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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6월항쟁 20년, 새로운 통일담론을 위하여

 

 

이승환 李承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주요 논문으로 「민간통일운동의 현황과 과제」 등이 있음. sknkok@paran.com

* 이 글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희망제작소가 공동주최한 토론회‘6월항쟁의 현재적 의미와 시민사회운동의 진로모색’(2007.6.7)의 발제문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평화체제의 전망」을 대폭 수정·보완한 것이다.

 

 

1. 6월항쟁 20주년과 통일담론의 변화

 

누구나 인정하듯이, 지난 20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는 통일담론이었다. 지난 87년 이래 탈냉전과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민족국가적 패러다임이 도전받게 된 세계적 상황과 대조적으로, 한국사회에서는 통일담론의 그늘 아래 민족국가적 패러다임이 여전히 큰 위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분단된 한반도에서 냉전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현실적 상황과 함께, 통일이‘정상적’민족국가로의 발전을 보장할 것이라는 강력한 소망이 동시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담론이 세계화시대를 맞이한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중요한 출구가 되었다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통일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통일에 부여하는 의미는 더이상 모든 사람에게 균일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뉴라이트의 등장과 구좌파의 퇴조 등 이념구도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통일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통일담론 무용론까지 제기되었다. 그 결과 6월항쟁 이후 20년이 흐르면서 한국 시민사회의 통일에 대한 태도, 통일담론을 다루는 입장은 매우 다양해졌다.

세계화와 탈냉전 그리고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한국의 시민사회는‘평화와 인권’‘생태와 환경’‘참여와 정의’등의 가치들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에 따라‘통일’문제는 1차적 관심의 대상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시민사회는 통일담론과 관련하여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나, 전통적 통일담론(민족우선주의적 통일담론)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통일담론이나 전망을 제시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1

그러나 시민사회 전반의 이러한 소극성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전통적 통일담론과 구별되는 새로운 흐름들이 나타났는데, 그 하나는 통일담론 무용론 내지 평화담론으로의 이전론이고,2 다른 하나는 주로 대북인도지원과 사회문화교류 등을 통해 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화해협력운동’의 흐름이다. 후자를 하나의 담론체계로 묶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전통적 통일담론과 평화담론 사이에 넓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중도적 통일담론’정도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3

 

 

2. 87년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전개

 

87년 이후의 남북관계

이 시기의 남북관계는 한마디로 남북관계의 주도권이 남으로 점차 전이되었고, 남의 경우 시민사회에서 제기한‘남북의 공존과 점진적 통일 방침’이 국가적 차원에서 수용되어갔으며, 북의 경우에는 통일이라는 언술적 공세는 지속되면서도 그 내용은 사실상‘현상유지’를 의미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갔다고 정리할 수 있다.

북의 공세적 대남정책과 남의 북방정책이 교차하던 노태우정부 시기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변화는 89년의 문익환-허담 4·2공동꼬뮈니께의 발표와 북한의 유엔 남북동시가입 인정 및‘하나의 조선’정책 포기였다.

89년의 4·2공동꼬뮈니께는 “쌍방은 (…)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 (…)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통일문제에서 남과 북이 기본원칙에서‘공존’그리고 과정에서‘점차성’에 합의한 역사적 문건이었다.

한편 91년 9월의 유엔 동시가입은 북한 스스로 남한정부의 실체를 인정하고‘법적 분단’의 공식화를 수용한 것이었다. 이는‘하나의 조선’이 아니라 남북의 공존과 사실상의‘현상유지’라는 방향으로 북한의 대남정책이 변화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해 12월에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를‘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하는데, 이 역사적 문서는 북의 변화된 대남정책이 아니었다면 합의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김영삼정부하의 남북관계는 전형적인 널뛰기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남과 북 모두, 특히 김영삼정부의 천박한 갈지자 대북정책으로 인해 남북관계 진전의 역사적 호기를 놓쳐버린 시기였다.

‘국민의 정부’로 불리던 김대중정부의 통일정책은 기본적으로 직접적인 통일보다는 교류·협력과 평화정착을 앞세우는‘선평화공존 후통일’, 즉‘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추구했다. 이는 4·2공동꼬뮈니께에 나타난 공존과 점진성의 원칙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의 결과로 98년에는 소떼 방북, 금강산관광 등 민족화해의 상징적 사건들이 전개되었으며, 2000년 6월에는 드디어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고‘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6·15공동선언에서는 4·2공동꼬뮈니께의‘공존의 원칙과 과정의 점진성’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으며(“남의 연합제 안과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의 공통성을 확인”),‘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와 함께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다방면에 걸친 교류협력이 천명되었다.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개성공단 건설과 철도·도로 연결사업 추진 등 화해협력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다방면에 걸친 교류협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협력 기조는 북핵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전략적 개입과 북한의 대미긴장 확대정책으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더디게 진행되었고,‘평화번영정책’을 내세운 노무현정부의 등장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87년 이후의 북미관계

이 시기 남북관계가 여러 곡절 속에서도 큰 틀에서 화해와 협력의 방향으로 전개되어갔다면,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 의해 한반도에서‘평화’에 대한 위협은 증폭되어왔다. 두차례에 걸친 북핵사태시 한반도를 뒤덮었던 전쟁의 위기는 한국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상황에서 전개되었기에 더욱 심각했다.

90년 9월 북의 김일성 주석은 한·소수교를 통보하러 온 소련의 셰바르드나제 외상을 만나주지도 않은 채 조·소 상호원조조약의 파기와 핵무기 개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통보했다. 이것이 사실상 기나긴 북핵위기 국면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4 그런 점에서 제1차 북핵위기는 애초에 북한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였다. 북한은 사회주의체제 붕괴와 남북격차의 확대라는 상황에서 핵개발과 북미 적대성 해소를 위한 대미협상을 국가적 전략으로 채택했는데, 이 전략에서 핵의제는 북미협상을 강제하는 핵심기제였다.

북한의 93년 3월 NPT탈퇴와 94년 5월 영변의 5메가와트 원자로에서의 핵 폐연료봉 제거작업 이후, 미 군사당국은 북폭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했고 한국정부와는 사전협의도 없이 그 사실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는 김영삼정부 당시 한미관계의 일방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한국 주재 미 관계자와 가족 들의 철수 예정일이었던 6월 17일에 김일성 주석의 초청으로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하고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됨에 따라 제1차 북핵위기는 진정되었다. 그후 수차에 걸친 북미협상의 결과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합의틀(94.10)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합의는 사후의 문건과 행동 들이 보여주었듯이 상호신뢰의 산물이 아니라 상호불신의 결과이자 상대방의 위반을 전제한 합의였다. 분석가들에 의하면 북한은 제네바합의 이후‘대미인식’을 핵심축으로 하여 격렬한 내부논쟁을 거치게 되는데, 1998년에 이루어진 선군주의(先軍主義)와 강성대국(强盛大國)의 천명은 그 논쟁의 결과물이었다.5 이는 북한이 제네바합의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자신의 전략적 선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2004년의 제2차 북핵위기는 제1차 위기와 달리 한반도문제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개입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2004년 10월 제임스 켈리 특사의 방북 결과를 설명하면서 북한이 핵개발을 위한 우라늄농축 프로그램(HEU)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고 이로부터 북핵문제는 다시 국제적 쟁점이 되었다.

북핵문제가 불거지기 직전 한반도와 동북아에서는 남북관계의 가속적 발전, 북일관계 정상화 추진 등 국제질서 변화가 매우 가시화되던 상황이었다. 즉 부시행정부가 새롭게 북핵문제를 제기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구도에서 벗어나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변화 움직임에 대한 일종의 공세적 방어라는 측면을 띠고 있었다.6

제2차 핵위기 도래 이후 북한은 미국의 무반응에 대응하여 핵공세의 수위를 상승시켜갔고, 결국 핵보유 선언과 미사일 시험발사, 핵실험을 차례로 강행했다. 이렇게 해서 2000년 이후 한국의 주도 아래 미국과 북한의 조율을 통해 한반도 냉전 해체를 추진하려던 시도는 미국의 전략적 개입과 북한의 핵개발 추진으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북핵위기에는 제1차 위기와 달리 노무현정부가 군사적 수단을 배제한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남북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북핵문제는 6자회담을 통한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는 쪽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6자회담은 미국이 전쟁을 제외하고는 사용 가능한 현실적 압박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나라들과의 협력을 모색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미국이 동북아의 질서를 일방적으로 주도할 수 없을 만큼 이 지역의 역학관계가 크게 변화되었음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6자회담에서 북에 대해 미국이 취한 일관된 입장은‘선핵포기 후협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결과적으로는 북핵문제에 대한 사실상의 방치 혹은 의도적 무대응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북핵문제 등 한반도 갈등상황이 오래 지속될수록 미국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네오콘의 입장 때문이라는 것이 유력한 해석이다.7

6자회담 내내 북한은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적대적 무시전략에‘핵위협 수위상승을 통한 협상주도 전략’을 추구했는데, 핵실험은 그 정점에 놓여 있는 카드였다. 북한의 이러한 전략은 현상적으로는 관철되는 모습이었다. 북한의 핵보유 선언(05.2) 이후 북미간의 뉴욕 및 뻬이징 접촉이 있었고 9·19공동성명이 발표되었으며, 미사일 발사(06.8)와 핵실험(06.10)이 있고 나서 북미 뻬이징접촉과 베를린회담이 이어졌다. 그리고 5차 3단계 6자회담(07.2.8~13)의 결과‘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즉 2·13합의에 도달했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핵협상 전략은 최소한 리더십 수준에서는 성공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13합의는 9·19공동성명의 이행을 위한 제도적 틀을 마련한 것으로서 북핵문제가‘말 대 말’의 단계에서‘행동 대 행동’의 구체적 이행단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또한 중간선거 이후 미국의 대량살상무기(WMD) 비확산과 민주주의 확산 동시추구 전략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3. 북핵문제 20년의 결산-남과 북 그리고 미국

 

북핵문제는 현상적으로는 북미 적대관계의 산물이자, 북한의 체제유지 전략과 미국의 WMD비확산 및 민주주의 확산 전략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핵문제는 근본적으로는 동북아 질서재편을 둘러싼 각국의 전략적 충돌의 매개자이다.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20년에 걸친 북핵문제의 전개과정에서 미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의 대차대조표는 어떠할까?

우선 미국은 동북아의 질서재편과 관련하여 북핵문제를 중요한 이해의 결절점으로 파악하고 전략적 개입을 단행했지만, 결국 북한의 핵무장을 저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미국은 북핵문제를 악화하고 그 해결을 지연한 장본인으로서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상대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대화’와‘협상’자체를 거부한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로 인해 북핵문제는 난항을 거듭해왔고, 그 결과 미국은 세계적 군사재편성(GPR)이나 미사일방어체제(MD)라는 자국의 이해를 위해 북핵문제를 고의적으로 방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미국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존의 제네바합의체제와는 비교될 수 없는 고비용의 지출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9·19공동성명과 2·13합의를 통해 미국은 이제 겨우 북핵 동결조치의 시작단계에 돌입했을 뿐이고, 북한 핵시설의 근본적 불능화를 위한 기나긴 협상은 물론이고 북한에 현존하는 핵무기 제거를 위해 더욱 힘든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의 경우는, 우선 핵의제를 매개로 미국과의 관계에서 체제안전 확보를 위한 놀라운 협상력을 발휘했고 그 결과 핵무장을 통한 체제 내구력 강화에 일정부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지도부 차원의 성취와는 별개로 북한은 국가적 신뢰 하락과 함께 더 많은 체제 차원의 의제제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우선 북한은 핵위기 발생과 악화 과정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북한은 핵개발을 결정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거부와 NPT탈퇴를 감행하여 최초로 핵위기를 발생시킨 당사자이다. 또한 고비마다 핵보유 선언, 미사일 시험발사, 핵실험 등을 강행하여 핵위기를 실질적으로 증폭해왔다. 그다음으로 북한은 핵문제에 관한 한 지극히 이중적인 언술과 태도를 반복하여 국제사회에서 스스로의 신뢰를 하락시켰다. 2차 북핵위기 직후 미국이 핵유령을‘날조’하고 있다고 주장하던 북한은 일정 기간 핵문제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ND정책을 유지하다가 2005년 2월에는 공식적으로 핵보유를 선언하고 미국에 핵군축회담을 제안하는가 하면, 2006년에는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강행하면서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이중적 언술 뒤에 있는 실제적 사실은 북한의 핵전략이 대미협상용만이 아니라 실제 핵보유를 목표로 일관되게 진행되어왔다는 점이다. 즉‘미국의 대북적대정책으로 인해 자위적 차원에서 핵무장을 하게 되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2002년 2차 북핵위기 도래 이후 북한은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 제네바합의를 모두 위반한 셈이었다.

북한은 핵무기를 얻었지만 그 대신 국제적 신뢰 하락과 동북아에서의 핵확산 위기의 현실화, 한국에서의 대북인식 악화, 일본의‘보통국가화’와 재일동포 탄압 강화, 동북아에서의 미일동맹 강화 등 유무형의 수많은 댓가를 이미 치르고 있다.

한국은 북핵문제의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지만, 북미의 전략적 충돌 속에서 운신의 폭은 근본적으로 제약당했다. 한미동맹과 남북관계의 병행 발전이라는 목표는 훌륭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핵문제 진전과 남북관계가 연계되는 제약에서 늘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남북관계에서의 입지 약화와 대미·대중관계에서의 협상력 약화를 연쇄적으로 초래하는 것이었다. 남북관계의 진전과 여기서 발생하는 주도성 없이 한국은 동북아질서 재편과정에서 자신의 외교적 입지를 결코 확대할 수 없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문제는 북한의 한미 분리대응전략이다. 94년 제네바합의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은 교류와 통일 문제는 한국과, 안보 및 평화 의제는 미국과 협상한다는 기본틀을 정립하고 이를 철저히 고수해왔다. 이는 남북장관급회담과 6자회담에 대한 북한의 대응전략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즉 남북회담〓통일회담, 6자회담·북미회담〓평화회담이라는 것이다. “핵무기는 결코 남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든가, “조선반도 평화문제는 근본적으로 우리와 미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라는 언술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북한의 분리대응전략, 평화의제에서의 남 배제는 한국정부의 핵문제와 관련된 무기력을 가중시켰다. 안보·평화의제가 배제된 6·15공동선언은 이후 남북대화에서‘평화·안보의제’의 배제로 연결되었고, 그런 점에서 6·15공동선언은 불가침과 비핵화를 선언한‘남북기본합의서’와‘한반도비핵화선언’에서의 명백한 후퇴였다.8

 

 

4. 시민사회 통일담론의 재정립을 위하여

 

국가정책에 동화된 통일담론, 그리고 평화담론의 대두

지난 20년의 남북관계, 북미관계가 한국 시민사회에 던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한국의 시민사회는 그간의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서 무엇에 주목하고, 그 의미를 어떻게 반추할 것인가?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면서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문제는 한국 시민사회의 통일담론이 국가적 차원의 통일정책과 차별성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남북관계가 발전해나감에 따라 한국 시민사회의 통일담론이 남북 당국자들의 정책인식에 사실상 동화(同化)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축적되어온 한국 시민사회의 통일에 대한 구상과 꿈은 대표적 재야인사 문익환을 통해 남북 양 당국에 전달되었고, 4·2공동꼬뮈니께로 발표되었다. 여기서 천명된‘공존과 점진성’의 원칙은, 비록 남에서는 일시적으로 거부되었지만, 통일문제에 관한 한 문익환과 크게 입장이 다르지 않던 김대중정부의 출범과 함께 사실상 한국정부의 정책기조가 되었다. 이는 6·15공동선언에 4·2공동꼬뮈니께의 내용이 사실상 그대로 반영되는 것에서 증명되었고, 한국의 시민사회는 자신의 통일구상을 국가적 경로가 추구하는 통일상과 큰 틀에서 일치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80년대 후반 이래로 민족우선주의적 통일담론을 주도해온 전통적 통일운동세력은 이미 북한의 통일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향에 서 있었다.

이런 이유로 6·15공동선언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는 통일문제에 관한 한 국가적 경로의 분견대 역할(‘전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논리)이나 협치(協治) 혹은 보완적 역할(대북인도지원, 사회문화교류 등)을 수행하면서 사실상 남북 당국자 사이의 국가중심적 경로와 동화되거나 별다른 차별성이 없어지게 되었다.

민족우선주의적인 전통적 통일담론은 6·15공동선언 발표 이전은 물론 그후에도 대체로 6·15에 대한 북한식 해석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15에 대한 북한식 해석의 의미는‘민족공조를 통한 반미통일론’이다.9 실제로 이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한국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소극성이나 한미동맹에 대한 비판과 함께 미국의 대북압박전략에 대한 항거를 통해 객관적으로는 북한의 정책입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이들은 북한의 정책변화와 거의 일치하는 담론변화의 궤적을 그려왔는데, 그런 점에서 이들은 남한당국과의 관계에서 긴장 및 독립성을 견지해왔던 것과 별개로 북과의 관계에서는‘국가중심적 경로’에 상당수준 동화되어갔다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들과 다른 하나의 갈래는 90년대 이래 새로이 등장하여 주로 대북인도지원과 사회문화교류 영역에서 국가중심적 경로의 보완적 역할 혹은 협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세력이다. 이들은 한국정부의 통일정책 기조에 의식적으로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한국정부와 다른 어떤 경로의 통일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사실상의 통일’추구라는 한국정부의 통일정책 기조와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정책기조와 큰 차별성이 없다 하더라도, 이들은 국가적 분견대 역할을 수행하는 전통적 통일담론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이들은 대북인도지원과 개발협력 그리고 국가영역이 아닌 다방면에 걸친 민간부문의 교류와 협력 사업을 진행하면서, 통일과정에서 국가적 경로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다양한 영역의 사업들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영역에서의 통일 준비 혹은 정치적 통일을 넘어서는 사회문화적 통합의 토대 쌓기이다.10

기능주의라는 비판이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실사구시적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담론적 수준에서는‘중도’라 부를 만하다. 여기서 중도는 단순한 산술적 타협이 아니라 대중적 지지와 참여를 확보해내기 위한‘실사구시’의 산물로 이해된다.11 그런 점에서 90년대 이후 이런 방향의 통일단체들이 급속히 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사회현상이 그렇듯이 통일담론에서도 쇠퇴하는 것과 새로 성장하는 것이 교차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두갈래의 통일담론에 대해서, 통일담론의 평화담론으로의 이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자는 물론 후자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다. 이들은 남북관계에서 국가주도성이 증대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통일운동과 통일담론이 국가주도성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스스로를 그에 대한 들러리 역할로 축소시켰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것은‘남북관계는 근본적으로 통일의 문제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국가간 관계이고 여기에 시민사회의 역할은 보조적이다’는 명제가 도전받지 않았던, 논쟁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12

이러한 비판은 통일담론과 관련된 한국 시민사회의 전망에 대해 하나의 중요한 시각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남북관계는 북과의 관계를‘발전’시켜야 하는 측면과‘성찰적 변화’를 추구하는 양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이들은 단지‘성찰적 변화’라는 한 측면만을 강조할 뿐이다. 남북관계의 발전 없이‘변화’는 불가능하고, 평화적 변화를 원한다면‘관계의 발전’은 불가피하다. 역사적 컨텍스트를 무시한 운동의 비약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국가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없다는 이유로 전통적 통일담론과 중도적 담론을 싸잡아 동류(同類)로 비판하고 있는데, 이같이 선후나 경중이 없는 무차별적 비판은‘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대한 이들의 이분법적 해석의 산물이다.

 

새로운 남북관계 구상, ‘성찰적 연대’

지난 20년을 반추하며 또 하나 지적해야만 하는 문제는, 남북 사이의 국가적 경로가 북한의 통일·평화논의의 분리전략으로 인해 평화의제의 배제를 전제로 진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시민사회에서도 북과의 관계에서 평화의제의 배제가 기정사실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북한은‘우리의 핵무장력이 한반도 전체의 안전을 담보하고 있다’거나‘핵과 미사일은 조미 사이의 문제’라는 논리를 한국 시민사회에도 작동시키고 있다.

평화의제의 배제는 두가지 측면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진전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국 시민사회가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 틀림없다.

그 하나는 평화의제가 배제된 남북관계에서의‘공존과 점진성’원칙은 결국 현상유지의 정당화로 귀결될 것이라는 점이다. 평화의제가 배제된 점진적 통일논의는 사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이끌어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체제안전의 이름을 빌린 분단유지’의 한 변형이다. 6·15 이후 북한은 남한당국과의 관계에서‘경제지원’과‘내정 불간섭을 통한 현상유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국가적 경로에서 추구되는 이런 전략은 물론 한국 시민사회에도 동일하게 관철되고 있다.13 이것이‘통일의 수사(修辭)’와 실체적 목표로서의‘현상유지’가 양립하는 부조화의 원인이다.

6·15 이전 시대, 더 포괄적으로는 탈냉전 이전 시대에는‘평화공존과 점진적 통일 추구’가 진보였다면, 탈냉전과 화해협력이 전면화된 오늘에 와서는‘현상유지’가 더이상 진보일 수 없다. 특히 당국간 관계 차원이 아닌, 한국 시민사회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의제가 배제된‘공존과 점진성’의 원칙은 남북관계에서 더 많은 의제, 더 많은 성찰적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현단계의 역사적 요청에 반하는 일이다.

또한 평화의제의 배제로 인해 한국 시민사회는 통일담론에서 평화와 진보의 보편적 가치를 적용하는 데 일정한 혼란을 겪고 있다. 미국의 핵배치 시도에는 반핵평화를 주장하다가 북한의 핵무장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반전평화만을 주장하는 이중적 태도는 그 자체로 이미 자기모순이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평화에 관한 한, 반평화를 야기하는 세력이라면 그것이 남이든 북이든 미국이든 비판적 견제와 감시에서 배제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제 한국 시민사회는 문익환의 꿈과 구상이 국가적 경로에 반영된 이후의 현실을 점검하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공존’의 원칙과 과정의‘점진성’에 더하여 남북관계의‘성찰적 변화’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새로운 남북관계 구상을 우리는‘성찰적 연대’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와 관련한 태도 문제에서 우리 사회에는 여러 입장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북한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문제이기 때문에 북한을 내재적으로 이해하면서(즉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통일에 접근해나가자는 전통적 담론의 입장이 있고, 또 그와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는 것으로 북한의 변화를 위해서 어떤 방식이든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대표적인 예가 소위‘북한민주화운동’이다)이 있다. 이른바 평화군축론자들은 남북관계를 그 직접적 시야에 넣지 않고 있지만, 범주적으로 볼 때 내재적으로 접근하는 입장이 아니라 북한의 변화를 추구하는 입장에 서 있다고 구분할 수 있다. 또 대북인도지원운동은 대체로‘선지원협력 후변화기대’의 입장으로 보이기 때문에 현시점에서는 북한을‘있는 그대로 인정하는’태도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입장들은 모두‘남북관계의 발전’이나‘남 혹은 북의 변화’중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고, 또 관계하는 방식에서도‘협력’과‘적대’의 양극단을 오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성찰적 연대’는 이들 모두와 구별되는 새로운 남북관계 접근방식이다.‘성찰적 연대’에서 연대의 쌍방은 서로에게‘관계의 발전’과‘성찰적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협력적 변화 유발자’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공존’과‘성찰적 변화’의 동시적 추구는 불가피하게 기존의 통일운동과 시민사회운동에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그것은 담론 차원에서는 기존의 통일담론을 넘어서 평화담론의 문제인식을 접목한‘평화지향적 통일담론’을 재구축하는 작업이고, 운동의 편성에서는 대북지원단체와 사회문화교류단체, 시민단체의 결합을 강화하고 내적 역할분담으로‘대북접촉 확대’와‘의제 확장’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14 한국 시민사회의‘통일’에 대한 진정한 고뇌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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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수한 시민단체의 한 간부가 “우리 시민운동은 전통적 입장의 통일운동을 바라보면서 박수나 치고 있거나 혹은 그들의 협조요청에 들러리나 서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통일문제 아니어도 할 일은 널려 있는’한국의 시민사회가 통일문제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서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2.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대표적 논자들은 구갑우(具甲祐), 이대훈(李大勳) 등이다. 구갑우의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후마니타스 2007)는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3. 이들을‘중도적 통일담론’이라 명명한 것은 백낙청(白樂晴)의‘변혁적 중도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의‘변혁적 중도주의’와‘현재진행형으로서의 통일’논의는 이러한 흐름을 어느정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 30~31면 참조.
  4. 박명림 「북핵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비평』 2006년 겨울호 179면.
  5. 제네바합의 이후 북한의 내부논쟁의 핵심은‘미국이 과연 제네바합의를 준수할 것인가’의 문제였다고 한다. 북한의 국가전략을 둘러싸고 군사우선 대 경제우선, 군대우선 대 인민우선 입장 사이에서 벌어진 탈냉전 이후 북한 최대의 논쟁은 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인식 문제의 연장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최악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정책을 예의주시하던 김정일 위원장은 4년의 내부논쟁을 거쳐 1998년 마침내 국가의 자원과 역량을 군대에 집중하는‘선군주의’로 결론지었다고 한다. 박명림, 같은 글 180면. 그해 8월 말의‘대포동미사일 시험발사’는 선군정치의 위세를 과시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6. Selig S. Harrison, “Did North Korea Cheat?” Foreign Affairs, Vol. 84, Jan/Feb 2005.
  7. 정세현 「3代 정권 대북협상 주역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의 충격 특강」, 『신동아』 2005년 3월호 116면.
  8. 박명림, 앞의 글 183면.
  9. 박순성(朴淳成)은 “이러한 북한의 교조적 해석 또는 통일전선적 반미통일론의 핵심은 민족해방전쟁론이라고 할 수 있다. 교조적 해석에 따르면, 평화는 민족의 생존과 통일의 이름하에 군사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민족은 반미주의 또는 반제국주의의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박순성 「북핵실험 이후, 6·15시대 담론과 분단체제변혁론」, 『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 338면 각주.
  10. 이들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주로‘기능주의적 접근방식’에 집중되어 있다. 실제 이들 중 상당수가 기능주의적 접근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타당하다. 하지만 문제는 기능주의적 접근 자체가 아니라 그 기능주의적 행위자들의 목표와 전략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점에서 상당수의 중도적 담론은‘접촉을 통한 변화’라는 원론만 반복할 뿐, 관계발전의 전략적 좌표가 취약하다. 즉 문제는 기능주의가 아니라‘목표 없는 기능주의’인 것이다.
  11. 백낙청은‘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이 6·15시대의 목표이고, 이것은 “광범위한 대중이 참여하는 점진적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에서‘중도주의’노선이 불가피해지는 한편, 기존의 잣대에 따른‘좌’와‘우’사이의 중간지점을 찾는 타산이 아니라 분단체제극복을 겨냥한 합작이라는 점에서‘변혁적’인 중도주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백낙청, 앞의 책 31면.
  12. 이대훈 「남북관계에서 민족과 국가의 주도성」, 민화협 여성위원회 주최 2007 여성평화대토론회‘통일운동이 여성운동에게, 여성운동이 통일운동에게’(2007.6.7) 자료집 61면.
  13. 미국의 체제보장이 어려울 것에 대비하여, 북한은 한국과의 관계를 진전시켜‘급격한 통합’을 저지하기 위한‘통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즈미 하지메(伊豆見元) 「북한체제의 변화가 동북아정세에 미치는 영향」, 평화재단 국제심포지엄‘2·13합의 이후 북한체제의 변화를 내다보며 준비한다’(2007.6.19) 발제문 87면.
  14. ‘평화지향적 통일담론’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은 졸고 「‘안보적 통일담론’에서‘평화지향적 통일담론’으로 전환해야」, 『민족화해』 2007년 1-2월호(통권 24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