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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정환·정남영 외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 갈무리 2007

87년체제와 민중문학의 진로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교수 jatw19@moiza.chonnam.ac.kr

 

 

민중『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은 다중네트워크쎈터가‘카이로스의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개최한 집단강좌의 결실이다. 모두 8명의 필자가 집필한 평론들과 필자들 자신의 좌담을 엮었는데, 이인성(1953년생)에서 한유주(1982년생)에 이르는 신·구세대, 사뭇 다양한 성향의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다뤘다.‘1987년 이후 문학 20년, 종언인가 진화인가’라는 부제가 딸려 있다. 이 지면에 각각의 글에 대한 논평을 다 담기는 어려우니 비평집 전체를 관통하는 논지를 뽑되 그중 내가 특히 주목한 평문에 집중하겠다.

제목이 명시하듯이 이 책은 오늘 우리의 상황을‘민중이 사라진 시대’로 규정한다. 논자들은 1980년대 군부독재와 맞서 싸운 민중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입을 모은다. 그 민중의 자리에 다중(多衆, multitude)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다중은, 어떤 헤게모니적 집단 없이 공통의 생산관계 속에서 소통적이고 삶정치적인 관계를 맺는 다수의 특이한 사람들의 총체이다”(조정환, 319면). 이 다중 개념은 외국에서 건너온 것인데, 질 들뢰즈, 안또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펠릭스 가따리 등과 연관되어 구사된다.

이같은 다중 개념에 입각한 논자들은‘1987년 이후 문학 20년, 종언인가 진화인가’라는 물음에 단연 후자라고 답한다. 종언론은 “1987년을 거쳐 90년대로 넘어가는” 세기말에나 해당하는 때늦은 언설이라는 입장이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처럼 문학을‘네이션 스테이트’(〓민족국가)와 관련지으면 종언이 되지만, “사회적 주체성과 결부시키는 관점”(좌담, 13면)에서는‘진화’가 된다는 것이다. 이 진화의 사회적 주체가 바로 다중이다. 80년대라는 변혁기의 민중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1997년의 IMF사태를 거치면서 해체되고‘다중’으로 새롭게 재구성되었다는 논리다. 그런데 논리적 정합성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새로운 입론’은 모종의 기시감(旣視感) 같은 것을 유발한다. “어떤 헤게모니적 집단 없이 (…) 다수의 특이한 사람들의 총체”인 다중도 87년체제의 산물이라면 지난 20년간의 그‘진화 양상’은 좀더 진중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책을 읽어갈수록 이 다중이라는 것이 80년대에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선도한 수직적 노동계급의 거울상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논자들은 이 둘이 전혀 종자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내 눈엔 옷만 바꿔 입은 일란성쌍생아처럼 보이는 것은 어인 일인가.

이것이 나의 착시일 가능성도 물론 배제할 수 없다. 그 점에서도 비평의 쌍방향 대화가 필요한 셈이다. 먼저 인상적인 필자들에게 말을 건네보면, 박민규를 다룬 박필현의 「경직화를 부수는‘삶문학의 오프닝’」과 이명랑을 검토한 조영실의 「인디라의 언어」는 젊은 작가들의 문학에서 그러한 다중의 기미를-필자들이 공통적으로 쓰는 표현으로는 다중의‘잠재성’을-긍정의 정신으로 포착하려고 애쓴 글이다. 또한 극작가 장진의 작품세계를 소개한 「수다와 거짓의 열린 무대」도 우리의 연극현장에 대한 충실한 보고다. 그런데 이처럼 8명의 필자가 평등하게 참여하고 목소리를 냈다고는 해도 87년 이후의 문학을 되돌아보는 방식과 민중문학의 진화 양상에 대해서는 조정환(曺貞煥)과 정남영(鄭男泳)이 역시 가장 주도적으로 밑그림을 제시한다고 해야 할 터다.

조정환은 「1987년 이후 계급 재구성과 문학의 진화」 및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 두편의 글을 실었다. 전자는 제목 그대로 87년 이후 민중문학의 소멸 궤적을 추적하면서 2000년 이후-‘삶문학’또는‘카이로스의 문학’으로 명명된-문학에 역점을 두고 있고, 후자는 故 박영근의 시에서 “새로운 민중의 형상”을 찾아내려는 글이다. 이 두 평문에도 공감할 만한 면이 있다. 80년대 민중문학이 거의 잊히다시피 한 오늘의 문학현장에서 어쨌든 그것을 되살려-조정환 자신은 이런 표현을 잘 쓰지는 않지만-계승을 끈질기게 모색하는 그의 비평가적 자세가 특히 그렇다. 하지만 그런 미덕이 그의 두 글에서 전반적으로 감지되는 문제를 상쇄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80년대에 계급문학을 열정적으로 주도하다가 좌초한 논자의 궤도수정이 NL(민족해방)과 대립한 PD(민중민주) 노선의‘수평주의적 확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건대 80년대 민중을 어떤 완결적 구조를 내장한 동질적 집합으로 믿은 이들은 주로 조정환을 포함한 근본주의적 계급론자들이었지 당시에도 실제 민중은 무척이나 다층적이었다. 또 그런 다층성에 세심하게 주목한 논자들도 적지 않았다. 조정환의 입론에는 민중의 복잡다단함에 대한 입체적인 인식이 결여된 감이 짙다. 87년 6월항쟁 20주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왕년의‘민족해방’과‘민중민주’가 간판만 바꿔 달고 소모적인 대립을 반복하곤 하는데, 바로 그런 대립을 정확히 읽어내고 해체하는 비평작업은 여전히 중요하다. 민중과 다중을 무 자르듯 하는 조정환식의 검법보다는 더 정교하고 종합적이어야 그 양자의 접합지점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에 달린 무려 45개의 물음표들은 구도(求道)의 이정표라기보다는 자기확신의 동어반복적인 표지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정남영의 「비평이란 무엇인가」는 주로 영국의 문학평론가 F. R. 리비스(Leavis)와 작가 로런스(D. H. Lawrence)를 중심으로 그 자신과 조정환이 함께‘카이로스의 문학’으로 분류한 비평의 의의를 개진한 글이다. 한마디로 정독에 값하는 평문이라고 생각한다. 리비스의 디킨즈(C. Dickens) 비평을 좀더 발전시켜 루카치의 전형성 개념을 되새김질하는 대목이나 로런스의 쎄잔느(P. Cézanne) 비평을 정밀하게 소개하는 대목 모두 경청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19세기 영문학에 대한 오랜 공부와‘민중문학’을 향한 열정이 결합된 결과로 판단된다. 하지만 자기 발목을 잡는 대목도 더러 눈에 띄는데, 그런 문제는 조정환의 입론이 드러낸 편향을 공유하는 데서 생기는 것 같다. 가령 “권력에의 저항인 동시에 새로움의 창조”(122면)로‘특이성’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특이성이 특정한 이념형으로 되돌려지는 현상이 바로 그러하다. 그는 이 특이성들이 “하나가 다른 것을 장악하거나 아니면 하나가 다른 것에 일방적으로 복무하는 식(‘실천에 복무하는 이론’)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네트워크의 방식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한다.‘상투형’과의 싸움에 진력하는 논자치고는 지당한 민주주의 원칙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글에서나 삶에서나 더 어렵고 정직을 요구하는 것은 탁월함을 알아보고 평가하는 일인데, 평등주의(〓수평주의)를 통치이념의 하나로 내건 민주주의체제의 건강한 존속을 위해서도 그런 공부가 절실한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하지만 이 책의 필자들이 그 점을 얼마나 작품읽기에서 유념하는가는 의문이다. 오히려 특정한 개념틀을 공유하면서 균질화된다. 표현을 약간 달리하면, 읽기의 기준이 각자의 절실한 고민에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그것을 외부에서 가져왔다는 말이다. 작품이 재단된다는 인상도 거기서 비롯되는 것 같다. 작가의 성취를 평가하는 핵심적 준거로 존재의 특이성과 잠재성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각 작가들의 작품이 형성하는 어떤 고유한 형세들이 부당하게 훼손되기도 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서구의 이론가들을 편식한 것과도 무관치 않은 현상이다. 전성태의 『여자이발사』와 고혜정의 『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를 논한 이종호의 「트랜스-내셔널의 감각과 형상들」이 그 점에서 징후적이다. 무엇보다 민중적(〓배타적) 민족주의와 한반도 주민으로서의 한민족을 역사적 맥락에 놓고 세심하게 분별하는 논의가 비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민족주의의 억압성이 제국주의의 폭력과 닮아 있다는 주장을 과감하게 펼치기는 하는데(199면), 그런 주장이 작품읽기의 섬세한 분별로 이어지지 못한다. “탈근대적 주체성” 또는 “집합적 주체성”(218면)의 확립이라는 전제에 사로잡힌 결과다.

다른 분야도 엇비슷하겠지만 87년체제의 부정적인 유산은 오늘날 문학분야에서도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 과거의 유산 가운데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은 언제나 혼돈스럽게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난 연대 민중문학의 알맹이를 새롭게 되살리는 일은 특히나 어렵지 않은가 싶다. 무엇보다 80년대‘민중’이 지녔던 폭발적 활력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러자면 예전의 방식대로 계급노선을 고수할 수도,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난처함을 비평으로 감당해야 할 터다. 그 점에서도 일국 단위에 매몰되지 않는 세계적 시야가 시급해진 것이다. 시야를 그렇게 트면서 남한만이 아닌 한반도 전체 민중의 (비대칭적인) 실상에 비평의 근거를 두지 않는 한, 21세기 민중문학의 진화도 난망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진지전의 방식으로 한걸음씩 나아갈 수밖에 없는 공부를 전제한다.‘민중’이 사라진 시대에‘민중문학’을 이어받는 문학은 그런 힘겨운 싸움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