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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앙드레 슈미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휴머니스트 2007
밖에서 본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김백영 金白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rangzang@naver.com
이렇게 흥미진진한 연구주제가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일까? 앙드레 슈미드(Andre Schumid)의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 정여울 옮김)은 한국 민족주의의 고유성을 그 발생 국면에 초점을 맞춰, 망원경적 시야의 원근감과 현미경적 시선의 세밀함을 결합하여 분석해낸 놀라운 역작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책은 관련분야 전공자라면 한번씩은 섭렵했을 법한 주요한 신문자료들과 누구나 어느정도는 알고 있을 법한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에피소드들을 엮어서, 단지 지금껏 한국사에서 그 누구도 시도한 바 없는 독창적인 이론적 가설을 성공적으로 논증해낸 한편의 연구서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때문에 2002년 출간된 이 책의 영문판을 처음 접한 국내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이 책은 신선한 충격을 넘어 기묘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느낌은 단지 국내 연구수준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충실한 내용을 갖춘 한편의 훌륭한 해외 한국학 연구성과가 던져주는 지적 자극의 차원을 넘어서, 도대체 그동안 우리 연구자들은 왜 이런 연구를 해낼 수 없었는지, 국내의 연구 역량과 풍토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히 해당 시기에 대한 사실(史實) 규명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로 하여금 한국 민족주의의 본질적 성격과 그 현재적 영향력까지 되돌아보게끔 만드는 발본적인 우회 심문의 효과를 거둔다.
책 전체를 관류하는 저자의 질문은 한마디로 요약된다.‘근대 한국의 민족담론은 어떻게 탄생했는가?’복잡한 경험적 사건사의 미로로부터 명쾌한 결론을 유도해가는 단순하고 일관된 질문의 미덕과 함께 이 책이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은, 해외 연구자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뛰어난, 정교하고 세밀하게 묘사된 19세기말~20세기초 한국사회의 담론적 풍경화이다. 저자는 각각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탐욕스런 두 제국 사이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돌연 세계로부터 자신의 집합적 정체성을 심문받게 된 한 미약한 주체가, 이제 막 어색한 변신을 시작한 시점에서 당혹스럽고 처절한 자기모순적 몸부림을 치는 역동적 장면들을 극적으로 포착해낸다. 20세기 후반, 분단체제하의 한반도를 풍미한 민족과 민족주의는 바로 이 시기 한국인들의 환골탈태 과정에서 그 최초의 형상을 얻은 것이다.
서론과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1~4장)는 세계로의 문호개방, 중국과의 결별, 일본에 의한 식민화라는 세가지 역사적 계기 속에서 문명개화와 애국계몽의 담론이 드러내는 변화의 궤적을 고찰한다. 후반부(5~7장)는 새로운 민족 개념의 얼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시간성·공간성·주체성이라는 세가지 차원에 초점을 맞춰 분석한다. 요약하자면, 저자의 연구주제는 크게 두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개화기 한국 민족주의운동이 실패한 담론내적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민족주의담론의 고유성을 구성하는 내적 요소들을 해부하여 그 역사적 기원을 밝히는 것이다.
우선 첫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저자는 청일전쟁에서 합병에 이르는 15년간(1895~1910)의 역사를 서술하는 국사학계의 세가지 지배적 내러티브-왕실의 시련과 저항, 정부주도적 개혁, 민간주도적 운동-의 병렬성과 불완전성을 비판하면서 출발한다.(1장) 그렇다면 이 시기 민족담론에서 변화의 방향을 주도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독립된 문명국이 되고자 하면서 몰락한 중화제국의 상징을 몸에 걸친 대한제국의 자가당착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2장) 대안은 새로운 문명과 계몽의 담론을 받아들여 문명국들간의‘동양평화’를 꿈꾸는 길뿐이었으리라.(3장) 저자는 두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결국은 일본의‘문명개화’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상황이 민족주의의 딜레마와 민족사의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한다.(4장)
여기서 두번째 문제가 제기된다. 일제 식민주의에 의해 오도된 문명개화론의 늪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자장에서 벗어난 어떤 새로운 민족담론이 가능한가? 신채호(申采浩)의 탁월한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이 국면에서다. 저자는 신채호가 전통 유교의 가족사관을 십분 활용하여 민족사의 선형성과 목적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영토중심적 역사와 국가중심적 역사라는 두가지 통념적 역사관을 비판함으로써 지금까지 상상된 바 없는 전혀 새로운 민족과 역사를 형상화해냈다고 주장한다.(5장) 신채호에 의해 새로운 지평이 개척된 민족 개념은 일제하‘암흑기’한반도의 경계를 넘어 만주 등지의 이역에서 민족의 새로운 지리적 영역을 발견하고,(6장) 해외 각지에 이주한 해외동포들에게서 민족사의 새로운 주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7장)
이 책은 연구의 대상이나 방법에서 최근 국내외 학계에서 유행하는 근대 사상사·지성사 연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방법론적으로 담론 분석에 의존하여 당대 정치사를 재구성하고 있고, 관찰자가 지닌 시선의 폭과 깊이도 애국계몽운동이라는 프리즘에 제약되어 있다는 점은 이 책의 불가피한 한계를 드러낸다. 또한 제목에서는 1919년까지를 포함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1910년까지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책의 바탕이 된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은 “Constructing Independence: Nation and Identity in Korea, 1895-1910”이다-도 이 책의 이론적 통찰력을 약화시키는 한계로 작용한다.‘1919’라는 기표를 보는 순간 누구나 그 이전 시기 응축된 어떤 힘의 폭발로서의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기대하게 되지 않는가? 더 나아가 1920~30년대 식민지시기 담론의 장(場)에 대한 서술의 누락은 일본의 식민주의가‘탈아입구(脫亞入歐)’에서‘귀축영미(鬼畜英美)’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드러내는 문명담론과 제국담론의 이중성과 상호복합성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론적 성찰의 결여를 초래한다. 에필로그의 논의가 다소간 역사적·논리적 비약으로 읽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지닌 고유한 강점은 탄탄한 이론적 문제의식과 광범위한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적재적소의 자료 활용을 통해 매우 강력하고 설득력있는 메씨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 문명화담론의 딜레마, 즉 민족주의가 식민주의와 의도하지 않은 공모를 함으로써 스스로 식민화의 조력자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주의적 지배담론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 즉 민족사의 좌절과 실패로 인해 오히려 해방 이후 더욱 강력한 신성불가침의 민족사담론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주장한다.‘이중의 역설’의 발견!
이러한 문제제기는 한국 근대정치사와 민족주의 사상사 그리고 한국 근대사학사 등 한국학계 각 분야의 지배적 담론에 내장되어온 적지않은 미제의 연구과제들에 대해 더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발본적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20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금기의 봉인에 도전하는 해외 한국학자들의 선구적 실천은 국내 연구자들의 분발과 대오각성을 촉구한다. 물론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근·현대 동아시아 삼국의 운명을 갈라놓은 19세기말~20세기초의 역사를 새롭게 밝히는 작업이 일국사적 수준에서의 연구를 통해 완성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작업은 여전히 일국사적 통념과 타성에 안주하고자 하는 동아시아 삼국간의‘적대적 공범관계’의 해체라는 장기적인 이론적 실천의 방향에 대한 전략적 합의가 구축될 때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전지구화와 다문화주의의 21세기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민족’이라는 기표가 우리에게 여전히 버겁고 두려운 현재진행형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