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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문정희 文貞姬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꽃숨』 『찔레』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등이 있음. poetmoons@yahoo.co.kr
물새
저물녘 석모도 앞바다에 떠 있는
저 물새는 한채의 암자 같다
깊고 푸른 멍 같은 바다를 깔고 앉아
가파른 물살들을 잠재우는 것을 보라
쉴새없이 기우뚱거리는 마음
차가운 심연에 담그고
부르튼 발로 자맥질하여
물 위에 암자를 세운 저 새는 누구일까
나인지도 모른다
산허리를 돌아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어둠이 내려오는 시간
날개로 허공을 밀며 천리를 달려온 저 새는
지금 움직이지 않고
홀로 또 천리를 가고 있다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생이란 물 위에 뜬 하루라
바람의 발목을 잡고 출렁이는
생이란 끝없는 물음인지도 모른다
고달픈 아랫도리 물에 담그고
문득 좌선에 든 저물녘
물 위에 뜬 암자를 향해
나는 조바심처럼 돌을 들어
힘껏 화두 하나를 던진다
바다의 살점이 불끈 고통처럼 치솟는다
날개를 펼치고 암자는
불현듯 먼 하늘로 사라진다
겨울 유리창
새 햇살 투명한 시 한편 써보려고
처녀림을 찾아 헤매는 십칠층의 겨울 아침
한 청년이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왔다
지난가을 금 간 유리를
추위가 오기 전에 갈기 위해서였다
새 유리를 끼우려면
우리는 먼저 창틀부터 허물어야 했다
갑각류 껍질처럼 마른 꿈을 부스러뜨리고
접착제로 봉할 수 없는 후미진 언어의 틈마다
더운 숨결을 훅 훅 불어넣었다
고정관념이 서서히 허리띠를 풀었다
칼끝으로 민감하게 오므리는 입술을 열자
속살에서 연꽃이 발그레 피를 머금었다
하늘이 드디어 숨을 쉬기 시작했다
빛나는 상처에서 솟아나는 날카로운 무지개
오래 품은 비수처럼 빛을 발하는
시간이란 이토록 깨지기 쉬운 것일까
그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만져보고 싶다고
표현하려는 순간
창가에 밧줄 하나가 아찔하게 내걸리었다
청년이 거기 처형처럼 매달려 있었다
끝내 지상에 내려놓을 수 없는 나신을
납작하게 누르며
겨울 아침, 새 햇살로 빚은 시 한편이
나의 생을 환하게 끌어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