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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
작가들, 장편소설을 말하다
창비는 장편소설 특집을 기획하면서 현재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을 대상으로 장편소설에 관한 짧은 산문을 청탁했다. 다음의 몇가지 질문을 예시하고 그중 선택해서 자유롭게 글을 쓰는 방식으로 했다. 물론 질문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편집자.
☐ 현재 한국 장편소설이 침체상태이고 해외 장편소설이 득세하고 있다는 진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한국의 작가가 장편소설을 집필하기 위한 여건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이와 관련해서 평론가나 독자, 출판사나 문예지에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 작가의 문학관에 큰 영향이나 변화를 준 고전 장편소설이나, 해외와 국내를 불문하고 재미있게 또는 의미있게 읽은 최근의 장편소설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장르적 특성을 작가의 입장에서 비교해주십시오. 집필에 관련된 체험적인 사례를 말씀해주셔도 좋습니다.
전업의 고통으로 감당하는 문학의 본령
황석영│장편『손님』『오래된 정원』『심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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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 장편소설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외국 장편소설이 득세하고 있다고들 한다. 문제의 촛점을 두가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이른바 본격문학으로서의 장편소설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게 문제라는 것인지, 아니면 대중적으로 ‘많이 팔리는’ 소설이 나오지 않는 게 문제라는 것인지. 앞의 문제점을 생각해보건대 이미 나는 의견을 여러번 내놓았는데, 벌써 십년 가까이 되지 않았나 싶다. 우선 인터넷의 대중화로 책을 읽는 풍조가 많이 사라졌다거나, 과거에 비해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움츠러들면서 현실로부터 멀어진 데도 원인이 있다거나, 서사를 중시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되면서 개인화 파편화 내면화하고 또는 문체와 문장을 강조하면서도 이야기 구조에는 맥이 빠지게 되었다거나, 문화 전반이 점점 대중화 연예화 오락화하면서 인문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등 끝이 없겠다.
예전에는 그야말로 가난을 무릅쓰고 글을 써서 먹고사는 일이 당연한‘선비’의 책무라고 하던 것이 이제는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신인작가로 문단에 나왔을 적에는 전업작가가 되기 위해서 처자식과 함께 극도의 가난을 견디며 대충 삼사년은 견디어야 했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평자들이나 독자들의 눈에 띄어 원고료와 인세 수입으로 중산층 생활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의 가난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욕망을 참고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장편소설이 나오는 토양은 이렇게 글 쓰며 견디는‘전업작가’가 많이 있어야 하는 건데, 요즈음은 좀 알려졌다 하면 대학 문예창작과에 교수 자리가 나서 들어가 주저앉아버리고 만다. 내가 신문에 인터뷰하면서‘기초예술’이란 말을 처음 쓰기 시작했고 연전에 민예총 회장 시절에 문예진흥원 원장 현기영씨와 함께 국회로 총리실로 뛰어다니며 얻어낸‘지원정책’으로 단편소설이나 창작집에 대한 지원이 생겨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역으로 이런 결과 때문에 단편소설 쓰기로만 역량이 몰리고 장편소설의 침체에 끼친 영향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장편소설이야말로 한 작가의 역량이 제대로 드러나는 분야이며, 문학의 본령이기도 하다. 그런데 장편 한편을 쓰려면 우선 그만한 서사와 문장 속에 작가 자신의 인생이 녹아들어야 할 텐데, 그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대하소설은커녕 천매 내외의 경장편 한편을 쓴다 해도 최소한의 준비기간을 합쳐 일년은 걸리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편을 써서 얻는 원고료와 인세 수입으로 적어도 이삼년은 살 수 있어야 쓸 의욕이 생기겠는데 한해를 허비한 것이 되고 말면 다시는 쓰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종이매체가 이제는 내리막길로 가는 게 아니냐 하는 의견도 끝없이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서구 특히 유럽의 경우를 보면 독서인구와 판매부수는 안정되어 있는 편이다. 꾸준히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현재 새로 쓴 작품들을 전보다 안 읽는 데도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이제는 고전을 거의 안 읽는다는 것이다. 전 세대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중고교 시절에 꼭 읽어야 할 세계명작이나 고전의 목록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 문학의 위기는 소비자보다 생산자측에 책임이 더 많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흔한 말로 한국영화를 보면 아직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예전에 문학이 발휘했던 대중적 힘을 모두 가져가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근년에 폭발적으로 대중을 동원한 영화들을 보면 거의가 탄탄한 서사와 현실이 뒷받침되고 있다. 봉준호 감독 개인만 놓고 보더라도 「살인의 추억」에서 보이는 서술과 구성 능력이 빼어나고 현실의 반영은 절제되어 있으며 예술적으로도 긴장미가 대단하다. 그의 「괴물」이 가진 대중적 설득력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씨지를 일종의 메타포로 감추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현재 한국영화의 설득력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우리 문학은 서사와 현실을 등한시하면서도 대중에 대하여는 고답적인‘겉멋’으로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어느 시절 어느 사회에나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이 있었고 이 양자를 결합시킨 다행스러운 예도 많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구분이 사라지고 얼마나 많이 팔리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가 쏠리면서 본격문학의‘가치’를 상실했다는 자평이 있을 정도이다. 혹자가 일본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것도 그 무렵이다. 내가 그때 일본에 있어서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아는데, 젊은이들은 좀 본격적인 얘기를 꺼내려고 하면‘무겁다’라고 하든가 약간의 비판적인 논제만 화두로 떠올라도‘어두워’라고 말하는 풍조였다. 현재의 일본 유행 소설들은 한때 우리 청소년들에게 성행하던 인터넷소설처럼 가볍고 말초적이고 부담스럽지 않고 도회적으로 세련되어 보이는 듯하다. 도회의 소비시장의 쎄트장치들 속에서 잘 어울리고 속내를 깊이있게 드러내지 않는 그야말로‘쿨’한 것이라고 하겠다. 정답던 고향의 이미지를 언제부터인가‘촌스럽다’는 조어로 표시하는 세태의 반영일까. 이미자의 가슴속에 휘감기는 노래가 아니라 이별도 슬픔도 발라드처럼 경쾌한 것이다. 이것이 소비시장의 장치에 어울리는 것이다. 문학은 이미 씹고 버리는 껌이나 시간 죽이기용 게임처럼 시장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아직 위축되기는 이르다. 문학은 삶의 기본적인 콘텐츠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한 영원히 지속될 테니까. 나는 요즈음 서사와 현실이라는 화두에 덧붙여 형식과 상상력을 가세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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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연재소설 집필 관계로 다른 작가의 장편소설들을 많이 읽지는 못하고, 책이 나오는 대로 따라 읽기도 쉽지 않다. 문학 이외의 책들은 더러 일하다가 들춰본다. 작년 말에 읽은 작품으로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과 르 끌레지오의 『아프리카인』 정도였다. 모두 동시대의 동료작가들이라 진작부터 읽어야지 벼르고는 있었다. 파묵의 소설은 내가 늘 말했듯이‘다중적 서술’또는‘화자의 끊임없는 이동’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넘나들고 있다. 사람에서 동물로 그리고 사물이나 심지어는 그림 속의 빨강 물감까지 서술에 끼어든다. 그러면서도 한 줄거리의 이야기를 관통해내면서 집요하게 감추어놓았던 사건의 핵심을 드러낸다. 르 끌레지오의 작품은 자전적인데, 자신이 어째서 탈서구적인 관점에 서게 되었는가 하는 것들을 식민지 의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아프리카 벽지마을의 일화들을 통해 얘기한다.
우리에게서는 아직도 해외문학에 대한 턱없는‘상찬과 오해’가 그치지 않고 있다. 내가 언급할 입장은 아니지만 예컨대 베르베르인가 하는 프랑스 작가는 프랑스 문단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으로 SF대중작가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또한 꼬엘류라는 브라질 작가도 통속작가로 기자들도 점잖게 언급을 피할 정도이다. 『다빈치코드』니 뭐니 하는 것들도 아무리 대중적으로 서점에서 팔려나가도 교양인은 모른 척한다.
해외문학에 대한‘오해’는 좋은 문학에 대해서도 편식을 종용하게 되어 일부의 문학만이 서구의 흐름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현대 한국문학은 다채롭고 힘이 있으며 라틴아메리카문학처럼 서구문학에까지 오히려 많은 영감과 반성을 줄 수 있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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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스또이는 『전쟁과 평화』를 쓰고 나서 장편소설은 예술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는데, 그것은 자기 시대에 예술이라고 불리는 창작물의 개념에 대한 못마땅함도 있었을 테지만, 대서사를 다룬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장편소설은 철학 역사 사회 인류학 풍속학, 하여튼 인문학적인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이른바 총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다른 예술장르는 거대한 모자이끄 벽화의 한 모퉁이나 부분 세부묘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단편소설은‘예술’적인 작업이다. 인생의 한 단면을 날렵하게 잡아채어 짧아서 미처 드러나지 못한 등장인물과 사건 전체의 모습을 뚜렷이 짐작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편 창작이야말로 작가수업에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기도 하다. 인물 구성 형식 문장 등을 주제에 따라 달리 여러가지로 실험해볼 수가 있다.
세계적으로 소설이 차츰 짧아지고 있으며 우리 원고매수로 천매 내외의 경장편과 그 절반쯤의 중편 정도가 하나의 흐름이 된 것은 그것이 단편의 압축적인 긴장감과 장편의 서사구조를 함께 지닐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강조해서 말하지만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그 특성이나 장르로 보더라도 전혀 다른 작업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어느 작가처럼 평소에는 목수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시간 여유가 생길 적마다 수공예품을 만들듯이 단편소설을 쓰는 경우도 있다. 평생 이런 식으로 단편소설만을 창작한 외국의 작가들도 많다.
그러나 경험한 바에 의하면 장편소설은 전업작가가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작업이다. 역량도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째서 수많은 문학평론가들이 장편소설을 문학의 본령으로 보았나 하는 점이 여기에 있다.
삶의 보편적 통찰을 복원하는 장편소설
공지영│장편『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사랑 후에 오는 것들』『봉순이 언니』등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주 게으른 사람이다. 가본 길이 아니면 거의 가지 않고 어떤 경우든 모험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나에게 모험심이 많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게으름 때문에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그래서 무엇이든 그냥 웬만하면 선택해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 밖의 사물들에 대해 평균적인 호기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어느날 나 자신에게도 호기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인생, 그러니까 사람들의 삶 자체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 사람은 왜 나와 다르게 저런 결정을 내렸을까, 저 사람은 왜 하고많은 말들 중에서 지금 저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저 사람은 왜 지금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이 결코 한순간의 기분이나, 한순간의 무심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봉순이 언니』라는 소설에 이런 내 관찰의 결과를 쓴 적이 있었는데, 사소한 일 하나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전체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기 전, 나는 막연히 내가 문학을 하고 싶고, 문학 중에서도 소설을 쓰고 싶으며, 소설 중에서도 장편소설을 선호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사소한 행동이나 말 혹은 생각 뒤에는 그 사람의 일생이 있으며 일생 뒤에는 그 사람의 배경을 이루는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고, 또한 그들이 살아온 시대가 깔려 있다는 것이 나를 이루 말할 수 없이 분발시켰다는 이야기도 된다.
쓰면서도 여러번 느꼈지만, 단편과 장편은 같은 소설이라는 이름이 달려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별개의 장르이다. 우리 문학사에 장편과 단편을 모두 잘 쓴 작가가 드문 것은(아니, 세계문단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다. 혹 장편과 단편을 모두 잘 쓰는 작가가 있다면 그것은 시와 소설 양쪽 분야에서 모두 일가를 이룬 경우처럼 드물 것이다.
나에게 장편소설은 사람에 대한 탐구이다. 대개는 한 사건을 시작으로 서술해나가지만, 그것은 그 사건이 있기까지 그 사람의 일생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각 사람은 그만의 고유한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사연들이 모두 다른 것이다. 그 사연을 우리는 이야기라고 부르며 혹은 서사라고 명명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인간의 본능 중에는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 이외에 사랑하고 싶은 것과 아름다움을 선택하고 싶은 것, 그리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본능이 있다고 믿는다. 남의 인생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그러므로 그 이야기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남의 인생에는 그 시대가 가지는 보편이 깔려 있고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에의 보편성이 있다. 이렇게 보편성과 동시대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도 인간이 어떻게든 혼자 떨어져 있다는 고립감을 피하고자 하는 안간힘일 수도 있겠다.
기이한 것, 특수한 것 들은 그러므로 어느 순간 나의 추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나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내가 인간으로서 비슷비슷한 삶을-그것이 무수히 다른 양태로 나타날지라도-살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확인하고자 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당연히,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비슷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함께임을 느끼고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그것이 거창한 것이 아닐지라도-알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 이십년 동안 나는 한국의 현대사와 더불어 문학의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책임감이 강해서도 아니고 무거운 인간이기 때문이어서도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나 혼자 짊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내가 그런 시대에 태어나 문학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어진 제복(制服) 같은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내가 문학을 시작한 혹은 문학을 공부한 이삼십년 전과 아주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그’본질은 어차피 셰익스피어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금 이 변화된 것들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거운 시대의 문학이 내게서 앗아간 것들을 내 소설에 복원시켜 한 시대, 어떤 사람들의 인생을 멋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것이 앞으로 나의 과제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순수한 의미에서의 재미’‘유머’그리고‘삶의 보편적 통찰들’이 되지 않을까 싶다.
민주화와 경제성장은 문학에도 많은 자유를 주었다. 나는 비로소 왜 제국주의 혹은 선진국들의 문학이 세계적인 문학이 되었는지(거칠게 이야기해서 그들의 국력이 미친 프리미엄은 빼놓고)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싼도르 마라이의 예민함이나, 헤닝 만켈의 집요한 추리, 빠울루 꼬엘류의 거시적 통찰들이 요즘 내 매료의 대상이다.
오래도록 평화를 원했던 나는 이제 더불어 자유를 원한다. 그것은 내 장편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다. 누구에게도 제어받지 않는 상상력, 한때 내가 문학소녀였던 시절에 그것은 어쩌면 권력의 문제만큼만 단순했겠지만 이제는 문단과 자본 그리고 독자 모두로부터의 자유를 나는 원한다. 쓰는 것은 실은 누구의 도움도 평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일, 이럴 때 나는 내가 소설가인 것이 좋고, 좀 괴롭다.
낙관주의자, 배신자, 행복한 사람
배수아│장편『에세이스트의 책상』『독학자』『당나귀들』등이 있다.
이딸리아계 미국 작가 돈 드릴로의 『화이트 노이즈』,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 그리고 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의 『앙스트블뤼테』(Angstblüte, 공포의 꽃)가 내가 비교적 최근에 인상깊게 읽은 장편소설-굳이 작품의 길이로 장르를 구분하자면-의 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 노이즈』와 『소립자』는 80, 90년대 선진산업국에서의 개인의 삶이라는 시대와 사회상을 강하게 반영하는 작품이다. 『화이트 노이즈』는 현대인의 삶에 파고들어온 테크놀로지의 흔적을 추적하며 발휘하는 작가의 모던한 상상력(하지만 이 소설은 80년대 작품이다)에 감탄하면서 읽었고(어느정도는 미국 영화의 잔영을 느끼게도 한다. 미국 영화에서 과장과 상투성이라는 특징을 제외한 것이라고나 할까) 『소립자』는 작가의 의도에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으나-하지만 어떤 문학작품을 긍정적으로 보기 위해서‘공감’이 독자의 필수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문화인류학적 견지에서‘성 혁명의 미래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제의식 자체는 높이 사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비하면 독일 작품 『앙스트블뤼테』는 상대적으로 매우 사적이고 내면적인 편이다. 하지만 이 세권의 책은 모두 일단 한번 잡으면 도저히 중간에 놓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서점의 독자서평을 살펴본 나는 조금 놀랐던 것이, 재미에 관련한 사람들의 취향이나 기준이 무척이나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양이 아니라 상반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아직 한국에 번역되어 나오지 않은 『앙스트블뤼테』에 대한 독일 독자들의 반응은 더욱 극심하게 양분되어 있다. (‘비교적 최근에’읽었다고 내가 고백한 이 리스트를‘상당히’올드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으리라.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나는 반성해야 한다.)
여기서 세 장편소설을 예로 들긴 했지만 소설의 독자로서 나는 장편이냐 단편이냐 하는 구분에 연연하지 않고 읽는 편이다. 분량의 확대나 축소가 그 작품의 본질을 크게 바꾸어놓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보지 않을뿐더러 가슴이 뜨거워지게 좋은 작품은 장편이냐 단편이냐에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원칙일 테니까. 오래전부터 나는 단편소설을 장편의 한 부분처럼, 혹은 경우에 따라서 어떤 장편은 단편의 연작이나 모음집처럼 받아들이면서 읽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작가의 책 한권을 읽는다이지, 그것이 장편이냐 단편 모음이냐 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라고 치부했던 것 같다. 작년에 나는 아주 우연히 누군가의 추천을 받고 이딸리아 작가 이딸로 깔비노의 환상과 서정이 어우러진 짧은 글 「보이지 않는 도시-도시와 눈」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때는 그것이 아주 짧고도 독특한 단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아마도 이 에쎄이의 테마 중 하나가 인상깊게 읽은‘장편소설’로 되어 있지 않았다면 깔비노의 「도시와 눈」도 나의 리스트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최근에 한국에서 깔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번역되어 나온 걸 보고 기뻐하면서 책을 구입하고 나서야 내가 읽은 「도시와 눈」이 말하자면 연작형태인 그 소설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적도 있다.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은 작품집은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한 작가를‘사귀게 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없어서이리라. 외국문학 애독자인 나는 의도하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단편보다는 아무래도 장편을 읽게 될 기회가 더 많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작품도 장편 혹은 책 한권 분량의 노벨레(Novelle)에 치우치게 된다.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단편을-길이의 개념에서가 아니라 특질의 개념에서-시와 소설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건 주관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시가 두뇌의 명석함과 언어적 영감의 혜택을 더 많이 요구하는 장르라고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한때는 시인이란, 인간으로서도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진심으로 믿기도 했다. 비록 나는 시인은 아니지만, 단편을 쓸 때 이것이 소설가의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시라고 남몰래 속으로 즐거운 암시를 줄 정도이다. 깔비노를 다시 언급하자면, 이번에 나온 한국어판의 역자가 쓴 작품해설에 깔비노가 그 책을 “한줄 한줄, 마치 시를 쓰듯이 여러가지 영감에 따라서 썼다”고 했다는 인용이 나온다. 아마 그리해서 내가 그의 글을 단편이라고 오인했는지도 모른다. 작가로서 내게 단편을 쓰는 작업은 비밀스러운 시작(詩作)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나는 단편을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을 더 즐기는 편이다.
그러나 아무리 원칙으로는 문학적인 차이가 없다고 전제하기는 해도, 흥미로운 줄거리에 지적인 통찰력으로 가득찬 밀도있는, 그것도 마음에 드는 장편소설을 만나는 것이 소설의 독자에게는 가슴 벅찬 행복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각자 저마다 다르게 해명할 수 있을 테지만, 한가지 예를 들자면 내가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을 읽으면서 받았던 감동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혹은 구성하는‘포괄적이면서도 동시에 집요하게 고립된 시점’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는 그 안에서 살게 된다. 독자를 다른 세계-작가의 세계-로 안내하는 이런 장편은 몸이 떨릴 정도로 매혹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말로가 그런 작품을 삼십대 초반에 써냈다는 사실에 아직까지도 조금 경탄하고 있는 중이다.‘고전’이 정확히 어떤 범주의 것을 가리키는지 잘 모르지만 나는 이 작품을 고전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나는 청소년기에 이 책을 읽었고 성인이 된 다음에 다시 읽었는데 나중에 읽은 것의 번역이 매우 훌륭했다. 청소년기에 외국문학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고 인상적인 것도 별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번역의 부실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가장 불만스러웠던 것은 이상한 고어투의 번역문장들이었다. 그래서 대개 청소년기에 읽었던 대부분의 소위 고전 세계문학이라 불리는 것들이 크게 와닿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조건』을 비롯한 말로의 작품들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또다른 작가 조셉 콘래드를 연상시키지만 콘래드보다는 읽기와 몰입이 더 용이하다. 아마도 그런 규모의 감동과 성찰을 전달하는 데는 장편만이 확실한 수단이 될 수 있으리라.
그것은 분량이나 소재의 상대적인 풍부함 때문만은 아니다. 단편과 달리 어떤 형태로든 연속성을 요구하는 장편에서 작가는 사랑의 게임을 펼치듯이 모습을 슬쩍 감추고 달아나버리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연속성은 길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결국 그 이상의 심도를 작가에게서 기어코 끌어내고 만다. 그러므로 장편작업은 작가에게 어쩔 수 없이 전부를 요구하는 성격이 있다. 그 작품에 몰입했던 기간만큼의 일시적인 전부일지라도 말이다. 장기간의 집중력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성숙 또한 분명 요구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풍부하고 다면적인, 지적인‘역사’와‘유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사적인 것이든 공동의 것이든 간에.
종종 작가는 장편을 쓰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자신의‘전부 이상의 전부’를 발견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개인적으로 나는 장편을 쓰면서 나 자신이 참으로 모자란 인간임을 실감하곤 했다). 선천적으로 음흉한 성향의 작가는 장편을 쓰더라도 아주 힘들게 쓸 수밖에 없으리라(이것 또한 나 자신을 겨냥한 아이러니이다). 훌륭한 장편을 쓰는 작가는 아주 진실하고 솔직한 거짓말쟁이여야 할 것 같다. 매력이 있는 만큼 장편은 독자에게도 수고를 요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게으른 독자이며,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시간을 낸다는 것이 거의 꿈처럼만 느껴지는 생활인임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노이즈』와 『앙스트블뤼테』 같은 작품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소립자』의 경우는 우리들이‘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의 벽을 넘어서 존중할 수 있는 작품 또한 큰 인상을 남긴다는 것을 실감했던 점이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의 공력, 작품의 수준(번역과 편집도 포함하여), 그리고 독자의 집중력, 이런 요소들이 모두 작용한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행운이, 우리 모두의 새로운 모럴이 되어버린 경제적 효율성의 원칙-이익을 남기는 사업만이 실현될 수 있다는-을 초월해서 이루어지는 분야가 한국이나 외국이나 분명 어느정도는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내 생각이 지나치게 나이브한 것인지?
이 글을 쓰다 보니 마치 내가 스스로에게 배신자가 된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한국문학을 생산하는 입장이면서도 한국문학의 독자가 아님을 고백하고 있으니(물론 그래야 한다는 룰이나 규범은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나 이외에도 문학의 독자들 다수가 외국문학을 선호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너무나 명백할 것이므로 여기서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어 보인다.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어로‘번역’된 문학이 한국의 언어예술의 발전과 절대적으로 무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 행복하고 즐겁다.
하지만 나는 한국의 문학작품(장편소설)들이-도약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한국 독자들에게 무조건 외면받고 있다는 평가는 내리지 않는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작가들도 분명히 있고, 또 그렇지 못한 많은 작가들도 아직은 작품을 더 쓸 수 없을 정도까지 용기가 꺾인 것은 아니며, 그런 작가들을 알아보는 편집인과 독자들도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하고 또 존재하게 되리라고 용감무쌍하게도 낙관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싶다. 한국문학에서 그런 의미있는 소수의 힘이 미약하게나마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 입술에 아무리 귀를 기울여봐도
김연수│장편『가면을 가리키며 걷기』『7번 국도』『꾿빠이 이상』등이 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길게 써본 장편소설을 신인공모 문학상에 투고해서 작가가 된 경우다. 왜 갑자기 길게 소설을 써볼 마음을 먹었는지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군복무를 마치고 정릉4동 산동네에 살 때니까 1993년의 일이었는데, 하루는 같은 동네에 살던 시인 권대웅형이 집으로 찾아와 대남문에서 이문재 시인을 만나기로 했으니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래서 대남문이 근처에 있는 문인 줄 알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갔다. 정릉초등학교 뒷산으로 올라가다가 보니까 칼바위능선 같은 고개도 나오고 길도 험해졌다. 그렇게 몇시간을 기어올라가고 나서야 나는 대남문이 북한산 꼭대기에 있는 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간신히 대남문에 다다르니까 나무 그늘에 이문재 시인 가족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나는 염치불구하고 물 좀 달라는 말부터 꺼냈다. 산에 올라오는 동안 우리가 목마르고 허기진 영혼들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꿰뚫어본 이문재 시인은 한쪽에 신문지를 펼치고는 앉으라고 권하더니 물과 김밥을 내놓았다. 허겁지겁 그 물을 마시고 김밥을 먹어 배가 좀 부르고 나니 슬그머니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그 산촌 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대남문에서 시인들과 함께 음풍농월하지는 못할망정 나무젓가락도 없이 맨손으로 김밥을 집어먹는 꼴을 보였다니. 그래서 깔고 앉은 신문지로 시선을 떨궜다가 그만 국민일보에서 장편소설을 공모한다는 사고(社告)를 보게 됐다. 그때 시인들 몰래 그걸 찢어 주머니에 넣고 산을 내려왔는데, 그게 바로 내가 장편소설을 쓰게 된 인연이었다.
내게 “그럼 만약 그때 겸연쩍은 마음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장편소설을 쓰지 않았을 거란 말인가?”라고 되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때는 미등단 작가가 장편소설로 데뷔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일단은 단편소설로 등단해서 두세권 정도 소설집을 출판한 뒤에야 장편소설을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신문사나 출판사에서 신인들을 대상으로 장편소설을 공모하기 시작하면서 장편과 단편 사이의 그런 위계질서는 깨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형식이 갖춰지면 어쨌든 그에 상응하는 내용이 마련되는 법이다. 신인을 대상으로 장편소설을 모집하면, 신인들은 장편소설을 쓰게 된다.
한국소설에서 단편소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중에서 한국문학의 수준이 세계적으로 높아서 단편소설이 승하다는 의견에는 좀 의아한 생각이 든다. 나는 단편소설이 장편소설보다 예술성이 강하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건 소설의 예술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따져봐야 할 문제니까 일단 한발 물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국소설에서 단편소설의 비중이 높은 원인을 찾을 때만은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될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그 이유가 간단하다. 문예지들이 단편소설을 청탁하니까 소설가들은 단편소설만 쓰는 것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뜻은 복잡하다. 한국의 문학제도가 단편소설 위주로 구성돼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제도하에서는 백명의 소설가가 있다면 그중 구십명은 단편소설을 쓰게 돼 있다.
장편소설에 관한 한, 나는 매우 운이 좋은 경우다. 지금까지 나는 모두 네편의 장편소설을 썼는데, 데뷔작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예지에 연재할 수 있었다. 각기 다른 문예지의 편집위원들이 내게 장편소설을 연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연재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왜 아니겠는가? 내가 아닌 다른 소설가라고 해도 나와 마찬가지로 답변했을 것이다. 그렇게 답변하고 나면 결국 장편소설을 써야만 한다. 500매 내외의 소설을 써본 일과 비교하자면 연재라는 건 전작을 쓸 때보다 육체적으로 훨씬 더 고통스럽다. 마감에 쫓기는 심리상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어쨌든 대개의 경우 연재하는 소설가는 연재를 끝마치게 돼 있다. 마치 신인을 대상으로 장편소설을 모집하면 신인들이 장편소설을 쓰게 돼 있는 경우처럼.
하지만 장편소설을 연재할 수 있는 행운을 얻는 작가들은 많지 않다. 연재 지면을 얻지 못할 경우, 원칙적으로 한국의 작가가 장편소설을 쓸 가능성은 높지 않다. 연재하거나 문학상에 당선되는 경우가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 전작장편을 출판한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한국의 작가가 얻을 수 있는 인세 수입이라는 건 많아봐야 천만원을 넘지 않는다. 액수가 적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건 아니다. 사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하는 데 간간이 들어오는 천만원의 수입이 적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단편소설을 썼을 때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과 비교할 때다. 기본적으로 연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작가가 장편소설을 쓰면서 기대할 수 있는 수입은 같은 분량의 단편소설을 쓸 경우의 절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적어도 단편소설은 문예지를 통해 발표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원고료를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경험상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아홉편의 단편소설을 쓸 때보다 더 많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장편소설을 쓰자면 적어도 2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반면, 같은 수준의 아홉편의 단편소설은 1년 정도면 쓸 수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연재하지 않는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의 기대수입은 단편소설을 쓸 경우에 비해서 4분의 1 정도로 줄어든다. 여기에다가 다른 외적인 요인들, 예컨대 단편 위주의 문학상제도와 문예지 수록 단편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다양한 단편 재수록 제도 등을 고려하자면 기대수입은 더욱 줄어든다. 이렇게 단편 위주로 형성된 한국문학의 제도가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작가들이 더 많은 장편소설을 쓰리라고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제도적 측면에서 장편소설 집필이 기피될수록 한국문학은 문학시장에서 멀어지게 돼 있다. 단편 위주로 형성된 한국문학의 제도는 문학시장과 문학작품을 유리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로 다시 단편 위주의 제도적 지원책이 마련된다. 이는 계속 반복되는 악순환이다. 이런 과정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면 전체 출판시장에서 한국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줄어드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최근 외국문학, 특히 일본문학의 득세는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즉 최근의 일본소설이 한국문학에 없는 콘텐츠를 담고 있기 때문에 활발하게 소비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한국소설은‘단편 위주의 문학제도’라는 진퇴양난의 수렁 속에서 점점 고립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말했다시피 기대수입을 고려할 때, 작가들의 노력만으로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니까 진퇴양난의 수렁이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고 할 때, 경제적으로 상승하는 나라에서는 대개 문화의 상승이 나타났다.‘한류’라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현재 한국문학의 외적 상황이 매우 긍정적이라는 뜻이다. 한국 출판시장은 세계 10위권에 육박하는 상당한 규모다. 식민지를 가져보지 않은 비제국주의 언어 출판으로서 이 정도 규모를 자랑한다는 건 정말 놀랍고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분간 이 출판시장은 더욱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한국 장편소설 창작의 사정을 보게 되면 그 규모에 비해 종수가 매우 부족한 형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출판시장의 규모가 커지는데 한국 장편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작아졌다. 그러므로 출판사들이 외국 장편소설 번역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단순히 일본소설의 유행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보기에는 한국 장편소설이 출판시장에서 차지하는 크기가 너무 작아졌다. 그래서 어쩌면 일본소설 다음에는 중국소설, 이런 식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어쨌든 출판시장은 커졌기 때문이다.
많은 말을 했지만, 요지는 간단하다. 문학제도가 작가들에게 장편소설을 요구하면 작가들은 장편소설을 쓰게 돼 있다. 하지만 작가들이 장편소설을 활발하게 쓰지 않는다면 그건 누구도 그들에게 장편소설을 쓰라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당위적으로는 작가들에게 장편소설을 쓰라는 요구가 존재하지만, 문학제도의 입술에 귀를 기울이면 아무런 말도 없다. 이 문학제도는 지금에 비해 그 규모가 현저히 작았던 시대의 출판시장과 더 잘 호응했던 것 같다. 1990년대부터 출판시장과 문학제도 사이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출판시장에서 나타나는 한국소설의 위축은 그 결과물로 보인다. 어쩌면 지금이 그 간격을 좁힐 수 있는 시기 같기도 하고, 이제는 영영 좁힐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아리송하다.
물량공세와 개미군단
강영숙│장편『리나』, 소설집『흔들리다』『날마다 축제』등이 있다.
일본의 유명한 출판사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편집자 몇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무라까미 하루끼를 좋아하세요? 인사를 하고 술을 따르고 음식을 먹기 전에 그분들이 내게 물었다. 괜히 약간의 반감이 작용해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버렸다. 그랬더니 이번엔 그럼 일본작가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다시 물어온다.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郞), 아베 코오보오(安部公房)의 이름을 댄다. 일본에서 오오에 켄자부로오는 안 팔리는 작가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장편소설 『인생의 친척(親戚)』을 제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토오꾜오에 사람이 많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도 시부야(澁谷) 쎈터가 입구의 횡단보도에 서 있으면 사람이 많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지 멀미가 날 지경이다. 더 이상한 건 어디나 지하철역 출구 앞에는 반드시 서점이 있고 서점 안에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인터넷서점에서 할인을 안해주기 때문일까. 대낮의 국립도서관, 구립도서관, 심지어 어린이도서관, 점자도서관 또한 사람이 많다. 약간 흠이 난 책들을 100엔에 파는 가게에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많다. 일본의 작가들이 한때는 이 100엔숍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반대서명까지 했다고 한다.
굉장히 이상한 얘기지만 최근 일류(日流)현상의 근본적인 이유는 모두 다 인구 때문인 것 같다. 올해는 단까이(團塊)세대라고, 비틀즈를 좋아하던 베이비붐 세대의 아저씨들이 대거 정년퇴직을 하는 해라고 한다. 이들의 퇴직금을 노린 실버마케팅 전략이 대단하다는데, 실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서점에서 책을 보는 사람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도, 토오꾜오 국립필름쎈터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도 대부분 실버들이다. 편집자들은 일본의 순문학 독자 또한 실버들이라고 대답한다.
한국에서 요즘 일본소설들이 인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편집자들에게 물었다. 아사히(朝日)신문에서 한국에서 일류현상이 거부감 없이 완전히 자리잡았다고 기사화했던 다음날이었다. 겸손인가, 그분들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면서 오히려 그 질문을 나에게 한다. 그럼 혹시 한국 장편소설 읽어보셨나요? 내가 물었다. 일본어로 쓴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金石範)의 소설은 읽었지만, 아쉽게도 한국 장편소설은 읽어본 바가 없단다. 번역자이자 문학연구자인 김훈아씨가 작년 후반기부터 요미우리(讀賣)신문의 독서란에 두달에 한번 정도 한국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최근에 박민규의 『핑퐁』을 소개했는데 반응이 좋다고 하면서 의외로 이 기사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한다.
호세이(法政)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올해 2월부터 토오꾜오에서 지내는 중에, 지난 4월 15일, 큐우슈우(九州)의 쿠마모또(熊本) 근대문학관에서 열린‘일본·한국 문학의 오늘’이란 주제의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강좌에 한국측 발제자로 참가했다. 그날 모인 100여명의 청중들도 한국의 현대소설이 번역된 게 많지 않아 읽어본 작품이 없다고 했다. 대신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는 대인기다. 「대장금」의 인기는 거의 초절정이어서 몇번씩 반복해서 본다고들 했다. 내가 「겨울연가」에 일부 나오는 춘천 출신이라는 말을 했더니 매우 조용하던 사람들이 아, 하고 웃었다. 한국문학의 주제나 경향에 대해서 발제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시에 관한 언급을 잠깐 했다. 선배 시인들의 뛰어난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국의 젊은 시인들은 주제나 형식 면에서 과감한 실험을 하면서도 여전히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미 1980년대에 현대시가 사라졌다고 하는 일본이어서 그런지 문학관 소속의 연구자들이 한국시에 대한 질문을 하러 따로 찾아왔을 정도였다. 이상(李箱)의 시를 읽는다는 할머니도 한분 만났다. 소설보다는 시를 수출하는 건 어떨까.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편집자들이 이번엔 나한테 묻는다. 한국에선 보통 장편소설 초판을 몇부나 찍느냐고. 보통은 3천부에서 시작합니다. 3천부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고 잘 팔리면 1만부 이상, 그 이상 되는 작가들도 소수지만 있다고 대답했다. 인구 대비로 볼 때 한국은 상황이 괜찮군요. 일본도 그 정도밖에 안 나갑니다. 작가들은 책을 내고 싶어도 출판사에서 내자고 제의를 하지 않으면 내기가 힘들죠. 팔리든가, 의미가 있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단다.
내가 또 묻는다. 그럼 일본작가들은 어떻게 생활하나요? 대학교수나 문화쎈터 강사가 아닌 경우, 작가들은 죽어라 하고 쓴다는 것이다. 자신들을 개미군단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유미리(柳美里)도 소설 8권, 에쎄이 11권, 희곡 2권을 썼다. 어떤 작가는 소설의 기본적인 성격 라인만 떠오르면 단기간에 바로 써버린다는 것이다. 얼마나 생산적인 집필 스타일인가. 신문광고도 안해주고 특별한 이벤트도 없지만 꾸준히 쓰고, 쓰다 보면 어느날 한권이 잘 팔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쓸 수밖에 없다는 반응이다. 한국에서는 기초생활이 어려운 작가들을 위해 단편소설 한편을 잘 쓰면 4백만원의 정부지원금을 주는 제도가 생겼다고 하자 다들 깜짝 놀란다.
일본엔 사람이 정말 많다. 냉장고, 세탁기, 여행, 책 등 모든 제조업들이 내수시장만으로도 유지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임여성들 모두 아기를 한명씩 더 낳을까. 아니면 빨리 통일을 해 인구수를 늘릴까. 둑은 차면 넘치는 법이라고 했다. 출판강국인 일본의 거대 출판사는 전직원이 천명이 되는 곳도 있고 편집자의 급여도 대기업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곳에서 생산되는 온갖 상품들이 한국처럼 호기심 많고 변화에 민감한 시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것이 한국 독자들의 입맛에 맞느냐는 다른 차원의 일이고, 그것보다 한국 자체의 콘텐츠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것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한국 독자들이(내가 보기엔 편집자들이 더) 한국식의 혈연과 지연에 얽매인 끈끈한 인간관계에서 느낀 피로감 때문에 일본소설을 좋아한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소설이 정말 쿨한가. 내가 보기에 일본소설은 오히려 찡한 측면이 강하다.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작품들은 반드시 눈물을 떨어뜨릴 만한 부분이 꼭 있다. 2005년에 출간된 릴리 프랭키(リリーフランキ)의 장편소설 『도쿄 타워-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가 좋은 예다. 일본에서 200만부가 팔렸다는 이 장편소설은‘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면 지하철에서 읽는 건 위험하다’는 입소문까지 날 정도였다. 그렇다면 일본소설이 쿨하다는 분석도 꼭 맞지는 않는 얘기가 아닐까.
동서고금의 수많은 소설들이 두루 읽히는 판에 우린 왜 하필 일본소설에 관해서는 그리 민감한 걸까. 괜찮은 한국 드라마들이 일본에 들어와서 유명해지는 것과 그리 다른 차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애니메이션은 들어와도 소설은 안된다는 자의식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일본소설을 읽어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암묵적으로 일본은 위대한 번역문화를 통한 근대화의 완성 이후 유럽 전통의 장편소설 장르가 아시아에서, 그것도 일본에서 꽃피어야 한다는 데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일요일 오후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전국노래자랑을 하고 진품명품 코너를 하는 것까지 한국과 일본은 징그럽게도 닮았다. 이 길항관계를 소설 하나만 가지고 얘기하자는 건 참 무책임한 일이고 오랜 시간 해온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극소수지만 한국소설을 읽어본 일본인들의 반응은 조심스럽다. 한국은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인지 작가의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작은 얘기부터 풀어나갈 줄 몰라 무겁고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작가들이 내가 작가요, 하고 잘난 척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어느 사회나 경제성장을 이루고 안정된 후에는 잔잔하고 은은한 이야기들을 읽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문제의 키는 독자들이 쥐고 있을 것이다. 우리 독자들이 일상생활의 잔잔한 사건들로부터 은은하게 전개되는 일본소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일본소설이어서가 아니라 소설의 포지션이 달라졌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나는 8천년 동안 죽지 않고 산 인간이 등장하는 씨몬느 드 보부아르의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같은 장편소설을 좋아한다. 또 다중화자가 등장하여 끝도 없이 이어지는 스토리를 여러 관점에서 서술하는 앨리스 워커의 『여인들의 신전』 같은 식의 장편소설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런 소설에서 얻은 상상력으로 진도굿의 살풀이 무당처럼 죽은자와 산자를 오가며 여러 화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해보고 싶다. 그런데 우연히 일본에 오게 돼서, 아니 또 일본소설이 많이 팔린다는 것 때문에 새로운 소설을 구상중에 있다. 예를 들면 헤어진 연인이 피렌쩨에서 다시 만나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같은 스토리, 또 호모들의 양로원을 재미있게 묘사한 영화 「메종 드 히미꼬」 같은 스토리 말이다. 나는 이런 식의 장편을 쓸 수 있을까. 여기에는 유전자의 문제가 개입된다. 또 우리의 복잡한 컨텍스트도 한몫하는 게 사실이다. 어떤 소설을 쓰든, 선택하든 그것은 작가의 감각의 차원이다. 몸을 바꾸어가는 일, 감을 잡기는 쉽지 않으나 나 스스로는 그런 일에 몰두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한다. 문화라는 것, 하나의 고유한 문화라는 것은 어쩌면 마법사의 주문처럼, 무당의 사설처럼, 누가 알든 모르든 혼자서 지껄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래서 그 마법 속으로 이방인을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그러나 최근 무국적 혹은 초국적의 공간을 등장시키는 소설이 나오는 이유는 이미 공간과 국적이 가지는 개별성 없이도 삶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라이프스타일이 같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문화의 개별성 혹은 특수성이라는 게 박물관에나, 여행사 가이드의 확성기 속에나 존재하는 언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박물관도 가고 스타벅스 커피도 마신다. 한·중·일 3국의 스타벅스 커피맛은 다 다르다. 사람들이 다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젊은 작가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선배 작가들도 더 많이 쓰고 출판사도 더 많아지고 책도 더 많이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식의 결론이라니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또 지금은 이렇게 무거운 마음속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전국의 조교들은 단결하라!
이기호│소설집『최순덕 성령충만기』『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등
1
창비에서 어려운 과제를 내줬다. 장편이 침체되었다, 이유는 뭐냐? 장편 집필할 환경은 어떠냐, 의미있게 읽은 장편은 어떤 것이 있느냐, 일본소설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느냐, 장편의 장르적 특성은 무어라 생각하느냐 등등. 사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뻔하다. 답이 뻔하다는 것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나, 과제를 내준 편집인들이나, 모두 다 알고 있는 사항이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이 글을 읽고, 과제를 내준다. 그리고 나 또한 아이고 그렇게 어려운 글을 제가 어떻게 써요, 엄살을 잔뜩 떨며 청탁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이건 뭔가?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 척 멀뚱멀뚱 시치미 떼고 있는 상황.‘시치미’의 카르텔. 어쩌면 문제는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그‘시치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하다.
2
시치미를 떼고, 나는 먼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처음 내게 그 문제에 대해 얘기해준 사람은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 동기였다.
“레이먼드 카버 형님이 말씀하시길, 장편소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의미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존재이유를 지닐 수 있는 장르라고 하셨지. 합리성이나 인과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야.”
“카버 형? 그 형은 단편만 썼잖아? 그런 형 말을 어떻게 믿어?”
나는 레이먼드 카버가 쓴 단편 「대성당」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나는 그 소설을 학부 창작수업시간에 읽었다.
“그러니까 네가 아둔하다는 소릴 듣는 거야. 잘 들어봐라. 카버 형님이 장편을 쓰지 못한 이유는 그 형님이 살았던 때가 도무지 합리성이나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시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세계 자체가 부조리하고 무의미한데 어떻게 장편소설을 쓸 수 있느냐, 이 말씀이시지.”
“흐음, 세계가 그러니까 쓸 수 없다, 그러니까 세계 탓이다?”
나는 그렇게 되물으면서, 언제가 누군가에게 주워들은 들뢰즈의 말을 기억해냈다. 들뢰즈는 단편이란 “이미 주어진 목적을 향해 달리는 자세(태도)”라 했다. 그것은 폐쇄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망의 폐쇄로 인해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만 중요한 것이 단편이라는 말씀. 해서 모든 성공한 단편은 대부분 허무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말씀. 돌아보니 카버 형님 말씀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말씀이었다.
“그럼 나도‘세계 탓’때문에 이런 거야?”
내 말에 동기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는 정말 그것이‘세계 탓’이라고 믿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시치미를 뗐다.
“너하곤 좀 다르지.”
동기는 그렇게 다시 운을 뗐다.
“카버 형님은 시대하고 세계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넌,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나도 한 걱정 하면서 살아.”
정말이다. 나도 걱정이 많다. 하지만 그 걱정이 장편을 쓰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가 부조리하고 무의미하다는 덴 동조하지만, 그렇다고 동조만 하고 앉아 있을 수 없는, 더 큰 이유가 내겐 있었다. 해서, 나는 또 물었다.
“근데, 카버 형님은 단편만 쓰면서 어떻게 사셨다냐?”
“뭔 소리야?”
동기는 다소 경계의 목소리로 물었다.
“생활을 어떻게 하셨냐고? 미국은 단편만 써도 생활이 되나?”
“씨러큐스 대학 교수였지, 아마.”
동기의 말에 나는 조용히 휴대전화 폴더를 닫아버렸다. 아아, 그랬구나. 카버 형님은 오리지널이 아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미니멀리즘으로 갈 수 있었구나. 나는 그렇게, 내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동기는 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왔지만, 난 받지 않았다. 받아봐야 좋은 소리 나오지 않을 것은 뻔한 일. 그러자 몇분 지나지 않아 이런 문자가 도착했다.
‘세상 그렇게 살지 마, 새꺄.’
3
“그건 다 전국의 조교들 때문이에요.”
다음으로 내게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사람은, 한 사립대학교 문예창작과 조교였다.
“조교요?”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어 내가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복사하기 쉬운 것은 단편소설이니까요.”
조교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조교한테 장편소설 복사하라고 맡기는 교수나 강사는 별로 없거든요. 그러면 좀 미안하죠. 조교는 조교대로 인상 빡빡 쓰니까. 그러니까 강의시간엔 계속 단편소설만 하는 거예요. 조교한테 미안해서.”
“그러니까 한국에서 장편소설이 침체된 것은 조교가 복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학생들은 강의시간에 공부한 소설들만 정전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걸 더 비중있게 바라보죠.”
조교의 말은 조금 어이없었지만, 그래도 카버 형님 말씀보단 조금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학생들은 그래서 앞으로 자신도 복사하기 쉬운 소설을 쓰겠다, 그게 한국에선 먹힌다, 이런 각오로 소설을 쓰는 거구요.”
“흐음, 그럼 처음부터 복사를 염두에 둔 글쓰기가 시작되는 셈이군요.”
“그런 셈이죠. 일종의 조교를 염두에 둔 글쓰기.”
“그럼 생활이 안될 텐데?”
나는 또 참지 못하고, 그 질문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질문에 집착하는 내가 한심스러웠지만, 사실 나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에이, 아이들도 그걸 다 알고 시작하는데요, 뭘. 소설 쓰면 가난하다 힘들다, 말들은 많이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소설에서 자꾸 엘리뜨적이고 귀족주의적인 특성만 보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복사를 많이 해도 상관이 없다, 그건 직업이 아니다, 뭐 이런 마음들인 거죠.”
“흐음, 그러니까 소설가는 직업이 아니다?”
“이래도 직업이 안되고 저래도 안되니까, 그러면 굳이 복사하기 힘든 장편을 써서 조교들한테 미움받을 짓이나 하지 말자, 뭐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조교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나는 좀 서글퍼졌다. 서글펐지만,‘시치미’를 뚝 뗀 채 계속 말을 했다.
“그럼, 한국에서 장편소설이 부흥하긴 힘들겠군요?”
내가 조금 자신없는 목소리로 묻자, 조교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이런 말을 했다.
“전국의 조교들이 단결하면 되죠. 조교들이 단결해서 복사 안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조교는 그러면서‘그래도 힘내세요, 이선생님!’하며 오른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해서, 나도 얼떨결에 한쪽 주먹을 쥐어 보였다. 내 주먹은 작고 힘없어 보였다.
4
창비에서 내준 어려운 과제 때문에 심란해졌다. 어떤 친구는 그것이‘세계 탓’이라고 했고, 또 어떤 친구는 그것이‘조교 탓’이라고 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나마 그것이 더 정직한‘자세’이고‘태도’라는 생각. 그것이 전부이다.
사실, 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도대체 이런 답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 다른 말도 필요없는 것이다. 뭔 말들이 그렇게 많은가. 그 말들을 듣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제발 우리끼리‘자뻑’좀 하지 말자.‘시치미’좀 떼지 말자. 그‘자뻑’과‘시치미’때문에 사태가 이리 됐다는 걸, 왜 모르는지, 정말 다들 몰라서 이러는지, 나는 그게 정말 궁금하다. 그래도 정‘자뻑’을 하겠다면, 먼저 조교들과 협상해라. 그게 더 구체적인 행동요령이다. 조교들과 함께 머리띠 질끈 묶고 나가서 외치면 된다.
‘전국의 조교들이여, 단결하라!’
단결이 될까,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게‘자뻑’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 있는 길일 터이니, 열심히들 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