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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

 

해석을 넘어 창조와 횡단을 꿈꾸다

한국문학의 번역, 그 현재와 미래

 

정여울 

문학평론가.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역서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이 있으며, 주요 평론으로 「20세기 초 몽유양식의 담론적 특성 연구」 등이 있음. suburbs@hanmail.net

 

 

1. 한국문학의 번역, 그 의미를 다시 묻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한국문단은‘노벨상 홍역’을 치른다. 노벨상이 한국문학 세계화의 디딤돌이자 강력한 지표로 인식되는 한, 이런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노벨상을 표적으로 한 번역사업이 오히려 다양한 텍스트의 해외 번역을 가로막는 문화적 장벽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노벨상을 겨냥한 번역 기획은 활동경력이 많은 생존 문인들의 작품에 국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전문학이나 최신 텍스트의 번역이 상대적으로 소외되기 쉽다. 게다가 문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들이 번역될 때, 비로소 한국문학을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가 구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주빈국으로 선정된 것은 물론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기회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다. 이러한 이벤트 중심적 사고 자체가 한국문학의 진정한 소통을 방해해온 것은 아닌가. 우리가 베트남이나 케냐나 체코가 아닌,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국문학이 읽히기만을 원해온 것은 아닌가.‘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캐치프레이즈가 프랑스나 미국 문학처럼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메이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동의어는 아니었을까. 국적에 대한 과잉된 엄숙주의가 한국문학의 진정한 지구적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는 루이 14세 말엽부터 중국의 사서삼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번역의 왕국이라 불리는 일본은 수백년 전부터 세계 각국의 텍스트들을 번역해왔다. 또한 일본이 1990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으로 선정되었을 때는 이미 2만권 이상의 일본 서적이 외국어로 출간되어 있었다. 이런 선진적 출판문화를 자랑하는 국가들과 비교한다면 한국문학이 해외에 번역된 역사는 짧다. 하지만 양적인 측면에서 한국문학 번역의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 1890년 언더우드(H. G. Underwood)의 한영·영한 겸용사전이 발행되었고 그 전인 1889년에는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이 번안한 『한국민담집』(Korean Tales)이 간행되었다. 이후 최초의 한국문학 번역서라 할 수 있는 제임스 게일(James Gale)의 『구운몽』(The Cloud Dream of Nine, 1922)을 비롯하여 한국문학의 번역작업은 단속적으로 진행되어왔다. 한국문학번역원의 통계에 따르면 2007년 현재 한국문학 텍스트 2,340여종이 27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번역작품 수로 통계를 내면 무려 31,731편이다.

가장 많은 번역이 이루어진 언어는 역시 영어(629종)이며, 일본어(439종)와 중국어(367종), 프랑스어(239종), 독일어(237종) 순이다. 1974년부터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 및 출판에 대한 정부 지원이 본격화되었으며, 이때부터 문예진흥원은 번역 및 홍보 사업을 통해 한국문학을 해외로 소개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2001년 한국문학번역금고가‘한국문학번역원’으로 개명하면서부터 더욱 체계적인 번역 지원사업이 이루어져왔고, 대산문화재단 또한 1993년부터 번역 지원사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2009년에는 1919년 이후 발표된 시, 소설, 희곡을 엄선한 영문판 현대문학선집이 10권으로 편집되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국내에서‘살아있는 고전’이 된 현대문학 텍스트들은 대부분 번역된 상태다. 원작자별 번역서 출간 순위를 보면 이문열(43종) 고은(36종) 조정래(35종) 황석영(34종) 이청준(32종) 김지하(25종) 황순원(24종) 김소월(23종) 박경리(22종) 박완서(21종) 등으로 50위 안에 드는 원작자 중 거의 70%가 생존해 있다. 가장 많이 번역된 책은 『춘향전』이며, 『구운몽』 『한국민담집』 『님의 침묵』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여러번 번역된 텍스트들을 비교하여 그것들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작업이나 훌륭한 번역서를 선별해내는 연구들은 많지 않다. 번역의 오류와 미진한 부분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최고의 완결판’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작업이야말로 번역의 질적 발전을 위해 절실한 시점이다.

박경리 서정주 이문열 황순원 박완서 김동리 윤동주 김소월 조정래 황석영. 2004년에 한국문학번역원이 독자 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우선적으로 번역해야 할 작가’의 순위다. 하지만 이 목록은‘작가별 번역서 출간’순위와 거의 일치한다. 한국을 대표하여 세계에 가장 알리고 싶은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박경리의 『토지』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제일 많긴 했지만, 『토지』는 번역이 완료된 상태였을 뿐 아니라 정작 해외에서 한국의 대하소설에 대한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한편 국내 유명작가에 치중되어 있는 한국문학 번역은 현재 가장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는 젊은 작가들 쪽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시대의 중심에서 오늘을 말하는 작품들을 생생한 현장성으로 복원하는 번역의 민첩성이 절실하다.

통계적 분석과 성과 중심의 분석은 이후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를 위한 기본자료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방대한 번역 양에 비해 질이 현저히 낙후되어 있다는 지적도 충분히 제기되었으며,‘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대안들도 이미 제출되어 있다. 관련 연구들은, 번역에 독립된 학술적·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고, 기획-번역-출판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매체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의 통계자료를 보면 이제 번역의‘수량’이 아니라 번역의 의미 자체를 다시 물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분량은 확실히 축적되었지만 번역의‘작품성’은 아직 거의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변화된 매체환경과 국제질서 속에서‘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이 지니는 의미 자체를 다시 사유해보는 몇가지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한국문학의 번역이라고 말할 때,‘한국문학’이라는 개념은 어느 범위까지 규정될 수 있으며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일까. 창작 못지않게 고통스럽고 난해한‘번역’이라는 작업은 어떤 차원까지 용인될 수 있고, 확장될 수 있는 것일까. 번역된 텍스트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할 때 우리는 흔히 모국어가 가진 독특한 뉘앙스가 휘발된 것을 한탄하곤 하는데, 우리는 과연 모국어에 얼마나 능숙한 것일까. 모국어 사용자끼리도 다양한 오해가 빚어지고 소통 불능이 발생하는 시대에‘모어문화’라는 경계는 얼마나 견고한 실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2. 오독과 난독 사이에서 표류해온 한국문학

 

바야흐로 우리 사회는 국내 거주자 4800만명, 국외 거주자 600만명 시대에 들어선 지 오래다. 해외유학과 이민이 나날이 활성화되고 국내에서도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을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하여 다채로운 외국인 캐릭터를 시나 소설에 등장시키는 작가들도 많아졌다. 자이니찌(在日)나 재미교포를 비롯한 해외거주 한국인의 문학 또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보편어’로서의 영어 교육에 길들여지는 한국의 어린이들에게‘한국어 글쓰기’는 과연 언제까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그들이 자라나서 인식하게 될‘한국문학’의 경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아니, 그들에게‘한국문학’이라는 경계 자체가 여전히 유효하게 될까. 유재현의 『시하눅빌 스토리』(창비 2004)처럼‘이것이 과연 한국문학인가’‘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하는 작품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해외에서는 인정받았지만 정작 국내에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한국계 작가도 많다. 이창래의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 Riverhead Books 1995)를 비롯하여 다수의 디아스포라 문학들이 국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그들의‘원어’텍스트들은 오히려‘한국어’로 번역되었거나 번역되어야 할 상황이다. 차학경, 현월, 아나톨리 김, 서경식, 수잔 최, 유미리, 카네시로 카즈끼, 캐롤라인 황, 이양지 등 수많은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문학을 소개한 『디아스포라 문학』(정은경 지음, 이룸 2007)의 출간도 반가운 소식이다. 이창래, 서경식 등을 제외하면 국외 거주 한국계 작가들의 작품은 그다지 활발하게 읽히고 있지 않다. 이제 그들의 문학을 단지‘교포문학’이라는 어정쩡한 위치에 가둘 수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이들의 활동을‘한국문학’이라는 견고한 국적성으로 재단하기도 어려운 문제다. 이들의 작품은‘한국문학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분열적이면서도 유동적인 정체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가 적어도 두개의 문화 사이를 횡단하는 역동적 경험일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번역을 통해서야‘모국어란 무엇인가’‘자국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익숙한 직관 바깥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유학 1세대라 할 수 있는 외국문학 전공자들은 하나같이 번역의 고통과 그에 비례하는 황홀경에 대해 흥미로운 고백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지문(徐之文)의 「한국문학 번역의 문제점과 과제」에는 한국문학 번역에 대한 각종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한국의 단편소설을 엄선하여 영역한 The Rainy Spell and the Korean Stories가 나왔을 때 유진오(兪鎭午)는 강경애의 「지하촌」이 이 선집에 포함된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을 정도라고 한다. 지독한 가난이 한국문학의 대표적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대연각호텔에 화재가 났을 때 어떤 지식인이 “우리나라에 그런 고층건물이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게 되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며 푸념했을 만큼, 가난에 대한 그 세대의 열등감은 처절한 것이었다고 한다. 서지문의 지인은 “우리나라 문학은 모두 굶어죽는 이야기밖에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서지문 자신도 『태평천하』의 윤직원같이 “사기성이 농후하고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1 인물이 주인공인 작품이 번역되는 것이 걱정스러울 정도라고 고백하는데, 정작 전경자(全慶子)가 번역한 이 작품은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레데레(M. Lederer)는 번역을 크게 세 차원으로 나누었는데,2 랑그(langue) 차원의 번역, 빠롤(parole) 차원의 번역, 텍스트 차원의 번역이 그것이다. 랑그 차원의 번역이란 출발어(원본 언어)와 도착어(번역 언어) 단어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방식의 번역이고, 빠롤 차원의 번역은 언어적 문맥 이외에 다른 문맥이 개입되지 않는 번역, 텍스트 차원의 번역은 빠롤 차원의 번역에 번역자의 지식과 인지능력이 보충되는 번역을 말한다. 세가지 차원의 번역 모두 텍스트 번역과정에서 중요하게 작동한다. 라드미랄(J. R. Ladmiral)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단어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물을 번역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사고를 번역하는 것이다.”3 원작 자체가 다의적 모호성으로 이루어져 있기 마련이므로 사실 일대일 대응의 번역이라는 생각 자체가 환상일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매끄럽고 자연스러워‘보이는’번역이 위험할 수도 있다. 독자로 하여금 문화적 갈등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번역은 지나치게 도착어 위주의 번역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한 작품에 대한 다양한 스타일의 번역이 존재하여 독자가 다채로운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문학 번역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독이나 오역을 지적한 사례들은 종종 있었다. 단적인 예로, 김억의 시를 번역한 불문학자는 “나비가 하늘하늘”에서 의태어‘하늘하늘’을‘하늘〔天〕’로 오해하여 “Leciel, leciel”이라 옮긴 적도 있고 정지용의 시 중에서 “파도가 뿔뿔이 흩어진다”를 번역하면서 의태어를‘뿔’(horn)로 착각하여 “파도들이 뿔들을 세우고 흩어진다”고 번역한 적도 있다.4 하지만 이런 오역을 번역자의 기상천외한 실수담으로 비판할 일만은 아니다. 그만큼 모국어 내부에서도 다양한 오독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공동 번역의 활성화와 함께 번역 텍스트 자체에 대한 다양한 토론작업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번역 텍스트에 대한 일종의 독자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독자들의 반응을 생산적으로 반영하여 번역서를 출간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오독과 곡해의 과정들은 그 자체로 모국어 자체를 낯설게 바라보는 창조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뿐 아니라 한국문학 텍스트 내부에서도 이미 모국어의 경계 자체를 다시 묻게 하는 상황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이주노동자나 외국인 거주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문학 텍스트에는 이미 한국어 내부의 혼성언어적 징후들이 보인다. 박범신의 『나마스테』(한겨레출판 2005)뿐 아니라 손홍규, 김애란 등 젊은 작가들이 최근에 발표한 작품들에서도 이주노동자의 혼성적 한국어는 중요한 소재다. 피진(pidgin)이나 크레올(creole)5은 더이상 영어나 프랑스어의 순수성만을 위협하는‘고유명사’가 아니며 이미 전세계에 수십종 이상의 크레올이 번성하고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거주자들이 쓰는 언어들이‘새로운 한국어 크레올’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다. 번역의 문제는 이제 단순히‘한국문학의 세계화’뿐 아니라 한국어라는 언어 자체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문화사적 테마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3. 해외문학 한국 소개의 성과와 한계

 

한국계 문인이 해외에서 주목받은 사례도 적지만은 않다. 함경남도 흥원에서 태어난 재미작가 강용흘(姜鏞訖, 1903~72)의 『초당』(The Grass Roof, 1931) 『동양 사람 서양에 가다』(1937) 등은 미국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초당』은 10여개 언어로 번역될 만큼 널리 읽혔고, 당시 『유엔월드』지가 그를 “살아 있는 한국사람 중 가장 유명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미륵(李彌勒)의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ßt, 1946)는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독일문학계에서 주목받았다. 이후 김은국(金恩國)의 『순교자』(The Martyred, 1964)는 당시 『뉴욕타임스』로부터‘도스또옙스끼와 알베르 까뮈의 문학세계가 보여준 위대한 도덕적·심리적 전통을 이어받은 훌륭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베스트쎌러가 되기도 했다. 이들의 작품은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 목록에 속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현재의 한국문학사 연구에서 재조명받아야 할 중요한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

윤흥길(尹興吉)의 『장마』(長雨, 강순 옮김, 1979)는 일본에서 널리 화제가 되었는데, 타떼마쯔 와헤이(立松和平)는 윤흥길의 『장마』가 기존의 재일교포문학과는 다른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후 윤흥길의 『에미』(母エミ)는 애초에 일본 독자를 대상으로 집필한 최초의 작품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쥘마출판사에서 나온 김유정 단편집 『소나기』가 초판이 매진되며 프랑스에서 단기간에 가장 많이 팔린 한국문학 작품으로 기록되기도 했고, 이승우의 『생의 이면』에 쏟아진 프랑스 언론의 찬사도 예상을 뛰어넘은 희소식이었다. 이승우는 2000년에 『생의 이면』 프랑스어판을 통해 한국작가로는 처음으로 페미나문학상 외국소설 부문 최종심에 올랐다. 『르몽드』는 『생의 이면』에 대해‘조용하고 진지한 영혼에서 분출된, 감동적이면서 묵직한 작품’‘진정한 문학애호가들의 흥미를 끌 것이 분명하다’고 격찬했다. 프랑스어로 출간된 『식물들의 사생활』 역시 페미나상 외국소설 부문 최종심까지 올랐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대형서점 프나끄(FNAC)가 선정한‘가장 주목받는 외국소설 10권’에 선정됐고, 총 683권의 신간소설에 매겨진 전국서점연합 판매순위에서 11위까지 올랐다.

이후 황석영의 『손님』이 2004년 페미나상 외국소설 부문 수상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스웨덴 최대 일간지 『다켄스 니헤테르』는 박완서의 「나목」을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한편 2005년에는 고은의 시선집 『만인보와 다른 시들』이 아틀란티스 출판사에서 스웨덴어로 번역되어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노르웨이에서 열린 2005 비외르손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비외르손 훈장을 받기도 했다. 고은은 이듬해 스웨덴 시카다재단이 수여하는 제3회‘시카다상’수상자로 결정되기도 했다. 김진경의 동화 『고양이 학교』는 2006년 프랑스 내 3000여개 학교 관계자와 15만여명의 어린이·청소년이 직접 뽑는‘앵꼬륍띠블상’(Le Prix des Incorruptibles)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등단한 작가들의 번역작품이 희귀하다는 것이 현재 한국문학 번역의 가장 큰 문제다. 한국의‘현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적다면 세계문학의 당대성에 어떻게 합류할 수 있겠는가. 90년대 이후 활발하게 활동을 벌인 그 수많은 작가 중 오직 은희경, 신경숙, 김영하 등만이 적극적으로 번역된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젊은 번역가들이 지닌 새로운 언어적 감수성으로 한국의 현재를 그린 작품들을 번역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어느 세대보다도 외국어에 능통한 현재의 젊은 세대들이 한국소설을 번역한다면 매우 참신하고 새로운 감수성을 지닌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번역작업을 지나치게 문단이나 학계 내부 인력으로 충당하는 것, 번역자를 선정할 때 경험과 연륜을 주요 기준으로 삼는 관행도 넘어선다면 더욱 역동적인 번역문화가 정착될 것이다.

지금까지 활발하게 번역된 텍스트들도 전면적으로 재검토·재번역되어야 한다. 2,30년 전의 번역이 여전히 유효하기는 어렵다. 다시 오늘날의 도착어에 맞게 번역 자체가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해외여행과 유학이 일상화되어버린 젊은 세대들에게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자체가 잠재적 번역 기획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나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소설 중 좋은 것이 없을까 하고 인터넷 지식검색싸이트‘지식iN’에 물어보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다수의 원어민 번역가, 그리고 젊은 한국소설의 감수성을 이해하는 신세대 번역가의 대거 등장이 절실하다. 번역서 선정과정 자체에 선입견이나 국내적 가치판단이 들어가기 쉬우므로 번역서, 번역자, 원저자 선정의 씨스템 자체에 창조적 균열을 내는 다채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4. 번역을 통한 언어횡단적 실천은 가능한가

 

많은 번역가들이 한국어 특유의 미묘한 뉘앙스를 살릴 수 없다는 고뇌를 토로한다. 김경희는 서정인의 작품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작가 특유의 다채로운 언어유희였으며 전라도 사투리는 번역에서 전혀 살려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6 비속어, 은어, 사투리나 판소리체 같은 것들은 모국어 내부의 다성성이며 이것을 번역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번역’과정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국어 자체도 균질적일 수 없음을, 100퍼센트 순수하게 증류된 모국어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매순간 수많은 오해와 소통불능 속에서 느낀다. 은유와 상징의 비밀병기로 가득 찬 문학의 숲에서는 하물며 얼마나 많은 오독과 난독이 일어나겠는가. 크레올 사용자들이 영어 자체의 균질적 문법을 교란하는 것처럼, 이주노동자의 저 새로운 혼종적 한국어가‘우리’의 모국어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흔히 100퍼센트 정확한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번역의 허무나 난해성 문제와 직결되곤 한다. 그러나 정확한 번역이 오직 하나뿐이지는 않다는 것이야말로 번역의 매력이기도 하다. 한없이 익숙하고 명징하게만 보이던 모국어를 춥고 불안한 미결정의 지대에 세워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국어의 요람 바깥에서 모국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능케 할 것이며, 모국어에 대한 자발적 거리를 유지시켜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바벨탑의 혼돈 속에서 분투하는 인간의 본원적 소통의 혼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상황에 대해 수천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바벨탑의 지옥이 아닌 바벨탑의 황홀경 아닐까.

쑨꺼(孫歌)는 자신의 생물학적인 국적이‘중국인’이라는 사실 자체와 싸우는 과정에서 비로소 모어문화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생겼음을 고백한다. 그녀는 일본어로 일본사상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중국문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진정으로 자기 문화로 진입하길 희망한다면, 우선 다른 문화에 진입하는 실험을 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7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전적·환경적 동일성에서 구하지 않고 끊임없이‘타자의 문화’와 소통하려는 문화적 충돌의 과정에서 찾으려 한다. “오히려‘타인’의 문제로 들어가고자 하는 바람이, 내가 중국인임을 망각했을 때 더 모어문화에 근접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자신이 반드시 모어문화의 대표자인 것은 아니라고 의식할 때, 비로소 타자 속으로 진입하는 노력으로 모어문화에 진입할 수 있고, 자기와 이 문화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번역을 통해 모어문화 자체를 일종의 유체이탈적 시선으로 재발견하는 과정이야말로 문학적 언어의 풍요로운 다성성이 확장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한국문학 번역이 지나치게‘주요 언어’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는 사실도 비판되어야 한다. 서구문화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극복하기 위한 한국문학 번역이 오히려 영어·프랑스어·독일어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번역문화 자체가 동양인‘스스로’가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더욱 적극적으로‘연대’해야 할 대상은 오래전부터 역사적으로 깊이 연루되어 있는 베트남을 비롯하여 현재 이주노동자들의 수많은 조국‘들’이 아닐까. 지금까지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은 철저히‘영어’라는 정치적 보편어를 향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케냐의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Ngugiwa Thiong’o)는 여전히 자신의 부족어인 키쿠유어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영어로 작품을 쓰면 자신의 작품을 좀더‘효과적으로’보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영어로 글쓰기 자체가 제국주의적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부족어로 글쓰기를 한다고 말한다. 사라져가는 부족의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언어제국주의를 해체하는 또 하나의 문화적 전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보편어〓영어’라는 문화적 권력으로부터 한국의 번역문학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응구기 와 시옹오는 1973년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을 읽고 감동받아 소설 「십자가에 매달린 악마」를 썼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서는 김지하 작품으로 연극을 올렸다는 이유로 제적당한 학생들이 있을 정도였는데, 케냐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뜻밖의 소통의 열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짐작과는 다른’탈식민주의적 소통이야말로 노벨문학상이나 프랑크푸르트도서전보다 뜻깊은 예술적 소통이 아닐까. 세계화되어야 할 것은 한국문학 그 자체의 내셔널리티가 아니며, 문학이야말로 내셔널리티를 뛰어넘을 수 있는 훌륭한 매체임을‘라이따이한’과 세계 각지의‘무적자(無籍者)’들과 해외입양아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미국의 흑인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나는 한번도 미국인처럼 느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렇게‘미국인’으로 포섭될 수 없는 자신만의 소수적 감수성으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구어냈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 넘어서야 할 경계는‘한국문학’이라는 견고한 레떼르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이창래는 자신의 작품이 한국문학도 교포문학도 미국문학도 아닌 그저‘이창래의 문학’으로 읽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문학의 표지를 떼고도 작가의 개별성만으로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지향할 때,‘한국문학의 세계화’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까뮈를 말할 때마다 우리가 그의 국적 프랑스를 떠올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까뮈는 까뮈임으로 충분하니까. 헤밍웨이가 단지‘미국’의 작가가 아니듯이, 도스또옙스끼가 단지‘러시아’의 작가가 아니듯이, 응구기 와 시옹오가 단지‘케냐’의 작가가 아니듯이, 한국의 작가들도 그렇게‘하나씩의 이름들’로 호명되기를 꿈꾼다.

일본의 사상가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는 평생에 걸쳐 루쉰(魯迅)의 텍스트를 탐독·번역했고, 그 번역 자체가 그의 사상적 투쟁이기도 했다. 그는 서구적 근대성을 넘어서는 아시아의 사상적 비전을 루쉰에게서 발견했고, 그 믿음을‘번역’이라는‘언어횡단적 실천’으로 증명한 것이다. 이런 지속적인 열정을 지닌 번역가가 한국문학 번역자 중에서도 탄생하기를 꿈꿔본다. 왜 우리나라는 중남미문학같이‘자기충족적’인 위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 한국문학 또한 중남미문학처럼 소수적이면서도 자기충족적인, 그 어떤 메이저 문학과도 비교할 필요 없이 스스로가 곧 스스로를 정의하는, 미국과 유럽을 부러워하고 지향할 필요가 없는, 문학 자체의 자기충족성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가능하려면 번역을 단지 일회적 노동으로 치부하지 않는, 번역 자체를 최고의 학술적·예술적 작업으로 긍정하는 문화적 풍토가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당당하게,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에서 21세기의 새로운‘오랑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21세기의 한국 번역문학은 한국인 출신 유명작가 중심의 번역 경향을 탈피하여, 작가의 국적과 주인공의 국적이 반드시‘한국인’에만 한정되지 않는, 다채로운‘한국-문학’이 되기를 꿈꾼다.‘한국문학’이라는 분리불가능한 단어조합이 아니라 이 유연한‘하이픈’(hyphen)이 끊임없는 다의성으로 확산되기를.‘한국’이란 무엇인가,‘문학’이란 무엇인가,‘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다양한 물음표들 속에 휩싸이기를. 한국의 고전문학이 지닌 다채로운 욕망의 드라마가 스페인어로 번역되고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의 삶이 담긴‘국적 불명’의 아름다운 소설이 네팔에서, 필리핀에서, 과떼말라에서 읽히기를.

고흐는 어느 나라 화가일까. 그를 단지‘네덜란드’의 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제 고흐의 국적은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세계에 퍼져 있고 그에 관한 자료는 수없이‘카피레프트’로 노출되어 있다. 한편 전세계 어디서나 인디언의 민담과 속담이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디언이라는 종족은 거의 멸종위기에 처한 지 오래지만, 그들의 이야기들은 얼마나 초역사적이고‘코스모폴리탄’하게 살아남았는가. 그들의 이야기를‘문학이 아니다’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내셔널리티를 앞세우지 않았기에, 자기 종족의 보전과 확장을 문학의 지상목표로 삼지 않았기에, 그들의‘국적 불명’의 목소리는 전세계에서 끊임없이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 그처럼 현대소설이나 시뿐 아니라 한국에서조차 잊혀져가는 다양한 속담들, 재담들, 민담들이 다채롭게 번역된다면 그 또한 창조적인 언어횡단적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문학의 역사적 자산은 단지 한국전쟁에만 도사리는 것이 아니므로. 한국 민담의 카니발적 웃음, 축제적 판타지가 담긴 재담들 또한 한국인들 스스로의‘민족문화’에 대한 시선을 새롭게 담금질할 수 있는 계기가 아닐까.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단순히‘한류’의 신화를 연장하는 확산적 세계화가 아니라, 분열적이고 다성적이며 축제적인 세계화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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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지문 「한국문학 번역의 문제점과 과제」, 『외국문학』 1995년 가을호.
  2. Marianne Lederer, La traduction aujourdhui, Hachette 1994, 14면. 이인숙 「한국문학 프랑스어 번역연구」, 『프랑스학연구』 제33권 173면에서 재인용.
  3. 이인숙, 앞의 글 173~74면.
  4. 이어령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번역의 문제점」, 『문학과 번역 서울 심포지엄 논문집』, 한국문학번역원 2002.
  5. 제3의 언어, 혼교어, 주변어라 불리는 피진어는 서로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발전되는 언어이다. 피진어의 화자는 의사소통을 위해 문법을 단순하게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언어체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당시에 발생한 피진어는 ‘Korean Bamboo English’라 불린다. 한편 크레올은 피진어가 특정 언어공동체에서 모국어로 자리잡게 될 때 발생한다. 즉 크레올은 새로운 세대에서 피진이 모국어로 전환될 때 탄생한다. 유진견 「영어에 나타나는 피진과 크레올 현상 연구」, 단국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3, 3~6면 참조.
  6. 김경희 「서정인 문학번역의 문제점」, 『프랑스학연구』 제26권.
  7. 쑨꺼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류준필·김월회·최정옥 옮김, 창비 2003, 25면.
  8. 같은 책 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