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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반도에서의 근대와 탈근대
대화
87년체제의 극복과 변혁적 중도주의
조효제 趙孝濟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저서로 『인권의 문법』, 역서로 『직접행동』 『세계인권사상사』 등이 있음.
백낙청 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최근 저서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백낙청 회화록』(전5권) 등이 있음.
조효제 안녕하십니까. 이번호 『창작과비평』부터 새롭게 ‘대화’로 제목이 바뀐 꼭지에 백낙청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늘상 비판하시는, 분단체제 극복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없는 전형적인 사회과학도입니다.(웃음) 어쩌다 보니 제가 엉겁결에 인터뷰어의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창비』 편집진에서 계속해서 여러가지 자료를 보내주고 읽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사람을 공부시키는 아주 교묘한 방법이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선생님이 논쟁을 좋아하시니 아주 강하게 밀어붙이라고 자꾸 부추기더군요. 그래서 아, 이 양반들이 나를 총알받이로 쓰겠구나 생각했습니다.(웃음) 어쨌든 제가 소질은 없지만 신랄하되 유쾌한 대화로 끌고 나가보려고 합니다.
이번호가 독자들과 만나는 시점은 봄이겠지만 아무래도 지난 대선의 결과를 먼저 짚어보는 게 온당한 순서가 아닐까 합니다. 보수진영에서 보면 자신들이 승리한 것이고, 또 반대편에서 보면 개혁진보진영이 크게 진 건데요. 패배의 이유가 참여정부에 대한 유권자의 심판이라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참여정부의 실정이 대선 패배에 큰 원인이 됐다는 진단에는 동의하시나요?
백낙청 크게는 동의합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정동영 후보에 큰 표차로 이겼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인 심판이라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다른 걸 잘했다 하더라도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거니까, 그것도 실정인 건 틀림없고요. 그밖에 뭘 잘하고 뭘 잘못했느냐를 따진다면 얘기가 길어지겠지요.
한반도 평화가 양극화 해소보다 중요한 쟁점이었나
조효제 선생님은 전부터 참여정부에 대한 정교한 인식과 평가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고, 이번 대선 직후에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양극화나 신자유주의에 대처하는 문제에 대해서 선생님이 전에 비판하셨던, 예컨대 최장집(崔章集) 교수 등의 통찰이 유권자들에게 더 많이 수용된 측면이 있지 않느냐고 볼 수 있는데요.
백낙청 신자유주의를 더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후보가 당선됐는데,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학자들의 통찰이 더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나요? 그분들의 비판이 통찰에 미달하는 구호에 그쳤든가 아니면 다소 통찰은 있었지만 어쨌든 국민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 아니겠어요?
조효제 그와 관련해서 대선 후에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나 여론조사를 보면 참여정부가 잘한 것과 못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데, 잘한 게 뭐냐는 질문에 국민들의 1/3이 잘한 게 없다고까지 대답하고 있어요. 나머지 2/3 중에서도 과거청산, 부정부패나 권위주의 타파, 사회복지 등을 잘했다고 하면서 반면에 못한 것은 양극화나 부동산문제, 경기침체, 민생문제 등을 많이 꼽았어요. 제가 아까 왜 그런 말씀을 드렸냐면, 『한겨레』 여론조사(2008.1.2)에 따르면 한반도 평화정착을 참여정부의 잘한 점으로 꼽은 국민은 고작 4.9%밖에 안된다는 거죠. 잘한 것 중에서 가장 낮은 수치예요. 선생님은 누차 DJ정부와 참여정부에 대해 적어도 이런 문제에서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하셨기 때문에 여쭤본 겁니다.
백낙청 여론조사의 구체적인 방식이나 설문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지난 대선에서 평화문제는 주요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가령 이회창 대 정동영 구도로 갔다면 중요한 쟁점이 됐겠지만요. 그래서 국민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면이 있고요. 참여정부가 평화정착을 위해서 한 노력을 평가하느냐 안하느냐 이렇게 물었다면, 평가한다는 답변이 압도적 다수가 나왔을 거라고 봐요. 그렇다고 평화정착을 온전히 이루었느냐고 하면 아직은 안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테고요. 그러니까 다분히 질문하는 방식에 달린 것이에요. 더구나 참여정부의 평화정착 노력을 지지한 논객과 양극화에 반대하는 논객으로 가르는 건 잘못된 이분법이라고 봅니다. 내가 최장집 교수를 비판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한반도나 한국사회의 문제가 남북관계 그리고 남북간의 통합과정과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그것을 너무 단순화한다, 평화문제도 분단현실과 분리해 단순하게 파악하고, 양극화 극복에 대해서도 남북간의 재통합과정과 결부된 구상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말하는 신자유주의 비판 이외에 구체적인 답이 안 나온다 하는 요지였어요. 그런데 그런 비판을 할 때마다 일부 보수언론에서는 백아무개는 NL을 대변하고 최아무개는 PD를 대변한다는 식으로 엉뚱한 이분법의 틀을 갖다 씌우면서 내 입장을 단순논리로 환원하는 식으로 나왔어요. 지금 조효제 교수도 다분히 한반도 평화정착을 지지하는 쪽이 양극화에 대해서 관심을 덜 갖는다든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부족한 것처럼 설정해놓고 질문하시는 것 같은데, 나는 국내개혁의 문제를 등한시하면서 평화통일 문제만 강조하는 세력도 비판했고, 동시에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인식 없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해봤자 답이 안 나온다는 주장이었거든요.
조효제 제가 말씀드린 취지는 유권자의 표로 연결되는 현실적 담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언론에서 왜곡됐든 어쨌든 담론의 쏠림현상 같은 것이 생길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예컨대 평화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90% 이상이 중요하다고 대답하겠죠. 그런데 그게 표라는 형식으로 연결될 때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백낙청 이번 대선에서는 경제가 큰 이슈였잖아요. 그것이 결정적인 이슈가 된 저변에는 양극화 현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대답은, 오히려 양극화를 부추기는 정책들을 지지해왔고 노무현정부가 그나마 부동산정책 등으로 양극화에 대응하려 할 때 발목잡는 일을 해온 세력이 집권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양극화 문제나 신자유주의 문제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토론하고, 그것과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밝혀야 한다고 하면 그건 맞는 말이죠. 하지만 마치 우리가 양극화만 무턱대고 비판해온 단순논리에 더 치중했다면 선거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을 거라는 식의 분석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도, 그런 단순논리를 더 힘차게 밀고 나가는 것이 해법은 아니라고 봅니다.
후보단일화는 실패한 전술이었나
조효제 지금 해법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실제로 해법을 듣기 위한 전제의 하나로서, 지나간 얘기지만 몇가지 역사적 가정을 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선국면과 연관해서 네가지 가정을 해봤는데요. 첫째, BBK사건을 비롯해서 각종 의혹이 사실로 판명됐다면 이명박 후보가 패했을까 하는 가정, 둘째, 선생님이 취하신 입장이기도 한데 범여권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선거결과가 달라졌을까 하는 가정, 셋째, 권영길 후보가 아니라 다른 후보가 나왔다면 민주노동당의 결과가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하는 가정, 마지막으로 범개혁진보진영이 2007년 12월 19일에 진 것이냐 아니면 그전부터 계속 져온 것이냐에 관한 가정입니다. 만약 후자라면 언제부터 돌이킬 수 없는 패배의 길로 간 것인지 하는 거고요.
백낙청 네가지 질문 중에서 민주노동당과 관련해서는, 지난 대선에서 몇가지 이유로 민노당이 큰 변수가 되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권후보가 아닌 다른 후보가 나왔을 때 득표를 더 했을 수도 있죠. 그러나 얼마를 더 했을까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요. 나머지 세가지에 대해서 조교수 나름대로 어떤 답을 갖고 계시리라 믿는데, 첫번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효제 제가 볼 때 의혹이 사실로 판명났다 하더라도, 막판에 공개된 동영상사건만 놓고 봐도, 표차에 조금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백낙청 그런데 막판에 동영상이 공개되는 형태가 아니라 검찰이 철저히 수사해서, 혐의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우리가 확실히는 모르지만, 의혹들이 상당부분 사실로 파헤쳐졌다면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전혀 다른 게임이 되는 겁니다. 첫째는 법률적으로 후보등록 원인무효 사안이고요. 또 한나라당 경선과정에서 도곡동 땅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명박 후보의 지지가 급격하게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때는 상대가 박근혜 후보였고 정동영 후보가 아니었으니까 똑같이 볼 수는 없지만요. 검찰 같은 기관이 국가기관의 공신력을 걸고 사태를 파헤치고 적절한 검증을 했을 때 그게 대선에 별다른 영향을 안 줬을 거라는 단정도 나는 굉장히 용감한 주장이라고 봐요. 그랬으면 대선이 뒤집혔을 거라는 단정도 쉽게 내릴 수는 없지만, 어차피 진 게임이었다는 단정도 마찬가지 같아요. 이건 조교수의 마지막 질문과도 관련됩니다. 12월 19일이 아니고 검찰의 수사발표보다 훨씬 더 앞선 어느날에 이미 결과가 정해졌다면, 검찰수사가 어떻게 나오든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답이 나올 테고, 이러저러한 여러가지 패배원인이 축적되어왔지만 또 거기에 대처할 수 있는 혹은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여러가지 변수도 함께 존재했다고 본다면 다른 답변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물론 네번째 질문에 대해서 조교수가 갖고 있는 생각이 충분한 분석에 의해 뒷받침돼서 검찰수사 이전에 이미 패배는 확정되었다는 판단이 성립한다면 그야 수긍해야겠지요. 12월 19일의 패배가 당일에 가서 결정된 게 아니라는 건 누구나 인정할 겁니다. 큰 표차의 패배가 하루이틀 사이에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해요. 하지만 철저한 검찰수사로 인해서 이명박 후보의 중대한 범법행위, 선거법 위반이나 공직자윤리법 위반을 포함한 중대한 범법행위가 밝혀졌더라도 뒤집어지지 않을 만큼의 패배요인이 언제 결정됐다고 생각하시는지 되묻고 싶네요.
조효제 사실은 선생님 논법대로 검찰에서 법적인 기소 상황까지 갔더라면 대선출마 자체가 봉쇄되니까 이 질문은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두는 건 아니고요. 물론 선거결과는 뚜껑 열어보기 전까지 아무도 모르지 않느냐는 원론으로 치자면 누구도 예견할 수 없겠지만, 추세라든지 여론조사의 흐름이 계속 하향곡선을 그려온 건 사실 같아요. 저는 2006년 지방선거 이후부터 계속 완만한 후퇴의 길을 걸어왔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드린 겁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패배주의적인 자세로 손놓고 있자는 건 아니지만, 이번 선거가 끝까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식의 일종의 허구적 인식이 개혁진보진영 내에 있었다고 봅니다. 투표 당일까지도 말이죠.
백낙청 그건 그래요. 그런 인식이 상당히 있었던 건 사실인데, 그것과 관련해서 나하고 직접 관련된 두번째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후보단일화가 됐으면 선거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면서 그게 나의 입장이라고 규정하셨는데, 후보단일화를 위해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일화가 되면 승리한다는 전제로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이번 과정에서 아시다시피 재야원로라는 사람들이 매번 조금씩 다른 명단이었지만 세번의 단일화촉구 성명을 냈는데-
조효제 마지막 게 12월 17일인가에 나왔죠?
백낙청 예. 그런데 세번 다 초점이 달랐어요. 단일화를 정면으로 내세운 것은 11월 19일인가 후보등록 전이었습니다. 단일화가 충분한 효과를 내려면 후보등록 전에 돼서 양보한 쪽은 후보등록을 하지 않는 게 정상적인 방법이니까요. 기자회견문을 나 혼자 쓴 건 아닙니다만, 세 문건 모두 나로서는 책임질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첫번째 기자회견은 우선 초점이 패배주의 극복에 있었습니다. 물론 민주개혁세력이라는 사람들이 그동안 참여정부의 실정 등에 대해서 아무런 반성의식도 없이 정치공학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선거를 앞두고 어차피 진 선거다 해서 완전히 패배주의에 젖어서 할 수 있는 노력조차 안하는 것은 본인들을 위해서 나쁜 건 물론이고 승자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는 논리였지요. 또한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 패배주의 극복과 단일화는 맞물려 있는 문제지요. 단일화가 안되기 때문에 패배주의가 더 만연하고, 패배주의에 젖어 있기 때문에 후보단일화도 잘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깨기 위해서 발언한 건데, 단일화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 쇄신하는 데는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조효제 제가 가르치는 제자 중에 그 문건을 복사해 와서 저에게 보여준 학생도 있었습니다.
백낙청 두번째 기자회견은 검찰의 수사발표 직후였어요. 그때는 엄정하게 수사하고 사법정의를 실현해야 할 국가기관이 어떻게 이렇게 허술한 수사를 할 수 있느냐는 걸 주로 문제삼았어요. 정확한 사실은 검찰이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모르지만, 당연히 수사해야 할 대목들을 수사하지 않고 발표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도곡동 땅에 대해서도 이미 발표했던 내용에서조차 후퇴한 발표를 했어요. 이처럼 국가기관의 공신력이 훼손되고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을 지적하면서, 이런 판국에 단일화조차 못하고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말을 덧붙였던 거예요.
12월 17일 또 한번의 기자회견을 했는데, 회견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광운대 동영상이 나오기 전이었습니다. 비디오가 공개되기 전에도 이명박 후보의 혐의를 방증하는 자료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거든요. 우리가 정치인들이 성인군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계속 거짓말을 하는 후보에 대해서 그냥 넘길 수 있겠느냐, 선거에 이기든 지든 이 대목에서 우리가 문제제기를 해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훗날 지도자의 도덕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할 계제가 생기더라도 뒷북이나 치는 형국이 되어서는 면목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월요일 기자회견을 하기 직전인 일요일에 동영상사건이 터졌어요. 그랬는데도 이명박 후보는 한점 부끄러움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단일화만 되면 이긴다는 판단을 한 건 아니고 더구나 그 시점에서 단일화는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어요. 하지만 더 일찍 단일화가 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건 역시 열려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2006년 지방선거 이후로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려왔다는 진단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정동영 후보의 26% 득표는 선거전 초기에 비해서도 상당한 결집을 이룬 거예요. 그러나 검찰수사라든가 후보단일화 등 몇번의 계기가 있었는데 어느 하나도 실현 못한 것은 확실히 실력부족이지요. 아무튼 저와 뜻을 함께한 분들 대다수는 지든 이기든 최선을 다하자는 심정에서 그런 노력을 했고, 우리가 표명한 원칙들은 두고두고 우리 사회의 중요 쟁점으로 살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명박 특검과 대통령 취임의 상관관계
조효제 이 대담이 지면으로 발표될 때쯤이면 당선자가 정식 취임하기 직전일 텐데요. 저는 이런 가정도 해봅니다. 지금 특검이 진행중이니까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만에 하나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명되더라도, 동영상에서 자신이 직접 BBK를 설립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이 공개되니까 나중에 그건 이른바 ‘실체적 진실’과 다르다고 발뺌했단 말이죠. 저는 오히려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실체적 진실을 운운한다는 것은 자신이 법적으로 실제 소유자는 아니지만 거짓으로 그렇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거 아니에요?
백낙청 맞아요. 따지자면 법리적인 문제보다 도의적·정치적 문제가 더 심각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에요. 도곡동 땅 문제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땅이 아니라 형님의 땅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서울시장이 포스코 회장을 찾아가서 “우리 형님 땅 좀 사주쇼” 하고 부탁했다면 그건 말이 됩니까? 포스코 회장이 그 청탁을 들어줬을 때는 회장도 다음에 서울시에 어떤 반대급부를 요청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니에요? 이게 바로 정경유착인데, 우리가 법리적 문제에만 너무 매달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건전한 민주시민의 양식으로써 판단하고 토론할 기회가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나는 설혹 특검이 수사를 제대로 해서 당선자에게 불리한 사실들을 밝혀내고 심지어는 용감하게 기소까지 한다 하더라도, 이걸로 취임을 막는다거나 취임 후에 선거무효 또는 당선무효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고 봐요. 법리상 그게 가능하냐 안하냐의 문제와 별도로, 법리에 기대서 새 정권의 조기퇴진을 이끌어내려는 건 정답이 아니라고 봅니다. 국민들이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아는 상태에서 이명박정부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서, 정부에 대해 추궁할 건 추궁하고 잘하는 건 잘한다고 인정하고 밀어주는 가운데 국민들의 각성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을 생각을 해야지요. 이건 여담인데, 만에 하나 선거를 다시 한다면 아마 박근혜씨 좋은 일을 해주는 게 되지 않을까요?(웃음) 물론 법적으로도 하는 데까지는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법치주의의 원칙이기도 하고, 또 국민이 진실을 아는 상태에서 감시하고 협조할 건 협조해야 건전한 민주주의가 가능해지니까요.
조효제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국가원수가 갖고 있는 정치적·법적·도덕적·규범적인 면의 중차대함을 생각할 때, 이번 대통령 선출은 좋게 말하면 카우보이식으로 큰소리치고 다닌 사람이, 극단적으로 말하면 노골적인 협잡질을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아주 심각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정치·경제적인 논리, 이념적인 논리로서의 경쟁과 시장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자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건전한 논쟁을 할 수도 있는 기회였는데, 이런 식으로 논리 이전에 원초적인 법적 문제, 지도자와 공인으로서의 자질문제가 먼저 부각된 게 우리 정치사회의 오점이고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협잡을 안한 깨끗한 신자유주의자가 나왔다면 비판하고 싸우기에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심은 천심이지만 선악시비는 인간의 몫
백낙청 토론이라도 좀 제대로 하고 투표했겠죠. 아무튼 조교수의 첫 질문이 민심의 심판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민심이 천심이란 말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생각해야 할 건 천심이 뭐냐는 거예요. 하늘은 선악시비(善惡是非)를 안 가립니다. 우리가 해와 달의 빛을 받고 그 은덕으로 살고 있지만, 태양이 선인·악인을 가려서 비춥니까? 비가 내릴 때도 진 자리 마른 자리 안 가리고 골고루 내리지요. 그러니까 오히려 천도(天道)는 무심해서 천도인 거고, 그걸 수용하면서 선악과 시비를 가려주는 건 인간의 몫이거든요.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을 이제 국민이 심판을 내렸으니까 너희들 다 엎드려 하는 식으로 몰아갈 게 아니라, 심판 자체는 겸허하게 수용하되 우리 인간들의 몫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더 열심히 더 정밀하게 시비를 따져야 한다는 태도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심은 예컨대 ‘정권교체’라는 판정을 내리더라도 정권교체의 도구가 적당한지 아닌지까지 가려주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사실 신자유주의 세계라는 게 서민들이 빠져죽고 시달리고 하는 풍랑의 세상인데 배의 조타수인 정부가 우왕좌왕하다 보니까 국민들이 물불 안 가리고 반대편에서 후임자를 선출했어요.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대응할 준비가 부족하기로는 지난 정권 못지않다고 봐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좀더 고생을 해야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조교수 말씀대로 신자유주의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한층 이성적인 토론을 해야 고생해도 고생한 보람이 있는 건데, 고생만 하면서 속임수나 협잡질에 계속 끌려가도 문제고, 아니면 새 선장 밑에서 5년 동안 고생하고 나서 다시 반대쪽으로 확 몰리면서 또 한번 준비없는 세력이 들어서는 것도 문제겠죠.
조효제 선생님 말씀대로 현재의 국면에는 여러가지 차원, 민주-반민주, 보수-개혁-진보 문제 이전에 상식 대 몰상식이랄까 양식 대 변칙 식의 계몽적인 문제조차 해결이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복잡한 거죠.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 제가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대선 이후에 개혁진보진영, 이 말을 함께 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혹은 진보개혁진영의 향후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낙청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말에 대해 개념정리를 좀 할 필요가 있어요. 지식인사회에서 쓰는 말이 진보개혁세력이고, 정치판에 가면 진보라는 말이 그다지 유리하지 않으니까 민주개혁세력이라고 하는데, 진보개혁세력이라고 할 때 가운뎃점이 찍힌 진보·개혁세력 즉 진보세력+개혁세력일 수도 있고, 양자를 구태여 크게 구별 안하면서 개혁이라는 건 신자유주의 개혁도 개혁이니까 그런 개혁이 아니고 진보적인 개혁이라는 뜻으로 진보개혁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진보세력과 개혁세력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으니까 그런 입장에서의‘진보·개혁세력’인지 아니면 신자유주의 개혁이 아닌 범개혁세력이 곧 범진보세력이기도 하다는 관점인지 밝혀두고 논의를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효제 실제로 『공산당선언』에서 맑스가 참된 사회주의와 여러가지 가짜 사회주의들을 나누지 않습니까? 저는 개념에 대한 그런 식의 관성이 많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특히 자기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진보와 개혁 사이에 장벽을 치는 거죠, 전혀 다른 거라고. 이번에 진보정당의 패인론 중 하나가 개혁세력에 대비해 명확한 자기정체성을 못 살렸다고 보는 진단도 있거든요.
백낙청 그러니까 조교수 자신은 자칭 진보세력과 개혁세력 간에 인식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장벽을 치고 가운뎃점을 찍을 필요는 안 느끼신다고 이해하면 되겠군요.
조효제 예. 인식과 이념의 토대가 다르긴 해도,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그 둘을 면도칼처럼 나누는 게 과연 현명할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 진보개혁진영에서는 선거 이후에 몇가지 대안들이 제출된 상태인데요. 그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 ‘87년체제’ 얘기를 꺼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 남북접근이라는 세가지 흐름의 혼재 양상을 87년체제로 규정한다고 하셨는데, 그와 관련해서 대선 이후 진보개혁진영의 선택지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이명박정부 출범으로 87년체제는 극복될 것인가
백낙청 먼저 분명히해둘 점은, 1987년 6월항쟁으로 87년체제를 출범시켰다는 것은 어쨌든 우리 현대사의 큰 자랑거리입니다. 87년체제에 문제와 한계점이 많지만 그만큼 온 것 자체가 우리 시대의 큰 성취였죠. 이제 그 체제의 시효가 다해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은 시점에 왔는데 이 체제를 극복하고 더 나은 체제를 출범시킬 수 있다면, 조교수나 나나 한 생애 살면서 두번의 큰 역사적 과업에 동참하는 자랑스러운 인간들이 될 수 있다고 봐요.(웃음) 그런데 지금 이명박 당선자나 주변의 논객들은 이번 대선승리로 민주화체제라는 87년체제가 선진화체제로 바뀌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나는 진작부터 한나라당이 이번 선거에 승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또 그로 인해 역사적인 퇴행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이 87년 이전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87년체제의 말기현상이 연장될 거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번 선거로 87년체제를 극복하고 선진화체제로 간다는 분석에는 동의하지 않죠.
그리고 87년체제의 세가지 흐름 혹은 세가지 이슈를 언급하셨는데 내가 그 얘기를 한 것은, 87년체제론을 펼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김종엽(金鍾曄) 교수가 87년체제에서 민주화의 과제와 경제적 자유화의 과제, 이 둘이 때로는 상충하면서 결합되어왔는데 지금은 일종의 교착상태에 왔다, 따라서 다음 체제는 민주화의 흐름을 강화해서, 경제적 자유화는 계속하더라도 신자유주의를 제어할 수 있는 그런 체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나는 그 논지에 기본적으로 공감하면서 김교수의 분석에 한가지 요인을 더 넣어야 한다고 지적했던 거예요. 그게 바로 남북관계입니다. 과거에는 통일세력 대 반통일세력으로 단순 구분이 가능했지만, 87년체제 아래서는, 특히 2000년 이후에 오면 남북관계 진전에는 동의하는데, 또는 통일에 대한 프로젝트를 각자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기득권세력 위주의 프로젝트냐 아니냐 하는 걸 구별하는 게 중요해졌지요. 그 둘이 각축하는 이슈가 하나 있고, 경제자유화를 하는데 이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완전 굴복으로 가느냐 안 가느냐 하는 이슈가 있고, 또 민주화나 사회개혁에 대해서도 어떤 내용으로 어느 정도까지 갈 것이냐 하는 게 뒤섞여서 한동안은 한국사회의 활력에 기여하는 면이 많았는데, 이게 최근에 와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게 분명하죠.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이 소위 민주개혁세력을 대표하는 후보에게 투표를 안한 것이고요. 그런데 한나라당 또는 이명박정부가 새로운 규범과 균형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세부적인 데서야 지난 누구보다야 잘하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조효제 전봇대 뽑는 것 말씀하시는 겁니까?(웃음)
백낙청 전봇대를 과감하게 뽑은 건 사실이죠.(웃음) 그러나 가령 노무현 대통령이 대불공단을 다녀오면서 전봇대 뽑으라고 했어도 뽑았을 겁니다. 이게 과연 관료주의를 뽑아버린 건지 아니면 전제주의의 전봇대를 새로 박은 건지는 모를 일이지요. 그런 것 말고, 부분적으로 경제적인 자유화라든가 심지어는 남북관계에서도 당장은 아니더라도 좀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에 과감하게 나아가는 것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정치민주화, 경제자유화, 남북관계발전의 새로운 배합을 통한 진정한 선진화체제의 출범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한반도에서 어떤 선진사회를 건설할까 하는 비전을 가지고 그 맥락에서 거기에 걸맞은 남한사회의 선진화작업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미가 전혀 안 보여요. 심한 경우에는 북의 존재는 어떻게든 잊어버리고 남한만 선진화하면 된다는 착각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선진화를 방해하는 것이 사실은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온갖 몰상식한 구태 아닙니까?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의식이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에요. 난 그런 의미에서는 87년체제의 극복이 이명박정부의 출범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명박정부 아래서 뭔가 더 시달려보고 정신을 가다듬어서 한반도 선진사회 건설에 대한 비전도 세우고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는 일에서도 좀더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냈을 때 가능할 거라고 봐요.
조효제 실제로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2007년으로 기억하는데, “그 세력(한나라당)이 승리하더라도 그때의 퇴보는 87년체제의 말기증상을 확대하고 연장하는 퇴보이지, 87년체제와 본질적으로 다른 체제를 출범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의 선택은 87년체제를 질질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유일한 타개원칙을 중심에 놓고 그에 걸맞은 정책배합, 세력연합을 이루어내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하셨거든요.
백낙청 거 누가 쓴 글인지 참 잘 썼네요.(웃음)
변혁적 중도주의란 무엇인가
조효제 그렇다면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단극복론과 연동된 이론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대선결과와 관련해서 변혁적 중도주의를 수정하신다거나 보완하실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으셨는지요? 예컨대 손학규 통합신당 대표의 중도실용론도 있고요. 독자들이 관심을 보일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주의’라고 하니까 자꾸 정치이념이 생각나거든요. 그래서 변혁적 중용이랄까 변혁적 평형 식의 개념이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백낙청 중도·중용·평형 같은 것이 더 좋은 말이긴 한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학자가 서재에서 거룩한 얘기 한다는 인상이 짙고 실제로 우리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얘기라는 느낌을 못 주죠. 변혁적 중도주의가 현실정치와 관련된 담론인 한 ‘주의’라는 말에 따르는 부담은 감수해야겠지요. 다른 한편 변혁적이라는 표현은 현실정치에서 별로 달갑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나도 누차 얘기하지만, 그건 선거용 구호가 아니고 우리가 87년체제 극복을 도모할 때의 그야말로 ‘유일한 타개원칙’을 개념화한 것입니다. 손학규씨 외에도 정치권에서 중도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것과 다른 점을 못박아주는 게 바로 ‘변혁적’이라는 관형사예요. 변혁은 구체적으로는 한반도 분단체제를 변혁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 한반도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당면한 최대의 역사적 과제가 한반도 분단체제의 변혁인데, 굳이 변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현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량적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데, 그렇다고 전쟁이나 폭력혁명을 통한 변화는 아니라는 뜻도 있습니다. 80년대에는 혁명이라는 말을 쓰다가 잡혀갈까 두려워서 변혁이라는 표현을 대신 쓰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돌려 말하는 표현으로서의 변혁이 아니라,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혁명과는 다른, 그러나 아주 근본적인 변화라는 뜻입니다.
변혁적 중도주의를 우리 현실정치에 적용하는 게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현실적으로 중도개혁노선이 맞습니다. 과격한 진보주의 처방보다 중도주의가 맞는데, 다만 그 중도개혁이 남북의 화해협력 및 재통합 과정과 연결되고, 그래서 남북관계의 진전에 대해 과감한 자세를 취하는 중도개혁이면 그게 변혁적 중도주의가 되는 거예요. 뜻이 있고 정신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걸 적용해서 답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선결과를 보면서 수정하거나 보완할 생각이 없느냐고 하셨는데, 보완은 끊임없이 해야 하지만 수정한다기보다 오히려 내 욕심으로는 결국 그것밖엔 해답이 없는데 우리가 엉뚱한 것 가지고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헛심을 썼구나 하고 남들이 인정을 해주었으면 합니다.(웃음)
조효제 오늘의 대화를 준비하기 전에 자료를 많이 읽었는데, 특히 다섯권짜리 『백낙청 회화록』을 읽느라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웃음)
백낙청 몸에 좋은 책인데 왜 그러세요?(웃음)
조효제 저는 아무래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많이 고민해왔던 터라, 선생님이 말씀하신 변혁적 중도주의와 그 차원을 어떻게 결합하고 창조적으로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 반신자유주의라고 쉽게 말하지만 저는 신자유주의에도 네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네가지 차원
첫째로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1970년대 이후에 국제경제 운용의 일반원칙으로 굳어진 차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1세계에서는 방만한 복지국가의 재편과정에서 ‘정부의 실패’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나온 것일 수 있겠죠. 그리고 제3세계에서는 5, 60년대만 하더라도 개도국 발전론과 국제교역을 연결시키는 논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는데, 70년대 이후로는 제3세계에서도 어쨌든 생존하려면 국제적 차원에서 자유시장을 통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식의 합의가 이루어져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신자유주의는 현행 자본주의체제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입니다. 스칸디나비아나 프랑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경향을 완전히 거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자본주의체제에서의 전면적인 이탈이나 완전한 의미에서의 탈연계까지 포함하는 입장은 성립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두번째 차원의 신자유주의는 그야말로 새처나 레이건, 이명박류의 시장만능 자유방임주의, 그래서 성장이나 경쟁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구체적 경제운용 방향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한 반대가 한국사회에서 흔히 반신자유주의라고 표현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안에도 두가지 흐름이 있죠. 하나는 현재의 지구화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 규정하면서 반신자유주의·반지구화 노선을 견지하는 진보적, 적극적 반신자유주의 입장입니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대세로 수용하되 그 안에서 운신의 여지를 발휘하자는 정도의 개혁적 신자유주의 관리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좌파 신자유주의, 또는 손학규씨가 얘기하는 신자유주의, 혹은 제3의 길, 혹은 다보스포럼에 참석하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노선…… 현재 문국현씨가 다보스포럼에 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진보진영과 개혁진영에서 신자유주의를 보는 태도가 표현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차이가 정도의 차이이지 본질의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두 노선이 정책의 공공성을 강화한다든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한다든지 복지정책을 실시한다든지 하는 면에서는 합의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세번째는 정치적 차원에서의 신자유주의가 있다고 봅니다. 흔히 노직(R. Nozik)이나 하이에크(F.A. Hayek)가 말하는 ‘법적 민주주의’인데요. 이때는 법의 지배가 다수의 지배 원칙보다 앞선다든지, 특히 헌정국가를 강조하고, 민간에 대한 국가개입을 제한할 것을 주장하고, 관료적 규제를 철폐한다든지 노동운동을 제한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죠. 이런 법적 민주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의 지배와 민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을 내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선생님께서 “구체적 자유에 대한 구체적 투쟁을 해야 한다”고 하신 적도 있는데, 저는 이 말씀이 바로 민주주의 원칙을 집합적인 공동체 삶의 모든 지점에 해당하는 투쟁으로 보자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저는 대운하문제만 하더라도 환경문제의 차원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원칙에 맞느냐 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넷째는 소위 세계체제론에서 말하는 자본주의 진화의 마지막 단계로서의 신자유주의, 또 그것의 하위체제로서 한반도 분단체제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짚을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해서 6·15공동선언을 수호하고 굳혀야 하는 게 아닌가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신자유주의의 이 네 차원 중에서 처음 차원을 제외한 나머지 둘째, 셋째, 넷째 차원, 다시 말씀드려서 정책의 공공성, 비정규직 문제, 복지정책,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는 문제, 그리고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과제 등은 진보개혁진영의 여러 세력이 각자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대동단결할 여지가 많다고 보거든요. 그게 선생님의 변혁적 중도주의와도 통하는 게 아닌가 또는 조희연(曺喜昖) 교수가 말씀하시는 복합적 신평등연합과도 통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식으로 말씀드린다면 돈 중심의 선진화가 아니라, 분단체제 극복까지 포함한 인간중심, 인간안보형 선진화론 같은 게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신자유주의 반대와 자본주의 반대는 구별해야 한다
백낙청 네가지를 잘 정리해주셨고 내가 생각하는 변혁적 중도주의와 통하는 데가 있다는 결론에도 동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나라의 담론세계를 보면 첫번째, 즉 이미 불가피한 대세로서의 신자유주의를-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이 붙어서 그렇지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 세계시장이 현존하고 작동하는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을-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평소의 레토릭이나 내놓는 프로그램을 보면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말과 자본주의 반대라는 말이 거의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나도 자본주의라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인류의 제대로 된 삶과 양립할 수 없는 제도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인류의 생존과 양립 불가능한 체제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건 장기적인 차원에서 하는 얘기지 지금 신자유주의 반대론과 자본주의 반대라는 걸 뒤섞어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건데, 실은 이른바 진보진영 내부에서는 그것조차 동의가 안된 상황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앞으로 합의를 이루어낸다면 그건 변혁적 중도주의 방향으로 합의가 되어야지 대책없는 자본주의 반대 쪽으로 가서는 안되겠다는 말씀이시라면 나는 물론 동감이지요.
그런데 네번째 분단체제론과 관련된 대목에서는 우선 세계체제론에서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최종단계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끝에서 두번째 단계로 보고 있는지가 확실치 않아요. 그건 세계체제분석을 전문적으로 해온 학자들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지만, 월러스틴(I. Wallerstein) 같은 사람의 생각은 오히려 이게 최종단계는 아니라고 보는 것 같아요. 부시가 이라크에 쳐들어간 건 엄밀한 의미로 신자유주의가 아니거든요.
조효제 그렇지요. 부시보다는 클린턴이 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자였지요.
백낙청 예. 어쨌든 신자유주의에서 오히려 새로운 규제와 정부개입 그리고 ‘묻지 마’식의 약탈, 또 이에 따른 대혼란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최종국면인지 몰라요. 그런데 분단체제론에서 전망하는 분단체제 극복은 시기적으로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종말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는 분단체제의 극복이 세계시장에서의 이탈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가 따르는 거고, 둘째로 이건 나중에 더 얘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반도의 원만한 통일이 세계적인 근대극복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인 동시에 한반도 주민의 입장에서 근대에 적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중도주의가 필요한 것이고요. 만약에 세계체제의 종말과 분단체제의 종말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정했다면, 더 급진적인 노선을 취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조효제 실제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논리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논리가 뒤섞여서 나오는 현상도 가능하고, 또 진보진영의 지식인들이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잡혀가는 세상은 아닌데요, 그럼에도 그런 데 대해서 꺼려한달까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 왜 정확하게 짚고 구분해서 사고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원래 좌파운동, 급진운동, 사회주의운동은 초기부터 가지지 못한 자들의 대안운동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담론이 중요했습니다. 이건 물론 제 얘기가 아니고 논자들의 말인데, 담론이 중요했고 이론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론의 선명성, 순수성, 순결성 같은 게 핵심 자산이었고 그게 무너지면 운동 자체가 끝장나는 판이기 때문에 그걸 견지하는 측면이 중요했다는 거죠. 두번째로는 전통적으로 좌파운동은 지식인들이 주도해왔고, 이 때문에 이념의 순결성이랄까 이론적 정확성 같은 면에서 현실적, 구체적 내용이나 유연성을 얘기하게 되면 바로 변절이라든지 개량이라든지 하는 식의 공격이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오히려 하나의 역설이기도 한데, 저는 이번에 이명박정부의 출현이 진보개혁진영의 일종의 자기검열 기제 같은 걸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런 면에서는 하나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낙청 당연히 그래야겠죠. 실제로 대선패배를 통해 우리가 얻을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나는 너무 쉽게 반성을 떠드는 사람, 반성을 하더라도 패배의 아픔이 없는 사람은 신뢰가 덜 가요.
조효제 구체적으로 현재 진보개혁진영에서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 노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선 패배 후 진보개혁진영의 대안전략에 대하여
백낙청 아까 한국식 제3의 길이나 조희연 교수의 신평등연합론 등을 언급하셨는데 다들 변혁적 중도주의하고는 거리가 있어요. 조희연 교수의 신성장연합 대 신평등연합의 구도는 또 한번 필패의 구도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해요. 신성장연합은 제대로 된 연합이고 그가 말하는 중도리버럴세력도 상당수 포괄할 수 있는데, 신평등연합은 말만 연합이지 ‘중도리버럴’과 ‘진보’를 가르는 구도를 만드는 것 아닌가요? 게다가 이 구도에서 배제되어 있는 게 소위 자주파의 문제의식이에요. 내가 세칭 자주파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민주노동당 내에서 자주파가 문제된 건 그들이 분단문제를 강조하고 통일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은 아니지요. 통일주장이 단순논리로 흐르는 게 문제고, 또 하나는 조직 내에 이른바 종북(從北)주의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주’가 아닌 ‘종북’이 문제되고 있는데다 그들이 수적인 다수를 동원해서 조직을 장악한다는 ‘패권주의’가 쟁점이 된 거예요. 그렇다고 한반도 분단극복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를 쓸어버리고 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에요. 조희연 교수 같은 논자들은 이번 대선에서 중도리버럴들이 깨지고 민노당 안에서 자주파가 깨진 것을 세칭 PD내지 평등파 부활의 호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의 신평등연합은 전술적으로도 패배하는 구도일 뿐 아니라 우리 현실에 대한 전략적인 해답이 나올 수 없는 구도라고 봐요. 내가 말하는 ‘후천성 분단인식 결핍증’의 사례를 또 하나 보는 기분이에요.
조효제 조희연 교수의 복합적 신평등연합 구도는 진보진영의 평등성 지향과 개혁진영의 형평성 지향을 적절하게 조화시켜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되어서, 진보진영의 기준으로 봐서는 오히려 유연한 입장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개혁진영에 속하는 김호기(金皓起) 교수는 대선 후에 아예 작심한 듯 사회통합형 세계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구화 대세에 적극 동참하면서 성장과 복지를 함께 도모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지구화 선순환론이라고나 할까…… 제3의 길을 연상시키기도 하죠.
백낙청 기본적으로 학계에서 기든스(A. Giddens), 정치권에서는 블레어(T. Blair)로 대표되는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를 좀 덜 야만스럽게 수용하는 노선이라고 봐요. 그나마 영국식 정당정치 전통과 복지사회의 기반 위에서 일정한 현실적 성과를 거두었지요. 한국에서 그게 가능할지도 의문이지만, 기본적으로 한반도적인 시각을 빼고 남한만 놓고서 세계화를 수용할 거냐 아니면 반대할 거냐, 이렇게 논쟁구도가 짜여지면 백년 가봐야 그 소리가 그 소리예요. 그러다 보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너무 나가면 안되고 조금 덜 나가자, 아니면 반대를 하되 당신처럼 너무 하면 곤란하니까 조금 덜 하자, 이런 절충주의밖에 나올 게 없어요. 한반도에서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은, 남북을 재통합해서 한반도 지역경제를 건설해가는 과정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갖기 힘든 기회가 열린단 말이에요. 이 기회를 포착하려면 무조건 세계화에 편승해서도 안되고 반대만 해서도 안되는 건 물론인데, 기회를 포착하고 활용할 수 있을 만큼의 적응력은 우리가 길러야 하지 않느냐, 그러나 좀더 원대한 목표에 맞추는 노력을 동시에 해야 하지 않느냐,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바로 변혁적 중도주의이고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과도 통하는 거죠.
조효제 말씀하시는 걸 기하학적으로 풀어보면 한쪽에 진보좌파가 있고 다른 한쪽에 중도리버럴 개혁진영이 있다면 그 중간쯤에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분단체제 극복의 변혁론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양쪽을 다 맞춰야 한다는…… 항해술에서 말하는 삼각항해법 같은 것 말입니다.
백낙청 아무튼 중도론인데 우리 사회의 우파라는 사람들 중에는 보통 우파가 아니라 워낙 극우파가 많고, 나머지들도 통일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비전이 없거든요. 북이 멸망하면 접수하면 된다든가, 당장 흡수통일은 안되지만 좀더 기다렸다가 흡수통일을 한다든가 하는 막연한 기대 수준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변혁적 중도주의란 건 좌파라고 인식하게 되고, 실제로 우리 사회의 현존 스펙트럼에서 보면 왼쪽에 속하는 건 분명하죠. 하지만 우파냐 좌파냐 따지기 시작하면 또 낡은 프레임으로 돌아가고 말지요.
조효제 이중과제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여쭤보기로 하고요. 새 정부의 정책을 살펴봤으면 합니다. 물론 현시점에서는 인수위의 정책이지만요. 벌써 통일부 폐지부터 시작해서 선생님께서 관심을 기울이시는 한반도문제에 대해 상당히 우려스럽고 걱정스럽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명박 당선자가 내세우는 북핵 해결에 대한 방식과 연관해서 말씀해주시죠.
참된 ‘실용주의’ 자세로 남북관계에 접근해야
백낙청 통일부 폐지 문제에 한해서는 이명박정부나 인수위원회가 실용적인 접근을 하지 않고 이념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헌법에 명시된 통일지향성 같은 문제를 떠나서 실용주의적인 차원에서도 말이 안되는 방안인데,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봐요. 이건 당연히 국회에서 제동을 걸어야 하고 아마 걸리리라고 생각합니다. 대운하문제는 실용주의라면 실용주의일 수 있겠는데 그야말로 천박한 실용주의죠.
조효제 저는 그걸 포클레인 실용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네. 그것도 좋은 표현이군요.(웃음) 나중에 무엇이 어떻게 되든 일단 일을 벌여서 경기를 부양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자는 거지요. 이런 사업을 출범시킨다고 할 때 몰려드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뒷날은 생각 안하거든요. 그리고 땅값이 오른다니까 좋아하는 사람들, 건설경기가 올라가니까 좋아하는 건설업자들 등이 몰려드는데, 어떻게 보면 당선자도 결국 그런 세계에서 자라온 사람이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됐으면 거기서 탈피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이런 무모한 사업을 벌인다면 피차에 불행한 일이 되겠지요.
조효제 우스갯소리로 대운하로 득 볼 사람들은 건설회사랑 말씀하신 대로 땅 가진 사람들 그리고 인근 밥집들밖에 없을 거라고들 합니다.(웃음) 실제로 저는 이 문제도 민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원칙으로 대응해야 하고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까 말씀하셨던 통일부 논의와 관련해서 본격적으로 새 정부가 내세우는 북핵 해결, 대규모 경제지원 맞교환 주장이 이명박식 통큰 주장이기도 하죠. 그런데 제가 좀더 걱정하는 부분은 한미공조를 강화해야 한다든가 북한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상호주의라는 측면 외에도 단순한 형식논리 차원에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이 있는 듯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낙청 북핵문제는 국제적인 현안이고 우리 국민들 대부분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걸 강조하는 게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건 사실이죠. ‘북핵 해결’이라는 것을 어떤 차원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는 그동안 햇볕정책을 통해 추진해온 방안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가령 아직 완료가 안됐지만 불능화 단계가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확실해지는 정도만 돼도 일단 해결 도상에 올랐다고 보고 통큰 경제지원을 시작하겠다고 한다면, 참여정부의 정책과 레토릭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용상 큰 차이는 없는 거고요. 더구나 말 그대로 실행에 옮겨진다면 오히려 이명박정부가 세게 나와서 일을 더 잘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테지요. 반면에 문자 그대로 완전한 핵폐기가 이루어진 다음에 경제협력을 시작하겠다고 하면 이건 안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고 핵폐기를 앞당기는 데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인수위 인사들 중에서 남북관계 경험이 많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무지의 소치로, 일부는 그동안 햇볕정책을 추진해온 김대중-노무현정부를 친북좌파로 공격하던 이념적 성향이 작용해서 지금 통일부 폐지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나는 남북관계에서는 결국 이명박 당선자의 실용주의가 그런 이념적 성향을 이겨내리라고 봅니다. 국제정세도 그렇고, 남북관계에서의 진정한 실용주의가 아니고는 경제 살리기도 안될 테니까요.
그런데 분단체제 극복을 얘기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잘 풀려도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건 현존하는 분단체제보다 더 나은 사회를 한반도에 건설하자는 게 목적이지, 단순히 국토를 통일한다든가 북한경제를 회생시켜주는 게 목적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볼 때 이명박 대통령이 통큰 경제협력을 한답시고 경부대운하사업 같은 걸 북한땅 여기저기에 펼쳐서 남한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난개발의 아수라장으로 만든다면 그게 분단체제의 진정한 극복에 도움이 되겠어요? 차라리 경협이 다소 지체되더라도 천천히 가면서 제대로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요. 이 점에 대해서도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감시해야 할 겁니다. 특히 남한사회 내부에서 인권이나 여성, 환경 같은 아젠다를 내세우는 분들이 분단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개입해야 한다는 거죠. 내가 남한에서 인권을 주장하니까 북한 인권도 해라, 내가 환경운동가니까 북에서 개발할 때 환경조사를 철저히 해라 하는 수준으로는 그냥 구호나 원론적인 요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남북관계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북에서 어떤 얘기가 어느 정도 먹힐 수 있는지 알면서 개입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평소에도 남북관계가 자신이 남한에서 추진하는 운동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실력을 쌓아야겠지요.
조효제 제가 인권문제를 공부하고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랄까, 말씀 중에 북한정부와 관련한 인권문제가 특히 관심이 가네요. 이 문제는 굉장히 폭발성이 크고 잘못하면 남북대화 자체를 경색시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인데, 이명박정부가 상호주의·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인권문제를 말해버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저는 남한의 인권운동가들이 한반도 전체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평소에 얘기해왔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남북정책의 중요 기조로서 북한 인권을 내세운다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고 민감한 효과를 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외국의 인권단체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실제로 그 사람들이 한국 인권문제를 지적해서 제가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해 배우고 깨달았다기보다는 그들이 자기 사회의 인권문제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 게 더 많거든요. 아, 이런 문제로 인권운동을 하고 있구나, 이런 문제까지도 인권문제로 사고하면서 투쟁하고 있구나 하고요. 그래서 저는 북한 인권문제는 체제우월적 논리로 접근할 게 아니라 오히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우리의 치부랄까 우리의 인권문제를 과감하게 개방해 보여주고, 물론 그게 선전·선동으로 이용될 걱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북의 주민들이 남한에서는 저런 것까지도 인권문제로 인식하고 있구나, 저런 것으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북측의 인권의식을 제고하는 훨씬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동감입니다. 그런 활동이 당장에 북측 주민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을 것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내는 건 아니겠지만, 길게 볼 때 방법상으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인간중심, 인간안보형의 선진사회를 말씀하셨죠? 인권문제와 관련해서 나는 원칙적으로 인권문제 자체를 인간안보(human security)라는 틀에서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남쪽 사회에서도 전에는 인권 차원으로 안 보이던 문제가 인권문제로 부각될 것이고, 또 북측의 인권문제를 어떻게 보는 것이 타당할까 하는 면에서도 대략적인 답이 나오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답이고 구체적인 해법은 그때그때 부닥쳐봐야 하는데, 부닥치는 과정에서 나는 남쪽에서 접근할 때는 좀 지혜롭게 역할분담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남북관계를 직접 맡는 사람이, 가령 정부당국으로 치면 통일부장관을 하는 사람이 남북장관회담에 나가서 북의 인권문제를 제기한다면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협상이 안되는 거죠. 그러나 북쪽에서 남쪽 내부에 대해 이러저러한 비난을 하고 비판을 했을 때 우리가 왜 내정간섭을 하냐고 하면 그쪽에서 이건 민족 차원에서 하는 얘기다 하고 응수하는 경우가 있어요. 같은 논리로 어느 시점에서는 북의 인권문제를 얘기하고서 이건 내정간섭이 아니라 같은 민족으로서 민족 차원에서 하는 얘기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지금이라도 다른 부서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시민사회에서도 어떤 NGO는 북의 인권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제기할 수 있고 어떤 NGO는 교류협력사업에 더 치중할 수 있지요.
남북 국가연합 없이는 연착륙도 재이륙도 불가능
조효제 현재 한반도문제를 보는 시각은 대체로 세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북한체제를 기본적으로 저무는 석양으로 보되 다만 그 일몰의 방식을 경착륙으로 가져갈 것인가, 연착륙으로 유도할 것인가 하는 시각차가 존재합니다. 둘째, 북한체제의 앞날을 예상할 수는 없지만 전쟁도 싫고 흡수통일도 싫으니 시간을 끌면서 어쨌든 분단을 ‘관리’해나가자는 소극적 현실주의가 있습니다. 셋째, 노력하기 나름으로 북한을 다시 이륙시킬 수 있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첫째 시각은 셋째 시각을 순진한 이상주의라고 생각하면서 썩은 동앗줄을 쥐고 있다고 보고 시간은 자기들 편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죠. 객관적으로 보아 첫째 시각이 틀리는지, 틀리다면 왜 틀리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백낙청 북한에 대해서 세가지 씨나리오를 제시하셨는데 나 자신의 구상에 딱 들어맞는 건 없는 것 같군요. 우선 나는 경착륙의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한마디로 모두가 불행해지는 길이고, 썩은 동앗줄을 붙들고 그야말로 어물어물 현상유지를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벌써 동서냉전이 종식된 지 오래됐고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인 위세도 어떤 의미로는 그런 현상유지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이고…… 그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재이륙’시킨다고 할 때도 지금 남북을 그대로 두고 다시 이륙시킨다는 말 아니에요?
조효제 이륙시키면서 뭔가 같이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의미입니다.
백낙청 그것이 질문에는 명시되지 않았는데 나는 남북연합이라는 정치적인 장치 없이는 연착륙도 안되고 따라서 재이륙도 불가능하다고 보거든요. 지금처럼 남북이 완전히 따로 선 두 정부를 가진 채 교류협력을 지속해서는 북의 개혁개방이라는 것도 순조롭게 갈 수 없다고 봐요. 참여정부에서 대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사람들이 흔히들 이렇게 해서 북한의 중국식 또는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유도한다고 하는데, 중국이나 베트남은 첫째는 미국으로부터 체제 안전보장을 받은 상태에서 개혁개방을 시작했어요. 물론 북의 경우도 북미수교를 통한 체제보장을 전제로 하는 말이지만, 중국과 베트남은 통일을 이룬 나라들이기 때문에 체제보장 문제가 간단하지만 분단국가는 달라요. 아시다시피 베트남은 미국을 물리치고 통일한 뒤에 개혁에 착수했고, 중국의 경우는 대만문제가 있지만 한반도와 같은 분단상황은 아니죠. 중국은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해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면서 1949년에 실질적으로 통일한 거예요. 대만문제는 분리독립을 막느냐 못 막느냐의 문제이지 중국이 대만에 흡수당할 위협의 문제는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남북관계에서는 미국이 북에 대해서 안전보장을 하더라도 남쪽 사회가 있는한 개혁개방을 하고 교류가 활발해지면 활발해질수록 북의 체제불안이 더 커질 수 있어요. 난민이탈 같은 것이 훨씬 심해질 수도 있고 심지어는 휴전선을 넘어서 탈북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국제사회의 인권문제 제기도 더 강력해질 것이고-
조효제 그러니까 거주이동의 자유를 어느정도 통제하자는 식의 말씀을-
백낙청 그런 식의 자유를 통제하는 거야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 그것만이라면 조교수가 말씀하신 두번째 옵션에 머무는 거죠. 세번째가 재이륙이었는데 재이륙을 하려면 우선 연착륙을 했다가 다시 떠야 하는 문제 외에, 재이륙한 다음에 또 경착륙이냐 연착륙이냐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일이 필요한 거고 이 과정이 대단히 지혜롭고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거지요. 아무튼 우선 연착륙을 제대로 하려면 남북연합 같은 관리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국가연합이라는 건 한편으로는 양쪽 체제를 인정하고 유지시키면서, 그러나 완전한 분립상태가 아니고 일정하게 협력하고 필요할 경우에 합의된 범위 안에서 상호개입도 할 수 있는 장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한번 연착륙하고 끝나느냐? 국가연합의 틀 안에서 연착륙하고 다시 이륙했을 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이게 북쪽 정권의 고민일 겁니다. 남쪽에서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사람들의 은근한 걱정거리이기도 할 거고요. 남북연합을 하면 그만큼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 것 아닙니까? 그때 가서 경착륙을 할 위험을 아무래도 북측 지도부는 고민할 텐데……
조효제 보수파들은 그 점을 파고들거든요. 어떻게 해도 경착륙하게 되어 있다는 거죠.
백낙청 그건 실용적으로 접근 안하고 이념적으로 접근하는 거예요. 북한정권이 나쁜 놈들이니까 경착륙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 남쪽 국민을 포함해서 한반도 주민들 전체의 복지를 위해서 경착륙이 좋으냐 안 좋으냐, 안 좋다면 다른 방도가 없느냐를 진지하게 생각 안해본 거예요. 물론 국가연합 이후에 어떤 경착륙 사태가 벌어지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고 불행해질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 경착륙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위험하고 불행하지요. 파국의 정도도 한결 덜할 것이고 그나마 남북연합이라는 관리장치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우선 국가연합을 만들어놓고 다음번 단계를 대비하는 장치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서 연방제가 좋겠다든가 좀더 높은 단계의 국가연합을 하자든가 합의를 해나가야지요. 국가연합조차 없는 상태에서는 북의 체제에 이변이 생겼을 경우에 우리가 동포로서, 또는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인접지역 주민으로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끄트머리가 없거든요. 지금은 북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건 중국밖에 없어요. 중국과는 동맹관계니까, 일방적으로는 못 들어가지만 북쪽의 당국자가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들어갈 수 있거든요. 나는 그런 사태가 안 일어나리라고 보지만 국제법과 국제정치의 현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조효제 마치 한미동맹과 비슷한 거죠?
백낙청 그렇죠. 자동개입은 아니지만요. 남북연합이 되면 그런 문제는 남북간의 합의를 거쳐서 중국을 불러들이든 미국을 불러들이든 우리끼리 힘을 합쳐 수습하든 하는 거고요.
세 부류의 강경파와 변혁의 비전 없는 온건파
조효제 통일과 관련해서 한가지만 더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 주로 어떤 청중을 염두에 두고 발언하십니까? 제가 이번에 선생님 글들을 읽으면서 선생님 나름의 토론방법의 특징을 추출해냈거든요. 선생님은 논쟁할 때 우선 경우의 수를 다 나열하신 다음, 토론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고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진행하시더라고요.(웃음) 마지막으로는 변증법으로 치면 합에 해당하는 명제를 언제나 앞장서서 제시하기 때문에 논쟁 상대가 황소와 황소가 맞선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황소와 투우사가 맞선다는 느낌이 들면서 상대가 판판이 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께서 한반도식 통일론을 말씀하실 때 항상 두 부류의 청중, 예컨대 북한체제를 경착륙시키겠다고 벼르는 강경 보수파에게만큼이나 민족통일 지상주의를 고수하는 강경 자주파에게 현실성을 갖추라는 계몽의 메씨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선생님은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고 발언을 하십니까?
백낙청 두 세력을 다 염두에 두고 설득하려 한다는 진단은 맞는데요.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느냐 하는 건 경우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되도록 많은 청중을 확보하고 싶어하는 게 발언자의 꿈이지만, 동시에 그때그때 다른 청중을 만나니까 거기 맞출 필요도 있지요. 가령 신문에 기고하는 글이냐 본격적인 학술논문이냐, 아니면 『창비』 같은 데 싣는 중간 정도의 글이냐에 따라 독자층이 달라지는데, 소위 강경 보수파와 강경 자주파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느냐 하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씀을 드리겠고요. 또 하나는 내가 염두에 두는 게 이 둘 말고도 많거든요. 강경 평등파도 염두에 두고 있고, 온건 개혁파라는 사람들 중에서 변혁의 비전이 없는 쪽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조효제 그럼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반대하시는 거죠?
백낙청 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틀렸고 나만 잘났다는 얘기죠.(웃음) 우리 담론진영에서는 적어도 넷을 꼽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 그 넷 중에서 둘을 임의로 골라서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답하기가 어렵다는 거죠.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관점, 그리고 교육문제
조효제 시간상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야겠습니다. 물론 아직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늘 신문에만 해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을 예견하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고, 지금 기세로는 잘못하면 보수정권이 10년을 갈 수도 있다는 걱정까지 드는데요. 그들이 만약 이번 총선에서 개헌할 수 있는 의석을 확보할 경우에는 개헌도 할 것 같고요. 특히 헌법 제119조 2항 국민경제 성장과 적정한 소득분배, 경제민주화와 시장규제에 대한 조항을 분명히 손대려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회과학자가 예견을 한다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고 자기충족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2001년의 ‘9·11’로 미국의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면 한국에서는 앞으로 ‘119’가 문제되지 않을까 싶어요. 제119조 2항의 문제가 굉장히 큰 이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혼자 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약간 논리의 비약이기는 하지만 저는 10년을 내다봤을 때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 사람을 키우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인간안보 중심의 진정한 선진화를 위해서라도 한반도식 전인교육 같은 게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선생님의 지난 발언 중에서 교육을 정면으로 다룬 발언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선생님의 교육관을 여쭙고 싶습니다.
백낙청 지금 사람을 키우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물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보수정권 10년의 가능성을 내비치셨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아까 이미 말씀을 드렸지요. 이명박정부 역시 지금 우리 현실을 제대로 감당하기에는 준비가 안된 정부이기 때문에 5년 후에 국민들의 지지를 다시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노무현정부 5년 동안 못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양극화를 실제로 완화해줄 후보인지 아닌지도 따지지 않고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듯이, 한 5년 지나고 보니까 이것도 아니더라 해서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데 그때 또 한번 준비되지 않은 정권이 들어서는 게 더 우려스러워요. 이 정권이 개헌을 해서 정권을 연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보다는 시계추가 다시 돌아왔을 때 다시 한번 경륜과 역량이 부족한 정부가 들어선다면 그것은 87년체제의 극복이 아니라 정말 질질 끌면서 점점 더 비참하게 연장되는 것이고, 그게 더 우려스럽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을 하는데요.
교육이나 대학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대학교수 생활을 40년은 좀 못 돼도 꽤 오래 했지만, 대학운영 같은 데서는 늘 소외된 처지였고 밖에서 활동을 많이 해서 대학 현장을 잘 안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더군다나 초·중등교육에 대해서는 정말 무지하기 때문에 발언을 아껴온 면이 있고요. 또 하나는 이것이 분단체제의 극복과정과 결부해서 새로운 해법을 찾지 않으면 무슨 답이 나오기가 어려울 정도로 꽉 막혀 있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내가 엊그제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50주년기념 국제심포지엄에서도 그런 얘기를 잠깐 했습니다만, 우리가 제도권 대학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대학에 모든 걸 다 거는 식으로 가도 곤란하고, 대학의 현장이나 대학이 가진 여러가지 자산을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하는 길밖에 없겠다-‘기회주의적’에 따옴표가 있습니다만-일종의 게릴라전을 하면서 추이를 보고 특히 분단체제를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어떤 틈새가 벌어질지 지켜봐야지, 지금 이 상태에서 정규전을 벌여서 이길 수 있는 어떤 전략이 나한테는 솔직히 없습니다. 그런데 분단체제의 극복만 하더라도 이게 아주 현실적인 과제이면서도 추상수준이 있는 명제 아닙니까? 그것과 교육문제를 연결해서 구체적인 제안을 해보려면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조효제 현재 대학 내 인문·사회, 이른바 문과계열의 교육만 놓고 봤을 때 서구의 설익은 이론들이 그냥 유포되고 재생산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자기 제자 키워 외국 보내 공부시키고, 그들이 다시 와서 누가누가 더 빨리…… 제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처음 들었던 얘기 중 하나가, 놀랍게도 “당신 잘 왔다. 아주 따끈따끈한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좋다”였어요. 그때 따끈따끈하다는 건 새로운 얘기, 신선하고 귀한 얘기들이죠.
백낙청 본고장에서 곧바로 건너온-
조효제 그렇죠. 그런 얘기들을 몇년 하다가 그다음에는 재충전한다며 연구유학을 떠납니다. 그러면 외국에 가 늘상 충전받아서 여기에 와 방전하죠. 그런 관점에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얘기가 사실 원론적으로 맞는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더 악화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근대의 이중과제론, 분단체제론, 변혁적 중도주의
백낙청 분단체제 극복만 하더라도 추상수준이 있는 담론이라고 했는데,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고 하면 그보다 더 추상수준이 높은 담론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을 곧바로 현장과 연결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하죠. 물론 그것이 유효한 담론이라고 하면 몇가지 단계를 거쳐서라도 당연히 연결될 수 있어야겠지요. 내 생각에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세계사 차원의 담론이 한반도에 적용될 때는 분단체제 극복론이 된다고 봅니다. 분단체제의 극복은 한반도에서 우리가 근대에 더 잘 적응하면서도 근대극복을 위해서 결정적인 한걸음을 내딛는 과업이 되는 것이니까요. 추상수준을 조금 더 내려서 이것이 남한사회 내에서의 변혁적 중도주의 노선이라고 할 때는, 한반도적인 시각을 갖고 한반도 전체에 제대로 된 선진사회를 건설하자는 목표를 견지하되 그것이 추상적인 담론에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에서의 효과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려면 대체로 중도적인 방향으로 가면서 최대한의 대중적 통합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뜻이지요. 아무튼 구체적인 과제를 놓고 근대에 적응하는 일과 근대극복의 비전을 실현해가는 일이 어떻게 결합될지는 우리가 사안별로 점검도 하고 새로운 방안도 개발하고 해야겠지요. 또 나 자신부터 문학평론을 비롯한 내 관심분야에서 그런 일을 할 만큼 해야겠습니다만, 이건 역시 여러 사람이 협동해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다만 제대로 협동하려면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하는데, 아직 얼마나 그런 공유가 이루어졌는지 의문이지요.
조효제 제가 보기에 일반적으로 비판적이고 깨어 있는 지식인이라면,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테제보다도 근대극복이라는 테제가 훨씬 공감하기 쉬운 하나의 접합점이 되지 않을까요? 선생님께서는 늘상 연결해서 말씀하시지만요.
백낙청 그런 면이 있어요. 나는 그게 오히려 우리 지식사회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근대에 대해서 거대한 담론을 펼치면 쏙쏙 들어오는데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사회를 분단사회로 인식하고 구체적인 우리 남한사회에서의 개혁작업이라든지 여러가지 운동을 그런 안목을 가지고 하자고 하면 힘들고 복잡하니까 회피하고, 마치 분단현실은 없는 것처럼 혹은 있어도 핵심적이 아니고 부수적인 현실인 것처럼 제쳐놓고 얘기하려고 하죠. 그러다 보니까 남한 내에서 하는 일도 제대로 안되고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뭐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지 하는 정도로 넘어가버리고 말지요.
조효제 이중과제라는 말씀을 계속 강조하시는데, 이 개념을 독자들을 위해 좀더 쉽게 풀어주신다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근대주의 및 탈근대주의와 구별되는 이중과제론
백낙청 어떤 개념을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은 그것이 무엇에 반대되는 담론인가를 짚어보는 거겠지요. 우선 이중과제론에서 근대적응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근대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데 우리가 그걸 아직 성취하지 못했다는 담론과 구별됩니다. 근대는 1876년의 개항과 더불어 우리가 타율적으로 세계시장에 편입되는 순간에 이미 우리에게 안겨진 것입니다. 그때 근대로의 전환을 경험했는데 주로 타율적으로 한 것이지요. 이 현실에 어떻게 적응해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근대라는 것이 저 바깥에 있어서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건 아니란 말이죠. 물론 근대사회의 좋은 점들 중에서 우리가 성취해야 할 게 아직 많은데, 그건 근대적응 과업의 일부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그런 좋은 걸 흡수함으로써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근대극복 과업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중과제론은 근대주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가지 근대극복론 혹은 근대에 반대하는 담론 들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근대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보면, 근대 이전의 관점에서 근대 자체의 도래에 항거하는 전근대적인 근대극복론이 있을 것이고,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 같은 게 대표적인 사례겠죠. 요즘에는 탈근대론이라고 해서 근대극복을 내세우기는 하는데, 어떤 이들은 탈근대담론이 나오니까 이미 근대 이후로 들어선 것처럼, 그래서 탈근대시대 또는 근대 이후의 시대로 보는 그런 부류의 포스트모더니즘도 있고, 또다른 경우에는 아직도 시대로는 근대라고 인정하지만 탈근대를 위해서도 근대에 적응하는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소홀히하는 비현실적인 대안들도 많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이론에 반대되는 게 이중과제론입니다. 이러저러한 국내의 정치노선이나 사회운동노선에 반대되는 것이 변혁적 중도주의이듯이 말이죠.
조효제 예의 경우의 수를 모두 나열하고 나서 모두 반대하시는 선생님의 논법이 여기에서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과제를, 굉장히 추상성이 높은 일반 테제를 우리 독자들이 이해하고 구체적인 생활에서 어떻게든 적용해야 할 텐데, 공중전과 게릴라전, 백병전을 같이하는 것이-
백낙청 추상성이 높다는 건 사실 적용범위가 넓다는 얘기니까 섣불리 적용하지 말자는 것뿐이지 어떻게 적용할까 하는 것은 사안별로 끊임없이 탐구해야지요.
조효제 말씀 나온 김에 주체적인 근대적응이나 근대극복이라는 맥락에서 우리의 영어교육 광풍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새 정부의 정책기조도 그렇고, 요즘 영어교육 문제가 거의 혁명적인 이슈가 되어 있는 판이니……
백낙청 보통은 영어 교육이나 학습 문제를 놓고 ‘근대적응과 근대극복’ 운운하면 괜히 아무데나 거대담론을 휘둘러댄다고 욕먹겠지요. 그러나 조교수께서 예로 드셨으니까 그런 발상이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은 할 수 있겠죠. 영어교육을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하고 우리 세대처럼 중학교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더 일찍부터 영어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건 근대적응 과정에서 타당한 명제라고 봐요. 그런데 이것을 근대주의에 매몰되는 형식이 아니라-요즘 하는 일들을 보면 ‘근대주의’라는 표현은 너무 근사하고 그야말로 천민자본주의의 티를 내고 있는 거지만요-정말 근대극복과 일체를 이루는 근대적응 작업의 일부를 만들려면, 발상과 진행방식이 모두 전혀 달라야지요. 광풍식으로 해서는 영어를 제대로 잘 배우는 것도 아니고, 돈있는 사람 위주로 가면서 어릴 때부터 아이들 학대하고 사회갈등도 조장하는 거예요. 근대라는 이 어려운 시대를 헤쳐가면서 더 나은 삶을 개척할 수 있는 모든 주체의 역량을 오히려 박탈하거나 위축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조효제 아예 영어만 쓰는 인간을 키우려 한다면 모를까 이중언어 사용을 목표로 한다면, 상식적으로 봐도 한국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 영어를 어떻게 잘할 수 있을지 어불성설입니다. 영어든 한국어든 언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어느 한국인과 외국인 간의 대화를 들었던 다른 외국인이 제게 전해주기를, 저 사람 영어가 굉장히 유창한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백낙청 내가 서울대 영문과에 오래 재직했지만 대학원까지 나오고 미국에 유학을 간 제자들이 많은데 그중 일부는 그쪽에서 펠로우십이나 어씨스턴트십 등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해요. 교양영어 시간에 조교 노릇을 한다든가 해서 미국 학생들의 문장도 고쳐주고 그럽니다. 그들의 영어가 유창함에서 학생들과 비교가 안되지만 조교 노릇을 곧잘 해냅니다. 왜냐? 이 사람들은 한국 대학에서 한국어 위주지만 그래도 자기 나름으로 교육을 받고 생각하는 훈련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 약간의 영어능력이 더해지면 회화는 유창하게 못해도 미국 대학의 1, 2학년 학생들이 쓴 영어작문에서 말이 안되는 걸 짚어낼 수 있단 말이죠. 지금 조교수가 말씀하신 것과도 통하는 이야기지요. 영어 잘하고 한국어를 못하는 사람이 유창하기만 했지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하는 현상이 나오는 거나, 영어가 비록 서툴러도 한국어로 생각하는 훈련을 거친 사람이 약간의 영어를 습득하면 심지어 미국 대학에서 미국 학생들의 영어작문을 고쳐주고 채점하기도 한다는 것이 앞뒤가 맞는 얘기 아니겠어요?
시대적 맥락에서 평가받는 지식인이 되고자
조효제 마지막으로 도발적인 질문 하나만 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선생님은 현실과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지식인 상과는 거리가 먼 분이신데요. 저는 이른바 확신형 지식인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한국사회의 확신형 지식인의 대표적 사례로서 선생님은 모든 명성과 평생을 두고 이룩해온 성취를 걸 만한 각오로 분단체제극복론을 말씀하고 계신지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싫어하시겠지만 우리 한반도, 한민족의 미래가 잘 풀렸을 때 받을 수 있는 영광, 예컨대 지적재산권 같은 것과, 그 반대일 경우 그것도 선생님의 판단이 잘못된 지점에 있는 경우 제기될 가혹한 역사적 평가까지도 모두 감당할 마음자세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건가요?
백낙청 겁주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웃음)
조효제 아니, 옆에서 막 부추겼습니다.(웃음)
백낙청 확신형 지식인이라는 건 오히려 후세의 그런 상벌에 대해 그다지 개의치 않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내 경우에 확신형 지식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평소에 이게 훗날 어떻게 평가받을까, 잘되면 좋은 평가를 받고 잘못되면 나쁜 평가를 받는데 어떤 것이든 감당하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어떤 발언을 하든 그것이 그 시대에서 받아들여지면 좋고 안 받아들여져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겠느냐, 훗날에 가서 내가 시대적인 한계에 갇혀서 틀린 발언을 했다는 판정을 받더라도 시대적인 맥락에서 생각해볼 때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발언을 하고 행동을 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조효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으로 정리를 해도 될까요?
백낙청 정리는 편할 대로 하세요.(웃음)
조효제 제가 『백낙청 회화록』을 처음부터 봤는데 첫 대담이 선우휘(鮮于煇) 선생과 한 것으로 나와 있던데요. 1968년 1월이었습니다. 정확하게 40년 전인데요. 앞으로도 회화록 5권을 더 내주십사 하는 청을 드리면서, 오늘 좋은 말씀 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2008년 1월 22일,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