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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실어증 환자들의 빈집 순례

영화 「빈집」

 

 

강영숙 姜英淑

소설가 bbum21@hanmail.net

 

 

이 영화에 등장하는 빈집들은 견고한 동시에 위태롭다. 개량한복을 입은 부부가 다정다감한 대화를 나누며 정원을 가꾸고 사는 한옥이 있는가 하면, 꽃무늬 소파와 함께 ‘즐거운 나의 집’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아파트도 있다. 집주인의 직업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진이나 캐릭터(사진작가와 전직 권투선수)가 있기도 하고, 침입자가 그 집의 생로병사(독거노인의 시신 수습)에 자연스레 동참하기도 한다. 또 자동응답전화기를 통해 빈집의 안부를 체크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하면 씨디플레이어를 작동시켜 음악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집을 비웠던 가족들이 돌아오면서 빈집은 가족들 사이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위험한 장소로 바뀐다. 빈집들은 나름의 스토리를 지닌 채 이런저런 이유로 잠깐씩 비어 있고, 그 빈집을 노리는 영혼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여주인공 ‘선화’의 집 정원에는 그 집 주인이 중산층임을 상징하는 골프 연습시설이 있다. 선화는 골프 치듯 자신을 수시로 때리는 남편한테 맞아서 얼굴이 새파랗게 멍든 채 실어증 환자가 되어 있다. 선화의 남편은 그녀에게 말한다.“(엄청 때리고 난 뒤 사무실에 출근해서 전화로) 이 정도 사는 게 쉬운 줄 알아?”“(섹스를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자 화를 참으며)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선화는 도통 입을 열지도 않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어느날 선화는 자신의 집 안으로 그림자처럼, 나비처럼 찾아들어온 침입자 ‘태석’을 만난다. 영화는 좋은 학교를 다녔고 젊다는 것 외엔 태석에 관해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태석은 상처받은 선화의 내면이 그려낸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빈집에 누군가 들어온다는 것은 사건의 중요한 전환점임에 틀림없다.

처음에 이들의 눈은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상대방의 등을 보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등을 보고 있는 상대방을 거울을 통해 바라본다. 그러다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가 환자임을 알아보고 키스를 한다. 그리고 빈집을 남겨놓은 채 세상의 또다른 빈집 순례에 나선다.

빈집에 들어간 이들은 제사음식을 준비하듯 밥상을 차리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듯 고장난 시계와 오디오를 고친다. 또 자신의 죄를 씻어내기라도 하듯 욕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손빨래를 하고, 걸레를 들고 닦은 방바닥을 또 닦는다.어떤 집에서는 자식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노인이 홀로 죽어 있는 걸 발견한다. 이들이 정성스레 노인의 시신을 염하는 장면은 일종의 정화의식 혹은 구원의식을 표현하는 클라이맥스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빈집에 살고 있는 선화 자신, 혹은 빈집을 순례하는 태석 자신을 위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뒤늦게 찾아온 죽은 노인의 아들 부부가 이들을 신고하면서 실어증 환자들의 빈집 순례는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의 성격을 보면, 선화는 누군가 자신을 구원하러 와주길 바라는 여자다. 남편이 매일 휘둘러대는 골프채를 보고 있으면, 한번쯤은 골프채를 들어 남편을 향해 휘두르거나 커다란 유리창이라도 깨보고 싶을 텐데, 선화는 그 정도마저도 할 수 없는 습관화된 피학의 희생자이다. 몹시 신경질적인 성격의 남편 또한 (바깥에서는 얼마나 균형잡힌 시각으로 사는지 모르지만)집에서는 죽은 듯이 사는 아내와의 사랑이 불완전함을 깨닫고 늘 불안해하는 이상성격의 소유자다. 또 좋은 학교까지 나왔으면서 정착을 모르고 습관적으로 빈집들을 순례하며 살아가는 멀쩡한 청춘 태석까지, 이들은 타인과 혹은 자기 자신과의 의사소통에서 지독한 장애를 앓고 있는 실어증 환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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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내 침묵이 지배하다가 가끔씩 등장하는 대사를 보면 영화의 의도랄까 나아갈 바가 드러난다. 가택침입과 강간범으로 몰려 감옥에 간 태석은 교도관 뒤에 완벽하게 숨어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그림자놀이를 시작한다. 이 그림자놀이에 늘 당하는 교도관이 말한다. “너 왜 자꾸 숨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나머지 180도 속에 숨는 건 불가능해. 만일 그렇게 되더라도 뭘 어쩔래.” 교도관의 이 직설적인 표현 속에는 자신의 존재태를 바꿔서라도 선화를 구해주겠다는 태석의 의지가 들어 있고, 이 의지가 결국 이 영화를 판타지로 끌고 가는 힘이 된다.

사실 현실 속에서의 선화는 자살했을 가능성이 크다. 태석과 함께 갔던 그 평화로운 한옥에서 태연하게 낮잠을 자고, 이제는 남편의 말에 같이 뺨을 때릴 정도로 선화는 변했다. 어쩌면 선화는 그 빈집에 홀로 남아 태석이 감옥에서 나오기만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임계점은 거기까지이다.

감옥에서 나온 태석이 선화의 집으로 돌아가고 빈집엔 생기가 돈다. 실어증 환자였던 선화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긴 태석은 마임 배우처럼 선화의 남편 뒤에 숨어서 밥을 먹는다. 그들 셋의 장난스런 식사장면, 혹은 동거를 지켜보며 관객은 웃는다. 「빈집」의 판타지를 이해한 것이다.

현실과 환상의 고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한 영화형식의 측면에서도 「빈집」은 어느정도 성공한 것 같다. 관객은 선화와 남편이 포옹하고 태석이 남편 뒤에 서서 선화와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웃는다. 저게 어떻게 현실에서 가능해, 저건 현실도피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알레고리로서 현실을 더 깊게 이해하는 문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동안 김기덕의 영화에는 여성을 대상화하고 영토화함으로써 영화 자체를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일종의 극단적인 시각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선화가 또다른 폭력에의 의지를 갖고 있는 태석을 감싸안고자 하는 일종의 종교적이면서도 성숙한 시선이 엿보였다. 또 타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빈집이 상처받은 누군가에는 안식처가 되기도 하고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극단이 아니라 상호 소통하고 길항하는 관계의 비전이 엿보이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자막에는 『장자』의 한 구절이 나온다.“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가치 전도된 현실에 일침을 가하고 싶었다거나 영화의 판타지적 속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 말이 필요했다면 이해는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건 분명히 사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