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과 현장
한국 민주화 다시 보기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김선철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한국 사회운동과 민주주의 전공. 바나드(Barnard)대 등에서 사회과학 방법론, 사회운동, 한국정치 강의를 맡고 있음. jollary@yahoo.com
80년대 이후 남한의 민주화과정은 독특한 경로를 그려왔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도입된 후 사회운동이 제도화되거나 탈동원되었던 다른 나라들의 민주화와 달리, 남한의 민주화는 끊임없이 아래로부터의 동원을 동반했고 사회운동은 정치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처럼 역동적인 남한의 현실은 사회운동이나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을 더욱 새롭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잠재력이 얼마나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되려 남한 민주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기성 이론에 비추어 현실을 보거나 강한 규범지향에 이끌려 현실을 진단하는 시도들로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다. 반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론화를 모색하는 시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남한 민주화와 관련해 많은 이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몇가지 가정들과 그 근저에 있는 인식론적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민주주의는 도달되(어야 하)는 어떤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사회정치적 투쟁과정 속에서 잠정적이고 때로는 우연적으로 조정된 합의의 결과로 파악된다. 이러한 시각은 민주주의를 이상적인 제도의 조합이나 사회운동 투쟁의 과제로 파악하는 다분히 규범적인 접근과 달리, 민주주의를 현실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1
이러한 관점 아래 이 글에서는 권위주의의 유산이 민주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남한의 민주화가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는, 그리고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우리의 정치적 과제라는 다소 상식적인 이야기들을 색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민주주의에 관한 많은 논의가 정형화된 도식을 따르고 있으며, 현실화되지 않은 가상의 결과를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그에 맞추어 현실을 해석하려는 목적론적 경향이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과정으로 파악할 때 이러한 문제가 극복될 수 있으며 좀더 적극적인 이론화도 가능할 것이다.
불완전한 민주화 이행의 역설적 결과
남한 민주화를 다룬 대부분의 저작들은 남한의 민주화가 상당부분 권위주의세력의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따라서 권위주의와 강한 연속성을 가진 불완전한 이행이었음을 지적한다. 강력한 국가의 억압력, 보스 중심으로 사당화(私黨化)된 정치정당, 강력한 노동통제, 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고 앉은 권위주의적 습속 등 과거의 유산은 당연히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또 민주화의 정착을 저해하는 장애물로 취급되고 있다.
권위주의의 유산이 민주화의 길에 제약을 가한다는 사실은 반박될 수 없다. 그러나 불완전한 민주주의나 권위주의의 유산 때문에 민주화가 더디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너무 단순한 논리가 될 수 있다. 이 논리는 조금 더‘완전한’방식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면, 즉 권위주의정권과 좀더 완전하게 결별했더라면 오늘날 민주주의의 질은 훨씬 더 나아졌을 것이라는 가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남한의 민주화와 유사성이 많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공과 브라질은 모두 7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되었던 소위 민주화‘제3의 물결’의 일부분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동원이 민주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던 나라들이다. 하지만 민주화의 첫 돌파구가 열린 이후 두 나라가 보여준 경로는 상당히 달랐다. 남아공의 민주화는 그 드라마틱했던 과정만큼이나 과거와의 단절도 강했다. 협상과정에서 백인들의 사회경제적인 지위가 보장되긴 했지만, 정권교체나 과거사 청산 등 적어도 정치적 차원에서 과거와의 단절은 확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와 강하게 단절했던 혹은 좀더‘완전한’민주화 이행의 양태를 보였던 남아공은 그래서 더 민주적이 되었는가?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과거 인종주의정책에 강력히 저항했던 운동세력은 눈깜짝할 사이에 새 정권으로 몰려들었으며, 사회운동은 급속히 탈동원되었다. 선거 때마다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받는 집권당은 관료화되기 시작했고, 이를 제대로 감시해야 할 시민사회는 텅 비어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남아공의 집권세력은 투투(Desmond Tutu) 주교가 공개적으로 그 비민주성을 지적할 정도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어졌다.2
브라질은 이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 70년대 군부정권에 의한‘위로부터 통제된 민주화,’즉‘불완전한 민주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브라질에서는 민주화가 아주 더뎠다. 하지만 그 더딘 과정과 모호한 정치체제의 빈틈을 비집고 사회운동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사회운동은 80년대 들어 절차적 민주주의를 브라질 땅에 안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변화속도는 남아공보다 훨씬 느렸고, 과거의 유산은 브라질사회를 채우고 있었지만 그것이 민주화를 가로막진 못했다. 되려 브라질사회에 뿌리내린 권위주의는 더 많은 민주적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응결점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브라질은 (비록 심한 빈부격차와 조직폭력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전세계 민주주의자들의 관심을 받는 새로운 민주적 제도와 실천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3
남아공과 브라질의 비교는 민주화의 불완전성이 이후의 민주화에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권위주의와의 강한 연속성을 강조하며 민주화의 한계를 부각시키는 논의는 역사가 단선적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들쭉날쭉한 흐름을 띠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4 권위주의의 유산이 새로운 체제에 완전히 녹아들어 더이상 어떤 식으로도 지울 수 없게 되었다면, 민주주의의 심화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권위주의의 유산과 새롭게 등장하는 민주적 요구가 경쟁하게 될 경우, 민주화는 더 역동적인 형태를 띠며 계속 진행될 수 있다. 남한의 민주화가 그러했다.
수년에 걸친 반체제 저항에 대한 대응 성격을 지녔던 87년의 6·29선언은 두가지 역사적 경향을 창출해냈다. 한편에서 그것은 권위주의적 상황을 일단락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와 함께 새로운 게임룰이 모색되었다. 선거를 비롯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제도들이 새로운 갈등해소 양식으로 자리잡을 태세였고 정상화의 기류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권위주의와의 강한 연속성은 동시에 다른 기류를 생성해내고 있었다. 노동자 농민 빈민 교사 좌파지식인 등은 권위주의시대에 큰 희생을 당했으나 새로운 게임룰의 협상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제도권 내에서 자신의 대변자도 찾지 못했다. 이들은 새롭게 열린 정치공간을 통해 목소리를 높여봤으나 돌아오는 것은 탄압뿐이었다. 이들에게 새로운 게임룰은 위협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조직화를 통해 6·29가 이끌어낸 정상화의 기류에 반하는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후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다. 87년 민주화 이후 시위 횟수는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기만 했고 더욱 조직적인 양태를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은 기본적으로 이미 합의된 게임룰을 안착시키느냐 아니면 새로운 게임룰을 만들어내느냐를 핵심으로 했다. 제6공화국 헌법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냈으나, 동시에 그 부산물로 새로운 정치세력과 그들의 저항도 낳았다. 민주주의가 조금이라도 발전했다면, 많은 부분 87년 이후 새롭게 형성된 운동세력의 도전과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만약 87년 대선에서 노태우 대신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당선되었더라면 변화의 체감온도는 훨씬 컸을 것이다. 적어도 피부로 느끼는 수준에서 권위주의와의 단절 정도도 컸을 것이다. 민중의 조직화도 좀더 친화적인 환경에서 잘 이루어졌을 것이며, 민중지도자들과 정부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의 과제는 정부와 몇몇 사회지도자들 간의 협약을 통해 추진되었을 수 있고,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힘은 더 약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반면 급속한 변화에 당황한 우파들의 사회운동은 일찍부터 더 거세졌을지도 모르고, 이 과정에서 지금껏 경험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사회적 갈등양상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5
표면적으로 민주주의에 불리한 조건이 어떻게 장기적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데 기여하는지, 그 역설적인 과정에 대한 더욱 주의깊은 관찰과 분석이 요구된다. 이는 정치변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민주화를 권위주의라는 한 정치씨스템에서 민주주의라는 다른 씨스템으로 이행하는 것이라 이해하기에 현실은 너무 복잡하고, 어떤 사건의 즉각적인 결과만을 놓고 인과관계를 따지기에 현실은 너무도 무수한 사건의 연쇄들로 얽혀 있다. 이 복잡다단함과 역동성을 추적하는 것, 이것이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첫번째 열쇠이다.
사회운동과 제도정치
앞의 논의에서 나는 사회운동이 민주화과정에 얼마나 중요한지 암시했는데, 그렇다고 사회운동이 있어야만 민주화가 진행된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과거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한 동원은 때로 민주주의의 역전을 가져올 수도 있다.6 따라서 사회운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다른 행위자들과 상호작용하는지 그리고 그 상호작용이 어떻게 정치과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미진하다. 비판 사회과학계의 논의도 그런 과정에 대한 경험분석보다는 사회운동의 힘을 키우기 위한 정치프로젝트 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다. 상대적으로 활성화된 남한의 사회운동과‘사회운동을 통한 민주화’라는 담론이 그 배경에 작용하는 것 같다. 하지만 87년을 보며 사회운동에 의해 민주화가 쟁취되었다고 단순화하는 것은 민주화가 순전히 양김씨의 지도력에 의해 획득되었다고 보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인식이다.
87년 6월항쟁은 그 자체로 아래로부터의 동원이라는 측면을 담고 있다. 하지만 6월항쟁의 핵심에는 제도권 야당 신민당과 그 배후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던 양김씨가 있었다. 87년 6월의 거리를 가득 채웠던‘직선제 개헌’이라는 구호도 85년 총선의 성공 이후 신민당이 시작한 전국적 캠페인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었다. 80년대 초반 자유화의 물결 속에 85년 총선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둔 신민당은 학생운동 등 풀뿌리 사회운동조직들과 결속되어 있었지만,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전술은 집권 민정당과의 정치협상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회운동조직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동원은 이들의 정치협상에 힘을 실어주는 한도 내에서 수용되었다. 사회운동조직들은 있었지만 이들은 제도권 야당 혹은 양김씨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 자율성을 가지고 지도력을 행사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6·29선언 이후 거리정치의 사령부 역할을 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양김씨의 분열에 따라 탈동원되고 분열된 것은 당시 사회운동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87년 6월항쟁을 수사적인 차원에서‘시민사회의 폭발’이라 할 수는 있지만, 엄밀한 차원에서 사회운동의 동원이라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87년 6월항쟁을 사회운동으로 파악한다 할지라도 이 사회운동은 제도권 정당의 지도력에 의해 규정된, 제도권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성이 상당히 제한된 사회운동이었다. 학생운동을 빼고는 독자적 기반을 가진 사회운동조직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깃발이 오르기 전까지 저항은 무정형적이었다. 전노협 전농 전교조 등 독자적 대중기반을 가진 조직들이 형성되고,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련 등 이슈 중심적 시민운동이 확립된 87년 이후의 사회운동 지형과 비교해보면 이 점은 뚜렷해진다. 이런 면에서 보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남한의‘사회운동’은 87년 민주화의 결과였지 그 원인은 아니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사회운동이 어느 정도까지 87년 6월항쟁과 그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해야 할까? 제도권 야당이 민주화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동원의 물결에 올라탄 것이라 봐야 할까, 아니면 그러한 동원조차 제도권 야당과 양김씨의 지도력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 해야 할까? 신민당과 양김씨도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의 한 부분이었다고 한다면 문제는 쉬워지지만, 그럴 경우 정치사회에서 독립된 시민사회, 혹은 정당활동과는 다른 영역을 가지는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의 분석력은 약화된다. 문제가 쉽지 않다. 제도권에서 독립된 자율적 동원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답이 나올까?
하지만 그럴 경우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6월항쟁 이전의 구로동맹파업과 소위‘인천사태’는 제도권 세력과는 다른 독자적인 이해를 가지고 아래로부터의 동원을 이루어냈던 몇 안되는 사례들이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이 사건들에 우리가 사후적으로 부과한 역사적 의미를 넘어선다면) 그리 성공적인 동원이 되지 못했고, 정권은 상대적으로 쉽게 동원을 주변화했다. 6·29선언에 이르는 사건전개의 연결축이 직선제 개헌에 있었다고 본다면, 커다란 저항의 물줄기에 포함돼 있었다는 것 말고 이 두 사건은 6·29를 끌어내는 데 그리 핵심적인 원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유사한 사례들은 많다. 상대적으로 열린 정치공간을 활용해 대규모 동원을 이뤄낼 수 있었던 87년 노동자대투쟁과는 달리, 88년 노동법 개정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동원은 상대적으로 외로운 투쟁이었고 가시적인 결과도 얻어내지 못했다. 전경에 의한 한 대학생의 죽음으로 촉발된 1991년 5월의 대규모 동원은 한달이 지나자 급속하게 잦아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지방선거를 둘러싼 집권당과의 정치협상에서 성과를 얻어낸 야당이 거리정치에서 빠져나간 것과 궤를 같이했다.
역으로 사회운동이 제도권 내의 지지세력을 만났을 때 동원의 규모와 효과는 커졌다. 93년부터 한총련에서 시작되었던‘전두환·노태우 구속투쟁’은 초기에는 몰락해가는 학생운동의 과격성만을 보이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나, 두 해가 지난 95년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내부 권력갈등을 겪고 있던 김영삼이‘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김영삼정부 이후 급속하게 확장된 시민운동이 또다른 관점에서 이 이슈를 제기하고 있었다. 무언가 위아래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청산을 위한 동원은 광주특별법 제정과 두 전임대통령의 구속이라는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사례로 귀결되었다.
1997년의 노동자총파업과 2000년의 총선연대도 비슷했다. 이 두 사례는 일견 사회운동의 독자적인 동원이자 제도정치권을 위협하는 성공적인 시민사회의 동원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배경에 제도권 행위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원내 다수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 통과를 계기로 폭발한 97년 노동자총파업은 결국 대통령의 사과,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합법화로 이어졌다. 국회 날치기 통과라는 구태에 대한 대중적 반발도 있었지만, 날치기 법안이 노동법뿐이었으면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노동법과 함께 안기부법도 날치기 통과되었고, 이것에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 야당의 반발과 저항이 각종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되는 가운데 총파업의 정당성도 커졌음은 성공적 동원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2000년 총선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외형상 시민사회와 정치사회가 충돌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각 정당의 입장과는 또 다르게 낙선후보를 경쟁자로 둔 후보들은 총선연대의 낙선자 명단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총선연대의 활동은 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제도정치권이 단합된 모습으로 총선연대의 캠페인에 대응했다면 그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기와 장소를 막론하고 성공적인 아래로부터의 동원에는 대부분 이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제도권 내의 행위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직간접적 개입이 사회운동의 대의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라 믿을 근거는 없다. 그보다는 아래로부터의 동원을 지렛대 삼아 정치권에서 자신의 이해를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가 더 강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없이 사회운동 자체의 힘만으로 성공적인 동원을 이뤄냈던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운동이 민주화와 개혁의 추동력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극화해 보여주려는 저널리즘적 접근일 수는 있어도 엄밀한 분석은 되지 못한다. 사회운동과 제도정치가 관계맺는 방식과 그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경험적 분석이 축적될 때에야 우리는 사회운동이 민주화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공고화의 신화
90년대 초반 사회구성체 논쟁이 사그라든 자리는 시민사회 논쟁이 차지했고, 다시 김대중정부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사회과학계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남한의 민주주의를 다룬 거의 모든 논의는‘공고화의 지체’를 낳은 여러 원인들을 지적하고‘공고화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바야흐로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정언명령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공고화를 민주주의가 되돌릴 수 없이 안착되는 과정 혹은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개념에는 더 많은 전제들이 숨어 있고, 이것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때로 곤혹스러운 상황을 야기하기도 한다.
얼핏 보면 더이상 권위주의로의 회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왠지 공고화의 이상적인 모습과는 다른 것 같다. 한동안 민주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던 사회운동이 언젠가부터 애물단지가 되어 성숙해질 것을 요구받는 현실은 이런 딜레마를 잘 드러낸다. 민주화 이행기와 공고화의 단계에서 사회운동(혹은 시민사회)의 역할이 다르다는 (혹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근거라도 제시되면 좋을 것 같은데, 공고화가 원래 그런 거라는 말 외에 딱히 어떤 이유도 없다. 하여 권위주의의 해체를 핵심논리로 삼는 이행기에는 비합법적 시위도 용인되지만, 제도정치와 정치문화의 안정을 핵심으로 하는 공고화의 단계로 접어드는 순간 시민사회는 더‘문명적’(civil)일 것을 요구받게 된다.
언뜻 맞는 이야기 같기도 한데, 이런 입장은 먼저 개념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현실을 해석할 뿐 딱히 어떤 경험적 근거에 기초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역사를 몇단계로 나누고 각각의 단계에 특정한 구성원리를 귀속시키는 체계논리(system logic), 그리고 특정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필연적인 진화를 가정하는 목적론적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 간의 상호작용이 평형(equilibrium)을 이룬 공고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가정이 있다.
이러한 접근은 몇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민주적 공고화의 단계가 이행기와는 다른 어떤 원리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공고화 국면의 특징을 기술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보통 공고화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판단되는 나라들, 그러니까 서구 민주주의국가들에서 찾기 마련이다. 비서구사회들이 반드시 서구 민주주의의 경험을 따라가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공고화 개념에는 그래야 한다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이슬람교나 유교 혹은 기독교 등 어떠한 문화적 배경도 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지지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문화적 전통과 지향이 민주주의에 가장 적합하다는 사고의 뿌리는 깊다. 이런 사고는 소위 정치문화를 강조하는 접근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났으며,7 남한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다루는 많은 저작들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전제를 받아들여왔다.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정치문화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변화’라는 단어가‘선진화’처럼 읽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것은 곧 서구사회의 정치문화로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프랑스, 스웨덴은 정치제도와 배경이념이 다른 만큼이나 정치문화도 다르며, 변화의 방향을 나타내주는 모형도 특별히 정해진 것이 있을 리 없다는 점에서 이는 허상에 가깝다.
공고화의 개념틀은 방법론상으로도 문제를 낳는다. 그것은 서구 민주주의에 이미 존재하는 제도나 조건에 비추어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비교는 현실분석을 위해 아주 유용한 방법이지만, 이상화된 대상과 비교할 경우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보다는 이상적 모델에는 있으나 우리에게 없는 것들만 골라내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공고화에 관한 연구들은 공고화의 이상형에서 남한의 현실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왜 동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공고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로 가득차게 되었다. 민주적 공고화의 실내용은 무엇인지, 이 개념이 얼마나 타당하고 현실분석에 도움이 되는지 등의 질문은 애석하게도 거의 던져지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의 개념틀도 마찬가지다. 이 삼분법은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개념도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를 규범적으로 보여주는 틀이기도 하다. 즉 정치사회 혹은 정당체계가 효과적으로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자 현실분석을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느 이론이나 개념틀처럼 이 삼분법도 현실을 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현실을 잘 간취해내는가의 문제이다. 현실은 딱히 그 이념형대로 작동하지 않는데도 이 개념틀을 가지고 현실을 분석하려 한다면, 현실에 대한 우리의 객관적 이해는 깊어지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규범적으로 이것이 더 올바른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 개념틀대로라면 정치사회가 효율적으로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게 되었을 때, 즉 각 요인들 간의 균형과 통합이 일단 이루어지고 나면 더이상의 변화나 발전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 모델의 경험적 기반이 되었던 미국이나 유럽 등 소위‘선진’민주주의국가들이 어딘가 너무 화석화되었다거나 변화의 여지가 없다고 느낀다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 여겨지는 서구사회들도 최근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심한 갈등과 혼란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모국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민주주의제도가 도입된 이후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기까지 2백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그 어떤 곳보다 많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해왔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원형이 되어버린 미국의 민주주의는 노예제와 공존했고 해방된 노예들이 선거권을 갖기까지는 피비린내나는 투쟁을 거쳐야만 했다. 민주주의의 모범국가이자 중립국인 스위스의 여성들은 1970년대 초까지 투표권이 없었다. 하지만 남한에서 공고화를 논하면서 이런 사실을 끄집어내는 경우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모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차피 민주주의는 분석적 도구이자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이념형이나 분석모델도 다 어느정도는 현실에 대한 관찰을 근거로 해서 나온 것임이 분명한데, 특정 현실이 어떤 모델에 딱히 들어맞지 않을 때 우리는 고민에 빠진다. 이럴 경우 그 현실을 잘 분석해서 원래의 모델을 수정·보완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학문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남한의 민주화와 관련된 논의 속에서 그러한 시도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 속에서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모델로서의 민주주의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경향만 과도해지는 것 같다.
역동적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정치제도란 완벽할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배제의 논리를 지니기 마련이다.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제도라 할지라도 다른 집단에 비해 더 불이익을 받는 집단은 있을 수밖에 없다. 정책결정과정에 접근이 제한된 사회집단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자 할 것이다. 권력집단이 자신들의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 권력에 대한 도전은 계속될 것이며 그러한 도전 없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의 주류이론은 그러한 시민사회의 도전이 정당을 매개하는 것이 민주주의라 못박고 있지만,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어차피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그림도 결국 사회정치적 투쟁과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투쟁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외연과 내포도 변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모델을 가지고 현실을 파악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정치과정을 추적하면서 행위자들이 만들어가는 현실 민주주의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오늘날 비판 사회과학계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료 삼아 연구를 진행하는 풍토보다는 각자의 규범지향을 담은 개념틀에 따라 현실을 정의하고 과제를 도출하는 것이 주된 논의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개념틀은 서구에서 직수입되어 적용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남한의 현실을 보고는 있으나 그 현실을 제대로 잡아내고 개념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개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도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에 기초해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몇가지 가정과 그 인식론적 전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보다는 현실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정적인 제도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보다는 역동적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에 주목할 것을 제안했다. 그래야만 개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좁힐 수 있으며, 서구 이론의 적용 대상이 아닌 새로운 이론 형성의 밑바탕이 되는 남한의 민주주의 현실을 포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__
- 이런 접근은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발생·전개·변형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해왔던 존 마코프(JohnMarkoff)나 찰스 틸리(Charles Tilly) 같은 사회사가들의 접근과 일맥상통한다. John Markoff, Waves of Democracy: Social Movements and Political Change, Pine Forge Press 1996; Charles Tilly, Contention and Democracy in Europe, 1650-2000, Cambridge Univ. Press 2003; Charles Tilly, Democracy, Cambridge Univ. Press 2007. 또한 민주화, 혁명, 사회운동, 집합행위, 일상적인 정치과정 등 서로 달라 보이는 정치과정을 관통하는 인과 메커니즘을 찾고자 하는 다툼의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문제의식과도 맞닿는다. Doug McAdam, Sidney Tarrow and Charles Tilly, Dynamics of Contention, Cambridge Univ. Press 2001; Sidney Tarrow and Charles Tilly, Contentious Politics, Paradigm Publishers 2006.↩
- 2005년 봄 아파르트헤이트를 주도했던 민족당(National Party)은 더이상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자신이 과거에 그렇게 탄압하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통합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당체제에 대한 우려가 많았는데, 이 사건으로 그런 우려는 확실하게 현실화된 듯하다.↩
- 2002년 룰라 대통령 당선 이후의 변화는 상당부분 남아공의 궤적을 따르고 있다. 노동자당의 집권과 함께 민주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노동조합연맹(CUT)과 지역공동체 조직들은 중앙과 지역 차원에서 급속히 체제내화되기 시작했고, 이는 관료화로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운동의 영역이 좁아진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완전한 민주화의 결과라기보다는 성공한 민주화 혹은 집권한 사회운동의 역설적 결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 이런 시각은 경로의존(path dependence)의 다양한 방식과 관련한 역사사회학의 논의에서 종종 제기되는 것이기도 하다. James Mahoney, “Path Dependence in Historical Sociology,” Theory and Society, Vol. 29 No. 4; James Mahoney, The Legacies of Liberalism: Path Dependence and Political Regimes in Central America, Johns Hopkins Univ. Press 2001; Sidney Tarrow, “The People’s Two Rhythms: Charles Tilly and the Study of Contentious Politics,”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Vol. 38 No. 3.↩
- 역사는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현실화되는 역사는 하나뿐이다. 역사에‘만약’은 없다지만, 이는 많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데 필수적인 방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베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Jr.)의‘억눌린 역사적 대안’(suppressed historical alternative)이란 개념은 이를 잘 정리한다. “역사는 종종 사후적 관찰같이 기만적일 수 있는 연구과정에 의해 은폐되거나 제거되어버린 억눌린 가능성과 대안들을 품고 있다. (…)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설명은 왜 다른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전제한다.” Barrington Moore Jr., Injustice: The Social Bases of Obedience and Revolt, M. E. Sharpe Inc. 1978, 376~77면.↩
- Guillermo O’Donnell, Modernization and Bureaucratic-Authoritarianism: Studies in South American Politics, Univ. of California Press 1973.↩
- 이와같은 정치문화적 접근은 20세기 초반 막스 베버(Ma xWeber)에서 시작하여 최근 쌔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프랜씨스 후꾸야마(Francis Fukuyama),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 등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회과학의 전통을 대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