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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

 

대담: 세계문학의 이념은 살아 있다

 

 

ⓒ이영균

ⓒ이영균

 

윤지관

문학평론가,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 저서로 『놋쇠하늘 아래서』 『리얼리즘의 옹호』, 역서로 『오만과 편견』 등이 있다.

 

임홍배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교수. 역서로 『루카치 미학』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주요 논문으로 「괴테의 세계문학론과 서구적 근대의 모험」 등이 있다.

 

 

때: 2007년 10월 20일 오전 10시

곳: 세교연구소 회의실

 

 

林洪培 통상적으로 세계문학이라고 하면 지역·민족문학의 산술적 총합 또는 인류 공통의 문화유산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문학사적으로 보면 민족적인 편향성을 넘어 근대 세계체제의 부상에 대응하는 문학운동 내지 기획의 의미를 지닙니다.

임홍배 이번호 『창작과비평』의 특집 대담으로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이란 주제를 마련했는데, 문학평론가이자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으로 계시는 윤지관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세계문학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릴 수 있으니까 독자들의 실감에 닿는 노벨문학상 얘기부터 해보죠. 얼마전에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었고 한국 작가의 수상을 기대했지만 아깝게 수상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국문학이 번역된 짧은 역사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 문학이 많이 세계화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노벨문학상 백년을 돌이켜보면 거의 반세기가 넘어서야 처음으로 비서구문학에서 수상자가 나올 만큼 서구중심적 경향을 보이다가, 70년대 이후로는 상대적으로 비서구 쪽에서도 여러 작가들이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이번에는 도리스 레씽(Doris Lessing)이라는 영국 작가가 받았죠?

 

노벨상 열망에 깔려 있는 의식구조

 

尹志寬 지역적으로 근대성이 발현하는 양상에 따라 그 민족의 독특한 성과들이 나오게 되고 그런 성과들이 모여서 세계문학을 형성하는 것이지, 세계문학의 정형이 이미 존재하고 그것에 도달하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윤지관 예, 금년 노벨문학상이 그렇게 되어서 문단에서나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실망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꼭 노벨상이란 걸 받아야 국민문학 내지 민족문학의 가치가 확보되는 건 아니겠지만, 역시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한국문학을 바라보자면 이런 국제적으로 인정된 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있느냐 없느냐가 흔히 준거가 되기도 합니다. 아까 소개하신 대로 제가 지금 한국문학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공공기관에서 일하다 보니까 이번에도 남달리 관심있게 보게 됐어요. 노벨문학상 수상이 비단 문학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함축성이 큰 문화적인 사건이긴 합니다만, 비록 못 받았더라도 해마다 관심을 모으는 고은(高銀) 시인이나 소설가 황석영(黃晳暎)을 비롯한 우리 작가들이 해외문단에서 주목받고 또 최종후보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한국문학이 세계문학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증거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임홍배 한국문학이 식민지시대, 분단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사의 현실을 천착한 성과를 인정받게 되고, 그 문학적 성취들이 한반도와 주변 세계에 대한 나름의 성찰을 통해 세계문학적 지평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윤지관 그렇습니다. 노벨문학상에 대한 우리의 기대나 반응이 좀 지나친 것 아니냐, 후진적인 것 아니냐 하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꼭 나쁘게만 볼 필요가 있나 싶어요. 이런 현상에는 우리말로 씌어진 창조적인 성과를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인정의 욕망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 자체를 민족주의적이라고 비난할 소지가 없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이 문화적 인정 욕구에도 먹고사는 일 못지않은 진정성 같은 것이 있다고 봅니다. 노벨상이 서구에서 주는 것이고 또 이번에 레씽도 그렇듯이 구미 작가들이 주로 수상하는, 유럽중심·서구중심적인 면이 있단 말이죠. 이런 가운데, 우리가 이제 먹고살 만한 처지가 되었다고 다가 아니고, 그들 못지않은 창조성을 지닌 민족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은 열망이 깔려 있다고 봐요.

사실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郞)가 수상했던 1994년 이래 10여년간 영국 작가 2명을 포함해서 수상자 대부분이 유럽 작가들입니다. 문학에서는 유럽중심주의가 더 강화되는 느낌마저 있어요. 우리로서는 이런 현상 자체를 냉정하게 읽어야지 일희일비할 필요야 없겠지요. 또 뒤집어보면 올해의 레씽이든 재작년의 해럴드 핀터(Harold Pinter)든 의미있는 작품활동을 벌써 수십년 전에 끝낸 작가들이 수상자로 선정되는 것은, 유럽문학에 이들 이후로 그만한 활력을 보여준 사례가 드물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지 않나 합니다. 오히려 세계문학이라는 구도에서 보자면 우리 문학을 비롯한 비서구권 문학의 활력이 기대되는 대목이지요.

 

괴테와 맑스, 그리고 세계화시대의 세계문학

 

임홍배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세계문학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 여러 견해와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간단히 개념을 짚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통상적으로 세계문학이라고 하면 지역·민족문학의 산술적 총합 또는 인류 공통의 문화유산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텐데요.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괴테는 민족적인 편향성을 넘어 적극적인 상호 소통과 교류를 추구하고 인적 교류와 연대까지도 도모해야 한다는 취지로 세계문학을 주창했죠. 근대 세계체제의 부상에 대응하는 새로운 문학운동 내지 기획으로 이해한 셈이지요.

그 조건으로 괴테는 자본주의 발달과 국가간 교역의 증대를 꼽았고요. 그런 측면에서는 나중에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말한 세계문학의 이념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요. 또한 괴테는 특정한 민족문학을 모델로 삼아서도 안된다고 하면서, 중심과 주변의 위계적 통합을 경계했습니다. 그러면서 세계사적 시야에서 당시 독일 현실을 탐구하는 창작실천을 통해 세계문학의 지평을 개척해나갔지요. 가령 서구 교양소설의 전범으로 알려진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구체제에서 시민사회로의 이행기라는 시대적 배경하에 한 인간이 어떻게 온전한 인격체로 성숙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는 시민적 가치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동체의 탐색을 주제로 삼고 있어요. 그리고 필생의 대작 『파우스트』는 괴테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인류사와 세계사’자체를 다룬 것이라 할 수 있죠.

윤지관 세계문학의 이념을 말하자면 역시 말씀하신 괴테의 뜻부터 되새겨볼 필요가 있겠는데…… 이런 질문이 먼저 떠올라요. 노벨상 얘기를 할 때도 항용 따라나오는 것인데, 한국문학이 과연 세계문학인가, 세계문학으로 인정받을 만한 성취가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한국도 세계의 일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문학도 세계문학이다 하면 간단하지만, 문학의 수준이나 혹은 어떤 목표로서의 세계문학에 얼마나 다가서 있는가 하고 물을 때는 달라지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서 괴테의 세계문학 개념이 지금 다시 얘기될 수 있는 근거랄까 당위성이 있겠어요. 세계화 혹은 지구화라고 통칭되는 세계 자본주의 발전상의 국면과 맞물려서 서구 문학이론에서도 근년에 세계문학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던 거구요. 세계화시대라고 해서, 전지구적으로 대량 유포되는 베스트쎌러들, 해리포터 씨리즈라든가 『연금술사』 『다빈치코드』 같은 작품들이 저절로 세계문학이 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괴테의 시대에 지구화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문제의 단초 같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괴테나 맑스의 세계문학 이념이 가지는 현재성이 있겠습니다.

임홍배 그런데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에 자본주의의 전일적인 지배라는 새로운 국면의 세계화시대를 맞아, 괴테가 말한 세계문학이 현실에서는 부정적인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그러니까 자본의 논리에 편승한 문화상품의 세계적 유통을 부추기는 양상으로 쏠릴 가능성이 전에 없이 커진 것 또한 사실이에요. 이런 추세에 대응하는 우리 나름의 문학을 추구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어요. 민족적인 것에만 집착해서도 곤란하지만, 추상적인 세계시민주의를 앞세우는 것도 작금의 세계화에 대한 대응논리로는 공허해 보입니다. 가령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울리히 벡(U. Beck) 같은 사회과학자들이 얘기하는 ‘세계사회’론도 그런 맹점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세계화의 대세가 지구적 차원의 양극화와 국지적 차원의 국가간 갈등을 격화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민족 내지 국민국가가 중요한 준거가 되지 않을 수 없지요.

윤지관 그렇습니다. 세계화와 민족국가의 상호관계가 중요하듯이, 세계문학을 얘기할 때 민족문학이나 국민문학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세계문학이 전체 민족문학의 총합이라는 점도 있어서 그렇겠지만, 민족문학 자체가 세계문학과의 관계 속에서 이룩된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문학에서의 민족문학론도 그렇구요. 크게는 근대성의 문제, 근대라는 전지구적인 문제에 지역적으로 혹은 민족적으로 대응하는 가운데 민족문학 혹은 국민문학이 발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민족문학의 시대가 가고 세계문학의 시대가 온다는 발언을 괴테가 했고, 또 그 20년 후쯤에 맑스도 『공산당선언』에서 같은 취지의 얘기를 했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 직후 유럽에 극도의 민족주의가 팽배하면서 그런 세계문학적인 기획은 크게 후퇴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괴테의 발언도 액면 그대로가 아니라 세계문학의 이념에 비추어 민족문학의 내용을 제대로 채워야 한다는 취지가 있었던 것 같고, 또 실은 당시보다는, 말하자면 그런 기획이 과도한 민족주의 때문에 불발로 끝난 제국주의시대보다는 지구화가 본격화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더 적실성이 있는 그런 이념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임홍배 사실 괴테 당대의 유럽 정세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혁명과 나뽈레옹전쟁의 여파로 국민국가들 사이의 치열한 쟁패전이 벌어지면서 민족주의가 발호하고, 전후 유럽질서의 복고적 보수화와 제국주의적 팽창이 그런 갈등을 봉합하는 형국이었죠. 그러니까 당시에도 온전한 뜻의 세계문학은 국수적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모두 넘어서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던 거죠.

윤지관 괴테 자신도 중국이나 페르시아 문학 등 외국문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기본적으로 타민족의 문화나 타자에 대한 인정, 개방성, 관용, 대화의 정신 등을 세계문학 이념의 요건으로 제시하기도 했어요. 나뽈레옹전쟁 이후에 일시적으로 팽배하던 국제주의 흐름과도 연관되는데, 국제적인 조건 면에서는 1990년대 탈냉전 기류 속에서 서구에서 다시 세계문학 논의가 나오기 시작한 것과 아주 흥미롭게 맞아떨어져요. 그런데 괴테한테도 그런 요소가 있었지만 세계문학이란 것이 때로는 유럽문학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서는 서구중심의 정전으로 고착되어온 면이 컸잖습니까? 우리 독서계에서도 세계문학 하면 서구 명작이고, 비서구권은 가물에 콩 나듯 하고, 한국문학은 거기 끼지도 못하고 따로 취급되어왔고 말이죠.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탈식민주의의 이론적인 영향도 있고 해서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새로 그려야 한다는 논의가 서구 쪽에서 나오고 있어요. 괴테의 이념도 서구문학의 보편성 논리로 왜곡되어온 부분은 그것대로 비판하고, 애초의 이념은 살려내는 그런 태도가 중요하겠습니다.

임홍배 우리 문학에서 보면 바로 그런 비판적 문제의식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되살려서 진전시킨 경우가 지난 40여년 동안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화두로 견지해온 백낙청(白樂晴)의 비평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간의 논의맥락을 여기서 두루 살피긴 어렵겠습니다만, 90년대에 들어와서 ‘민족문학의 새 단계’를 거론하고 특히 근년에 ‘지구화시대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강조하는 대목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냉전체제 붕괴와 더불어 자본과 힘의 논리가 주도하는 세계화의 파고에 대응하면서, 동북아시아를 한 축으로 전개되는 세계정세의 흐름과 분단체제 극복의 과제가 더욱 긴밀하게 맞물리는 양상을 직시할 필요가 있겠지요. 거칠게 말해 분단체제 극복이 그냥 대세를 추종하는 통일에 안주하자는 게 아니라 남과 북에서 지금보다 나은 삶을 일구는 방식으로 통일을 하자는 것이라면, 그동안 한반도 질서를 규정해온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에도 일정한 변화를 동반해야만 가능하겠지요. 지금 한반도 현실에서 민족적인 과제와 세계문학의 이념을 함께 사고할 필요성은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윤지관 워낙 한국문학이든 외국문학이든 민중적인 혹은 제3세계적인 시각에서 보자는 민족문학론의 전제 자체가 세계문학의 지향이나 이념을 함축하고 있었던 셈이지만, 역시 동구권 몰락과 냉전구조 해체로 대변되는 1990년 무렵이 세계문학 논의에서도 한 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크게 보면 장기적인 흐름으로서의 세계화가 이 시기부터 강하게 부각되면서, 또 분단체제가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민족문학 논의에 새로운 모색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일부 탈근대론자들이 민족 범주의 해체나 소멸을 말하고는 있지만, 기실 세계화 국면에서 가령 동구권의 경우가 그렇듯이 민족이 새로운 중요성을 가지게 된 경우도 있기 때문에, 복합적으로 사고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세계화가 실은 미국문화 중심의 획일성을 강요하면서 다문화주의의 외양을 띠고 있는 양상이 세계문학의 전열 자체에 위기를 불러오고 있고, 민족문학이 세계문학적인 이념에서 자양을 얻기 위해서는 세계체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 백낙청 비평의 문제의식이었던 것 같아요. 원래 제3세계적 시각이라는 것이 세계를 셋으로 나누어서 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자는 문제의식이기 때문에, 민족의 위기란 것도 결국 세계체제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세계문학의 이념으로 말하자면, 이 세계체제에 대응하는 그런 문학을 통해서, 우리 민족문학으로 본다면 세계체제와 맺어져 있는 분단체제에 대한 깊이있는 해석을 통해서, 여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남미문학의 세계문학화와 그 한계

 

임홍배 그럼 이제 구체적인 창작의 성과를 놓고 얘기해보기로 하지요. 마침 제3세계 얘기를 하셨는데, 20세기 문학사에서 중남미문학은 민족적인 전통에 기반을 두면서도 다른 언어권과 두루 소통한 대표적 사례로 흔히 거론됩니다. 가령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보르헤스의 경우가 그런 맥락에서 언급되는데, 문외한인 제 입장에서 보면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고 오히려 서구의 해체론적 이론 취향에 맞는 작가로 각광받은 게 아닌가 싶어요. 2차대전 이전 시기에 이미 리얼리즘 소설의 재현론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선행 텍스트에 대한 ‘주석’으로 텍스트를 대체하는 ‘픽션들’을 쓰기 시작한 것도 전후의 서구이론과 코드가 통하는 것 같아요. 반면에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유럽에서 생명력이 소진된 리얼리즘을 중남미적인 현실에서 나온 ‘마술적’상상력과 결합해서 발전시킨 경우로 평가받는 것 같습니다만…… 중남미문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윤지관 세계문학의 이념이 이 시대에 새로 모색되는 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서구중심주의 탈피 혹은 극복의 문제겠지요. 노벨문학상도 그랬지만, 비서구문학 가운데 서구 중심부에서 본격적으로 인정받은 게 중남미문학이고, 70년대 이후에는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바꾸는 데 중남미문학의 활력이 작용한 면이 컸습니다. 몇년 전 우리나라에도 왔다간 까싸노바(Pascale Casanova)가 『세계문인공화국』(The World Republic of Letters)이라는 책에서 세계문학을 민족문학 사이의 헤게모니 싸움의 장으로 보는 관점을 피력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런 세계문학의 장이란 틀에서도 중남미문학은 큰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께스를 좀 구분해서 말씀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도 그런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헤게모니 다툼이란 것이 그렇듯이, 주류측에 받아들여지면서 동시에 먹혀버리는 면도 있는데, 중남미문학도 전반적으로는 그런 요소가 있는 것 같아요. 가르시아 마르께스로 대변되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성과도, 조금 단순히 말하면 그 ‘마술’이란 것이 묘하게 현실을 신비화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거죠. 『백년 동안의 고독』은 서구 양식과 남미의 서사양식, 여기에 꼴롬비아 특유의 역사가 결합된 성과라 하겠는데, 서양인의 눈으로 보자면 그 ‘마술’이란 것에는 다름아닌 서양의 새로운 근대문명에 대해서 제3세계인이 느끼는 신기함과 환호 같은 것이 섞여 있단 말이죠. 비유럽권에서 일어나는 근대화과정에서 분명 그런 근대성의 요소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반면에 정치적 폭력이나 어두움, 악마적인 요소 같은 것들도 부과되기 마련인데, 그의 작품에는 이런 것들은 아주 추상화되거나 뒤로 숨고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 승하다 보니까, 어떻게 보면 서양에 면죄부를 주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중남미문학이 다른 지역의 좀더 리얼리스틱한 작품들보다 미국이나 서구에 더 쉽게 수용된 데는 이런 것들이 작용했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임홍배 그러니까 마술적 효과가 먹혀든 데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한 면도 있다고 보시는 거군요. 한가지 덧붙이자면 서구 독자들이 모더니즘 시기의 다양한 형식실험을 거치면서 습득한 학습효과 덕분에 수용이 용이해진 측면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서구문학에서 현실을 불가사의하고 기괴한 공포의 체험으로 인지하는 상상력이 적어도 1차대전 이후로는 그리 생소하지 않게 되었고, 가르시아 마르께스 자신도 그런 작품들의 영향을 언급한 적이 있지요. 그렇긴 하지만 가령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처럼‘라틴아메리카의 고독’에 더이상 매달리지 말고 서구적 보편성을 지향하자고 주장한 경우와는 달리,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문학에는 역시 서구 독자의 눈에는 낯선 충격의 체험 같은 것이 독특한 형태로 구현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윤지관 얼마전 칠레 출신의 미국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이 희곡집 출간을 계기로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와 대담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제가 그의 장편소설 『체 게바라의 빙산』을 거론하면서 “당신의 작품에도 마술적 리얼리즘적인 성격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마술’보다는 ‘리얼리티’에 파고드는 정신이 더 느껴져서 그냥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기가 좀 걸린다”고 했더니, 도르프만 자신도 마술적 리얼리즘은 싫다는 거예요. 그런 수법을 활용하되 어떻게 당대 현실의 현실됨을 파고드느냐 하는, ‘마술’보다‘리얼리즘’에 집중하는 것이 근대성에 대한 탐색으로서나 작품적 성취로서나 더 소중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중남미뿐 아니라 예컨대 인도의 루슈디(S. Rushdie)같이 서양 주류문단에서 활동하는 제3세계 작가들이 흔히 쓰는 기법인데, 루슈디는 영국에서 부커상을 받는 등 문학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파키스탄이나 인도의 상황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낸 그 지역 작가들의 작품은 서구사회에서 거의 대접도 못 받고 유통이 안되고 있거든요. 진정한 세계문학이 그런 ‘마술성’으로 치장된, 서구의 눈으로 수용되기 쉬운 문학만이 아니라 비서구적 형태일지라도 각 지역의 척박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각 민족의 문학들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면, 중남미 형태의 세계문학 진입은 한편으로는 기존 세계문학 관념에 대한 혁신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동화인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문학에서 서구 주류담론의 결을 거스르거나 따로 이루어진 리얼리즘문학 논의와 문제의식이 세계문학을 새로 구성하는 데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임홍배 그 말씀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리얼리즘에도 그 어떤 전범이 있는 게 아니라 현실을 보는 눈을 새롭고 풍요롭게 해주는 부단한 자기쇄신이 요구된다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서구의 경우도 그 점은 마찬가지인데, 가령 토마스 만(Thomas Mann)도 그래요. 최근까지도 그가 통상적인 의미의 리얼리스트라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그에 맞서 아예 모더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서구근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세례를 통해 단련된 리얼리스트라고 봐야죠. 토마스 만은 바그너·니체·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런 지적 자양분에 힘입어 몰락해가는 서구 시민사회 내부의 가치붕괴를 이전 시대의 리얼리스트들과는 다른 감각으로 예리하게 통찰할 수 있었던 것이죠.

흔히 토마스 만과 함께 논란이 되는 카프카의 경우도 그냥 모더니스트로 단정하고 넘어갈 사안은 아닙니다. 서구의 주변부이자 합스부르크제국의 속국인 체코에서, 게다가 유대인이면서 독일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자의식의 표현으로 카프카는 자신의 글쓰기를 ‘작은 문학’이라 일컬었어요. 말하자면 서구 중심부의 거대서사로는 담아낼 수 없는 몇겹의 억압구조를 포착하기 위해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한 셈이지요. 그렇게 해서 서구 자본주의사회가 봉착한 위기의식, 가령 사물화와 소외의 문제를 묘파하는 세계문학적 지평을 획득하게 됩니다.

 

서구 모더니즘 논의의 수용 양상

 

윤지관 모더니즘은 시대사조이기도 하고 문학적 특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세계문학의 차원에서는 20세기 들어와서 가장 광범하게 추구된 세계문학운동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발흥해 20세기 초에 폭발적인 성취를 거쳐 세계 전반으로 파급되면서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을 갱신시키기도 하고 각 지역마다 독특한 모더니즘의 성과를 낳게 했으니까요.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째로 모더니즘으로 귀속시키는 것은 어폐가 있겠지만 그 한 예가 될 수 있겠고요. 말씀하신 대로 토마스 만이나 카프카도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으면서 좀더 리얼리스틱해지는 면모를 보였다면, 제3세계의 뛰어난 성취들도 크든 작든 그런 경로를 거칠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합니다. 저는 모더니즘의 세계문학적인 의미를 장편에서 교양소설이 쇠퇴해가는 현상과 관련해서 이해하고 싶은데요. 서구문학이 19세기에 거둔 성과였고 또 세계적으로 여파를 가장 널리 미친 것이 바로 교양소설이라는 판단에서입니다. 한 사회공동체 속의 개인이 모험이나 실패와 좌절을 겪고 그걸 통해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인식을 획득한다는 교양소설적인 틀은 그 자체가 서구적인 근대화의 산물이고 자본주의의 역동성이 문학에 구현된 대표적인 장르이기 때문에, 서구뿐만 아니라 제3세계 등 비서구권의 근대문학에서 되풀이해 시도되고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는 서구문학의 어떤 보편적 성격이 여기에 드러났던 셈입니다. 모레띠(Franco Moretti)식으로 말하면 교양소설은 ‘근대성의 상징형식’인 거죠.

모더니즘은 이런 교양소설적인 통합의 가능성이 서구사회에서 소실되어가면서 생긴 위기를 돌파하려는 한 실험이었는데, 모더니즘의 진짜 힘은 서구 내에서도 제3지대에 속하는 작가들, 가령 더블린의 제임스 조이스나 베케트, 체코의 카프카 같은 작가들에게서 나왔고, 당시에 살아 있던 변혁이념과도 결합되면서 모더니즘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카프카의 ‘작은 문학’ 언급을 소수문학의 저항성과 바로 연결시키는 들뢰즈식의 관점은 너무 과한 것 같지만 말이죠. 모더니즘도 이런 맥락 속에서 그것이 가령 우리와 같은 구체적인 국지에서 어떻게 발현되나를 봐야지, 서구에서 한번 했던 양식과 내용을 그대로 보편성의 틀로 흉내낸다고 무슨 세계문학이 나오겠습니까? “너희 모더니즘이 그런 거냐? 우리는 이런 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성과를 내려면 역시 우리의 구체적 현실이 뭐냐, 분단이 뭐냐 이런 것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태도가 중요하겠습니다.

임홍배 예, 교양소설의 역사적 변천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괴테만 해도 본격적인 근대화 초기에는 19세기 사회소설로의 이행을 예고하는 서사적 통합의 가능성을 강하게 드러내지만, 19세기로 오면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분열상을 탐색하는 쪽으로 기울고, 그런 의미에서 안티교양소설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모더니즘 내지 아방가르드 문예운동 역시 편차가 다양하죠. 1차대전을 겪고 나서 서구의 몰락을 전망하는 문명비관론이 비등하고, 서구적인 근대에 대한 절망과 재생에의 욕구가 교차하는 가운데 파시즘과 또 한차례의 제국주의 전쟁을 유럽 본토에서 치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문학의 핵심적 성취라 할 수 있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믿음 같은 게 거덜나지요. 그런 맥락에서 다다(dada)처럼 아예 문학개념 자체를 파괴하는 데 골몰한 실험, 현실의 인과적 합리성을 부정하는 초현실주의 등이 나왔고, 그런가 하면 이딸리아 미래파처럼 파시즘의 선봉을 자처한 엉뚱한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문학에서 모더니즘은 식민지시대의 이상(李箱)이나 산업화시대의 조세희(趙世熙)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가 처한 현실을 통해 굴절 변형되면서 다른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아요.

윤지관 소위 모더니스트들, 가령 이상이나 조세희 같은 독특한 성과들에 대한 임선생의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예를 들어 카프카와 만의 대비 속에서 루카치가 얘기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 혹은 서로 방향이 다른 경향성의 충돌이라는 문제의식 아래서 한국 근대문학사를 보자면, 한국 근대문학은 루카치가 주목한 바로 그 시기, 즉 모더니즘 발흥기에 근대문학으로 형성되었고 그 속에 모더니즘 자체의 성과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말하자면 리얼리즘을 중심으로 해서 이룩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염상섭·현진건·채만식·이기영 등으로 이어지는 전통이 아무래도 식민지문학의 주류를 이루었고, 해방 이후에도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성과들이 대개 거기서 나왔던 거구요. 역사적으로 보면 서구와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였던 거죠. 세계문학 차원에서도 그러면 빨리 서구를 쫓아가야지 뭐냐, 이렇게 발전론적으로 볼 문제가 아닙니다. 지역적으로 근대성이 발현하는 양상에 따라서 그 민족의 독특한 문학적 성과들이 나오게 되고 그런 성과들이 모여서 세계문학을 형성하는 것이지, 세계문학의 정형이 이미 존재하고 그것에 도달하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임홍배 그런 측면에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접합점은 역사적으로 불균등하게 진행되는 개별 민족문학 내지 국민문학의 성취를 바탕으로 따져볼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문학과 하루끼 현상의 문제점

 

이제 동아시아문학 얘기를 해보죠. 근래에 일본과 중국의 현역 작가들 작품이 한국에는 물론 서구에도 꽤 많이 소개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일본의 경우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같은 작가는 일본 내에서 베스트쎌러 작가로 각광받고 있고, 한국 작가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구미에서도 잘 읽히고 있는데다 이번에 언론에서는 노벨상 후보로도 거명되던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윤지관 하루끼는 실제로나 상징적으로나 동아시아문학뿐 아니라 세계문학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작가인데, 그 전에 동아시아문학 전반에 대해서 좀 짚고 싶어요. 전체적으로 동아시아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까지는 미미했고, 같은 제3세계권이라 하더라도 중남미나 아프리카 쪽과 달리 아시아권의 작가들은 각자의 민족문학으로서의 성취와는 무관하게 세계문학계에서 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언어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예컨대 중남미의 경우에는 대개 스페인어 사용권이라는 잇점이 있고,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서구의 식민지배를 겪으면서 프랑스어나 영어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많기 때문에 주류 서구문학권에 진입하기가 쉬웠다고 볼 수 있는데, 동아시아권은 그럴 수 없었던 거지요. 고유의 언어를 지켜냈다는 장점이 오히려 세계문학에서 훨씬 주변적인 위치에 몰리게 했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겠죠. 일본문학은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권이어도 어떤 면에서는 특수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문학과 관련지어서 민족문학을 얘기할 때 제3세계적인 시각을 강조해왔고 또 제3세계권 문학과의 연대나 유사성을 말하기도 했는데, 일본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하루끼 문학의 경우에도 대단히 서구화·미국화됐다고 할까, 서구중심의 세계질서에 별 저항 없이 부응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성과로 보이구요. 지금의 일본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얘기하다 보면 지금 세계화가 뭐고 세계문학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첨예하게 부딪칠 법해요.

임홍배 하루끼는 서양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모티프와 감각이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문제는 과연 자국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뒷받침되느냐, 또 그것이 외국 독자들에게도 설득력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최근의 대표작 『해변의 카프카』를 보면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가령 태평양전쟁을 일본국민 공동의 역사적 책임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스스로를 전쟁의 피해자로만 기억하고 싶어하는, 그렇지만 까놓고 드러낼 수는 없는 보통 사람들의 집단적 무의식을 자극하고,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 자체도 탈역사적으로 신비화하죠. 60년대 학생운동 역시 나약한 개인에게 치명적 상처만 남긴 집단적 억압으로 간단히 처리되고, 이 모든 역사적 부채를 마치 부당한 금기처럼 깨뜨리는 자유만 용인됩니다. 그래서 코모리 요오이찌(小森陽一) 같은 평론가는 “역사의 기억을 소거시키는 극히 위험한 전향”이라고 평한 거 아닙니까? 이런 탈역사적 상상력이 세련된 감각주의와 결합되면서 한국과 중국에서도 많이 읽힌 게 아닌가 싶어요.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80년대에 대한 반작용과 맞물리고, 아마 중국에서는 문혁에 넌더리라도 내는 윗세대와 달리 아예 정치 일반에 무관심해진 신세대의 감각에 부응한 게 아닌가 짐작됩니다만.

윤지관 그래도 『해변의 카프카』는 『노르웨이의 숲』(국내에는 『상실의 시대』로 번역)처럼 감질나는 것보다는 역사현실에 한번 대들어보겠다는 뜻도 있어 보이던데, 역시 그냥 넘어가시지 않는군요.(웃음) 저도 읽었지만 심하게 말하면 흉내만 낸 것 같아요. 하루끼만 보고 일본문학 전체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소위 하루끼현상이라는 것을 무시할 순 없을 듯합니다. 하루끼를 비롯한 80년대 이후 세대가 이루어온 일본문학의 흐름을 보면, 그것이 세계문학이라고 할 정도로 일본의 현재를 깊이있게 묘사하고 그 지역적 내용을 보편적 주제로 승화시킨 성과들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습니다. 연전에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것도 기본적으로는 특히 80년대 이후의 일본문학의 변화에 많이 기댄 것이었지요. 물론 세계적 현상으로서의 지구화라든지 대중문화나 대중매체가 중심이 되면서 문자언어가 주도권을 상실했다든지 하는 탈근대적 변화가 그 근거이겠습니다만, 일본문학 내적으로도 근거를 두고 있어요. 그전에 오오에 켄자부로오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만엔 원년의 풋볼』같이 일본의 역사, 사회현실, 그와 관련된 일본인들의 심리적 억압 같은 문제들을 돌파하고자 하는, 말하자면 진지한 문학이 밀려나고, 가볍고 또 표피적인 감상이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작품들이 일본문학의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다는 점 때문에, 문학이 사회변화에 영향을 주던 시대는 끝났다는 식이 된 거지요.

하루끼는 전공투를 경험한 세대다 보니까 변혁운동이 실종된 시대의 상실감을 대변한다느니 새로운 감각이니 하면서 우리 90년대 작가들한테 특히 영향을 미친 것 같은데, 하루끼도 그렇고 무라까미 류우(村上龍)도 그렇고, 표피성이 강해서, 가령 괴테나 맑스적인 의미에서 세계문학, 세계화에 대항하는 몇 안되는 거점으로서의 세계문학, 그런 저항 가운데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과 사회체제를 움직이는 근본원리에 대한 해석, 이런 것에는 미달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젊은 작가들을 보면 하루끼에게서 무슨 대안을 찾던 데서는 벗어난 것 같아 다행인데, 저는 또 이런 국면에서 하루끼가 덜컥 노벨문학상이라도 타버리면 이건 참 난리도 아니다, 우리도 못 탔지만 하루끼도 안된 것이 그나마 세계문학을 위해서나 괴테를 위해서 다행이다 했습니다.(웃음)

 

격변의 소용돌이에서 용틀임하는 중국문학

 

임홍배 근래에 중국 작가들도 국내에 많이 소개됐지요. 위화(余華), 모옌(莫言), 쑤퉁(蘇童) 같은 작가들이 중국 안팎에서 주목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윤지관 중국문학을 잘 알지 못하는 입장이니까 길게 얘기하면 손해일 것 같구요,(웃음) 우선은 동아시아라는 틀에서 세계문학의 이념을 이야기해보는 것도 필요한 듯합니다. 동아시아를 하나의 문화적 카테고리로 보면 거기에 미국화되어가는 세계화 현상에 맞서는 어떤 동아시아적 가치지향이 문학에서 표출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한·중·일의 문학적인 흐름을 서로 파악하고 교류·연대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한·중·일 3국을 비교할 때 일종의 문학적인 시차 같은 것이 먼저 떠올라요. 예컨대 일본이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문화형태, 일종의 후기자본주의적 문화논리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성하고 거기에 휩쓸려가는 형국이라면, 한국은 어느정도 일본식 표피문화의 침투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문학에서는 현실참여적인 정신도 살아 있고 세계화의 격랑을 겪으면서 뒤흔들리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새로운 문학적 대응을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에 비하면 중국문학의 경우, 중국의 역사 같은 것들을 소재로 한 젊은 작가들, 특히 80년대에 등단해서 그후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위화나 쑤퉁, 모옌 등 소위 선봉파(先鋒派) 작가들의 작품에는, 중국문학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으되 현실에 대한 거의 자연주의적인 묘사에 가까운, 크게 보아 리얼리즘적인 접근이 상당히 살아 있어요. 이런 3국간의 차이를 세계문학이라는 관점에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가 관건일 것 같군요.

임홍배 우리 문학이 서구에 소개되는 과정에서도 우리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폭넓고 깊게 담아낸 고은이나 황석영의 작품이 우선 주목을 받지요. 바깥에 알려진 중국문학 역시 중국현대사의 배경이 짙게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活着)』 같은 작품은 나약한 개인의 삶에 각인된 중국현대사의 축약판이라 할 만한데, 바로 그것이 소설로는 맹점이 아닌가 싶어요. 개인사의 연대기에 역사적 사건들을 에피소드로 배치하는 이야기의 흐름과 결이 좀 심심하고 성기다는 느낌이랄까요. 중국을 모르는 서양 독자들한테 최소한의 역사적 상식은 제공해줄지 몰라도 소설 자체의 성취로는, 한국 독자들의 성에 차기 어렵겠다 싶어요. 그렇다면 중국과 한국의 문학적 소통이 세계문학의 경지를 내다볼 수 없음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적 가치의 공유를 뒷받침하기에도 미달이지요. 물론 한 작품의 사례를 일반화해선 안되지만, 한·중·일의 문학소통을 얘기할 때는 가령 한류열풍을 얘기할 때와는 다른 차원의 작품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윤지관 전 좀 다르게 읽었는데요, 요즘 우리한테도 소개되고 서양에도 꽤 알려진 중국 작가들을 보면, 우선 역사·전통의식이 살아 있어요. 최근 중국문학의 변화랄까 개혁에서 오는 창조적 성과라 할 수 있죠. 중국문학이 그동안 사회주의체제 속에서 위축되었다면 위축되었던 창작력이 앞으로 왕성하게 살아날 징후 같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모더니즘의 성과를 가능케 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앤더슨(P. Anderson)의 분석을 원용하자면, “중국 현대문학에는 과거의 전통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이 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여기에 변화 내지 개혁의 전망이 뒷받침된 어떤 결합국면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이런 추정도 됩니다. 이에 비해서 일본의 경우에는 그런 가능성이 퇴색하고 희미해진 단계가 아닌가, 역사적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표피적 감각이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많이는 못 읽었지만 쑤퉁이라는 작가가 상당히 괜찮은 것 같고, 위화는 『허삼관매혈기(許三觀賣血記)』를 가장 재밌게 봤어요. 염상섭과 김유정을 섞어놓으면 그런 유장하고 심각하면서도 유쾌한 역사소설이 나올까 싶었습니다. 여기 비하면 저 역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이 처진다고 느껴요. 쑤퉁은 자연주의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예컨대 운명론이나 결정론적인 인간의 조건, 어쩔 수 없이 역사의 덫에 갇혀서 벗어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을 그려내죠. 당대 중국사회의 가치관 변화를 담은 「이혼지침서(離婚指南)」 같은 중편에는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같은 분위기도 나구요. 중국문학의 가능성을 짐작하다 보면, 요즘 우리 문학이 너무 호흡이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참여 문학은 이제는 시효가 지났다느니 리얼리즘은 구문이라느니 하는 소리가 많이 들리는데, 좀 시야를 넓혔으면 싶어요.

 

ⓒ이영균

ⓒ이영균

 

임홍배 제가 『허삼관매혈기』는 아직 못 읽어서 앞에서 한 얘기를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웃음) 어떻든 한 작가의 작품에 서로 다른 평가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중국문학이 커다란 실험의 와중에 있다는 하나의 징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모옌에게서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는데요, 가령 『술의 나라(酒國)』를 보면 ‘식탐’을 아이를 잡아먹는 알레고리로 변환해서 개혁개방시대의 들끓는 욕망을 그로테스크하게 엮어가는데, 일견 섬뜩한 얘기를 섬뜩하지 않게, 혹은 그 역으로 풀어가는 블랙 유머가 특이합니다. 제 느낌에는 중국의 전통서사적 요소가 없지 않지만 그런 요소와 길항하는 현대적 실험정신이 훨씬 승한 작품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혼혈양식을 어떻게 향토색 짙은 『홍까오량 가족(紅高粱家族)』의 작가가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구요. 이런 양식의 단절과 혼합이 낯설지 않을 만큼 과연 지금 중국사회가 격심한 혼돈의 와중에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홍콩식 누아르영화를 의식한 것인지 잘 분간되지 않더군요.

쑤퉁의 작품은 또 다른데, 중국의 근대와 전근대가 착종된 양상이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가령 「처첩성군(妻妾成群)」 같은 작품은 축첩제도가 봉건시대의 유물로 남아 있던 개화기 초입의 이야기인데, 이런 작품이 지금 중국에서 당대소설로 읽히는 현실적 근거가 무엇인지 아리송해요. 그런가 하면 「이혼지침서」는 입쎈의 『인형의 집』에 나오는 여주인공 ‘노라’를 현대 중국의 남성으로 치환한 이본(異本)인 셈이죠. 입쎈의 노라와는 딴판으로 허영과 치기로만 뭉쳐진 남성인물을 꼴통 가부장으로 희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역시 ‘희화’의 양식이 허용하는 만큼의 세태소설에 그쳤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 문학에서 가령 채만식의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와 비교해도 소품이지요.

윤지관 그 작품에는 그런 소품적인 면이 있죠. 그렇지만 쑤퉁의 『쌀(米)』 같은 장편을 보면 거친 듯하면서 인간의 욕망과 복합심리를 파고드는 힘이 또 만만찮거든요. 채만식과 견주어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저도 이걸 읽으면서 미두장을 배경으로 한 『탁류』(1937)가 언뜻 떠오르더군요. 인간군상을 역사현실 속에서 그려내는 도도한 필치에서 비슷하고 둘 다 대단한 풍자가지만, 쑤퉁의 뚝심이랄까 인간의 악마성 같은 것을 끝간 데까지 밀고나가는 집요함이 당대 중국문학의 힘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문제는 우리 사십대 작가들한테서 이런 추궁력을 얼마나 자주 목격할 수 있나 하는 거죠.

 

중심부의 한계를 돌파해낼 아시아문학의 활력

 

바로 옆에서 치고나오는 중국문학도 그렇고, 또 우리하고 역사의 악연이 얽혀 있는 베트남문학도 같은 맥락에서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요. 베트남문학도 번역된 것이 몇 작품 안되니까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바오닌(Bao Ninh)이나 반레(Van Lê)의 소설들, 또 최근에 응우옌옥뜨(Nguyên Ngo.c Tu)라는 젊은 작가의 『끝없는 벌판』이라는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반레의 경우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체취가 많이 나서 별 재미를 못 느꼈지만, 바오닌만 하더라도 전쟁의 심리적인 영향을 밀도있게 파고들고 근대를 자기 삶과 관련지어서, 또 베트남의 현실과 관련지어서 형상화해내는 힘이 있어요. 응우옌옥뜨 같은 신세대 작가에게는 현재의 베트남 현실, 그 현실의 척박함을 시적으로 형상화해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고요. 그런 점에서 베트남문학의 활력이 감지되는데, 마치 우리가 70년대 전후에 겪고 대응했던 국면들이 시기를 달리해서 살아나고 있는 면이 있거든요.

이런 아시아문학의 정황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문학이 시대적 국면이나 상황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발현하는 방식을 통괄해내고 그것을 세계문학 형성의 새로운 힘으로 엮어내는 시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민족문학 얘기를 하면서 중심부에서 희미해진 역사의식이 생생하게 일깨워지는 주변부적 상황을 말했다면, 지구화 속에서 지역들 사이의 이런 대비나 중심부의 한계를 돌파해내는 주변부문학의 힘 같은 것들이 새로운 세계문학 지형도에서 응당 자리잡아야 할 것입니다.

임홍배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이나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같은 작품을 보면 소년기에 대미항전에 참전했던 투사답게 혁명적 낙관주의가 강하게 느껴지고, 그에 비해 고단한 유민생활의 단면을 그린 『끝없는 벌판』은 말씀하신 대로 서정적 색채가 짙죠. 지금 베트남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을 담은 당대소설이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우리 문학과의 시차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일종의 환경결정론 내지 진화론적 발상에 빠질 우려가 있지 않나 해요. 예컨대 중국처럼 과도기의 격변을 겪고 있는 사회에서는 서사의 활력이 살아나고, 반면 후기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선 나라에서는 서사의 활력이 감퇴한다는 식의 도식이죠. 최근 우리 문학에 대해서도 사회가 정체되니까 소설이 위축된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니지 않나 싶어요.

윤지관 “베트남이나 중국 소설이 우리 6, 70년대식의 리얼리즘이다, 그런데 일본문학은 그런 단계를 진작 지나서 포스트모던한 대중소설로 간다, 그리고 한국은 그 중간 어디쯤이다” 이런 식으로 단순화한다면 좀 지나치겠지만, 일면의 진실은 있다고 보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우리한테 최근 소개되고 있는 것들만 봐도 그렇잖습니까? 노골적으로 감상적인 혹은 거의 순정소설적인 작품들이 마구 들어오고 있고, 여기에는 물론 현대 도시 젊은이들의 사고방식, 느낌, 생활방식, 스타일, 패션 등이 화려하게 반영되어 있죠. 일본문학에 그런 대중문학만 있는 것은 아니고 재일조선인 작가라든가 사회의식을 가진 작가들도 없진 않습니다만, 하여간 결국 이렇게 단계적으로 세계화 혹은 자본주의가 진행되는 데 따라 문학의 의미가 궁극에는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겠죠.

이것은 상당히 크고도 심각한 주제인데요, 자본주의체제 및 그것의 성숙 혹은 확산과, 우리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창조성의 영역이나 언어를 통한 창조적인 공간의 보장이나 형성이 모순적으로 대립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 가운데서 문학은 위기에 처해 있고, 또 항상 위기 속에 있을 테지요. 다만 지구화의 경향 속에서 모든 것이 전일화된다고 해도, 예컨대 중국이나 또 베트남처럼 제3세계의 특수성 같은 것들도 있고, 제1세계든 어디든 지역들에서 일어나는 반지구화적인 요소들이 운동으로든 정서상으로든 존재할 수 있다면, 그런 요소들을 작품적 성과로 이룩해낸 각 지역의 문학들을 통해서 이를테면 맑스가 예상한 대로의 세계문학의 형상이 새로 탄생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국제연대의 문제도 생각해볼 수 있겠고, 그런 점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AALF)을 추진하는 최근의 문단 움직임이나, 계간지 『아시아』의 간행, 베트남, 인도, 팔레스타인에 관심을 가진 문인들의 모임이 활성화되는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임홍배 예, 말씀하신 대로 좁게는 동아시아, 멀리는 중동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것은 과거에 서구문학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세계문학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 수 있는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움직임에 한국 문인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데서도 우리 문학의 저력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변화와 문학의 역할을 다르게 진단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한국도 일본처럼 자본주의가 난숙한 국면에 접어들면 문학의 활력도 위축될 게 아니냐 하는 진단인데, 실은 그런 현실의 복잡다단한 모순과 갈등을 총체적으로 묘파하는 과제가 문학의 짐이자 보람이 될 수도 있겠지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큰 특징으로 흔히 상품문화와 종래의 예술문화의 경계가 흐려지고, 감각이라는 것도 사람살이를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현실인식을 둔화시키는 문화적 소비재에 쉽게 흡수되고, 일상의 생활세계에서 가상과 진상의 구분도 모호해지는 현상들을 꼽지요. 문제는 상황이 그러니까 문학환경이 척박해진다고만 볼 게 아니라, 더 명민하고 활달한 감수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맑스가 『자본론』에서 상품의 환각효과를 가리켜‘리얼한 가상’이라고 했듯이 포스트모던 문화에 달라붙는 헛것들에도 그 실체적 뿌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윤지관 말하자면 서구 모더니즘이 이룩한 성과 가운데 훌륭한 부분이 바로 임선생이 말씀하시는 그런 과제에 대응했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서구의 모더니즘이 맞닥뜨렸던 그런 문제가 지금 비서구 혹은 제3세계의 대도시에서는 어떤 식으로 추구될 수 있는가가 지금은 관건이겠지요. 또 한가지는 지금 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대도시는 다문화적이고 다민족적인 요소가 강해진 상태입니다. 모더니즘 발흥 당시에 서구 도시도 실은 그랬지만, 특히 지구화가 확산되어온 지금의 시점에서 대도시는 이민자,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외국인, 그밖의 상호 교류 등을 통해서 여러 인종들이 모인 다문화적인 속성이 커졌습니다. 한국도 그렇게 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 속에서 어떤 방식의 문학이 지구화된 새로운 형태의 대도시에서 탄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숙제랄 수 있습니다. 이런 지구화의 변화 속에서 안과 밖 사이의 견고한 경계선 같은 것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해가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이거든요. 근래에 무국적문학이니 하는 것이 세계문학의 대세라는 식의, 말하자면 하루끼가 세계문학의 모델이라는 식의 이해도 나오는 것인데, 요즘 많이 얘기되는 오르한 파묵(Orhan Pamuk)만 보더라도, 각 국지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모순, 정체성의 문제 이것들 자체에 대해서 단순히 탈주니 이탈만으로는 제대로 대결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한국 장편문학의 성취와 과제

 

임홍배 그러면 그런 큰 맥락 속에서 최근에 주목받은 한국의 장편소설을 한번 짚어봤으면 싶은데요. 먼저 눈에 띄는 건 황석영의 근작소설로, 동아시아 근대화를 다룬 『심청』과 탈북자의 이산(離散)문제를 다룬 『바리데기』가 있죠. 신경숙(申京淑)의 『리진』은 구한말 격동기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궁녀 출신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그리고 있고,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김훈(金薰)의 『남한산성』도 마찬가지로 역사소설이죠. 김영하(金英夏)의 『빛의 제국』은 근래 소설로는 드물게 80년대말 학생운동과 분단문제를 지금 현실로 끌어낸 작품입니다.

우선 황석영 소설부터 얘기해보죠. 『심청』은 심청설화를 빌려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단순히 소재를 차용한 게 아니고 이야기 전개방식이 서구식 기준으로 보면 소설의 원형이라 할 서사시 같은 형태로 독특하게 변형된 느낌이 들어요. 특히 오끼나와를 ‘용궁’으로 상상하는 장면이 그렇고, 전체적으로 심청을 연화보살의 세속화로 변주하는 방식이 그런 느낌을 줍니다. 물론 한국·중국·타이완·싱가포르·오끼나와·일본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귀향하는 심청의 동선을 움직이는 힘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소용돌이에 요동치는 동아시아의 현실, 특히 왜곡된 시장논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에 대한 묘사는 역시 황석영다운 리얼리티를 발휘하지요. 사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심청이 너무 멀리까지 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웃음) 그런 리얼한 묘사와 동아시아 근대화의 핵심국면들을 적절히 배치하는 역사적 원근법을 보면 역시 황석영만이 감당해낼 수 있는 공력이 느껴지더군요.

윤지관 장편소설은 근대문학의 총아이고 카라따니 코오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것도 장편소설의 의미 상실을 말하는 거니까, 그런 뜻에서도 우리 문학에서 과연 장편소설이 살아 있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질문이겠습니다. 황석영은 출옥 후에 그야말로 장편소설로 승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서사문학이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큰 버팀목이 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90년대 이후 문학에서 서사가 약화되었다면 황석영의 장편들은 이 위기를 정면으로 뚫고 나가는 돌파력이 있어요. 『오래된 정원』 이후로 내놓는 작품마다 한국문학의 현재를 가늠케 하는 무게가 실려 있는데, 한편으로 작품에 따른 특장들이 있는 것 같아요.

연전에 『손님』이 프랑스의 권위있는 페미나상 후보에 올랐을 때, 저는 개인적으로 『오래된 정원』이 올랐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님』에서는 리얼한 묘사의 힘이 빛나는 대목들이 있는 한편, 작품구조상으로 매우 중요한 원령들의 개입이 느슨해서 이를테면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Beloved) 같은 전율성이 없거든요. 물론 그 자체로서 훌륭한 성취라 해도 말하자면 세계문학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의 아쉬움 같은 것입니다. 최근 작품인 『바리데기』 그리고 그전의 『심청』에서도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역사소설적인 외양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소설의 원형으로 돌아갔다고나 할까요, 피카레스크(picaresque) 형식을 활용해서 국경 너머로까지 확장되는 모험을 그려내면서 아시아, 혹은 그 너머까지의 공간을 포괄하여 지구화의 국면과 주체들의 삶을 엮어가고자 합니다. 유목적인 주체랄까, 세계적인 차원의 이산문제를 끌어안으면서, 수난의 주체가 자기를 찾는 모험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형식은 피카레스크지만 그 내용에는 세계체제 속에서 인간의 운명을 형상화하려는 근대 장편소설(novel)의 충동이 살아 있는 것 같아요. 그 점에서는 분명 주목에 값하는데, 작품에서 이 충동이 얼마나 살아 있느냐, 이런 문제를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리데기』는 집중도가 뛰어난 전반부에 비해 바리가 해외로 나간 후반부에서는 에피소드들이 제대로 엮이지 못해서 피카레스크의 문제성 같은 것이 드러납니다. 현재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세계문단에서도 비중을 인정받는 작가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집중력있는 장편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홍배 그런데 소설이라는 게 원래 여러 장르와 형식을 뒤섞어서 녹여내는 용광로 같은 속성이 있고, 그런 점에서는 피카레스크 같은 선행형식도 얼마든지 새롭게 차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작품처럼 시공간의 동선이 큰 경우에는 그런 형식이 나름의 내적 필연성을 갖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도 여러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요. 비근한 예로 TV에서 80년대나 지금이나 사극이 늘 인기를 누리는데, 사실 이른바 ‘역사 뒤집기’를 표방하면서 흥행을 노리는 상당수의 역사소설 역시 그런 TV방영물을 흉내내는 면이 없지 않지요. 그런 경우를 차치하면 지금의 현실인식이 교착상태에 빠졌거나 특수한 과도기 국면에서 현재의 좌표를 가늠하기 위해 시야를 멀리 가져가는 측면도 있을 거예요. 말하자면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지금 이곳의 현실을 폭넓게 조망하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시도가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면 서사의 결핍을 대체하는 형국에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신경숙의 『리진』이나 김훈의 『남한산성』을 얘기해봤으면 좋겠는데요. 저는 『리진』을 재미있게 읽었고, 실제 역사적 사건들이 원경에 깔려 있지만 신경숙 특유의 낭만적 색채가 강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역사를 의식하다 보니 다소 정적인 느낌도 주는데,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낭만적 상상력을 더 밀고나갔어도 좋았겠다 싶어요. 일찍이 졸라가 발자끄와의 차별화를 꾀하면서 발자끄에겐 낭만적 잔재가 너무 강해서 리얼리티를 해친다고 비난한 적이 있는데, 실은 졸라가 본 것과 달리 고품격의 낭만주의는 리얼리즘의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죠. 어떻든 『리진』은 작은 한 개인의 운명을 그 시대에 어울리는 역사적인 균형감각으로 소화해낸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반면에 김훈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빌려오긴 했지만 역사성을 제거한 실험쎄트 같다는 느낌이 컸어요. 그러니까 출구 없이 갇힌 상황에서 인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행태실험을 하는 듯해요. 역사와 허구가 만나는 지점들에서 과도한 자의성이 드러나기도 하죠. 작가는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라고 했는데, 전자는 맞는 말 같지만 후자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 작품이 베스트쎌러가 된 이유로 평론가 김영찬(金永贊)은 지난호 『창작과비평』에서 IMF사태 이후 국민들의 박탈감을 건드린 점을 얘기했는데, 독자들이 처해 있는 무력감을 불가항력적 사태로 절대화해서 울분을 자극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그런 효과는 사이비 카타르시스일 뿐이고 진정한 역사소설로는 함량미달이다 싶어요.

윤지관 우선 신경숙의 소설부터 말씀드리면, 저도 『리진』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문체도 그렇고 인물을 그려내는 신경숙 특유의 개성이 역사를 다루는 데서 발휘되어 한번 잡으니까 손을 놓기 힘들 정도였어요. 또 개화기라고 지칭되기도 하는 근대 초기의 문제에 초점을 두면서 근대성의 문제를 그 시원에서 풀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전에 나왔던 김영하의 『검은 꽃』과도 서로 비교되고 관심이 갔습니다. 두 작가 모두 소위 90년대 문학의 대표주자로 나왔는데 탈민족, 내면, 탈역사 같은 담론하고 잘 엮이는 작품활동이 중심을 이루던 것에 비하면, 근작들이 역사로의 귀환이랄까요, 함께 역사소설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당대 문학의 한 징후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두 작품 모두 최근에 나온 장편 가운데 수작인 건 분명한데, 역시 이것들을 세계문학적인 기준에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리진』을 읽고는 이렇게 아름다운 역사소설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역사가 사인화(私人化)되었다 할까 미학화되었다 할까 하여간 정통적인 역사소설이 보여주는 그런 역사의 역동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해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물론 작가가 그걸 노린 측면이 있겠지만, 역사 속의 인물들을 복원해냈고 또 생생하게 복원한 부분이 있긴 해도, 배경이 되는 역사라는 틀은 교과서에서 말하는 대로 그냥 두고 그 속의 인물들만 채색했다 할까요? 같은 연배의 중국작가들이 쓴 역사소설 속 인물들의 생동감하고는 종류가 또 다르고, 더 가깝게는 홍석중(洪錫中)의 『황진이』에서 보이는 역사에 대한 ‘해석’ 같은 것이 부족하지 않은가 합니다.

김영하의 『검은 꽃』이 그 점에서는 역사소설에서 기대함직한 역사 해석력이 더 돋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작품도 정통적인 의미의 역사소설은 아니고, 그런 외양을 하고 있지만 역사에 대한 해체랄까 하는 의도를 알게 모르게 품고 있는 것이 걸립니다. 『검은 꽃』의 성과는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당대 인간들이 근대를 만났을 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는 작가적인 기율(紀律)이 이룩한 것이라고 하고 싶고요. 하여간 미학에서는 승리했지만 철학에서는 미흡한 것,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소설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 세계문학으로 보자면 우리의 재능있는 작가들에게서 느끼는 제 아쉬움입니다.

그래도 두 작품에는 역사를 붙들고 씨름한다는 의식이 살아 있는데, 이번의 『남한산성』도 그렇고 김훈의 소설은 역사를 차용했지 역사소설은 아니거든요. 독자들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호소하면서도 거꾸로 역사 자체에 대한 허무의식을 부추기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뭐랄까 좀 부정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문장의 호흡을 살려내는 솜씨라든가 장인적인 면모는 뛰어나지만, 역사를 미학화하려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신경숙에게는 장점이 된 처연한 아름다움 같은 것이 여기서는 너무 태를 부린 것처럼 매끈거려요.

임홍배 『검은 꽃』 얘기를 하셨는데 이 작품과 『빛의 제국』은 이야기의 시공간이 전혀 달라도 이야기하는 방식은 뭔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를테면 파국적인 결말을 미리 예정해놓고 이야기의 흐름 속에 국가, 민족, 이념 같은 것을 휩쓸어서 해체하려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 듭니다. 『빛의 제국』이 고정간첩이라는 특이한 인물설정으로 분단문제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여기에서도 『검은 꽃』에서 보였던 과도한 작위성이 인물의 활동 여지를 크게 제약합니다. ‘빛의 제국’이라는 표제의 초현실주의 모티프가 말해주듯이, 분단상황에서 고정간첩이 되기까지 필연으로 여겼던 삶의 도정이 지금 나의 존재와는 전혀 무관한 헛것으로 증발해버립니다. 냉전시대에 결별을 고하는 의미는 있겠지만, 그것도 지금 시점에서는 새삼스러운 이야기일 테고, 권태와 허무에 찌든 자본주의적 일상에 흡수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한 천착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작품 결말이 분단이라는 소재를 걷어내도 무탈한 씁쓸한 세태의 확인으로 끝나고 말지요.

윤지관 김영하의 『빛의 제국』은, 아까 『검은 꽃』을 말한 방식대로 하자면, 그 특유의 역사 전복에 대한 몰두가 작품 속에서 문제를 야기한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분단문제가 갖는 이념의 질곡을 풍자하고자 하는 의도는 물론 이해가 돼요. 그런데 분단문제를 다루면서 전체적으로는 당시의 역사에서 요구됐던 민주화운동과 분단극복운동의 결합이라는 운동의 배경이나 역사해석에 대해 해체, 뒤집기를 시도하려는 의도가 너무 강해서 작품상의 여러 문제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분단문제에서 야기되는 비극을 희화하려면, 가령 위화가 『허삼관매혈기』에서 문화대혁명을 두고 그러는 것처럼, 인물에 대한 작가로서의 대접이랄까 어떤 애정이 저절로 작품 속에 용해되어 있어야 하는데, 운동에 참여한 여성의 타락상이라든가 이런 것이 애정도 설득력도 없이 제기되는 곳이 많아요. 역시 탈이념, 탈민족도 좋지만 너무 그런 ‘이념’에 매여 있으면 이렇게 작품이 성기고 덜컥거리게 될 수 있습니다. 『검은 꽃』이 그의 의도를 넘어서서 가까스로 리얼리즘의 성취를 이루었다면 『빛의 제국』은 그러지 못한 셈이지요.

 

세계화시대 한국문학의 과제-번역과 소통

 

임홍배 최근의 몇 작품만 언급하다 보니 비판적인 평가가 많이 나온 것 같습니다만, 길게 보면 한국문학의 활력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문학의 과제를 세계문학과 관련지어 얘기해보죠.

윤지관 괴테가 세계문학을 얘기할 때 중시한 것이 민족문학간의 교류였지요. 타자의 문학과 대화하고 또 그것을 용인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도 발전시키고 세계문학도 형성하자는 그런 취지였을 텐데, 사실 지금 보면 괴테가 말한 교류란 것이 괴테 당대에 비하자면 엄청나게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작가들이 해외여행도 많이 다니거니와, 외국 작가들이 방문해서 혹은 우리 작가들이 해외로 나가서 같이 행사를 하기도 하고 말이지요. 문제는 그 교류란 것이 어떤 내실을 가지는가 하는 것인데, 문인들의 교류가 무슨 사교모임은 아니고, 역시 각 민족이나 지역이 처해 있는 모순이나 곤경에 맞서는 작가로서의 고민을 서로 나눌 수 있는 토대가 되어야겠지요. 일방적으로 저쪽 얘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이쪽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해내는 능력도 필요하겠고요.

임홍배 괴테의 경우에도 역사학자 칼라일(T. Carlyle)이 괴테 선집을 영역할 때 둘이 직접 서신을 주고받는 작업들이 있었어요. 오늘날 작가들의 직접적인 교류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를 포함해서 세계 각 지역과의 교류와 연대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 바람직한 의미의 세계화에 기여하는 문학의 역할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한편 문학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소통 역시 일상적으로 중요한 과제죠.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한국문학은 겨우 9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해외에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좋은 번역을 내는 일은 여전히 큰 숙제가 아닌가 합니다. 윤선생님께서 마침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계시니까 그 일과 결부지어 말씀을 해주시죠.

윤지관 제 업무를 내세울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웃음) 우리가 한국문학을 세계문학과 관련지어서 이야기해왔지만, 사실 우리 문학이 번역이 안되어 있으면 세계문학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교류란 것도 거의 내실이 없는 것이겠고요. 그런 점에서 한국문학처럼 상대적으로 소수언어로 씌어진 문학에서는 특히 번역이란 것이 세계문학에 동참하는 토대라고 하겠는데, 이 자리에서 자세히 말할 것은 아니지만, 말씀하신 대로 한국문학이 아직도 세계문학에서 존재가 미미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좋은 번역물이 많이 부족하다는 현실입니다. 당장의 번역도 번역이고, 또 한국문학을 해외로 번역할 만한 역량을 지닌 번역가들을 지원하고 교육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지요. 또 해외에서 한국문학을 하나의 연구분야로 자리잡게 하는 일이나 해외의 독자층을 형성해내는 그런 번역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정부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이 앞으로 역점을 두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임홍배 일각에서는 문학번역이나 세계적인 유통문제는 시장이라든지 학계에 맡겨두어야지 정부가 꼭 해야 하는가 하는 시각도 있는데, 다른 것도 아닌 ‘문학’번역원의 존립근거를 묻는 질문일 수 있겠습니다만…… 번역의 당대적인 의미랄까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좀더 말씀해주시지요.

윤지관 어려운 질문인데(웃음), 우선 번역이 왜 중요하냐…… 본질적으로는 세계화시대가 되면서 번역의 중요성이 거의 질적인 전환을 했다고도 할 정도로 커졌다는 것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세계화라는 것이 언어들 사이의 교류를 빈번하게 만들면서도 중심언어로의 통합 같은 것도 동시에 진행시키잖아요? 요즘 세계어로 대접받는 영어가 그 대표적인 것이지요.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각 민족어의 위상은 약화되는 경향이 생기고, 그 민족의 언어가 담고 있는 문화의 토대라든가 새로운 창조의 동력 같은 것들이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년 전인가 번역관련 학술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하면서 획일화된 영어로 갈 것인가, 민족 다양성을 살려내는 번역으로 갈 것인가라는 선택 앞에 우리가 서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번역이 그냥 기능적인,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또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화가 초래할 수 있는 획일적인 문화, 획일화된 언어에 맞서는 필수적인 매개이자 힘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를테면 영어 사용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민족어를 살려나가면서 세계화에 맞서자면 번역을 키워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민족문화의 창조성을 보존하는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문학번역이 중요한 것은 문학이 민족어로 이룩한 성취의 핵심이기 때문이겠고요. 저는 우리 정부가 국고로 문학번역을 지원하는 것에는 번역문제에 대한 이런 인식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 워낙 한국문학의 기반이 세계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시장이나 학계에 전적으로 맡기기에는 이르고, 이것들이 제 기능을 하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요.

아까 말한 까싸노바라는 이론가가 민족문학들의 각축·경쟁으로서의 세계문학을 얘기했는데, 물론 우리가 국가적으로 문학번역을 지원하는 것도 민족국가의 국제적인 위상 혹은 경쟁이라는 목적이나 관념과 맺어지는 면이 분명 있지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민족국가가 꼭 민족이기주의만 추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이고, 실제로 민족국가가 이런 세계화 국면에서는 국지적인 요구와 절실한 삶의 문제를 수렴해내고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거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문학번역원이라는 공공기관도 우리 문학의 경쟁력을 높여서 문학작품을 수출하거나 노벨문학상이라도 받아서 나라 이름을 올리면 다른 상품들을 팔기가 유리하다거나 하는 그런 경쟁의 목적, 까싸노바적인 의미에서의 현실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세계문학을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구축해나갈 것이며 우리나라의 창조적인 성과들을 어떻게 제대로 해외에 내보내서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바꿔나가는 데 기여할 것인가, 말하자면 괴테적으로 사고하면서 대응해야 하지 않나 합니다.

임홍배 말씀하신 대로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단지 그동안 덜 알려진 우리 문학을 바깥세계에도 널리 알리자는 소극적인 취지를 넘어서 한국문학이 우리의 국지적 현실에 대한 나름의 성찰을 통해 세계적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데 특별한 기여를 하자는 것이겠지요. 한국문학이 그런 의미에서 세계와 소통하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진행중인 세계문학의 이념을 우리 시대의 요구에 맞게 되살리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첨언하자면 한반도에 국한해서 볼 때 남북 문학교류 또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중요한 과제죠. 예를 들어 과거에 동서독이 통일되기 전에 굉장히 많은 동독 작가들이 서쪽에서 작품을 내서 많은 독자들을 확보했고, 나중에는 작가들간의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습니다. 우리도 공식기구를 통해 남북 문인교류를 상당한 정도로 진척시켜왔지만, 작품교류는 근래 홍석중의 『황진이』가 만해문학상을 받은 정도지요. 한두 작가의 작품밖에 소개되지 않은 정도로 단절되어 있는 것도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