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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토오꾜오와 서울에서 쁘리모 레비를 읽는다

 

 

서경식 徐京植

재일조선인 작가, 토오꾜오케이자이대(東京經濟大) 교수. 저서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대담집 『만남』 등이 있다. kysuhkr@hotmail.com

 

  • 쁘리모 레비 20주기를 기념하여 이딸리아 피렌쩨대학에서 세계 각국의 레비 연구자 15명의 글을 모은 기념 논문집이 간행되었다. Voci dal mondo per Primo LeviIn memoria, per la memoria, Firenze University Press 2007. 여기에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필자가 참여했으며, 이 글은 그 논문집에 기고한 글을 축약한 것이다.

 

 

1. 시작하며-두편의 영화

 

쁘리모 레비(Primo Levi)가 이딸리아 또리노시 레 움베르또 거리의 자택에서 목숨을 끊은 지 20년이 지났다. 또리노에서 태어난 유대계 이딸리아인 쁘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강제수용되었다가 극적으로 생환해 잔혹한 정치폭력의 시대를 증언한 작가였다. 그가 자신의 삶과 충격적인 죽음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던진 물음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2007년 4월 토오꾜오에서 열린 이딸리아영화제에서 다비데 페라리오(Davide Ferrario) 감독의 영화 「쁘리모 레비의 길」(2006)이 상영되었다. 이 영화가 쁘리모 레비의 작품 『휴전』(Latregua)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라고 들었지만 나는 내심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왜냐하면 10여년 전,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한 프란체스꼬 로지(Francesco Rosi) 감독의 영화 「머나먼 귀향」(The Truce)을 보고 너무나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지 않았다. 쁘리모 레비가 남긴 메씨지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희석하고 있었다. 그 점이 가장 잘 드러난 대목은 쁘리모 레비를 비롯한 이딸리아 수인들을 태운 귀환열차가 뮌헨역에 일시 정차하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역에서 노역에 시달리던 전 독일군 병사가 쁘리모 레비들을 보곤 회한과 고뇌에 찬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원작의 장면은 정반대다. 원작에 따르면, 열차의 정차 중에 역 주변을 돌아보던 쁘리모 레비는 강제수용소에서 생환한 사람들을 직접 목격하고도 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고 완강히 입을 다물고 있는‘독일인’들의 모습을 봤던 것이다.

로지 감독의 영화가 제작된 것은 1996년이었다. 대략 쁘리모 레비 사후 10년의 일이었다. 대중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그 오락영화를 보고, 나는 불과 사후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쁘리모 레비도 이렇게 화석화되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나 페라리오 감독의 로드무비가 공개된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후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을 방랑한 끝에 8개월이 걸려서 또리노에 귀환한 쁘리모 레비의 길을 60년이 지난 지금 페라리오 감독은 되짚어간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로루씨, 루마니아 그리고 그 뮌헨역의 장면에서는 신(新)나찌의 모습, 차례로 변해가는 계절과 풍경,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에 쁘리모 레비 작품의 낭독이 덧씌워진다.

페라리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 쁘리모 레비와 우리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쁘리모 레비의 이야기를 극영화로 직접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 판단은 분명 현명했으며 필연적인 것이었으리라. 쁘리모 레비의 생애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증언의 불가능성, 다시 말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편에서는 쁘리모 레비가 남긴 메씨지를 화석화하는 흐름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그를 소환하여 대화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러한 두가지 정신적 운동의 명료한 대비를 나는 쁘리모 레비의 사후 20년에 토오꾜오에서 목격했다.

 

 

2. 소수자로서의 공감

 

이딸리아라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의 구석에서 반나찌주의 투쟁이나 홀로코스트와 전혀 관계가 없는 듯 보이는 한 인간이 왜 쁘리모 레비에 깊은 관심을 품게 되었을까.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 세계의 타지역 사람들에게 동아시아의 컨텍스트에서 쁘리모 레비가 어떻게 읽히고 있는지 추측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나는 1999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プリ-モ.レ-ヴィへの旅)』(한국어판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창비 2007)라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이 책으로 토오꾜오 이딸리아문화회관에서 수여하는 마르꼬뽈로상을 받았다. 그 수상식에서 내가 밝힌 인사말의 일부를 소개한다.

 

조선민족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시인 중 한 사람인 한용운은 자신의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꽃의 님이 봄비라면 주제뻬 마찌니의 님은 이딸리아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한용운은 승려이면서 1919년 3·1독립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독자적인 사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처럼 이딸리아의 마찌니(Giuseppe Mazzini)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조선인이 한용운의 시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것은 많은 조선인의 마음에 마찌니의 이름이 동경과 존경의 뜻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님’이란 본래‘사랑하는 사람’이나‘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에 붙이는 조선어 특유의 경칭입니다만, 한용운에 의해서 이 말이 지시하는 이미지가 보편적으로 확장됨으로써 독립이나 자유, 그리고 인간적 해방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동경 등의 의미를 함축하는 특별한 말이 되었습니다. 우리 조선인은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던 나날들, 그리고 이어지는 민족분단과 군사독재의 나날들, 그러한 현실들로 초래된 이향(異鄕)에서의 이산의 나날들을 바로‘님’에게 호소하며‘님’을 초조하게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금세기 초에 한용운에게 마찌니가 그랬듯이 세기말에 재일조선인인 내가 쁘리모 레비의 작품과 사상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나의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20세기를 특징짓는 식민지 지배, 세계대전, 인종차별과 대량학살 같은 수많은 악몽들에서 우리 인류가 분명히 손을 끊을 수 있는 길을 구하는, 정처없는 여행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내가 쁘리모 레비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나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미 시사한 대로 소수자로서의 공감이다. 일본사회의 소수자인 나는 이딸리아의 소수자였던 쁘리모 레비에게 각별히 공감하고 있다. 가령 『주기율표』(Il sistema periodico, 1975, 한국어판은 돌베개 2007)에 수록된 「아르곤(Ar)」에는 19세기라는‘동화(同化)와 해방의 시대’를 살아온 삐에몬떼 지방 유대교공동체의 기억이 유머 넘치는 필치로 그려져 있다.

『주기율표』는 쁘리모 레비라는 한‘유대인’의 자기정체성을 둘러싼 방황과 탐구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내향적이고 개별적인 정신세계를 향해 닫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럽의 인문주의와 자유주의 사상 중에서 가장 양질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휴머니스트의 모습을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소수자인 나는 『주기율표』를 읽고 공적인 역사에서는 쉽게 이야기되기 어려운 우리의 역사가 그 세부 감정에서 어떻게 이딸리아의 소수자의 경험과 공통되는지 느끼고, 이른바‘소수자의 보편성’이라고도 할 만한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수자와 소수자를 나누는 장벽을 넘어서기 위한 혹독하도록 아름다운 비전이 전해지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소수자로서의 공감이라는 이 첫번째 요소에 대해서 더이상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나머지 두 문제의식,‘증언의 가능성과 불가능성’과‘기억의 투쟁에 대한 참여(engagement)’라는 문제의식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 생환하여 증언하다

 

쁘리모 레비의 대표작 『이것이 인간인가』(Se quest eun uomo, 1958, 한국어판은 돌베개 2007)는 일본에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어느 이딸리아인 생존자의 고찰』(朝日新聞社)이라는 책으로 1980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일본은 나찌주의와 홀로코스트에 관한 서적이 대단히 많이 번역 출판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증언문학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빅토르 프랑클(Victor Frankl)의 『밤과 안개』는 1961년에, 엘리 비젤(Elie Wiesel)의 『밤』은 1967년에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안네의 일기』도 스테디쎌러 중 하나이다. 이 작품들이 1960년대에 이미 널리 알려진 것과 비교하면, 쁘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주 뒤늦게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에게는 이미 나찌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하나가 미지의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쁘리모 레비가 제시한 메씨지의 성격에서 보더라도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메씨지는 사실 그 자체를 알리기보다 그 사건이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에 관해 고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개인적인 체험기로서도 뛰어날 뿐 아니라, 그 범위를 넘어서 더 깊은 그리고 더 보편적인 수준에서 현대의‘인간’그 자체의 위기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이 책은 과거에 잔혹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증언이 전달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위기,‘인간’은 증언에 귀를 기울여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공포스러운 위기에 대해서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이 간행된 1980년 봄, 나의 두 형은 9년째 한국에서 옥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나고 자란 형들은 1960년대 말부터 한국에서 유학했는데, 60년대 초에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강제적인 개발독재정책을 추진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70년대에 접어들자 점차 독재권력을 강화하고 영구집권을 꾀하기 시작했다.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반정부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박정희정권은 “북조선의 스파이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며 간첩단 검거를 선정적으로 발표했다. 그‘간첩단’의 지도자로 나의 형들 이름이 공표되었다.

그들은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고문을 받았다. 형 중 한 사람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또 한 형은 징역 7년을 선고받았는데, 형기가 만료된 후에도‘재범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구속이 연장되었다. 그들이 정치범으로서 옥중에 있던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의 시대가 이어졌다. 옥중의 정치범에게 고문과 학대가 반복되었다.

1979년 독재자 박정희가 자신의 측근에게 암살되고, 드디어 한국에도 민주화의 기회가 도래했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1980년 5월 계엄령을 선포한 전두환 장군은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스스로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다. 특히 광주에서 확산된 반정부운동에 대한 공수부대의 잔혹한 군사적 진압은 다수의 희생자를 냈다.

이러한 때에 나는 쁘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만났던 것이다. 게다가 형들을 면회하기 위해 멀리 일본에서 한국의 감옥을 계속 오가던 어머니가 같은 시기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물론 나찌 강제수용소와 한국의 정치범 감옥이 같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모독이 일상화되던 한국의 정치범 감옥은‘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신화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철저히 주입시켰다는 점에서 쁘리모 레비가 수용되었던‘부나’(Buna)와 공통점이 있다.

그럴 때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나는 커다란 격려를 받았다. 물론 그 격려는 낙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책에 그려진 것은‘배려’‘연민’‘이성’‘양심’‘대화능력’등 우리가 통상‘인간적’이라고 생각하던 모든 특징이 철저히 파괴된 세계이다. 왜 나는 그러한 책을 읽고 힘을 얻은 걸까. 그것은‘살아 돌아와 증언한다’는 의지의 기능이 여기에 서술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쁘리모 레비는 생전에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연명한 인간형에 대해, 종교적 또는 정치적 신념이 강한 자는 살아남았다고 했다. 신앙심이 독실한 인간에게는‘이세상’의 외부에‘저세상’이 존재한다. 공산주의자에게는‘현재’의 외부에‘역사적 필연성에 따라 실현될 미래의 공산주의사회’가 존재한다. 그것들이‘이세상’이나‘현재’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며, 자신의 희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근거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쁘리모 레비는 자신은 이러한 유형과 다르며, 자신에게는 살아 돌아가 증언하겠노라는 의지가 살아남는 데 힘이 되었다고 진술한다. 살아 돌아가 증언하겠노라는 것은 그 제한된 세계-예컨대 나찌 강제수용소-의‘외부’가 있고, 거기에는 분명 자신의 증언을 들어줄 누군가가, 진정‘인간’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기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령 모든 세계가 강제수용소이며, 그곳의‘외부’따위는 없다고 한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남으며, 누구에게 증언한다는 말인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수용소의 동료‘삐꼴로’에게 단떼의 『신곡』 중 오디쎄우스의 항해 부분을 암송하여 들려주는 장면이다. 레비가 암송한 그 부분은 고난의 항해를 거쳐 귀환하여 증언한다는 이야기이며,‘이성’의 인도에 따라 지옥에서 연옥(煉獄)을 거쳐 천국에 이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인간성의 승리를 위해 증언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쁘리모 레비를 보라. 인간은 아우슈비츠 같은 지옥, 그곳이 인간성의 폐허라고 할지라도 그곳에서 살아 돌아와 증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옥중의 형들에게도 또는 나 자신에게도 언젠가 이 숨막히는 갇힌 장소에서 인간들이 존재하는‘외부’로 살아 돌아가 증언하는 날이 틀림없이 올 것이다.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동반한 투쟁의 결과, 80년대 말에 군사정권시대의 종지부를 찍었다. 내 형들도 20년 가까운 옥중생활 끝에 출옥했다. 겨우 증언의 때를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쁘리모 레비가 자살했던 것이다.

 

 

4. 증언의 불가능성

 

일본에서는 쁘리모 레비의 죽음이 당초 유럽에서만큼 충격적인 화제는 아니었다. 겨우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유럽에서의 논의가 점차 소개되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을 가장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프랑크 시르마허(Frank Schirrmacher)의 「누구나 카인이다」라는 글이다. 본래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1991.2.16)에 게재된 것인데, 일본에서는 『미스즈(みすず)』(1991년 7월호)라는 출판사 광고지에 번역 게재되었다.

 

훗날 보고할 수 있게 고통을 견디자. 이것은 문학의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고 가장 의심스러운 명제 중 하나이다. (…) 타자에게 알리기 위해서, 또 고뇌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고뇌, 고문, 존엄의 상실을 견디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핵심적이고 유화(宥和)적인 양식이 그로테스크한 오해라는 것, 바로 그것이 이딸리아 태생의 유대인 쁘리모 레비의 연대기 안에 표현되어 있다.

 

만약 그가 지적하는 대로라면, 예전에 내가 쁘리모 레비에게서 격려받았던 것도‘그로테스크한 오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쁘리모 레비는 오히려 증언의 불가능성을 우리에게 증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일상적인 상상을 훨씬 초월한 경험은 대부분의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너무나 끔찍한 일을 경험했던 사람은 그 경험이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그 세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통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왜냐하면 끔찍한 경험을 상기하는 것은 그것을 추체험(追體驗)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잔학행위와 폭력이 인간 자신의 상상력이나 표현력을 초월해버렸을 때, 그 경험을 표상하거나 타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를 묻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대부분 자기 주변밖에 보지 못하고, 가능한 한 가까운 장래의 일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그러한 잔학행위와 폭력에 대한 상상력을 스스로 차단함으로써 하루하루를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그것을 체험한 피해자는 증언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대로 침묵한다면 참사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역설이 생겨난다. 피해자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증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증거가 없다든지 허풍떤다고 한다든지 설득력이 없다고 하는 등 증인에게 무신경한 비판을 던지는 것이다.

쁘리모 레비는 이런 아포리아에 도전해야만 했다. 그는 최후의 작품 『익사한 자와 구제된 자』(Il sommersi i salvati, 1986)의 결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젊은이와 대화하기가 점점 곤란해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의무인 동시에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대착오라고 여겨질지 모른다는 위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위험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야기해야만 한다. 개인적인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 우리는 총체적으로 어떤 근본적이고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의 증인인 것이다. 진정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이다. (…) 이것은 한번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 싶은 핵심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우슈비츠에서 막 생환해온 20대 젊은이가 한번에 써내려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구석구석까지 계산된 듯한 중층적인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토대는 바로 그리스·로마신화이다. 그 위에 단떼의 『신곡』이라는 르네쌍스와 인문주의의 서사가 중첩되며, 이것은‘인간성’과‘이성’의 승리를 주창하는 서구 계몽주의사상으로 이어져간다. 더 나아가 그 위에‘홀로코스트’의 서사가 중첩되어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이러한 삼층구조의 서사이다. 하지만 이 삼층구조의 서사는 증언이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성공서사가 아니다. 최상층에서 반전되어 계몽주의적인 인간관의 파국을 맞이하는 서사로 이뤄져 있다.

쁘리모 레비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문화적 영웅’으로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증인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 일인가, 그리고 증언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통찰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하는 점, 결국은 증언의 불가능성이라는 아포리아를 그는 불의의 자살로써 우리에게 제시했던 것이다.

 

5.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1996년 1월, 쁘리모 레비의 묘 앞에 서기 위해서 나는 또리노로 여행을 떠났다. 또리노의 공동묘지는 넓었다. 안내도에 의지해서 한참을 걸은 후에 어렵게 유대인 묘지의 한구석에 있는 그의 묘를 발견했다. 그 간소한 묘비에는 174517이라는 여섯자리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순간 알 수 없었다. 한참 후에 알았지만, 그것은 아우슈비츠에서 그의 왼쪽 팔뚝에 새겨진 수인번호였던 것이다.

그것은 증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 사후에도 증언을 계속하겠다는 의사표명인 듯 보였다. 가령 아우슈비츠 부정론이나 역사수정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의 참사를 잊은 후에도, 먼 훗날에 누군가가 이 수수께끼 같은 여섯자리 숫자를 발견하고 마치 고고학자가 고대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듯 20세기에 실제 존재한 미증유의 폭력의 역사를 복원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바람이 내포되어 있는 듯이 생각됐다.

이 여행의 기록과 사색을 써내려간 책이 앞서 언급한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이다. 2002년 봄, 나는 다시 또리노로 떠났다. 이 책을 기초로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어 거기에 출연하기 위해 촬영팀과 함께 현지로 떠났던 것이다.

우리는 쁘리모 레비의 묘와 레 움베르또 거리에 있는 생가-그가 자살한 현장이기도 하다-를 촬영했다. 또한 몇가지 중요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중 첫번째는 비안까 귀디띠-쎄라 씨와의 인터뷰이다. 그녀는 80세까지 변호사로 활동한 인물인데, 학생 시절부터 쁘리모 레비나 『주기율표』의 「철(Fe)」에 등장하는 싼드로 델마스뜨로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녀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지만, 2차대전 말기에는‘여성의 옹호 및 자유를 위해 싸운 투쟁병사를 지원하는 모임’이라는 조직에 참여해서 저항운동을 했다. 당시 유대인을 숨겨주거나 도피시키는 활동도 해서 쁘리모 레비의 모친이나 여동생과도 연락이 닿고 있었다. 종전 후에도 살아 돌아온 쁘리모 레비와의 친교는 이어졌다. 그가 자살하기 며칠 전까지 함께 경치 좋은 언덕을 산책했다고 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쁘리모 레비가 보낸 「회색의 영역」(『익사한 자와 구제된 자』)이 타이프된 초고를 보여주었다.

두번째는 에이나우디 출판사의 쁘리모 레비 담당 편집자인 바르뗄 바르베리스 씨와의 인터뷰이다. 쁘리모 레비의 작품활동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온 그의 말은 내가 추측해온 대부분의 사항을 보강해주었다. 그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쁘리모 레비는 단지 소설가라기보다‘기억의 작가’이며, 무엇보다도 우선 증인이었다. 현재 역사수정주의나 부정론적인 경향이 보이지만, 이것은 현재의 유럽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하나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이 거꾸로 증언의 역할을 하는 문학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켰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쁘리모 레비의 문학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를 고민케 한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였다. 그는 나찌 독일이 폴란드인에게 한 행동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에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공식적인 유대인 사회와의 교제에서 아주 괴로워하고 있었다. 유대인 사회는 같은 유대인인 그가 이스라엘의 정치에 반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쁘리모 레비 같은 인물에게서 전해 들은 증언을 계승해가는 윤리적인 사명이 우리에게는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줄리아나 떼데스끼 씨와도 인터뷰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었다. 쁘리모 레비의 친구이자 1965년 수용소 해방기념식 때는 그와 함께 아우슈비츠를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오랫동안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앞서의 바르뗄 바르베리스 씨가 그녀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녀의 왼쪽 팔뚝에는 수인번호가 문신으로 남아 있다. “이 번호를 레이저시술 등으로 지우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결코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추운 날씨라도 반팔 옷을 입고 가능한 한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임무이니까요. 그런데‘어째서 그런 곳에 전화번호를 메모해놓고 있어?’라고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6. 기억의 투쟁-일본의 맥락

 

나는 앞서 밝힌 것과 같은 활동들을 내 개인적인 동기로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본에서 벌어진‘기억의 투쟁’에 대한 내 나름의 참여이기도 했다.

유럽의 1980년대를 2차대전 이후 몇차례 있었던‘기억의 투쟁’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타당하리라. 1970년대 서독에서는 빌리 브란트의‘동방외교’로 상징되는‘자유주의 좌파적 컨쎈서스’가 주류의 위치를 차지했는데, 1982년에 기독교민주동맹이 정권을 잡자‘건전한 독일 국민의식’을 전면에 내세우려는 보수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85년에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황야의 40년’이라는 제목으로 국회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 대해서도 장님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호소한 내용으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실제는 좌우 양파의 균형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같은해에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영화 「쇼아」(Shoah)가 공개된 것도 기억의 투쟁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나찌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들이 등장하여 증언하고 있다.

이듬해인 1986년부터‘역사가 논쟁’이 시작되었다.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Ernst Nolte)는 자신의 논문에서 “과거가 사라져가지 않는 것에 불쾌함을 표하며, 이미‘종결’된 것으로 삼고 독일의 과거를 다른 나라의 과거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자 한다”며‘독일 국민’의 심정을 옹호하여 역사수정주의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이에 대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비판을 계기로 논쟁은 1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학문적인 차원에서는 하버마스 측이 승리했지만, 일반 대중의 차원에서는 “언제까지나 나찌 때의 일을 문제삼는 것은 지겹다”고 하는 역사수정주의의 주장이 대중의 마음속에 깊이 침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만년의 쁘리모 레비의 심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가 자살한 것은‘역사가 논쟁’직후의 일이다.

유럽보다 10년 정도 뒤늦게 일본에서도‘기억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1989년은‘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듯이 냉전구조 붕괴에 한 획을 그은 해이다. 냉전기간 한국, 타이완,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에서는 냉전논리로 자기정당화를 꾀하는 권위주의적인 개발독재정권이 존속했다. 이 정권들은 겉으로는 과거의 가해자인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일본과의 정치경제적인 관계를 자신들에 유리한 형태로 유지하는 데 부심했기 때문에, 일본의 전쟁 책임이나 식민지 지배의 책임에 대한 추궁도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어 그 국가들에서도 민주화가 진전되어 권위주의정권이 퇴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피해자 개인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권리와 정의를 요구하는 주체로서 등장하고 일본의 가해 책임을 추궁하게 되었던 것이다.

1989년은 또한 쇼오와(昭和) 천황이 죽은 해이기도 하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최고책임자이자,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의 최고지휘관이기도 했던 그는 결국 스스로 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하지도 않은 채 죽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때까지 그다지 표면화되지 않았던 대립층이 부상했다. 요컨대 다시금 일본의 과거를 상기하고 그 책임을 분명히해야 한다는 주장과, 오히려 과거의 책임을 흐지부지하게 만들어 근대사를 찬란한 서사로 묘사함으로써‘일본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강조하려는 주장이 대립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서히 시작된 일본의‘기억의 투쟁’을 결정지은 중요한 사건은, 김학순(金學順)이라는 한 한국인 여성이 1991년 8월에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은 일본군의‘위안부’였다고 공표한 것이다. 그녀는 얼굴과 실명을 공개한 최초의 옛‘위안부’가 되었다. 그때까지 막연하게만 알려진 채 종종 사실과 반대되는 낭만적인 서사의 조역으로만 인식되어왔던‘위안부’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눈앞에 나타나, 자신이 당한 폭력과 존엄의 부정에 대해서 생생하게 증언을 시작했던 것이다.

김학순 씨의 등장 이후 한국뿐만 아니라 북조선, 타이완,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과거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각 지역에서 옛‘위안부’등의 전쟁 피해자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네덜란드인 옛‘위안부’할머니가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 전쟁 피해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났으며, 그때까지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증인들이 일제히 나타났던 것이다. 1990년 이후 일본의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수십차례나 제기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부 일본인들은 아시아의 전쟁 피해자의 증언에 진지하게 응답하여 사죄와 보상을 통해서 새로운 우호관계를 구축하자고 촉구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움직임에 동참한 사람은 소수에 그쳤다. 오히려 이런 움직임은 또다른 일부의 일본인들에게‘언제까지 사죄하라는 말인가’라는 도착적인 피해자 의식,‘일본은 아시아 해방을 위해 구미와 싸웠던 것’이라는 나르씨씨즘적 역사인식,‘아시아의 피해자는 금전을 노리고 허위고발을 하고 있다’는 식의 멸시감,‘이대로는 일본이 중국과 한국에 지고 말 것’이라는 대항적 국가주의 등의 자기중심적인 정서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부정론과 역사수정주의가 우세해짐에 따라, 대다수 보수 정치가들도 이러한 국민의 정서를 공유했다. 1994년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처음으로‘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실렸지만, 우파가 이에 강하게 반발하여 항의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일본 국민의 긍지’를 강조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하는 운동을 개시했다. 이같은 우파의 운동은 예상외의 확산을 보이면서 그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위안부’에 대한 국가와 군의 관여를 과거부터 일관되게 부정해오다가, 1990년대에 접어들어 증인들이 나타나고 역사가들의 연구가 진척되자 1993년이 되어서 겨우 정부와 군의 관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견해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견해에서도 일본 정부는 법적인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현재까지 정식으로 사죄와 보상을 하고 있지 않다. 수십건이 넘는 보상요구 소송도 결국 거의 모두 패소로 끝났다.

아베 신조오(安倍晋三) 전 총리는 90년대부터 우파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1993년의 정부 견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표명하는 등 역사수정주의적인 발언을 반복해왔다. 작년에 그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아 4월말 미국을 방문했을 때 기묘하게도 부시 대통령에게‘죄송하다’며 사죄의 뜻을 표했는데, 이 사죄는 피해자에게 한 것이 아니다. 작년 7월 31일 미국 하원은‘위안부’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는데, 그럼에도 일본 정부의 자세는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일본에서 90년대에 시작된‘기억의 투쟁’에서는 우파와 보수파의 역사수정주의가 승리하려 한다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은 이‘기억의 투쟁’에서 문제를 일본 대 아시아 각국이라는 국가간의 이항대립적인 구도로 가두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곡해하고 오히려 역사수정주의를 이롭게 하는 결과가 되리라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 진행되는‘기억의 투쟁’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문맥 아래 위치짓고, 두번에 걸친 세계대전이나 홀로코스트라는 20세기의 미증유의 정치폭력을 극복하는 인류사적인 과제의 일환으로 볼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증인들의 증언의 의미를 더 깊이 성찰하기 위해서도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는 일본에서의‘기억의 투쟁’에 쁘리모 레비라는 참조항을 도입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의 이러한 시도는 별다른 성과를 올릴 수 없었다. 그 원인은 우파나 보수파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라기보다 대다수 일본 국민의 자세가-여기에서 쁘리모 레비의 작품을 빌려 말하자면-「바나듐(V)」(『주기율표』)에 등장하는 독일인 뮐러 박사의 자세와 공통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부나’의 화학실험실에서 쁘리모 레비와 만난 적이 있는 I.G. 파르벤의 직원 뮐러는 자신을 마치‘선의의 제3자’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쁘리모 레비가 묘사하는 이같은 인간상을 흔히 만난다. 그들은 자신이 휴머니즘적인 평화애호가라고 믿고 있지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도대체 언제까지 사죄하라는 것이냐?”는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서로‘증오’를 버리고‘공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고담준론을 풀어놓는 것이다. 하지만‘서로’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증오를 품는 이유는 얼마든지 예로 들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 가해자의 책임을 애매하게 해서 지금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피해자에게 “과거를 없었던 일로 하자”며 은근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진술했듯이, 일본은 세계에서 드물게 나찌주의와 홀로코스트에 관한 서적이 많이 번역 소개되었으며 연구 수준도 높은 나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지적(知的) 축적들을 자국의 역사나 현실의 사회문제와 결부해 고찰하는 경우는 드물다. 연구자들은 좁은 아카데미즘의 범위에서만 이뤄지는 닫힌 논의로 시종하고 있다. 일반 대중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저작과 영화의 장(場) 안에서만 동정을 표하거나 오락으로서 즐기고 있다. 그 모두가 자신들과는 관계 없는 남의 일인 것이다. 일본이 히틀러의 독일, 무쏠리니의 이딸리아와 동맹관계였던 점, 따라서 일본 역시 홀로코스트에 대한 가해 책임의 일단을 면할 수 없다는 점을 자각하는 일본인은 너무도 적다.

 

 

7. 서울에서

 

2006년 4월부터 나는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군사정권시대에는 이 나라에 출입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야 내 선조의 나라(roots)에서 생활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한국에 올 때 나는 몇가지 과제를 나 자신에게 부과했는데, 그중 하나는 쁘리모 레비의 저작을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각 방면에 걸쳐 노력한 결과, 우선 2006년 12월에 내 저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가 번역 출간되었다. 그리고 2007년 1월에는 내가 해설을 쓴 『이것이 인간인가』와 『주기율표』 두권이 번역 간행되었다. 이것들은 한국에서 처음 번역된 쁘리모 레비의 저작이다.

한국에서는 일본보다 나찌주의나 홀로코스트에 관한 서적이 압도적으로 적게 소개되어 있다. 쁘리모 레비를 알고 있는 사람도 일부의 전문연구자를 빼고는 전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일반 한국인이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지닌 지식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로 알려진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적어도 오늘날까지 이 주제가 일반 한국인에게는 자기와 직접적 관계가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지내는 어떤 대학교수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식민지 지배, 내전, 군사독재 같은 잔혹한 정치폭력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대다수 한국인은 먼 다른 나라의 학살사건에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렇게 말하는 인물도 만났다. “유대인도 엄청난 일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비극을 경험했다. 그들의 경험만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상을 벗어나 『이것이 인간인가』의 한국판은 판매에서 호조를 보이고 있다. 초판 3천부는 한국의 출판문화에서 보면 적은 부수가 아닌데, 곧바로 증쇄에 들어가서 출간 7개월이 지난 현재(2007년 8월)까지 9천부를 발행했다. (한편 『주기율표』는 현재 초판 3천부가 아직 다 판매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판매 호조의 이유에 대해서 출판사의 담당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출판사로서 당초 상정했던 독자층은 첫째,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둘째,‘기억의 투쟁’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 셋째, 츠베탕 토도로프나 조르조 아감벤의 저작을 통해서 쁘리모 레비에 대한 사상적 내지 철학적 관심을 가진 사람들, 넷째, 이딸리아문학 애호가라는 네가지 유형이었다. 간행 후의 반응을 보면, 첫째 셋째 넷째 유형의 독자의 반응은 그다지 없었고, 오히려 둘째 유형의 독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1980년 5월 학살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광주에서‘청소년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이 지역에서 판매량이 늘었던 것이 이 추측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개인이 인터넷 블로그에 독후감이나 서평을 싣는 것이 대단히 널리 이뤄지고 있는데,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글이 굉장히 많으며 그 하나하나가 장문이고 기본적으로 진지한 내용이다. 그것들을 읽어보고 인상 깊었던 점은 역시 한국인 자신이 경험한 정치적 수난의 기억과 그 증언이라는 문제를 결부해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정권의 탄생과 함께 과거 정치폭력의 진상 규명,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정책적으로 이뤄져왔다. 예컨대 1948년의‘제주도 4·3항쟁’에서는 주민 다수가 정부군이나 경찰, 우익단체의 폭력에 희생되었는데, 군사정권시대에는 이 사건이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며 희생자는‘폭도’라고 규정되어왔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부가 이런 견해를 수정하여‘제주도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었다. 이것은 과거 정치폭력의 진상과 책임을 둘러싸고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기억의 투쟁’의 일례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했던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은 오늘날 공식적으로‘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진상이 해명되어 책임자가 처벌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학살사건의 최고책임자이자 훗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현재도 건재하며, 지지자도 적지 않다. 또한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 중 한명이었던 박근혜는 과거의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등에 업고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기억의 투쟁’은 현실적인 정치투쟁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도 역시 억압받고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대하고 그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자는 요청으로서 쁘리모 레비가 읽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또 하나, 한국다운 반응으로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국군의 제도적인 비인간성과 결부해 읽은 독후감이다. 이 서평자는 “한국의 남성이라면 누구나 쁘리모 레비의 책을 읽고 금방 군대생활을 떠올릴 것이다”라는 문장을 시작으로 군에서 일어나는 처참했던 사적 제재의 횡행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침해를 고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구조적인 폭력 때문에 매년 백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자살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모든 남성 국민은 병역을 마쳐야 한다. 남북분단이라는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과거 수십년에 걸쳐 이어져왔기 때문에, 군사정권시대만큼은 아니지만 현재도 사회 각층에 군사문화가 침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제는 지금에서야 논의되어 대체복무제 도입이 결정된 실정인데, 아직 법제화되어 있지 않으며 병역 기피자는 심한 처벌을 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두가지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에서 쁘리모 레비에 대한 독해방식은 과도할 정도로 자신들의 현실문제와 관련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본과 명료하게 대비되는 점이다. 이러한 독해방식이 홀로코스트라는 사건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나 쁘리모 레비에게서 드러나는 사상적 문제-특히‘증언의 불가능성’이라는 아포리아-에 대한 고찰이라는 수준까지는 아직 도달해 있지 않다. 한국에서 정치폭력의 피해와 가해의 기억이 환기되고 논의되고 깊이 고찰되는 것은 향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반향을 볼 때, 기대를 가질 수 있을 듯하다.

 

동아시아에서 진행중인‘기억의 투쟁’은 식민지 지배, 세계대전, 인종차별과 대량살육 같은 20세기의 악몽과 손을 끊기 위한 전세계적 투쟁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출구를 찾지 못하고 당분간 정처없는 여행을 계속해야 할 듯하다. 20년 전 세상을 떠난 쁘리모 레비를 거듭 소환해서 그가 남긴 메씨지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계속해야만 한다.

│박광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