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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신자유주의, 바로 알고 대안 찾기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시장만능주의인가
김기원 金基元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저서 『경제학 포털』 『재벌개혁은 끝났는가』 『미군정기의 경제구조』 등이 있음. kwkim@knou.ac.kr
1.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한 엇갈린 평가
IMF사태를 맞은 지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은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의 새로운 틀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바닥이 보이던 외환보유고가 2,500억달러 정도로 늘어나 세계 5위가 되었고, 한때 9%에 육박했던 실업률도 3%대로 하락했으며, 기업회계나 금융감독 등과 관련해 선진적인 제도도 다소 갖추어졌다. 게다가 불법 대선자금의 공개로 정경유착도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러나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한다. 1987년 이후 개선되던 분배상태가 다시 악화되고 고용구조도 열악해졌다. 이러한 양극화 사태의 심각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 문제다. 또한 한미FTA에서 보듯이 범위와 속도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은 급속한 개방을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게 전개되었다. 신용불량자의 대량발생이나 부동산가격의 폭등 등 서민대중의 삶과 직결된 문제도 터져나왔다.
이런 복잡한 상황을 반영해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한편으로 보수언론, 한나라당, 보수지식인들은 김대중정권을 관치경제의 부활, 남미식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 등으로 비판하더니 노무현정권에는 노골적으로 반시장적 좌파라고 낙인찍었다. 그런가 하면 이와 정반대로 진보언론, 민주노동당, 진보지식인들은 두 정권에 신자유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길 좋아한다.1 이때 비판하는 측들은 왜 자신들과 정반대의 비판이 다른 편에서 제기되는지 따져보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비판들은 특정 정책을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정권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규정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은 이처럼 좌우에서 협공당하는 쌘드위치 신세다. 마치 모자이크 작품처럼 평자가 보는 각도, 즉 이데올로기에 따라 정부정책의 모양과 색깔이 달라지는 셈이다. 세계 선진국들을 늘어놓고 그 스펙트럼 상에서 보면 두 정권은 중도우파다. 하지만 중도우파 정권도 극우파가 보기에는 자신의 왼쪽에 위치하며, 좌파가 보기에는 자신의 오른쪽에 위치하기 마련이다. 또 사람들은 정권의 정책 중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정권의 성격을 극단으로 규정함으로써 자기 지지세력을 넓히려는 정략적 판단도 작용한다.
그런데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정책에 대한 평가의 엇갈림은 평자들의 이데올로기나 정략적 고려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두 정권이 처한 역사적 상황 자체가 바로 복잡한 평가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박정희시대의 개발독재에서 선진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놓여 있는데, 바로 이것이 극단적 논란의 기본배경이다.
1987년 6·10항쟁과 6·29선언을 통해 박정희 개발독재체제 중 정치적‘독재’체제가 허물어지고, 1997년 IMF사태를 통해 경제적‘개발’체제가 허물어져갔다. 그런데 개발독재체제가 이렇게 두 단계를 거쳐 허물어지고는 있지만 일거에 깔끔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개발독재의 요소가 뿌리깊게 잔존하며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이를 처리해가는 과도기 정권인 셈이다.
이런 과도기에는 변화가 격심하며 그에 대한 저항도 치열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과도기를 거쳐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사회는 단 하나의 모범답안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여러 유형이 경쟁하고 있다. 흔히 구분하는 영미형과 북유럽형은 서로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둘 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전자가 시장·효율성·경쟁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민주주의·공정성·연대를 더 중시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이 과도기는 이런 다양한 선진사회 중 어느 쪽으로 나아갈지 또는 선진사회들의 어떤 조합을 우리 스스로 창출할지를 둘러싸고 각 세력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시기다. 각 정권에 대한 극단적 평가들도 이런 투쟁의 한 표현이다. 여기에다 우리의 특수한 분단상황 탓에 통일한국을 만들어가는 방식에 대한 갈등도 추가된다.
2. 시장과 시장만능주의의 분별
진보세력 일각에서는‘선진사회’라는 방향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보수세력이 이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고, 또 그들이 양적 성장을 강조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는 북한이‘동무’란 말을 사용한다고 남한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선진사회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선진사회냐이다. 그리고 선진화의 개념이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민주화나 산업화에 비해 선진화는 다소 허술한 개념이다.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화와 산업화의 수준이 세계 일류급에 도달하는 것을 선진화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민주화가 단순히 정치적 민주화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민주화까지 포괄함은 당연하다. 문화수준의 고양도 선진화에 들어가야 할 내용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이런 선진화를 향한 과정에서 과거의‘개발’체제를 지양해 시장경제를 정상화하고 발전시키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시장경제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 좌파도 있겠지만, 적어도 현재의 역사발전 단계에서 경쟁에 의한 효율성을 가져다주는 시장의 긍정성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는 것과 시장에 대한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 사이에는 칼로 두부모 자르듯 분명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을 발전시킨다는 것이 과도하게 추진(overshooting)되어 시장만능주의로 나아갈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시장만능주의자의 주장과 달리 시장은 불완전하고 폭력적이기도 하다. 독점이나 분배악화, 경기불황 같은 문제가 그런 경우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발전에는 이를 시정하는 조치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다. 외환위기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공황에 직면한 우리 상황에서는 미국의 뉴딜정책처럼 시장을 규제하고 복지를 강화하는 등 시장의 폐해를 완화하는 조치의 도입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시장경제에 대한 이런 민주주의의 개입이 시장만능주의자에게는 시장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조치로 비치기 쉽다.
돌이켜보면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시장경제의 발전도, 시장의 폐해를 바로잡는 민주주의의 발전도 기대만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시장과 시장만능주의를 잘 구별하지 못했던 게 그 하나의 요인이다. 마찬가지로 정권 비판세력 역시 양자를 잘 구별하지 못했다. 보수세력은 정권이 시장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으려 하면 좌파로 몰아붙이고, 진보세력은 정권이 시장질서를 바로잡으려 하는 경우에도 시장만능주의로 몰아붙이는 일이 있었다. 재벌기업과 재벌총수를 분별하지 못한 것이 재벌문제 해결에 혼란을 초래했듯이, 시장과 시장만능주의를 분별하지 못한 것이 정권이나 정권 비판세력 모두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만능주의는 말 그대로 1원1표의 시장원리를 만능시하는 사상과 정책이다. 이는 자본의 이윤극대화를 제약하는 1인1표의 민주주의원리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고, 자본의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그 힘이 강화되었다. 그런데 시장만능주의, 즉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 발흥 초기의 구자유주의와 다른 점은 그것이 서구의 강력한 노조와 복지정책에 대한 자본의 반격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1987년 이후 노조, 특히 대기업노조가 강력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복지수준은 1997년 이전에는 변변찮았다. 게다가 우리는 개발독재에서 벗어나 공정한 시장질서를 수립해야 하는 구자유주의적 과제도 안고 있다. 서구와 다른 이런 우리 상황에 대한 분석 없이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은 각기 특정 측면만 부각해 좌파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서구의 개념을 무분별하게 차용한 셈이다.
3. 김대중정권의 경제정책
김대중정권의 경제정책은 크게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반기는 외환위기를 맞아 구조조정을 통해 해외빚을 갚기 급급했던 시기이고, 후반기는 2001년에 IMF빚을 모두 상환함에 따라 IMF 관리체제를 벗어나 정권이 구조조정보다는 경기부양에 더 주력했던 시기다. 먼저 전반기 김대중정권의 경제정책은 재벌·금융·공공·노동 4대 부문의 구조조정과 개방이라는 대외적 구조조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재벌 구조조정은 크게 세가지 범주로 구성된다. 과잉투자 해소, 기업지배구조 개혁, 재벌기업의 국민경제 지배체제 개혁이 그것이다. 재벌의 과잉투자 해소를 위해서는 빅딜, 워크아웃, 퇴출 조치를 실시하고 부채비율 축소를 요구했다. 기업지배구조 개혁과 관련해서는 소수주주권을 강화하고 사외이사제를 도입했다. 재벌의 국민경제 지배체제 개혁을 위해서는 벤처기업을 육성하고 재벌의 비서실 해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재벌 구조조정을 통해 일부 부실한 기업과 사업이 정리되고, 인력이 대폭 감축되고, 재무구조가 개선되고, 소수주주권이 강화되고, 상호채무보증이 해소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재벌의 금융지배는 제대로 손도 대지 못했다. 사외이사제가 과거에는 아예 열리지도 않던 이사회를 열게끔 하는 구실을 했지만 사외이사는 대개 들러리나 로비스트에 지나지 않았다. 비서실 해체도 비서실의 간판만 구조조정본부 따위로 바꿔 달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재벌이 국민경제를 지배하려고 구축한 정계·관계·학계·언론계·법조계와의 네트워크도 다소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 기본구조는 동요하지 않았다.
김대중정권이 추진한 이런 재벌 구조조정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빅딜 같은 조치는 전두환정권이 시행한 중화학투자 조정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개발독재 정책이다. 인력감축 과정에서는 비정규직이 대량 발생하는 시장만능주의 정책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벌개혁 과정은 재벌의 왕조적 독재체제와 정경유착이라는 전근대성을 타파하려는 것이었고, 이는 시장질서를 바로잡는 구자유주의에 속한다.
일각에서는 그나마 재벌개혁의 확실한 성과라 할 수 있는 소수주주권 강화를 시장만능주의와 주주자본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총수의 불법적 행위를 견제하는 소수주주권 강화가 시장만능주의의 표현일 수는 없다. 물론 일부 외국인 펀드가 주주총회에서 기업경영권에 시비를 걸어 막대한 차익을 거둔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소수주주권 강화와는 무관하게 외국자본에 함부로 문호를 개방한 결과이고, 동시에 재벌체제가 제대로 개혁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2
또 대우자동차처럼 부도난 기업의 인력감축까지 모두 시장만능주의라고 비난해서는 곤란하다. 부도기업에서 인력조정을 단행하는 것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시장원리의 기본이다. 이런 시장원리를 부정하는 것은 옛 소련과 동구권에서처럼 불필요한 인력을 계속 끌어안다가 기업도 망하고 나라경제도 망하는 길이다. 중요한 점은 그런 인력감축 과정을 합리적으로 시행하고 그렇게 감축된 인력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지, 인력감축 자체를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런 것이 시장과 시장만능주의의 분별이 필요한 경우다.
다음으로 금융 구조조정은 과거의 누적된 부실을 떨어내고 미래의 부실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위해서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기관 부실을 정리했고 후자를 위해서는 금융감독체계를 재정비했다. 금융기관의 부실정리 면에서는 우선 회생 불가능한 금융기관을 퇴출시켰는데, 그 결과 전체 금융기관의 4분의 1 이상이 정리되었다. 그리고 회생 가능한 금융기관에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자본을 충실화했다. 금융감독체계의 재정비 면에서는 금융감독위원회를 설립하고 BIS비율(위험자산 대비 자기자본비율) 등 각종 건전성 규제의 기준을 마련했다.
이러한 금융 구조조정 과정을 통해 금융자본의 과잉투자 완화, 금융기관 재무구조의 건전화,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 방지가 다소 진전되었다. 하지만 금융기관의 소유·지배·경영 구조는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재벌에서와 마찬가지로 금융기관의 사외이사는 들러리의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외국자본에 금융기관을 함부로 매각함으로써 일부 외국인 펀드가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두었다. 시세차익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외국자본의 선진적인 금융기법을 별반 전수받지도 못했으면서 그들이 구조조정기 시장의 불확실성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게 만든 셈이다.
금융 구조조정의 성격을 규정해보면 국가경제의 중추인 은행을 외국펀드에까지 매각한 것은 시장만능주의의 한 사례다. IMF의 요구에 의해 시행된 이자제한법 폐지와 고금리정책도 같은 성격이다. 하지만 BIS비율 등을 통한 건전성 규제의 강화는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를 막고자 한 것인데, 김대중정권을 비난한 진보세력의 일부는 이것까지 시장만능주의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규모가 큰 부실 금융기관들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회생시킨 것도 시장만능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만약 일부 서민대상 부실 금융기관들의 정리가 과도했다면 이를 시장만능주의에 포함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한편 공공부문은 재벌이나 금융기관과 달리 부실이 누적되어 도산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그리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인원감축이 단행되고, 일부 민영화가 추진된 정도였다. 케인즈 이론에 입각하자면 경제위기시에는 공공부문이 유휴인력을 끌어안아야 하는데도 거꾸로 인력을 감축한 것에는 시장만능주의적 요소가 들어 있다. 하지만 정부는 다른 한편에서 공공 일자리를 실업자대책으로 내놓기도 했으므로 일률적으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민영화의 경우에도 한국중공업 등 일부 거대기업이 매각되기는 했으나 다른 민영화된 기업은 소규모였다. 당시 한전 민영화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지만 시장만능주의 세력들이 요구하는 식의 민영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전 민영화는 노무현정권하에서 다시 도마에 올랐으나 결국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된 바 있다.
다음으로 노동부문의 구조조정을 검토해보자. 이는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의 두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로 노동시장 차원에서는 IMF의 요구에 따라 정리해고제를 조기 실시하고 파견근로제를 도입했다. 이는 1987년 이후 강력해진 노조에 대한 자본의 반격이란 점에서 전형적인 시장만능주의 정책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정부는 그 폐해를 줄이기 위해 고용보험제를 강화하고 공공지출 예산을 늘려 국민기초생활보장제 등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사회민주주의 정책도 채택했다.
그리고 정리해고제는 대기업노조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시행에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시장만능주의가 제대로 관철되었다고 하기 힘들다. 나아가 비정규직 중 파견근로자의 비중이 미미하므로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증대는 정부정책에 기인했다기보다 기업이 강력한 노조에 대응하고 수익성에 크게 민감해진 결과다.
우리 진보세력은 고용조정 같은 노동유연성 증대를 시장만능주의로 비난한다. 하지만 덴마크에서는 고용조정이 대단히 자유로운데, 그렇다고 시장만능주의라고 비난받지는 않는다. 다만 덴마크에서는 실업자에 대한 사회보장이 철저하고 재취업교육도 충실하다. 그러니까 고용조정 그 자체는 시장기능의 발전일 뿐, 반드시 시장만능주의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시장의 폐해를 시정하는 사회보장이 미비한 상태에서 고용조정이 무자비하게 시행될 때만 시장만능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노사관계 차원에서 김대중정권은 민주노총과 교원노조를 합법화하고 노조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등 개혁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해 노동시간 단축 등 몇가지 합의를 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실업자의 조합원 자격 인정 등 노사정위 합의사항을 정부가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금융기관 퇴출과 관련해 노사정위가 소외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이 내부 강경세력의 반발로 탈퇴하면서 노사정위의 위상은 추락해갔다.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정책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셈이다.
김대중정권에 의해 구조조정 대상으로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중요한 구조조정 내용에 포함되는 대외개방은, 외환자유화·무역자유화·자본자유화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IMF의 강력한 요구로 시행된 것인데, 시장만능주의로 비판받을 소지가 가장 큰 분야이다. 물론 대외개방은 대세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는 시장의 확대로서 시장만능주의적이지 않다. 또 보수세력이 정략적으로 제기한 국부유출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대외개방만을 근거로 한국경제의 중남미화를 운운하는 일부 진보세력에 동의할 수도 없다.
그러나 현실의 개방은 자본과 노동을 모두 포괄해 하나의 완전히 자유로운 경제권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노동을 제외하고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자본의 글로벌화에 대한 세계정부와 세계시민사회의 민주적 견제도 미비하다. 따라서 개방에서는 득실을 따지고 범위와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김대중정권은 달러 부족에 의한 외환위기의 충격 때문에 달러를 들고 오는 외국자본에 대한 일종의 우상숭배에 빠졌다. 그리하여 기업경영에는 별로 관심도 없는 외국계 펀드가 한국의 은행을 소유하고 주식시장을 쥐고 흔드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한편 김대중정권의 후반기는 구조조정이 일단락되면서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데 주력했던 시기다. 신용카드 남발을 방치하고 부동산 관련 규제를 완화하는 조치가 이때 취해진 것이다. 또 IMF의 철수로 정권의 경제정책 수행력이 약화된 반면, 구조조정을 마무리한 재벌이 다시 헤게모니를 회복하면서 개혁은 후퇴의 길을 걷는다. 출자총액제한제 완화와 금융계열사 의결권 허용이 그 대표적 사례다.
4. 노무현정권의 경제정책
노무현정권은 김대중정권에 비해 훨씬 더 강하게 그리고 임기 내내 보수세력으로부터는 좌파로, 진보세력으로부터는 시장만능주의로 공격받아왔다. 보수세력은 민주투사 출신의 성격이 강한 노무현정권에 대해 더 우려했고, 반대로 진보세력은 그만큼 기대가 컸던 탓에 실제 정책에 대해 더 실망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 김대중정권 때는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해 보수·진보세력 모두 상당기간 목청을 높이기 어렵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공격에 시달린 나머지 노대통령이 “그럼 내가 (형용모순인) 좌파 신자유주의란 말이냐”고 내뱉게 된 셈이다.
이런 종류의 공격은 자기중심적, 정략적 요소를 포함하며 과도기 정권이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수난이기도 하다. 게다가 노무현정권은 정치기반이 취약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함으로써‘좌파’나‘시장만능주의’라는 비판이 더욱 거세졌다. 정치기반의 취약성은 물론 정권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부적절한 언사나 대북송금 특검, 정당 분열로 일찍부터 대중적 지지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다만 노무현정권은 김대중정권과 달리 IMF같은 외부세력의‘뒷받침’도 없었고, 반면에 보수세력의 중심인 재계는 구조조정을 일단락하고 헤게모니를 회복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노무현정권은 삼성을 중심으로 하는 재계, 보수언론, 보수관료, 부시 치하의 미국이라는 보수세력들에 포위되어 있었다. 이런 제약조건을 정권측은 과대평가하고 진보세력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다 보수세력은‘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분노로 강력한 결속력을 발휘했지만, 진보세력은 중도파 노무현정권을 어떻게 견인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과 전술이 부재했다.
노무현정권은 분단개발독재에서 통일선진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김대중정권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라경제의 틀을 바꾸는 커다란 구조조정은 주로 김대중정권에서 입안·시행되었고, 노무현정권은 그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그때 다루어지지 않은 가계, 중소기업, 자영업의 구조조정을 과제로 부여받은 정도였다. 남북 경제협력도 김대중시대 햇볕정책의 단순한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런데도 김대중정권보다 더 심하게 좌우파의 협공을 받은 연유는 앞서 말한 정치적 판도의 차이 때문이다.
물론 노무현정권의 경제정책을 뜯어보면 시장만능주의나 좌파로 공격받을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특히 정권 말기에 추진한 한미FTA가 시장만능주의의 전형으로 커다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정권측에선‘개방이냐 쇄국이냐’하는 식으로 반대파의 한미FTA비판, 즉 시장만능주의 비판을 시장에 대한 거부로 매도하면서 협정을 추진했지만, 긍정적 효과는 불분명한 데 반해 부정적 효과는 만만찮다. 대통령이 처음에 목표로 내세웠던 써비스업 구조개혁은 기대할 게 없고, 개성공단 제품의 수출증진 효과도 넘어야 할 산이 첩첩인 형편이다. 반면에 투자자-국가소송제를 비롯해 농업의 피해, 의료비 증가 등 부정적 효과에 대해서는 정부가 그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보인다. 다만 한미FTA이전에는 노무현정권의 시장만능주의로는 해외펀드에 외환은행을 매각한 게 포함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노무현정권은 정부지출에 대한 보육 등 복지지출 비중을 집권 기간 20%에서 28% 정도로 늘리는 사회민주주의 정책도 시행했다. 하지만 보수세력이 노무현정권을 분배에 주력하는 좌파라고 비난해온 것에 견주어보면, 이런 복지지출 증대 이외에 양극화 해소를 위해 적극적으로 실시한 분배정책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요컨대 노무현정권이 시장만능주의나 좌파적 철학을 갖추고 그에 입각한 경제정책을 체계적으로 실시한 것은 아닌 셈이다.
노무현정권의 경제정책의 특징은 적극적인 좌파나 시장만능주의라기보다 오히려‘엉거주춤’또는‘갈팡질팡’이며, 서민대중의 삶에 대한 둔감함이다. 예컨대 신용불량자 문제는 엉거주춤하면서 찔끔찔끔 대책을 내놓기보다 단번에 획기적 정책을 시행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또 부동산 정책은 갈팡질팡하지 말았어야 했고, 이른바‘반값아파트’같은 서민주택정책도 한나라당이 떠들기 전에 진작 시행했어야 마땅하다. 이자제한법이나 영세자영업자 카드수수료 문제도 마찬가지로 좀더 일찍 해결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의도가 도덕적으로 선하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주변부 서민의 삶을 압박하는 전체주의 성격을 띤 성매매처벌법이나 노래방도우미처벌법을 시행했다가 반발에 놀라 단속을 완화했는데, 이는 서민대중을 위한 정권을 자처했으나 정작 그들의 구체적 경제현실에는 둔감했음을 보여준다.
재벌개혁이나 금융개혁과 관련해서는 한편으로 상속·증여세 포괄주의와 집단소송제를 실시해 시장질서를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법 대선자금을 앞장서 드러냄으로써 정경유착을 상당히 해소한 것은 큰 공적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초기의 카드대란에서 구래의 개발독재식 수법에 의존했고 금융관련법 개정에서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정권 말기에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빈껍데기로 만들어버리고 지주회사 규제도 완화해 재벌체제를 강화하는 개혁 역행조치를 시행하기도 했다.
조세정책에서는 보수세력의 압력하에 선거공약을 뒤집고 소득세율과 법인세율을 인하하는 등 부유층 편애정책을 취했다. 그런가 하면 부동산투기 진정책에선 그 반대로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의 종합부동산세를 신설했다. 이를 두고 민주노동당의 부유세와 성격이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대통령의 언급도 있었다. 김대중정권에서도 나타난 현상이지만 재벌정책, 금융정책, 조세정책 모두 개혁의 엑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는 형국이었다.
노동관련 정책도 갈팡질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권 초기에는 노사정위원회를 강화하고 대화와 타협의 선진적 노사관계를 구축하려는 모습이 엿보였다. 그러나 철도파업을 계기로 정부와 노조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노조의 경직된 자세나 일부 대기업노조의 부패가 정권의 노조기피증을 초래한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노사관계 개선을 포기하다시피 한 것도 정권의 참을성 부족과 무책임함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특히 중소기업 노동자나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 대처가 불충분했다. 중소기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중소기업 상생회의 같은 이벤트성 행사를 개최했을 뿐 그다지 실속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했다. 정부 차원에서 볼 때 중소기업과 그 노동자 문제는 세금과 복지정책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이벤트성 회의로 풀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즉 대기업에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두고 그 돈으로 교육·의료·주택 같은 문제를 기업복지가 아닌 사회복지로 해결함으로써 대·중소기업 노동자 사이의 실질적 격차를 완화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해법에 주목하지도 않았고, 이를 알았더라도 취약한 정치기반에서 실행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정권측은 중소기업 노동자 문제를 비롯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고민이 많았으며, 그 결과 비정규직의 차별과 남용을 완화하려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런 노력까지 무시할 필요는 없다. 진보세력 일각에서는 이 법률이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괴롭힌다고 비난한다. 물론 이랜드사태에서 보듯이 이 법률이 만족스런 해결책은 아니며, 이 법률로 인해 비정규직을 용역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비정규직이나 용역이나 그게 그것이므로 상황이 크게 더 나빠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우리은행, 현대자동차, 신세계의 경우에서 보듯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이끌어낸 긍정적 측면도 존재한다.
사실 비정규직 문제는 한편으로 임금체계를 연공급 위주에서 직무직능급 요소를 강화하는 쪽으로 바꾸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보장제도의 충실화를 바탕으로 정규직의 노동유연성을 확보해야 풀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개혁을 노조가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이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사회보장제도의 충실화를 추진할 정권의 등장 여부나 재계의 동의 여부도 큰 과제다. 다만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고 가능한 부분이다. 덧붙이자면 임금체계의 변화는 회사 퇴직연령을 늦춰 영세자영업자의 과잉공급 문제를 푸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경제정책도, 굳이 나누자면 그래도 개혁적 인사들이 구색 갖추기 차원에서나마 정권 내부에 자리잡고 동반성장을 내걸었던 전반기와, 2005년에 그들이 물러나고 관료들이 견제 없이 정책을 주무르게 된 후반기가 다르다. 한미FTA같은 시장만능주의 정책은 후반기에 나타났으며 재벌개혁의 후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노무현정권의 경제정책을 모두 싸잡아 시장만능주의로 비난할 수 없음은 앞의 정책분석에서 알 수 있는 바다.
재차 강조하지만 노무현정권의 경제정책에서는 엉거주춤, 갈팡질팡, 서민감각 부족이 오히려 더 두드러진다. 시장만능주의와 관련해서도 한때는 대통령이 “신자유주의는 대세니까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한다”고 했다가 다른 자리에서는 “시장이 점차 비대해져서 사람을 위한 시장이 아니라 시장을 위한 사람을 만들어낸다”면서‘시장의 독점적·독재적 지배’를 비판하기도 했다. 후자의 발언은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사실 대통령이 신자유주의라고 했을 때 그것이 시장을 의미하는지 시장만능주의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노무현정권을 단색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5. 시장만능주의와 시장만능주의 논란을 넘어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는 좌파와 시장만능주의라는 상반되는 평가가 공존한다. 개발독재에서 선진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에는 이러한 논란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며, 게다가 총체적 인식을 결여한 자기중심적 사고와 정략적 공세가 난무하는 우리 상황에서는 그러한 논란이 더욱 뜨거울 수밖에 없다. 중도우파 정권의 숙명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평가는 과학이라기보다 정권 타도를 부르짖는 선동에 가깝다. 황무지 같은 복지상황을 개선한다든가 전근대적 재벌체제를 규제한다고 해서 좌파로 규정한다면 선진국들은 모두 좌파 아니 극좌파다.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정권의 시장만능주의 때문에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1987년 이전보다 후퇴했다는 식의 주장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1987년 이후 실질임금의 상승과 직장내 인격적 차별 철폐, 각종 사회보장제도 도입이 다 헛것은 아니다. 지니계수나 노동분배율을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에는 물론 시장만능주의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시장질서를 바로잡는 구자유주의, 복지를 강화하는 사회민주주의, 구래의 개발독재가 혼재되어 있다. 이런 갖가지 흐름이 각축을 벌이면서 우리 나름의 선진사회를 지향해온 것이다. 서구에서는 중상주의 이후 구자유주의가 한참 지속된 다음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시장만능주의가 전개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일종의 중상주의 단계인 개발독재에서 구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시장만능주의가 한꺼번에 몰려들고 있다. 이 역시 한국경제의 압축적 발전을 나타낸다.
이 가운데서 어느 흐름이 지배적인가 따지는 일이 이론호사가들에게는 유의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지배적’이란 개념 자체가 모호할뿐더러 한가지 지배적 경향만 파악하는 데 그친다면 정권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이해하기 힘들다. 나아가 우리의 현실을 한걸음이라도 진전시키려는 입장에서는 부정적 요소를 최대한 억제하고 긍정적 요소를 최대한 발전시키는 일이 지배적 요소를 확정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범람하면서 시장원리에 대한 과도한 부정이 횡행하는 것도 우려스러운 바다. 물론 시장의 불완전성과 폭력성을 시정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시장만능주의를 벗어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병행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경쟁에 의한 효율이라는 시장이 지닌 긍정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더구나 시장원리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재벌체제 같은 전근대성을 탈근대성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야 시장만능주의와 아울러 다분히 비생산적인 시장만능주의 논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라질 수 있다. 다만 그 평가에서는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남북관계도 아울러 고려되어야 한다. 경제의 경우에도 글로벌화라는 세계여건, 과거 정권의 유산, 국내 각 세력집단의 움직임을 고려하면서 정책의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도덕적 비판이 중요한 게 아니다. 가능했던 대안이 무엇인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이것이 바람직한 선진사회상이라는 큰 방향성과 눈앞의 구체적 실천을 결합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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