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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인터뷰
한국문학은 살아 있다
소설가 황석영과의 대화
심진경 沈眞卿
문학평론가. 저서로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있음.
황석영 黃晳暎
소설가. 장편소설 『장길산』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바리데기』, 소설집 『객지』 등이 있음.
‘한국문학의 신화’로 불리는 황석영 선생과의 인터뷰는 사실 나에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와 나는 여러가지 면에서 달랐는데, 우선 세대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며 무엇보다도 성(sex)이 달랐다. 아마도 이러한 다른 점 때문에 내가 그와의‘도전인터뷰’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같은 이유로 그에게‘도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직접 만나본 그는 생각보다 젊고 유쾌하고 또 진지했다. 그런 모습은 그에 대한 공격준비로 잔뜩 긴장한 나의 의지를 한풀 꺾었고, 자신을‘여리디여린 사슴’에 비유하면서 권위적인 마초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나의 모종의 의지는 두풀 이상 꺾였다. 그는 나의 평론가다운 딱딱하고 다소 공격적인 질문을 소설가다운 입담으로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서 쫙쫙 늘려놓았다. 그렇게 가지를 치기도 하고 샛길로 빠지다가도 다시 중심으로 치고 들어오는 기예에 가까운 그의 얘기에 넋을 빼앗기다가 결국 인터뷰는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인터뷰 내내 입은 다물고 귀만 열어둔 셈이다. 그러니 도전이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의 원래 생각과 계획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이 인터뷰는, 즐거웠다.
자발적으로 난민 되기
심진경 이번에 장편소설 『바리데기』를 출간하셨는데, 독자들한테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하네요. 전작들도 그랬지만 특히 『바리데기』는 선생님의 해외체류 경험이 녹아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유랑생활이 처음엔 어쩔 수 없이 시작된 것이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선생님께서 자발적으로 디아스포라를 실천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심청』과 『바리데기』라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출현 또한 최근까지의 빠리, 런던 체류 경험을 포함한 선생님의 탈국적 삶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디아스포라’란 무엇인지요. 탈국적 삶을 선택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요.
황석영 먼저 용어를 정리합시다. 난 그‘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애매해서 싫어요. 난민, 이주, 이렇게 하면 정확해질 것을 굳이 유대인이 어찌어찌 됐는데 해가며 디아스포라라는 말로 애매모호하게 흐리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신식민지 하면 개념이 더욱 정확해질 텐데 탈식민지라고 해서 흐리고…… 아마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쪽에서 연구비도 주고 하니 그것과 타협할 수밖에 없겠지요. 주로 미국 쪽에 그런 경향이 왕성한데요, 그런 한계 안에서 학자들 스스로 애매모호하게 흐리고 가는 거죠. 그래서 그냥 난민 아니면 이주, 이렇게 구체화하는 게 좋아요.
팔자인지 업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연히 그렇게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그런 길을 찾아가기도 했어요. 이를테면 70년대에 『장길산』을 쓰면서, 당시에는 전위냐 현장이냐 하는 논쟁도 있었지만, 나는 물론 작가니까 지금도 벽지나 다름없는 해남으로 내려가버렸거든요. 전통적인 농촌을 모른다는 약점을 스스로 보완하려는 뜻도 있었겠지요.
해외체류 경험을 얘기한다면 첫번째가 베트남입니다. 그때는 한반도 남쪽에서 외국에 가보기가 힘들었어요. 어느 정도냐면 내가 고등학생 때 어떤 사람이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에 15일 다녀왔다고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 갔다온 얘기를 강연하더라고요. 베트남이 최초로 바깥에 나가본 세상인데, 그게 청년기에 큰 영향을 주었겠지요.
얘기를 두서없이 하게 되는데 제게 몇번의 변화의 계기가 있어요. 이를테면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상계』 신인상을 받고 나서 8년 뒤에 「탑」이라는 단편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는데, 그사이에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고 엄청나게 많이 썼어요. 잡문을 발표하기도 하고. 이게 재고품으로 쌓여 있다가 나중에 급해지면 그것도 고쳐서 내놓곤 했으니까요. 김현이 내 2년 선배인데 한번은 그랬지요. “야, 「객지」를 쓴 사람이 어떻게 느닷없이 「가화(假花)」 같은 걸 쓰냐?” 그건 이십대 초반에 썼던 것이죠. 아주 탐미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내면을 찾아 헤매는 그런 기간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베트남에서 완전히 변해서 돌아오지요.
그때 사회와의 접점을 찾기 시작하는데 베트남에서 돌아와 한참 고생했어요. 자다가 일어나서 포복을 하기도 하고, 동생 머리를 화병으로 내리쳐서 스무 바늘이나 꿰매기도 했지요. 어머니가 목사를 불러다가 안수기도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소설을 써야겠다고 하고 있는데 바로 그 무렵에 전태일(全泰壹)이 평화시장에서 분신을 합니다. 사실 베트남전쟁과 전태일이 만나서 「객지」를 이룬 셈이죠.
그다음에 광주에 내려가서 광주항쟁을 겪게 된 일도 중요했는데, 거기서 진작에 알게 된 게 있지요. 작가에게 자유란 뭔가? 광주에서 비겁하게 살아남은 데 대한 중압감도 있었겠지만 그후에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괴롭혔습니까? 사실 그때 좌절하고 때려치웠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두가지가 나를 지탱시켰어요. 하나는 『장길산』을 끝내겠다는 소망이었고 하나는 문화운동이었어요. 그래서 일상적으로는 연재소설을 쓰면서 인형극이라든가 남사당놀이라든가 탈춤 판소리 같은 전통연희의 원형들을 현장 마당극에 접목하는 형식실험을 많이 했지요. 그때 농촌과 노동 현장에서 50여편 이상의 대본을 공동창작으로 썼을 거요. 그 두가지 일감이 작가로서의 자기를 지킬 수 있었던 버팀목이 되어주었지요. 그러다가 광주 이후 북(北)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도 타자가 아니라 또 다른 자기라는 생각으로 방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남과 북이라는 분단이 주는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앞으로 문학도 시원스럽게 해내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서본 것은 작가로서 귀중한 체험이었어요.
바깥에 서서 안을 그리워하는 경계인
내게 자유란 오래전부터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살아온 인생체험 자체라고 해야 될 겁니다. 어려서부터 전학 많이 다니고 노동자 구역의 공장지대에서 혼자 놀고 사춘기 때는 퇴학 맞고…… 쫓겨났다고 생각하면서 중심부에 안 들어가는 거죠. 중심부에 들어가면 내가 못 견디거든요. 그러니 늘 바깥에 있고, 바깥에 있으면서 저 안을 그리워하고. 어떤 친구가 자칭 경계인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경계인이에요. 늘 소속되지 않은 자의 그런 자유와 억압에 대한 긴장감이 있어요.
심진경 중심부에 들어가면 못 견디면서도 바깥에서는 저 안을 그리워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장 권위있는 문단의 어른이면서도 한반도라는 자기 권역 내에 안주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기 몸을 바깥으로 밀고 나가려는 노력이 선생님의 문학적 동력이지 않았나 싶네요. 그러면서도 바깥에서 한반도 안을 들여다보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으시고……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세계라는 원심력에 이끌리면서도 한반도라는 구심력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긴장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이 두번째 장기 해외체류였죠? 첫번째 해외체류는 방북 이후 귀국하지 못한 채 미국과 베를린을 떠돌아다니실 때였는데, 그 무렵은 어땠나요?
황석영 아까 시대마다 자기의 변화과정을 얘기했지만,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허물어진 장벽 사이로 몰려나온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환호하고 서로 껴안고 노래 부르고 그러는데, 나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아름다운 개인’을 발견하게 되죠. 그때 세계는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과 지금까지의 리얼리즘적 기획이나 산문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창작노트가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표어처럼 스스로 언명했는데요,‘현실주의적 서사를 우리 형식에 담는다’고 했지요. 여태까지의 산문의 형식을 해체해버리겠다는 과감한 표현도 썼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그 속에서 정말 치열한 일상과 대면하죠. 황아무개는 모험에 강하고 위험한 걸 잘 견디고 재밌어하거든.(웃음) 근데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게 미치는 거거든요. 독방 안에서 다섯해 동안 일상을 배우게 되는데 그때 나름대로의 내공이 쌓인 것 같아요.
하여튼 독일 체류시절은 정말 외로웠어요. 아주 절친했던 이들도 베를린에 왔다가 겨우 전화통화나 하고 지나갈 정도였지요. 나를 만나면 큰일 나니까. 어느 국가나 사회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결정된 망명자도 아니고, 지명수배 기간을 베를린과 뉴욕에서 5년 가까이 보냈는데 정말 외롭더군요. 그때 알았어요. 나는 남도 북도 아니고 국가의 구성원도 아니다. 그때 국가로부터 왕따당했다는 실감과 함께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접어버린 것 같아요.
그러고는 사회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건 물론 과거의 기억들을 정리한 것들이지만…… 다시 세계를 확인하고 싶어졌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냉전 해체와 세계사적 변화가 막 시작됐는데 당시에는 쫓겨난 자로서 자유스럽지 않은 시절에 서구를 봤다면, 지금은 어떨까? 반드시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싶었죠. 그럴 뿐만 아니라 심리극 용어에‘역할 바꾸기’라고 있지요? 또 자기 거처를 떠나서 바라보기를‘거리감’이라고도 얘기하는데, 지금 서구 작가들 중에 내 친구들을 보면 거의 서로가 도시를 바꿔서 살아요. 예를 들어 베를린에 살던 작가는 로마에 가 있고, 런던에 살던 작가는 그리스에 가 있고, 빠리에 살던 작가는 남미에 가 있고, 뉴욕에 살던 작가는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이렇게 거처를 바꾸어 살지요. 근데 이게 아주 신선한 게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가면 아무도 자기를 모르거든. 말하자면 스스로가 낯선 곳에서 타인이 되는 창조적 긴장이 생겨나지요. 또한 큰일이 벌어지는 서구의 대도시에 머물기 때문에, 뭐랄까 시대정신이 물결쳐 지나가는 것을 포착할 수가 있어요. 잘 보이지요.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결국 동기는 비슷합니다. 친구 르끌레지오(Le Clézio)한테 너는 왜 빠리를 싫어하냐 했더니 자기는 빠리에 가 있으면 오히려 유럽이 안 보인대요. 오지에 가야 유럽이 잘 보인다는 거예요.
작가의 조국은 모국어
심진경 달리 보면 선생님의 해외 망명시절은 그야말로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에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방북 이후 남과 북 모두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선생님 말씀처럼 한반도 상황을 아주 리얼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황석영 망명시절에 북과 남을 둘다 벗어났는데, 못 견디겠더군요. 내가 당시에 정신적으로 국적이 없었다는 건 뒤집어 얘기하면 나는 대한민국 사람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도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르끌레지오가 한 수 가르쳐 준 말이 있었는데 나도 진작에 한 수 보탠 것이 있어서 맞교환하기로 했어요. 즉 작가라는 존재는‘민족이나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다. 작가의 조국은 모국어이니까’라는 근사한 말이었지요.
이런 일화가 있어요. 베를린 체류시절, 허리에 디스크가 와서 윤이상(尹伊桑) 선생의 권유로 북한에 들어가 5개월 이상 물리치료를 받았거든. 그래서 김일성 주석을 여러번 만나게 됩니다. 내가 평소에 재미있는 얘기를 좀 할 줄 알잖아요.(웃음) 말년의 그분이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맨날 앉아 있다가 외교사절 오면 사진 한번 찍고 들어와서 텔레비전 드라마 보고…… 내가 가면 말동무가 되니까 좋아하고. 이 양반이 어느날 그러는 거예요. “황작가는 미국에 간다고 하는데, 컁구단(갱단)도 많다는데 미국엔 왜 가나? 나하구 살디.” 그러면서 민촌(民村) 이기영(李箕永) 선생 얘기를 꺼내는데, “내가 벽초(碧初) 선생한테 도와달라구 부탁했더니 벽초 선생은 당에 들어와서 우리를 많이 도와주셨디. 민촌 선생한테도 도와달래니까 그저 글만 쓰갔대. 섭섭하지만 글만 쓰겠다니 어떡하겠나? 그래서‘선생님, 내가 뭘 도와드리면 되갔습네까?’했더니 과수원이나 하나 달래. 기래서 알아보라구 했디. 기랬더니 저 순안 가는 길에 복숭아 과수원이 한 3천평이 있다구 기래. 민촌 선생이 거기에 가서 글 쓰셨디. 근데 1년 만에 농사를 지어왔댔는데, 문인들이 참 게으르긴 게으르더만……”“왜요?” 물었더니 “복숭아를 한 광주리 따왔는데 절반이 썩어서.” 그러는 거예요.(웃음)
그 얘기의 요지가 뭐냐면 집필을 하려면 그냥 여기에서 살지 왜 가려고 하냐는 거지요. 그래서 측근들이 전부 눈치를 챈 거죠. 황아무개를 잡아놔야겠구나. 그래서는 여권이고 뭐고 다 숨겨놓고 못 나가게 하는 거예요. 안되겠더라고…… 내가 북한의 주요 간부에게 얘기했지요. 내가 보기에는 월북자나 월남자는 결국은 양측에서 분리주의에 종사하게 된다. 나는 내 문학으로 보더라도 차라리 붓을 꺾을지언정 결단코 분리주의를 안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북에 남으면 결국은‘식객’아닌가? 나와 내 문학은 남한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내가 내 독자들에게 돌아가야 통일에 보탬이 되지 여기서 식객이나 하고 있으면 무슨 보탬이 되겠냐? 나는 나가겠다, 그랬더니 “그건 아우님 말이 맞아. 내가 토론하갔시요” 그래서 겨우 나오게 됐어요. 그 얘기를 나중에 최원식 교수에게 했더니 토끼가 용궁 갔다왔다고 하는데,(웃음) 여하튼 그때 긴 시간 있는 동안 남한 군사독재 시절에 못지않은 북한의 경직된 국가주의를 봤어요. 베를린에 있는 동안에, 아까 탈국가 얘기도 했지만, 그때 일단 아주 냉정해졌어요. 냉정해지면서 스스로 어느 이데올로기로부터도 놓여났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심진경 재미있는 얘기네요. 바깥에서의 시선이 한반도의 상황을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선생님께서 전(傳)이나 무가(巫歌), 굿 같은 전통적인 서사양식을 가져와서 소설창작에 접목하는 작업은 바깥의 시선으로 한반도의 양식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비록 그런 서사양식이 한반도 내에서는 익숙한 것일지라도‘세계 속의 한반도’라는 관점에서는 새롭게 구성되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그런 형식이나 내용이‘세계 속의 나’라는 관점에서는 새로울 수 있을지 몰라도 한반도에서 쭉 살고 있는 저에게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낯익고 손쉬운 방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세계 속의 나’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전유된 전통적 서사양식이 의도와는 다르게 한반도에 대한 익숙한 클리셰를 반복할 우려도 있을 것 같아요. 예컨대 식민지 조선이 제국 일본의 잡지에 소개될 때 물레방아라든가 한복 입은 여인네 등 몇가지 상투적 이미지로만 그려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위험도 있지 않을까요?
황석영 내가 감옥에서 나오면서 했던 인터뷰에서도 밝혔는데, 구한말의‘동도서기(東道西器)’를‘서도동기(西道東器)’로 바꾸어 생각하자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에서도 엿볼 수가 있겠네요. 김지하(金芝河)는 이를 다시 동도동기(東道東器)라는 말로 바꾸었지만. 여기서 물론 내가 생각하는 서사나 이제까지의 작품이 일제 치하의 향토주의나 검열하의 중국 현대문학의 한 분야처럼 민속주의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황아무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으로 독법에 차질이 없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대에 대학가에서 탈춤이나 농악 공연을 하면 그것 자체로 불온한 것이었지요. 이미 당시의 대학가는 서구 교육의 전당이었고 서구적 소비문화의 최일선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이십여년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아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리는 모두 현대 서구인입니다. 심선생에게는 익숙하고 안이하게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 이문구(李文求)의 소설을 대학에서 읽혔더니‘오히려 포스트모던’하게 받아들이더라는 누군가의 농담이 생각나는군요. 『돈 끼호떼』가 요즈음 새삼 기억되는 것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되던 당시에 고전을 형식적으로 패러디했던 관점이 획기적이었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하나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서구인들이 자기들 삶의 방법대로 해가지고 우리에게 내민 것을 근대문학이 들어오면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받아먹었지요. 서구에서 작가간담회 행사엘 가보면 사람들이 객석에서 다리 꼬고 앉아서 “당신은 서구 어떤 작가의 영향을 받았냐?”고 묻는데 이건 정말 건방진 거요. 그러면 나는 “하도 오래돼서 생각이 안 난다”고 합니다.(웃음) 우리 동료작가들이 외국에 나가면 무수히 당하는 질문들 중 하나입니다. 그렇듯이 한국은 언어와 문화가 마이너리틴데 이걸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까요? 전혀 예측 못하는 방향으로, 저들이 여태까지 고수해왔던 소설적 서술이나 방법론, 이런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자기 스타일이지요.
내가 보기에는 동아시아 작가들 대부분이 이른바‘대가’의 문턱에 못 가고 그친 사람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서구 근대문학은 스스로가 근대를 이루어왔던 당사자들이고 우리는 수동적으로 받았으니까. 도스또옙스끼나 발자끄를 얘기하면서 그런 정도의 작가가 누가 있냐 하고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면 “글쎄, 루 쉰(魯迅)은 문턱이고, 소오세끼(夏目漱石) 역시 문턱이고 타니자끼(谷埼潤一郞)도 그렇고……” 계속 이래요. 서사의 내용도 그렇지만 그것에 걸맞게 서사의 형식, 그것을 엮어내는 방법론, 이런 걸 잘 형성해내면 내 문학이 또다른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지요. 그게 징역에서 풀려나올 때 얘긴데, 물론 나의 이런 프로젝트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출발을 했는데 느낌이 괜찮은 것 같아요.
시적 서사로서의 『바리데기』
심진경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최근에 몇몇 글들에서 경장편이 세계적 추세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세계적인 문단의 흐름에서 파악해야 할 것 같네요. 그래서인지 『바리데기』는 서사공간의 이동, 시간 진행, 수많은 등장인물 등 그 스케일 면에서 대하소설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경장편 분량입니다. 그 전작인 『심청』만 하더라도 상당한 분량인데, 서사규모 면에서 『심청』 못지않은 『바리데기』는 『심청』의 3분의 1도 안되는, 말 그대로 경장편으로 꾸리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분량이 적은 탓인지 초반 바리의 북쪽 생활에 비해 중국과 영국에서의 생활이 상대적으로 소략하다는 인상을 주고, 또 탈북 이후 만난 인물들 또한 충분하게 성격화되지 못한 것 같아요. 아무리 경장편이 세계적 추세라 해도, 이런 규모의 서사라면 그 추세를 거부했어야 한 것은 아닌가 싶네요.
황석영 ‘경장편’이라는 말 역시 한국의 저널리즘이 만들어낸 것인데 나는 요즈음‘시적 서사’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 있습니다. 소위‘경장편’이라는 게 현대의 생활패턴이나 주말문화, 이런 데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또다른 측면이 있어요. 우리는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십여권짜리‘대하소설’을 앞다투어 써내던 시대였습니다. 이른바 19세기식 리얼리즘의 시대였지요. 나는 현대세계의 소비시장이 기나긴 서사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또 한편으로는 시(詩)가 출판시장에서 사라지고 있지요. 이제는 서구 어디를 가든 서점에 시집이 꽂혀 있는 나라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좀 특별하지만요. 시는 이미 마니아들의 세계로 자폐되었습니다. 수십부 또는 수백부를 대학이나 연구소, 재단 등의 후원을 받아 팸플릿처럼 찍어 동호인들끼리 돌려가며 읽는 지경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나 시적 메타포나 은유 또는 서정적 시정(詩情)은 광고카피라든가 시적인 영상의 이미지로 대체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시적 이미지의 홍수라고나 할까요.
과거의 서술은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려 집 안과 거실로 들어가는 데 수십페이지가 들었어요. 정원의 돌과 나무에 관해서, 또는 집 안의 불빛과 분위기, 대문의 모습, 현관과 손님을 맞는 하인의 표정 복장 얼굴 생김새, 그리고 마호가니 또는 보르네오 또는 아프리카 원목으로 만든 온갖 가구들, 책상 위의 문방구와 서재에 앉은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이런 식으로 수십권이 씌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테면 영화는 렌즈 안에 들어온 것만 보여줄 뿐 다른 방식의 서술로 줄거리를 이어줍니다. 디테일을 다 사용하지 않고 장면과 장면을 배치하지요. 이를 몽따주라고도 하고 미장쎈이라고도 하고, 언뜻 비치는 작은 소품 하나로 복선을 준비해놓기도 합니다. 앞의 길고 잡다한 서술을 피사체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함축해야 하는 거지요.
나는 우리가 청년기 때 나누던 얘기를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도 시적인 긴장을 유지하는 그런 형식이 없을까 하는 것이지요. 서구문학사에 서사시 또는 산문시라는 장르가 있지만 그건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어떤 친구가 “시+소설, 즉‘시설(詩說)’이라고 하면 안되겠느냐” 하더니 자비로 출판을 하고는 망해버렸지요. 김지하는 풍자적으로‘대설(大說)’이라는 말을 썼지요. 제 표현으로는‘시적 서사’라고 하는데, 이건 오히려 과거의 소설적인 세계라기보다는 연희대본이나 씨나리오에 가깝다고 하겠지요.
심진경 『장길산』 같은 대하장편소설을 쓰신 선생님께서 시적 서사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니,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기갱신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시적 서사라는 새로운 양식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속시가의 주인공인 영매‘바리데기’를 이민과 이주가 빈번한 오늘날의 현실을 대변하는 인물로 변모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바리’는 영적 능력을 타고난 신이(神異)한 존재이면서도 심층적이기보다는 표층적이고, 죽음보다는 삶에 더 가까운 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어요. 그런데 탈북과 난민의 현실을 보여주는 리얼한 인물이면서도 바리데기라는 신화적 캐릭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설에서 바리를 통해 그려지는 현실의 문제가 다소 추상화된 것은 아닌가 싶어요.
나아가 그것은 시적 서사라는 다소 모호한 양식적 추구와도 관련되는 것 같아요. 오히려 여성무가인 「바리데기」를 현실 속에서 완전히 해체해서 소설적으로 재구성하셨더라면 더 구체적이고 실감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예컨대 김혜순(金惠順) 시인은 바리데기를 현실에서 자신의 시적 영토를 갖지 못해 유령의 목소리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성시인의 또다른 이름으로 해석하면서, 신화가 갖고 있는 풍부한 상징성을 여성적·시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바리데기」를 여성시라는 장르로 끝까지 밀고 갔다고 할까요? 선생님의 『바리데기』도 시적 서사라는 애매한 이름에 붙들리기보다는 차라리 소설이라는 장르로 완전히 밀어붙였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황석영 내가 19세기의‘심청’과 21세기의‘바리데기’를 연이어 쓴 것은 두 시대에 세계체제의 재편성이 일어난 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이고 신자유주의가 신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인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연전에 스코틀랜드의 캐넌게이트(Canongate)라는 출판사가 전세계의 작가들에게‘신화를 소설로 쓰기’를 제안한‘세계신화총서’씨리즈가 있어요. 그러나 그쪽 기획은 신화를 그대로 놓고 쓰자는 것이고 내 의도는 바로 당대 현실과의 연관 아래서 신화를 다시 보겠다는 것이었지요. 출판사측의 의도와는 달리 주요 작가들이 많이 빠져나가고 나도 기왕에 생각했던 바와 달라서 빠졌던 겁니다. 신화나 설화 민담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던 것은 90년대에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지난 세기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모든 인문·사회과학적인 체계와 사상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사람이 지은 짓들이 모두 불확실하고 예측되지 않으니까 문명의 대안을 생각하면서 인류의 원초적인 생각들을 살펴보려는 것 같아요. 나는 그냥 단순한 신화 탐구는 환원주의로 보았습니다.‘바리데기’를 국가와 국경이 없던 시대의 이주의 전형으로 보면서도 주인공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주요한 점은 다른 데 있다고 보았어요.
「바리데기」라는 서사무가가 문화침탈이 빈번했던 한반도 같은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구비로 전승됐기 때문이에요. 또 그랬기 때문에 수천년간 살아남은 것이기도 하구요. 모든 얘기꾼들은 입말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요. 그래서 나는 형식적인 차원에서 구비전승됐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둡니다. 또 내가 『심청』이나 『바리데기』에서 쓴 것은 여성해방운동을 하려던 게 아니라 당대 현실을 반영한 것이지요. 여성이든 남성이든‘고통받은 고통의 치유자’로서의 바리에 주목한 것입니다. 책 뒤의 대담에도 나오지만 세계체제 이후 적응하지 못한, 버림받은 수많은 나라의 백성들의 얼굴이‘바리’입니다.
그리고 나는 심층과 표층, 죽음과 삶을 갈라서 얘기한 게 아니에요. 죽음과 삶, 현실과 비현실, 이게 다같이 공유되어 있는 거예요. 박민규(朴玟奎)란 작가가 최근에 젊은 작가들끼리 좌담하면서 근사한 말을 했더라고. 소설은 물질이다…… 이게 근사한 말이지요. 내가 최근에 리옹에 가서 얘기를 하는데 어떤 프랑스 여성작가가…… 인기 절정의 여성작가래요. 몇십만부가 팔리고 하는데 맨날 자기 사생활을 작품으로 쓰고 그런데요. 누가 “글을 어떻게 씁니까?” 물었더니 작가가 하는 말이 내면이 피투성이가 되고 어쩌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나는 뭐라고 했냐면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그리고 궁둥이로 쓴다.” 그건 뭐냐면 소설창작은 8, 90퍼센트가 노동이 결정하는 거예요. 우선 오래 앉아 있어야 되거든. 프로 작가는 글이 안 나와도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해요. 안 나오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난 글쓰는 행위를 물질적 행위로 보고, 세상에 표출된 것도 그 물질의 부분으로 봅니다. 요새는 작가들이 왜 그렇게 엄살이 심한지 모르겠어요. 하늘에서 천형, 천벌을 받은 것처럼 말하더군.
심진경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표층적인 것, 물질적인 행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태도야말로 소설가의 미덕이라고 보시는 거네요. 표층만으로도 어떤 깊이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시적 서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리데기』에서 획득되는 시적 깊이는 바리의 영적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서사적인 표층의 심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네요. 그렇게 본다면 『바리데기』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난민의 상황이야말로 종국에는 시적 깊이라는 형질변화를 일으키고야 말 표층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황석영 좋은 표현입니다. 앞으로 그 말 좀 써먹어도 괜찮을지?(웃음) 이를테면 『심청』의 경우에도‘심청’을 패러디해서, 이를테면 원전의 심청이 주가 되는 게 아니라 현실이 주가 되어서 심청을 빌려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심청이란 서사를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재밌는 건, 이걸 나만 썼는 줄 알았더니 일제말에 채만식(蔡萬植)도 쓴 거예요. 채만식이 『태평천하』의 작가였다는 걸 잊어버리고 스스로 깜짝 놀란 겁니다. 채만식이 이렇게 근대적인 작가였구나. 누군가 『손님』과 『바리데기』를 두고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과의 상관관계를 묻더군요. 그런데 거기하고 내 거는 방식이 달라요. 아스뚜리아스,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이사벨 아옌데, 그전에 보르헤스 등을 보면 자기네 인디오문명에 축적된 민담, 전설의 요소들을 활용하는데, 그것들이 그대로 등장하거나 엉뚱하게 끼어들어 따로 노는 경우가 많습니다. 등장인물들은 현실에서는 드문 기인들이지요. 그래서 이른바 괴이한 소격효과를 주기도 합니다만, 나는 언제나 현실과 타당한 연결을 지으려고 노력합니다.
예컨대 베를린 망명시절에 이런 체험이 있습니다. 1990년에 제1차 범민족대회를 판문점에서 개최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해외문화팀들과 프로그램을 짜기를, 남북 합토제(合土祭)를 지내자, 그래서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흙과 광주 망월동에 있는 흙을 합쳐서 판문점에 소나무를 하나 심자 그랬지요. 그런데 합토제 젯상에다 올릴 돼지 대가리가 시간이 되도 안 나타나는 거예요. 왜냐면 개성 시당(市黨)에서 문제가 생겼대요. 텔레비전에도 나가고 민족의 문제를 논의하는 마당에 어떻게 인민들에게 미신을 보여줄 수 있는가? 어떻게 돼지 대가리를 올려놓고 거기에 절을 하느냐고요. 기다려도 돼지 대가리가 안 와서 화를 내고 있는데 당간부 하나가 그러는 거예요. “이거 큰일났습니다. 우리 젊은 동무들이 반대해서 난리가 났시오.” “아니, 중앙에서 누르면 안됩니까?” 안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리로 갔지요. 갔더니 정말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꾀를 냈지요. 내가 생각해낸 게 김일성 주석의 일화예요. 휴전 직후인데, 금강산의 산봉우리들, 관음봉 보살봉 미륵봉 이런 이름들을 군부가 전부 전투봉 승리봉 통일봉 같은 걸로 바꿔놨대요. 그런데 이게 마땅치 않은 거요. 그래서 김주석이 사회과학원 원장을 했던 홍기문(洪起文) 선생을 불렀다지요. 벽초 선생 아드님 말이에요. “홍선생, 지금 이걸 전투봉 승리봉 통일봉 이렇게 하자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옛날에 위대한 수령님이 나오시기 전에는 인민들이 믿을 데가 없었으니까 미륵님, 보살님 이렇게 이름을 붙였는데 그때 인민들이 했던 대로 놔두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고 얘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름을 바꾸자는 말이 쑥 들어간 거죠. 그 생각이 나서 내가 말을 바꿨지요. “당신네 김일성 주석께서는 미신도 혁명화하면 과학이 된다고 그랬습니다. 돼지 머리는 분단된 남북 국토의 터주에게 바치는 예의요 인사인데 뭐가 문제요?” 그랬더니 결국 개성 시당에서 돼지 대가리를 삶아가지고 왔습니다. 귀신이란 게 뭐냐면 몸이 사회화되는 과정이 귀신이에요. 나는 그렇게 봐요.
비현실적 존재들과 당대 현실의 접점
그래서 나는 『손님』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현실과의 접점을 계속 찾아나가지요. 물론 내가 더 넉넉해지면 자신감있게 확 차고 나가면서 형식의 구속을 벗어나 훌훌 날면서 자유롭게 넘나들겠지요.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아직은 그게 나한테 남아 있는 젊은 날, 과학적 습성의 한계란 말이에요. 하여튼 그걸 치열하게 내 산문 쓰기의 과정에서 해보려고 그래요.
심진경 그렇다면 최근 선생님 작품에 등장하는 귀신이나 영매는 과학적 습성과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그런 비현실적인 존재를 현실과 결부시켜 현실 속에서 접점을 마련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손님』이나 『바리데기』에 등장하는 비현실적 존재들은 오히려 현실을 좀더 세밀하게 접근하고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매우 현실적인 캐릭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맥락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과학적 습성과의 투쟁이란, 현실이라는 영역을 과학적으로 재현 가능한 세계만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꿈과 몽상의 세계로까지 확장하려는 시도로 읽혀요. 그것은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것들이 혼종되어 공존하는 탈근대적 현실로 보이기도 하는군요.
황석영 내가 이런 경험도 있거든요. 광주항쟁이 끝난 다음에 사람들이 죽고 다 없어졌어요. 내가 도망갔다가 몇개월 만에 나타났더니 살아남은 후배들이 내게 『장길산』을 끝내야 한다며 광주 밖에다 거처를 하나 마련하겠다는 거였어요. 30분 나가면 있는 담양에 절을 봐놓았다면서 그리로 옮기라더군요. 그래서 보따리를 싸서 올라갔는데, 담양에 가면 거기가 영산강 상류예요. 읍내에 다리가 조그만 게 하나 있고 작은 동산만한 언덕이 있고 거기 절이 있었어요. 들어가면서 입구를 보니까 이름이 호국사(護國寺)예요. 지킬 호에 나라 국자. “절 이름이 수상하네” 하고는 올라갔어요. 앞에 스님들하고 보살이 사는 데가 있고, 대웅전이 있고, 왼쪽에 요사채가 있는데 방이 일고여덟개가 됐어요. 그러면 고시생도 받고 재수생도 받고 하면 먹고살 만할 텐데 웬일인지 텅 비어 있는 거예요. 그쪽 방 하나에 책상을 놓고 일을 시작했는데, 새벽 두세시쯤 됐나요? 자다가 소변이 마려워서 밖으로 나와 마루에서 댓돌을 짚으려는데 갑자기 눈앞이 아찔하면서 캄캄한 거예요. 그래 넘어지면서 허방을 디뎠어요. 다리를 질질 끌고 가서 일을 보고 들어가서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발이 엄청 부었더군.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요. 택시를 불러 타고 광주 시내의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발목이 딱 부러진 거야. 깁스를 하고 쌍지팡이 짚고 올라가서 밥을 먹는데, 그 스님이 만각(晩覺) 스님이에요. 늦을 만에 깨우칠 각자. 나중에 보니까 이 사람이 육군 일등상사 출신인데, 영광 불갑산 이런 데서 공비 토벌하고 그랬던 사람이에요. 근데 이 사람이 결혼만 하면 마누라가 죽는 거요. 그래서 마누라 셋을 잃고 마흔이 넘어 머리를 깎았어요. 그래서 법명이 만각이에요. 그 스님이랑 밥을 같이 먹는데, “황선생 기가 세긴 세구만요. 그만하기 다행입니다” 하는 거예요. “왜요?” 했더니 “여기가 터가 셉니다.” “네?” 그랬더니 “저 밑의 제각에 한번 내려가보쇼.” 내려가서 문구멍으로 들여다봤더니 위패가 석줄로 쫙 있는 거야. 왜 그러냐고 하니까 바로 절터가 6·25 때 격전지였다는 거요. 다 전투경찰 위패였어요. 내가 거기에 몇달 있다 보니까 담양군 현충일 행사를 그 절에서 해요. 그래서 호국사예요. 근데 이 스님 얘기가 재밌어요. 자기가 거기 처음 부임했을 때 요사채에 보따리를 놓고 자는데…… 자기는 토벌을 해봤으니까 알잖아요, 그리고 자기 마음속에도 기억이 남아 있었겠지요. 산사람, 빨치산이 온 거지요. 배추머리라고 그랬다나. 치깎은 머리가 산에서 자랄 대로 자라면 덥수룩하게 덮이니까 빨치산들을 배추머리라고도 했다지. 그 배추머리가 문을 벌컥 열더니 “스님, 밥 좀 줘!” 그러는 거야. “아, 부엌에 가서 달라고 하지 왜 여기서 달래?” 하고 대꾸하고는 깨어났는데 생시처럼 선명한 거예요. 그러니 기분이 이상했겠지, 무섭기도 하고. 그래서 마당으로 나가 목탁 두드리고 절마당을 돌고 그랬대요. 그리고 이튿날이 됐는데 그 사내가 또 왔답니다. 이번엔 문을 열고 올라타더니 밥 달라고 목을 조르는 거예요. “아아아” 하고 뿌리치니까 온몸이 땀이지. 그래서 이 절이 자기가 있을 데가 아닌가 보다 생각한 거지요. 그런데 거기에 옛날부터 있던 여든 가까이 된 꼬부랑 허리의 공양주 할머니가 있는데, 그 할머니한테 가서 “할머니, 저 떠나야겠습니다. 이 절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하니까 “왜 그랴?” 그래서 그 얘기를 한 거예요. “스님이 뭐 그걸 갖고 그랴? 난 날이 궂고 비가 오고 그럴 때 밥하고 있으면 젊은 년이 애 업고 와서‘할머니 밥 좀 줘요’그래” 이러는 거지요. “이년 썩 없어져” 하면 슬그머니 사라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스님이 안 거지. 이게 한쪽만 밥을 줘서 그렇구나, 전투경찰한테만 제사를 지냈던 거죠. 그 자리가 몇번을 뺏기고 도로 찾고…… 거기가 지리산에서 백양산 쪽으로 내려오는 목인데 거기를 점령하면 담양을 점령하고, 담양을 점령하면 광주 외곽까지 차지하는 거요. 그러니까 유리한 고지를 뺏기 위해서 맨날 싸웠던 거죠. 내가 있던 요사채 양쪽 문을 열면 백양산에서 내려오는 바람하고 강바람이 맞부딪쳐서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요. 거기가 주 저항선이었던 거야. 거기 참호에서 왕창 죽은 거요. 그래서 이 만각 스님이 어떻게 했냐면, 현충일이 끝나고 나면 그 이튿날은 왼쪽 사람을 해주자. 그래서 밥을 산만큼 지어가지고 숟가락을 사오십개 꽂아서 하루종일 목탁을 때리는 거죠. 실컷들 먹어라, 먹어라 이러고. 그다음부터 무서움증이 싹 없어졌대요. 센 터라는 게 그런 식으로 우리 국토 어디에나 있습니다. 얘기가 옆길로 새긴 했지만 아까 얘기의 연장인데요, 모든 민담과 전설은 당대 현실과의 연결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저는 보는 거예요. 그러나 사람살이란 게 어떻게 과학만으로 되겠어요? 드디어는 거기에서도 자유스러워지겠지.
심진경 말씀을 들으니 선생님은 넋의 세계나 영혼의 문제를 현실과 분리해 사고하기보다는 현실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여 현실과의 접점을 발견하면서 그를 통해 당대의 문제를 좀더 다양하게 다루시려는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의 의도와는 달리 『심청』이나 『바리데기』에서 마음과 넋은 고통스러운 현실과는 분리된, 좀더 견고하고 불가침한 어떤 영역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현실과의 접점이 잘 안 짚어지는 것도 같고요.
황석영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단계가 아직까지는 거칠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요. 너무 가까우면 『손님』처럼 끔찍한 뼈대만 남고 미학적 간격을 멀찍이 두면 백일몽이 되어버리고 말겠지요. 그러니까 앞으로 더 추구해야 돼요. 이게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 우리의 산문을 어떻게 하면 개척할 것인가가 내 고민인데, 하다 말기도 하고 안타깝게 중도에 죽기도 하고 그러지요. 자기 형식 발견의 문턱에서 죽은 화가 오윤(吳潤)이나, 아니면 이상(李箱)처럼 포즈만 잡다가 젊을 때 죽은 것보다는 나을 테지. 또 해내지 못하면 후배들이 받아서 할 거고. 하여튼 그걸 해보려고 해요.
고통당한 고통의 치유자, 수난당한 수난의 구제자
심진경 선생님은 『심청』과 『바리데기』에서 국경을 넘으면서 세계를 떠도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디아스포라 자체가 여성으로 젠더화되어 나타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심청』과 『바리데기』는 19세기와 21세기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다릅니다. 『심청』에서‘심청’은‘렌화’‘로터스’‘렌카’로 변해가는 삶의 여정 속에서도 심청이라는 자기정체성을 끝까지 잃지 않고 유지합니다. 그런데 『바리데기』에서‘바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물론 돌아가겠다는 간절한 바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심청과 바리는 모두 디아스포라적 인물들이긴 하지만, 심청이 근대적 캐릭터라면 바리는 탈근대적 캐릭터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 두 인물간의 거리를 통해 선생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무엇인지 궁금한데요.
황석영 어허, 또 그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나는 싫은데.(웃음)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책에서 읽은 용어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기자들은 거대담론 미시담론 하는 말도 상황과 처지에 대한 고민 없이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더구만. 아무튼 『심청』은 지난 세기의 이야기니까 일단 완결된 구조로 끝나지요. 15세에서부터 80세까지. 맨 마지막에 희미하게 웃으면서 끝나거든. 진창 속의 일생을 받아들이고 자족하죠. 그런데 『바리데기』는 울면서 끝나잖아요.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아가야 미안하다” 하지요. 『바리데기』는 완결되지 않은 결말인 셈이요. 그러니까 결말을 독자에게 던진 거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고통스런 이행기가 그렇듯이 당신의 앞에서 지옥은 계속되고 있다,라고. 열려 있는 구조라고 할까. 세월이 더 지나면 덧붙여서 한 권을 더 쓸 수도 있고, 한 장(章)을 더 쓸 수도 있겠죠. 아무튼 그렇게 거기에서 딱 끝내버린 거예요. 말하자면 뒤를 열어놓겠다는 거죠. 이번에 『바리데기』 결말이 물의를 일으킨 걸 봐서는 의표를 찌른 부분이 있는 것 같군요.(웃음)
심진경 『바리데기』는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전지구적 자본주의화로 인해 이주와 탈주가 빈번해진 21세기를‘바리’라는 탈북여성을 통해 그려내면서도 그 고난의 강도가 생각만큼 세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탈북 이후 중국을 거쳐 영국까지 온 바리는 파키스탄 출신 영국인과 결혼하면서 나름대로 정착합니다. 결코 해피엔딩이라 할 수 없는 미완적 결말에도 불구하고‘바리’가 생각보다 쉽게 선진 유럽에 안착한 것은 아닌가 싶은데요. 바리는 과연 이런 고통의 현실을 소설적으로 감당할 만한 캐릭터일까요?
황석영 일단 황폐한 땅을 벗어나 다른 도회지에 몰려든 이주노동자들이 행운인지 불운인지는 우리의 판단으로 감히 말할 것은 아닐 거요. 이런 이주로 말하자면 이미 우리 안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백여만이나 들어와 있고, 중국에는 수십만 국내에는 오천명 가까운 탈북자가 있고, 결혼 이주도 농촌에서는 새로운 풍속도가 되어 있지요. 다시 말하자면 바리는 버림받은 자요, 『바리데기』의 바리는 상징적 전형일 뿐이지요. 사실적 사진이 아닌 드로잉의 피사체 같다고 할까.
지금은 개인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양극화에 의한 왕따가 일어나고 있어요. 미국이 주도하는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나라는, 어느 정도냐면…… 일국적으로 본다면 옛날의 해남 같아요. 칠십년대에 해남에서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다 가버리고 마을의 빈집이 한개 면에서 백 집 가까이 나오고 그러던 때와 같은 거요. 주변부는 산업적 생산이 점점 안되잖아요. 고구마, 옥수수 팔아서 어떻게 먹고살겠어요? 생산력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구매력도 없게 되지요. 그러면 그런 나라나 지역은 선진국들이 왕따시키면서 그냥 가는 거요. 그러면 공동체가 무너질 뿐만 아니라 부족이, 말하자면 공해 때문에 지구상의 동식물이 멸종하듯이 그 일대는 멸종하는 거예요. 아프리카에서는 이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에요. 거기에 에이즈에다가 각종 질병에다가…… 그렇게 왕따당한 사람들이 다 바리예요. 나는 북한 통치권의 책임은 물론이고 남북의 분단체제를 경영해온 강대국들의 위선적인 인권 논리를 전부터 비판해왔습니다. 세계적 이행기의 가장 큰 특징은 노동 이주 내지는 이동 현상이라고 봅니다. 동유럽이 무너질 무렵에 아마 데리다(J. Derrida)가 그랬을 거요. 자본주의의 악과 사회주의의 무지몽매함이 혼혈되면 새로운 악이 탄생할 거라고요.
심진경 흥미로운 것은 『바리데기』에서 왕따당하고 버려진 존재인 바리는 오히려 버림받은 자의 힘으로 그러한 버림받음의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것 같아요.
황석영 그렇죠. 그걸 무속용어로는 이렇게 얘기를 하지요. 고통당한 고통의 치유자, 수난당한 수난의 구제자로서의 샤먼. 그러니까 제일 고통받고 눌리고 했던 자가 남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 그건 아주 그럴듯한 명제가 될 것 같아요.
『바리데기』의 몽환성과 리얼리즘
심진경 『바리데기』에서는 끔찍하고 리얼한 현실을 다소 비현실적으로, 몽환적으로 그리셨죠. 예를 들어 밀항 장면을 보면 바리가 강간을 당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다소 모호하게 그리신 것 같아요. 꿈 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하고요.
황석영 처참한 상황을 초점이 흐려진 사진처럼 그리거나 환상으로 처리하면 바리가 그후에 스스로 이겨내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단 것이죠. 엄청난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는 그 사건이 몸의 요구에 의해서 저절로 기억에서 지워지기도 하고 그래요. 하여튼 나는 그걸 옛날 했던 식으로 직접‘실감나게’드러내기가 싫었어요. 그리고 이게 한편의 몽환적 꿈과 현실이 교차되면서 읽히길 바랐지요. 내가 『손님』을 쓰고 나서 조금 못마땅했던 게 『손님』은 너무 리얼리스틱해요. 참혹한 삶을 좀더 생명 본래의 넉넉함으로 풀어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실제로 씻김굿의 굿중극으로 끼어 있는‘다시라기’같은 대목은 망자를 따라 저승의 강을 함께 건너가버릴 수도 있는 유족들을 생활의 장으로 되돌려놓으려는‘신명’예찬의 부분입니다.
심진경 그렇다면 『바리데기』를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말씀인가요?
황석영 종래의 리얼리즘 개념이라면 그렇습니다. 나는 내 산문이 기존의 소설 장르 안에서 스스로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바리데기』에서는 이런 끔찍스러운 것들을 오히려 장엄한 화면으로 그리고 싶었지요. 예를 들어 산불 장면도 그래요. 어느 외국대학의 교수가 귀띔을 해줬어요. 최근의 탈북자들 인터뷰를 했는데 산불 얘기를 많이들 하더라고 그래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90년대 중반부터 그 무렵까지 엘니뇨 때문에 전세계에서 산불이 많이 났대요. 그런데 북한이 특히 더 그런 건, 사람들이 불을 지른 탓이에요. 화전을 일구려는 이유도 있었고. 위성사진 자료를 찾아보면 한때는 거의 북한 전역이 타고 있어요. 내 문장에도 있지만 어둠 속에서 살려달라고 구조 요청의 횃불을 올리는 것처럼…… 그래서 산불 장면을 주요한 장면으로 넣었지요. 그리고 죽은 혼들만 남은 빈 마을에 들어가는 장면들…… 나는 사실 중국에 가서 취재를 할 때 말도 못할 끔찍한 사진들도 보았고…… 그런데 그걸 어떻게 다 쓰겠어요? 그걸 다 그리는 걸 자연주의 소설이라고 그러지요. 나는 그 본질을 말하면서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어요. 그다음에 내가 고심했던 밀항하는 장면은 무속의 여러가지 유형에 나옵니다. 횡단의 유형들이며 방법들, 자기 영혼과 육신의 해체 방법과 정화과정, 이런 게 다 나오죠. 밀항에서 영화의 흑백화면처럼 여러가지 씬이 끼어드는데 그게 다 밀항한 사람들을 취재한 신문기사나 회상 자료에 나오는 얘기거든요.
심진경 『바리데기』에서는 칠성이랑 할머니의 영혼이 바리를 넋의 세계, 서천 여행길로 인도하는 일종의 중개인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바리는 영매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삶과 죽음,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 등을 중개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칠성이나 할머니 같은 중개인을 통해서 넋의 세계로 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황석영 이건 국문학이나 민속학의 상식에 불과한데, 무당은 누구나 몸주가 있고 그러한 영이 안내자가 되어줍니다. 영매는 몸주나 수호령을 통해서 피안과 연결되지요. 또한 그건 바리의 끈이 여기 한반도이고 여기에서부터 연결되어 먼 나라까지 가는 거지요.
심진경 그렇군요. 저는 충직한 개나 인자한 할머니 같은 캐릭터가 우리에게 친숙한 전래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과 흡사해서 그 부분이 다소 우화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꿈에서 얻은 영감
황석영 영국에 갔다고 흑인 아줌마나 집시가 나와서 인도하면 이상하겠지요.(웃음) 죽음의 세계도 다 자기 세계가 있을 것 아녜요. 그러면 귀신도 자기 전통의 뿌리가 있는 세계에서 와야겠지요. 나는 외국에 나가서 꿈을 꾸면…… 내가 모국어를 붙들고 씨름해서 그런지 현지 얘기는 하나도 없고 꼭 여기 한국이 나오더라고.(웃음) 사실 아까 할머니 얘기가 나왔지만 이 소설을 쓰면서 원조 바리 할머니 꿈을 꿨어요.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저거 또 허풍치네’할 수도 있지만 나는 옛날부터 무슨 소설을 시작하면 꼭 꿈을 꿔요. 『장길산』 때는 아까 호국사 얘기도 했지만 그런 일화가 너무 많고…… 우리 집에서 수백년 묵은 구렁이까지 나왔으니까. 그 집이 『장길산』을 마지막으로 완성하고 없어졌지만, 그 집터가 지금 광주예술원 놀이마당이 됐어요. 그게 그 집의 팔자인 거지. 해남에 갔을 때는 당집에서 살았고…… 그런 경험들이 있는데, 『손님』 쓸 때는 참 무서웠어요. 덕산 산골짜기에서 살 때인데 귀신들이 나와서 유리창 부수고 도끼, 낫 들고 들어와서 춤추고 난리가 났어요.
심진경 선생님은 온몸으로 쓰시네요.(웃음)
황석영 근데 이번에는 참 재미있는 것이…… 내가 『바리데기』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담당편집자가 막바지 교정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파주에 있는 창비 사무실이 천장이 높아요. 그런데 뭐가 퍼덕퍼덕하고 난리가 났다는 거예요. 새 한마리가 잘못 들어와서 사무실 안에서 날아다니는데, 가만히 보니까 매라는 거예요. 그래서 창문을 열고 쫓아서 날려보냈다는 거야. 나중에 편집자가 이시영 시인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가 그랬대요. “조짐이 좋네. 황이 매야.” 사실 우리나라 무속화나 무속에는 매가 늘 등장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사람과 가깝게 생활하니까 풍산개를 등장시켰지 사실 메씬저는 날것이에요. 오리라든가 까막까치라든가 학이라든가 그런 건데, 무속에서는 원래 신의 메씬저는 매요. 이건 재밌는 뒷얘기가 되겠구먼.(웃음)
심진경 그러네요. 『손님』 때는 귀신들과 격전을 벌이면서 썼다고 하셨잖아요? 『바리데기』 쓰실 때도 그런 일이 있었나요?
황석영 평화롭고 즐겁고 노래 부르고 그랬어요. 왜 이 소설에 나오는 가사들 있잖소. 그게 옛날 무속가사를 조금씩 바꾼 거거든. 그런 건 내가 『장길산』 쓸 때부터 잘하니까.(웃음) 거기에 곡조 붙여서…… 컴퓨터 책상에 손바닥으로 장단을 치면서 흥얼대고 그랬어요.(웃음) 아주 고양된 상태였지요.
심진경 『손님』에 등장하는 귀신이 이 세상에 상처입은 원귀에 가깝다면 『바리데기』의 귀신들도 물론 맺힌 원한이 많겠지만, 그래도 그런 원한을 풀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고 감싸주는 존재에 가까운 것 같네요. 그래서 선생님도 즐겁게 작업하신 것 아닌가요?
황석영 글쎄 귀신은 물론 사람들이 지은 업에서 나오니까 악령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우리와 같이 있으면서 서로 도와주고 치유해주고 그럴 것 같군요. 그게 훨씬 인간적인 관념일 것 같고. 그런 면에서 내가 세상살이에 대해서 좀더 너그러워진 게 아닌지.
심진경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누구보다 많이 겪으셨을 텐데 어째 점점 더 낙천적이고 순해지시는 것 같네요. 선생님이야말로 고통을 통해서만 비로소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바리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황석영 나는 사실 운이 좋은 편입니다.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겁도 없이 낙관적이죠. 나는 아무리 고민이 생겨도 십분 이상 고민을 안해요. 에이 그만두자, 우선 잠부터 자고, 어쩌구 하고 나면 어제는 없던 일이 되어버리죠. 예전에 안기부에 잡혀 들어가서도 딱 하룻밤 자고 나니까 우리 집이더라고.(웃음) 괜찮더라고…… 그 친구들이 반말하면 나도 반말하고, 때리려고 하면 나 재판 가서 다 불 거야 그러고, 고문하지 말라고 아우성치고…… 상대편이 웃통을 벗길래 나도 벗었지.
‘여성’의 시각에서 본 『심청』과 『오래된 정원』
심진경 2000년대 이후 선생님의 소설을 얘기할 때 여성이라는 토픽이 굉장히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요.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정적으로 많이 얘기된 것 같습니다. 『오래된 정원』 이후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비판적인 논의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텍스트가 『심청』이었던 것 같아요. 소설에서‘심청’은 매춘여성이죠. 그러니 당연히 성행위 장면이 빈번하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독자로서 저는 그런 부분들이 상당히 불편하고 낯설었어요. 특히 심청의 첫날밤 장면이 그랬죠. 누군가에게 억지로 끌려와 강제로 옷이 벗겨지는 상황에서 말 그대로‘봉변’을 당하고 있는데도, 심청은 그런 상황 자체를 즐기고 심지어 “견딜 수 없는 안달”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그 상황은 마치 여성은 강간당할 때조차 성적 쾌감을 느낀다는 비상식적 속설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서 제 관점에서 심청은 결코 여성인물이 아닙니다. 다만 남성의 관념 속에서 굴절된 정형화된 여성 이미지에 불과한 거죠.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황석영 『심청』에서 야한 장면이 너무 많이 나와서 그런가요.(웃음) 사실 처음에 나는 포르노보다 더 극명하게 재현하고 싶었어요. 포르노는 이를테면 자본과 같은 냉혹한 물성이 있거든요. 『무기의 그늘』에 이미 그런 게 나오는데, 전투를 마치고 미군기지로 돌아가면 휴식시간에 바에서 포르노를 틀어주지요. 대리석처럼 물화된 육신에서 정액이 흐르고 난리가 나잖아요. 그러다가 전선에 가면 새벽에 동이 트는데 밤 동안의 열기에다 스콜이 내려서 시체가 금방 썩기 시작해요. 다리나 팔이 두세배로 불어나 시커멓게 보이는데, 그런 구멍 속으로 도마뱀과 쥐 떼가 들락날락하는 장면이 박명 속에서 보이지요. 나는 그런 걸 여러번 봤어요. 그것과 저것을 연결하는 거예요…… 그런데 역시 소설에서는 너무 그리로 나아간 점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심청, 연꽃의 길』 개정판(2007)을 내면서는 너무 많은 자료에 짓눌린 듯한 후반부를 좀 쳐내고, 지나치게 야한 부분들은 함축하고……
심진경 저는 야한 게 나쁘지는 않아요. 다만 자기의 몸을 근대를 돌파할 강력한 도구쯤으로 대상화하는 심청의 자의식이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황석영 나는 심청을 그릴 때……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여성성을 말한 것 중에 여성의 몸이나 여성이 가진 권력으로서의 여성이 있잖아요? 그걸 그럴싸하게 봤습니다. 이걸 도치시킨 것도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그리고 『심청』에서는 유리 거울이 나오는데, 그 거울이란 게 근대적인 산물이지요. 청이가 연화로 상징적인 죽음을 하고 다시 태어나서 남경에 팔려갔을 때 제일 먼저 보는 모습이 자기의 벌거벗은 몸이거든요. 그때까지 제 몸을 한번도 못 본 거지요. 그때 거울에 있는 몸과 대화를 하잖아요. “넌 누구니?” 그게 의미심장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다음에 바리도 그렇고 심청도 그렇고 다 어린 소녀 아닌가요? 지금 무슬림이 히잡이나 부르카를 씌우냐 마느냐 하는 것과도 똑같은 얘기거든요. 예컨대 마을 바깥에서 낯선 외방인이 들어온다든가 해서 분란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아녀자들이 가장 극명한 희생의 표적이 되잖아요. 나는 물론 페미니즘이나 여성운동을 깊이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성운동을 위해서 소설을 쓰는 건 아니니까요.
심진경 화제를 좀 바꿔서 저는 『오래된 정원』이 여러가지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황석영 『오래된 정원』을 본 평자들이 제각기 연애소설, 역사소설, 후일담소설이라고들 하는데,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그 무렵의 개인적인 사생활의 회한이자 세계를 보는 나의 회한이었고 저물어가는 20세기를 보내는 지식인들의 회한이었을 거예요.‘역사와 사랑은 시제가 맞지 않는다’라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인 셈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등지고 시간을 향하여 전인미답의 길을 가지요. 언젠가 훗날에 돌이켜보면 자신의 선택이 그릇되었거나 엉뚱한 길로 왔다는 걸 알게 돼요. 사랑도 미숙할 적에는 몰랐던 것이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야 내면에서 뒤늦게 완성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돌이킬 수는 없지요.
나는 두가지 종류의 작품을 쓰는데, 이를테면 「객지」는 차가운 머리로 구성하고 직조해서 꽉 짜인 구성을 이루어놓은 작품이라면, 「한씨연대기」는 어머니에게서 듣거나 유년기에 경험했던 내밀한 이야깃거리를 가슴속에서 퍼내듯이 쓴 작품이에요. 『오래된 정원』은 오랜 격리와 이별 끝에 스스로를 치유하고 작가로 돌아가려던 무렵의 소설이에요. 평론가들은 「객지」류를 좋아하는데, 동료 소설가나 일반독자 들은 「한씨연대기」를 더 좋아하더군요. 솔직히 얘기하면, 감옥에서 나와 의욕적으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오래된 정원』이 아니라 『손님』이었어요. 『손님』을 그때 2백매 정도 썼는데 다섯번인가 고쳐 쓰다가 중단해버렸지요.
석방되고 나서 내가 한동안 자폐증에 시달렸는데, 잠을 잘 때 큰방에서도 꼭 벽 쪽에 가서 웅크리고 자야 편한 거예요. 그러면서 불면증과 노이로제로 고생하다가‘아, 나의 얘기를 먼저 써야겠다’생각했지요. 사실 『오래된 정원』 구상은 베를린 시절에 다 했어요. 감옥에서 더 굴렸지요. 처음에는 베를린만 쓰려고 했지요. 그러다가 그게 살이 붙은 건데, 사실은 그걸 쓰면서 스스로를 치유했어요. 대개 감옥 후유증이 수감기간의 3분의 1 동안은 간다고 해요. 5년 살았으니까 그럼 20개월은 정양해야 하는데, 작품을 꼭 1년 쓰니까 어느결에 회복이 되더군요. 그러니 사실은 『오래된 정원』을 쓰면서 글쓰는 사람으로 돌아온 거지요. 물론 주인공은 감옥에서 18년을 살았고, 유학생간첩단으로 들어갔던 후배 이야기도 모자이크했지만 거기에 나와 있는 감수성이랄지 디테일들은 다 내가 직접 겪은 일들입니다. 심지어 오현우는 내 분신이었다 쳐도 한윤희가 겪었던 베를린 체험이나 운동권 후배들을 도와주면서 겪는 주체의 갈등은 모두 내 자신의 경험이에요.
심진경 제가 읽기로 베를린장벽 붕괴 이전까지 선생님의 문학적 기획은 단순하게 얘기해 근대적 기획이었다면, 그후에는 탈근대적 기획으로 가닥을 잡고 가시는 것 같아요. 지금의 탈국적 상황이나 탈근대적 상황에 오히려 가장 적합한 캐릭터가 여성이 아닐까 하거든요. 꼭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더라도 여성성을 갖춘 캐릭터들이 지금의 비균질적이고 복잡한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이런 세계사적 변화를 감지하고 계신 듯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이야말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계신 것 같아요.
황석영 베를린장벽 붕괴 이전까지와 이후의 나의 문학적 기획이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맞습니다. 심선생의 포스트모던 안경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사실은 전에도 소설 여기저기에 부분적인 편린들이나마 여성의 얘기를 많이 썼지요. 그런 감수성들이 『바리데기』까지 이어지는데 사실 『심청』을 쓰고는 좀 미흡했어요. 그래서 뭔가 하나 더 하자 하다가 『바리데기』로 넘어간 거죠. 이젠 또 뭔가 새로운 걸 써야겠는데, 지금 여성성 얘기를 했지만 다음 작품은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을 쓰려고 하는데 그 중요한 매개가 여성인 것은 틀림없어요. 어쨌든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고 누구나 어머니의 자식이니까.
심진경 선생님의 근작들을 모두 여성적 서사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말씀처럼 큰 흐름은 여성적 서사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어떻게 보면……
황석영 아직은…… 마초적인가요?(웃음)
심진경 아뇨. 마초적이라기보다는 분명히 작품이 여성적 서사와 형태를 갖고 있는데도 여성인물의 성격 묘사, 혹은 여성인물이 서사에서 차지하는 방식이나 역할을 맡는 부분들이 좀 정형화되어 있다고 할까요? 분명히 선생님의 눈은 저 멀리 여성적 서사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지만 몸은 여전히 기존의 남성서사에 붙잡혀 있다고나 할까요? 예컨대 『오래된 정원』의 한윤희가 그렇죠. 굉장히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인물인데 결국에는 모성으로 회귀하거든요. 모성이야말로 대표적인 남성적 여성신화죠.
황석영 그건 이런 거예요. 위인의 명언 식으로 얘기하자면, 결국은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도다 하는 것처럼요. 그 작품에서 케테 콜비츠의 그림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요? 일본에 있는 교수 친구가 동아시아의 근대에 대해 쓴 글이 생각나는군요. 제목이 아주 그럴듯해요. 물론 일본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겠지만 제목이‘독방의 수컷’이에요. 지들이 그래봤자 독방에 혼자 있는 수컷 아니냐는 거죠. 동아시아의 근대가 바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내를 살해하고 딸을 살해하고 그러면서 지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케테 콜비츠는 어머니를 얘기하고 수없이 어머니와 아들을 그려냈지요. 남자들이 서로를 죽이던 세기가 20세기인데 그걸 생각하면서 모성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여성운동 하는 사람이 발끈하는 게 뭐냐면, 가장 위대한 자연인 모성을 회복하고 싶다는 얘기가 나오면 그래요. 아니 겨우 여성이 모성밖에 안되냐? 근데 뭐 나는…… 우선 여성주의나 페미니즘 쪽에서 뭐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꼬리를 내립니다.(웃음) 왜냐하면 미안하니까. 나는 우리 연배의 세태로 보아 혜택받은 장남이자 가부장적 남편으로서 저밖에 모르던 죄가 많지요. 서구사회에다 빗대어놓고 보면 우리네 남자들은 아직 진화가 덜된 인간이라고 해야 되나? 누군가 내게 농담을 하더군요. 이제 황아무개는 양서류쯤 되어 보인다나.(웃음) 늙어서야 반성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심진경 그런데 『오래된 정원』에서 그려지는 오현우의 귀환과 한윤희의 죽음이라는 소설적 정황은 저에게 1990년대 여성문학의 운명을 연상시킵니다. 공교롭게도 선생님의 출감과 『오래된 정원』의 발간 시점이 1990년대 여성문학 붐이 사그라드는 시점과 교묘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둘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이 상황은 한국문학의 어떤 풍경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것은 『오래된 정원』 출간 직후 모 신문기사에서 이 소설을‘거대서사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말한 것과도 관련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래된 정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문학 이후의 여성문학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2000년대 이후의 텍스트에서 새롭게 시도되어온 선생님의 여성적 서사기획은 1990년대 여성문학의 성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래된 정원』은 그 분기점이 되겠지요. 이후 『심청』과 『바리데기』는 이러한 여성적 서사로의 전환이 좀더 본격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황석영 세상에 여성 상대 없는 남성이 있을 리가 없고, 사랑 이야기는 무조건 여성서사인가요? 심선생의 다분히 주관적 견해로 보이는데, 다만 케테 콜비츠나 한나 아렌트(Hanna Arendt)의 성찰처럼 근대가 남성적 억압과 갈등으로 구축된 세계라는 점에서는 저도 반성의 대열에 참여하고 싶은 남성입니다.
나는 『오래된 정원』에서 내 개인적 회한과 지난 시대의 우리의 과오를 지적하고 싶었지요. 말하자면 80년대에 우리가 치켜들었던 공동체적인 책임, 조직, 역사, 사회, 혁명 등의 한편에 소홀히하고 저버리거나 감추고 있었던 개인적 일상과, 사랑이라든가 행복, 내면 등에 가해진 억압에 관해 말하고 싶었지요. 세기말의 사회주의권 붕괴와 함께 그러한 절망적인 세상의 속내가 보이기도 했어요. 『오래된 정원』은 후기에서 밝힌 대로 역사가 아니라 그 뒤안길에서 휘감기고 스러져간 나약한 개인에 대한 고찰이었지요. 그게 감옥 안에서 보낸 치열한 일상의 결론이었어요. 오현우가 갈뫼를 방문하고 떠나면서 앞으로의 변혁은 일상과 더불어 지속될 거라고 다짐하는 장면에서 그런 점이 다시 한번 강조되지요. 이제 사회주의적 관점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비판적으로 내면화되면서 더욱 힘겨운 일상적 싸움의 과정으로 넘어가게 된 겁니다.
솔직히 감옥에 있을 적에 바깥의 청산주의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한국문학이 양에 차지 않았어요. 왜 그랬냐면, 내가 볼 때 90년대가 군사정권의 이행기였는데 김영삼정권이 잡고 나니 민주화가 이젠 다 됐다는 분위기였어요. 면회 오는 사람들도 그런 표정이구요. 그러고는 다녀가서 하는 말이‘황석영이 재밌게 잘 지내더라.’(웃음) 나는 미치는데 말이야. 그때가 그렇더라고요. 나는 그 안에서 원한에 사무친 것까지는 아니지만, 밖에 나가기만 해봐라 하는 것이 있었지요. 섭섭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때 많은 걸 정리정돈하게 되죠. 나가면 뭔가 새롭게 시작해야지 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버리지 않고 지속하고 있는 건, 이걸 강박관념이라고 할 테지만 현실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내가 해외에서 망명시기를 보낸 지 십수년 만에 런던 체류할 적에 뉴욕에 행사차 갔다가 외국 교수며 작가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친구들이 뭐라고 하냐면 “우리가 그동안 잘 놀았다”그럽디다. 그동안이라는 건 우리가 다 짐작할 수 있듯이 세계체제가 전환된 이후를 말하겠지요. “이제는 그동안 밀쳐두었던 현실로 돌아가자”라고들 얘기하더군요. 이렇게 나선형으로 반동과 반성을 거듭하면서 되돌아오는 겁니다.
우스꽝스러운 ‘근대문학의 종언’
심진경 이제 서서히 마지막 주제로 넘어가볼까요? 요즘 젊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에 대해서 얘기 좀 해주세요.
황석영 외국에 있는 바람에 다 자세히는 읽지 못했는데, 작년에 박민규의 『핑퐁』하고 이혜경의 『틈새』, 김애란의 단편을 봤는데 기분이 좋았어요. 내가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한국어판에 “이 소설들을 읽으니 나에게도 돌아갈 정처가 아직 있다는 걸 알고 반가웠다”고 썼죠.
심진경 선생님은 베트남전 참전과 민주화운동 참여, 북한방문 등 문학 외적인 차원에서도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오셨어요. 하지만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은 이제 문학이 책임졌던 사회적 역할은 끝났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을 곧바로 우리 문학의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고 또 다소 과장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지난 몇년간 이 토픽은 한국문학의 현실을 진단하고 예측하기 위해 수없이 얘기되었습니다.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황석영 거 참, 내 한마디 합시다. 느닷없이 젊은 사람들이 카라따니 코오진 정도를 가지고 웬 법석이요? 그게 모두 일본 저희 집안 얘기지. 80년대에 있었던 일이에요.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郞) 선배와 내가 일본 이와나미(岩波) 출판사에서 처음 만나 대담을 하는데, 그때는 광주항쟁 이후 정치적으로 매우 급박하고 위험하던 때라 얘기가 참 풍성했어요. 그런데 오오에가 알려진 대로 매우 겸손하지요. 그는 나에게 “나는 당신이 부럽다, 그리고 격동에 휩싸인 당신네 사회가 부럽다”라고 말했지요. 자기는 스스로의 문학적 긴장을 유지시킬 인자(因子)가 자식이었다고 말하더군요. 그의 아들이 정신지체 장애인이었어요. 그래서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을 겁니다. 여하튼 날더러 당신은 얼마나 활달하고 작가로서 천혜의 텃밭에 있는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미묘하게도 어쩐지 얄미웠달까. 그래 너희는 그렇게 마음고생이나 하고, 우리는 허벌나게 깨지고……(웃음) 말하자면 제1세계의 지식인이 제3세계를 용납하듯이 말하니까 기분이 안 좋지요. 하지만 그 양반이 아주 겸손한 분이니까 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겠죠. 지금도 진심의 말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카라따니와도 관련이 있는 한일작가교류라는 게 언제 생겼냐면…… 우선 60년대의 한일회담 때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할 겁니다. 그때 막후에서 양쪽의 다리 역할을 하던 커넥션들이 있었어요. 그때까지는 정치·경제적인 유착관계에 머물렀지만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이 커넥션에 문화부문이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유신시절 김지하 구명운동 이후부터 한일민주화운동 연대조직이 생겨나고 일본 시민운동권이 여러모로 한국 민중과 연결하려는 실천적인 흐름이 나타났기 때문이에요. 나는 5공 이후 문화운동 1세대 후배들을 포섭하려는 정권의 공작을 여러차례 알아차렸고 그 인물들과 맥락에 대해서도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광주에서 얼마전에 작고한 윤한봉(尹漢琫)을 밀항시킨 뒤 85년에 미국에서 만나 그의 조직적 활동을 도우면서 해외의 운동단체를 통해 일본의 진보 지식인 시민단체들과 연결된 것도 그 무렵입니다. 이와나미 출판사의 잡지 『세까이(世界)』는‘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몇년째 연재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조직적으로 도왔지요.
따라서 한국 군사정권은 이를 뒤엎을 만한 일본 지식인 또는 작가군과의 교류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잡지도 발간하고 그런 일을 전혀 표나지 않게 연결할 인사들도 필요했지요. 정권측의 허아무개 김아무개 인사들과 한국의 전모씨 일본의 안모씨, 그리고 일본 작가·평론가들이 몇몇 기억나는군요. 이들이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부관(釜關) 페리호가 개통될 때 한일 문화인의 선상대담을 마련한 거였어요. 내게 참가제의가 왔는데 거절했기 때문에 그 맥락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지요. 그다음 일본에 우리 작품을 소개하는 한국의 문예지가 창간되고 일본에서는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잡지가 일본인들에 의하여 창간되었어요. 자금은 물론 지원되었고요. 이때에 나까가미 켄지(中上健次) 등이 등장하고 우리 문인들도 영문 모르고 교류 작품을 쓰고 그랬지요. 저는 물론 다시 거절했습니다. 카라따니는 그때 그쪽 그룹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물론 그가 이런 내막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요. 하긴 우리 문인들도 순진하게 동원되었으니까.
나는 85년에 미국을 거쳐 일본에 가서 동경과 오오사까 쿄오또 등지에‘우리문화연구소’와 문화팀을 조직하느라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작가 예술가 등과 만났고 이를 우리측에 연결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노는 물이 달랐던 것이지요. 내가 만난 벗들로는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교수를 비롯한‘일한연대위원회’지식인들과 당시 전평과 사회당 계통의 편집자들, 아사히와 요미우리 쿄오도오(共同)통신 등의 양심적인 저널리스트들, 연극단체에 속한 문화패들, 평론가 이또오 나리히꼬(伊藤成彦), 작가 노마 히로시(野間宏), 오오에 켄자부로오, 아베 코오보오(安部公房), 오다 마꼬또(小田實), 화가 토미야마 타에꼬(富山妙子), 평론가이며 이와나미 사장이던 야스에 료오스께(安江良介) 등등 그외에도 여러 분들이 생각나는군요. 이들은 안보투쟁 세대들이면서 그 아래로 새로운 젊은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과 우리를 연결시켰던 장본인입니다.
내가 보기에 일본의 우리 벗들이 현실 가운데 서 있었다면, 카라따니와 나까가미 등의 문인들은 말하자면 일종의 문예쌀롱에 소속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이들이 안모씨와 연결되어 한일작가교류가 시작됩니다. 한국 문예지 측과 연결되어 몇차례 내왕이 있었지요. 나로서는 이들 일본 문인들은 한참 아래로 보였습니다. 이들의 문예이론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젊은 진보적인 평론가들을 뒤에 몇몇 알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코모리 요오이찌(小森陽一)는 카라따니보다는 몇수 위였고 한마디로 엄살을 부리지는 않습니다. 카라따니가 근대문학의 종언이니 어쩌구 한 것은 벌써 오래전의 얘기고 일본문단의 나른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어요. 좀 우스꽝스러운 일이지요.
문학은 자폐의 길에서 벗어나야
내가 얼마전 기자간담회에서 “올해가 한국문학의 중흥기야” 어쩌고 했는데 한국문학 격려하느라고 그런 거예요. 사실이 그렇기도 하고…… 아니, 기자라는 사람들이 겨우 이삼년을 못 참아서 지난 몇년간 한국문학은 끝났다 어쩐다 하면서 난리를 쳐요? 한국문학이 잘 안 팔리고 번역소설들이나 팔리고 그러니까 그런 기미가 아주 없지는 않았어요. 그러면 편집자 평론가 기자 들이 좋은 작품이 나올 거다 하면서 옛날 것도 다시 한번 얘기하고 그러면서 기다리고 북돋아주어야지. 올해를 봐요. 그동안 한국작가들이 제각기 쓰고 있었던 거야. 나도 쓰고 있었다고……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다들 쓰고 있던 거예요. 올해 나올 책들이 앞으로도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는데. 쏟아져나올 거요. 김애란도 가을에 나온다며? 천운영도 나온다고 하고, 또 김영하 나올 거고, 김연수도 준비중이고. 지금 원로에서 젊은 신인들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역작들을 내놓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물론 한국문학이 위기가 아니었던 때가 없지만 지금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봐요. 그리고 우리는 아직 사회변혁이 진행중이고 분단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얘기할 거리가 너무 많아요. 문학을 하는 사람들마저 문학이 현재‘문화의 최하위’라고까지 말하는데…… 자학하지 말고 자기를 존중해야 남들도 존중한다고.
근데 나는 요새 기분나쁜 게 어디 가서 호통을 쳤으면 좋겠어요. 아니, 이 싸가지없는 국회의원들이 저희들끼리 싸우다가 상대가 거짓말하는 것 같으면‘소설’쓰지 말래. 그러더니 어린 네티즌들도 누가 허튼소리를 하면‘소설 쓰고 있네’그래요. 외국에서는 당대의 소설, 문학책, 이런 게 그 사회 교양의 척도예요. 아니, 이렇게 허섭스레기 같은 취급을 받다니 말이야. 그래서 좀 자부심을 갖고…… 왜냐하면 사회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없어졌기 때문에 근대문학의 종언이 아니고, 그런 역할을 잊으면 잊을수록 허섭스레기가 되고 종언되는 거예요.
심진경 카라따니 코오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를 예로 들면서, 지금의 탈근대적 상황에서 사회적인 메씨지를 전달하고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다른 매체가 훨씬 더 설득력있게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비판할 수 있다고 했는데요.
황석영 그건 일본 상황에서 나온 소리죠.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사용하고 구사하려는 논리이고. 일본은 소설뿐 아니라 매체 자체가 다 자본이나 권력에 먹혀서 그 어떤 진보적이고 선진적인 집단도 천황주의에 대해서는 언급도 못해요. 천황주의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근대 이후 백년을 보냈는데 무슨 저희들이 제대로 싸워온 지식인이냐는 거요. 입만 살았고 엄살 심하고…… 한마디로‘약해’.
일본소설이 이렇게 된 데는 시장에서 베스트쎌러 내세워 줄세우기나 하고…… 그리고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벽을 무너뜨리면서 문학의 가치가 붕괴하니까 본격문학의 작가들이 지레 자폐했어요. 다 문을 닫았다고…… 포기하고 사는 거요. 그다음에 어떻게 되냐면 시민운동 쪽에 소속해서 그쪽에서 가끔 글 쓰고 강의하면서 먹고살고 그러는 거예요.
심진경 그렇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황석영 대개 20세기 초부터 서구문학은 위기론을 운운했지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일본이 70년대의 경제적 특수를 누리면서 문학이 현실로부터 멀어지면서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가 많아요. 카라따니의 담론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본격문학의 침체는 대략 80년대부터 시작이에요. 일본 출판계가 몇개의 메이저 출판사로 통합되면서 군소 출판사들이 다 죽어요. 우리도 그 길로 가는 게 아닌가 염려스러운데 사재기하고 줄세우고 하는 데서 자본의 힘이 큰 쪽이 살아남을 거란 말이지요. 군소는 죽고…… 생각해보세요. 지금 1, 2만부 팔리는 젊은 작가들, 이거 다 잊혀진다고. 문학까지도 같이 도태되는 거예요. 몇몇 브랜드가 있는 작가들은 살아남을 수 있겠죠. 이름이 있으니까. 하지만 막 시작한 신인들, 5천부 정도 팔리는 새롭고 가능성이 있는 작품들이 베스트쎌러 줄세우기 속에서 흔적이나 남길 수 있겠어요? 그냥 묻혀버린다고. 그러면 독자와의 접점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는가? 그러다 보면 자포자기하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정말 문단 내에서 캠페인이라도 벌이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평론가 편집자는 교통정리와 안내를 해내면서 정당한 가치평가를 통해 작품과 독자를 연결시켜야 할 겁니다.
심진경 그럼 선생님은 한국문학의 미래가 그렇게 어둡지는 않다고 보시는군요.
황석영 밝다 어둡다 점을 칠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결국은 재능의 문제이고 작가들이 얼마나 문학에 전력투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어요. 문학에 자기 모든 인생을 바쳐야 하거든. 그런데 요새는 그 점이 어딘가 약한 것 같아.
심진경 지금 몇몇 작가들은 소설을 개인 블로그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요.
황석영 그게 자폐되는 길이에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시장이 아니라면 그 어느 곳에서 대중과의 접점을 찾겠어요? 시장에서 만나지 못하면 대중을 변화시킬 수 없고 세상도 달라지지 않아요. 그리고 평론가 편집자 들은 끊임없이 본격문학의 가치평가를 해내고 북돋우면서 독자들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겁니다. 나는 근대를 적응해내고 뛰어넘는다는 담론을 기억하고 있어요.‘새로운’것은 스스로 자기 땅의 독자들과 더불어 만들어내는 것이지 남에게서 빌려오는 게 아니란 말이죠.
인터뷰 내내 나는 그가 참으로 젊다는 생각을 했다. 정치와 문학에 대한 허무주의에 빠진 나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지나칠 정도로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익히 알다시피 결코 그의 삶이 평탄했기 때문은 아니다. 베트남전과 광주항쟁, 그리고 방북과 투옥 등의 경험은 그에게 깊은 정신적 외상을 남겼고 꽤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새롭게 기획하고 자신의 문학적 변화를 갈망했다. 고통은 그를 더욱 활기차고 너그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지금의 젊은 작가들을‘자신이 돌아갈 정처’라고 말한 대목이었다. 물론 그에게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특유의 유연성과 포용력으로 젊은 작가들의 장점과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이 의외로 놀라웠다. 거기에는 동업자로서의 연대감이나 의리가 작동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문학을 늘 현재진행형으로 만들려는 그의 의지 또한 중요하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그것은 황석영이라는 이름의 신화를 그 스스로 허물면서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려는 의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젊은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