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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그분은 저 위에 계셨다
부시 방문 이후의 팔레스타인 일지
오수연 吳受姸
소설가. 소설집으로 『빈집』 『부엌』 『황금 지붕』 등이 있음.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해외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알까딴 문화재단’(Al Qattan foundation)의 초청을 받아 팔레스타인에 체류중임. sohoj@hanmail.net
- 이 글은 지난 1월 10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을 방문해 자치정부의 압바스 수반과 회담한 때를 전후하여 기록한 작가의 현장일지다. 부시는 급진 이슬람 저항운동세력 하마스의 영향력하에 있는 가자지구에는 방문하지 않았다-편집자.
2008년 1월 10일
정오 무렵,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청사가 있는 라말라의 도심 알마나라 광장 주변에는 행인보다 자치정부의 보안대원들이 더 많았다. 소속기관이 다양하여 제복도 다채로웠다. 군청색 경찰복, 검은색 전투복, 초록 베레모를 곁들인 쑥색 군복. 하늘색 제복의 교통경찰만 빼고 다들 총을 어깨에 메고 몽둥이를 등에 꽂고 있었다. 그들의 통제로 주변 모든 상점의 문이 닫혔고, 자치정부 청사 쪽으로 가는 길엔 차는 물론 사람까지 통행이 금지되어 휑했으며, 청사를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 이내의 높은 건물에는 저격수가 배치되어 있다고 했다.
길모퉁이에서 스무명 남짓이‘팔레스타인을 팔아먹지 말라’‘정착촌 먼저 철거하라’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조용히 시위를 했다. 대개 외국인들이었다. 역시 대개 외국인인 카메라맨들과 기자들이 그들을 찍고 취재했다. 1시간쯤 지나 시위대가 피켓을 어깨에 메고 흩어진 후, 빨간 베레모를 쓴 보안대원들이 한 트럭 새로 실려 왔다. 잠시 뒤에 얼룩무늬 제복에 방탄모를 쓰고 무슨 안테나 줄까지 늘어뜨린 보안대원들도 고급스러운 밴을 타고 왔다. 내 옆에서 구경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도 그 최신 보안대는 오늘 처음 본다고 했다.
오렌지 한봉지 사서 집으로 오다가, 나는 진짜 시위대를 보았다. 알마나라보다는 작은 알싸아 광장 부근 언덕배기에서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팔레스타인 국기가 휘날리며 함성소리도 났다. 보안대원들과 카메라맨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뛰어갔고 사방에서 싸이렌을 울리며 경찰차도 몰려왔다. 나도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내가 몇걸음 더 걷기도 전에 이미 시위는 신속히 제압되어 주동자들이 차례차례 끌려 내려왔다. 새파란 팔레스타인 젊은이들. 한명은 코가 깨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를, 다른 한명은 보안대원한테 맞아 어깨가 부러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안대에 끌려가 죽도록 맞고 풀려나든지, 아니면 죽도록 맞고 장기징역을 살게 될 거라고 했다.
시위현장에는 여자들 열댓명이 남아 바닥에 주저앉아 박수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대개 외국인들이었다. 경찰은 팔레스타인 사람이 시위에 낀 듯하면 다짜고짜 끌고 갔다. 하지만 굳은 얼굴로 길가에 서 있거나, 웃으며 친구와 환담하거나, 누구보다 먼저 달려온 노점상에게 차를 사서 마시고 있거나, 아까 지나갔는데 또 지나가는 그 많은 이들이 시위에 낀 건지 안 낀 건지는 매우 모호했다. 한 청년은 경찰이 자신을 붙잡자 경멸하는 표정으로 품에서 외국 시민증을 꺼내 경찰 눈앞에 들이댔다. 경찰은 그를 놓아주었다.
흰 헬리콥터 두 대가 차례로 날아와 머리 위에서 빙빙 돌다 간 다음, 마침내 성조기가 선명하게 찍힌 검은 헬기가 똑바로 하늘을 가로질렀다. 순간 땅에서는 많은 손들이 일제히 그 헬기를 향해 솟구쳤는데, 죄다 손바닥을 위로 하여 다른 손가락은 다 접히고 가운뎃손가락만 쳐들려 있었다.
그분은 저 위에 계셨다.
이 또한 나중에 듣기를, 오늘 그분 때문에 불쾌할 줄이야 팔레스타인 사람들 모두가 예상하고 각오한 바였으나 실제로는 훨씬 더 불쾌했다고 한다. 그분의 경호를 위해 라말라 시내에 풀린 4천명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보안대원들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대열도 잘 안 맞게 서서 담배 피우고 빵 사먹는 보안대원들이지만 필요하다면 자기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그들은 작년 11월 아나폴리스 평화회담에 반대하는 시위대에 발포하여 한명을 죽인 전력이 있다. 그분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오늘, 하루종일 라말라 시내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체포되어 끌려갔다. 그분은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 수반의 안내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청사에 들어가서 말했다. 압바스 수반 휘하의 보안대를 현대화하는 일을 이스라엘이 도와줘야지 방해해선 안된다고. 서안(West Bank)지구의 자치정부 보안대가 강화되어 가자(Gaza)지구의 하마스(Hamas)를 억눌러야 한다는 뜻이었겠으나, 그들이 억누를 대상은 하마스만이 아니었다.
1월 15일
나블루스 외곽 알발라타 난민촌은 그새 많이 바뀌고 길도 더 복잡해진 듯했다. 2003년에 나는 국제연대운동(International Solidarity Movement)의 회원으로 자살폭탄 공격자‘지하드’의 집에 한동안 머무른 적이 있는데, 오늘 5년 만에 오니 그 집을 다시 찾기가 힘들었다. 동행한 팔레스타인 친구가 길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순교자 지하드네 집이 어디지?”
“어느 지하드? 여기는 순교자 지하드가 여럿이야.”
“지하드의 사촌이 무함마드라고, 무장저항단 지도자였어.”
“여기는 무장저항단 지도자 무함마드도 여럿인데?”
“이스라엘군한테 암살당한 사람이야.”
“여기는 이스라엘군한테 암살당한 사람이 수두룩한걸?”
무함마드의 집을 먼저 찾아 차를 대접받고, 무함마드 누나의 안내로 지하드네 집에 갔다. 지하드의 어머니는 부엌에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커다란 양푼에 밀가루 반죽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5년 전보다는 양 볼이 좀 늘어졌지만 표정과 눈빛은 그대로였다. 다시 차가 나왔다. 여전히 밤마다 이스라엘 지프가 난민촌을 누빈다고 했다. 무함마드의 집은 이스라엘군이 두번이나 무너뜨려 다시 지었다고 했고, 지하드의 집도 이스라엘군이 수색한다며 폭발물을 터뜨린 탓에 1층이 전소되어 벽돌로 대충 입구만 수습해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요즘도 이스라엘군이 심심찮게 창문에 대고 총을 쏘고 폭발물을 던져넣어, 두 집 다 바깥벽은 물론 집 안벽에까지 총알구멍이 숭숭 나고 검게 그슬린 자국이 있었다. 찻주전자가 반도 비지 않았건만 커피가 또 나왔다.
지하드의 집 현관 위에는 지하드의 사진이 붙어 있고, 무함마드의 집 거실 벽에는 심장 모양의 붉은 장식이 둘 걸려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 이스라엘 감옥에 들어가 있다는 표시인 그 장식은, 얼마 전까지는 무함마드네 집에 둘이 아니라 세개였다. 장남 무함마드가 암살당한 후로 그 밑의 동생 셋이 줄줄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얼마 전에 한명이 나왔다고 했다. 무함마드와 지하드는 외사촌간이니, 지하드의 어머니와 아직도 감옥에 있는 두 아들을 번갈아 면회 다닌다는 무함마드의 어머니는 자매다. 자기 동생도 이스라엘군을 공격한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올해로 3년째 감옥에 있다는 나의 동행은 말했다.
“물론 가슴이야 아프지만, 우리는 슬프지 않다. 우리는 순교하거나 감옥에 있는 가족이 자랑스럽다.”
나블루스에서 나오는 길에 알후아라 검문소를 통과하는데, 나는 외국인이고 여자라 40분 걸렸지만 동행은 팔레스타인 청년이라 1시간 반 걸렸다. 팔레스타인 남자들은 허리띠까지 풀어 이스라엘 군인들한테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검문소 철문을 밀고 나올 때 한손에 허리띠를 든 채로 다른 한손으로는 바지 허리춤을 쥐고 바짓가랑이를 질질 끌었다. 마치 강간당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합승 택시를 타고 라말라로 출발했으나, 얼마 못 가 두번째, 또 얼마 못 가 세번째로 오늘따라 까다롭게 구는 검문초소에서 줄서서 기다려야 했다. 라말라에 거의 다 와갈 무렵 또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날아다니는 검문소’(이스라엘의 이동 검문소)였다.
저녁도 거른 채 라말라에 도착해 소식을 들었다. 오늘 가자지구를 이스라엘이 대대적으로 공습하여 스무명이 죽었다. 그분이 왔다 간 결실로 바로 어제 14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총리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나 평화협상을 시작했다고 했건만. 알마나라 광장에서는 추모시위가 벌어졌는데, 거기 있었던 한 친구에 따르면 보안대가 와서 관공서로부터 시위 허가를 받았느냐고 따지면서 한 피켓의 문구를 특히 문제삼았다고 한다. 그 문구는 이랬다. “하나의 땅, 하나의 피. 고마워 부시!”(One Land, One Blood, Thank you Bush!) 그 친구는 말했다.
“2002년 아라파트의 청사가 공습당했을 때 라말라 시민들은 한밤중에 시위하러 나갔다. 그때는 허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있건만, 왜 점령 반대 시위를 하는 데 허가를 받아야 하는가? 자치정부의 보안대가 질서를 단속할 필요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침략부터 단속해야 하지 않겠나? 적어도 우리가 살육당하도록 놔두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이 정부가 있을 필요가 무엇인가?”
오늘 텔레비전에서 가자의 사상자들에 대한 뉴스가 나온 후, 다음 뉴스가 그분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왕자와 춤추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1월 18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완전히 봉쇄하고 폭탄을 쏟아붓고 있다. 그분이 중동순방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저께 16일, 서안 전역에 걸쳐 가자 공습에 항의하는 파업이 벌어졌다. 라말라에서도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영향을 미쳤다면 팔레스타인 자체의 경제가 하루치 못 돌아갔다는 정도랄까. 이스라엘 국방부장관은 이번 공습이 하마스가 쏜 20발의 로켓포에 대한 보복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그런데, 잠깐만, 어느 20발? 작년 11월 아나폴리스 회담 이후 가자에서 이스라엘로 날아간 하마스의 로켓포는 200발도 넘으며, 키부츠에서 봉사하던 에꽈도르인 한명이 죽고 이스라엘인 여러명이 다쳤다. 그리고 같은 기간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죽은 가자 사람들은 115명이 넘는다. 가자에서 보낸 것은 이스라엘 신문들이‘날아다니는 파이프’라고 비하해서 부르는 사제 로켓이고, 가자가 받은 것은 미사일과 무인전투기의 요격이었다. 이스라엘은 아나폴리스 회담 이전에도, 작년 6월 가자를 봉쇄하기 전에도, 작년초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이기기 전에도, 재작년에도, 십년이나 이십년 전에도 가자를 폭격하고 있었다. 또한 이번에 그분이‘평화외교’를 하려고 오기 전에도, 와 있는 동안에도 폭격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분이 가자마자 대공습을 감행했다. 이 공습이 대체 어느 로켓포 20발에 대한 보복일까?
20발이든 200발이든, 그 로켓포들은 왜 이스라엘로 날아갔는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 어디든지 가고 싶은 데 가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느 도시, 어느 거리, 어느 집, 어느 산, 어느 들, 어느 밭, 마지막 자투리땅까지 이스라엘은 빼앗거나 봉쇄하거나 폭발물로 날려버릴 수 있다. 이스라엘이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든 갈 길 막고 몇시간 길바닥에 세워두거나, 아예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서서히 생필품을 끊어 굶기거나, 감옥에 처넣거나, 불특정 다수와 함께 폭사시킬 수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의사와 결정에 따라 살든지 죽는 것만이 허락되어 있다. 또는 저항하든지.
로켓포와 미사일이 왔다갔다 할지언정, 이것은 상호보복전이 아니다. 피맺힌 원한 따위는 더구나 아니다. 간단하다. 원인도 결과도 점령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유엔 결의안마저 어기며 팔레스타인에서 물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흘 전에 다녀온 알발라타 난민촌에서 오늘 또 한 청년이 이스라엘군한테 살해당했다. 길가 벽이 순교자의 포스터로 도배되고 이미 붙어 있는 포스터 위에 새 포스터가 붙는 그곳에, 또 한명의 순교자가 추가되었다.
1월 21일
지난 15일 이후 가자에서 37명이 죽고 120명이 다쳤다. 텔레비전에 가자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 장면이 나왔는데, “이게 부시가 남긴 것이다”라는 피켓이 많았다. 어떤 피켓에는 유아들이 분유가 없어서 굶주린다는 뜻으로 빈 젖병이 붙어 있었다. 목발 짚은 할아버지, 휠체어 탄 장애인 들도 시위에 나왔다. 아버지 품에 안겨 나온 네다섯살짜리 남자애는 손에 종이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오늘 라말라 알마나라 광장에서 다시 촛불시위가 있었다. 밤마다 어디선가 총성과 싸이렌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 나는 이스라엘군이 쳐들어오는 줄 알았으나,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팔레스타인 보안대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낮에도 싸이렌을 울리며 차들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밤마다 이스라엘군이 출몰하는 나블루스에도 낮에는 총을 멘 보안대원들이 많이 보였는데, 밤에 이스라엘군이 오면‘도망가든지’또는‘도망 못 가 이스라엘군하고 마주쳐 모욕당하든지’한다고 했다.
얼마 전 내가 라말라 외곽 잘라존 난민촌 어린이쎈터에 갔을 때, 아이들이 외국인인 내게까지 물었다. 파타(Fatah)야, 하마스야? 파타당이 주도하는 서안의 자치정부는 하마스를, 가자를 장악한 하마스는 서안의 자치정부를 비난하며 서로 보안을 강화한다. 누구라도 자치정부를 비판하면 하마스라고 몰리고, 하마스를 비판하면 압바스와 한통속이라고 몰린다. 그러나 자치정부나 하마스나 중요한 면에서는 똑같다. 둘 다 일반인들 위에 있다. 가자의 하마스도 시위 탄압, 언론 감시, 구타와 고문을 자행한다.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Zakaria Muhammad)는 말했다.
“이제는 파타와 하마스 중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다.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은 실패했고 우리는 대안이 없다. 이것이 진정한 위기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우리에게 이스라엘과의 합의를 통해 독립을 이룰 가능성이 있으며 늘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말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정권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년 동안 협상하여 얻은 게 무엇인가? 전혀 없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하마스가 가자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협상을 통해 우리에게 독립을 줄 생각이 없으며, 미국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관리할 뿐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앞으로 100년을 더 협상하고 앉아 있더라도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발밑에 아무것도 없음을, 우리가 환상 위에 서 있었음을 깨닫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원칙 없는 평화협상은 이스라엘에 이로울 뿐이다. 우리는 점령당한 사람들이며, 평화가 아니라 정의가 필요하다. 평화 절차가 아니라 점령 철폐 절차를 시작해야 한다.”
영문 월간지 『디스 위크 인 팔레스타인』 작년 12월호에 실린 「가자에서는 두시간이면 충분하다」라는 싸미 압델-샤피의 기사에서, 가자의 한 마부가 이런 말을 한다.“내 평생 중력의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느낀 적이 없건만, 요즘 그래요. (…) 중력이 다시 돌아오면, 이 땅이 사람들 머리 위로 무지막지하게 떨어질 거예요. 여기가 없어져버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말이에요.”‘중력의 감각을 잃다’(lose sense of gravity)는 현실감을 잃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뜻의 아랍어 관용구로, 이 기사에서는 현실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상황이 끔찍하다는 표현일 것이다. 가자 사람들만이 아니라 서안 사람들도 그런 듯하다.
1월 22일
유엔 안보리 회의에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에 대한 비난성명서를 채택하자는 안건이 올랐는데, 미국이 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이스라엘을 옹호하고 하마스에 책임을 돌렸다는 것이다.
이게 뭐야, 이게. 그분이 여기 오든지 가든지 어차피 쇼라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그래서 한 친구는 데모조차 시간낭비니 그동안 제 할 일이나 하겠다고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했지만, 그분은 쇼만 하고 간 게 아니었다. 워싱턴의 그 중대한 자리를 잠시 비우고 굳이 대서양을 건너와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헬리콥터로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며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흰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자기 발밑에서 오글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쪽으로 향하고, 다른 손가락들은 다 접고 가운뎃손가락 하나만 세웠다. 그분은 그러려고 여기 왔다 갔다. 그걸 위해서 이 먼 길 왔다 가야만 했다.
1월 25일
이틀 전인 23일 하마스가 이집트 국경의 장벽을 뚫어, 가자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려고 이집트로 파도처럼 밀려갔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고사시키려고 가자지구를 봉쇄한다지만, 그럴수록 하마스를 진정한 투사로 부상시킬 뿐이다. 사실 이스라엘이 가장 좋아하는 파트너는 하마스라고 말하는 이들이 제법 많다. 가자지구에 하마스가 있어야 이스라엘은 대내적·대외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가자에 폭탄을 퍼부을 수 있으므로.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나는 어제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우리말 기사를 보고 놀랐다.
팔레스타인 무장대원 정착촌 난입 4명 사상
뉴시스|기사입력 2008-01-25 06:20
〔예루살렘〓AP/뉴시스〕 팔레스타인 무장대원 2명이 24일 이스라엘 정착촌에 난입해 흉기를 휘두르다가 사살됐다고 현지 경찰이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무장대원 2명이 이날 늦게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서안지구의 크파르 에치온 정착촌 내 신학교에 들어와 학생 3명을 칼로 찔렀다. 이들은 긴급 출동한 경비원들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됐다고 경찰은 전했다. 긴급구조대는 부상당한 학생 2명을 바로 병원으로 후송해 치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는 별도로 팔레스타인 무장괴한이 이날 예루살렘 외곽 슈아파트 난민 수용소 밖에서 이스라엘 주민을 향해 총기를 발사해 2명에 중상을 입혔다.
‘이스라엘 정착촌에 난입해 흉기를 휘두르다’니. 경비 삼엄하고 이스라엘 군대가 보호하는 정착촌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어떻게‘난입’한단 말인지? 팔레스타인 사람은 단순노동을 하러 정착촌에 들어갈 때도 줄서서 철저한 조사를 받아야 한다. 정착민을 공격하려면 몰래 숨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예루살렘 외곽 슈아파트 난민수용소 밖에서 이스라엘 주민을 향해 총기를 발사해’라는 문구도 이상하다. 총에 맞은 그 이스라엘 주민들과 난민수용소의 관계는 무엇일까? 아무 관계 없고 그들은 그냥 난민수용소 근처를 지나가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맞은 걸까? 혹은 그들은 난민수용소 주민들인데 수용소 밖에 나왔다가 총에 맞은 걸까? 또는‘팔레스타인 무장괴한’이 난민수용소 밖에서 안으로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았단 말일까?
그 기사의 출처인 AP통신 24일자 영문 기사를 찾아보았더니, 첫번째 사건은 “2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서안지구 정착촌에 있는 신학교에 침투하여 학생들을 공격했다. (…) 공격자들은 스터디홀에 들어가 학생들을 칼로 찔렀으며 경비원한테 사살당했다. (…) 그 2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병사로 위장했다고 한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두번째 사건에서 총에 맞은 이들은 이스라엘 국경경찰들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내가 알기로 그 근방에서 두번째 사건이 벌어진‘슈아파트 난민수용소’란 팔레스타인 난민촌이다. 1948년과 1967년 두차례에 걸쳐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이 모여 사는 난민촌이니 당연히 서안지구에 있다. 그 근처에 이스라엘 국경경찰이 들어와 있을 권리가 없다. 그들이 들어와 있는 게 바로 불법점령이다. 또한‘이스라엘 국경경찰’은 서안지구 내 이스라엘 정착촌 설립을 경호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인티파다(intifada)를 진압하는, 이름과는 동떨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특수경찰이다. 경찰이라기보다는 군대에 가깝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다.
로이터통신에는 첫번째 사건이‘점령당한 서안지구에 있는 유대인 정착촌에 침입한 2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정착민들이 제압하고 사살했다’고 씌어 있다. 두번째 사건에 대해서도 총에 맞은 이스라엘인 2명 중 죽은 이는‘준(準)군사적인 국경경찰’이며 부상당한 이는‘이스라엘 안보기관’(ISS) 소속이라고 나와 있다.
같은 사건들에 대한 우리말 기사는 너무 다르다. 오역이나 실수 이상이다. 친(親)팔레스타인적일 필요야 없더라도, 이렇게 반(反)사실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 기사만일까. 이제껏 내가 보고 들은 아랍이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이랬을까. 또 앞으로도 얼마나 이럴까.
이곳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이 두 사건을 일으킨 청년들이‘저항투사’들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점령이 끝나지 않는 한 이어질 독립투쟁의 일환이면서도, 요즘 상황에 대한 명백한 메씨지를 담고 있다. 즉 가자 봉쇄에 대한 반응이다. 마치 죽는 게 직업인 것처럼 연일 죽어나가도 가자 사람들은 갇혀 있는 탓에, 로켓포 말고는 이스라엘에 항의할 방도가 없다. 그들 대신 서안 사람들이 메씨지를 전한 것이다. 봉쇄를 풀라고.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자명한 이 맥락을 지구상의 몇퍼센트가 알아줄까.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나날이 또 급격히 점점 더 무거워지는 짐을 지고 있는데, 누군가 당장 일어나서 버텨주지 않으면 단체로 깔려버릴 테고, 버티던 사람이 꺾어지면 다음 사람이 제꺽 일어나 버텨줘야 하고, 그다음 사람, 또 그다음 사람……
1월 26일
서안지구를 둘러싼 8미터 높이의 장벽을 보고, 나는 아찔했다. 상상을 초월한,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 그 어떤 몽상가도 감히 꿈꾸지 못할, 아무리 창의적인 사람도 이런 발상이 떠오르기는 힘들 비현실이 실제의 현실이 되어 눈앞에 쾅 떨어진 듯했다. 이를 시인 키파 판니(Kifah Fanni)는‘이스라엘의 초현실주의’라고 풍자적으로 표현했다. 그도 그분의 중동순방에 대한 그분 자신의 평가에 동의했다. “눈에 띄는 진전이 있었다.” 다만 반대 방향으로. “부시는 여기 직접 와서 이스라엘에 밝고 선명한 청신호를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이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계획을 이제 실행해도 된다고.”
그분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방문은 헛되지 않았다. 무척 효과적이었다. 그분의 말대로‘현실을 감안하여’서안지구 깊숙이 파고든 이스라엘 정착촌을 인정한다면, 서안지구는 서로 연계성이 없는 파편으로 조각난다. 이스라엘을‘유대인국가’로 인정한다면, 이스라엘 안에 있는 125만 팔레스타인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쫓겨 오게 된다. 해외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돈으로‘보상’하겠다는 건,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돌아올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해외 팔레스타인인들의 귀환을 막고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쫓아내고, 그들과 서안지구 사람들을 고립된 몇개의 도시에 몰아넣는다는 자기들의 최종목표를 향해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설마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 수야 있겠느냐고, 내가 고개를 젓자 키파 판니 시인은 물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립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집에 재워둔 아기를 데리러 갈 새도 없이 고향에서 쫓겨난‘나크바(재앙)’, 1967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전영토 점령, 오늘날 서안지구를 완전히 포위해버린 장벽,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가자의 봉쇄,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느냐고. 그런데 일어났지 않느냐고.
“이스라엘은 가능한 한 많은 땅을 우리한테서 빼앗고, 가능한 한 많은 인구를 우리에게 떠넘기려고 할 것이다. 깡통 같은 도시 몇개에 우리를 가두고는 우리더러 그걸 국가로 생각하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부르주아를 우리 위에 앉히고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면서, 책임은 하나도 안 지려 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런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호할 것이다.”
가자와 이집트 국경에 이집트 국경수비대가 장벽을 다시 세우면 하마스가 도로 무너뜨리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틀 전인 24일 다보스포럼에서는 이스라엘 외무장관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외무장관한테 하마스와 협상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한때 점령 반대와 독립 쟁취라는 하나의 우산 아래 있었던 팔레스타인이 분열하고 있다. 서안과 가자, 파타와 하마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이라는 바람직한 모토는 이제 한 분파의 모략으로 전락했다.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라크, 레바논,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랬듯이. 아랍권에서 권장받는 나라는 결국 내부적으로 심각한 갈등을 안은 불안한 나라다. 그리고 그 모든 분파들은 꼭 보통사람들 머리 위에서 갈등한다. 그 분파들 위에 더 강력한 집단과 세력 들이 있고, 또 그들 위에 더더욱 강력한…… 저 위에 그분이 계셨다. 하지만 아랍의 석유를 깔고 앉은 이 비대한 세계의 저 밑에는 무엇이 있나. 석유가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인류는 무엇 위에 서 있을까. 나도 중력의 감각을 잃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