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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이형

윤이형 尹異形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으로 『셋을 위한 왈츠』가 있음.

 

 

 

큰 늑대 파랑

 

 

허름한 치마저고리 위에 누비 조끼를 걸쳐 입은 노파 하나가 잰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노파는 필사적으로 힘을 내 걸었지만 곧 가슴께를 한손으로 싸쥐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비닐봉지가 노파의 손을 빠져나와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작고 하얀 빵 몇개가 더러운 땅 위에 쏟아졌다. 골목 끝에서 새까만 머리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왔다. 눈이 빨간 소년이 노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땅바닥에 내다꽂았다. 둘이 한덩어리가 되어 구르는 불과 몇십초 동안 소년의 머리는 노파의 얼굴과 옆구리, 어깨와 정강이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노파가 벽을 향해 돌멩이처럼 굴러왔다. 노파의 목에 고개를 박고 힘차게 턱뼈를 움직이던 소년이 공중으로 고개를 확 쳐들었다. 우박만한 핏덩어리가 메마른 벽에 맞고 으깨져 흘러내렸다. 눈이 빨간 소년의 턱 밑으로는 굵고 검붉은 핏줄 하나가 늘어져 있었다. 노인의 명은 길었다. 소년이 충분히 배를 채울 때까지 노파가 온몸을 쥐어짜듯 소리를 지르며 팔다리를 휘저었기 때문에 땅바닥에는 복잡한 모양의 피웅덩이가 생겼다. 노파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자 소년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가젤처럼 민첩하게 길 끝으로 뛰어가 사라졌다. 노파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온 노란 액체가 맑은 피웅덩이에 천천히 섞여들었다.

인기척이 사라지자 파랑은 마침내 벽에서 빠져나왔다. 작고 짧은 네 다리가 땅을 딛자 오랫동안 불가능하게만 여겨지던 그 일이 다시 일어났다. 사방에서 근육들이 뼈를 향해 다가왔다. 우선 살점이 도로록 달라붙었고 그 위로 새파랗고 보송보송한 털들이 순식간에 솟아났다. 약간의 고통과 함께 수염들이 살을 뚫었고 송곳니가 잇몸을 째며 튀어나와 혀에 닿았다. 동그란 눈매가 물방울 모양으로 찢어지며 제자리를 잡고 두 귀가 허공으로 쫑긋 서자 맹수의 본능이 커다란 손처럼 심장을 콱, 움켜쥐었다. 온몸에 돌기 시작한 피가 시키는 대로 파랑은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처음에는 느리게 걷다가 이내 겅중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꼬리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온몸을 밀어주었다. 큰길로 나오자 더이상 관절에 무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파랑은 조그만 코를 벌름거리며 연기가 자욱한 4차선 도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찼지만 피냄새는 고통보다 빠르게 몸을 파고들었다. 몸에서 떨어져나온 사람의 팔 하나가 파랑의 발에 차여 굴러갔다. 팔 끝에 붙은 손은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쥐고 있었다.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몇가닥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공기중을 떠다니는 수천개의 서로 다른 피냄새 속에서 익숙한 것을 찾아내려 애쓰며 파랑은 숨을 몰아쉬었다.

 

 

파랑은 1996년 3월의 어느 늦은 밤, 컴퓨터 모니터에 담긴 작고 하얀 정사각형 방 안에서 태어났다. 볼펜보다 마우스를 정교하게 놀리는 아이들은 자신들이‘오에까끼’라고 부르는 그 방 안에 볼펜의 명확한 선으로는 그릴 수 없는 불확실한 형체들을 그려넣곤 했다. 그 방에서 태어난 것들은 사람과 사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윤곽선이 거칠었고 때때로 몸 한쪽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어 몸의 일부가 바깥으로 새어나가기도 했다. 파랑은 태어나서 일주일이 지나도록 몸을 함부로 기울이지 못했다. 몸 안의 것들이 밖으로 새어나가거나 바깥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어올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작은 늑대 파랑이 앉아 쉬기에 그 방은 더없이 편안했다.

파랑은 어떤 늑대와도 달랐다. 이빨은 옹골차고 날카로웠지만 작고 동그란 두 눈과 웃고 있는 입매 때문에 겉으로는 순한 개처럼 보였다. 파랑은 암컷의 젖꼭지와 수컷의 성기, 암컷의 강인함과 수컷의 의리를 동시에 한몸에 지니고 있었다. 파랑에게는 세명의 어머니와 한명의 아버지가 있었다. 파랑에게 살과 피를 선사한 것은 아버지였지만 숨을 불어넣은 것은 어머니들이었다.

1996년 3월의 어느 늦은 오후, 파랑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는 자신들이 누군가의 부모가 되리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먼지가 자욱한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넷 모두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교문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길게 늘어선 시위대가 보였다. 파랑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는 시위대의 맨 뒤에 가서 섰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곳을 지나가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했고, 오후를 보낼 별다른 계획이 없었으므로 그들도 그렇게 했던 것이다. 시위대의 수는 평소보다 많았고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분주하게 전단지가 오갔다. 잠시 후 시위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아이들은 평소와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 자신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세계 속으로 미끄러지듯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가벼운 놀라움과 흥분을 느끼며 잠깐 동안 걸었다.

그러나 교문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에 걸려 시위대의 허리가 잘리자 아이들은 생각을 바꿨다. 넷 중 누군가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이화예술극장에서 「저수지의 개들」을 하고 있어. 분명히 극장에서 빨리 내려갈 텐데. 넷 중 하나가 말했고, 나머지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위에 꼭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시위라는 것에 한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었다. 하교길, 먼지가 날리는 교정을 걷다 보면 가끔씩 머리 위로 작은 돌이 날아가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넷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곧바로 방향을 바꿔 학교에서 가까운 낡은 극장을 향해 걸었다. 시위대는 곧장 걸었고,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갔다.

헤모글로빈으로 칠갑된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며 넷은 저마다 어깨를 조금씩 움찔거렸다. 사람의 몸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흘러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처음 알았다. 극장을 나온 넷은 마지막 장면에서 누가 누구를 쐈는지에 대해 엇갈린 의견을 주고받으며 걷다가 지하철역에서 헤어졌다. 평소처럼 지하 음악감상실에 들러 뮤직비디오를 몇편 보거나 맥주를 마시기에는 속이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그 뉴스를 읽었을 때 네 아이들은 모두 자기 방 컴퓨터 앞에 혼자 있었다.

미스터 블론드가 경찰의 귀를 잘라내고 있었을 때 종로 근처의 어느 인쇄소 기계 뒤에서 남학생 하나가 쓰러져 죽었다. 남학생은 넷과 같은 학교 학생이었고 학년도 같았다. 정확한 사인을 규명중이지만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뉴스에는 씌어 있었다.

다음날 밤 네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 작은 방에 모였다. 그리고 두시간쯤 천장만 바라보며 함께 누워 있었다. 마침내 한 아이가 일어나 앉아 마우스로 모니터 속의 하얀 공간에 작은 늑대를 그리기 시작했다. 불확실한 여러개의 선을 겹쳐 뼈를 세우고, 새파란 물감을 몸 위에 부어 살을 만들었다. 그는 파랑의 아버지가 되었다. 나머지 세 아이들이 일어나 모니터를 둘러쌌다. 그녀들은 파랑의 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니들과 아버지는 알지 못했지만, 파랑이 눈을 뜨자마자 맡은 것은 짙은 피내음이었다. 늑대의 날 선 본능이 갓 태어난 파랑의 온몸을 붙잡고 흔들었다. 파랑은 조그만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옆구리를 물어뜯기지 않았고, 무리에서 낙오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역시 피냄새가 났다. 마룻바닥 어딘가에 흥건한 피웅덩이가 있다는 것을 파랑은 알고 있었다.

 

 

2006년 10월의 어느 일요일 정오 무렵 그 일이 시작되었을 때 사라는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까지 막아야 하는 짧은 원고가 세개였다.‘권태기의 연인이 함께 볼 만한 미드 베스트 10’. 멍청한 기획이었다. 미국 드라마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나란히 앉아 짧지도 않은 그 씨리즈들을 몇 종류나 봐야 극복될 권태기라면 애당초 연애를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제인 오스틴이 에꾸니 카오리를 만나 펼치는 가상대담.’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둘이 만나 대체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제인 오스틴과 코니 윌리스라면 또 몰라도.‘조지 로메로 영화에 드러나는 좀비의 법칙.’이건 낡을 대로 낡았지만 쓰기는 아주 쉬웠다. 또 무슨 좀비 영화가 개봉하는 모양이었다. 사라는 드립커피를 내리기 위해 부엌으로 가면서 머릿속으로 세개의 항목을 떠올렸다. 로메로의 좀비는 사후경직 때문에 느리고 뻣뻣하게 움직인다(대니 보일의 뛰어다니는 좀비들과 비교할 것), 좀비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주로 지하로 내려가 인간을 습격한다, 반드시 머리를 파괴해야 처치할 수 있다. 모자라는 법칙들은 만들어 넣으면 됐다. 세개의 각각 다른 매체에 들어갈 원고들의 컨쎕은 비슷하게 바보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원고들이 사라에게 밥을 벌어주었다. 커피만 마셔도 살 수 있다면 생활비가 훨씬 줄어들 텐데. 사라는 진한 드립커피 내음을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하지만 자리로 돌아왔을 때 찜찜한 이물감이 생리통처럼 묵지근하게 허리에 달라붙었다. 몸이 무거워진 뒤부터 가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사라에겐 디지털 초자연현상이라 부를 만한 일이 가끔 일어났는데, 그것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인터넷뉴스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책상 앞에 앉은 사라의 머릿속에서‘짐바브웨’라는 단어가 갑작스레 불길한 존재감을 띠고 작은 공처럼 뭉쳐질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창에‘짐바브웨’를 쳐보면, 바로 몇시간 전에 짐바브웨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뜨는 것이었다. 폭동이 발발했다거나 축구 경기장에서 관객이 훌리건의 발에 밟혀 중상을 입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사실 세계를 뒤덮은 네트의 확장 속도와 그 생태적 특성으로 볼 때 그것은 전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지만, 사라는 그것이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그 단어는‘좀비’였다. 써야 할 원고 때문이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라는 손을 움직여 키보드를 두드렸다.‘서울에 좀비 현상 확산.. 원인은 이상 바이러스로 추정(종합)’이라는 제목을 단 연합뉴스발 3시간 전 뉴스가 떴다.

사라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찬찬히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결국 웃고 말았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맞춤법이 여러 군데 틀린 뉴스의 어조는 급박하면서도 심각했다. 좀비들은 공포영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사람의 몸을 물고 내장을 뜯어먹으며, 물린 사람은 좀비로 변한다. 변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어 빠르면 3분에서 길면 24시간까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태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라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별로 놀랍지 않은 뉴스였다.

좀비가 나타났대. 이젠 정말 갈 데까지 갔군. 왜 지금에야 나타난 걸까, 이런 일이 생기려면 훨씬 전에 생겼어야 했어. 사라는 농담처럼 혼잣말을 했다. 사라는 몇년 전부터 자주 혼잣말을 했다. 꼭 방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사라는 냉장고로 걸어가 남은 식료품의 양을 확인했다. 방의 네 벽면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마룻바닥까지 쏟아져 내려온 책들만큼은 아니었지만, 냉장고 속에는 두 주일은 족히 먹을 만한 냉동식품과 레토르트식품 들이 가득했다.

사라는 한달에 서너번 외출했다. 일과 인간관계,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은 인터넷으로 불편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프로판가스 폭발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사라의 인생은 바뀌었다. 삶은 형상기억합금 같은 것이 아니어서 아무리 애써도 그전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취업용 일반상식책을 읽다 밤늦게 돌아와보니 집이 있던 자리에 시커먼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부모님은 늦은 저녁을 먹다 돌아가신 것 같았다.

사라는 그 뒤로 상식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다시는 그런 단어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취업을 포기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사라는 한가지 결심을 했다. 부모님은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한평생을 성실하게, 그리고 우울하게 고생만 하며 살다가 고작 프로판가스 때문에 온몸의 살점이 갈기갈기 찢겨 바람에 날아갔다. 사라는 절대로 그런 삶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사라에겐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사라는 책, 거의 모든 종류의 책들을 사랑했고, 가능하다면 언젠가 책을 쓰고 싶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글을 써서 먹고살겠다고, 멍청한 회사 따위에 다니며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겠다고 사라는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그렇게 보낸 10년을 떠올리며 사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대부분 지켰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고 마음 가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가고 싶은 곳에는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갔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껏 먹었다. 맨 마지막 이유 때문이었을까. 사라의 몸에는 적금처럼 꾸준하게 살집이 쌓였다. 사라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고와 스무살 때는 과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학생들 중 한명으로 꼽힐 정도였지만, 10년 동안 60킬로그램이나 살이 쪘다. 체중이 100킬로그램을 넘어가자 거리를 나다닐 수 없게 됐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둘러도 가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라는 하루에 다섯번 가스밸브를 점검했고, 추운 겨울에도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은 언제나 열어놓았다. 임신한 것처럼 배에 두둑하게 붙은 살집을 제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견디기 어려운 건 따로 있었다. 사라는 가끔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사라는 비슷한 종류의 불행을 당한 다른 사람들처럼 방황하며 인생을 망치거나 뿌리 깊은 원한에 시달리지 않았다. 다량의 독서 덕분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었고, 일어와 중국어, 스페인어를 완벽에 가깝게 구사할 수도 있었다. 근본적으로 건강한 성격인데다 박학다식하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사라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녀를 좋아하는 선배와 후배 들도 적지 않았다. 사라는 다만 그들을 전화나 인터넷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자와 쎅스해본 게 언제였더라, 사라는 지혜로운 할머니처럼 온화하게 웃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그애 이름이 재혁이었던가.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그들은 같은 학교 법학과에 다니던 한 남학생이 시위 도중에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사이가 됐다. 그때는 둘 다 참 어리고 민감했구나, 사라는 남의 일처럼 감탄했다. 어렴풋이 기억날 것 같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애는 그 사건 이후로 무척 불안정한 성격으로 변했고, 아마 사라 자신도 어느정도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스무살 무렵의 모든 아스라한 추억들이 그러하듯 그 일도 이제 바람에 날려 아주 먼 대륙으로 흘러가버렸다.

커피잔 바닥이 드러나자 갑작스럽게 현실감이 밀려왔다. 좀비들이 나타났건 그렇지 않건 일은 해야 했다. 사라는 한달에 원고지 600매에서 800매가량의 다양한 원고들을 썼다. 책과 영화와 음악과 드라마에 대해, 연필을 만드는 나무의 품종별 차이에 대해, 커트 코베인이 죽기 직전까지 복용한 약물의 종류와 그 해악에 대해, 사라는 썼다. 원고료는 매체에 따라 달랐지만 대체로 고만고만한 푼돈 수준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쑤시고 온몸의 관절이 저려도 그 정도 분량을 쓰지 않으면 음식도 책도 살 수 없었다.

사라는 모두 합쳐 여덟개의 필명을 사용했지만 본명을 쓰는 곳이 딱 한군데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틈틈이 어느 웹진에 스페이스오페라와 칙릿을 결합한 SF로맨스물을 연재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웹진을 발행하는 회사에서 단행본 계약을 하자는 연락이 와서 그쪽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기까지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다음에는 연락이 없었다. 사라는 모자와 목도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그런 일이 있었어도 사라는 계속 그 소설을 썼다. 가끔 진심이 담긴 팬레터를 받기도 했다. 꼭 한번 만나고 싶어요. 꼭 한번 만나서 얘기 나누고 싶습니다. 꼭 한번 뵙고 싶네요. 몇몇 충실한 독자들은 사라의 이야기에서 SF부분은 매우 뛰어나지만 로맨스 부분은 이해되지 않을 만큼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메일을 보냈다. 사라는 송곳으로 몸 한구석이 뚫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그런 독자들을 더 고맙게 여겼다.

사라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삶은 별게 아니었다. 훌륭한 드립커피나 적절한 순간에 흘러나오는 펫 숍 보이스의 노래, 닥터 하우스의 귀여운 미소, 좋은 책의 한구절 같은 것들이면 충분할 때가 많았다. 먹고살기 위해 키보드 위로 손을 올리기 힘들어질 때까지 아르바이트 원고를 쓰지 않아도 된다면, 그리고 가끔씩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외로움만 어쩔 수 있다면 참 좋겠지. 하지만 그런 삶이 가능한 곳은 지상에는 없을 것이었다. 사라는 다음날 막아야 할 원고에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기 위해 인터넷창을 새로 띄웠다. 그런데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다. 모뎀에도 랜선에도 이상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휴대폰을 집어들어 봤다. 수신가능 신호가 뜨지 않았다. 그때 현관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열쇠를 돌리는 것 같은 작은 소리였지만 그것은 이내 누군가가 문을 탕탕 두드리는 굉음으로 바뀌었다. 현관문에는 거대한 쇠해머로 때려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이중 잠금장치가 달려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라는 책상 앞에 다가앉아 화면 맨 밑에 깔린 여남은개의 인터넷창들을 차례로 최대화했다. 끊어진 메씬저는 재접속되지 않았다.

창들이 서로 뒤섞이면서 화면이 다운되어버렸는가 싶었을 때 갑자기 방 안의 전등과 컴퓨터 전원이 동시에 나갔다. 베란다 쪽 창문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잊었다. 언제나 열어두는 창문은 책상에서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사라는 일요일 오후의 새하얀 햇빛 속에서 2층 베란다의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기어오르는 검은 형체들을 보았다. 조지 로메로는 좀비들이 위로는 올라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들은 대낮에 아주 쉽게 2층으로 올라왔다.

 

 

앞니 두개가 부러진 자리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뜨겁고 짠 피였다. 파랑은 턱뼈를 파고드는 통증을 참으며 혀를 빼물고 달렸다.

파랑은 어머니들 중 하나를 찾아냈다. 하지만 너무 늦게 그곳에 도착했다. 파랑은 그녀가 2층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몸집이 아주 커져서 10년 전에 본 것과는 딴판이었다. 땅에 부딪혀 머리가 깨지는가 싶었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딱 일어섰다. 어머니의 눈은 새빨갰고 거기서는 눈물과 핏물이 한꺼번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코는 이미 흔적도 없이 떨어져나갔다. 어머니의 방을 습격한 살아 있는 시체들은 상당히 굶주렸던 것 같았지만 그녀의 몸을 남김없이 먹어치우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파랑을 보지 못하고 두 팔을 앞으로 쳐든 채 지나쳐 갔다. 시뻘겋게 벌어진 허리춤의 틈에서 기름과 창자가 줄줄 쏟아져 땅바닥에는 금세 피의 강이 만들어졌다.

파랑은 총명한 늑대였다. 눈앞의 상황은 짐작과 달랐지만, 10년 전에 부모들에게서 받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불과 몇십초 만에 기억해냈다. 해가 빨리 저물었으면 했지만 아직 저녁이 오려면 한참 남아 있었고, 태양의 눈부신 입자들은 모든 사물의 형체와 굴곡 사이로 공평하게 스며들었다. 하얀 뼈가 여기저기 드러나도록 참혹하게 찢긴 몸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어머니의 등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다가 파랑은 훌쩍 뛰어올랐다. 목을 물고 여러번 흔들어 숨을 끊은 다음 머리카락 사이로 이빨을 박아넣었다. 어머니의 피는 달큰하고 슬펐고, 두개골은 마치 쇳덩어리 같아서 작은 늑대 파랑이 깨물어먹는 일 자체가 고통이었다.

어머니의 골을 반쯤 삼켰을 때 파랑은 안에서부터 찢어지기 시작했다. 뼈와 힘줄이 길어지며 투둑투둑 소리를 냈고, 살점이 갈라진 자리에 야들야들한 새 살이 올라와 붙었다. 이빨을 악물며 그 아픔을 다 견뎠을 때 파랑의 몸은 두배로 커져 있었다. 새파란 털들이 목 근처에서 갈대처럼 흔들렸다.

 

 

미닫이문이 닫히자 한정식집 방 안의 무거운 분위기가 어깨를 내리눌렀다. 재혁은 담배 생각이 간절했지만, 10분 전에 이미 한대 피웠다. 금세 다시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밥상 맞은편에 앉은 갈색 얼굴의 사내들은 아까부터 수저를 들지 않고 재혁만 보고 있었다. 일렉트릭기타를 치는 야쿠브와 드러머 리오, 보컬리스트 코코가 차례로 앉았고 코코의 옆인 방 맨 안쪽 자리는 비어 있었다. 재혁의 옆으로는 내일모레면 환갑인 사장과 그의 동생인 부사장, 그리고 재혁의 직속상사인 정팀장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마치 국가간 단체 맞선이라도 보는 것 같은 자리 배치였지만 짝이 맞지 않았다. 베이씨스트 아르손이 오지 않았고, 그의 일곱살배기 딸을 위해 통로 중간에 빼놓은 방석도 비어 있었다. 전골이 다 끓었는데도 사내들이 음식에 손을 대지 않자 사장이 특유의 호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 왜들 안 드시나? 김재혁씨, 어서 먹으라고 말 좀 해요. 이트(eat), 이트! 이슬람인지 뭔지 고기 못 먹는 희한한 종교라 그래서 특별히 해물전골로 시켜놓으니깐 왜들 안 먹어?”

사장은 맞은편에 앉은 인도네시아인들이 한국어를 알아듣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할 줄도 안다는 사실을 몰랐다. 리오는 한국에 온 지 4년, 야쿠브와 코코는 5년이 지났다. 셋 모두 작업장에서 얻어맞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한국어를 배운 사람들이었다. 부사장은 이슬람교 신자들이 돼지고기는 먹지 않지만 쇠고기는 먹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제 사십대 후반인 정팀장은 그들보다는 많이 아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혁 또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사내들은 재혁이 자신의 회사 경영진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재혁이 경영진과 한패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 그렇게 씌어 있었다.

재혁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옆에 앉은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내들의 젊고 건강한 갈색 얼굴에 담긴 적대감에 대항할 만큼 떳떳한 무언가가 자신 속에는 없었다.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록밴드‘다마이’를 찾아낸 건 3개월 전이었다. 이번 건은 재혁이 90퍼센트 성사시킨 거나 다름없었다. 재혁의 회사는 최근 몇년간 이렇다 할 히트작 광고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던 참에 엄청난 물량공세로 이름난 최고의 광고주 S사가 내년에 새로 런칭할 계열사의 이미지광고 PT를 제안해오자 순식간에 비상이 걸렸다. 경쟁 PT에 초청받은 상대는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Y기획이었다. PT준비가 시작된 사무실은 수백마리의 전기뱀장어가 한꺼번에 쏟아져들어온 사각형 수조 같았다. 재혁은 사무실 한구석에 간이침대를 펴놓고 새우잠을 잤다. 카피라이터들은 커피 두잔 다음에는 박카스 한병을 마시는 식으로 카페인 양을 조절했다. 정팀장은 야근하는 직원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경영진의 뜻을 전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큰 기회를 몇번이나 만날 거라고 생각하나? 이번이 그거야. 태어나서 딱 한번 크게 터뜨리는 거야. 못하면 그냥, 죽는다고 생각해.

“그런데 우리 주인공은 왜 안 왔다고 했지? 머리 꼬불꼬불하고 그 베이스 친다는 친구 말야. 딸내미도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어?”

전골을 떠먹던 사장이 사내들 쪽을 보며 물었다. 야쿠브와 코코가 시선을 주고받았고, 리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재혁이 대답했다.

“집에 좀…… 일이 있답니다.”

그것은 재혁이 세 사내들에게서 들은 그대로였지만, 사장은 만족하지 않았다. 수고했다고 우리가 식사를 대접하는데 뭐 그리 중요한 일이 있어 안 오는 거냐, 안 그래도 그 사람 표정만 영 어둡고 웃음이 자연스럽지 않아 약간 걸렸다, 꼬마가 천사처럼 귀여워서 마지막 안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사장은 쉬지 않고 읊어댔다.

“죽었습니다.”

입을 연 것은 리오였다. 재혁의 젓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을린 얼굴을 한 사내의 입에서 나온 또렷한 한국어에 놀란 듯 사장의 얼굴이 하얘졌다.

“죽다니, 누가?”

“나띠가 죽었다고요. 아르손 딸요. 전부터 폐렴에 걸려 있었다고 했잖아요. 촬영 끝나고 많이 아파서 병원에 갔어요. 닷새 전에 죽었습니다. 아르손은 지금 집에 있어요.”

숟가락을 쥔 리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사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얼굴의 반이 흔들리도록 밥알을 꼭꼭 씹어 삼켰다. 엉? 사장과 부사장, 정팀장의 입이 동시에 쩍 벌어졌다. 놀란 것은 재혁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럼 우리 광고는 어떻게 찍어? 부사장이 당황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예비촬영한 컷들을 넣은 시안으로 광고는 따냈지만, 다음주부터 본촬영이 잡혀 있었다. 메인으로 등장하는 소녀가 없다면 촬영을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업들의 사회공헌 이미지광고에서 이주노동자는 한창 뜨는 소재였고, 록밴드 다마이는 한가지 잇점을 더 지니고 있었다. 그들을 모델로 쓰면 이주노동자들을 일방적인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당당히 구성하는 예술가들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아니 S사가 그렇게 바라본다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다름을 인정하면서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기업’을 보여주기에 그만한 대상은 없었다.

평일에는 안산에 있는 공장에서 전자제품을 조립하고 주말에만 모여 연습하는 다마이 멤버들은 촬영 준비 때문에 이미 한달째 연습을 거르고 있었다. 이슬람교 명절인 라마단의 마지막 주말만이라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쉬어야겠다는 그들의 요구는 정당했다. 하지만 그 주말 재혁은 안산으로 차를 몰았다. 네 멤버의 집을 차례로 돌았다. 아무리 스케줄을 짜봐도 그때 촬영하지 않으면 PT일정에 맞추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멤버들을 스튜디오에 나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모델료를 이미 받은 터라 별다른 항의는 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촬영 내내 죄수들 같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악기의 전원을 껐다켰다 할 뿐이었다. 아르손 곁에 붙어 앉아 기타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조그만 계집애를 재혁이 기억해낸 것은 그때였다.

따님이 기타를 칠 줄 알죠? 재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의바른 태도로 밀어붙이면 안될 일도 될 때가 많았다. 구석으로 밀고 밀고 또 민다. 마침내 상대가 말려들 때까지, 본래의 의도는 대화에서 사라지고 오직‘예의’만이 남아 식충식물의 덩굴손처럼 상대를 꼼짝달싹 못하게 감아버릴 때까지. 아르손은 두려움과 적의가 뒤섞인 눈으로 대답했다. 그애는 아픕니다. 나띠는 그저 치는 흉내만 낼 뿐이에요. 재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Enter Sandman’도입부를 따라 치는 걸 봤어요. 아빠가 가르쳤어요? 대단한 솜씨던데요. 언제 어디서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재혁은 그런 일에 뛰어났다.

나띠는 착한 아이였다. 보글거리는 갈색 곱슬머리와 잘 여문 과일 같은 뺨을 지녔고, 가끔씩 콜록콜록 하고 어린애 기침을 했다. 그건 분명 단순한 감기처럼 보였다. 그애는 어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재혁이 시키는 대로 포즈를 취했고 미소를 지었다. 아르손 앞에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던 나머지 멤버들도 그애가 스튜디오에 들어오자 조금씩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애는 정말로 메탈리카의 ‘Enter Sandman’도입부를 연주할 수 있었다. 제 몸만한 기타를 들고 줄을 뜯느라 손놀림이 서툴긴 했지만 전주 부분의 코드와 멜로디를 정확히 꿰고 있었다. 스무살 무렵 재혁 자신도 어느 선배의 기타를 빌려 연습해본 곡이라 아이의 박자감각이 얼마나 정확한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죽지 않았다면 나띠는 천재적인 여성 기타리스트로 자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밥그릇 뚜껑이 콸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리오가 인도네시아 말로 뭐라고 내뱉더니 점퍼를 집어들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당황한 코코와 야쿠브가 따라나갔다. 사내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옆방에서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사장이 놀라 뛰어왔다. 그녀는 얼굴에 선명히 떠오른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여기 이러는 데 아닙니다. 옆방에도 손님들이 계신데. 저런 사람들 데리고 오시면 안된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사장은 이 모든 상황에 기가 질려 입을 다물지 못했고 정팀장은 제 잔에 술을 채웠다. 부사장이 소리쳤다. 김재혁씨, 뭐해? 당장 잡아와!

재혁은 신발장 앞에서 잠시 비칠거렸다. 벗어놓은 구두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용 슬리퍼를 발에 꿰고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재혁은 아찔함을 느꼈다. 낯선 감정은 절대로 아니었다. 전에도, 그전에도 이런 일은 수없이 있었고 이제 그것이 또 한번 반복된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문득 까닭없이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기를 쓰고 이번 PT를 성사시키려 한 것은 침체되어가는 회사 분위기에 가당찮은 책임감을 느껴서도, 팀에 합류하자마자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 AE들의 기획력에 위기감을 품어서도 아니었다. 나띠를 처음 보았을 때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무리한 촬영일정에 엮었을 때 생길 온갖 불운하고 더러운 일들의 가능성을 직감하고서도 재혁은 물러나는 대신 그 속으로 자신을 던져버렸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재혁은 언제나 스스로 그렇게 했다. 그러면서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자신을 비웃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재혁이 이 세상에 태어나 마음을 다해 좋아해온 것은 어릴 때부터 즐겨 그리던 아기자기한 그림들도, 기존의 관념을 비틀고 깨부수면서 신기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광고 일의 매력도 어쩌면 아닌 것 같았다. 재혁이 정말로 공들여 음미하는 것은 자신을 비웃는 일의 위악적인 즐거움이었다. 한번 그 즐거움에 휩쓸리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재혁은 일정수준 이상의 연봉을 받아야 회원이 될 수 있는 클럽제 친목모임에 가입했고, 백화점에서 제대로 된 넥타이를 골랐으며, 옷차림에 신경쓰지 않는 남자는 범죄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페라리의 스포츠카와 마이바흐의 쎄단 정도가 아니면 차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동차 잡지들을 읽었다. 게이들을 속으로는 혐오해 마지않았지만, 게이 커뮤니티에 가입한 지 한달 만에 진짜 그들처럼 말하는 법을 배웠다. 모델이 되어도 좋을 만한 외모의 여자들을 만났고 한달이 채 되기 전에 헤어졌다. 재혁은 자신이 그런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믿었고, 자신이 정말로 그런 인물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한 아이가 죽었다.

목에서 흘러내린 피로 제복 전체가 더럽혀진 여종업원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을 때 재혁은 간신히 뒤를 돌아보았다. 재혁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여자가 재혁의 팔에 달라붙었다. 재혁은 비명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지만, 새빨간 눈의 여자는 턱힘이 엄청나게 셌다. 바닥에 넘어지면서 재혁은 눈앞에 스쳐가는 아르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뭔가 파랗고 희미한 그림자도…… 다마이는 인도네시아 말로‘평화’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5분 후 재혁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의자를 붙잡고 천천히 일어나 아수라장이 된 식당 한복판에 섰다. 그리고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고깃덩이를 찾기 시작했다. 방문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부사장을 발견한 재혁은 입에서 빠져나온 침줄기가 길게 늘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파랑은 털갈이를 하는 짐승처럼 땅바닥에 온몸을 짓찧으며 뒹굴었다. 파랑의 몸에서 빠져나온 새파란 털들이 흉한 덩어리로 뭉쳐지며 피웅덩이 속을 굴러다녔다. 늑대들은 제 새끼를 목숨 걸고 지켰지만 부모에 대해서는 무심했고, 독립한 후에는 어미를 까맣게 잊고 제 삶을 살았다. 하지만 파랑은 평범한 늑대가 아니었다. 파랑은 뱃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사람들은 늑대가 속으로도 운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뛰었지만 여전히 너무 늦었다. 염통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는데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빨을 드러낸 채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파랑이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자 주춤거리며 물러났고, 이내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늑대는 사자나 치타와는 달랐다. 앞발에 실린 엄청난 힘이나 압도적인 스피드처럼 먹잇감을 한방에 끝장낼 만한 필살기를 갖지 못한 늑대들은 집요함 하나로 지옥 같은 초원에서 살아남았다. 상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따라 달리고 또 달려서 진을 빼는 것. 파랑도 그렇게 했다. 아버지의 뻥 뚫린 배 한가운데에서 길게 빠져나온 주홍색 창자가 등 뒤로 요란하게 흔들렸다. 파랑은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를 따라 달렸다. 왜 그를 쓰러뜨려야 하는지, 왜 자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었다. 파랑의 이빨은 몇시간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져서 아버지의 머리통은 아그작 하는 소리와 함께 쉽게 쪼개졌다. 몇분 뒤 파랑의 몸은 알래스칸 맬러뮤트 두마리를 합쳐놓은 크기로 자라났다. 파랑은 몇걸음 달려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가 사라진 아버지의 목은 추워 보였다. 열 손가락은 땅속의 무언가를 감식하려는 것처럼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다. 파랑을 그려낸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이었다.

 

 

그것은 검고 동그란 얼룩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커피를 쏟은 자국 같기도 했고 그냥 물에 젖은 흔적 같기도 했다. 하지만 권이사의 오른쪽 어깨에 묻은 그것은 분명 한시간 전보다 커져 있었다. 누가 커피를 쏟을 만한 부위도 아니었다.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정희의 신경은 자꾸만 그쪽으로 쏠렸다. 권이사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정희는 그가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전에 본 적이 없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땀에 젖어 이마에 찰싹 붙었고, 늘 입고 다니는 쥐색 양복에는 연탄재 비슷한 뿌연 먼지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권이사는 정희의 회사에 나오는 여러 이사들 중 한명이었지만 직원들 중 누구도 그의 업무분야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의 취미는 등산, 골프, 영화감상, 낚시 등으로 다양했는데, 그것은 부사장이 등산을, 사장이 골프를, 홍보이사가 영화를, 영업이사가 낚시를 각각 좋아한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었다. 그 네개의 사내 동호회는 매주 토요일 아침 8시부터 모임을 가졌는데 권이사는 네 모임 모두에서 가장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는지 그는 일요일에도 매주 회사에 나와 웹써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닌게아니라 자기 책상 앞에 앉아 자꾸만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대는 그는 등산을 갔다가 맹수를 만나 한달음에 산을 달려내려온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날은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었고, 양복을 입고 산에 가는 사람은 없었다. 정희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희는 재빨리 모니터로 눈을 돌렸지만 한박자 늦고 말았다.

“이정희씨.”

“네?”

“지금 의심하고 있지?”

“……예?”

“의심하고 있잖아. 내가 저것들한테 물린 거 아닐까 하고.”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그렇게 써 있는데. 나 안 물렸어.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 이렇게 보여도 나 싸움 잘해.”

“………”

“이정희씨.”

“예?”

“혹시 크리켓 좋아하나?”

“……?”

“스포츠 같은 거 안 좋아하지?”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요.”

“설마 저것들이 다시 올라오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생각보다 오랫동안 여기 같이 있어야 할 수도 있다고.”

“………”

“같은 사무실에 있는데도 우린 서로를 잘 모르잖아? 이정희씨는 워낙 말이 없고. 내가 크리켓 좋아하는 거 알았어? 크리켓이란 게, 야구랑 비슷해 보이는데 좀 달라.”

그는 하아, 하고 숨을 내쉬며 기묘한 웃음을 짓더니 곧바로 크리켓 규칙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잠시만요, 정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구석에 붙은 탕비실 쪽으로 걸어갔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귓불까지 올라왔다. 몸이 뜨거웠다. 정수기 옆 탁자 위에는 일회용 커피와 녹차 티백 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티스푼을 담가두는 머그잔이 하나 있었다. 그 머그잔 옆에 과도가 놓여 있었다. 가끔 찾아온 손님들에게 과일을 대접할 때 쓰는 조그만 과도였다. 정희는 그것을 천천히 쥐어보았다. 팔 전체가 후들거렸다.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절대로 아니라고 했지만 권이사는‘그것’들에게 물린 게 분명했다.‘그것’들이 저 바깥에 정말로 있다면, 그리고 그의 얘기 대부분이 사실이라면. 횡설수설하는 말투도 그랬지만 얼굴빛도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겨우 심호흡을 하고 자리로 돌아오다가 정희는 숨이 멎을 뻔했다. 권이사는 이제 정희의 자리로 옮겨 앉아 있었다. 그가 등을 돌린 채 물었다.

“이정희씨, 담배 피우면 좋나?”

“네?”

“만날 숨어서 피우는 거 알아. 지금도 피우고 왔잖아. 무슨 여자가 담배를 피우나? 교양없이. 그러니까 시집을 못 가는 거야, 몸매도 안 살아나고. 이정희씨 집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던가?”

정희는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가 고개를 좌우로 몇번 흔들더니 갑자기 흡, 하고 숨을 멈추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는 책상 위로 쓰러지며 모니터를 두 팔로 껴안았다가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뒤로 기댔다. 그러고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와이프, 와이프는 애들 데리고 교회에 갔어. 교회는 안전할 거야. 그지? 내가, 보통 때에는 잠을 자도 꿈속에서 일을 해, 꿈속에서. 회사 와서 기획안을 쓸 때도 고민을 안해도 된다고. 하나도 안해도 된다고…… 꿈에서 작성한 걸 그대로 옮겨놓으면 되거든. 얼마나 편한데.”

정희는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정희는 어떤 면에서 그가 부러웠다. 그는 얼마나 순수하게 행복할 것인가. 그토록 좋아하는 회사 일이 머릿속에 늘 가득했고, 꿈에서도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을 또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부러움은 두려움에 묻혀버렸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쇳소리처럼 갈라졌다.

“……내가 원래 꿈이, 그러니까 젊었을 때 장래희망이, 근사한 통기타 까페 하나 차리는 거였거든. 청바지 입은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 부르고, 손님이 많든 적든 주인은 같이 어울려서 술 먹고. 근데 어제 꿈에 그런 까페가 나왔어. 내가 주인이더라고. 왜 그런 꿈을 꿨을까? 기분이 참 좋긴 했어. 그런데 그게 개꿈일 줄 누가 알았겠어? 오늘 이런 웃기는 일이 생기다니. 근데 이정희씨, 마감은, 마감은 왜 그렇게 늦게 하나? 원고 마감이 어제 아니었나?”

문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돌리는 바람에 정희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과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과도는 책상 밑으로 굴러들어가버렸다.

“……내가 아까 보니까, 러시아제는 역시 달라. 좀비한테 물려도 러시아 것들은, 물리나 안 물리나 그것들은…… 이정희씨, 저 망할 것들이 쳐들어와서 마감이 늦어지니까 좋지? 편집장은 연락이 됐나? 지난달에도, 흡, 내가 얼마나 불려다녔는데. 그런데 있잖아, 이정희씨…… 나 이사 아니고 상문데.”

그랬다. 그는 한달 전에 이사에서 상무로 승진했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정희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가장 적극적인 감정을 굳이 든다면 혐오감이었다. 그 때문에 회사를 뛰쳐나간 직원들이 여럿이었다. 그가 직원들, 특히 여기자들에게 하는 말과 행동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무시하는 쪽이 현명했다. 일요일 오후 그와 단둘이 사무실에 갇혀 있다가 삶이 갑자기 끝나버릴 수도 있다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재혼했고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남자친구는 가끔씩 생겼지만, 정희의 얼굴에서 어색함과 긴장이 걷히고 친밀감과 피로가 적나라하게 그 자리를 차지할 즈음이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연락을 끊었다. 정희는 자신의 곁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 숨이 끊어지기 전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게 될 사람이 권이사가 아니라 그들 중 한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정희는 생각했다.

숨을 헐떡이며 다가오는 권이사, 아니 권상무의 어깨에 묻은 얼룩은 분명 피였다. 몇시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닐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사무실에 뛰어들어온 그가 좀비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때는 너무 황당하고 겁에 질린 나머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의 눈에 가득한 굵은 핏발도 아마 그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정희는 곁눈으로 문 쪽을 보았다. 손을 떨면서 점점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새빨간 눈의 남자를 지나쳐 그리로 뛰어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지문인식 씨스템이 달린 사무실 문은 웬만한 장정 몇이 몸을 부딪쳐도 끄떡없을 만큼 단단한 강화유리로 되어 있었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여는 데 최소한 10초는 걸렸다. 왼발이든 오른발이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정희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어느 발을 먼저 움직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 짧은 순간 동안 수많은 이미지와 소리들이 2배속으로 재생한 동영상 화면처럼 잉잉거리며 머릿속을 뚫고 지나갔다. 불과 반나절 전의 일들이었다.

그날 정희는 새벽 4시에 퇴근해 세시간가량 눈을 붙인 다음 이를 악물고 아홉시에 맞춰 출근했다. 1호선 열차 안은 일요일인데도 발디딜 틈 하나 없었다. 정희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하철 안의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이상한 점도 찾아내지 못했다. 무거운 공기가 관자놀이를 조여들었지만 그것은 출근해야 하는 여느 휴일 아침의 공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희는 드라이를 하지 못해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졸다가 옆자리 아이가 신경질을 내며 비켜!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깨어났다. 분홍색 휴대폰을 손에 든 아이의 눈자위는 모기가 파고들어 휘저어놓은 것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일찍 나오겠다고 한 편집장은 정오가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10시쯤‘이정희 기자, 오는 대로 강사라 원고부터 수정해서 넘겨요’라는 문자메씨지가 하나 왔고, 12시 20분에‘이정ㅎ’라는 메씨지가 왔을 뿐이었다. 두번째 메씨지는 좀 이상했지만, 독촉과 비난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는 편집장의 다른 메씨지들처럼 확인하자마자 삭제해버렸기에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정희가 제때 기사를 넘기지 못해 마감이 한참 늦어지고 있었다. 정희는 한글 프로그램을 띄우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뭉치를 집어들었다. 예리한 회칼로 북북 그어놓은 것처럼 빨간 글씨로 범벅이 된 원고에서 살아남을 부분이라곤 별로 없어 보였다. 정희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된 걸까, 정말로? 어디에서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희의 잘못인지도 몰랐다. 월급명세서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정희만큼 연봉을 받기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번 회사에서만은 오래 있어야 한다고 정희는 입사 첫날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이젠 더 도망칠 곳도, 자신을 받아줄 곳도 없었다.

정희는 스물네살 때 영화잡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음악잡지, 공연잡지, 여성지, 남성지, 주부지, 패션지, 교양지, 여행지, 레저지, 연예지, 월간지, 주간지, 일간지, 인터넷신문을 가리지 않고 20대 중후반의 여자가 기자로 입사할 만한 거의 모든 종류의 매체에서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일년까지 일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든 별로 상관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많은 매체를 겪어보았으면 정착할 곳이 어디인지 대충 감을 잡을 만도 했건만 정희의 경력은 좀처럼 일년을 넘어가지 못했다. 대기업에서 외주를 받아 사보를 제작하는 기획사에 들어오기 위해 정희는 자기소개서 문구를 여러번 고쳐 썼다. 특징 없어 보이는 몇구절을 삭제하고‘재능있는 여러 작가들과도 친분이 있으며’라는 구절을 새로 넣었다. 글발 좋고 잘나가는 필자를 섭외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기자에겐 주요한 자질이었다. 친한 작가가 누구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사라의 이름을 대면서도 정희는 사라에게 정말로 연락할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편집장이 정희에게 맡긴 첫번째 임무는 젊고 가능성있는 작가 한명을 연재소설 꼭지에 책임지고 채워넣으라는 것이었다. 지난달까지 글을 쓰던 작가가 갑작스럽게 중도하차했다고 했다. 정희는 헤어진 연인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소설가들에게 먼저 청탁전화를 넣었다. 하지만‘사랑이 넘치는 사회’라는 주제 아래 밝고 따뜻한 성격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 주인공들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꿈을 이루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동과 희망을 심어주는 소설을 연재하라는 제안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작가를 찾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더러는 웃어 넘기고 더러는 “여보세요, 거기서는 정말 이 세상이 그런 곳이라고 믿는 거예요? 게다가 작가한테 정해진 방향대로 소설을 쓰라고요?” 하고 진지하게 되묻는 작가들과 짧은 통화를 하면서, 정희는 매체 이름만 밝혔을 뿐 자신의 이름은 대지 않았다. 다시 통화할 일 없는 사람들이라도, 지구 어딘가에 이정희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10년 만에 사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마감이 코앞으로 닥쳐온 시점이었다. 대학시절 이후로 연락이 끊겼지만 정희는 사라의 새 블로그 주소를 알고 있었다. 정희는 예나 지금이나 사라의 글을 좋아했고, 사라가 웹진에 연재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가슴을 옥죄는 질투심과 그에 맞먹을 만큼의 동경을 품고 다음 회를 기다리곤 했다. 사라는 정희의 긴 설명을 듣고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마감 날짜를 물었다.

편집장은 사라가 보낸 소설을 한참 동안 꼼꼼히 읽더니 정희를 작은 회의실로 불러 원고에 줄을 그어가며 지적했다. 여주인공이 가난하다는 설정은 좋다고 쳐요. 하지만 한달에 30만원도 벌지 못한다는 건 지나치게 현실성이 없잖아? 게다가 똑같이 우울한 친구를 만났으면 둘이서 힘을 합쳐 뭐든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그냥 둘이 우울한 채 가만 있잖아. 이건 우리 컨쎕하고는 전혀 맞지 않으니까 수정해달라고 합시다. 원고료를 우리가 주니까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거죠, 그 정도는. 편집장의 얼굴에 갈등이나 그 비슷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정희는 이건 소설이잖아요, 하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원고를 조금만 수정해줄 수 없겠느냐고 정희가 겨우 물었을 때 사라는 수화기 저편에서 잠시 말이 없더니 푸하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웃음이 길게 이어지며 조금씩 잦아들더니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편집장은 수십꼭지의 크고 작은 원고들 가운데 유독 무명작가의 우울한 소설 하나를 마감이 늦춰지도록 싸안고 있는 정희를 이해하지 못했다. 작가들이 왜 그렇게까지 회사의 제안을 거부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글만 써서 먹고살기 힘든 형편일 텐데 왜 그러는 거지? 그냥 이정희 기자가 고칩시다, 우리 분위기에 맞게. 오늘 점심은 자장면으로 합시다, 하고 제안하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 사십대에 막 들어선 편집장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스타일로, 친절하고 싹싹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부하직원들의 기분을 세심하게 배려할 줄 알았고 작은 결정도 여러번 생각해서 내리려고 노력하는 그에게서 결점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원고료를 우리가 주니까’라는 말을 아무런 갈등 없이 자연스럽게 한다는 게 한 사람의 결점이 될 수 있을까? 정희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다른 곳에서는 더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패션지에 들어갔을 때는 정희가 입고 다니던 코듀로이 재킷을 만든 브랜드가 3년 전에 없어졌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편집장 때문에 정희는 유명 디자이너를 인터뷰하러 가는 길에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야 한다며 편집장이 추천해주는 브랜드의 옷을 사입을 돈이 정희에게는 없었다. 영화잡지에서 일할 때는 어느 블록버스터 영화의 리뷰를 쓰다가 손을 놓아버렸다. 다섯명의 평론가들이 별 다섯개 만점에 나란히 반개를 준 영화였지만, 영화의 배급사에서 광고가 여러 페이지 들어왔기 때문에 기사 방향이 수정되었다. 정희가 원고를 펑크내는 바람에 편집부 전원이 하룻밤을 더 새워야 했고, 그다음부터 중요한 원고들은 정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연예기사를 다루는 인터넷매체에 있을 때는 이틀에 한번 꼴로 매니저들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정희는 배우와 가수들이 지나가듯 던진 농담들을 적당히 다듬어 따옴표로 묶은 다음 기사에 썼는데, 매니저들은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회사가 편집장에게, 편집장이 정희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지시한 일 때문에 누군가가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할 만큼 증오심을 품는 것을 보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누가 잘못한 걸까? 정희보다 경력이 많은 선배들은 필자에게서 욕설이 가득한 메일을 받고 취재원들의 경멸 섞인 시선을 느껴도 잘 견뎌내는 것처럼 보였다. 편집장들은 회사의 경영 방침대로 모든 일을 진행하는 것에 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정희가 만약 그런 일을 문제삼는다면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처럼 여겨질 것 같았다. 자신의 밥벌이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희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많은 회사들 가운데서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품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회사 한군데가 없다면 그건 세계의 잘못이 아니라 정희의 잘못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희는 부끄러웠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언제나 부끄러웠고, 모두가 참아내는 그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매번 비겁하게 도망쳐나오는 자신이 버거웠다. 모든 기자들이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희가 들어가는 회사들은 모두 그런 종류의 업무를 수행할 능력을 요구했다. 그런 일이 아니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높은 감식안과 쓸데없는 자의식을 빼면 사실 자신에게 재능이란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정희는 알고 있었다. 재혁과 사라에게 먼저 다가간 것도, 자신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던 그들을 친구라고 끝까지 우기고 싶었던 것도 자신에게는 없는 그 재능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정희도 이 세상 한구석에 쉴새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망그러뜨리고 흠집을 낸 다음 쎌로판지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희는 무심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저녁까지 원고를 끝내지 못하면 마감은 하루 더 늦춰질 것이고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라는 어차피 정희와의 옛 기억을 거의 잊은 듯했고, 화는 내겠지만 정희에게 인간적으로 크게 실망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겨우 1회분 원고 마지막에서 사라의 여주인공은 친구에게 말하고 있었다.‘그러니까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정희가 그 대사를 어떻게 바꿀지 고민하고 있을 때 문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권이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짙고 불투명한 피와 흘러내리는 살점덩어리들 때문에 유리문 밖에서는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철벽처럼 견고해 보이는 유리문에 몸을 던지기 위해 뒤로 물러나면서 파랑은 문득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기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파랑의 몸속에는 많지 않았지만, 처음 벽 속에 숨어들던 순간의 기억만은 또렷했다. 벽은 단단하고 서럽고 아픈 물질이었다. 하지만 그 아픔이 지나가자 그것은 솜처럼 포근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파랑이 채 두살이 되기 전의 어느 여름날, 파랑이 들어 있던 하얀 방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터져버렸다. 방이 폭발하는 순간 파랑의 몸도 수천개의 물방울이 되어 공중에 흩날렸다.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놀랍게도 눈이 떠졌다. 눈을 뜨자 파랑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곳은 조금 더 넓은 방 안, 직사각형 모양의 하얀 종이 위였다. 파랑은 액자에 담겨 어딘가의 벽에 걸려 있었다. 피로와 두려움 끝에 긴장이 풀리자 파랑은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파랑은 벽 속에 앉은 채 몇년이고 죽음처럼 잠을 잤다.

그리고 다시 그 순간이 왔다. 짱 하는 소리가 나며 유리에 금이 갔다. 파랑은 몸이 둘로 접혀 비닐봉지에 쑤셔넣어진 채 어딘가로 한참을 실려갔다. 매캐한 연기냄새가 코를 찔렀다. 종이를 불 속에 던지기 위해 누군가의 손이 비닐봉지 속을 헤집는 순간 파랑은 처음으로 다리를 크게 움직여 펄쩍 뛰었고, 마침내 종이에서 빠져나왔다.

바깥세상은 복잡했고 어지러웠다. 토할 것 같은 냄새들이 망치가 되어 파랑의 머리를 쿵쿵 찧어댔다. 파랑은 현기증을 참으며 쓰레기 소각장을 벗어나 도시가 나올 때까지 달렸다. 파랑이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가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가끔 들킬 것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파랑은 벽 속에 뛰어들어 숨었다. 파랑은 몸집이 어린아이 주먹만했고, 입매는 언제나 웃고 있었으며 온몸의 털은 지중해의 바닷물처럼 새파랬다. 간혹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벽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파랑이 벽에 그려진 귀여운 벽화의 일부라고만 생각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파랑은 벽에서 벽으로 건너뛰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자신을 왜 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공기 속을 더듬어도 그들의 냄새, 그 작은 방을 살갑게 채우던 그들의 살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서로의 내장을 뜯어먹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을 때 파랑은 비로소 눈을 떴다. 고기 썩는 악취와 상한 음식물 냄새,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두터운 피비린내 사이로 익숙한 냄새 몇가닥이 밀려왔다. 파랑은 멀리서 희미한 기억처럼 자신을 잡아당기는 그 냄새들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동안 파랑은 점점 많은 것들을 기억해냈고, 더 많은 것들을 새롭게 깨쳤다. 아무리 땀을 흘려도 안되는 일이 있었고, 아무리 뛰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가 있었다. 지키려고 애를 써도 결국 어떤 것들은 부서졌고, 어떤 것들은 더러워졌다. 그리고 지키고 싶지 않아도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었다. 파랑이 찾아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일곱번째로 몸을 날려 유리문에 부딪쳤을 때 파랑의 이마가 길게 찢어졌다. 뜨뜻한 액체가 새어나와 눈 속으로 흘러들었다. 아홉번째로 부딪치자 겨우 유리에 가느다란 금이 생겼다. 열세번째로 벽에 뛰어들었을 때 와장창 하는 소음을 내며 마침내 문이 산산조각났다. 두번째 어머니가 유리조각 더미 속에서 두 팔을 움직여 악어처럼 파닥파닥 기어나왔다. 어머니의 양쪽 다리는 무릎 바로 밑에서 잘리고 없었다. 어머니는 파랑을 보자 입을 벌리고 가느다랗게 한숨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나란히 박아놓은 날카로운 못 같은 이빨들이 그녀의 입 속에서 새하얗게 빛났다. 파랑은 그녀의 빨간 눈을 피해 머리를 숙이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어머니의 다리 한쪽을 뜯어먹고 있던 늙은 사내의 몸을 파랑은 몇초 만에 여러 조각으로 찢었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냄새가 났다. 파랑은 호흡을 멈추고 어머니의 머리통을 물어 몸에서 뜯어냈다. 어머니의 머리카락 사이에 끼어 있던 유리조각 몇개가 어금니 사이에서 와그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파랑은 이제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슬퍼할 겨를이 있다면 몸을 움직여 한발이라도 더 내딛는 게 나았다. 어머니들과 아버지의 골을 삼킬 때마다 파랑은 자기 몸속에서 꿈틀대는 낯선 짐승의 거대한 몸을 느꼈다. 몸 한가운데에서부터 살을 찢을 듯 그것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하자 파랑은 고통을 참기 위해 눈을 치떴다. 아직 모든 게 끝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한명의 어머니가 남아 있었다. 파랑은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핥으며 건물 밖으로 서둘러 빠져나갔다.

 

 

아영은 호텔 커피숍 창밖으로 정원수들을 내다보며 한시간째 자세를 바꾸지 않고 앉아 있었다. 알전구가 달린 전선들이 나무들의 몸을 복잡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이제 겨우 10월 말인데 꼭 겨울 같구나, 아영은 생각했다.

맞선 자리에 상대방이 나오지 않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불쾌함이나 조바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좀 당황스럽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아영은 종업원이 리필해준 커피를 마시면서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머니, 여자친구를 만나러 나간 남동생 그리고 정희의 전화번호를 차례로 눌러보다가 아영은 충동적으로 K의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신호가 세번 가기 전에 플립을 닫아버렸다. 익숙한 고통이 독한 약처럼 위장을 타고 내려가자 아영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몸속 그 자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K의 웃음은 여전히 귀 바로 뒤에서 들려와서 아영이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곧장 그의 얼굴이 보일 것 같았다.

아영은 보통 한달에 두번, 둘째와 넷째 일요일에 선을 봤다. 남자친구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아영의 몸이 피로하거나 가뿐하거나 상관없이 그 일은 의식처럼 거행되었다. 일요일이 되면 아영은 어머니가 골라준 단정한 투피스 정장을 입고 교회에 갔다. 예배가 끝나면 가방에 성경책을 넣은 채 맞선 자리에 나갔고, 너무 늦지 않게 차를 몰고 돌아왔다. 맞선이 있는 주 수요일이나 목요일이 되면 아영은 가끔 메씬저로 정희에게 말을 걸어 일요일에 만날 상대의 프로필을 들려주었다. 몇년 전까지 정희는 한숨을 쉬면서도 이러니저러니 토를 달아주었지만, 이제는 그러니, 하고 대답할 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일이 몇번 반복되자 아영은 정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정희는 언제나 새벽 한두시까지 일하고 있었고, 지난 몇달 동안은 특히 바빠 보여서 제대로 몇마디 나누지도 못했다. 정희에게 말을 걸다 보면 아영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한가하고 할 일 없는 사람, 그 나이가 되도록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기분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희는 아영이 K를 만났고 헤어졌으며, 그다음에 다시 만났고 또 한번 헤어졌다는 것, 그리고 또 다시 만났으며 헤어진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영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통제하기 힘든 감정의 대상이 그라는 것도, 그 때문에 아영이 밤마다 부엌 찬장에서 양주병을 꺼내 방으로 들고 간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영에게 삶은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즐겨 입는 옷 스타일부터 학력과 직장, 지지하는 정당과 정기구독하는 잡지, 배우자가 될 사람의 외모와 성격까지 아영의 삶을 채우는 옵션들은 부모님이 오래전에 골라놓은 것들이었다. 아영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았고,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대체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아영은 아이돌그룹의 즐거운 노래들을 크게 틀어놓고 방에서 가끔 혼자 울었다. 언젠가 정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은 적이 있었다. 왜 부모님과 싸우지 않는 거니? 그렇게 힘들면서 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낳아준 사람들이 늙고 병든 온몸을 쥐어짜듯 뒤틀며 소리를 질러댈 때 그들의 턱 끝에서 후둑후둑 떨어지는 눈물을 보는 일이 어떤 것인지 정희는 알지 못했다. 아영 또한 차라리 부모님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분들만 없으면 모래와 쇳가루가 섞인 먼지가 아니라 사람이 마시는 진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분들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분들은 아영을 품고 있는 거대한 몸체였고, 아영은 그분들의 다섯번째 팔이었다. 부모님이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든 아영은 결코 그분들에게서 분리되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 경제적 자립도 불가능했고, 혼자서 어떻게 삶을 꾸려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K를 소개해준 대학후배는 K의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신자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아영의 어머니가 매일 성경 구절을 딸에게 메일로 보낸다는 정보 또한 K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아영이 나중에 따져 물었을 때 후배는 죄책감 때문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한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어떡해요 선배. 그저 그렇게 얼버무릴 뿐이었다. 모태신앙으로 시작해 30년 동안 교회에 속해 살아온 아영에게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고, K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둘은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다음, 둘 사이의 감정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뜨겁고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몸속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다음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죽어도 부모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 같다며 먼저 관계를 정리하자고 한 건 의외로 K였다. 눈을 내리깐 채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최대한 무겁지 않게 전하려고 노력하는 K의 얼굴을 아영은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아영 역시 수없이 많은 남자들에게 그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K의 표정은 겨울만 있는 별에서 온 사람의 그것처럼 낯설었다. 그 사람들 눈에는 아영도 그렇게 보였을까? 어쩌면 K에게는 아영 역시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손의 짓궂은 변덕에 따라 조금 다가왔다가 금세 밀려나버린 숱한 사람들 중 한명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평생 처음 느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해봤자 똑같은 맞선 자리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아영도 K도 그 일을 자신들의 한계 밖으로 밀어붙일 만한 힘과 끈기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은 거대한 한계들의 연속이었다. 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아영은 문득 대학시절, 사라의 방에서 타 마시던 진한 다방커피 맛을 떠올렸다. 그 방에서 자신이 얼마나 어색했는지도. 사라와 재혁과 정희 셋은 잘 어울렸지만 아영은 그들과 함께 있는 자신에게서 미묘한 이물감을 느꼈다. 그들은 셋 다 감각있고 매력적인 친구들이었고, 졸업 후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갔다. 아영은 그렇게 멋진 아이들과 한때 친하게 지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 기억은 아영의 삶을 바꿔주지 않았다.

약속시간에서 1시간 30분이 지나자 휴대폰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자주 들러 이제는 제 방처럼 익숙해진 커피숍 안은 그날따라 한적했고, 바 안으로 들어간 종업원들은 어째선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멀리서 희미하게 새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사람의 소리 같기도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영은 불안함을 누르며 카운터로 계산서를 가져가다가‘그것’들을 보았다. 처음에는 연인끼리 입을 맞추거나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끌어안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들의 입에서는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방울처럼 잘게 부서진 핏방울들이 튀어나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팔다리들은 부러진 연필 끝처럼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 젊은 남자의 몸에 올라타고 있던 중년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로비를 가로질러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영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중년 여자는 아영의 바로 곁을 지나치더니 웨이터를 끌어안고 바닥에 뒹굴었다. 아영은 있는 힘을 다해 주차장 쪽으로 뛰었다. 시동이 걸리자마자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체들이 과속방지턱처럼 타이어에 턱 턱 걸렸다. 사람들은 새빨간 눈을 하고 팔을 공중으로 치켜든 채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아영은 욕설을 뱉어내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언제나 찾아올 것 같기만 하고 정작 오지는 않던 세상의 끝이 어딘가에서 이미 시작된 듯했다. 땅과 하늘 모두가 천천히 죽음에 먹히고 있었다. 그동안 모든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일도 아영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영은 막히지 않는 길을 찾아 동물적으로 핸들을 돌리면서 도끼를 떠올렸다. 트렁크 안에 도끼가 하나 있었다. 작지만 다부진 몸통에 반짝반짝 빛나는 날카로운 날이 달린 손도끼였다. 아무도 몰랐지만 아영은 집에도 회사에도 둘 곳 없는 그 물건을 자기 차 트렁크 속에 보관해두었다. 한 회사에 머무르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던 정희가 좀 기묘해 보이는 밀리터리 잡지사에 들어갔을 때 그런 물건들을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이번 달에는 도끼랑 칼을 다루는 게 특집이야. 너도 하나쯤 준비해둬. 언제 세상이 끝나버릴지 모르잖아. 아무도 너를 대신 지켜주지 않아. 메씬저로 대화하고 있었지만 아영은 정희의 야윈 얼굴에 걸린 시든 웃음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정희는 언제나처럼 힘든 상태였고, 언제나처럼 곤경에 빠져 있었다. 아영이 싸이트에서 도끼들을 구경하는 동안 정희는 평소답지 않게 긴 한탄을 늘어놓았다. 근로자의 자발적인 의사로 퇴직한 경우에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정희는 아영이 일하는 고용안정쎈터에 찾아온 다음에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영은 날마다 쎈터에 새롭게 밀려와 비슷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지친 얼굴의 사람들 사이에서 정희의 얼굴을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학 때 맑스의 『자본론』이라도 읽어둘걸. 그때는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 얘기들은 하나도 피부에 와닿지 않았어. 후…… 정희의 이모티콘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영은 14.5cm짜리 날이 달린 대만제 손도끼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정희는 계속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 그 사람들처럼 거리로 나가 싸워야 했던 걸까? 그때 그러지 않아서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난,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면 그걸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어. 사람들이 싸우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 재미있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창피하게 이게 뭐냐고?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어버리라는 거야? 아영은 키보드 위에서 손을 움직였다. 정희야, 넌 그래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있잖아. 난 그런 것조차 없는걸.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재혁과 사라와 정희는 언제나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고, 아영은 그들의 하루하루가 자신의 것처럼 답답하지는 않으리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정희는 사라 역시 블로그에 쓰는 글들로 보아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재혁의 소식은 제일 먼저 끊어졌고, 정희도 아영도 그의 안부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정희는, 몇년 전 어느 겨울날 오후 아영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한 적이 있었다. 아영아, 너 차 있지. 나 그걸로 살짝만 치어주라. 기사를 쓸 수 없게 팔만 살짝 부러지면 돼. 병원에 들어가 일주일만 누워 있고 싶어. 그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날 정희는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어느 여자연예인 집 앞에 여섯시간째 서 있었다. 그 여자연예인이 연인과 함께 집을 나서는 모습을 찍지 못하면 사무실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아영은 장바구니에 도끼를 담았다. 장난처럼 주문한 손도끼는 며칠 후 케이스에 담겨 회사로 배달되어 왔다. 서른한살, 친구들은 철밥통이라고 불렀고 부모님은 한심해했으며 아영 자신에게는 그저 꾸역꾸역 삼켜야 하는 반(半)고형 화학물질 같던 아영의 삶에는 그렇게 해서 도끼 한자루가 생겼다. 아영은 두근대는 가슴을 누르며 그것을 신문지에 단단히 싸서 트렁크 속에 넣어두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도끼가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 물건을 꺼내들 일이 실제로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영은 아파트 앞에서 몇마리의‘그것’들과 마주쳤다. 하지만 들키지 않고 계단을 뛰어올라갈 수 있었다.‘그것’들은 아영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왜 그럴까, 아영은 아주 잠깐 궁금했다. 내가 느껴지지 않는 걸까?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운하기만 하던 일이 죽은자들 한가운데에선 도움이 되었다. 아영은 숨에 턱이 닿았지만 집 앞까지 뛰었다. 엄마, 집에 있어요? 초인종을 누르며 아영은 손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그때 건너편 아파트 쪽에서 희미하게 짐승의 울음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TV에서 흘러나오던 것보다 거칠고 생생한 소리였다. 점점 커지며 다가오는 그것은 무리를 찾는 늑대가 목을 하늘로 뽑고 토해내는 긴 울음이었다.

 

 

세번째 어머니는 한손에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파랑을 보자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났다. 날카로운 손도끼를 움켜쥔 그녀의 손이 허공으로 쳐들렸다. 그러나 도끼날은 파랑의 머리를 내려찍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이 점점 커지더니, 입에서 낮은 신음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너 파랑이구나. 파랑 맞지?

그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먼 하늘 한쪽에서 여러개의 목소리들이 차례로 날아와 파랑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얘 이름은 파랑으로 하자. 깨뜨릴 파(破)에 이리 랑(狼)자를 쓰는 거야. 그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재혁이었다. 왜 이렇게 새파란 색인데? 긴 퍼머머리를 등 뒤로 늘어뜨리고 볼이 붉은 어머니가 물었다. 어머니의 이름은 사라였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잖아, 하이텔 바탕화면. 아버지가 대답하고 웃었다. 너무 귀여워, 넌 어떻게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니? 머뭇거리다 자신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 어머니의 이름은 아영이었다. 옆에다 뭐라고 좀 써봐, 심심하잖아. 또다른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았다. 소녀다운 흥분이 동그란 안경 속 두 눈에 가득한 어머니의 이름은 정희였다. 그들은 모두 젊고 아름다웠으며, 아직 어떤 무리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들이 속한 유일한 공간은 불확실한 윤곽선들로 이루어진 그들 자신의 몸이었다. 아버지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얀 방 아래 빈 공간에 토닥토닥 글자들이 솟아올랐다.‘늑대의 이름은 파랑이다. 파랑은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파랑을 지킨다. 언젠가 우리가 우리를 잃고 세상에 휩쓸려 더러워지면, 파랑이 달려와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뭐가 이렇게 비장해? 어머니들이 한꺼번에 웃었고 아버지가 따라 웃었다. 그렇지만 파랑은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방 어딘가에 고여 있을 피웅덩이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파랑의 머리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파랑의 키가 너무 커서 어머니는 팔을 훌쩍 들어올려야 했다. 가늘게 떨리던 조그만 손이 이내 차분해지더니 파랑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보는 어머니의 손이었다.

어머니는 파랑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너를 계속 생각했어. 하지만 정말로 와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집이 이사하는 바람에 너를 잃어버렸어.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왜 이렇게 다쳤니? 정희는 어떻게 됐어? 재혁이랑 사라는? 파랑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피로 물든 파랑의 입가를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어머니의 소매에 두 어머니와 아버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묻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니의 입에서 튀어나온 비명이 공기를 반으로 찢어놓았다. 피로 흠뻑 젖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먼저 집 안에서 뛰어나왔고, 이어 얼굴의 오른쪽 반이 뜯겨나가 뼈가 허옇게 드러난 여자 하나가 긴 손톱이 달린 손을 쳐들고 복도로 걸어나왔다. 그들은 복도의 반대쪽 끝으로 뒷걸음질치는 어머니를 보았고, 이어 복도를 꽉 막은 채 서 있는 파랑을 보았다. 파랑은 빠르게 뛰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불과 몇초 만에 감지하는 그들의 재빠른 신경을 느꼈다.‘그것’들은 파랑을 두려워했지만 눈앞에 뛰어나온 늙은 남자와 여자는 달랐다. 파랑은 복도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커다란 몸을 쉽게 돌릴 수 없었다. 겨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악귀처럼 파랑에게 달려들었다. 파랑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그들은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파랑은 어머니가 치켜든 도끼날이 허공에서 번쩍, 빛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의 동그란 입에서 쏟아져나와 허공을 날아가는 소리들의 파편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서러운 울음소리가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파랑은 복도 끝에 몸이 반쯤 낀 채 쓰러져 있었다. 사방은 피바다였고, 도끼날로 머리가 으깨진 두 구의 시체가 파랑 앞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의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파랑의 어머니는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눈과 코와 입을 크게 벌리고 허리를 꺾은 채 마지막 힘을 쥐어짜 몸속의 모든 물기를 남김없이 토해내는 중이었다. 어머니의 옷은 새빨갛게 물들어 원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었다.

파랑은 네 다리에 힘을 넣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피웅덩이 속에 주저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든 어머니가 피에 젖은 파랑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어머니는 파랑을 껴안은 채 한참을 더 울었다. 어머니의 몸은 안에서부터 둘로 쪼개질 것 같았고, 온 세상은 그대로 눈물 속에 잠겨 흔적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파랑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 한방울이 어머니의 정수리 위로 뚝, 떨어졌다.

그날 밤하늘에는 흐린 별 몇개가 떴다. 도시의 짙은 매연 속에서 그것들은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어둠이 세상을 덮어버리자 어머니는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피투성이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어. 파랑의 귓가에 다가온 어머니의 입술은 그렇게 속삭였다.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야. 날 좀 데려다줄래?

파랑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물 때문에 따뜻해진 어머니의 몸이 상처입은 파랑의 몸을 이불처럼 덮었다. 파랑은 좁은 아파트계단을 뛰어내려 큰길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도끼를 든 어머니가 등에 올라타자 파랑의 몸은 더욱 거대해졌다. 멀리서는 작은 섬 하나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만한 크기였다. 세상을 가득 채운 죽은 사람들은 그들을 보지 못한 채 깜깜한 길 위를 걷고 있었다. 파랑은 새파란 네 다리를 움직여 어둠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얼음기 섞인 바람이 파랑의 커다란 등을 세차게 밀었다. 아파트 뒤쪽 어딘가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파랑도 어머니도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