리 부인은 귀족들의 역겨운 사랑놀음에 환멸을 느껴 그들이 모두 다 그렇고 그런 족속이라고 생각해 주인의 시중을 들 때면 자신도 모르게 뻣뻣하게 응대하기 일쑤였다.
위즐리 부인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거실엔 온기 하나 없이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 죄송해요, 밀 선생님. 아침부터 넷째아이가 아파서 그애를 돌보느라 늦었어요. 빨리 아침식사를 만들어드릴게요.
- 위즐리 부인. 난 상관없으니까 천천히 하시오.
소파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던 존은 퀭한 눈으로 위즐리 부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 그런데 맙소사!어쩌자고 이 추운데 난롯불을 꺼뜨리셨어요? 장작 몇개만 던져넣으면 될 일을…… 아이고, 이를 어쩌나.
위즐리 부인이 벽난로 안을 헤집어보며 우는소리를 냈다.
-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장작을 넣는 걸 깜박했나 보군요.
불쌍한 양반 같으니라고. 요즘 해리엇인지 뭔지 하는 화냥년 때문에 넋이 나간 게로군. 보나마나 그년한테 걷어차인 게 틀림없어. 하긴 정상적인 여자라면 저런 나무토막 같은 인간에게 매력을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이지. 사람들은 저이를 천재라고 하는 모양인데 도대체 뭐가 천재라는 거야? 흥, 실연의 천재? 그나저나 불을 피우려면 고생 좀 하게 생겼군.
위즐리 부인은 난롯불을 피울 불쏘시개를 찾으며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난로 옆에 있는 두툼한 종이뭉치를 발견했다. 한눈에 봐도 불쏘시개로 쓰기에 더없이 적당한 재료였다. 그녀는 탐욕스런 눈으로 종이뭉치를 살펴보며 말했다.
- 선생님, 여기 이 종이뭉치는 뭐에 쓰려고 놔두신 건가요?
종이뭉치? 하긴 저 여자의 눈에는 저 원고가 불쏘시개로 쓸 종이뭉치로밖에 안 보이겠지. 글자를 모른다는 게 저런 장점도 있구먼. 나는 어쩌자고 어릴 때부터 글자를 배워 이 고생인지, 원.
- 아, 그건 중요한 원고니까 그냥 놔두시오. 그리고 불쏘시개로 쓰고 싶다면 그거 말고 왼쪽에 있는 종이를 쓰시오. 그건 회사에서 폐기한 문서를 가져다놓은 거니까.
전에도 존은 자신이 다니는 동인도회사에서 폐기된 문서들을 가져와 위즐리 부인에게 불쏘시개로 내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캔디를 선물받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 고마워요, 밀 선생님. 우선 뒤뜰에 가서 장작을 좀 가져와야겠어요.
- 난 잠깐 침실에 들어가 눈을 붙일 터이니 식사가 준비되면 불러주시오.
- 그러세요. 선생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가서 좀 쉬세요. 그사이에 불을 피우고 따뜻한 수프를 끓여놓을게요.
존은 이층 침실로 올라가 자리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해리엇은 이제 부정한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무 기별도 없이 떠나다니!그녀가 이렇게 잔인하고 무정한 여인인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나 오, 해리엇!어느 사낸들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 배길 것인가!그리고 왜 하필이면 존 테일러는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 아내를 소개해줬단 말인가. 차라리 처음부터 그녀의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걸 몰랐더라면 좋았을걸……
그는 이제 원고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그가 언제나 도망쳐 숨고 싶은 곳, 따뜻한 해리엇의 품속을 갈망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를 한정없이 용납하고 참아줄 것 같은 해리엇의 부드러운 미소와 그의 냉랭한 심장을 따뜻하게 덥혀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 밀 선생님. 그만 일어나서 따뜻한 수프 좀 들어보세요.
존은 꿈결인 듯 아득하게 위즐리 부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당장 바스러져내릴 것처럼 온몸이 쑤셨다. 난롯불도 꺼진 거실에서 밤을 새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가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을 때 벽난로에선 장작불이 활활 타올라 뜨거운 불길이 아궁이 밖으로까지 넘실거렸다. 거실엔 따뜻한 기운이 감돌아 그는 다소나마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교정일을 시작해야겠어. 보나마나 토머스 선배가 조바심을 내고 기다릴 텐데……
존은 난로 앞으로 다가가며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난로 옆에 놓아둔 원고가 눈에 띄지 않았다.
- 부인. 여기 놔둔 원고는 어디로 치워놓은 거요?
존이 난로 근처를 둘러보며 물었다.
- 원고요? 무슨 원고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위즐리 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아까 여기 있던……
- 아, 그 종이뭉치 말이군요. 그건 선생님이 불쏘시개로 쓰라고 주셨잖아요.
위즐리 부인이 태연하게 응수했다.
- 부, 불쏘시개요?
존은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놀라 벽난로 쪽으로 달려갔다. 옆에 놓아둔 원고를 들춰보니 그것은 토머스의 원고가 아니라 회사의 폐기된 서류였다.
- 부, 부인. 그럼 그 원고를 불쏘시개로……?
- 네. 아주 잘 말라서 금방 불이 붙던걸요.
위즐리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존은 황급히 부젓가락으로 난로 속을 헤집어봤지만 이미 원고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아니, 부인!내, 내가 불쏘시개로 쓰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종이뭉치잖소!도대체 어쩌자고 그 원고를……!
그러자 위즐리 부인이 정색을 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 밀 선생님. 제가 글자는 몰라도 말귀는 잘 알아듣는답니다. 선생님은 분명히 왼쪽에 놓아둔 종이뭉치를 쓰라고 하셨어요.
- 마, 맙소사!내가 왼쪽에 있는 원고라고 했단 말이오?
- 네. 오른쪽 건 중요한 거니까 놔두고 왼쪽에 있는 걸 쓰라고 하셨잖아요. 혹시 뭐가 잘못됐나요?
위즐리 부인의 태도는 마치 존을 나무라는 것처럼 매우 단호하고 뻣뻣했다.
- 오!하느님 맙소사!어쩌다가 그런 끔찍한 실수를……!
존은 머리를 감싸쥐고 울부짖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 부인!도대체 부인은 그게 어떤 원고인지나 알고 난로에 처넣은 거요? 그건 토머스 선배가 지난 삼년간 죽을 고생을 하면서 쓴 원고란 말이오!게다가 그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원고인데…… 맙소사!도대체 이 일을 어쩌지? 토머스 선배가 이 사실을 알면, 오!상상하기도 끔찍해. 그는 아마 미쳐서 자살해버리고 말 거야.
존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터키융단 위를 왔다갔다 했는데 이때 한가지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쾌감이 온몸에 번지며 마치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자꾸만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애써 웃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어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추위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 토머스가 등장했다.
- 토, 토머스 선배?
존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토머스를 바라보았다.
- 어머, 칼라일 선생님. 이 추운데 어쩐 일이세요.
- 안녕하시오, 위즐리 부인. 그런데, 존. 왜 그렇게 놀라지? 자네 얼굴은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군.
- 그, 그게 아니고. 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존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위즐리 부인이 앞으로 나서며 토머스의 외투를 받아들었다.
- 칼라일 선생님. 어서 난로에 와서 불을 좀 쬐세요. 따뜻한 차를 내올게요. 간밤에 주인님이 불을 꺼뜨렸는데 마침 불쏘시개가 좋아서 금방 다시 피웠거든요.
그러고 보니 과연 벽난로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라 난로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토머스는 손을 비비며 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 교정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해서 들렀네. 어제도 출판사에서 사람이 다녀갔거든. 그래, 존. 원고는 읽어보았나?
- 네? 아, 네. 읽어보긴 했는데……
- 그랬는데?
토머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존을 돌아보았다.
- 저,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 원고는 아주 훌륭했어요. 그, 그럼요. 훌륭하고 말고요.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좀 있어요.
- 문제가 어디 한가지뿐이겠나.
토머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 그, 그러니까 그 문제라는 게……
존은 당황해서 계속 말을 더듬거렸다.
이때 위즐리 부인이 차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기 위해 고개를 숙이다 그만 공교롭게도 머리에 쓴 보닛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머리 한가운데가 둥글게 벗겨진 위즐리 부인의 정수리가 존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존은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참으려고 한다는 게 그만 자신도 모르게‘큭큭’대며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토머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존과 위즐리 부인을 번갈아 바라보다 물었다.
- 이봐, 존. 혹시 이 집에서 나만 모르는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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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 Emerson, 1803~1882) 미국의 시인, 수필가. 『자연론』 『명상록』 등을 남김.↩
- 토머스 칼라일(ThomasCarlyle)이 『의상철학』에서 사용한 말. 대자연은 신의 의복이고, 모든 상징·형식·제도는 가공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주장. 이 책은 1836년 미국에서 첫선을 보였고, 에머슨을 비롯한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었다.↩
- 존 스튜어트 밀(John S. Mill) 『공리주의』 제2장.↩
- 칼라일은 벤섬(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를‘돼지철학’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 알렉시스 드 또끄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가, 정치가. 저서로 『미국의 민주주의』 『구체제와 혁명』 등이 있음.↩
- 알렉시스 드 또끄빌 『미국의 민주주의』.↩
- 토머스 칼라일 『영웅의 역사』.↩
- 프랑스혁명 때 혁명적인 민중세력.↩
- 괴테(Goethe)는 칼라일이 아직 문인으로서 이름을 떨치기 전인 1827년 에커만(Eckermann)과의 대화중에 이미 그 특유의 통찰력으로 “칼라일이 대단히 중요한 도덕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간파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