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유시주·이희영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 창비 2007
한국 민주주의의 개척자들에게 바친다
조효제 趙孝濟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hyojecho@hotmail.com
희망제작소의‘우리시대 희망찾기’프로젝트의 첫권인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한국 민주화 20년의 역사를 독특한 방식으로 기리고 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단순명료하다. 이제 우리에게‘제도’민주주의는 상식이 되다시피 했지만‘체감’민주주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는 말이 많이 들린다. 이 말이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민주주의를 뼈대만이 아닌 살과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 사람살이의 진정한 원리로 심화하고 승화할 묘책이 무엇일까? 여기까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문제의식이다. 이런 주제를 다룬 연구서도 기왕에 여러권이 나와 있다.‘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론’을 다룬 책들로 서가 한 칸을 다 채울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 책이 유별난 것은 그러한 일견 평범한 문제의식을 민주화 도정을 거친 사람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민 30명의 목소리를 통해 권력자나 연구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원근법과 독해법을 추출해낸 것이다.
지은이 유시주(柳時珠)와 이희영(李熙英)은‘질적 연구방법론’에 속하는 구술면접을 통해 민주주의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체험을 경험자의 주관적 해석과 참여적인 이해방식으로 추적했다. 그럼으로써 여론조사 혹은 통계 같은‘양적 연구방법론’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경험세계의 미묘한 음영이 신기할 정도로 또렷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예를 들어보자. 평자는 우연히 변양균·신정아씨가 구속수감되던 날 이 책의 3장‘제도와 사람’을 읽고 있었다. 어느 화가는‘순수미술’에 대한 지원제도, 공공기관의 소장품 구입제도가 얼마나‘민주화’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지금 있는 제도도 어느정도는 많이 연구를 해가지고 한 거죠. 그런데 실제 시행되는 데 있어서 격차가 있는 거예요 (…) 거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기존의 권력이 행사가 되는 거죠.”(78~79면) 형식적으로는 어느정도 민주주의 제도가 갖춰졌지만 그 실제적인 운용은‘오래된 현실’에 의해 좌우되고, 그러다 터져나온 사건이 다시 민주주의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확연하게 보이지 않는가?
이렇듯 이 책은 민주주의 제도와 현실 사이의 접촉면에서 고민하는‘진짜’사람들의 이야기로 구성된 탓에 독자로 하여금 서사 자체의 긴장과 흥미를 통해 주제의 무거움을 훌쩍 건너뛰게끔 해주는 미덕을 발휘한다. 페이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세지 않고 단숨에 독파할 수 있는 연구서란 흔치 않은 법이다. 이런 점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는‘소통과 갈등’을 다룬 7장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최근 직접행동 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번역 출간한 바 있는 평자는 폭력시위에 가담하는 노동자들의 심리를 다룬 다음 대목에서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무리 보도자료를 내면서 요청을 해도 어느 것 하나 보도가 안 나. 그런데 (…)‘화염병 들고 쇠파이프 든다, 내일 집회에서’하면 공중파 3개사가 카메라 들고 다 쫓아오고 (…) 그러면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결국 폭도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언론을 타야 되는 거야, 언론빨을 받아야 되는 거야. 사회쟁점화시키기 위해서.”(221면) 이런 식의 깊은 속내가 이 책에서 수도 없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일상의 민주주의로 번역되지 못한 것일까?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기는 했을지언정 민주주의를 충분히 ‘훈련’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239면, 강조는 평자).
그런데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지식인들이 좀더 학술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책이 있다. 올여름에 출간된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웅진지식하우스 2007)가 그것이다. 엇비슷하게 교차하는 주제들을 다루지만 접근과 서술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두 책은 상호보완적으로 병행하여 읽기에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예컨대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에서 권인숙(權仁淑)이 쓴 「6월 민주화항쟁, 그 이후에 찾은 질문들」과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의 6장‘사상과 일상’은 서로 정확히 조응한다.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를 떠받치는 30인의 목소리는 한국현대사를 비교적 치열하게 고민했던 이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자기의 체험과 고뇌를 민주주의라는‘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뜻에서 이들은 보통 민초라기보다‘매개적’민초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관성적으로 보수화되기 쉽고 사익과 경쟁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곤 하는‘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관은 여기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 점이 평자가 이 책에서 제일 아쉬웠던 부분이다. 적극적으로 실망하지만 동시에 적극적으로 암중모색하는 평균 이상 되는 성찰인들의 목소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보통’사람들이‘민주파’에 냉소를 퍼붓곤 하는 사정을 고려할 때 이런‘보통’의 목소리도 주의깊게 들어볼 필요가 분명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장점이자 포부이기도 하다. 제도 민주주의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길찾기를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명백히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딱 맞는 역사적 사례가 하나 있다.
1969년 서독 총리 자리에 올랐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모험을 원한다.” 그렇다. 더 많은 민주주의는 더 평탄하지도 더 효율적이지도 더 안전하지도 않은 길일 것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가 불확실한 모험의 길이기에 포근한 안주를 원하는 사람들은 흔히‘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하곤 한다. 그러나 더 많은 민주주의는‘민(民)의 지배’와‘민(民)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적 출구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의 지은이들은 결론부에서‘돌이킬 수 없는 희망’에의 길을 걷고 있는 민주주의의‘개척자들’에게 특별한 시선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를 개척해가는‘작은’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우리 모두의 희망의 표현일 것이다. 이 땅의 민주시민들에게 민주적 가치에다 “삶으로 살아지는 역사적 육체성”(340면)을 부여하자고 호소하는 지은이들의 열정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