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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오성용

오성용 吳成龍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3학년. 1984년생.

foooooo@naver.com

 

 

 

기다려, 데릴라

From 시하눅빌

 

그런 말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를 등지고 돌아서자마자 첫번째로 든 생각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훌쩍 강렬한 생각이 나를 조롱하듯,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게 아니었다고, 반복해서 읊조렸다. 나는 의식적으로 잠시 두 눈을 크게 뜨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다음, 두 발을 앞으로 옮겼다. 그러자 의식하지 않았던 한개뿐인 입에서, 나도 모를 한숨이 길게 뻗어나왔고, 덕분에 잠시 허공을 장식한 입김은 뽀얀 글씨로,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게 아니었다라고 휘갈긴 뒤 증발해버렸다. 내가 그러건 말건, 나의 시야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그녀는, 나의 어깨 너머로 이 풍경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섬으로써 그녀가 볼 수 있었던 것을 내가 바라보고 있다. 기억대로라면 그녀도 먼저 돌아선 나 때문에 피치 못해 등을 돌렸기에, 방금 전에 내가 바라보고 있던 그녀 뒤의 어떤 것들과 마주쳤을 것이다. 변함없이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흔들림없이 걸었고, 그렇게 그녀와 나는 서로가 볼 수 있던 세상의 일부를, 맞바꾸어 바라보고 있다. 달라진 것은, 그녀와 나의 방향뿐. 아니 달라진 것은 나의 방향뿐,이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와 달리 일정한 방향을 가진 그것들은, 나의 귀밑머리를 스쳐가고, 입김을 뚫고 지나가고, 피부에 달라붙기도 하면서, 그 끝에 도달했다. 질척해진, 거리를 에워싼 공기는 한없이 차갑고 또 무거워져, 지구가 아닌 별의 중력인 양 무겁게 나를 짓눌러왔다. 때문에 나는 손가락 사이에 고인 눈송이조차, 털어내지 못하고 그것이 물로 변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느껴야만 했다. 느낌인지 실제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중심에 구겨넣은 풍경은 점점 동결되고 좁아져서, 천천히 또 싸늘하게 느려지고 있었다. 내리던 눈들이 거의 정지하다시피 허공에 부유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서서히 움직임을 잊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나의 걸음도 한장의 스틸사진처럼 기형적으로 멈춰버렸고, 눈 또한 감기려 들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본래 눈송이였던 물방울이, 눈물처럼 흘러 내려가다 맺힌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세계는 점점 더 느려져만 갔고, 시간은 멈춰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움직일 수 없게 돼버렸고, 오로지 생각만 할 수 있는 상태에 직면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첫번째 생각을 곱씹는 것뿐이었다. 멈추고 싶었지만 멈춰지지가 않아서, 계속해서 곱씹고 되뇌었다. 멈춰진 시공간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그 생각은, 까닭없이 정수리 부근이 시려오는 것이 느껴지면서,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예상 밖으로, 나의 첫번째 생각은 그렇게 고작 대여섯걸음의 거리와 세번의 눈 깜박임, 한번의 긴 한숨을 소비하고서, 작게 뭉쳐져 어딘가로 굴러가버렸다. 아니 첫번째 생각이 차지하던 자리에 또다른 생각이 덧씌워졌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나는 한 발을 땅에 딛고 나머지 한 발은 허공을 밟은 채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여러 방향으로 걷던 사람들은 정지해 있었고, 눈송이는 공중에 못 박혀 떠 있었으며, 어딘가의 초침이 멈춰서고 있었다. 그 순간 속에서 나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게 아니었는데 하며, 그녀를,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를, 생각했다.

 

 

그런 여자

 

일단 예쁘고 착하면 된다는 한 친구의 도전적인 발언에서 시작된‘그런 여자’타령은, 끝을 보자는 식으로 끝도 없이 이어져 내려갔다. 때는 여느 날과 똑같은 날이었고, 장소는 술자리였으니 그것이 인생에 차지할 비중은 말할 것도 없이, 0보다 못한 소수점 열두자리 이하의 것으로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어찌됐건 여자와는 연이 없던 나에게,‘여자’라는 민감한 단어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여자’라는 말은 어쩐지 지구상에서 발견되지 않은 광물의 원소기호를 발음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나의 주변에도 XX염색체를 가진 것이 분명한, 여자라는 종은 여럿 존재하지만, 그들은 여동생이나 누나, 어머니, 아줌마라는 말로만 표현 가능할 뿐,‘여자’라는 말에 딱 떨어지는 사람은, 무슨 저주인지, 아직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따라서 아직까지 내게‘여자’란 단어는 동음다의어의 형태로 두려움, 경외, 숭배, 경계, 애정, 배척, 연구, 우호의 대상을 가리키는, 거리와 범위가 불분명한 단어이다. 오죽하면 내 입으로‘여자’라고 분명히 발음하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과, 어쩐지 불경한 말을 하는 것 같은 죄책감을 느낄 정도다. 결국,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기분은 확실히 아닌 그 행위는, 체내에 침투해 있던 술과 교묘히 결탁해, 날 예민하게 만드는 불상사를 일으키고야 말았다. 대체 기준이 뭔데? 삐딱한 나의 질문을 받은 나의 친구는 취기 때문인지 핵심을 찔려서인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글쎄,라면서 말을 흐렸다. 창피하지만‘여자’때문에 가시가 돋칠 대로 돋친 나는, 얼마 전에 읽은 책의 내용까지 인용해가며 설교하기 시작했다. 제목이‘지구에 꽁짜는 없다’란 책이었는데,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엄연한 경제처세서로서 주식과 펀드를 겸한 돈 버는 방식에 대해 나열한 것이 전부라, 아무리 생각해도‘여자’와는 관련이 없는 서적이었다. 하지만 취한 상태에서 예민해지기까지 한 나는, 그런 것을 가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혀 꼬이는 소리와 함께 무소처럼 돌진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발전이 없는 거라니까, 그건 진짜로 막연하잖아, 돈 많이 벌고 싶다란 말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야. 사람이 계획이 있어야지, 언제까지 꿈만 꿀 거야? 실현 가능한 조그마한 것부터 차근차근 상세하게 목표를 세운다면, 착하고 예쁜 여자를 넘어선, 더 착하고 더 예쁜 여자를 얻을 수 있는 거라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예쁘고 착한 여자를 원하는지, 진정 자신이 원하는 정도를, 체크해야 돼. 안 그러면 인마, 성공 못해, 절대! 운만으로는 안된다고. 왜 그런 말도 있잖아! 계획 있는 자가 미녀를 얻는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의 주정 아닌 주장을 듣고 있던 친구가 대답했다. 용기있는 자 아니냐? 나는 대답했다. 닥쳐, 계획이 맞아.

 

술에 취한 내가 귀여웠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심심했는지, 나의 설교가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낄낄낄 웃으면서 나는 그런 여자, 아니 나는 그런 여자가 더 좋은데,라는 식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재밌는 것은, 저마다‘여자’에 대한 개념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달리 말해, 각자 여자에 대한 고유의 환상을 쌓아왔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자와 한번이라도 사귀어본 사내라면 절대 갖지 못할, 희소성과 그로 인한 특별함을 획득한 불쌍한 환상을, 취기를 핑계삼아 조금씩 뱉어내가며, 비교를 반복하며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했다. 정상의 궤를 벗어난 건지 아닌지를 말이다. 아직, 변태의 수위에 오르지 않은 것을 확인한 우리는, 서로와 자신에게 안도감을 표했고, 하던 일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예쁘다, 착하다, 귀엽다, 정이 많다, 싹싹하다 같은 어쩐지 어렴풋하고 두루뭉술한 추상적인 단어들의 연속이었다. 이래서야 무슨 발전이 있겠느냐라는 나의 푸념이 곁들여지고 나서야, 친구들은 굳은 얼굴로 숨기고 있던 컬러조커를 내놓았다. 그러니까, 눈매가 중요해, 난 날카로운 눈매를 원해. 나는 코가 좀 오뚝하고 작았으면 좋겠어, 그걸 통해 들숨 날숨이 오간다는 걸 생각하면, 아 진짜 행복하다. 나는 턱이 예각을 형성하고 있다면 더 바라는 게 없어, 각진 턱은 진짜 지양하는 바이다. 각자의‘그런 여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상세해지고 구체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한몫 거들고 있던 나의‘그런 여자’도 점점 더 생기를 띠게 됨은 물론이었다. 잠시 뒤 우리는, 어느새 술집 카운터에 있던 메모장과 펜까지 손에 쥔 채, 경건한 마음으로 각자의‘그런 여자’를 서술하는 작태까지 보이며, 열과 성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것은 마치 고3 수험생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더이상 바랄 게 없이 완벽한 각자의‘그런 여자’를 설명한 장문의 글은 완성됐다. 글이 완성되면서 얻은 소득이라곤,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썼다는 뿌듯함과, 실현 불가능에 가깝게 적혀버린 이상형에 대한 무력감, 혹시 실현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전부였다. 소주병들은 이미 빈 병이 되어 탁자에 뒹굴고 있었고, 우리는 어디‘그런 여자’없나?에서 어디‘이런 여자’없을까? 하는 극미량의 성분 변화를 거친 의문을, 하릴없이 허공에 내던질 뿐이었다.

 

어디에도 이런 여자는 없겠군. 나는 내가 열두줄에 걸쳐 써놓은 ‘여자’를, 혹시나 오류는 없는지, 진지하게 다듬어야 할 사항은 없는지, 아니면 추가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따져보기 위해 재차 읽다가, 어렵지 않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가관이네. 다행히 모두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다시 답답한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술이나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술잔을 집어들었다. 그때 미대를 다니던 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심한데 몽따주나 그려볼까? 누구의 이상형이 제일 예쁜지 비교해보자. 은근히 경쟁심을 부추기는 친구의 발언에 모두는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고서, 그의 오른손에 집중했다. 아니 아니 눈은 좀더 크고 그렁그렁하게, 좋아 좋아 그리고 입술은 약간 도톰해서 윤기있게, 머리카락은 웨이브지고 굴곡있는 형태의 단발! 오, 딱 이거야 이거,와 비슷한 말을 서로의 차례에 맞게 징징대길 여러번, 마침내 나의‘여자’가 윤곽을 드러냈고, 베일에 싸여 있던 얼굴이 공개됐다. 완성된 그림을 바라본 나는, 약간 놀라고 말았는데, 내가 쓴 글에서 파생된‘여자’가, 어쩐지 전설이나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여자’의 맨 아랫줄에,‘한국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는 사항을 한줄 추가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히 깨달았다. 확실히, 어디에도 이런 여자는 없겠구나. 나는 어쩐지 세상에서 나 홀로 혜택받지 못한 기분이 들어서 굉장히 피곤해졌다. 해서 순식간에 귀찮아져버린 만사를 뒤로하고, 나의‘여자’가 그려진 종이 위에 두 팔을 포개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두 눈을 감았다. 어디에도 없을 것이 확실한 나의‘여자’가, 나의 그늘 아래에서 표정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녀를 만날 확률이 좀더 높을 것이 분명한 꿈속으로 그렇게 가라앉아갔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키득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끝으로.

 

 

그런 기호들

 

그런 여자가 있다. 어디에도 없을 것만 같은, 나의‘여자’가 진짜 있다,라는 친구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닮을 수 있는 것이지, 결코‘그런 여자’는 현존할 수 없다는 나의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여기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네가 착각한 거겠지라는 나의 불신 섞인 말에,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진짜 있다니까! 대꾸하는 친구의 역정 때문이다. 여전히 당사자인 나는 그런 여자는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나의‘여자’를 펼쳐서 되새겨 읽고, 또 한번 감동한 뒤, 다시 한번 친구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의사를 추슬렀다. Zoo미용실. 근처의 애꿎은 보도블럭의 칸을 옮겨가며 밟아대던 나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 확실하지만, 친구는 있다고 주장하는 나의‘여자’를 보기 위해 미용실 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친구가 말하길,‘여자’는 이 미용실에 있다고 했다. 뻐근하게, 마음이나 생각과는 외따로이 심장이 진동하고 있었다. 간판 덕분인지 문 앞에 바짝 다가서자, 뜻 모르게 동물원에 처음으로 놀러 갔던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고, 기묘한 기분에 괜스레 뒷머리가 간지러워져, 오른손을 들어 그 부위를 가만히 긁어냈다. 유리문에 그런 나의 모습이 비쳐왔다. 우습게도 치렁치렁한 나의 머리 위로 거대한 물음표가, 거짓말처럼 부풀어올라 있었다. 나는 그 상태를 어쩌지도 못한 채, 정수리에 붙은‘?’를 달랑달랑 흔들며, 나의‘여자’를 구경하려고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여자는 자그마한 쏘파에 앉아서 등도 돌리지 않고, 인사말부터 던졌다. 여자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곧 테이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털썩 하는 소리가 나길 바라고 있던, 나의 눈은 그 책을 훑어냈다.‘지구에 꽁짜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묘한 기분이 발끝을 자극하려는 찰나, 머리 자르러 오셨어요? 이어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나를 꺼내주었다. 아뇨,라고 대답하려던 나의 입은, 서서히 돌아서는 여자의 얼굴을 본 나의 눈 때문에, 아……를 발음하면서 끊겼고, 네! 하는 소리를 내버리면서, 나의 의사를 배신했다.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동시에 상체를 돌려세운 여자 앞에서 나는, 매우 복잡미묘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딱딱해졌고, 동시에 말랑해져버렸으며, 경직된 듯하면서도, 묘하게 늘어지는 것이었다. 예컨대 무언가를 느껴버린,‘!’느낌표의 모습이랄까. 미용실 거울 속의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이 없어 보였고, 눈빛을 잘게 흔들어대며, 어디선가 솟구쳐 올라오는 듯한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여자는, 그런 상태의 나를 향해 완전히 마주 섰다. 당연히 나의 눈에는 여자가 보여야 했으나, 나의 눈에는 여자가 아닌, 다른 무엇이 보였다. 그것은‘*’이었다.‘*’이 분명했다. 별 혹은 애스터리스크, 말 그대로 하늘 너머에 있어야 마땅한, 그것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여자는 빛을 내뿜으며, 그 빛으로 사위에 있는 모든 것을 지워내면서 스스로를 부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압도되어버린 나는, 미용실이 아니라, 아스트랄계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고, 원한다면 불과 물과 흙과 공기를 씹어 삼키는 행위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glory, 이런 수식어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알 수 없게도 나는, 이 모든 광경이 성스럽게 여겨졌고, 말 못할 따뜻함이 날 감싸안고 있는 것처럼 뿌듯해졌다. 나는 별빛에 휩싸인 채, 술에 취해 어쩐지 전설이나 신화에나 있겠구나 여겼던‘여자’를 급(急)수정했다. 여자는 성경에서 뛰쳐나와 이곳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다로.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 구경만 하고 나가려고 했었다. 잠깐 스쳐보고서 다시 나와, 왜 거짓말을 해서 내 소중한 인생의 5분을 허비하게 만들었냐고 외치며 친구를 타박하려고 했다. 하지만‘여자’의 휘광은 그런 나의 생각을 가뿐하게 지워내버리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미용실에 그런 것이 있으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기에,‘그런 여자’의 목소리로 이쪽에 앉으세요,라며 의자를 가리키는 여자의 말에, 애초에 의사 따윈 결여된 인간인 것처럼 기계적으로 복종하고 말았다. 여자가 지정해준 의자에 앉자, 여자는 천보다 새하얀 손으로, 하얀색 천을 나의 목 주위에 둘러주었다. 거울 속에 예상과는 자꾸 엇나가는 나의 모습과, 그 너머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와 발만 드러낸 채로 앉은 나의 모습은 마치‘;’쎄미콜론 기호를 연상케 했다. 여자는 나의 치렁치렁한 머리를 쓸어 만지며, 어떻게 잘라드릴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몽롱한 눈을 유지하며, 아무렇게나 그쪽이 편하실 대로 잘라주세요 머리가 아니라 모가지를 자르셔도 좋아요 좋아,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어조로 대충 다듬어주세요라고 답했다. 곧, 써걱써걱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가위의 궤적이 두피를 통해 기분좋게 느껴져왔다. 이 모든 게 생각보다는 괜찮은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여자의 손길이 위로 아래로 오갈 때마다, 조금씩 나른해지고, 또 힘이 빠져, 나의 얼굴은 처음에 태어날 때의 표정을 재연했다. 바닥으로 선선히 떨어지는 머리카락들 위로, 나는 잠들지도 않았으면서 잠을 자는 것처럼, 조용히 실눈을 뜨고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비친 여자를 응시했다.

 

5:5 가르마라는 악취미적인, 산뜻한 머리를 하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날듯이 뛰어가 만난 친구에게 내 소중한 인생의 5시간을 투자해 칭찬과 고마움을 표한 것이었다. 나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기적이 벌어졌다는 점에 대해서 인정했으며, 공통된 놀라움을 느꼈다. 신기하다 신기해. 진짜 신기하다. 더 신기하게도 다음날 나는 또 머리를 자르고 말았다. 머리를 자를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자꾸 갈 수밖에 없는 신기한 일 앞에, 나를 포함한 주변사람 모두 신기하구나 하는 반응을 보인 것은 물론이었다. 신기한 일은 그뒤로도 계속되었고, 그것은 나의 머리형태의 변화를 계속해서 추구했다. ˆ 악쌍씨르꽁플렉스, ´ 악쌍떼귀, ` 악쌍그라브 같은 이국적인 기호들이 내 머리 위에서 맴돌았고, 하늘과 내 정수리 사이의 거리는 나날이 가까워져갔다. 결과적으로 신기한 일은 입영열차를 타러 가도 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민대머리를 한 나를 만들고서 끝을 맺었는데, 이쯤에 와서 이제 진부한 일 정도의 취급을 받게 된 그 신기한 일은, 주변사람들로부터 나를 민대머리를 한 미친놈 정도로 부를 수 있게끔 도와주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이제 더이상 미용실을 갈 수 없게 된 나는, 홀로, 야한 생각이라도 해서 머리를 빨리 길러야겠다, 왜 미용실은 동물원 가듯이 갈 순 없는 걸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괴로워하며 긴 새벽을 꼴딱 새우고 말았고, 해가 뜸과 동시에 그나마 남은 머리라도 잘라야겠다 아니, 밀어버려야겠다는 결론을 내려, 달려서 미용실로 갔다. 빛에 수렴하는 속도로 달려가 도착한 미용실, 그 안에 홀로 앉아 있던 여자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놀란 눈을 한 채 말했다. 잘못했어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전달하지 않은 듯한 맥락없는 그 말에 나는, 여자보다 더 놀란 눈을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눈을 보지 못한 여자는 거의 울 듯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고, 잘라준 머리가 맘에 들지 않아서 시위하고 있는 거 아니냐, 그렇다면 그것은 주문을 성의없이 한 당신의 잘못이지 나의 잘못은 아니다, 이제 자를 머리도 없어 보이는데 제발 그만둬달라는 해명, 그리고 애원을 나의 귓가에 들이부었다. 비약하자면, 여자의 저 놀란 눈에 내가 민대머리를 한 미친놈 정도로 보이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나의 귀를 통해 몸속으로 파고들어가, 이름 모를 뼈에 부딪쳐 튕겨가며 안타깝고 또 슬픈 감정을 자꾸 새겨넣었다. 저릿한 심장 부근의 뼈들은 특유의 울림으로 나를 부추겼고, 여자에게 민대머리를 한 미친놈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던 나는 그 울림에 응답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이미 내 속에서 내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한, 이런 몰골을 갖추게 된 이유를, 내 입으로 꺼내고 말았다. 놀란 눈에 물기까지 보태고 있던 그녀는, 좀 많이 더듬거리고 중간에 다른 이야기로 몇차례 새기도 했지만, 당신이 제 이상형이어서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자주 찾은 것뿐입니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좋아합니다,라는 알몸을 드러낸 나를 전부 듣게 되었다. 피부 안쪽으로 뚜렷하게, 부끄럽고 쑥스러운 기분들이 꽉 들어찼다. 그런 나와는 별개로 안도하는 표정과 놀라는 표정을 오가던 여자는, 원래의‘*’의 표정을 되찾고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에 휘말려 있던 내게 예쁘고 환한 빛이 내리쬐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빛살 속에서 어렴풋하게 서로 포옹하고 있는 여자와 나를 보았다. 가지런히 팔을 뻗어 서로의 등을 감싸안고 있는 그 씰루엣은, 바라보기만 해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것의 형태는‘§’이런 모습을 띤 쎅션기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기호처럼 나의 인생도 더 나은, 새로운 장으로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한참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여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머리 안 자르시는 거죠?

 

 

그런 날들

 

‘지구에 꽁짜는 없다’고 온몸으로 선언하는 책을 집어들었다가, 5분도 안돼서 다시 내려놓았다. 도대체 왜 이따위 책이 베스트쎌러가 된 건지 어리둥절할 정도의 너저분한 내용들이, 내게 책을 던져버리라고 외쳤기 때문이었다. 분명 내가 나의 피 같은 자본을 들여 사놓고도, 왜 그랬는지 의문이 들었다. 맞춤법까지 무시하고 공짜를 꽁짜라 부르는 선정적인 제목, 지구를 들먹이는 거대한 스케일을 빼고 나면, 진짜 공짜로 나눠줘도 아무도 안 가져갈 그런 책을 나는 왜 돈 주고 샀을까, 왜? 하며 궁상맞은 자책을 하던 나는, 냄비받침의 용도로 제작된 것이 분명한 그 책을 다시 집어들어, 이것을 구입하면서 잃게 된 기회비용을 따져보기 위해 뒷면을 살폈다. 정가 10,000원. 난 참 돈도 많았구나, 하는 생각과 거의 동시에 가격 위에 실린 저자의 사진에 눈이 갔다. 사진 속 그 양반은 눈에 확 띄는 대머리로, 왠지 공짜를 굉장히 밝힐 것 같은 관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제목과는 모순된 작가의 모습은 지루함에 놓여 있던 나로 하여금 빵 하고 폭소를 터트리게 만들었다. 갑자기 왜 웃어? 갑자기 웃는 내가 이상했던지, 손님의 머리를 자르고 있던 여자친구가 가위를 멈추고 물었다. 아니 이 책 말이야, 나도 집에 있는 건데, 작가 사진을 지금 막 발견해서 말이야. 사진이 웃겨? 응, 충분히 웃겨, 그래도 책제목이‘지구에 꽁짜는 없다’인데 작가는 공짜 완전 밝히게 생긴 대머리인데다가, 표정까지 묘하게 진지하게 금전적인 걸 바라는 것 같잖아. 하하하 웃으며 소감을 이야기하는 나를 보며, 여자친구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갔다. 안타깝지만 그 책, 작가가 우리 삼촌인데. 말을 던지고 다시 가위질에 열중하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내가 겪어야 했던 나날들은 사실 기적이라고 불려야 마땅했지만, 오랜 시간이 경과한 연유로 나는 그것들을 그냥 일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여자를 여자친구라 부르고 있는 지금의 현실도 모두 지나간 일상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나의 일상은 이제 나만의 일상으로 보기 힘들어졌다. 여자친구라는 이전의 나의 삶에 부재하던 존재가 등장하면서부터, 그동안 지겹게 이어져오던 나만의 삶들은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할 일이 있으면서도 할 일을 안하고 술 마시고, 할 일이 없으면 술을 마시던 예전의 일상이, 할 일이 있으면 할 일을 하고, 할 일이 없으면 미용실에 놓인 쏘파에 앉아 그녀를 구경하는 새로운 삶으로 교체된 것이 그것이다. 매일같이 놀러오는 나를 보며 여자친구는 왜 맨날 뒤에 앉아서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사람을 구경하냐고 나무랐지만, 아무 말 없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그녀가 손을 움직이고, 가위를 쓰고, 이름 모를 도구들을 사람들의 머리에 붙이고 바르고, 와중에 희박한 비율로 한두번 나에게 눈길을 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나의 커다란 행복이었기에 웃음으로 대꾸할 뿐,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의 흔들림, 걸음걸이 하나, 규칙적인 눈 깜박임, 특유의 입가의 움직임 같은 작고 미묘한 변화는 내게 그녀가 실재한다는 느낌을 주었고, 그녀가 실재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난, 그 느낌을 연료 삼아야만 행복으로 연소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실 아직도, 실재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서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하는 상태에 빠지곤 하는데, 이것이 완벽한 여자친구의 탓인지, 기적을 맛본 나의 탓인지, 아직까지 범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꿈이어도 좋고, 현실이라도 좋지만 말이다. 나랑 사귀어요,라는 직접적인 고백을 할 때도 그랬다. 정상적인 상태의 나라면 절대 꺼낼 수 없는 단어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말았다. 상식적으로 상대방에게 임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거기다 민대머리의 몰골을 하고서는, 절대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법인데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거절당했을 경우를 고려하지 않았던 나의 무모함에는 치가 떨린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때, 그 순간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어쩐지 꿈결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기에, 나는 자각몽을 꾸는 것처럼, 세상 모두가 내 편이라는 착각 속에서 뻔뻔하게, 그딴 식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너무 뻔뻔해서였을까? 그런 나를 정상적인 상태로 목도한 그녀는, 나를 바람둥이 내지는 호색한 같은 가벼운 부류의 사람으로 분류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당연히 No라는 대답을 꺼냈다. 다만‘그런 여자’의 착한 심성을 소유한 탓에, 여러번의 자기검열을 거친 후에 말이다. 그녀의 거절은 결과적으로 주변에 여자가 많은 남자는 싫어요,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변해서 내게 던져졌다. 하지만 이게 무슨 축복인지, 나는 지난 이십여년간 쭈욱 여자와는 인연이 없는 인간이었고, 주변에 여동생, 누나, 엄마, 아줌마만 있을 뿐,‘여자’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이 자라온 행복한 경우에 속한 처지였다.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던 나는 감탄사를 내지르며 그럼 제가 딱이네요, 저 여자 한번도 안 사귀어봤어요!라고 온몸으로 그녀에게 자랑을 했다. 그런 인간 같지 않은 나의 모습에 그녀는 그저 얼이 빠져 멍해져버렸고, 민대머리의 흉상을 한 내가 애처로웠는지, 그런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 가여웠는지,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는지, 그도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게요라는 말로 사태를 수습하고서 자리를 떠났다. 물론 사태는 내가 원하는 쪽으로 움직여, 지금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솔직히 나는, 도대체 몇개의 기적이 내 인생에 찾아온 것인지, 세어보다가 지칠 정도다. 하루하루가 마치 기적 같았기 때문이다. 어떤 땐 내가 전설과 신화가 가득한 성경책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내가 정신병에 걸려 정신만 이곳에 있고, 현실의 몸뚱이는 어느 정신병동에서 긴 팔보다 훨씬 긴 팔 옷을 입고 스스로를 껴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보았다. 그런 생각과 추측에 빠질 때마다 결국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닌 남들이기에, 나는 남들 앞에서 나를 검증받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려나? 이죽거리며 친구들에게 찾아갔다가, 캄보디아 원주민들이 코코넛 따듯 목을 따일 뻔도 하고, 아침밥을 먹다가 사회는 정의롭다는 말을 꺼내 아버지에게 통원치료를 권장받기도 했다. 결국 나는 그녀가 실재하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답안을 써낼 수 있었다. 그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어쩐지 자각몽을 꾸는 것처럼, 나를 주인으로 모시는 세상이 전부 다 의지대로 휘청거리거나 굽신거리는 것 같았고, 존재하는 모든 혜택을 누려도 될 것 같은 거만함이 깃들었다. 그것이 지금에까지 이어져서 거만함에 휩싸여 그녀를 구경하고, 그녀를 구경해서 행복해지고, 행복한 나머지 거만해지는 묘한 순환을 반복하는 나날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 손님을 다 내보낸 여자친구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책 한권 덕분에, 그녀의 삼촌을 비웃음거리로 몰아버린 전적이 생긴 나는, 비웃음당한 남자의 조카인 그녀를 볼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새 머리가 많이 자랐네? 머리 해줄게 여기 앉아봐.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천사가 속삭여왔다. 생각해보니 나의‘그런 여자’는 몹시 착하다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필시 내가 곤란할까 봐 배려하고 있다는 생각이, 터질 듯한 감동이 몰려와 코끝을 깨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녀가 말한‘여기’에 앉았고, 곧 그녀가 둘러준 하얀 천 아래에서 발을 까닥이게 되었다. 가위를 들고 내 뒤쪽에 서서, 거울에 반사된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가 나타났다. 아까 저지른 나의 비웃음을 무마해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에 골몰하던 나는 그녀의 얼굴이 나타나자마자, 안면에 비굴한 표정을 띠고서 저 책, 진짜 감명깊게 읽은 책이야,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내뱉었다. 다행히 거짓말의 효과가 있었는지, 여자친구는 풋 하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나의 볼을 꼬집었다. 농담이었어, 바보야! 우리 삼촌들은 머리가 아직 정정하시거든요. 그것 때문에 그렇게 얼어 있었어?라고 대답했다. 깜박하고 잊고 있었는데 나의‘그런 여자’는 유머감각도 풍부한 편이었다. 여자친구가 그렇게 풍부한 유머감각을 활용해 나를 바보로 만들어 비웃음거리가 되게 했다는 것은 좀 씁쓸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의 가까운 친척에게 불경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기쁜 것이었다. 나는 그 심정을 입술을 내밀어 표현했다. 예컨대 거참 다행인데 나 놀려서 삐졌어란 의미를 내포하는 입술이었다. 써걱써걱 가위를 움직이던 그녀는 그런 나의 입술을 바라보며 방긋 웃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대머리들은 진짜 싫어, 세상에서 제일 싫어, 게다가 대머리들은 공짜를 밝히잖아 적어도 머리미용에 한해서, 하하하 나는 요렇게 너처럼 머리 빨리 자라고 숱 많은 사람이 좋아요 좋아.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내뱉는 그녀의 말 몇마디에 나의 입술은 튀어나온 보람도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튀어나와 있는 입술을 유지하고 있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평온해졌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거 공짜 맞지? 할 말을 하는 성격을 지닌 입술이 마지막 말을 내뱉고, 평상시로 돌아왔다. 입술과는 별개로 머릿속에선 다행이라는 생각만이 시끄럽게 맴돌았다. 머리가 빨리 자라는 나라서, 머리숱이 많은 나라서 참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그런데

 

나는 대기실에 놓인 의자에 앉아,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는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린 채 허공을 응시했다. 어느새 두 눈의 습도는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었다. 믿지 못하게도 나는 병에 걸려버렸다. 아니 걸려 있었다. 따라서 모든 병들이 가지는,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는 말도 쓰지 못하고 그런 병을 숨기고 있던 나의 몸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의 몸에 잠복하던 그 병의 징후를 발견한 것은 며칠 전, 집의 욕실에서였다. 그날도, 전날과 또 그 전날과 다를 바 없는 그런 날에 불과했기 때문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친구의 얼굴을 구경하고, 콧노래와 미소로 포장되어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깥에서 집으로 귀가해서 하는, 첫번째 일을 하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섰고 옷을 다 벗고서, 쏟아내리는 물 한가운데 자리한 후, 몸을 씻어내는 일상적인 행위, 즉 샤워를 시전했다. 향긋한 레몬향이 나는 샴푸를 두어번 짜내어 머리에 맞댄 후 비비고, 매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알비누를 집어 온몸에 마찰시키고, 자리마다 일어난 거품들을 물로 흘려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그 일은, 당연히 내려가야 할 물이 내려가지 않아서 중단되었다. 나는 바닥에 고인 물 위에 뜬 거품들을 손으로 밀어내고 수챗구멍을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무언가에 의해 막혀 있었다. 나는 고인 물이 빙빙 돌고 있는 곳으로 손을 내뻗어, 그 무언가를 추려냈다. 묵직하게 잡혀 나온 것의 정체는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머리카락들이었다. 거의 한주먹을 상회하는 터무니없이 많은 양에 나는 약간 놀라움을 느꼈고, 그것들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서 추리하기 시작했다. 이치상 이 욕실은 나의 방에 딸려 있는, 따라서 나 혼자 쓰고 있는 욕실이었기에 용의자를 한명으로 좁히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용의자의 혐의를 입은 나는, 수사를 받기 위해 거울 앞에 서서 한 손으로 이마를 들췄다. 맞은편에서 나의 모습 같지 않은 훤한 이마를 가진 내가, 알몸으로 서 있었다.

 

예쁜 옷, 데이트 코스 같은 느낌의 단어들만 써넣던 인터넷 검색창에,‘탈모’라는 단어를 쳐야만 했던 나의 비참한 심정은, 세상의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검색싸이트는 그런 나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관적인 자료들의 바다로 안내했다. 탈모 자가진단입니다. 당신의 정수리 부근에 빈 터가 형성되었다면 2번으로, 그렇지 않다면 3번으로 가세요. 정수리를 가만히 건드려보니, 조금 지쳐 보이긴 하지만 아직 괜찮은 듯 보였기에 나는 3번으로 갔다. 이마 라인이 뒤편으로 점진적으로 후퇴하고 있다면 11번으로, 그렇지 않다면 18번으로 가세요. 딱 나의 경우였다. 나는 단순히 이마가 훤해지는 것을 점진적으로 후퇴한다라고 표현하는 풍부한 어휘력에 감탄하면서 11번으로 갔다. 모발이 전보다 가늘어진 것을 느낀다면 A로, 그렇지 않다면 24번으로 가세요. 24번으로 굳이 갈 필요를 못 느낀 나는 A로 직행했다. 도착한 그곳엔, 당신은 탈모입니다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시군요,라는 비아냥거리는 글이 있었다. 알려줘서 고맙지만 고마운 기분은 들지 않는 내용을 재차 읽은 나는 다시 시급한 조치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검색창을 찾아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탈모 시급한 조치. 한숨과 함께 아직 20대인데라는 추임새가 절로 곁들여졌다. 뭔가 대략, 좋지 않았지만, 나는 그 시급한 조치가 병원에 가봐야 될걸요라는 것을 수차례의 검색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환자분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환자라는 지칭어가 나를 의미한다는 것을 자각한 나는, 다시 한번 상실감을 느끼며 진료실에 들어섰다. 의사는 테스토스테론안드로겐디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프로스카프로페씨아 같은 이상한 말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지껄이더니 허허허 웃었다. 남의 일이라 즐거워하는 그 모습에 절로 어깨춤이 덩실거릴 정도였지만, 나는 그것이 나의 일이기에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즐겁지 않은 기분은, 목적이 시급한 조치가 목적이고 그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나는 허허허 웃는 의사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나의 상태를 말했다. 하루에 100개 이상씩 머리가 빠지더라고요. 그러자 나는 안 그렇지롱 하는 표정으로, 의사가 대답했다. 스트레스도 받은 적 없고, 발열을 수반하는 병을 앓은 적도 없다, 그럼 아무리 생각해도 유전적인 요인 같은데, 혹시 부모님 중에 그런 증상을 가지신 분이 있나요? 아뇨 쌩쌩하신데요.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 나의 말이 예상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의사는 잠시 동요했다. 그럼 혹시 할아버지나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어떠세요?갑자기 가족사진을 찍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렵지 않게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었던 나는, 그분들도 말짱하셔요라고 대답했다. 이제 의사인지 역사스페셜의 감독인지 영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저씨가 허허허 하더니 그럼 증조할아버지나 증조할머니는? 하고 물어왔다. 거기까진 못 봐서 모르겠네요. 못 봐서 모르겠지만 그나마 머무르고 있는 머리카락마저, 숭숭 빠지는 것 같았다.

 

만주 벌판을 휘달리며 온 세상의 일제 앞잡이들을 모조리 척결하고, 맨주먹으로 백두산 호랑이를 거의 멸종 위기에 놓이게 만들고, 훈민정음의 전파에 가장 앞장서기도 했다가, 멀리 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조종하고, 태조 왕건이 이끄는 중앙군의 부대장으로 적장의 목을 수수깡 꺾듯 동강냈다는 나의 선조들의 무용담은, 할아버지의 입에서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이게 아닌데,라는 나의 생각을 모르시는 듯, 할아버지는 아예 본격적으로, 장롱 안에 고이 봉인해두었던 가보들과 족보까지 들고 나오신 판이었다. 멀리 5대에 걸친 조상들에서부터 잠재해 있을 수도 있다는 탈모의 위험성에 대해, 있다도 아니고 있을 수도 있다고 애매하게 장담한 의사가 새삼 원망스러워졌다. 할아버지가 주관하고 있어서,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그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어, 이제 고대사 학술쎄미나 수준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마당에 혹시 그분들 중에 대머리는 없으셨나요? 하고 묻는 것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나의 윤리의식이 만류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기계처럼 가식적인 감탄사만 연발하면서, 주머니에 넣어둔 시급한 조치의 결과물을 매만졌다. 프로페씨아, 의사가 처방해준 약의 이름은 용도와 무관하게 무척 예쁜 이름이었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 조상님의 두발건강 상태를 알아낸다 치더라도, 이 약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게 내 처지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잘 알면서도, 쉽게 그 약에 의존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 약이 치료약이 아니라, 그저 상태를 조금 더디게 해주는 약이라는 것, 또 만만치 않은 부작용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부작용이 없어도 모자랄 판에 발기능력 저하라는 공포를 굳이 함유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자꾸 현실은 나를 딜레마로 몰아넣었다. 문제가, 약을 복용하면 확실하게 머리카락이 없어지는 속도가 느려지지만 발기에 문제가 생긴다, 약을 먹지 않으면 호랑이보다 무서운 탈모 앞에 방치되긴 하지만 정상적인 남성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정도로 단순하다면, 어쩌면 선택이 간단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간단한 문제가 나에게 대입되었을 경우 상황이 많이 복잡했기에, 결단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의 존재 때문이다. 실상 나는 내 머리가 대머리가 되건, 갯수가 두개로 늘어나건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멋을 부리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누군가를 많이 만나야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닌 내가 고작 머리카락들이 없어진다고 죽을상을 할 이유는 모두, 그녀가 대머리를 싫어하기에, 그것도 진짜 싫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슨 불행인지 그녀는 미용사라는 직업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여자친구는 인간의 머리에 한해선 전문가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나의 딜레마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니까 약을 먹어서 뒤로 점진적으로 후퇴하는 이마 라인을 늦춘다고 해도, 전문가인 여자친구의 눈썰미는 피해갈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니, 곧 대머리가 될 나를 눈치챈 그녀는 점진적으로 나를 싫어하게 될 것이고, 나는 발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무력한 모습으로,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눈물을 흘리겠지. 그렇다고 약을 먹지 않고 버틴다면, 버티지 못하고 뒤이을 급속한 탈모가 그녀의 급속한 외면을 부를 것이 뻔하다. 발기가 되는 상태로 차인다고 생각해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내가 약을 먹든 먹지 않든 간에 그녀는, 나의‘그런 여자’는, 나를 싫어하게 되고, 더 나아가 경멸하게 돼, 종국엔 나와 헤어질 거란 결론만 도출됐다. 차라리 죽을병에 걸리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착착 잘도 걸리는 병은 다 어디 가고 나는 이따위 병을 앓아야 하나,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것을 바라봐야 할 것이 확정된 나는, 이 형용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머릿속까지 머리 바깥처럼 피폐해지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그런 여자’의 요건에 대머리도 좋아하는 여자라고 써둘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고, 그것은 그녀는 왜 대머리를 싫어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져 세상 모든 대머리들에 대한 동정으로 치우쳤다가, 이내 변질되어 모든 대머리가 아닌 사람들을 저주하게 되어 그녀의 삼촌들도 모두 다 대머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고, 까닭없이 그녀의 미용실에 있는 책의 제목을 떠올리며 그 끈을 놓았다. ‘지구에 꽁짜는 없다.’ 결국 그런 것이었을까? 나는 어쩐지 내가 이런 병을 앓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지구가, 거의 거저 그녀를 얻은 댓가로 내게 머리카락을 지불하라며 독촉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

 

내가 대머리가 될 위기에 직면하자마자, 나의 눈은 영문을 알 수 없이 자동으로 남의 머리를 향했다.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두세배 확대되어 내게로 전해졌다. 지나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발휘되는 나의 능력은, 나로 하여금 풍성한 머리의 사람이 지나가면 안타까움을, 남 같지 않은 허전한 머리의 사람이 지나가면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 짓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 나는, 어쩐지 내가 봐도 애처로웠다. 머리, 그로 인해 그녀. 한가지를 잃게 됨이 확실해지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하는 사태에 놓인 나는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많은 시간을 들여도 답안이 안 나오는 이 상황에서 쉬지 않고 달려보았지만, 결코 원하던 결승점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내가 스스로 멈춰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끝나야 한다면, 나는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것을 보기 전에 끝내고 싶었다. 나는 이제 머리는 물론 그녀에게까지 포기상태가 되어 힘없이 걷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러기 위해선 그녀를 만나야 했기에 시작된 나의 걸음은, 조금씩 방향을 잃어갔다. 그녀가 있을 곳을 뻔히 아는데도, 그녀를 향하지 않는 나의 걸음은 어딘지 더디고, 불쾌했다. 정말 아무 의미 없이 거리를 걷는 것에 지나지 않는 걸음을 걷게 된 나는 갑자기 내가 동물원의 짐승보다도 못한 것 같다는 구슬픈 생각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짐승이었다면 나 지금 털갈이중이야, 따위의 말로 얼버무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짐승이 아닌 나는 계속해서 아무데로나 직립보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찬바람이 눈 밑살을 거쳐 자꾸 각막을 자극했다. 나는 손목을 들어 눈을 비비면서 계속해서 걸었다. 이제 정말 어디를 걷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제 정말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 들어선 나는, 주변을 살폈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어디인지 모를 곳이 좁은 골목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유난히 환하며, 그 이유가 그 안에 비정상적으로 빛나는 머리를 가진 이름 모를 대머리들이 여기저기에 전구처럼 앉아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가던 대로 계속 걸음을 이어가기 위해 그 골목을 가로지르기로 마음먹고, 한걸음을 내디뎠다. 나의 진행방향의 오른편에 있던 한 대머리가, 잠깐만 나의 이야기 좀 들어주게라고 절박하게 말하며, 막 지나쳐가던 나를 불러세웠다. 어차피 나는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그저 걷고 있었고, 다리도 조금 아팠기 때문에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외국인이지만 이상하게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또 그만큼의 정직한 댓가를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네. 나의 좌우명은 항상 선을 베풀고 살자였고, 정말 나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어. 자랑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교회는 물론 사회봉사도 매주 빠뜨리지 않았을 정도니까. 그런 나를, 직장에서는 청렴하고 선한 사람으로 인정해줬고, 바깥에서는 선생님이란 호칭을 붙여줬지. 나는 그런 나의 삶과 나 자신에게 참으로 만족하고 살았었네. 내가 시장으로 출마하기 전까지 말이야. 나는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열심히 달렸네. 공약도 성심성의껏 지킬 수 있는 것만 하고, 많은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손수 광고전단도 돌렸어. 이 모든 것이 상대방 후보보다 질 높은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약간 방심도 했었다네. 하지만 이게 어찌된 건지, 투표결과는 예상과 정반대였네. 후에 사람들이 말하길, 상대방의 풍성한 머리숱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더군, 대머리는 신용이 없어 보인다나, 하아, 결국 나는 그렇게 대머리는 선거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전례를 남기고 말았다네. 그래서 나는 자네를 비롯한 모두에게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어, 미안하네, 용서해주게, 나 때문에 이제 선거도 나가기 전에 한풀 꺾일 것 아닌가. 나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서 대머리는 역시 불편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말이라도 해줘야겠다는 의무감은, 괜찮아요 저는 선거 나갈 일도 없는걸요라는 대답을 만들어 외국인에게 건네고서 그를 지나치게 만들었다. 시종일관 미안한 기색을 보이던 외국인은, 이미 등 돌려 걸어가는 나에게 혹시 비슷한 경우가 생겨도 내 경우는 잊고, 절대 주눅들지 말게라는 부탁까지 던졌다. 나는 그런 그를 그냥 무시하고 계속 걷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한두걸음 걸어갔을 무렵, 나는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춰선 한쪽 발 때문에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내려 아래를 바라보니, 누군가의 발이 나의 발에 닿아 있었다. 그제야 내가 누군가의 발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사과를 하기 위해, 발의 주인을 찾았고, 머리는 다 빠져 아무것도 없지만 묘하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얼굴을 한 여자가,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마주 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간 여자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베레니케라고 합니다. 지금은 좀 바빠요.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거든요. 제 남편은 지금 전쟁터에 있어요. 그런 그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머리칼이나마 하늘에 있는 아프로디테 여신께 바쳐, 기도하는 것뿐이랍니다. 고작 머리카락으로 남편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잘라줄 수 있죠, 뭐 이제 남은 머리도 없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그쪽도 뭘 지키고 계신가 보죠?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 외에는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쏘아낸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날아온 그녀의 질문에, 그녀를 떠올렸지만 그녀라고 말하기엔 왠지 우스워져서, 딱히 지키고 있는 건 없는데요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나의 대답에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골목의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다시 두걸음 정도를 옮겼을 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고, 나의 눈은 자연히 웃음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했다. 나의 눈길이 향한 그곳엔 젊은 처녀총각임이 분명한 대머리 커플이 부둥켜안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에 예쁘장한 머리띠가 걸쳐져 있고, 남자의 팔에 시계가 없는 시곗줄이 달려 있는 것만 빼면 하나도 특이할 것이 없는 전형적인 커플이었지만, 단지 대머리라서 약간의 위화감을 조성했다. 나는 내가 지나가건 말건 서로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 모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걷는 속도를 높였다. 그런 나를 보았는지 두 사람 모두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행복하세요. 행복하세요. 왠지 내 처지와는 완전히 대립될 정도로 행복한 그 모습과 말에, 나는 되려 내가 가진 불행함의 정도를 키우고서, 그들에게서 사라져주었다.

 

이제 더이상 다른 어떤 대머리들이 붙잡아도, 그냥 내 갈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젖었던 나는, 누가 붙잡지도 않았는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머리에 힘줄이 다 보이도록 씩씩거리면서 맷돌을 돌리고 있는 모습까지는 괜찮은데, 그 사람의 얼굴과 몸매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를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바로 나였다. 항상 거울로만 바라봐왔던 나의 모습이, 그곳에 앉아 맷돌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나를 닮은 그의 모습에 압도되어, 한참 동안 움직임을 멈췄다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말을 걸었다. 저기요,라는 말에 씩씩 돌리고 있던 맷돌을 멈춘 그는 왜? 하는 짤막한 말로, 대답과 질문을 동시에 처리했다. 나는 그 박력에 또 한번 놀라 아뇨, 그냥 저를 닮으신 거 같아서요라고 말을 흐렸다. 그러자 그는 사람은 누구나 닮은 데가 있지라고 무뚝뚝한 대답을 하고서, 허공을 응시했다. 나는 닮은 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온통 닮았다는 말을 하려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가, 그의 눈을 보고는 그 말을 잊고 말았다. 그의 눈이 있어야 할 움푹 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대신해 그가 입을 열었다. 나를 닮아봤자 좋을 것은 하나도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 마음, 그 믿음만큼은 괜찮다고 생각하네, 비록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그 때문이지만 말이야. 그런 나를 너도 어리석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의 눈에 이어, 그의 말에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었다. 아무 말이 없는 나를 앞에 세워둔 채, 그는 다시 손을 더듬어 맷돌의 손잡이를 찾아 붙잡고는 힘을 주었다. 그르렁 하는 소리를 내며 맷돌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명백히 나를 쫓아낸 것이라 생각되는 나를 닮은 그의 행동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골목의 끝으로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그가 돌리는 맷돌에서나 날 법한 그르렁 하는 소리가 나의 가슴속에서 퍼져나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계속해서 걸어가 마침내 골목을 관통해냈다. 그리고 다시 낯익은 거리에 들어섰다고 생각했을 때, 골목 안쪽에서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와 나의 옷깃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가뜩이나 날카로워져 있던 신경을 의식하고 그 손을 떨쳐내버리려는 의사를 거칠게 표했지만, 나의 옷깃을 붙잡은 손은 굳건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서서 나를 붙잡은 그 손의 주인을 마주보았다. 어딘가 낯익은 듯한 공짜를 밝힐 것 같은 인상을 가진 대머리였다. 나는 왜 날 붙잡는 거죠? 이 손 좀 놓으세요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그 대머리는 나의 이야기도 좀 듣고 가게, 중요한 말이 있어라고 쑥스럽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쑥스러움과 그의 중요한 말보다 더 중요한, 나의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바쁘다는 말만 되돌려줬다. 대머리는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은 채, 짧은 말이니 얼마 걸리지 않는다고 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그 중요한 말을, 짧게 해보시죠. 대머리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쳐 나의 옷깃을 놓았다. 그러니까 말일세, 짧게요, 나는 왠지 신용이 가지 않는 관상을 가진 대머리의 말을 잘라가며, 나의 의사를 한번 더 분명히했다. 그래, 알겠네, 그러니까 말일세, 학생, 지구에 꽁짜는 없다네. 대머리의 짧고 중요하단 말은, 오래도록 나의 머릿속에서 나를 괴롭혀왔던 말을 반복하는 식상함을 과시했고, 이에 나는 이런 쉬운 말을 이렇게까지 하면서 들려주려 했던 이유와 그 대머리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그러자 대머리는 털이 부재하는 그의 뒷머리를 긁으며, 쑥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지구일세.

 

영양가 없는 이상한 골목에서, 결국 빠져나온 나는 다시 익숙한 풍경으로 스며들어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르렁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낀 나는 휴대폰을 열어 문자메씨지를 확인했다. -요즘 왜 놀러 안 와? 나 심심해- 그녀의 문자였다. 나의 손가락은 답장 버튼을 눌러 -잠깐 나와줄래? 할 말이 있어-라는 글을 썼다가, 전송버튼 위에서 멈춰섰다. 온정이라고는 없는 차가운 공기가 불어왔다. 별스럽게 차갑고 습윤한 공기가 손끝에 맺혔다. 나는 이제 더이상 버티기 힘든 상태와 이제 말해야 될 때가, 동시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멈춰 있던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는 내가 걷기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정리해두었던 말들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또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천천히 되뇌면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다시 그런 말

 

그녀를 떠올리자, 모든 것이 멎어버린 순간에도 나의 머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민활하게 움직여, 내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뱉어냈다. 나는 그렇게 튀어나온 기억들에 휘말려,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로 굳어져 있는 나를 원망했다. 다시 첫번째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정말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게 아니었다. 그런 말을 그녀에게 내뱉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돌아서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후회는 점점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그 윤곽을 상세하게 드러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또 이미 늦은 생각들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혼자서 만들어낸 수많은 나의 생각들은 모두 핑계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나를 싫어하기 전에 내가 그녀에게 이별을 고해야 했다는 것도, 그 원인인 나의 탈모도, 모두 다 핑계에 불과했다. 나는 그저 나에게 일어난 기적을 배신하고 그녀를 기만한 것뿐이다.

 

?* ! ; ˆ´` §

 

물음표를 달고서 별을 만나 느낌표, 더 나아가 쎄미콜론이 되어, 악쌍씨르꽁플렉스, 악쌍떼귀, 악쌍그라브 같은 모습으로 변모를 거듭하다, 꿈을 관통해 마침내 쎅션기호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나를 기억하고 있다. 여러개의 기적과 많은 양의 행운이 깃들어, 그토록 꿈꿔왔던‘그런 여자’와의 사랑을 시작했던 숨찬 표정의 나도 기억한다. 거지 같은 병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나 역시 기억한다. 그러다가 만났던 이상한 대머리들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나의 모습도 기억난다. 알 수 없게도 나는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기적을 잊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또 자기가 지은 죄 역시 그것과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제 일렬로 늘어선 나의 모든 기억들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한결같이 공통된 의견을 말했다. 마치 암호와도 같아,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신비로움으로 시작된 나의 사랑을, 그 기적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끝내버렸다고. 나는 이제 가루가 되어버린 기억을 긁어모으며, 한 발은 지면을 또 다른 발은 허공을 밟은 채,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멈춰서, 뚜렷한 적의로 나를 원망했다. 곧, 죽을 것 같은 기분과 죽고 싶은 마음이, 내가 가진 전부가 되었다.

 

죽을 것 같아도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시간이 멈춰버린 탓이었다.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죽어야겠다는 결론까지 내렸지만, 여전히 눈은 공중에서 바닥으로 가라앉지 않았고, 사람들은 멈춰서 있으며, 세상의 모든 색깔들은 회색으로 탈색되어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머리와 몸은 원래 별개의 것인 듯, 나의 것이 분명한 몸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몹시 고통스러웠다. 몸도 그렇고, 머리도 그렇고 어느 것 하나 통제되지 않는 상태는 충분히 고통을 느끼게 해주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 몸과 혼자 미친 듯이 기억과 생각 들을 곱씹는 머리, 둘 모두 나를 벌주겠다는 듯 물러남이 없었다. 그 속에서 이제 몸도 아니고 머리도 아니게 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녀가 보고 싶다는, 솔직한 염원을 빌어보는 일이었다. 솔직하지 않게 그렇게 말하고서 돌아선 나는, 솔직히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고, 뻔뻔하고 혐오스럽게 염원했다. 그녀가 보고 싶다고. 어쩐지 주변이 따뜻해지고,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고, 붙잡은 채 그것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녀가 보고 싶다. 그녀가 보고 싶다. 나의‘그런 여자’가 보고 싶다. 갑자기 감기지 않고 있던 눈으로, 빛이 들어왔다.

 

‘*’들이었다. 그것들은 정지한 시간을 무시한 채, 회색인 세상을 빛으로 지워내며 허공에 떠 있던 눈들을 녹이고 멈춰진 사람들 사이사이를 누비며 다가와, 나를 둘러싼 다음 멈춰섰다. 나는 감기지 않는 나의 눈이 빛에 익숙해지고 나서야‘*’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어느 동네의 골목에서 전구처럼 앉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마치 전구처럼 발광하는 그들의 머리에서 새어나오는 빛들은, 어딘가 모르게 그녀의 것과 닮아 있었고, 그것이 주는 성스러운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다른, 기적이군요. 나의 말에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우울한 과거를 가진 외국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선조가 후손을 돕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일상이라고 부르는 거라네. 뚜벅뚜벅 걸어온 그는 손을 들어 굳어 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의 두피는 그의 체온이 참 따스하다고 내게 전해주었다. 외국인이 말했다. 절대, 주눅들지 말게. 나의 감기지 않던 눈이 어느새 깜박거리면서 눈물을 뱉어내었다. 명심할게요. 내가 대답을 하면서 울어버리자, 누군가 그런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베레니케였다. 그녀는 나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주고서, 머리를 다독여주었다. 그 손끝에선 별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싱긋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세요. 아무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허공을 딛고 있던 한쪽 다리가 제자리를 찾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나는, 넘어질 뻔했지만 양쪽에서 누군가가 손을 뻗어 지탱해줘서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고개를 가로저어 보니, 예쁜 머리띠를 하고 시계 없는 시계끈을 찬 대머리 커플이 나의 팔을 껴안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양쪽에 자리한 채, 각자 바깥쪽의 팔을 들어 허공에서 깍지를 끼고서, 나의 머리 위에 조심스레 올렸다. 키가 작은 나 덕분에 하트 모양의 윤곽이 그려졌다. 나는 그 하트에서 뿜어져나오는 따뜻함에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런 나를 보며 커플이 웃으면서 말했다. 행복하세요, 행복하세요. 노력할게요. 나는 두 다리의 감각이 모두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손을 뻗어, 머리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욱신거리는 머리에, 뒤를 돌아보니 맷돌을 돌리던 남자였다. 여전히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냥 믿어, 맷돌 돌리는 일도 생각보단 할 만해. 믿고 있어요. 어느새 두 팔이 자유로워진 나는, 그의 손을 머리에서 밀어내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나저나 아버지, 할 말 있다고 하셨잖아요. 나를 닮은 누군가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한발자국씩 옆으로 물러났다. 그들 사이로 거대한 빛이 다가왔다.‘*’보다 더‘*’같은 그 빛은 어쩐지 낯익은 듯했으며, 동시에 굉장히 따사로웠다. 당신은 정말 지구였군요. 나의 눈앞엔 왠지 공짜를 밝힐 것 같은, 낯익은 얼굴을 한 대머리가 빛을 가르며 서 있었다. 나의 말에 외국인이, 베레니케가, 대머리 커플이, 또 나와 닮은 남자가 순차적으로 대답해주었다. 그래. 너와. 우리 모두의. 아버지시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지구가 말했다. 뭐, 그런 셈이지. 나는 그 순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던 나의 대머리 선조가 누군지 알 것 같았고, 그러니까 제 머리는 당신에게서 물려받은 거였군요라는 말을 지구에게 건넸다. 꼭 내가 아니라, 나의 자손과 그 자손과 또 그 자손 들이 너와 연결된 것이지. 웃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신기한 느낌을 받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나의 형질을 이어받은, 너는 꼭 알고 있었으면 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잘 들어보렴.

 

지구에 꽁짜는 없단다.

 

나는 그제야 그 말이 어떤 온도를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 알았어요. 지구는 나의 말에 그거 참 다행이구나, 다행이야라는 어쩐지 낯익은 말을 하고선, 안도의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마지막 인사말을 했다. 그럼 이제 가서 너의 일을 하려무나. 나는 나의 일에 대해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지구가 내어준 나의 공간에 바로 섰다. 잘 있어, 나중에 또 만나 같은 인사말도 없이, 반짝하며 그들의 머리가 빛을 내뿜자 사방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이 빛으로 뒤덮이는 순간, 문득 생각난 작별인사를 지구에게 건넸다. 있잖아요, 꽁짜가 아니라 공짜예요 공짜.

 

 

그런 나는

 

허공이 제자리인 줄 알던 눈송이는, 다시 자유낙하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멈춰 있던 초침은 오른쪽으로 달려나갔다. 다시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안 나는 초침보다 빨리, 내가 해야 하는 나의 일을 위해, 가던 방향에서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마주친 사람들의 이야기들처럼, 나의 자손들이 마주칠지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를‘완성’하는 것, 단지 생각 때문에 중단된 나의 이야기를 기적 같은 순간에 느낀 실감으로 다시 이어붙이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외국인의 이야기가 가르쳐준 대로 주눅들지 않고, 베레니케의 이야기를 생각해 지켜내야 할 나의‘그런 여자’를 지켜내어, 대머리 커플이 들려준 이야기대로 행복해질 것이다. 나는 그녀를 향해,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형체를 일그러뜨리면서 나의 뒤로, 사라져갔다. 모두 다 추운 날씨에 잔뜩 웅크린 채, 걷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하나도 춥지 않았다. 정수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굉장히 따뜻하고 포근한 공기가, 나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되려 덥기까지 한 그 공기는, 어쩐지 내가 캄보디아 남해안에 있는 항구를 산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몽환적인 생각까지 들게 했다. 저 멀리, 푸른 바다를 낀 야자수는 아니었지만, 가로등 아래, 힘없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닮은 누군가가 했던 것처럼 그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비록 방금 전에 결심한 것이지만, 그 각오는 설사 평생 맷돌을 돌리게 되더라도 변하지 않을 굳셈을 지니고 있다. 나는 또한 지구를 믿었다. 지구에 공짜는 없으니, 내 머리를 가져간 지구는, 그 댓가로 내가 그녀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런 다짐과 생각과 연속된 실감 속에, 내가 달리는 속도는 자연적으로 높아져갔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게 아니었어로 시작할 말이 너무도 많은데, 자꾸 숨이 벅차왔다. 좀 전보다 가까이, 가파르게 커져오는 그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밭은 숨을 내뱉으며, 이제 나의 모든 이야기 속에 자리할 주인공인 그녀를 불렀다.

 

 

 

심사평

 

총 333명의 응모작을 세명의 심사위원이 나누어 2주 동안 심사한 뒤, 각자 최종심에 올릴 만한 작품들을 골랐다. 그 결과 「기다려, 데릴라」 「대흥동 불가마 사운드」 「미인국」 「붉은 밤을 지나서」 「아름다운 신세계」 「이제 펑키뮤직을 틀어주세요」 「일식」 등 7편의 작품이 최종심에 올랐다.

심사위원들은 이들을 윤독한 뒤, 수상작 선정을 위한 토론을 시작했다. 우선 지원 자격을 대학생에 한정했음에도 신춘문예나 문예지 공모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좋은 작품들이 많았고, 또 작품들 사이의 편차가 그다지 심하지 않다는 데 심사위원들은 동의했다. 이건 한국문학의 미래가 밝고 따뜻하리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한편 내용상으로는 직업이 없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해 대학생들이 경제적 미래를 어둡게 보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개별 작품에 대해 논하면 다음과 같다. 「기다려, 데릴라」는 이번 투고작 전반의 경향과 좀 동떨어진 형태의 작품으로, 언어를 다루는 감각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자기가 쓰고자 하는 것을 끝까지 쓰고야 말겠다는 식의 굴하지 않는 에너지가 넘친다는 평이 많았다. 「대흥동 불가마 사운드」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 안정적인 문장과 무리하지 않는 사건 진행이 인상적이었다. 사소한 대화라도 쉽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 「미인국」은 일들을 평범하게 보지 않고 현실을 뒤집어서 생각해내려는 발상이 읽는 내내 시선을 붙들었다. 「붉은 밤을 지나서」는 로알드 달을 연상시키는, 아주 유쾌한 소설이었다. 문장도 탄탄하려니와 이야기도 풍부했다. 「아름다운 신세계」는 소제목을 붙인 독특한 구성이 신선했고, 자기가 써야만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펑키뮤직을 틀어주세요」는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서술이 읽는 부담을 덜어주었고, 이십대의 정서와 고민을 실감나게 풀어내는 이야기가 좋았다. 「일식」은 깔끔한 문장으로 읽는 사람의 궁금증을 제어하는 솜씨가 뛰어났으며, 현대인의 텅 빈 자아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한 점도 평가할 만했다.

말했다시피 다들 어느정도 수준에 이른 작품들이라 그중 한편만 뽑는다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K의 죽음이라는 결말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인 「대흥동 불가마 사운드」, 요즘 소설이라기에는 너무 전통적인 사건 진행이 흠으로 작용한 「붉은 밤을 지나서」, 이야기가 소설이 되지 못하고 발상 수준에 머문 감이 들었던 「미인국」, 너무 소설적으로 만들어진 게 오히려 흠이었던 「일식」 등이 제외됐다. 나머지 「이제 펑키뮤직을 틀어주세요」 「기다려, 데릴라」 「아름다운 신세계」 이 세편을 놓고 한 최종토론에서 심사위원들은 무엇보다도 응모자들이 젊은 대학생인만큼 안정적이고 노련한 솜씨를 보이는 작품보다는 패기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에 주목하자고 합의했다. 그 결과 「기다려, 데릴라」가 제6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수상자에게는 축하와 함께 무거운 기대를, 본심에 오른 분들에게는 조만간 새로운 작품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은희경 공지영 김연수

 

 

 

당선소감

 

그냥 어쩌다 생각난 소재로 심심풀이 삼아 쓴 소설이었기 때문에, 응모해놓고서도 상을 타는 것은 별반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렇게 상을 받게 됐군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진짜 멋있겠지만, 실상은 이와 정반대에 가까웠다. 술에 취해 학교 게시판에 붙어 있던 공모포스터를 몰래 훔친 일부터 시작해서, 마감일 소인을 찍기 위해 우체국으로 내달려간 일로 끝을 본, 나의 한달은 내가 봐도 볼 만한 광경들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봐도 하나도 멋있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나 스스로가 제대로 된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 같은 희열과, 맘같이 안 써지는 소설에서 파생된 두통, 계속 이런 시간을 살고 싶다는 확신 들이 그것이었다.

덤으로 소재 선택의 중요함도 깨달았다. 아무래도 내 소설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꺼내는 이야기이다. 돌이켜보면 최악의 소재 선택이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끌어와봐도 도저히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았다. 잘 알고 있거나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재밌을 것 같다는 막연한 취지로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조금만 심오해지면 왠지 투병생활 수기의 냄새가 났고, 반대로 약간이라도 가벼워지면 꽁뜨가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쓰는 내내 뭔가 또렷하게 망해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더 치열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말이 안되는 부분은 말이 되게끔 꾸며내야 했고, 말도 안되는 부분은 말도 안 나오는 방법으로 덮어야 했다. 애초부터 말하고 싶은 건 많고, 자꾸 생기는 맹점들은 수습해야 하고, 밑그림을 넘어가는 것도 경계하다 보니 오기는 치솟아오르고, 글자들은 미친 듯이 불어나기만 했다. 그래서 하는 변명이지만, 어쩔 수 없이 분량 조절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을 타고서 가장 의외라고 생각됐던 것이 이 부분이다. 심사 기준치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분량을 받아들여주었다는 것. 나로서는 몹시 고마울 따름이다.

한쪽 다리를 달달달 떨어가면서, 수상소감을 적고 있다. 응모 마감일부터 발표일이 될 때까지, 혹시라도 복이 달아날까 봐 다리도 떨지 못했던 것을 보상하는 의미의 다리 떨기이다. 또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떨리는 다리이기도 하다. 이제‘지금까지’보다‘지금부터’라는 말로 시작해야 하는 때임을 잘 알고 있다. 벌써부터 들려오는 우려의 목소리가 그것을 알려주었다. 아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실망시키지는 않는 수준을 유지해서, 그 우려에 답변하겠다.

끝으로. 소설을 비롯한 글의 즐거움을 가르쳐주신 학과 교수님들, 그중에서도 특히 “만만한 네가 상 탔으니 과의 앞날이 훤하구나”라고 축하 아닌 축하를 해주신 이승우 교수님께 감사를. 나보다 소설을 1.1배 정도 잘 쓰지만 결과적으로 나에게 밀린 소설동인‘모호’사람들에게 자극을. 그냥 가만히 있어도 온통 소설의 소재를 제공해주는 나의 친구들에게 희망을. 내가 낸 소문에 휘말려 내가 정말 소설을 잘 쓰는 줄 알고 있었던 학교 선배, 동기, 후배 들에게 다행을. 기쁜 소식에 따뜻한 포옹과 용돈을 안겨주셨던 부모님에게 사랑을. 병실에 누운 채로 부족한 손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주신 할머니에게 고마움을. 그리고 모자란 나의 소설에서 가능성을 보아준 심사위원들께 큰절을. 보낸다. 모두 고맙습니다.

오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