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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도상 鄭道相
1960년 경남 함양 출생. 1987년 단편 「십오방 이야기」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친구는 멀리 갔어도』 『모란시장 여자』, 장편소설 『푸른 방』 『누망』 『실상사』 등이 있음. oksknk@hanmail.net
찔레꽃
남행열차는 빠르게 달렸다.
손님들과 도우미들은 탬버린을 허벅지에 치며 목소리를 높여 합창하고 몸을 거칠게 흔들어댔다. 술과 노래와 춤에 취한 손님들과 그 앞에서 교태를 섞어 몸을 흔들던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에 꽉 찬 담배연기에 목이 따가웠다.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방에서 나왔다. 벌써 세번째 손님맞이였다. 숨이 막힐 듯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 모레쯤 그 남자가 올 텐데…… 복도로 나와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각 방에서 흘러나온 노래들은 복도에서 서로 섞여 소음이 되었다. 아우 지겨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 밖으로 나가는 문을 밀었다. 그런데 문은 오히려 내 쪽으로 밀려왔다. 얼른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 패거리의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 몸에 비 냄새가 큼큼하게 묻어 있었다.
“어, 은미씨 어디 가세요?”
이틀에 한번 꼴로 노래방에 오는 최가 반갑게 웃으며 물었다. 나는 최의 웃음에 고개를 돌렸다. 최는 남동공단 볼트공장에서 쇠를 깎는 노총각이었다. 최는 키가 작고 통통했는데 험한 일을 하는 사람치고는 손이 고왔다. 서른다섯살이었는데 노래방에만 오면 언제나 나를 불렀다. 내가 다른 방에 들어가 있으면 도우미 없이 혼자 노래를 부르며 기다린 적도 있었다. 최의 눈길을 등으로 느끼며 밖으로 나갔다. 이래도 되는 걸까? 잠시 지금의 행동을 주저했지만 발걸음은 이미 지하에서 지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슬비가 포구의 밤을 적시고 있었다. 후우, 길게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빗방울이 고였고 이내 마음 가득 습기가 배어들었다. 서너번 숨을 몰아쉬는데 진한 갯비린내가 풍겨왔다. 소래포구는 낮 동안의 소란을 어둠 속에 품고 고요히 비에 젖고 있었다. 갯비린내는 내 안에 있던 함흥을 불러냈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들, 눈길 가는 곳마다 붙어 있던 붉은 구호들, 돼지밥 달구지를 끌던 엄마와 어두운 방구석에서 말라가던 아버지, 단짝이었던 은실이, 재춘 오빠와 함께 갔던 빈 창고와 좁은 골목들, 그리고 지독했던 배고픔이 망막 위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멀리서 파도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바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니, 바다가 끌어당긴 것이었다. 빗속으로 한걸음 내딛는데 누군가가 우산을 씌웠다. 옆을 보니 최였다. 최가 말없이 웃으며 쓰고 가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는 적어도 나에 대해서만큼은 불행한 남자였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고양이처럼 걸었다. 함흥을 떠난 이래, 한번도 마음놓고 땅에 발을 붙여보지 못했다. 중국을 떠돌 때는 비법(非法)월경자였기에 발을 내려놓지 못했고, 한국에 와서는 물에 섞이지 못하는 기름처럼 떠돌았다. 북조선에 있을 때는 충심이었고, 중국에서는 메이나(美娜)였다가 별명으로 소소를 얻었으며, 한국에 와서는 은미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민등록증에도 김충심이 아니라 이은미로 올라가 있다. 한국의 통일부나 국정원에선 어차피 진짜 이름을 조회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은실이의 은과 미향이의 미를 따서 은미라고 이름을 내세웠다. 혹시라도 있을 피해로부터 북의 가족을 보호하고 싶었다. 바다는 조용히 비를 맞고 있었다. 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선착장에 쪼그리고 앉아 바다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찔레꽃 붉게 피이인 북쪽나라 내 고오오햐앙, 언덕 위의 초가삼가아안 그리이입습니이다아, 자주 고름 입에 물고오……
콧잔등이 시큰해지더니 눈앞이 흐릿해졌다. 눈물을 참아내며 느릿하고 나직하게 노래를 마쳤다. 함흥음악학교에서 배운 노래였는데, 지금은 노래방 도우미의 십팔번이 되고 말았다. 뼈가 저리도록 슬플 때는 슬픈 노래를 불러야 슬픔이 삭았다. 뼈가 저리지 않을 정도의 슬픔은 억지로 웃거나 동무들과 어울려 놀거나 함흥냉면을 서너그릇씩 먹으면 풀어지곤 했다. 찔레 화분에 물을 주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찔레에 물을 줘야지. 지난 오월 하얀 꽃이 하도 예뻐서 사왔는데, 오래지 않아 꽃은 지고 잎과 가시만 무성해졌다.
“잘 놀고 있네. 졸라 열받아! 툭하면 찾으러 다녀야 되냐, 씨발.”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봐서 노래방에서 일하는 총각이었다. 인간이 저렇게 싸가지가 없어도 되나 싶은 녀석이었다. 나는 말없이 일어서서 녀석을 슬쩍 피해 노래방을 향해 걸었다.
“암튼 탈북자 년들은 대가리가 졸라 이상해. 손님이 있어도 멋대로 빠져나오고 지랄들이야, 지랄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마음 같아선 돌아서서 따귀를 한대 올려붙이고 싶지만, 녀석의 말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불고깃집에 취직했던 무산의 성희는 일이 힘들다며 사흘 만에 말없이 나와버렸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취직했던 회령의 정림이는 하루 종일 서 있는 게 싫다며 일주일 출근하고는 드러누워버렸다.
남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희와 함께 무산에서 나온 홍단이는 툭 하면 동거를 했고, 석달을 넘기지 못했다. 벌써 네번째 남자를 내보내고 다섯번째 동거를 시작하려고 남동공단 입구에 있는 카쎈터 총각을 밤마다 불러들이고 있었다. 대전에 있는 영희는 호프집에서 만난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고 전화에다 수다를 떨었다. 그것도 자랑이라고 하느냐며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미 중국에서 몸을 버릴 만큼 버린 터라 모두들 그까짓 것 하며 살았다. 나만 해도 노래방 도우미로 있으면서 벌써 서너군데나 노래방을 옮겨다녔다. 중국으로 다시 나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직은 무서웠다.
노래방에 돌아갔더니 2차를 미리 계산한 맹꽁이처럼 배가 나온 중년의 대머리 손님이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은 벌써 가버린 모양이었다. 노래방 사장이 나 때문에 흥이 깨져 다른 손님들은 먼저 가버렸다며 버럭 화를 냈다. 미안한 노릇이긴 했다. 게다가 다른 방에서도 찾고 있다며 눈을 흘겼다.
“빨리 와, 바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손님들이 유난히 많았다. 대머리 손님이 먼저 노래방에서 나갔다. 대기실로 가서 손가방을 들고 나오다 최와 딱 마주쳤다. 얼른 손가방을 뒤로 숨겼다. 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최한테 미안했다. 최는 아직 한시간을 더 기다려야 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콘돔이 너무 싫었다. 너무 뻑뻑해서 언제나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 들어와서 낯선 남자의 성기에 콘돔을 끼우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인천공항에 내릴 때만 하더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약간의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부풀었다. 이 땅에 도착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지나온 모든 고통이여 안녕,이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탈북자 교육시설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깨달은 것은 탈북자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민족이었지만 외국인 노동자보다도 차별이 더 심했다. 조금이라도 번듯해 보이는 회사에 가서 면접을 보면, 탈북자라는 사실에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식당에서도 탈북자라면 고개를 외로 꼬았다. 공장에 가서 재봉틀을 돌리거나 다른 일을 하고 싶었지만 먼저 지나간 탈북자들의 행세가 나쁘다는 소문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어, 털이 없네. 빽이네.”
손으로 아래를 만지면서 손님이 기어이 아픈 곳을 푹 찔렀다. 키도 가슴도 작았지만 털이 없는 아래 때문에 옷을 벗을 때마다 언제나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반드시 불을 끄고 2차 손님을 받았다. 어떤 손님들은 재수가 없다며 담배를 피워 물었고, 몇몇은 더 흥분된다고 말했다. 그중에서 재수가 없으면 그냥 가야지 담배를 피운 뒤에는 돈이 아깝다며 기어이 밀고 들어오는 놈이 제일 싫었다. 대머리 아저씨는 다리를 벌리더니 그곳에 입술을 대려고 했다. 화들짝 놀라 얼른 밀어내고는 다리를 오므렸다. 젖가슴이나 입술은 물론이고 아래에 키스하는 것은 절대엄금이었다. 그게 나의 몸파는 원칙이었다. 노래방 도우미로 나서면서 그 원칙을 깬 적은 없었다. 그것 때문에 어떤 손님은 노골적으로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의 손님들은 조급했으며 나는 뻑뻑한 콘돔의 느낌을 이겨내려고 이를 악물었다. 행위가 끝나면 미련없이 모텔에서 나왔다. 가끔 2차비를 또 줄 테니 한번 더 하자는 손님들도 있었지만, 싫었다.
“야, 빽은 처음인데 한번만 해보자, 응?”
대머리 아저씨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징그럽고 끔찍해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돈을 더 주겠다며 한번만 입으로 빨아보게 해달라고 졸랐다. 더러운 자식들 제 딸 그곳이나 빨지,라고 생각하며 다리를 더 꽉 조였다.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내 원칙이었다. 몸을 파는 주제에 그까짓 게 대수냐고 따진다면 별로 할 말은 없지만, 그것을 지키려고 온갖 수모를 겪어내야 했다. 나는 모텔의 천장에 그려진 별자리를 보고 있었다. 콘돔은 마른 고무장갑으로 맨살을 마구 문지르는 느낌이었다. 야광으로 만들어진 별자리는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였다. 휴대폰 속에서 울먹이던 엄마의 목소리가 별자리 속에서 유성처럼 쏟아져내렸다.
아이구 충심아. 밥은 먹고 지냄둥?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있으나 간신히 울음을 참아내며‘예, 엄마.’) 어디를 가더라도 장군님이나 조국에 무스그 욕을 하는 거이 아임두. 내가 리(里)인민위원장질을 하니 절대로 아이됨두! 알갔지비. (강대나무처럼 計計하게 말라가던 아버지를 떠올리며‘예, 엄마. 아바이는요?’) 묏동 하나 해줄 돈이 없어 그냥 묻었지비. (엄마가 울음을 참느라 끄윽끄윽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마지막에 충심이 너를 찾다가 눈도 감지 아이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괜찮다마, 잊고 너나 잘살거라. (‘열흘만 남양 이모집에 계세요. 미향이도 잘 있다고 이모한테 말해주고, 아바이 묏동 쓸 돈을 더 보낼 테니 무스그 좀 기다리고 있음두. 미향이도 돈을 모아 보낸다고 전해주고.’) 돈은 무스그 썩어질. (‘엄마 조심하고 꼭 기다려야 해.’) 밥 굶지 마.
남자가 배 위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벌떡 일어나 남자의 물건에서 콘돔을 벗겨 변기에 던지고 물을 내렸다. 콘돔은 변기 물속에서 뱅글뱅글 돌다가 꾸르륵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이제 저 남자와 나는 쎅스를 한 적이 없어졌다. 증거가 없으니 불법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참, 개 같은 세상이다. 몸을 씻을 마음도 생기지 않아 서둘러 옷을 입었다. 남자는 등을 돌리고 담배를 뻑뻑 빨며 한 손에는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마구 바꾸고 있었다. 인사도 없이 방을 나왔다. 방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를 탄 뒤에야 팁도 받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텔에서 나와 우산을 펼치는데, 아까 최가 씌워준, 살이 하나 꺾어진 우산이었다. 최한테 미안했다. 지금은 노래방으로 돌아갈 기분이 아니었다. 최는 노래방으로 출근하자마자 맞이한 첫 손님이었다. 내 목소리에 반해 그후 내리 일주일을 퇴근과 동시에 노래방으로 와서 술을 마시며 두시간씩이나 노래를 불렀다. 최는 주로 내 노래를 들으려고 했다. 최가 한곡 부르면 나는 두곡을 불러야 했다. 일주일 뒤에 최는 내가 좋다며 사귀자고 했다. 나는 혼자의 몸도 버거워 싫다고 했다. 그래도 최는 밥을 사주겠다, 옷을 사주겠다, 회를 사주겠다며 데이트를 신청했다. 탈북자 여자라고 쉽게 보고, 또 헤퍼 보일까 봐 그때마다 웃으며 거절했다. 그래도 최는 꿋꿋하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는 울타리를 갖고 싶었다. 아주 높아서 누구도 나를 함부로 들여다보지 못할 울타리. 키는 작았지만 최는 높은 울타리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소망은 먼지처럼 이 땅에 사뿐하게 내려앉아 그대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남자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질 않았다. 친구들은 속도 모르고 나더러 여자처럼 행동하라고 했지만 나는 여자인 것이 슬펐다.
최의 불행은 고백을 하고 한달 뒤에 찾아왔다. 엄마와 이모한테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날, 그동안 한번도 소식이 없던 박선교사가 잔금을 달라며 교회 집사라는 남자를 보냈다. 많은 고민 끝에 몸을 내놓기로 했다. 나 혼자 목구멍에 풀칠을 하자면 굳이 몸까지 팔 건 없었지만, 엄마와 이모한테는 목돈을 보내주고 싶었다. 첫 손님은 최가 아니었다. 며칠 후 잔뜩 화가 난 최가 노래방에 오더니 2차를 가자고 했지만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 최가 만약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내 손님이 되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찔레를 찾았다. 찔레는 함흥의 아버지처럼 바삭바삭하게 말라 있었다. 명치에 숯불이 놓인 느낌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세숫대야 가득 물을 받아 찔레 화분을 담갔다. 물이 넘쳤다. 조심스레 침대로 찔레 화분을 옮기고 그 옆에 앉았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찔레를 쓰다듬는데 마른 잎이 툭툭 떨어져내렸다.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는데, 그것은 어미를 잃고 무리에서 떨어진 얼룩말 새끼였다. 어제 오후 노래방으로 출근하려고 화장을 하다가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얼룩말 무리를 보았다. 얼룩말의 무늬를 보는 순간, 그만 하늘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영수가 몽골초원에서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환청이 되어 귀에 쟁쟁했다.
“아부지, 재춘 오빠, 미향아, 영수야.”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보았다. 그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고 말았다. 문득 그들을 위해 밥 한그릇 차려놓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미웠고 그들한테 미안했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욕을 퍼붓다가 화분에 떨어진 찔레 잎사귀 몇개를 손에 꼭 쥐었다. 잎사귀는 손바닥 안에서 소리도 없이 바스라졌다. 손바닥을 펴보니 가루가 될 지경이었다.
가루…… 바람에 날리던.
미향이는 도문(圖們)행 기차 안에서 아기가 되다 만 핏덩어리를 쏟고야 말았다. 승객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기차 바닥에 쏟아진 핏덩어리를 망연자실 바라만 보았다. 기차의 공안이 달려왔다. 다시 두만강을 건너 미향이를 남양의 이모집으로 데려다주기로 약속했기에 달아날 수도 없었다. 기차가 연길역에 서자 공안이 와서 축 늘어진 미향이를 들것으로 실어나갔다.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미향이는 영원히 두만강을 되건널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는 공안차에 실려 어딘가로 갔는데, 내릴 때 보니까 북부시장을 지나고 있었다. 눈에 익은 국자가(局子街) 근처였다. 공안의 손에 끌려 허름하고 낡은 어느 건물의 3층으로 올라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곳은 연길 안전국의 탈북자 조사실이었다. 그곳에 갇혀 탈북과정을 소상히 적고 또 적었다. 조사를 담당하던 사람은 사나웠지만 가끔씩 들러 살펴보던 높은 사람은 올 때마다 밥을 먹었느냐고 물었고 직접 나가 식당에서 밥을 사오기도 했다.
조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의 어느날 점심 무렵이었다. 높은 사람이 와서 조사기록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편하게 농담도 해가며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다. 그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차라리 합법적으로 오가게 만들면 비법적으로 월경(越境)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며 혀를 끌끌 찼다. 세상에 제일 못된 장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얼음장사와 사람장사라고 덧붙였다. 그때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조사를 담당하던 사람이 문을 열자 대뜸,‘헹님에, 도시락 개꾸 왔소’라는 소리를 지르며 남자가 들어섰다.
갑봉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악한을 여기서 만나다니, 또다시 흑룡강성 농촌으로 팔려가는가 싶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숨이 컥컥 막혔다. 갑봉이가 들고 온 도시락 보자기를 풀며 잠시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고 수다를 떠는 것은 이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책상 위에 음식을 다 차려놓은 뒤에야 갑봉이가 나를 알아봤다.
“니, 니가 여게 무스그?”
살다 보면 때로는 악연도 도움이 되었다. 갑봉이의 도움으로 미향의 뼛가루를 도문의 늪지로 가서 두만강에 뿌렸다. 미향의 뼛가루는 두만강 위로 가뭇없이 날렸다. 늪지 위, 무산 가는 길 위에 아이들이 재재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게 아스라하게 보였다. 여울목을 뛰어가면 겨우 일분도 걸리지 않아 북조선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영혼을 담고 두만강은 말없이 흘렀다. 연길로 돌아와 이틀을 내리 잤다. 꿈도 없는 깊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니 한밤중이었다. 다음날, 갑봉이가 마련해준 여비를 갖고 연길을 미련없이 떠났다. 어디로 가게 될지는 나도 몰랐다.
깜빡 졸았던가?
와장창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나니 침대에 두었던 세숫대야와 찔레 화분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화분은 깨졌고, 흙과 섞인 물이 질펀하게 방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한동안 멍한 눈길로 난장판이 된 방바닥을 바라보기만 했다. 침대도 물에 젖어 축축했다. 목이 몹시 말랐다. 냉장고를 열어봤더니 맥주 세병과 먹다 남은 소주가 보였다. 맥주 한병과 반병 정도의 소주를 한꺼번에 바가지에 붓고 단숨에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음보다 찬 소맥 폭탄주가 들어가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다시 맥주 한병을 바가지에 붓고 마시다가 숨이 차서 식탁에 내려놓았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찔레꽃 붉게 피는 북쪽나라 내 고향……”을 되풀이해서 부르며 질질 짜다 크게 깔깔거리곤 했다. 바가지에 담긴 맥주를 간신히 마시고 다시 한병을 꺼내 콸콸 부었다. 문득 방바닥에 뿌리를 드러내고 누워 있는 찔레가 보였다.
그래 너도 취해 보라마.
찔레를 집어들었다. 손바닥이 따끔 아팠다. 반항하는 거지 너,라고 소리를 지르며 바가지 속의 맥주에다 찔레를 푹 담갔다. 거품이 출렁거렸다. 방바닥의 흙을 바가지에 퍼담고 침대로 기어올랐다. 베개를 가슴에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무스그 어쩌라고? 어쩌라는 게야!
미향이 이름으로 이모한테 보낼 돈과 엄마한테 보낼 돈을 중국의 브로커에게 송금했다. 이제 연길에서 그 돈을 찾은 브로커는 북조선의 남양으로 건너가 엄마를 만날 터였다. 엄마를 데리고 두만강변으로 몰래 나와서, 숨겨 가지고 간 휴대폰으로 내게 전화를 걸어 돈을 분명히 전달했음을 확인시킬 것이다. 백만원 중에서 삼십만원은 수수료로 떼더라도 나머지 칠십만원을 중국돈으로 바꿔 엄마 손에 건네주는 장면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수수료를 제하고 엄마는 내 몫으로 중국돈 삼만위안, 이모는 미향의 몫으로 만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돈을 부친 것이다. 엄마는 함흥으로 돌아가야 하니 앞으로 최소한 여섯달은 목소리를 듣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돈을 더 마련하고자 아득바득 애를 쓴 것이었다.
돈의 액수보다도 미향이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될 이모가 가여웠다. 이모 생각만 하면 너무 안쓰러워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둥거렸다. 어차피 통일이 되기 전에는 미향이를 만나지 못할 터이니 그렇게 믿다 그리움을 잔뜩 안고 돌아가시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돈으로 적어도 여섯달은 굶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앞으로도 미향이 이름으로 가끔씩 송금해서 가여운 이모를 달래줄 작정이었다. 그래야 미향이한테 진 빚도 갚는 셈이었다.
먼저 정착한 언니한테 북의 부모님께 송금하는 방법을 듣던 날,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대부분의 새터민들이 그악스럽게 돈을 모아 중국의 브로커를 통해 인편으로 가족한테 송금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어떤 남자는 중국을 거쳐 북으로 다시 들어가 살다 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럴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 통장으로 들어오는 정착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굶고 사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원을 나오면 생계비와 정착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생계비는 매달 생활비로 주는 돈이었고, 정착금은 임대주택 보증금 천만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천만원이 현금으로 지급되었다. 생계비로 입금되는 37만원으로는 생활을 꾸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기에 정착금으로 삼개월마다 백만원씩 나누어 보내주는 돈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옷도 입어야 했고, 휴대폰도 사야 했으며 텔레비전과 침대와 냉장고와 밥솥도 필요했다. 게다가 한국으로 오면서 진 빚이 당장 문제였다. 질 나쁜 브로커들은 잔금을 받겠다며 아예 정착금 통장을 빼앗아가서 깡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들이 북으로 송금까지 해주고 있었으니, 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면 무조건 잔금부터 갚아야 했다. 다행히 소개받은 브로커는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에 담겨 있는 찔레를 망연하게 바라보는데 문득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데, 밥을 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이고 라면을 끓여 식탁에 차리는 것 자체에도 역증이 솟았다. 그렇다고 혼자 나가서 사먹자니 청승맞아 싫었다. 침대 모서리에 기대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찔레와 바가지는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예쁜 화분을 사서 옮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노래방 사장의 번호가 화면에 떠 있었다. 벽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시 삼십분이었다. 진작 출근해 대기실에서 저녁을 먹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휴대폰에서 배터리를 빼버렸다. 부르고 싶지도 않은 노래를 불러야 하고 낯선 손님 앞에서 옷을 벗는 내가 너무 가여웠다. 적어도 한달은 푹 쉬고 싶었다. 그것이 가여운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래 뭐든 먹자. 먹고 싶어도 먹을 게 없어 굶어죽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먹을 수 있는데도 먹지 않고 마음이 어쩌고 저쩌고 따지는 것 자체가 커다란 죄였다. 벌떡 몸을 일으켜 모자를 꾹 눌러썼다. 김밥을 한줄 사먹고 빈 화분과 화초 영양제를 샀다. 영양제를 살 때, 잠시 머뭇거렸다. 함흥에서 봤던 부황든 어린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바가지에 담겨 있던 찔레를 화분에 옮겨 심고 영양제를 꽂았다. 찔레 뿌리가 노란 영양제를 방울방울 빨아들이는 상상을 하며 함흥의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제발 굶지 말기를, 무엇이든지 먹고 토실토실 살이 올라 어여쁜 꿈을 꾸기를. 이제 곧 찔레는 푸르게 살아날 터였다. 아니 반드시 살아나야만 했다. 솔직히 나는 저 찔레에 잎은 다 떨어지고 가시만 남을까봐 두려웠다.
“미안해요. 아직 준비가 덜 됐어요.”
박선교사가 보낸 남자가 집으로 찾아왔다. 잔금 삼백만원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지난번에 왔던 교회 집사는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다소곳하게 말했다. 말끔하게 양복을 입었고 선하게 생긴 눈빛을 가지고 있어 마음이 놓였다. 듣기로는 이 남자한테 잔금을 치를 탈북자들이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의 이 아파트에만 일곱명이라고 했다.
“장난쳐, 지금?”
그의 선하게 보이던 눈동자에 순식간에 독기가 서렸다. 나는 움찔 놀랐다. 주먹으로 한대 때릴 기세였다.
“통장이라도 가져와!”
숫제 명령이었다.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만일 엄마한테 돈을 송금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레 겁을 먹고 그 돈을 순순히 내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엄마는 함흥에서 남양까지 와서 그 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돈이 아니라 어쩌면 나와의 전화 한 통화에 간절히 목을 매고 있었다. 나도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 그리웠다.
“그건……”
나는 얼버무렸다.
“이런 개 같은 년이! 돈도 없다, 통장도 못 준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응? 내가 여기서 살까? 이게 아주 순 쌩으로 먹자고 드네?”
그가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커피잔이 넘어졌다. 주방 바닥으로 흐르는 커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행주를 가져와 닦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는 양복을 벗어 방바닥에 던지더니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앞이 캄캄했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는데 남자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켰다. 개그맨들과 가수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왁자하게 들렸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시간이 지루하게 흘러갔고 저녁이 되자 그는 중국집에서 볶음밥과 소주를 주문해서 먹었다. 그는 정말 갈 생각이 없는지 아예 바지를 벗고 본격적으로 침대를 차지했다. 양파를 씹은 것처럼 코가 매웠다.
도무지 함께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주방의 칼을 보면 그의 배를 쑤시고 싶어졌고, 찔레 화분을 보면 그의 머리를 내리치고 싶었고, 가위가 눈에 띄면 그의 눈을 찌르고 싶었다. 이러다간 살인을 저지르고 말지 싶어서 서둘러 나왔던 것이다. 밖에는 옅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발길 가는 대로 하릴없이 걸었다. 아파트단지 앞 과일가게에서 옆동의 성희가 조선족 남편의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으며 복숭아를 고르고 있었다. 중국에 있을 때 사이가 좋았는지 성희는 조선족 남편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하얗고 탐스러운 복숭아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는 성희가 부러웠다. 복숭아를 사들고 아파트로 돌아가는 성희 부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성희 남편은 남동공단에 취직해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었다. 덕택에 성희는 아이를 가졌다고 날마다 자랑이었다.
소래포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포구에 즐비한 횟집을 향해 몰려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치 긴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몽롱해졌다. 숨을 쉴 때마다 배가 고프던 적이 있었다. 아니 배가 고프다기보다도 꿈에 허기지던 시절이 있었다. 이미 정해진 운명 때문에 다른 꿈은 꾸기 어려웠던 그곳과 지금의 여기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서로 극과 극이었다. 휴전선이라든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물 안과 우물 밖은 전혀 다른 세상인 줄을 두만강 건너기 전에는 진정 몰랐다. 재춘오빠가 아니었다면 숨이 컥컥 막혀서 하루도 견디기 어려웠던 열아홉의 날들이 참으로 아득했다. 걷다 보니 노래방 근처였다. 날마다 오가던 길을 기억하고 있는 발이 미웠다. 이쪽으로는 결코 오고 싶지 않았는데, 2차를 나가는 탈북자 노래방 도우미란 직업에서 영원히 벗어나고 싶었는데…… 눈길이 노래방 간판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계단에서 쑥 올라왔다. 얼른 고개를 돌리고 반짝이는 포구 쪽으로 걸었다.
“이제 출근하세요?”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최였다. 술냄새가 솔솔 풍겼다. 슬쩍 피했지만 최는 얼른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몸을 돌렸다. 그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나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최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노골적으로 따돌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최를 따돌린 것은 나의 예의였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기에 다른 손님들과 똑같이 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최는 똑같은 손님으로 대해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투정을 받아줄 수는 있지만, 노래방 도우미란 직업을 때려치우기로 했기에 그러기는 싫었다. 나는 말없이 몸을 돌려 걸었다.
“뭐야? 뭔 말이라도 해야 될 거 아냐?”
최가 내 손목을 잡았다. 앙칼지게 최의 손길을 뿌리쳤다.
“꼭 해야 되나요? 여긴 노래방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말을 하라 마라 하는 거예요?”
하지만 속마음은‘무스그? 이런 쎄스케1 꺼지라 마!’라고 외치고 있었다. 최가 고개를 흔들며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비켜요, 가게!”
소래포구를 포기하고 아파트 쪽으로 걸었다. 북조선이나 중국에서처럼 비루하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죽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최에 대해 나쁜 감정은 없었다. 그의 속마음이야 어찌되었든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좋아하니 사귀자는 말을 해준 사람은 최였기에 고맙기는 했다.
아파트 문을 열었더니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서랍에서 통장과 도장을 꺼냈다. 잔액은 삼십만원 정도였고 앞으로 입금될 정착금은 오백만원이었다. 통장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이걸 맡기고 돈을 빌릴 사람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떠오르는 이름은 모두 탈북자들이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도 대개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안 입고 안 먹고 모은 정착금을 북조선의 가족에게 보내는 그 마음들이 너무 가여웠다. 언젠가 서로 모여 삼겹살을 먹고 노래방에 갔다가 모두 울어버린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굶어본 사람만이 굶는 사람의 그 간절하면서도 참담한 허기를 몸으로 알고 있다. 나는 남자를 깨워 통장을 내밀었다. 통장을 받자마자 그의 눈에서 순식간에 독기가 사라졌다.
전화가 오지 않았다.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진득하게 차올랐다. 생리통처럼 아랫배가 찢어질 듯 아팠다. 진통제를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국의 브로커한테 전화를 먼저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라도 북조선에 있을 때 전화를 해서 그가 곤란한 지경에 빠질까 조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온갖 나쁜 생각이 다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엄마와 이모가 보위부에 끌려가는 모습, 보낸 돈을 모두 빼앗기는 모습이 떠오르자 머리가 짜개질 듯 아팠다. 당장 중국 도문으로 가서 두만강을 건너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답답할 줄은 몰랐다. 그 브로커한테 돈을 보낸 다른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봤더니 그들도 멍청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휴대폰만 바라보며 물 한모금 넘기지 못한 채 이틀이 지나갔다. 액정화면의 안테나 갯수를 셌고, 배터리도 자주 갈았다. 그 이틀은 생지옥이었다. 사흘째 아침, 너도 나도 사기를 당한 것이 분명하다는 전화들이 오갔다. 온몸이 저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긋난 듯 아팠다. 기어이 예정도 아닌데 생리가 터졌다. 편도도 벌겋게 부어 열이 펄펄 났다. 딸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고 있을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침대에 누워 앓을 수도 없었다. 아무 방법도 없지만 성희한테 가서 통사정이라도 할 요량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눈을 뜨니 동네의 병원이었다. 어떻게 병원에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옆에 성희가 서 있었다. 성희의 말에 의하면 제 남편이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는데, 내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링거를 맞고 돌아와 성희가 끓여준 죽을 먹고 약기운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침대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다행히 머리는 거울처럼 맑았고 몸은 가뿐했다. 식은 죽을 데워 천천히 먹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갑봉이었다.
죽을 먹다 말고 일기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전의 그 기억이 분명하다면 일기장 어딘가에 갑봉이의 전화번호가 있을 터였다.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갑봉이가 나쁜 놈이기는 했지만 아주 악질은 아니었다. 마침내 미향이가 죽던 무렵의 일기에서 갑봉이의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즉시 갑봉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웨이.”
갑봉이의 목소리였다.
“갑봉 아저씨. 나, 충심인데요? 저 기억나세요?”
조심스레 물었다. 이마 위에서 진땀이 눈으로 굴러들어와 매웠고 아팠다.
“아, 그래! 기억남메. 으째 전화쳤음두?”
그동안의 사연을 말하려고 하는데 그만 목이 메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끄윽 끄윽 목을 타고 올라오는 울음을 어쩌지 못했다.
“이런 썩어질……”
갑봉이는 고맙게도 내가 다 울기를 기다려주었다. 울음이 가라앉자 나는 저간의 사정을 다 말했다.
“무스그!? 이런 쎄스케! …… 이름이 무스그? …… 알았음두. 발목 심줄으 따버려 앉은뱅이르 만들어주겠음두.”
갑봉이는 분노했다. 나는 남양의 이모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를 걱정했다. 곧 함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돈을 사기당해 어쩌냐며 하소연을 했다. 갑봉이는 당장 돈이 없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는 걱정해줘서 고맙다며 전화를 끊었다. 모르긴 몰라도 갑봉이의 성격으로 보아 도문 해관을 들락거리며 사기꾼의 주소를 찾아낼 터였다. 불 맞은 멧돼지처럼 식식거리며 뛰어다닐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전화를 끊고 한시간쯤 지나 갑봉이한테 전화가 왔다. 한국 국적이 필요한 조선족과 가짜 결혼을 하면 천만원을 준다는데 어떠냐고 다짜고짜 물어왔다. 나는 싫다고 대답했다.
“가짜 결혼인데 무스그함두?”
이어서 결혼하겠다면 지금 당장 사만위안을 만들어 남양으로 건너가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신길동에 살고 있는 누구도 탈북자인데 가짜 결혼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삼개월만 사는 척하면 출입국관리소에서도 더 살피지 않으니 당장 돈이 필요하다면 그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찔레 화분에 거꾸로 꽂힌 영양제 통은 텅 비어 있었다. 찔레도 나처럼 링거를 맞고 금방 몸을 일으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양에 도착해서 전화를 쳐달라고 대답했다. 갑봉이의 목소리가 환해졌다.
밤이 깊었다. 찔레 화분에 꽂힌 빈 영양제를 빼내고 새것으로 바꿔주었다. 그러곤 찔레를 쓰다듬으며 노래를 나직하게 불렀다. 예전에 내가 부르는‘찔레꽃’을 듣더니 최가 다른‘찔레꽃’도 있다며 가르쳐준 노래였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노래를 불러주자 찔레의 마른 잎에 조금씩 생기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함흥에서 음악학교 다닐 때 배웠던,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끌려간 찔레와 고려에 남은 동생 달래와 병든 아버지의 찔레꽃 전설이 한편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찔레 화분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찔레꽃이 무더기로 핀 길 위에서 엄마가 돼지밥을 가득 싣고 달구지를 끌고 오는 꿈을 꾸었다. 내가 달려가 그 품에 안겼지만 엄마는 냉정하게 모른 척했다. 일곱살쯤 되었을까? 어린 나는 엄마를 부르며 뛰어갔지만 아지랑이 속으로 달구지를 끌고 엄마는 사라졌다. 엄마를 찾아 온 함흥을 헤매다가 잠에서 깼다.
푸르스름한 새벽이 멀리 바다에서부터 오고 있었다. 침대 위에 있던 찔레 화분을 베란다에 내어놓았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와 아침이슬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새벽은 길지 않았고, 햇살이 찔레 화분 위에 이슬비처럼 뿌려졌다. 기분이 좀 좋아졌다. 오랜만에 간단하게 밥을 해먹었다. 설거지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갑봉이었다.
“사만위안이면 된다고 했음두?”
그때부터 갑봉이는 중계방송하듯이‘지금 돈을 받았다, 안전국 형님 차를 타고 도문으로 간다, 연길-도문간 고속도로를 탔다, 변경 해관에 도착해서 수속을 받는다’등을 전화로 알려왔다.
“지금 다리를 건너감두. 남양에 가자마자 곧추 가진 못할 것임두. 보위부 눈치도 있고, 무역하는 일꾼들한테 장마당 둘러본다고 무스그 좀 멕에야 하니, 알간?”
“예. 조심하세요.”
갑봉이는 스스로도 수완이 좋은 장사꾼이라고 했다. 청진이나 김책으로 다니며 무역을 했다고 하니,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믿을 수도 없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찌됐건 갑봉이한테 부탁을 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다림은 지루했고 서글펐다. 전화기만 바라보고 애를 태우며 두시간쯤 간신히 견디고 있는데 마침내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발신자 번호를 보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충심이네?”
기다리던 갑봉이가 아니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진숙 언니였다.
“예, 언니.”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오데 아파? 목소리가 왜 기래?”
나는 아니라고 했다. 진숙 언니는 곧 대학마다 특별전형이 시작되는데 준비는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얼른 대답을 않자 언제까지 노래방 도우미나 식당 종업원으로 일할 거냐며 꾸짖었다. 이제 스물일곱이니 아직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며 당장 서류를 꾸미라고 난리였다. 중국어를 아주 잘하니까 중국어학과나 중문학과를 졸업해서 학원강사를 해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겠냐며 나중에는 애원조로 타이르기까지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수중에 돈 한푼 없었고, 게다가 가짜 결혼까지 해야만 하는 몸이었다.
“인차 준비하라우. 시간은 항상 니 편이 아이니. 네게 차례질 그 어떤 것보다 대학을 먼저 가라우.”
나이 마흔에 아들 하나를 데리고 공부하는 억척어멈 진숙 언니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사실은 노래방에 나가지 않기로 작정하면서부터 대학에 입학할 준비를 할 참이었다. 중고로 컴퓨터를 하나 들여놓고 타자와 인터넷을 배우면서 그동안 쓰지 않았던 중국어를 슬슬 공부할 요량이었는데 그게 마구 어긋나고 있었다.
갑봉이가 남양에 들어간 지 네시간이 지나서야 전화가 왔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목소리를 되도록 쾌활하게 꾸몄다. 엄마는 밥을 잘 먹느냐고 자꾸만 물었다.
아부지 묏동 잘 쓰라마. (‘그까이 죽은 사람 뫼이 별거네? 산 사람이 무스그 살아야지.’) 엄마 나 대학 갈까? (‘무스그, 대학? 그거 졸업장 있으면 더 잘삼두?’) 잘 몰라. (‘높은 공부하고 사람답게 살라마. 그래도 밥은 굶지 말고.’) 엄마 인차 함흥으로 감두? (‘무스그라 해도 내 집이 젤 좋다마.’) 추석 때 남양으로 와, 목소리 듣게. (‘추석 때?’) 응. (‘그땐 우리 충심이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구마.’) 알았음두. 보여줄게 꼭 오란대두! (‘오냐, 내 새끼.’)
전화를 더 길게 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전화를 끊고 나니 멍해지며 온몸에 맥이 쭉 빠졌다. 잠시 침대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몰려오는 허탈감을 이기려 애썼다. 밥을 굶지 말라는 엄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끄응, 몸에 힘을 주었다.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뒤졌다. 한달 전쯤 친구들과 함께 구워먹고 남은 삼겹살을 찾아 굽다가 신 김치를 보시기째 엎어넣고 밥을 비볐다.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프라이팬을 놓았다. 다리 사이에 프라이팬을 넣고 수저 가득 밥을 떠서 먹었다. 엄마의 말대로 절대로 밥을 굶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밥을 먹다 말고 진숙 언니한테 전화를 걸어 내일 당장 만나자고 약속을 정했다. 수저 가득 비빔밥을 떠서 입 안으로 밀어넣으며 찔레꽃을 보았다. 찔레 잎사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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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나 연길에서 쓰는 말로 ‘정신병자, 미친 놈’이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