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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우리 시대의 ‘시적인 것’, 그리고 기억

 

 

박형준 朴瑩浚

시인.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등이 있음. agbai@korea.com

 

 

‘전통의 단절’과 ‘단절의 전통’

 

시인은 비평(이론을 포함하여)의 영향에서도 아주 자유롭기는 어렵지만, 선대의 시인에게서는 더욱이나 자유롭지 못하며 그 영향의 불편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기 세계를 정립해나간다. 일례로 우리 시에서 김수영(金洙暎)의 「풀」은 모더니스트든 리얼리스트든 상당히 많은 후대 시인들을 불편케 만들었으며, 또한 그로부터 각 진영의‘새로운 시’가 조정되어나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방가르드 문학의 진원지인 서구에서도 사정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말라르메(S. Mallarmé)는 시적 산문으로 작성된 「문학적 씸포니」(Symphonie littéraire) 서문에서 세명의‘스승’(고띠에, 보들레르, 방빌)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시적 부친과 그로 인한 시적 자식의 거세효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전임자의 아름다움은 풋내기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지만 그 풋내기는 무력하고 피동적인 영혼, 즉 여성적인 상태로 변신함으로써 이처럼 거세된 상태는 일종의 뮤즈(muse)로서 다시 환기된다. 영감의 결여가 영감의 원천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또한 말라르메의‘백조’가 실제로는‘지난날의 백조’, 즉 보들레르(C. Baudelaire)가 자신의 시적 전임자인 위고(V. Hugo)에게 헌정하기 위해서 썼던 「백조」라는 제목의 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흥미롭다. 백조는 이같은 전임자를 지칭하게 된다.1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전통을 옹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전통을 지금 여기의 시각으로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후대 시인은 선대 시인이 이룩해놓은, 이제는 진부해져버린 표현에서 벗어나기 위해‘다르게’말하기의 불가능성에 도전하지만, 또한 그만큼‘똑같게’말하는 것 역시 불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래서 말라르메가 보들레르의‘지난날의 백조’를 전유(專有)해 이룩한‘위대한 한권의 책’(THE BOOK)-“세상은 위대한 한권의 책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은 상관적인 개념이다.2

전통의 재구성은 결코 무덤 속 망령들을 소환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시대의 시가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금 시를 쓰는 것은 출발과 되돌아감 사이에서 교차되는 시간들을 채집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그 “시간들의 교차점, 시간들의 수렴점”3을 모색하는 행위다. 즉‘전통의 단절’이 아니라‘단절의 전통’을 꿈꾸는 것, 그래서 단절 하나하나가 새로운 시작이 될 때‘텍스트의 무덤’은 지금 이곳에서 살아 있는 작품들의 집합체가 될 수 있다.

2000년대 시를‘서정적 경향의 시’와‘환상적 경향의 시’로 대별하고 그 특성을 고찰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고 있다. 이 이분법적 도식을 적용해 중진시인들을‘서정파’라고 한다면 젊은 시인들은‘환상파’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비슷한 또래의 젊은 시인들 사이에도‘서정파’와‘환상파’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촌공동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문태준(文泰俊), 손택수(孫宅洙) 등이 서정적 경향의 시를 쓴다면, 그 반대쪽에 서 있는 황병승(黃炳乘), 강정 등의 시는 낯설고 기괴한 이미지로 환상적 공간을 창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이전 세대와는 다른‘세대론’이나‘재현에 대한 상이한 세계관’등의 관점으로만 접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시대 시적인 것의 탐구와 ‘기억’

 

이런 이유로 내게 지난호 『창작과비평』(2007년 여름호)에 게재된 백낙청(白樂晴)의 「외계인 만나기와 지금 이곳의 삶」은 무척 실감있게 다가왔다. 그는 이 글에서‘외계인 만나기’라는 모티프를 통해 젊은 비평가들과의 비판적 대화를 시도한다. 이것은 그가 이제까지 보여준 “나는 모더니즘을 리얼리즘 쪽으로 끌어당기든 리얼리즘을 모더니즘 쪽으로 끌어당기든 그것이‘이질적이고 낯선 것을 익숙한 코드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굳어지지 않고 읽는이 나름의 진지한 독법이기만 하다면 다 좋다는 입장”4과 맥락을 같이한다. 무엇보다 이 글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젊은 비평가의‘외계인’논의에서 지금 이곳에서의‘시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성찰을 이끌어내는 대목이다.

 

현실인식과 현실변혁에의 의지 또한 살아감의 필수적인 여건이며,‘시의 경지’의 필연적인 파생물(…)이다. 아니‘언어’에 대해서도 실제 살아 있는 인간들의 언어가 “외부에서 부여된 언어”와 그 “바깥”으로 양분될 수 있는지 연구해볼 문제다.(340~41면)

 

이 글에서 백낙청은 그가 텍스트로 삼은 이장욱의 「외계인 인터뷰」에 의지해‘외계인’의 관점을 씨앗어로 삼아 젊은 비평가와 똑같이 다시금 시에 대한 논의를 소설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로 “이는 소설 또한‘시의 경지’에 달할 때 비로소 언어예술의 한 장르로서 그 고유한 몫을 다할 수 있다는 나의 지론과도 통”(335면)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관점은‘외계인 인터뷰’를 통해 관례적 인식을 넘어서서‘있는 그대로의 실재/현실’을 새롭게 다루면서도, “그것은 시적 전략 따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감각과 본능의 산물”5에 의해서라는 이장욱의‘시적인 것’과 일정한 차이점을 보인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백낙청이 의도하는‘시적인 것’의 모습은 설명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소 선명해 보이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이장욱과는 다른‘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 논의가 크게 진척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백낙청이 말하는‘시적인 것’은 그가 최근 펴낸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에 산발적이긴 하지만 텍스트에 숨겨진 보석처럼 의미심장하게 빛을 발한다. “나는 전형성, 현실반영 같은 특정 기준들의 충족 여부보다‘지공무사(至公無私)’또는‘사무사(思無邪)’로서의 당파성의 구현 여부가 한층 본질적인 문제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오히려 좁은 의미의 시야말로 하나의 작품이 어떻게 시의 경지에 도달하는가를 확인하고 점검하는 최선의 표본이 되고, 나아가 현실주의적 성격이 좀더 농후한 장르들의 현실주의를 올바로 정초(定礎)하는 첩경일 수도 있다.”(429면) 백낙청이 말하는‘시적인 것’은 “메씨지를 옳게, 설득력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전통문법의 틀을 깰 수도 있”(53면에서 재인용)어야 하며, 그것은 아울러 “포괄성과 구체성”(123면)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재현기법의 새로운 탐구가 오늘날의 지구시대에서 증가하는‘달리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져 곧 지금 여기의‘있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첩경으로 제시되어 있다면,‘포괄성과 구체성’은 근대 전반을 포괄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어떤 확고한 면모를 지녀야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그‘확고한 면모’가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실현되는 것으로‘지공무사’나‘사무사’의 시정신을 들고 있는데, 이것을 직시하기 위해서는‘각성된 노동자의 눈’이 그 안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눈’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런 세상이 부당하며 극복되어야 함을 꿰뚫어”보는 것이고, 거기서 “나아가‘지식사회’가 되고‘정보화사회’가 된다고 해서 노동이 근절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됨을 인식”(202면)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각성한 노동자의 눈’은 근대 세계체제와 현행 세계화과정에 대한 발본적 대안을 제시하는 입장을 뜻”한다(같은 곳).

그러므로 백낙청이 말하는‘시적인 것’은 “새로운 중도(中道)를 찾을 필요”(209면)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의‘시적인 것’의 핵심은 분단체제와 세계체제 속의 민족적 위기가 여전한 이 땅의 현실에서‘지공무사’라든가‘각성한 노동자의 눈’을 통해 남한의 국민문학을 겸한 전체 한민족의 민족문학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같은 백낙청의‘시적’기획이 성공하려면 앞으로도 이론과 창작이, 그것도 서로 별개의 것을 넘어서서‘이론 속에 창작이, 창작 속에 이론이’서로 육화될 수 있는 경지를 발견하는 구체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간 우리의 현대시사에서 실험의 불가피성은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들에게 실험의 중요성을 언급하며‘시적인 것’을 새롭게 발명한 시인은 김수영이다. 그의‘온몸 시론’은 두말할 필요 없이 현재까지 우리 시단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시적인 것에 대한 탐색을 펼쳐나가려면 현재의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여전히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난 연대의 이성복(李晟馥), 황지우(黃芝雨), 박남철(朴南喆) 등의 시적 성찰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 8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김수영의 적자(嫡子) 격인 황지우는 김수영과 브레히트(B. Brecht)의 소격효과를 차용하여‘시적인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자신의 시론에 적용한다.

 

한 개인의‘피부 속’에서만 필연적으로‘시적인 것’은 그것의 인식론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존재론적 이유에서 무의미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 한 사람만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시적인 것으로 느껴주지 않는‘시적인 것’이 있을 수 없는 이유는, 그와같은 한 개인의 피부 속에‘시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비(非)시적인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을‘시적인 것’으로 느껴줄 몇몇 사람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시적인 것’을 우리가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는 데에 있습니다.6

 

황지우에 따르면 시적인 것은 인간의 내부에만 있지도 않고 외부에만 있지도 않은, 그의 용어로는‘내면의 외부’‘외면의 내부’에 있다. “말하자면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진, 간주관적이고 간인간적인 문화적 성층에 있다. 좀 거칠게 말하면 이 성층은 제도다. 다만 이 제도는 끊임없이 자기발생하기 때문에 그 테두리가 불분명하고 흐물흐물하다.”(16~17면) 따라서‘시적인 것’도 이처럼 제도적이다. 그때그때 시를 쓰고 읽는 사람에 의해‘시적인 것’의 틀이 생기지만, 또한 이 틀을 갈아 끼우려는 노력도 틀에 준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시적인 것’의 자격부여와 그 틀의 형성이 시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의미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17면) 그러므로 황지우가 말하는‘시적인 것’역시 의사소통을 완전히 포기한 현실해체적 실험보다는‘과거와 미래’로의 열린 개념을 지향한다. 그에게 시적인 것은 내용 자체가 형식이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시적인 것’의 포착은 그것을‘어떻게 쓸 것인가’까지의 포착이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내용이 그때그때의 형식을 가져다”(14면)준다.

물론 백낙청이 「외계인 만나기와 지금 이곳의 삶」에서 이장욱이 말한 “외계인은 하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들 내부에 있고, 나와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사이에 있다”7라는 명제에서 “외계인 논의를‘지금 이곳의 삶’으로 끌어들이”(324면)는 미덕을 발견하는 것은 세대간 단절을 넘어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인식하는‘현실’이라는 것이 차이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증조부와 할머니의 필사본도 구두로 내려오는 가족사를 알아야 읽을 수 있다. 즉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결속력이 바로 공동기억 또는 집단적 기억이다. 물론 백낙청이 이장욱에게서 논의를 끌어낸 것은 공동의 토대 위에서 끊임없이 토대의 갱신을 이루려는 뜻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이장욱이 인식하는 현실의 층위에서 우리가 더 많이 접하게 되는 것은 “‘기원’이나‘계보’를 꿈꾸거나 의식하기보다는 (…) 개별자적 감각 안에서 이미 일정한‘보편적 감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당대적 감성의 지평 위에서 이합집산”(이장욱, 앞의 책 30면)하는, 기원이나 계보와는 거리를 둔 시적 풍경을 옹호하는 모습이다. 오늘날 시를 쓰는 젊은 세대는‘현실 과거’에서 경험이 배제된‘순수 과거’만 알고 있는 셈이고, 더 나아가 이 소멸되어가는 기억과의 거리가 더 멀어지게 되면 기억의 자질 또한 크게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현실 과거에서 순수 과거로의 전환은 활성적 역사경험의 해체로 이어질 것이고 머지않아 조형물, 영화, 비망록 같은 것으로 축적된 자료들만이 역사를 말해주게 될 것이다.8 때문에 최근의 시적인 것에 대한 논의가 현실 과거나 역사에서 감각에 대한 사유 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문예중앙』 2007년 봄호 특집(‘미래파, 그 이후’)에 실린 신형철(申亨澈)의 「감각이여, 다시 한번-‘감각으로 사유하는 종(種)’을 위한 단상」은 김경주(金經株) 시를 분석해가면서‘감각 너머’를 사유하려는 모색이, 다른 말로 하면 감각파들의 시에 사유의 형상을 입히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감각의 본능은 배반이다. 감각은 이중 스파이다. 감각은 이성을 배반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배반한다. 그것은 이성의 타자이고 세계의 역모자다. 감각이 믿는 것은 그 자신뿐이다. 감각이 끝까지 달려나갈 때 그것은 자신을 잊고 사유가 된다. 김수영풍으로 말하자면, 감각은 끝내 제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사유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69~70면)

 

물론 그의 논지대로‘시’는 끝내‘번역’될 수 없는 그 무엇의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기표와 기의가 맞아떨어지는 시가 주체 자명성의 시학으로 거론되면서 오로지 부정될 일만은 아니다. 흔히 불확정성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우리 시대에서 오히려 총체성으로서의 자명성에 대한 추구는 새로운 시학을 모색하는 데서 결코 무시되거나 간과될 수 없기 때문이다.‘이성’과‘세계’를 배반하는‘감각의 본능’은 이 시대의 젊은 시를 살펴보는 데 새로운 틀을 제공하지만, 그 밑바탕을 이루는‘전통’이나‘기억’의 발굴작업에도 섬세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안드레이 따르꼬프스끼(Andrei Tarkovsky)는 자신의 영화 「거울」(1974)에서 영화를 서정시 같은 상태로 만들고자 시도한 바 있다. 이 영화는 사회의 인과적 복합성의 징표로서 한 개인의 가장 사소한 기억들인 가족사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화집, 시, 초상화, 시간을 비추는 거울 등을 소품으로 등장시키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역사의 지평에서 융합되는지 보여준다. 감독은 서정시의 작동원리인 기억이라는 내밀한 저수지의 탐험에 몰두하면서 내적 현실을 복원하기 위해 과거를 향한 근원적인 운동상태를 스크린에 투사한다. 이 때문에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행위는 매번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젊은 비평가들에게서 나타나는 주체 자명성에 대한 폭넓은 불신에는 기억을 단순히 향수로만 보는 태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따르꼬프스끼의 영화에서처럼 회상과 향수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즉 향수가 과거에 대한 미적인 관계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지는, 현재를 벗어나고 현재를 잊어버리며 과거 속에 빠져드는 서정적 욕망이라면, 회상은 자기 고유의 진실을 가진 살아 있는 과거에 호소하는 것이며 현재에 속하는 것이다. 이 경우 과거는 개인적인 기억의 희미한 반영이 아니다. 이것은 현재에 적용하면 그만인 교훈이 아니라, 정신에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살아 있는 과정이다. 그만큼 회상행위 속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는 상호적이고 역동적이며, 따라서 이 행위 자체는 상당한 윤리적인 지평을 동반하는 것이 된다.9

이제 나는 기억과 회상이라는 렌즈를 통해 전통적 문법 혹은 재래적 서정시의 대표 격으로 평가받는 90년대 시인 장석남(張錫南), 2000년대 서정시인 문태준, 그리고 80년대부터 높은 시적 성과물을 생산해온 고형렬(高炯烈), 김사인(金思寅)의 시에서‘시적인 것’이 어떤 형식으로 구현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기억과 현실을 성찰하는 새로운 시적 인식

 

2000년대 들어 한가지 특이한 현상은 90년대 서정시인들의 시적 변모에 대해 시단과 평론가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2000년대에는 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인들의 목소리가 그 위의 선배시인들과 그 아래의 새로운 시인들 사이에서‘낀 채’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 시사(詩史)에서‘낀 세대의 전형성’이 다시금 되풀이되는 듯한데, 이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날 때마다 벌어지는 문단의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까‘낀 세대’는 선배시인들만큼 강력한‘아우라’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후배세대에 비해 새로움도 많지 않으니 현장비평에서는 딱 외면받기 십상이다.

 

집 부서진 것들을 주워다 지폈는데

아궁이에서 재를 끄집어내니

한 됫박은 되게 못이 나왔다

어느집 家系였을까

 

다시 불을 넣는다

마음에서 두꺼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잉걸로 깊어지는 동안

차갑게 일어서는 속의 못끝들

 

감히 살아온 생애를 다 넣을 수는 없고 나는

뜨거워진 정강이를 가슴으로 쓸어안는다

 

불이 휜다

-「군불을 지피며 2」(『새떼들에게로의 망명』, 1991) 전문

 

이 시는 장석남의 초기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길잡이가 된다. 시의 내용은 간단하다. 모두 떠나버린 고향의 빈집 아궁이에 “집 부서진 것들을 주워다” 군불을 지핀 후 아궁이에서 재를 끄집어냈더니 한 됫박의 못이 나왔다는 것. 그런데 2연에 접어들면 현실에서 접한‘한 됫박의 못’은 과거로 여행을 떠나자마자 시적 화자를 아프게 찔러대는 차가운‘속의 못끝들’이 된다. 이런 시적 화자의 복잡한 내면심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서 두꺼운 연기가 피어오르고/잉걸로 깊어지는 동안”에서 보이는 행간이다. 우리는 시읽기가 행간읽기임을 알고 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과거로의 잠행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며‘두꺼운 연기’를 내면서 동시에‘잉걸’로 깊어진다는 것이다.

이 시가 지닌 이러한 과거의 이중성을 이해하게 될 때 시가 “불이 휜다”로 끝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아궁이 속에서 불의 휨은 과거로 떠난 상상 속의 여행에서 조우하게 된‘속의 못끝들’이자 그것을 현재에서 느끼는 아픔의 시적 표현이다. 시인은 시적 표현을‘산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고통은 늘 현재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의 아궁이에 군불을 때는 시적 화자가 정강이를 끌어안고 자신의 마음속에서‘속의 못끝’을 느끼며 그 못끝이 구부러지는 것처럼 불이 휘는 모습을 보는 장면은 이 시의 가장‘뜨거운 상징’으로 오래 기억될 만하다. 장석남에게 자신을 고향으로 데려다줄 새떼들에게로의‘망명’은 과거라는 친숙한 나라로의 도피가 아니라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설정한 기억의 재발견이다.

 

저만치 여름숲은 무모한 키로서 반성도 없이 섰다

반성이라고는 없는 綠陰뿐이다

저만치 여름숲은 城보다도 높이, 살림보다도 높이 섰다

(…)

새는

졸아드는 고요 속에서도 여름숲을 운다

城보다도 높이, 살림보다도 높이

여름을 운다

-「여름숲」(『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2001) 부분

 

이 시는 여름숲을 “무모한 키로서”“반성이라고는 없는 녹음”이라고 의인화함으로써, 지난 과거들을 모두 인내하고서 뜨거운 여름이 되자 “성보다도 높이, 살림보다도 높이” 서서 초록을 마음껏 발산하는 자기 의지를 지닌 주체로 설정한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주어진 자연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대항하는 내부의 목소리를 가진 주체로 제시되는 것이다. “조금의 반성도 죄악이라는 듯이/묵묵”히 서 있는 녹음이 그 위에 “울음이 예쁜 새를 허락”하는 장면은 강인하면서 동시에 유약한 존재의 내면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의 최근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2005)는 이같은 기억의 시학이 현실과 어떻게 접점을 이루는지 한층 변모된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는 기억과 일상의 틈바구니에 솟아난 근사한 정자(亭子)의 시학을 마련한다. 또한 그러한 것이 마치 자신의 시적 승리라도 되는 듯이 “전위를 말하는 촌스런 시들로부터/현학의 무지한 시들로부터/정치를 외면한 가여운 隱逸로부터 싸워 이긴/빛나는 승리”(「亭子 1」)라고 적고 있다. 이런 장석남의 시적 태도는 초기의 부드러운 동일성의 시학에서 한발 나아가 과감하게 산문적인 반어(反語)를 채택함으로써 기억과 현실의 새로운 접합점을 모색하려는 시적 의도로 볼 수 있다.

 

오늘 나의 아버지는 미래의 과일들을 버리네

(…)

백이십 근의 나무그늘이 거짓말처럼

노름판에 건 문서처럼

홀연 사라지고 돌밭이 남았네

돌밭은 물혹의 내장

돌밭은 젖을 물릴 수 없는 늙은 젖가슴

아버지는 나의 물혹열매

눈 먼 아버지는 오늘 폐원(廢園)을 가꾸고

내가 태어나던 그해처럼 다시 돌밭을 얻었네

-문태준 「나와 아버지의 폐원」(『문학과사회』 2007년 여름호) 부분

 

2000년대의 대표적 서정시인 문태준이 이 시에서 90년대적인‘폐원’의 이미지를 다시금 지금 여기로 불러오는 대목은 그의 시적 변모를 예감케 한다. 문태준은 그간 「맨발」 「가재미」 등의 시편을 통해 소외된 세계가 이곳의 현실과 행복하게 습합하는 시 작품으로 각광받아왔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과거의 추억이 이곳의 현실과 행복하게 결합되는 것보다, 반대로 그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는 현재와 미래를 예각화하고 있다. 때문에 과거는 행복하고 순진무구하고 닫힌 기억의 정원이 아니라, 미래로 갈수록 점점 폐원이 될 수밖에 없는,‘상속받아야 할’저주스런 기억의 터가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미래로 점점 나아가는 것은 거꾸로 화자에게 황무지로서 급속하게 도래할 과거의 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문태준의 시학이 앞으로 더 현실과 예각을 이루려면 이 예감 섞인 시편에서 보이는‘물혹열매’가 구체화될 수 있도록 기억의 폐원을 다시금 고통스럽게 밟아나가야 할 것이다.

 

 

중진들의 다성적이고 미묘한 시적 발화

 

현대인들은 노스탤지어에 지대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 중 하나가 과거 찾기이다. 정치적·역사적 맥락에서부터 개인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과거는 또 하나의 낯선 나라로서 우리 앞에 존재한다. 개발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뿌리를 상실한 채 살아왔고 최근에는 미래를 확신할 수 없게 된 한국인들은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를 통해 안락함을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인에게 노스탤지어는‘상상된 열망’이다. 우리는 과거가 지나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과거를 영속화함으로써 미래의 불안에서 도피할 수 있는 안전한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그것이 노스탤지어이다.

서정시인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노스탤지어를 희망하며 그것을 미학화하여‘자연의 매트릭스’를 만든다. 그렇다고 그것이 현실인식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부정될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그 속에 자신이 있음을 인정하고 적극적인 시적 현실로서 살아야 한다. 말과 시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시인이 과거에 겪은 트라우마에 지속적으로 시라는 옷을 뒤집어씌워 그것을 각성해나가면서 그 혼돈에 규칙적으로 대항할 힘을 만들어줄 시적 풍경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를 파멸시켜가는 매트릭스 속에서 그 무의미하고 파괴적인 혼란에 온전하고 운율있는 언어로 대항하는 문학적인 치유의 시도야말로 현대시인에게 가장 큰 미학적 문제이다. 즉‘매트릭스 속에서 살기’는 단순히 현실과 시가 유리된 징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이는 현실로 감각화하는 고도의 복합적이고 미학적인 시적 기술이 될 수 있다. 80년대 시인으로서 2000년대에도 자신의 시적 세계를 갱신하는 데 성공한 고형렬과 김사인의 시가 주목되는 점이 여기에 있다.

 

남자는 해가 질 때 엉망이 된 머리로 미장원을 찾아온다

(…)

서구에서 그는 은빛과 은가위를 들고 머리칼을 손가락에 끼고

아껴가며 삭둑삭둑 자른다 이렇게 떨어지는 머리카락 같았으면

그러다 남자는 그의 천수 속에서 잠이 들었다

천수의 손놀림은 안에서 흠흠 헛기침하는 소리를 무시한다

남자는 해가 지는 2001년 하노이에서 머리를 맡긴 사람이 된다

1월에 소가 풀을 뜯는 겨울은 나무 밑에서 이발을 했던 것

(…)

어둠이 내다보이는 방 안에서 남편은 독서를 계속한다

남자는 머리가 엉망이 되길 기다리며 도심에서 낡아갈 것이다

그도 남자도 조금씩 금빛처럼 노을처럼 사라지고 있지만

저쪽에 긴 여름비가 오고 은빛 천수의 은가위만 놀고 있을 뿐

-고형렬 「천수(千手)」(『밤 미시령』) 부분

 

이 시는 요령부득인 요즘 젊은 시인들의 환상적인 시편들만큼이나, 그 반대쪽에서 해석 불가능하고 모호한 다성적인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많든 적든 고형렬의 최근 시집 『밤 미시령』(창비 2006)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시의 형식이 잘 정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의 시 안에서 시적 주체가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내면의 한쪽에서는 기원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만나는 기억의 아름다움에 몸을 떨면서, 또다른 한편으로 “여기까지 나를 멱살 잡고 끌고 온 지겨운 짐승”(「나의 동굴」)이라는 동굴 같은 몸속의 흉측한 짐승과 싸운다. 이렇게 이 시집의 모순적인 정신과 육체가 동숙(同宿)하는 풍경은 동일성과 비동일성이 충돌하는 가히 양가적인 시적 공간을 창출한다. 고형렬에게 시적 언어란 드러나면서 동시에 숨는 현실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즉 현실 너머의 초월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의미를‘발명’하는 매트릭스적 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생성되는 현실의 인과를‘발견’해나가는 시다. 특히 이 시집에서 빈번하게 출현하는‘간다’라는 모티프에는 양가적인 미(未)도착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 시적 화자는 기원으로의 회귀에서도 또한 그 반대인 일상의‘서울살이’에서도 끝내‘정주(定住)’하지 못하는 자의 심정을 미묘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이 시에도 이러한 면모가 잘 나타난다. 여기서‘남자’‘그’‘남편’각각이 모두 시적 화자이다. 처음에는‘남자’가 시적 화자인 것 같지만 그것은 금세‘그’로 바뀌고, 뒤이어‘남편’으로 바뀐다. 얼핏 시의 형태를 보면 전통적인 서정시의 기법으로 충실하게 시적 공간을 짜나가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독자는 금방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재래의 서정시가 1인칭의 주체중심적인 왕국이라는 편견은, 따라서 이 시에서는 편견을 넘어선 그야말로‘환상’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시에서 남자는 중생을, 그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을, 그리고 남편은 부처의 근본을 이루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남자가 엉망이 된 머리를 미용사인 그에게 맡기는 것은 그가 “은빛과 은가위를 들고” 능숙하게 자신의 머리를 만져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위는 천수관음이 가진 천개의 손과 그 손에 박혀 있는 눈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비로운 눈길과 손짓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구제자의 손은 동시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생의 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남자의 고뇌와 그가 놀리는 은빛 가위질 사이에서 욕망과 좌절의 묘한 음영이 드리워지며 수없이 많은 손들의 표정이 지나간다. 그중에서도 이 시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해가 지는 2001년 하노이에서 머리를 맡긴 사람이 된다/1월에 소가 풀을 뜯는 겨울은 나무 밑에서 이발을 했던 것”이라는 대목은 비밀처럼 간직된 남자의 욕망과 상실감이 음화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미용사는‘은빛과 은가위’에서 연상되듯 서구에서 뛰어난 미용술을 배워 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만약 천수관음을 상징한다면 이때의 서구는 西歐가 아니라 西矩(west quadratur)10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천수관음조차 태양을 뜻하는 비로자나불에 비하면 중생이자 유한자이다. 이 시에서 비로자나불로 보이는 남편은 시적 공간인 미용실과 그 미용실 너머의 무한히 넘실대는 시간을 관조하면서 절대적인 한권의 책-THE BOOK-을 읽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읽으면 마지막 대목, “그도 남자도 조금씩 금빛처럼 노을처럼 사라지고 있지만/저쪽에 긴 여름비가 오고 은빛 천수의 은가위만 놀고 있을 뿐”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한다 해도 이 시가 내포하는 비밀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기억과 기원이 발하는 매혹에 미련을 가지면서도 그 집착을 넘어서는 초월과 허무의 심리가 이 시를 미궁의 사원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미궁의 미로를 거닐며 무수하게 난 길을 각자의 의지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좋은 시와 가짜 시를 가려 읽는 안목 중 하나는 좋은 시에서는 어떤 한곳으로 귀결되지 않는 지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가짜 시는 환상이나 피안이 먼저 주어져 있으므로 독자가 주어진 회로를 피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그래서 굳이 그 안에‘참여’할 필요가 없는 의사(擬似) 세계이다. 반면 좋은 시는 섣불리 그 환상과 피안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독자가 시인의 육체나 정신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될 어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실감의 경지를 보여준다. 김사인의 근작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이 그러하다. 이 시집을 넘기다 보면 미묘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위로하듯 우리의 마음을 쓰다듬는 것 같은데, 그 물결에 몸을 맡기고 방심한 채 흘러가다 보면 그 속에서 개별화된 존재로서 단호하게 발화되는 또다른 이의 음성이 들려와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된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코스모스」 전문

 

짧지만 울림이 큰 시다. 김사인의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이와같이 돈호법을 시적인 것으로 새롭게 변용해낸다는 점이다. 만약 이 시를 주체 동일성의 시학으로 읽게 되면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빈 호주머니여”는 제목에서 주어진‘코스모스’를‘빈 호주머니’로 묘사하는 방법, 즉 정서적으로 강화된 방법으로만 취급하게 된다. 주체 동일성 혹은 주체 자명성의 관점은 시인보다는 화자에 역점을 두고, 그것에 따라 시인 자신이 창조해낸 모든 복잡성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이상적인 시인을 설정함으로써 경험적인 시인을 대체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같은 돈호법은 음유시적 비약에만 집착하여 자신의 발화를 치장하는 시적 화자의 허구적 발화만을 표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빈 호주머니여”는 참고할 수 있는 의미론적 대상이 불분명하다. 사실 아무리 빼어난 감각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생김새에서 가을날의‘코스모스’와‘빈 호주머니’의 유사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렇게 묘사한 것으로 여긴다면 2연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요령부득의 세계가 될 터이다. 김사인은 이 시에서 돈호법을 새롭게 감각화함으로써 습관적으로 바라보던 세계를 전혀 다른 주체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끔 한다.

 

날 잊지 말아라 노래 부르네

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해

별은 빛나 적적한데 그대에게?

 

나 이승의 연(緣) 다하여

먼 길 가는 날

살쩍 고운 귀밑머리 흰 목덜미

그대 두고는 차마 못 가

자욱마다 소나기 오리

울고불며 몸부림치리

-「서귀(西歸)」 부분

 

이 시는 먼 훗날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스스로 진혼하는 만가(輓歌)이다. 만가 역시 고도의 돈호법이다. 되돌려놓을 수 없는 일시적인 단절-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취급하면서도 그러한 과정을 다시 되돌려놓을 수 있도록-죽음에서 삶에 이르는 과정-돈호법의 움직임으로써 다리를 놓고 있다.11 즉 시인은 단순히 차안과 피안의 단절을 노래하지 않고 먼 훗날 이승의 연(緣)이 다할 때 그대의 “살쩍 고운 귀밑머리 흰 목덜미”“자욱마다 소나기”가 내린다고 함으로써 자신의‘비통’이 단절에 의한 체념의 정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된 간절한 희원의 표시임을 감각화한다. 그래서 이 시의 “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해/별은 빛나 적적한데 그대에게?” 등의 돈호법은 짐짓 죽음에 의한 절연을 무덤덤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당신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보여주는 미리 씌어진‘비통’의 비문(碑文)으로도 기능한다. 한편, 이 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서정주의 「서귀로 간다」를 이곳의 현실에서 새롭게 재창조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말과 실재 사이에 난 길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1940년대 나찌가 프랑스를 점령하던 시절, 비행기가 하얀 새처럼 작은 책자를 뿌렸다. 사람들은 모두 그 책자에 씌어진 엘뤼아르(P. Eluard)의 「자유」를 발견하고 나서 흐느꼈다. 왜냐하면 점령지의 사람들에겐 새들조차‘리브르(libre, 자유로운), 리브르, 리브르’하고 우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의미심장한 것은 엘뤼아르가 이 시를 쓴 것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점령지의 사람들은 아주‘아름다운 오해’를 한 셈이다. 이런 일을 두고 엘뤼아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시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을 주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지 않은 연시(戀詩)들은, 어느 아름다운 날 사랑하는 연인들을 하나로 결합시켜줄 것이다. 마치 우리는 실재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꿈꾸듯, 한편의 시를 꿈꾼다.”12

어쩌면 이런 어긋남, 말과 실재 사이에 난 길을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비행기가 뿌려대는 삐라 같은 이미지가 우리를 구원할지도 모른다. 시의 본질은 원래의 흔적을 지워버린 언어의 추상성과 다의성 속에서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니, 한편의 시는 분위기로써가 아니라 일체의 분위기를 제거한 가장 궁벽한 극빈의 언어로써 정확하게 무(無)의 심연을 찌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이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시인은 절대적 고독감 속에서 텍스트 깊은 곳에 보석을 감춰놓는다. 어쩌랴, 우리가 시인과 똑같은 절실함으로 그 빛나는 진실을 찾아나설 때, 비로소 시의 감각은 그렇게만 우리에게 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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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 호제크, P. 파커 엮음, 윤호병 옮김 『서정시의 이론과 비평』, 현대미학사 2003.
  2. 같은 책 462면.
  3. 옥타비오 파스 지음, 김은중 옮김 『흙의 자식들 외』, 솔 1999, 210면.
  4. 백낙청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330면.
  5. 이장욱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창비 2005, 71면.
  6. 황지우 「시적인 것은 실제로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1986, 220~21면 참조.
  7. 이장욱, 앞의 책 74~75면.
  8. 알라이다 아스만 지음, 변학수 외 옮김 『기억의 공간』, 경북대학교출판부 2003, 14~15면 참조.
  9. 이윤영 「서정시를 닮은 영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거울’의 시학」, 『러시아 연구』 제16권 제1호,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2006.
  10. 외행성(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이 태양의 서쪽에 있어 황경(黃經)의 차이가 90도일 때, 또는 그 자리를 가리킨다.
  11. C. 호제크, P. 파커 엮음, 앞의 책 참조.
  12. 이찬규 『불온한 문화, 프랑스 시인을 찾아서-랭보에서 키냐르까지』, 다빈치 기프트 2006, 112~19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