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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발랄한 고백과 자아의 개방된 기획

공지영 장편소설 『즐거운 나의 집』

 

 

김은하 金銀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1970년대 소설과 저항 주체의 남성성」 「애증 속의 공생, 우울증적 모녀관계」 「식탁 위의 성정치」 등이 있음. saguaro69@hanmail.net

 

 

즐거운나의집이른바‘정상 가족’의 범주 바깥에서 살아가는 일은 상처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정상 가족’만이 유일무이한‘진정한 가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결핍’혹은‘결손’의 딱지가 붙을 때 불안은 허약한 영혼을 잠식해오기 쉽다. 기실‘정상 가족’은 결코‘정상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기만이고 넌쎈스이다. 친밀성의 깊이, 커뮤니케이션의 평등성, 소통의 진정성 등을 따져 묻기보다 가족의 형식에 집착하는 편협하고도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그럼에도‘정상적인 것’혹은‘평범한 것’은 우리를 쓸데없이 예민하게 하거나 우울을 유발하기 쉽다. 타자의 인정 없이 자기를 긍정하기란 히말라야 설산을 넘는 것만큼이나 힘겨운 일이다.

공지영(孔枝泳) 장편 『즐거운 나의 집』(푸른숲 2007)은‘특별한’가족의 이야기이다. 각기 성이 다른 세명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씽글맘의 집은 익숙한 서사의 무대가 결코 아니다. 이 특별한 가족의 가장은 세번의 결혼과 세번의 이혼이라는‘과잉’의 이력을 소유한 베스트쎌러 소설가이다. “엄마는 이 세상 모든 이혼한 사람의 대표 선수로 뽑혔잖아”(15면)라는 자조적 표현은 그녀가 타인의 일방적이고 무책임한 시선에 마음을 다쳐왔음을 암시한다. “세번이나, 자식을 낳고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했다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아”(186면)라는 그녀의 말처럼, 세번의 이혼은 실패의 경력으로(만) 낙인찍히기 쉽다. 그럼에도 소설은 신파적 감상성을 버리고 유머의 전략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음울하기보다 발랄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엄마의 특기는 그런 것이다. 어디서든 좋은 점을 찾아낸다”(17면)라는 딸의 말처럼 소설가 엄마의 덜렁대고 낙천적인 성격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그것은 고통을 줄이기 위한 감정의 경제학, 즉 감정의 위장술일 수 있지만 여기서 냉소나 풍자 같은 자기방어적인 날카로움을 찾아볼 수는 없다.

유머의 전략은 작품을 회한과 탄식 그리고 자기변명으로 얼룩진 멜로드라마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며, 젊은‘여류작가’의 사생활을 엿보고자 하는 관객의 저열한 호기심도 산뜻하게 배격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젠더 규범을 이탈한 여성을 가부장적 권력의 대상으로 고착화하려는 지배의 권위를 무력화한다. 고백은 젠더 규범을 이탈한 여성들이 사회로부터 면죄부를 얻는 방식으로 활용되어왔다. 고백은 너의 죄를 자인하라는 사회적 압력 혹은 강요의 결과이기도 하다. 자기의 죄를 까발려 스스로를 타락한 여성으로 인정함으로써 그 여성은 사회에 통합될 수 있었다. 특히 눈물은 과오를 뼈아프게 깨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화적 표상이다. 눈물은 무능력과 허약함의 증거로서 여성을 연민과 동정의 대상, 즉 수동적 주체로 위치짓는다. 따라서 유머는 단순히 기질의 승리라기보다 고백을 강요하는 권위에 대한 발랄한 도전이다.

작가의 자전담을 골자로 한 이 작품은 동정의 젠더정치를 거부하고 자아에 관한 성찰적 서사를 제시한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이 소설가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딸인 여고생‘위녕’인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소녀들이야말로 놀라운 집중력과 탁월한 재능으로 자기에 관해 섬세하고도 복잡한 이야기를 풀어내는‘자아의 서사’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자물쇠가 채워진 비밀 일기장, 알록달록한 꽃편지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수다의 경연 등이 말해주듯 소녀들은 사소한 계기만으로도 만남과 이별, 고뇌와 희열, 희망과 절망의 이야기를 무궁무진하게 엮어내는 이야기꾼들이다.‘위녕’역시 그러한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다.‘위녕’은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어린 소녀지만, 놀라운 집중력으로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엮어가며 미래의 시간을 향해 발을 내미는 지혜로운 모험가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배신감에 상처입으리라 짐작하면서도 어린 시절 헤어진 엄마의 집으로 이주한다. 엄마 곁에서만이 애정결핍을 치유할 수 있으며, 엄마에게 가는 것은 십대 시절이 저물기 전 치러야 할 통과의례임을 알아챈 것이다. 소설 말미에서‘위녕’은 또다른 세상을 만나기 위해 다정한 가족을 다시 떠난다.

이렇듯‘위녕’의 이동하는 삶은 세간의 잣대와 규범에 연연하기보다 자기의 욕망과 감정의 지도에 따라 인생을 꾸려온 엄마의 그것과 닮았다.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49면)이라는 스페인 성녀의 말을 빌려, 소설가 엄마는 자신의 여인숙 인생학을 고백한다. “맙소사. 여인숙이 뭐냐구? …… 그건 그러니까 말하자면…… 창밖에 말이야, 벌판 같은 데 불빛 하나 없고 바람이 불어. 그런데 나지막하고 허름한 모텔이 있는 거야. 아주 후지지. 창틈으로 바람은 새어 들어오고 비도 뿌리는데, 겨우 먼 길을 걸어와 누운 거야. 아침부터 먹은 거라곤 배낭 속에 들은 딱딱한 빵 한덩이뿐이고, 해진 신발 틈으로 물이 새고 침낭은 낡았고 내일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 뭐 이런 거 말이야. 그때 올려다본 천장의 어둠은 얼마나 서늘하겠니……”(50면). 사춘기 소녀의 수첩에 적혀 있을 법한 이 인용문은 일상의 거대한 변화, 즉 삶을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불안 들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개방된 기획으로 받아들이는 변화의 징후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 모녀의 이야기는 개인이 기성의 지침이나 습관의 굴레에서 빠르게 탈피해 새로운 자기 찾기를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삶을 지탱해오던 전범들이 회의에 부쳐지는 현재는 사춘기의 시간과 닮아 있다.

이 소설은 일상의 거대한 실험이 여성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위녕’은 단지 어머니의 집으로 지리적인 이동을 한 게 아니라, 폐쇄적인 규칙과 규범에 충실한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다.‘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소설의 제목에서는 가족이라는 집단의 가치를 위해 개인의 욕망이 배제 혹은 억압되어서는 안된다는 작가의 생각이 드러난다. 이 모계가족에는‘아버지의 이름’같은 상징질서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아버지의 부재는 결핍 혹은 상처의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한다.‘아버지’들은 이 새로운 가족의 장에서 외부로 밀려났거나 탈락한 존재인 것이다. 즉 오이디푸스 가족로맨스와 달리 딸은 어머니와 결별하고 아버지의 질서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와 연대한다. 특히나 소설가 엄마는 죄의식 없이 연애하고 딸은 엄마의 욕망을 인정한다. 더이상 어머니는 탈성화(脫性化)된 주체가 아니며, 모성과 여성은 갈등 없이 양립한다.

그러나 엄마의 애인 다니엘 아저씨는 여성을 위해 완벽하게 헌신하는 로맨스소설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다소 진부한 캐릭터이다. 가족의 주검을 제 손으로 거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다니엘과‘위녕’모녀의 관계는 전형적인 이성애 가족 구도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연애의 새로운 재구성이라고 보기 어렵다.‘위녕’모녀가 오랜 시간 헤어져 있었는데도 이렇다 할 갈등 없이 서로를 인정하고 결속된다는 점도 아쉽다. 각기 성이 다른 사춘기의 아이들과 씽글맘이 서로 부딪치고 화해하면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장면이 부재한 틈을, 인생과 가족에 대한 수수께기 같은 일화와 감상적인 경구들이 채우고 있다. 두 아들‘둥빈’‘제제’는 존재감 없이 흐릿하며,‘위녕’은 지나치리만큼 엄마를 잘 이해하는‘착한’딸이다. 스무살이 되어 집을 떠나는 딸에게 쓴 엄마의 편지에‘위녕’아빠와의 결혼과 이별에 관한 엄마의‘고백’이 등장한다.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이 고백의 기록은 그녀 자신이 실패한 결혼생활이 남긴 상처와 딸의 성장기를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음을 뜻하며, 이러한 자책감은 가족 구성원들의 다성적 목소리를 억누르는 소설의 장애요소로 작용한다. 이는 고백을 강요당한 주체가 자기방어와 정당화의 유혹을 쉬이 극복하기 어려움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