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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노동시의 확장
이론적 모험과 가능성
박수연 朴秀淵
문학평론가. 평론집 『문학들』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 등이 있음. qkrtk@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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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와 관련하여, 김수이(金壽伊)는 「얼굴 없는 노동, 자본주의의 역습」(『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에서 두가지 논점을 제출한다. ①‘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노동’과 ②‘노동시의 재구성’이 그것이다. 내용상으로 단락화된 이 두가지 논점은 수미일관한 내적 인과성의 논리를 획득한다고 여겨진다. 자본이 노동을 실질적 포섭 단계로 포괄하는 시대의 정동(情動)과 정동적 노동이라는 문제설정, 그리고 그 논의의 또다른 토대를 이루는 철학자 스피노자(B. Spinoza)를 염두에 두면서 진술되었을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노동문학이 발본적으로 전환해야만 할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적인 근거이다. 이를테면 현실이 변했으니 그 현실의 언어적 표현이 달라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다. 김수이의 글은 이런 정황 속에서 한국 노동시의 막힌 출구를 찾아보려는 하나의 노력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90년대 이후 탈중심화론의 문학담론에서 보면 ①과 ②는 서로 상이한 층위에서 움직이는 개별적 구성물들이다. 이것들을 공통의 목적과 운동으로 결합할 수 있는 힘은 오히려 자율적 운동체들의 우연적 만남을 통해 형성 가능하다. 탈중심화론과 무관하지 않은 우발성의 유물론(알뛰쎄르)이 중층결정되는 존재의 역학을 표현하듯이, ①과 ②가 일관된 논리로 결합할 수 있는 근거는 순전히 우연적 조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둘은 서로에게 외부적일 뿐 필연성의 고리로 연결될 수 있는 내적 계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문학은 노동현실로 환원될 수 없으며 현실 또한 문학언어로 반영될 수 없다는 통념의 90년대 이후 판본이 자본주의의 모든 현실을 기호론적으로 해명하려는 편향이다. 이에 의거한다면, 노동시는 그 기호들이 펼치는 자율적 코드화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자율적 코드의 유희는 현실의 대상보다는 사고의 대상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1 그래서 현실은 모두 허구일 뿐이고 결과적으로는 정치·경제·사회의 영역이 유사한 형식의 기호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손쉽게 전이된다. ①과 ②가 수미일관한 논리로 결합할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현실 개조를 위한 유물론적 시도의 효과라기보다는 사고 대상의 형식적 유사성이 강제한 기호론적 결과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김수이의 입론에 대한 고봉준(高奉準)의 논평(「문제는 실감이다」, 『창작과비평』 2007년 봄호)이 주로 지적하는‘노동시의 불가능성’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봉준은, 네그리(A. Negri)에 근거하는 한 노동과 삶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시라는 개념도 필요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진술은 형식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그 부정명제의 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곧 노동이기 때문에 그것을 언어화한 문학은 모두 노동문학이라는 명제가 그것이다. 고봉준도 분명히 의식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후자의 명제야말로 김기택(金基澤)의 「사무원」을 90년대 이후 노동시의 대표적 성과로 요약하는 김수이가 애초에 의도했던 의제 설정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노동시’라는 개념에 관한 한,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노동시에 대한 가장 최근의 공식적 성취2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원용되는 이론이 네그리 등의 이딸리아 자율주의운동이라는 사실도 주목해둘 만하다. 노동과 자본주의적 현실이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이 결여하고 있는‘국가’의 영역을 끌어오면서 맑스주의를 일반화하려는 시도들이 한편에 있다면, 이딸리아 자율주의운동은 가치법칙의 파괴라는 반경제학적 관점을 동반하는 무정부주의적 이론으로 또다른 한편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이론에서 최종적 귀결로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사회적 노동의 자기가치 실현을 통한 구성권력과 그 효과로서 국가의 해체이다. 김수이와 고봉준의 글이 노동과 노동 재생산에서의 국가와 이데올로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그 이론의 무정부주의적 성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현재적 수준에서의 한국의 노동시가 그에 합당한 수준의 이념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편이 옳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노동과 국가의 문제를 힘주어 강조할 여지가 두 사람의 글에는 별로 없어 보인다. 위와 같은 이론적 근거 때문에 노동의 재생산을 위한 국가적 제약과 그에 따른 갈등요인들이 두 사람의 글에서는 삭제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노동시가‘노동’시일 수 있는 한가지 조건은‘시’의 영역에서일지라도‘노동’의 관점에서‘국가’의 문제를 환기하는 것이다. 노동시의 이념이 있다면 바로 이것, 즉 계급적 차이를 무화할 수 있는‘국가의 민주화’이며, 그 민주화란‘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지적 차이를 소멸시키는 것’(윤소영)3이다. 이 인식의 진전이 인간학적·정치적 소통이라는 점을 노동시는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당연히 미의 윤리학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소통은 관계맺음이고, 그 관계맺음은 개인주의를 넘어서서 외부적 조건들과의 구조적 문제틀을 형성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개인의 초(超)개인적 이성으로 비극적 정념이나 왜곡된 의식을 해방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잉여노동의 제한,‘인간학적 차이’(지적/성적 차이)의 종언으로서‘인권의 정치’가 미(美) 그 자체의 조건”4이라는 말이 되새겨져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수이와 고봉준의 논의는‘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노동의 의미와 그에 대한 시적 사유를 새로운 이론에 근거하여 발본적으로 제시하는 데 성공했음이 분명하다. 일례로, 김수이의 글은‘노동시’에 대한 저간의 논의를 단순 반복하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적 현실의 전환적 국면에 대응하여 그에 합당한 노동시론을 제출하려 한다.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이 입론은 그러나 80년대적 문제설정의 핵심을 충분히 쟁점화하는 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 핵심을 주체와 이념의 문제로 요약한다면, 김수이에게 그 문제는 한편으로는 사무직 노동자의‘노동권’을 통한 주체의 확장으로 귀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로 대변되는 노동현실의 변화를 “개인의 내면세계와 감각과 미학”이 가진 “무의식적 저항의 속성”으로 돌파하는 일로 귀결된다.
이런 논점 확장은 첫째, 사고의 대상과 현실의 대상을 혼동하고(사회노동자의 강조), 둘째, 노동이 상황 속에서 실현하는 자기가치의 문제를 자기관계의 문제로 축소하는 결과(환유적 언어체계의 강조)를 가져올 뿐이다.
2
왜 하필 노동시인가. 이 질문은, 노동시의 현재가 한국문학의 한 영역을 대표한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사태로부터 제기된다. 그것은‘열광 뒤의 환멸’이라는 정세적 국면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인데, 80년대의 혁명운동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노동문학의 사회운동적 필연성을 당연시하도록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최근의 노동문학이 처한 정황은 그같은 혁명운동의 퇴조 혹은 노동조합의 사회운동적 성격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와중에 노동시라는 의제와 함께 네그리의 비물질노동과 들뢰즈(G. Deleuze)의 행동학(ethology) 개념이 제출된 것은 노동문학의 소강상태에 가해진 효과적 충격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 개념의 문학적 실례로 김기택의 「사무원」을 인용하며 펼치는 김수이의 입론은 전통적인 육체노동 중심의 노동문학관에 대해 분명 중요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기회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다시 성찰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30년의 사무노동이 초래한 인간의 사물화에 대해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의 생물학적·존재론적 전회(轉回)”(김수이 246면)로 읽는 독법 자체를 문제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독법에는 모종의 착종이 있다. 네그리와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영유하면서 부각시킨 변용(affectio) 개념이 그것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행동학으로 해석하지만 네그리는 (들뢰즈를 거쳐) 스피노자에게서 권력과 역능의 인간학을 가져온다. 행동학이‘인간의 비인간화’라는 말로 통칭되는 자연주의적 해석이라면 네그리는 다중의 능동적 주체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들뢰즈와 정치학자 네그리가 공유하는 것은 그 변용능력의 생산적 성격인데, 김기택의 시는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시는 장시간의 노동으로 자본주의적 사물화에 사로잡힌 인물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비물질노동의 생산성 혹은 생물학적 전회와는 무관한 실존적 비애이지 자기가치의 실현이라는 노동의 근본적 성격과는 무관하다.
비물질노동이라는 문제설정을 떠나서 본다면, 노동의 자기가치 실현이라는 개념에 더 타당한 노동자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시인은 이면우(李冕雨)이다. 이면우와 김신용(金信龍)은 90년대의 정세적 전환 속에서 80년대 노동시의 미학적 결여를 보완해준 시인들로 주목받을 만하다. 이들의 시적 성취는 그러나 언어적 성공의 이면에 혁명적 미래상의 탈각이라는 반대급부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물론 연유가 있다. 80년대의 노동담론은 역사의 담지자로서 노동자를 호출하고, 그로써 노동하는 삶의 긍정성을 확인케 했는데, 이 결과를 90년대 이후의 시편들은 두갈래로 이어받는다. 첫째, 노동조합의 조합주의 내지 실리주의적 전환에 따른 한국 노동운동의 대대적인 변질이 노동시의 패배적 정서를 야기한다. 백무산과 박영근(朴永根)으로 이 경향이 대표될 것이다. 백무산이 그 패배를 역사적 시간의 지속에서 삶의 공간적 생성이라는 사건으로 전환했다면, 박영근은 그것을 삶의 근원 상실과 비애감으로 확장했다. 이 차이는 공통성을 동반하는데, 노동하는 삶에 대한 비극적 정념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시에서 그것은 80년대의 삶에 대한 패배의식이다. 둘째, 노동하는 삶의 긍정성에 대한 90년대적 표현은 일용노동자의 자기 시화(詩化)로 연결된다. 이 긍정성이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의식이 조직노동자의 역사적 패배에서-80년대적 혁명운동의 전망을 선취해야 한다는 긴박감에서-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상대적 자유가 노동운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과학적 사유에서 멀어진 사태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그래서 대중노동자에서 계급노동자로 전환하는 일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고 해도, 노동자의 자기가치 실현이라는 과제를 일정정도 언어화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면우의 시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열일곱, 처음 손공구를 틀어쥐었다 차고 묵직하고 세상처럼 낯설었다 스물일곱, 서른일곱, 속맘으로 수없이 내팽개치며 따뜻한 밥을 찾아 손공구와 함께 떠돌았다 나는…… 천품은 못되었다 삶과 일이 모두 서툴렀다 그렇다 그렇다 삶과 일이 그리고 유희가 한몸뚱이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나는 머리칼이 잔뜩 센 나이 마흔일곱에야 겨우 짐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주 오래 움켜쥐고 있으면 쇠도 손바닥처럼 따스해지고야 마는 듯
초등학교 이학년 아이에게 공구세트를 선물했다 지퍼를 당기는 손이 가볍게 떨고 바로 그때 아이의 탄성처럼 은백의 광채가 그곳에 떠도는 것을 나는 처음이듯 보았다.
-「손공구」(『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2001) 전문
노동의 부정될 수 없는 진실이 차갑고 묵직하게, 그러나 끝내 따스하게 표현되는 이 언어들은 이면우의 시집에서는 유별난 것이 아니다. 손공구를 처음 쥐었을 때의 이물감은 그 공구를 내팽개치도록 하는 정념으로 들끓는다. 이 정념은 삶의 슬픔에 대한 것이지만, 그 삶의 갱신에 대한 비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 갱신이란, 80년대에는 혁명적 낙관주의와 통하는 것이었고, 지금은 다중의 역능에 연결되는 낭만적 무정부주의의 형태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낙관주의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비관주의가 저 정념의 울림으로 가득한 삶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이면우의 시는 루카치(G. Lukács)와 벤야민(W. Benjamin)으로 대표될 두갈래의 역사관 사이에 자리잡는다. 그에게 삶은 낙관과 비관의 두 측면을 동시에 갖는데, 「손공구」는 바로 그 이중적 의미로 감싸인 삶을 긍정함으로써 삶 스스로 확장하는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차가운 공구에서 따스한 공구로 전환함으로써 삶의 확장을 실현하는 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곡절의 비약이 있었을 것이다. 시적 변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비약의 결과는 그런데‘인간의 동물 되기’(들뢰즈)와도 같은 비인간적 풍모가 아니다. 여기에는 김수이가 김기택의 시에서 읽어내려고 하는 생물학적·존재론적 전회도 없다. 오히려 인간학적 소통과 확장이라고 해야 할 내용이 도드라지는데, 그것을 알게 해주는 표현은 “아주 오래 움켜쥐고 있으면 쇠도 손바닥처럼 따스해지고야 마는 듯”이다. 이것이야말로 객관적이고 비인간적인 대상에 대한 인간화의 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 핵심적 지표이다. 김기택이‘사물화된 다리’(「사무원」)로 나아가고, 유홍준(劉烘埈)이‘기계신(神)’(「기계는 기계의 염주 베어링을 돌린다」)으로 나아갈 때 이면우는‘차갑고 묵직한 쇳덩어리’를 인간적 소통의 따스함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이 소통이 노동의 이념과 관련됨을 보여주는 시가 있다. 소통이 있을 때 개인성에 근거하되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의 공통적 토대가 만들어지는데, 시에 이것이 상징적 보편성의 차원으로 직접 드러날 수는 없다. 시는 항상 그 보편성의 구체만을 현재적 의미화의 차원에서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 어떤 우회가 있다면 그 우회를 보편성으로 연결해줄 비약이 필요할 것이다. 이 비약과 함께 소통의 가능성/불가능성이 나타나는데, 노동과 자본의 동역학을 인간학적 소통의 실현을 통해 뒤집어볼 줄 아는 시는 김해자(金海子)의 「찐따」(『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이다.
출근길 계단을 건너뛰어 급히 유리문을 열면
오래전부터 그랬다는 듯 조용히 샘플대 앞에 서 있던 사람
그의 손을 거쳐간 수천 가지 옷을 증명하듯
두꺼운 종이 가다판 줄줄이 걸려 있는 벽 마주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사람
풍 맞고 다리를 절어, 찐따라 불리던 사람
(…)
열네 살부터 양장점에서 기술을 배워
솜씨 하나는 일류급이었지만 계산에는 서툴러
늘 적자에 허덕이던 사람 솜먼지 쿨럭거리고 색색 원단뭉치
힘겹게 서 있던 공장 뒤켠 단칸방에서 살던 사람
몇 달 월급 못 받고도 끝내 싸울 수 없었던,
부끄러움 내내 곱씹게 하였던, 서른세 살,
절뚝거리며 공장문을 걸어 나온 내 유약한
청춘의 마지막 공장 박 사장
-「찐따」 부분
여기에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도 착취하는 자본가도 없다.‘월급을 받지 못한 노동자의 어처구니없는 대범함’만 있는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물론 노동하는 존재의 연민과 긍휼 때문이다. 이 연민과 긍휼이 인간적 윤리학의 한가지 기초라면, 미학의 윤리학도 이를 통해서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존재들 사이의 관계가 펼쳐지면서 뜻하지 않았던 의미와 삶의 충만함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류공장의 가난한, 노동하는 사장 뒤에 있는 거대한 힘이 무시될 수는 없다. 노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절뚝발이 찐따로 만들어버리는 그 힘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현실을 치유 불가능한 찐따로 왜곡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에는 두개의 층위가 나타난다. 현상의 층위에서는 교류하는 존재들-그것이 가능한 것은 노동이다-의 상생과 화해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이것이 공통적 삶의 정치이고 인간적 자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시는 환기한다. 자본주의적 적대 너머의 공간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시는 그것의 불가능성을 확인한다. 이를 통해 근거의 층위가 나타난다. 시의 결말에 “절뚝거리며 공장문을 걸어 나온 내 유약한/청춘”이 가로누워 있기 때문이다. 근거의 층위에서 움직이는 힘이 노동을 소외시키는 역학을 「찐따」는 슬며시 전달하는데(시의 화자가 절뚝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절뚝거림’이야말로 서른세살의 나와 공장 사장의 관계를 펼쳐 보이는 결정적 계기이다. 우선‘절뚝거림’은 나와 사장의 관계맺음을 구체적 사태로 표현한다. 어떤 공통성을 구성할 수 있는 소통이 여기에 있다. 다음, 그‘절뚝거림’은 그러나 나와 사장 사이에 그같은 공통성의 균형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소통이 있는데 뒤집어보니 한계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에서 나와 사장 사이의 공통성은 상상적 동일화의 과정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상징적 보편성이란 바로 자본의 현실을 가리킬 뿐이다. 「찐따」의 절뚝거림이 단순한 정서적 부끄러움이나 상처의 의미로만 종결될 수 없는 셈인데, 이렇게 시는 노동과 자본의 근본적 불일치를 잠재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비물질노동이 아닐 것이다. 노동시까지 포함해서 모든 시의 공준(公準)이 시인 것처럼 모든 노동의 공준 또한 노동이다. 더구나 그 노동이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 있을 때 노동은 노동 재생산에 개입하는 국가의 영역과 최종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에 노동시와 관련하여 제출된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국가가 개입하는 자본주의적 노동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최근 노동에 관한 시들이 노동구조의 변화를 적극 반영하지 못하고 육체노동을 주로 다루는 것은 현실의 속도에 뒤처져 있는 시의 지체현상을 예증하는 것”(김수이 246면)이라는 김수이의 진술에는 그러므로 노동현실의 새 국면에 대한 지나친 일반화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여겨진다. 새로운 언어표현과 새로운 현실에 대한 집중적 관심이 이런 편향의 이유일 텐데, 이는 90년대 이후 언어학적 전환이라는 국면 속에서 문학언어의 문학성에 집중한 부정적 효과일 것이다. 김수이의 사태 파악이 부분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해도, 육체노동이 여전히 삶의 중심에 있는 노동자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실제로, 노동과 자본의 계급적 역학을 충실히 형상화하고 있는 시의 예는‘일과시’동인들의 작품에서 더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시가 80년대적 노동의 문제의식을 생활노동의 소품으로 축소시킨다라는 부정적 평가도 가능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한국 노동운동의 조합주의적 전환이라는 한계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비판에 불과하다.5 마찬가지 근거에서 본다면, 김기택의 시가 노동시이기 위해서는 그 노동을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활력으로 전화(轉化)하려는 싸움을 동반하고 있어야 한다. 노동시가 새로운 함의를 지니면서 동시에 기존의 노동운동이 핵심적으로 수행해온 사회구성적 역할을 계승하는 것은 바로 이런 활력의 의미를 찾아올 때에야 가능하다.
3
김수이가 노동을‘사건/행위’라고 지칭할 때, 이 지칭에는 정확히 헤겔의 목적론에 대비되는 종말론의 사유가 개입되어 있다.6 갑작스러운 공백이나 개시 혹은 시간의 중단이 일어날 때‘(발생하는) 사건’과‘(작용하는) 행위’가 있는 것이다.‘사건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론적 체계들이 공히 전제하는 것은 공간적 생성에 대한 사유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시간의 지속으로서의 역사성의 문제 이전에 그 지속들의 단절과 단절을 통한 생성의 논점이 제기된다. 이로써 역사의 파국인 동시에 새 역사가 개시되는 순간이 논의의 표면에 떠오르는 것이다. 이미 백무산에 의해 형상화된 바 있는 이‘사건’의 시화(詩化)는, 세계에 대한 순간적 포에지의 언어화가 시라는 점에서 보면 시인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문제되는 것은, 근대적 역사관의 파탄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예전과는 달리 그것이 근대적 시간관을 대체하는 사유라고 재성찰되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차원에서는‘공간적 생성의 사유’를 개념들의‘전개’에 대비되는 개념의‘분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7 개념을 탐구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시간을 상실한 존재들의 실천적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을 상실했다는 것은 진리의 가능성을 상실했다는 말과 통할 텐데, 이로써 역설적이게도 그 진리의‘가능성’을 탐구하는 일이 곧 개념을 분석하는 일인 셈이다. 최근 노동시의 한 차원이‘노동 개념’을 시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현상도 이로써 좀더 잘 이해될 수 있는데, 최종천(崔鍾天)과 조기조(趙起兆)가 그들이다. 최종천은 개념적 분석을 하되 그 분석의 바탕에 근대적 노동 개념을 둔다. 다음의 구절을 보자. “감각의 입구였던 열 개의 손가락은/자판 위를 누비며/회색의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다/보이지 않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던/손의 시력은 높은 안경을 끼고 있다/(…)/나의 손은 이제/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다/나는 노동을 잃어버리고//허구가 되어간다/상징이 되어간다”(「가엾은 내 손」,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최종천의 시에서 비물질노동과 정동적 노동의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것은 다만 허구일 뿐이라는 이 간명한 진술은 그러나 형식적인 차원에서는 앞에서 말한 공간의 철학에 닿아 있다. 조기조는 이것을 좀더 시적으로 가다듬는다.
지난여름 붐볐을 바다
그러나 흔적 없이 지워놓은 바다에
철 지난 휴가를 왔다
도시에서 이 바다까지 오는 데
세 시간이 걸렸지만
어려서 이 바다를 떠난 지
삼십 년 만에 나는 쉬러 왔다
백사장 입구에 안내판이 있었다
‘구석○시대…… 유○○…… 조○무지……’
글자들이 모래알로 부서지고 있었다
길고 긴 시간의 채에 걸러진
모래턱의 모래알들 누군가
내게 찰나의 크기를 묻는다면
모래 한 알을 들어 보이리라
누군가 바다를 찾는 것은
모래알처럼 자디잘게 부서진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래 한 줌을 들어 흩뿌려본다
크고 굵기만을 바라던
지난여름 노동의 땀방울 틈새를 채우며
비로소 삶이 온전해지는 듯하다
안내판을 따라 눈을 돌리자
지구 모양으로 휘어진 수평선에
어부들이 허리를 기댄 채
삼만 년 전의 자세로
함지박을 밀고 끌며 걸어나온다
함지박 가득 담긴 조개들이
혀를 빼물고 있었다
아, 누군가 또다시
영겁의 크기를 묻는다 해도
나는 모래 한 알을 들어 보일 것이다
-「모래의 시간」(『기름美人』, 2005) 전문
여기에는 모래 한 알로 찰나의 영원성을 노래하는 공간적 상상력이 있다. 조기조의 시가 특이한 것은 그 찰나의 공간이 “모래 한 줌을 들어 흩뿌려본다/크고 굵기만을 바라던/지난여름 노동의 땀방울 틈새를 채우며/비로소 삶이 온전해지는 듯하다”는 진술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도시 노동자의 삶의 표현일 그 구절은‘어부’들의 노동으로 확장되고, 이것은 다시 삼십년 만에 찾은 고향의 휴식으로도 확장된다. 이를 연대의 확장이라고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각각의 시적 대상, 즉‘삼십년의 노동-모래 한 알-삶-어부-영겁의 크기’가 동등한 비중으로, 동시에 언어적 구성으로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념적 분석의 형식을 심미적 언어의 형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약과 개시의 사건으로 시가 전개되는 방식이다. 이 비약과 개시의 사건이란, 그가 이미 숲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개별자로서 보편에 관계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듯이(「숲의 정치-똘레랑스에 대하여」, 『유심』 2005년 여름호) 뜻하지 않은 의미 출현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나아가 존재의 새 국면을 계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에 대한 개념적 분석이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현상하는 진리 상실이라는 문제와 관련된다면, 또한 진리 상실 시대 이후에 출현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심심찮게 등장하는‘노동’의 상상력도 비중있게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김수이도 그의 글 말미에서‘노동의 시화(詩化)가 젊은 시인들의 개인적 내면의 감각과 충분히 접속할 수 있다’는 요지의 진술을 하고 있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또한 비물질노동의 차원에서 노동시도 감각의 언어화이기 때문에 이 진술은 충분히 발전시켜볼 만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면에서 판단할 때 이들의 시는 노동시가 아니라 단지 노동과 노동자를 상상력과 감각의 현현(顯現)을 매개하기 위한 소재로 활용한 것일 뿐이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분석하지는 않겠지만 이 시편들은 대부분 언어와 시인 자신의 관계를 표상한다. 언어학적 전환 이후의 시적 전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이들의 시는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존재들에 대해, 혹은 자신의 개인성을 구성하는 초개인성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들의 시로써 한국시의 언어미학적 지평이 넓어졌다는 사실은 글자 그대로 미학적 차원의 일이지 노동시의 차원은 아니다. 그러므로 김수이가 젊은 시인들에게 내적 감각과 노동시의 무리없는 결합을 요구할 때, 그 결합에서 필요한 것은 감각의 자기 내적 관계의 표현이 아니라 그 감각을 초개인적인 외적 관계로 확장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새로운 감각과 언어표현을 무의식적 저항이라는 말로 가다듬는 것은 모종의 억압가설을 전제하는데, 그 가설이야말로 자칫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오류를 정당화할 뿐이다. 노동에 대한 새로운 언어표현이 그 가설로서의 억압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그리고 노동의 경제학을 넘어서서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영역을 표상할 수 없다면 그것은 노동시가 갖춰야 할 요건의 한가지 핵심을 놓쳐버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것은 자본주의적 현실의 상징적 보편성을 노동재생산에서의 국가와 이데올로기 문제로 환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 시인들의 시가 소통의 부재라는 비판에 노출되는 사태가 바로 이 문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다. 그들의 시에서는 공통의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고의 대상과 현실의 대상을 혼동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의 대상이 과학적 개념으로 정리되고 사고의 대상이 철학적 개념으로 정리될 때, 미학적 감각을 통한 관념 비판은 바로 사고의 대상을 개념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8 젊은 시인들 개인의 내면세계와 감각을 통한 무의식적 저항이 결국은 자기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의 언어적 순환에 지나지 않는다는 앞서의 지적은 바로 이런 사태를 가리킨다. 젊은 시인들 특유의 감각이 특히 최근에 이르러 환유적 언어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이것이 노동시의 현실적 실천성과 맺을 수 있는 관계는 그리 많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진리는 실천적 구성과정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 진리가 이른바 거대서사의 몰락과 함께 형이상학적 폭력의 진원지라고 규정되자마자 세상은 모호하고 아득한 미지의 영역이 되어버린다. 그 대신에‘언어학적 전환’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인식론이 등장하고, 이제 문학은 그 언어의 미끄러짐을 어떻게 형식화하는가 하는 사실의 증거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이때 모든 문학은 진리에 대한 그런 미끄러짐의 존재증명을 위해 기능한다. 분명하고 뚜렷한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으며, 가능한 것이 있다면 세계의 핵심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일의 운명적 실패를 문학적으로 어떻게 색다르게 드러내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이미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언어의 놀이라는 명제와 함께 이를 포스트모던적 비관론의 낙관적 정향(定向)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진리의 불가능성은 혁명의 불가능성이라는 논리로 통한다. 그러나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이행이 혁명운동의 불가능성을 초래했다는 생각은 맑스의‘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중 첫번째 테제를 부정하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 테제는‘실천적 행위’혹은‘주체’를 세계 변화의 동력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포스트 담론의 주장은 그 실천적 주체를 삭제하는 데서 출발한다. 실제로 자본의 압도적 물리력 앞에서 실천하는 주체는 점점 왜소해지고 무기력해지고 있다. 자본주의적 계급역학 속에서 거대담론 시대의 민중이 소멸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민중이 반자본의 효과적 실정성을 더이상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 구성분자로서의 민중이 사라질 리는 없다. 자본의 세계지배 정책에 대항하는 농민 시위와 노동자 파업은 계속된다. 이중기(李仲基)는 『다시 격문을 쓴다』(작가마을 2005)에서 세계화시대 한국 농민의 울분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최종천은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창비 2007)에서 여전히 노동계급의 사상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같은 농민·노동자의 절규 혹은 주장에 대한 반향은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이 사태가 정말로 포스트 담론의 주장처럼 실천적 주체의 무기력을 방증하는 것일까? 주체의 실천과 세계 변화는 이제 시효가 다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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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편의 시 분석을 통해 현재 노동시의 윤곽을 살펴보고 몇가지 주장을 제시하려 한 것은, 현재 한국문학의 양상 속에서 노동시에 대한 희망사항을 피력한 측면이 강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90년대 이후의 노동시는 생활노동의 비애를 묻거나 개념적 탐구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노동시를‘노동’시이게 하는 요인이 눈에 띄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뜻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소통과 연대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여기에 국가의 문제가 개입되는 이유는 국가가 노동의 재생산에서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에 국가의 문제가 생경하게 직접 드러날 수는 없다. 그것은 삶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한지 혹은 왜 불가능한지를 심미적으로 성취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노동시가 이 문제를 심도있게 고민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는 점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되짚어서 생각해보면, 80년대에 박노해의 시가 열광의 대상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열광을 뒷받침하는 연대적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미학적 결과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상상력의 심미적 실천이었으며 그 바탕에는 사회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노동운동이 실리주의적 조합주의에 머무는 한, 그 심미적 실천으로서의 노동시는 따라서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객체로서의 대상’과‘주체로서의 실천’이라는 언어로 표상되는 것들의 오래된 대립구도가 서로 얽힌 채 난맥상으로 펼쳐지는 것도 바로 그 정황 속에서이다.‘민중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거나‘80년대 같은 노동시는 이제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명제와 질문 들이 이제는 거의 상식이 된 현실에서, 왜 하필 노동시인가라는 질문은 객관과 주관의 상호적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감행하도록 요구한다. 포스트포드주의가 노동시의 가능성을 소멸시키는가 아니면 노동시의 시효 만료라는 담론이 포스트포드주의의 일방적 규정성을 용인하는가 하는 점이 논의되어야 한다. 상당히 기계적일 수밖에 없어 보이는 이 논의는 그러나 자본주의 현실과 그에 대한 현재의 문학적 진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더 많은 분석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난 십여년간의 문학담론에서 문학의 문학성이 (나아가서 노동운동의 노조중심주의가) 중심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 그 문학의 현실성은 (나아가서 노동운동의 사회운동적 성격은) 주변으로 밀려나버렸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의 문학담론에서 도래할 시간을 향해 운동하면서 그 시간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주체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와 반대로 현재적 현상들의 변모가 주체를 규정하는 과정과 그 주체의 현상적 실태에 대한 사례보고로만 내용을 채워나간다. 주체의 능동성이 삭제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또다른 의미의 객관주의적 편향이다. 과거 문학담론의 주의주의(voluntarism)적 편향을 넘어서야 한다는 정당한 주장은 현재 문학담론의 핵심 내용인 구조적 피규정성을 옹호하는 수사학으로 전락해버린다. 주의주의를 극복하여 주객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최근의 시비평이 그다지 할 말이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주의주의를 넘어서면서도 객관주의적 편향에 빠지지 않는 균형잡힌 시각이다. 그러나 주장하기는 쉬워도 실현하기는 어려운 것이 또한 그 균형이다. 9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이 보여준 양상들이 하나의 편향을 교정하기 위한 또다른 편향으로의 함몰이었다면, 그 사태야말로 균형잡힌 시선의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다. 노동시 또한 이 어려움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90년대 이후의 노동시가 모종의 지리멸렬에 빠져 있었다면, 그 이유는 바로 그 균형의 부재에서 오는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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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는‘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중 첫번째 테제에서‘사고의 대상’과‘현실의 대상’을 구분하고, 관념론과 구분되는 유물론은 현실의 대상을 사유한다고 주장한다.↩
- 노동문학의 실천적 도약이 목표인‘리얼리스트 100’의 경우도 아직 일관된 견해를 제출하고 있지는 않다.↩
-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면, 노동자로 하여금 1종의 인식(원인을 알지 못하는 인식)에서 2종의 인식(원인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 에띠엔 발리바르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윤소영 편역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 187면.↩
- 오히려‘일과시’동인들의 시는 노동시가 고려해야 할 것들을 지속적으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지금 현실은 여전히 노동과 자본의 적대로 구성된 자본주의이다’라는 말은 누누이 반복되지만 그 반복만큼 절실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부각되지는 않는 시점에, 노동과 자본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떤 미의 윤리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일과시’동인들은 줄기차게 제기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미적 성취의 충분성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80년대적 문제의식에서의 후퇴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이들의 시에서는‘노동’시, 즉 모든 시 중에서 바로 그 시를 노동시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적대의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 (역사적) 목적론과 (메시아적) 종말론의 대칭점에 대해서는 에띠엔 발리바르 「목적론 대 종말론: 알뛰쎄르와 데리다의 유예된 대화」, 윤소영 편역 『일반화된 맑스주의의 경계들』, 공감 2007 참조. 발리바르의 글은 그 둘을 구별하는 데리다를 알뛰쎄르적 관점으로 영유함으로써 넘어서려는 시도인데, 여기서 헤겔과 맑스는 한국에서 포스트 담론에 의해 일방적으로 비판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평가된다. 가령 헤겔은 이미 『대논리학』에서 목적론의 문제를 지양하고 있으며 맑스는 역사를 서로 모순되는 다수의 경향들의 가능성의 문제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결국 맑스주의의 복귀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함께 필연화될 수밖에 없다고 발리바르는 말한다.↩
- 조정환(曺貞煥)이나 정남영(鄭男泳)이 가치법칙을 넘어서 비물질노동과 실질적 포섭, 사회적 노동이나 다중의 문제를 개념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런데 이들의 작업은 역설적으로 맑스에게 부재하거나 결여되어 있는 것-‘부재’와‘결여’라는 언어의 차이는 관점의 차이이다-을 맑스의 말로 재구성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맑스의 포섭론이 기계의 진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본 속에 노동이 있다는 것인지가 분명히 구분될 필요가 있는 셈이다.↩
- 앞에서 인용한 테제에서 맑스가 감각의 대상에 집중하는 포이에르바흐의 태도를 지적했을 때, 그것은 관념론을 비판하는 감각 중심의 철학 분파의 미학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것으로 확장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낭만주의 중심의 그 분파는 인간의 실천적 대상으로서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의 감각적 대상으로서 철학적 대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때 감각이 대상과 맺는‘관계’는 현실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윤소영, 앞의 책 27~32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