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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김훈 소설이 묻는 것과 묻지 않는 것

 

 

김영찬 金永贊

문학평론가. 저서로 『비평극장의 유령들』 『근대의 불안과 모더니즘』, 역서로 『성관계는 없다』(공역) 『근대성과 페미니즘』(공역)이 있음. youngmarx@naver.com

 

 

1. 책임은 그에게 있다

 

김훈(金薰)의 소설은 문제적이다. 그 근거로 우리는 무엇보다 한국소설의 위기가 풍문으로 떠도는 이 시점에서 그의 소설이 유독 그 풍문에 아랑곳 않고 폭넓은 독자층의 지지를 보란 듯이 끌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해볼 수 있겠다. 그것은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 그리고 최근의 『남한산성』에 이르기까지 김훈의 역사장편소설이 이른바‘본격소설’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과 관련된 것이다.1 그리고 특별히 지적해두어야 하는 것은, 김훈의 소설이 거둔 성공이 흔히 잘못 진단하기 쉬운 것처럼 역사(물)에 대한 최근의 대중적 관심과 트렌드에 힙입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훈의 소설은 일면 그런 독서시장의 흐름에 얹혀 있으면서도, 중요한 지점에서 여타 역사소설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김훈의 역사소설이 거둔 성공의 원천은 단순히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적 외양과 소재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고 통어하는 나름의 독특하고 확고한 문학적 자기세계로써 지금 이곳의 대중에게 육박해 발휘하는 흡인력에 있다.

그러나 짐작하겠지만, 비단 그것만이 김훈 소설 고유의 차별적인 문제성을 증명하는 것이라 보긴 힘들다. 예컨대 대중적 지지로만 치자면 맥락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황석영, 은희경, 신경숙, 정이현, 박민규 등의 소설이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따라서 핵심은, 짐작대로다. 즉 그들 작가의 문학과 구별되는 김훈 문학의 문제성은 유달리 그의 소설이 각기 서로 다른 문학적 관점과 취향, 이데올로기가 투사되거나 그것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같은 대상을 놓고 왠지 모를 거부감과 열렬한 찬사가 첨예하게 공존하는 현상이 그것을 방증하는 것이며, (탐미주의자, 문체주의자, 리얼리스트, 허무주의자, 개인주의자, 보수주의자, 남근주의자, 파시스트 등과 같이) 평자의 입장에 따라 각기 달리 작가 김훈을 규정하는 저 엇갈리는 다양한 명명들의 난립이 또한 그렇다.2 그러니 정작 김훈의 소설은, 어쩌면 다양한 입장과 취향에 따라 갈리는 저 수다한 규정들에 제 몸을 내맡겨 그 입장과 취향이 교차하고 논란하며 경합하는 격전지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공백의 기표(empty signifier)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김훈의 소설을 놓고 대개 그리하듯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미안하지만 맥을 잘못 짚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그 모든 것이, 나아가 그 모든 반응들의 엇갈림 자체가 바로 김훈의 소설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김훈 소설의 문제성이고, 김훈 소설의 간단치 않음이다. 그러니 여기서 잠깐, 뜬금없겠지만 『현의 노래』의 한 대목을 떠올려보자. “야로는 세상의 단순성과 세상의 복잡성 사이에서 어지러웠고 피곤했다.”(『현의 노래』 104~5면) 김훈의 소설이 바로 저 야로의‘세상’과 방불하다. 말하자면 그의 소설은 사뭇, 단순하고도 복잡하다.

물론 야로가 그러했듯 그런 김훈의 소설 앞에서 어지러워 피곤해하는 것이 우리가 할 바는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이같은 김훈 소설의 특출한 문제성이 앞서 지적한 폭넓은 대중적 지지와 맞닿는 지점을, 그렇게 맞닿음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를 각별히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 김훈 소설의 저 문제성은, 얼핏 그리 대중적이라곤 할 수 없을 듯한 그의 고집스런 문학세계에 대한 다소 의외라 할 정도의 대중적 응답과 호응의 뒷면에 숨은 모종의 원인과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점은, 우리 시대에서는 드물게도 문학과 현실과 정치가 보이게 보이지 않게 서로 얽혀 간섭하고 대면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그 지점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가?

미리 조금 발설하자면, 거기에는 포스트-IMF시대 대중의 현실감각에 뒷받침된 정치적 무의식이 있고, 문학적으로는 김훈의 소설세계가 지금 2000년대 젊은 문학의 흐름에 저도 몰래 동참하게 되는 사연이 있으며, 나아가 그와 결부해 지금 2000년대 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짐작하고 궁리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이것은 물론 이 모든 것을 의도했을 리 없는, 그와 무관하게 고수되어온 김훈 소설의 고유한 문학세계가 자기도 모르는 새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그러니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그의 문학세계가 갖는 특별한 개성에 있다. 하나씩 살펴본다.

 

 

2. 불가피(不可避)의 미학

 

김훈의 세편의 장편소설은 모두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임진왜란(『칼의 노래』), 신라의 가야 정벌(『현의 노래』), 병자호란(『남한산성』)이 각각 그것이다. 그의 소설에 살점이 찢기고 곤죽이 되거나 모가지가 잘려나가는 죽음의 풍경이 수다하고 처절한 살육의 광기와 피냄새가 자욱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전쟁인가. 그것은 김훈의 소설을 하나같이 관통하는 의도나 자기의식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를테면 김훈의 소설에서, 전쟁이란 그가 생각하는 세상의 됨됨이를 축약해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알레고리다. 그 세상이란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적의와 맞서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곳이고(『칼의 노래』), 살아남기 위해 견딜 수 없는 치욕을 견디거나(『남한산성』) 제 발로 엎드려 기어들어가야 하는 지옥과 같은 곳3이다(『현의 노래』). 그것은 “쇠붙이의 세상”(『현의 노래』 39면)이다. 『남한산성』의 최명길은 이 세상의 이치를 이렇게 말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339면)

김훈의 소설은 그 참혹한 세상에 무력하게 홀로 맞선 자의 우울한 독백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역사소설이라는 외양을 하곤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역사의 옷을 빌려 (작가가 생각하는) 세상의 이치와 자아의 자리를 되새기는 자의식적 소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소설은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독백적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는 인물들 각자의 성격화나 운명의 굴곡, 극적인 서사성 따위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가령 인물들의 내면은 그가 누구이든 (여성과 백성, 군졸은 제외하고) 모두 동일하게 작가의 내면을 크건 작건 나누어 갖고 있어 딱히 갈라 구분되어야 할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남한산성』에서도 보듯 뒤에 숨어 상황을 섭정하고 인물의 내면에 투사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삼인칭의 서사적 틀을 시시각각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4 따라서 사실은 이렇다. 그것은 모두‘세상의 길’위에서 선‘나’의 이야기다.

김훈이 세편의 소설 앞머리의‘일러두기’에서 자신의 소설이‘소설’일 따름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5 그것은 역사와 허구의 분별이라는 지당한 독서관습을 환기하고 준수하기를 일러두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소설이 궁극에는 모두 역사적 소재에 얹은 세상과‘나’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의 장편소설이, 다루는 소재와 상황은 각기 다를지 몰라도 들여다보면 본질적으로는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변주하면서 반복하는 듯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김훈의 역사소설이 하나같이 양식화된 특성을 보이는 까닭도 따지자면 여기에 있다. 하지만 흔히 그렇게 하듯이 이 점을 놓고 가령 철 지난‘역사소설’의 규범을 들씌워 김훈 역사소설의 한계로 비판하고 마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적 소재를 나름의 주제 속에서 재배치하는 작가 특유의 개성적인 미장쎈이라고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그 미장쎈의 역할은 물론 세상의 참혹함을 드라마틱하게 부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훈의 소설에서 세상의 참혹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세상이 “살육과 유혈”로 얼룩지고 지배와 폭력이 창궐하며 고통과 죽음이 흥건한 곳이라는 뜻이 아니다. 참혹함이란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세상의 질서에 압도되는 김훈의 인물들을 강렬하게 사로잡고 있는 정념이다. 그것은 무력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고통스런 상황을, 어떻든 피할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고 굴욕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하고 도저한 체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 전편을 관통하는 자의식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남한산성』의 큰 주제는 이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는가. “참혹하여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남한산성』 39면, 118면) 다만 당면할 뿐, 다른 방책이란 있을 수 없다. 마침 『칼의 노래』에서 도원수 권률도 묻는다.

 

-자네 무슨 방책이 없겠나?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방책, 아아 방책. 그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칼의 노래』 32면)

 

김훈 소설의 상황이 모두 그와 같다. 가령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세상의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공포를 견디면서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칼의 노래』 105면) 세상을 다름아닌 그 칼로써 맞서야 하는 불가능을 감내해야 한다.‘나’이순신은 그렇게 불가능을 감당하는 일 그 자체 또한 의미없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나’에 따르면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었다.”(65면)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197면)이다. 처참한 살육이 난무하는 세상을 제각각의 도구(악기, 무기, 연장)로써 헤쳐가는 『현의 노래』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냉정한 무감동(apathy) 또한 그것이 세상이고 또 그럴 수밖에 없음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나오는 태도다. 주전(主戰)과 주화(主和)를 놓고 다투는 『남한산성』의 인물들 또한 입장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그러한 터, 가령 “부딪쳐서 싸우거나 피해서 버티거나 맞아들여서 숙이거나 간에 (…)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을 것”(16면)이라는 김류의 인식은 비단 그만의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결론은 같을 수밖에 없고, 어쩔 수 없음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말들의 운명 또한 그것을 반영한 듯,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남한산성의 불안한 운명을 놓고 “낮게 깔려서 뒤섞이고 부딪치는 말들”도 “대부분‘마찬가지’로 끝났다.”(『남한산성』 182면)

김훈 소설의 인물들은 이렇게 벗어날 수 없고 어찌해볼 수도 없는 거대한 불가피와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들은, 울거나 신음한다. 우륵은 남몰래 눈물짓고(『현의 노래』), 이순신은 식은땀에 젖어 숨죽여 흐느끼며(『칼의 노래』), 김류와 김상헌은 깊이 신음하거나 출렁이는 몸속 울음에 제 몸을 내맡긴다(『남한산성』). 김훈의 소설은 그렇게 저 불가피를, 그리고 불가피 앞에 선 자의 우울과 허무를 냉정한 시선으로 드러내놓는다. 중요한 것은 김훈의 소설이 그 우울한 불가피를 미학화(aestheticization)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에서 대개 그러하듯 불가피 앞에 선 자의 우울과 허무가 비장한 품격과 정신주의적 아우라를 얻게 되는 것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다. 가령 “흙냄새와 소 울음 속에는 성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을 듯싶었지만, 임금은 그 길을 더듬어 낼 수 없었다”(『남한산성』 105면)와 같은 서술처럼 상황을 추상화하는 진술들이 빈번하고, 한시(漢詩)의 댓구를 연상케 하는 문장구조가 시종 유장하게 반복되면서 리드미컬한 여운을 던져주는 것6 또한 그것을 거드는 대표적인 사례다.7

이쯤이면 이제 김훈 소설에 나타나는 이러한 방식의 미학화가 이를테면 현실의 역동과 자유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수리(受理)하면서 현실의 참혹을 자연화(naturalization)하는 운명론적 전략과 한 짝을 이룬다는 비판이 있으리라는 것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김훈의 소설에서, 이를 방증하려는 듯 현실의 불가피는 말 그대로‘자연’과 시간 앞의 불가피와 무력함으로 곧잘 치환되거나 확장되곤 한다. 예컨대 다음 대목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남한산성』 180면)

 

스승의 목소리는 봄과 여름, 새벽과 저녁, 흘러가는 시간들과 살아 있는 것들로 더불어 살아 있으되 더이상 그것들을 어찌해볼 수 없는 체념이나 단절의 신음으로 들리기도 했다…… 좋구나,라는 스승의 혼잣말에 니문은 때때로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을 느꼈다.(『현의 노래』 46면)

 

이러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자연(과 자연의 시간)은 당연히 불가피의 운명과 그 장구한 자연의 질서 앞에서 하찮음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의 우울한 무력(無力)을 일종의 허무주의적 숭고의 체험으로까지 승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적하고 마는 건 너무 쉽지 않은가? 물론, 사태는 그리 간단치 않다. 그것은 예의‘자연’과 관련해서도 그렇다. 우리가 김훈의 소설에 비중있게 등장하는‘자연’의 모티프와 관련해 더 긴요하게 짚어야 하는 것은 사실 다른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찌 보면 김훈 소설의 중요한 핵심과 은밀히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3. 저토록 안쓰러운, 동물들……

 

그 이전에 먼저, 잠시 길을 에둘러 우리는 김훈의 소설을 일관되게 지배하는 일종의 강박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사실’(fact)에 대한 강박인데, 그것은 이를테면 불가피의 사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탐구하는 작가적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김훈의‘사실’이란 외면하거나 피할 수 없는 사태와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강박은 실은 김훈의 인물들부터가 크든 작든 공유하고 있는 것인바,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들이 변치 않는‘사실’의 자명함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되새기는 것으로 나타난다.“참혹하여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남한산성』)라는 진술이 그러하고, 임금과 신하들의 헛된 언어에 탄식하는 다음과 같은‘나’이순신의 심회가 그러하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칼의 노래』 18면, 강조는 인용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지만(“나는 늘 알지 못했다”, 『칼의 노래』 63면)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65면)이라는 것만큼은 자명한 사실임을 수시로 환기하는 이순신의 인식도 따지고 보면 그런 맥락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사실’에 대한 거의 강박에 가까운 집착은 실은 소설을 쓰는 작가 자신의 태도이기도 한데,8 그런 측면에서 다음 대목은 퍽 암시적이다.

 

당상들이 날마다 어전에 모였다. 내행전 마루에서 말들이 부스러졌고, 부딪쳐서 흩어졌다. 사관은 서안 앞에 앉아서 말하는 신료들의 이 입 저 입을 바라보았다. 사관은 묘당의 말들을 기록할 수 없었다. 저녁 때 사관은 붓을 들어 겨우 적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남한산성』 244면)

 

어떤 말들이 오갔든 허공에 떠 흩어지는 그 말들이란 헛되고 부질없는 것이어서 기록할 수 없는(실은 기록할 가치가 없는) 것일 뿐이고, 다만 임금이 여하튼 남한산성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만이 중요한 기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때 어찌하든 변치 않는 자명한 사실만을 기록하며 그 사실의 엄정함을 환기시키는 사관의 태도가, 의도했든 아니든 작가 자신의 소설쓰기의 태도와 절차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기능하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전편에 걸쳐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는 문장이 거듭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도 그 점에서 사뭇 시사적이다.

김훈 소설의 논리에 따르자면, 이러한‘사실’에 입각하지 않는 언어는 모두 헛것이며 “대가리를 치켜”드는 “기름진 뱀”(『남한산성』 9면)과 같은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작가가 폭력이나 살육의 정경을 지나치리만큼 클로즈업해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어쩌면 그 자체로 향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은 거기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이 계몽주의나 역사주의, 국가주의 같은 지난 역사소설의 낡은 이데올로기적 분장을 지워버리고 그만의 독창(獨創)을 얻을 수 있었던 토대는 다름아닌 그런 태도에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사실’에 대한 강박은 다른 한편 반대급부로 자연주의 혹은 경험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다시, 김훈이 강조하는 저 수많은 자명한 사실 중에서도 더할 수 없이 가장 자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그의 소설에서 그것은 바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언어로 개념화되는 어떠한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고, 희망 없는 세상에서 죽음 또한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나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했다.(『칼의 노래』 181면)

 

이것은 비유컨대,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을 바로 ‘의심하는 나’의 존재에서 발견했던 데까르뜨의 저 유명한 고전적 명제의 자연주의적 판본이다. 김훈의 소설에서‘사실’에 대한 강조는 다시 이렇게‘살아 있음’에 대한 확인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생물학적 생존에 대한 안쓰러운 긍정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안쓰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불가피한 죽음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해 겨우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김훈의 소설에서 그것은 그런 까닭에 또 가까스로 아름다운 것이다.9 그리고 생물학적 생존에 대한 그런 안쓰러운 긍정은 바로 인간이란 시간과 자연의 영원성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 무력한 살아 있음의 비애를 어떻게든 겨우 감당할 수밖에 없는 하찮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엄중한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사실에는 다른 어떤 거창한 명분이나 대의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것의 핵심은 너무나 지당하게도,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서든 먹어야 하고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진실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이것은‘사실’에 대한 집요한 강조가 이르게 되는 당연한 귀결이다. 2장에서 우리가 보았던‘자연’앞의 무력과 불가피는 이 지점에서 다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바로 그것의 이름은 여기서,‘끼니’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굶든 먹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칼의 노래』 197면)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 들이 병들어죽고 굶어죽었다. 나는 굶어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황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칼의 노래』 201면)

 

‘끼니’란 인간의 의지 같은 것을 한없이 무력하게 만들고, 인간이란 먹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동물에 불과함을 비애와 더불어 환기시키는‘속수무책’의 상징이다. 김훈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인간은 동물이다.’이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인간과 동물은 먹이를 놓고 한 문장 속에 나란히 배치된다. “말을 삶는 김 속에서 군병들은 허겁지겁 먹었고, 말들은 느리게 먹었다.”(『남한산성』 94면) 그것은 임금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터, “임금은 국물에 밥을 말았다. 살진 밥알들이 입 속에서 낱낱이 씹혔다. (…) 가까운 민촌에서는 일 없는 겨울 소들이 아침 여물죽을 기다리며 울었다.”(『남한산성』 105면)

김훈의 소설에는 이를 포함해 먹고 먹이는 장면들이 유난히 수다하다. 그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끼니를 찾아 먹고, 군병들을 먹이며, 말들을 먹인다. 작가는 소설에서 이처럼 먹고 먹이는 장면이나 밥짓는 장면 들을 자주 등장시켜 세세하고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런 묘사의 빈번과 집요는 일종의 증상이기도 한데,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불가피한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동물성이 갖는 역설적인 존엄에 대한 긍정이다.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김훈의 반(反)휴머니즘적 명제가 궁극에 의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어떠한 대의나 이념이라 할지라도 결코 소홀히해서는 안되는 개개의 비루한 생물학적 생존에 나름의 가치를 부여하려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멀리 따지고 보면 실은 “스스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 앞에서 느끼는 이순신의 쑥스러움(『칼의 노래』 57면)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고, 대장장이 서날쇠 앞에서 느끼는 김상헌의 부끄러움(『남한산성』)이 또한 그런 논리의 연장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김훈 소설의 면모는, 그간의 한국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었듯 인간과 삶에 들씌워져 그것을 쉽게 재단하거나 신비화하는 관념적인 판타지를 거부하고 인간이 직면하는 사태의 본질을 날것 그 자체로 해부하면서 바로 그 속에서 미학의 토대와 긍정의 윤리를 찾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어보자. 예컨대 원칙적으로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듯한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안쓰러운 긍정이, 그리고 그것에 뒷받침된 나날의 비루한 개체적 삶의 존엄에 대한 긍정이 궁극에는 거꾸로 스스로 옹호해 마지않는 바로 그 삶 자체와 삶의 존엄을 상실하게 만드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는 아닐 것인가…… 대답은 잠시 미루고,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4. 2000년대의 현실과 문학과, 더불어 김훈은

 

앞에서 우리는 김훈의 소설이 문제적이라 했다. 김훈의 소설이 새삼 지금 이곳에서 문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아이콘으로 부각되는 까닭은,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바로 저 불가피의 감각과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안쓰러운 긍정이 포스트-IMF시대 한국사회의 예민한 정치적 무의식의 성감대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그 무의식이란 물론 IMF이후 개전의 여지가 없는 듯 더욱 강화되어가는 강고한 시장과 경쟁 씨스템 속에서 나날의 삶을 불안과 생존의 절박을 떠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다. 거기에 있는 것은 삶을 압박하는 거대한 씨스템의 위력에 짓눌려 느끼는 불가피한 무력함이고, 이른바‘먹고 사는 것’을 당장에 해결해야 할 지난한 과제로 맞닥뜨리는 데서 오는 불안과 비애이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비루한 생존(혹은 성공)의 욕구 밑에 다른 모든 가치를 종속시키는 정신적 빈곤의 자발적인 내면화다. 김훈의 소설이 건드리는 대중독자(예컨대 30~40대)의 성감대는 바로 이 지점이다. 거대한 불가피 앞의 무력한 우울과 신음을 통절하게 그리는 동시에 그것을 유려하게 미학화하는 김훈의 소설은, 독자들이 떠안고 있는 저 비루한 삶의 감각을 적절히 환기시키면서도 거기에 정신적·미학적 품격을 부여해주는 것이 아닌가.

김훈의 소설이 갖는 호소력은 그렇게 대중이 겪는 자발적·비자발적 굴욕의 현실감각을 적절히 환기해주는 데서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거기에 너무 가까이 가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적 소재는 그 삶의 감각을 적절히 거리화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하드보일드와 미려함,‘사실’에 대한 산문적 집요와 한시적(漢詩的) 여운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문체의 흡인력 또한 그것을 거들고 있다.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김훈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어쩌면 거기에서‘먹고 살아야 한다’는 지난한 생물학적 당위에 압도된 스스로의 비루한 삶에 대한 긍정의 위안과 속화된 보편주의-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고래로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라는-의 알리바이를 제공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론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김훈 소설의 논리와 메씨지가 전혀 그와 무관한 것도 아니다. 특히 그와 관련해서, 인간사의 지난한‘사실’의 세목들을 진지하게 대면하게 하는 김훈 소설의 미덕이 거꾸로 특정한 프레임에 의해 선택된 것일 수밖에 없는 그‘사실’을 부당하게 특권화해 오히려 한층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현실의 문제를 은폐하는 위험 또한 안고 있는 것이라는 점은 이 대목에서 덧붙여둘 수 있겠다.

이쯤이면 이제 어느 정도 짐작이 갈 것이다. 김훈의 소설이 저 자신의 고유한 세계로써 지금 2000년대 문학의 흐름에 합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변치 않는 운명론적 불가피의 세계 앞에 선 자의 우울이 그렇고, 인간은 비루한 동물이다, 라는 반(反)휴머니즘적 명제가 그러하며, 현실에서 모든 관념적인 판타지를 걷어내고 그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개인의 가치를 방어하는 태도가 그러하다.10 같은 맥락에서 김훈은 내용은 다를지 몰라도 세계는 이미 “그렇고 그런 곳”(박민규)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판단까지도 2000년대의 젊은 문학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김훈은 일각의 그들과는 또 달리 결코 공상이나 판타지, 취미나 텍스트 등으로 도주하지 않고 현실의 감각을 환기시키면서 그것을 진지한 사유와 성찰의 영역으로 끌어오고 있다. 저 스스로 2000년대 문학의 흐름에 동참하면서도 바로 그 안에서 그와는 또다른 길과 가능성을 열어 보여주는 김훈 소설의 미덕은 바로 거기에 있다.

돌아보건대 지금 적지 않은 한국소설이 독자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것이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김훈의 소설은 그것의 원인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그 자신의 예외적인 성공을 통해 거꾸로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사례다. 물론 김훈의 소설에서 펼쳐지는 사유와 성찰의 세목에 대한,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전제에 대한 문학적·정치적 판단은 분명히 엇갈릴 수 있고 그 한계 또한 뚜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특별히 가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김훈의 소설이 갖는 대중적 호소력과 흡인력이 무엇보다 바로 그렇게 문학적 형식 속에서 현실의 감각과 지난한 삶의 고통을 여하튼 적극적으로 환기하고 사유하며 성찰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김훈의 소설이 이룬 문학적 성취 또한 그것과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과의 유무형의 긴장을 자발적으로 반납하면서 점점 더 자족과 자폐에 안주함으로써 저 스스로 문학의 존재가치를 협소화하고 있는 듯한 지금 일각의 젊은 문학에 김훈의 소설이 조용히 들려주는 조언이다. 지금 2000년대의 젊은 문학이 저 자신의 결여와 미래를 성찰하기 위해, 그리고 독자와의 창조적인 소통을 모색하기 위해 김훈의 문학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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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에서 다루는 소설은 다음과 같다.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 2001), 『현의 노래』(생각의 나무 2004), 『남한산성』(학고재 2007).
  2. 대강 이 점만 놓고 본다면, 김훈을‘뒤늦게 온 이문열’이라 평한 조영일(曺泳日)의 지적은 썩 그럴듯하다. 조영일 「자연사의 구조」, 『문학마당』 2007년 여름호 참조.
  3. 예컨대 우륵은 말한다. “가야는 지옥이다. 신라는 더 깊고 더 뜨거운 지옥일 것이다. 그리로 가야 살 수 있다.”(현의 노래』 226면)
  4. 작가 김훈을 두고‘뛰어난 복화술사(複話術師)’라 칭한 최원식(崔元植)의 표현은 이순신이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칼의 노래』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최원식 「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감각들」,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49~50면), 『현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삼인칭 소설에서도 그런 의미의 복화술을 내놓고 구사하는 것이 또한 김훈 소설의 특징이다.
  5.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칼의 노래』); “이 책은 다만 소설이다.”(『현의 노래』);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남한산성』)
  6. 그 예로 아무렇게나 한 대목을 뽑아본다.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들어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쌓인 눈이 낮에는 빛을 튕겨냈고, 밤에는 어둠을 빨아들였다. (…) 먼 산들이 먼저 어두워졌고 가까운 들과 민촌과 행궁 앞마당이 차례로 어두워졌다. 가까운 어둠은 기름져서 번들거렸고, 먼 어둠은 헐거워서 산 그림자를 품었다. 어둠 속에서는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았고,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가까워 보였다.”(『남한산성』 179~80면)
  7. 김훈은 그 스스로 “정신주의라는 것의 공허함”을 비판하고 있으나(김훈·서영채 대담 「허명과 거품을 피해 내 자신의 작은 자리를 만드는 것이 내 앞길이에요」, 『문학동네』 2006년 여름호 102면), 그의 의도야 어찌 됐든 인물과 현실과 자연의 화폭을 그리는 이런 방식의 필치에서 어쩔 수 없이 누설되는 것은 그와 상이한 맥락에서 또다른 형태의 정신주의다.
  8. 그것은 앞의 몇몇 인용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실체를 왜곡하는 기호(〓언어)에 대한 불신과 짝을 이루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표출되는 기호에 대한 불신은 『강산무진』(문학동네 2006)을 대상으로 차미령이 이미 적절히 지적한 바 있다. 차미령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위하여,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향하여」, 『문학동네』 2006년 여름호 121~29면 참조.
  9. 김훈의 소설에서 흔히 나타나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적 집착 역시 근원을 따지고 보면 실은 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칼의 노래』의 여진과 『현의 노래』의 아라, 「화장(火葬)」(『강산무진』, 문학동네 2006)의 추은주에 대한 묘사에서도 보듯이 그것이 대개 목숨과 죽음의 운명에 대한 비애 같은 것과 짝지어져 있다는 점도 중요하게 환기해볼 만하다.
  10. 2000년대 문학의 전반적인 특징에 대해서는 김영찬 『비평극장의 유령들』(창비 2006)의 제1부와 2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