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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 | 김수영 시인 40주기에 부쳐
김수영의 현대성 또는 현재성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저서로 『얼굴 없는 희망』 『말과 시간의 깊이』, 역서로 『라모의 조카』, 말라르메의 『시집』 등이 있음. poetique@dreamwiz.com
김수영(金洙暎)은 비범한 일을 했다. 구태여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는 한 ‘원로시인’이 몇해 전에 현대 한국시 전반에 걸치는 시인론집을 출간하면서 거기서 김수영을 제외해야 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놀라운 발언은 그러나 거기에 걸맞은 파동을 일으키지 못했다. 김수영을 깊이 존경하거나 자신의 문학적 성장을 그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 문인들의 편에서라면, 이 말이 무력함을 자신들의 무응답으로 실증했다고 할 수도 있고, 끝내 겉돌다 끝날 지루한 논의에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김수영의 공적은 어떤 바람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것이다. 그러나 문단에 적을 걸고 있는 여러 ‘계층’의 인사들을 이러저런 사석에서 만나보면, 한국 현대시의 역사가 ‘왜곡된’ 근본원인이, 적어도 자신들이 문단생활에서 부당하게 겪어야 했던 온갖 불운의 일차적 책임이, 김수영에게 있음을, ‘이론이 딸려서’ 공론을 펼 수는 없지만, 확신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에게도 김수영은, 어느 누구에게서보다도, 살아 있다. 어느 편에서나 김수영의 존재는 이렇게 무겁다. 이 점은 우리에게서 시가 무엇인지, 혹은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묻는 논의에서 김수영을 인사치레로라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저간의 사정과 일치한다. 훌륭한 시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김수영은 그만큼 특별한 일을 한 것이다.
이 작은 글은 그 특별함을 들춰보고, 그가 유명을 달리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특별한 것들이 그 특별함을 유지하면서도 그 세월에 값하는 어떤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서 오는지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그의 초상을 문학적이건 아니건 어떤 이데올로기로 환치하거나, 그의 시를 오지랖만 넓은 어떤 용어들 속에 포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밤낮 달아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김수영 자신이다. 그의 시들이 여전히 좋은 힘이건 나쁜 힘이건 어떤 힘을 행사하는 것은 그들 시가 여전히 어디에 가두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서라면 김수영 자신이 어떤 말로 어떻게 시를 썼고 그것이 어떻게 차별되는지 살피고, 그 의의를 숙고하는 일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터이나 이 글로 그 일을 다 하기는 어렵다.
김수영이 시를 거칠게 썼다는 의견에 반론을 펴는 사람은 드물며, 그 평가는 사실에 가깝다. 김수영의 시법에 대한 논의도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는 것은, 자명하게만 보이는 이 의견이 김수영에 대한 여러 다른 평가의 근저를 형성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내용은 상술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시를 매끄럽게 쓰지 않았다. 그는 가지런한 시행과 영탄조의 문장과 시적일 것 같은 말과 멋 부린 말을 믿지 않았으며, 말 하나하나를 생경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문법을 밀어붙이고, 무엇보다도 그럴듯하거나 비겁한 논법에 기대지 않았다. 그는 누가 울 때 ‘운다’고 썼지 ‘웁니다’나 ‘우옵네다’라고 쓰지 않았다. 그는 먼 것을 보고 ‘먼’이라고 썼지 ‘먼먼’이라고 쓰지 않았다. 「奢侈」 같은 시의 “길고긴 오늘밤”이나 “어서어서 불을 끄자”처럼 입에 발린 첩어가 나타날 때는 거의 예외없이 어떤 종류의 것이건 모멸감이 섞인 희화가 있다. 김수영은 이 시를 “불을 끄자”라는 짧은 말로 끝내면서 그 희화를 접는다. 「孔子의 생활난」의 마지막 시구는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난다. ‘고요히’나 ‘흡족한 마음으로’ 같은 말은 거기 없지만, 말의 리듬을 끊는 “그리고”는 대범하게 거기 있다. 모든 언어에는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장치 외에도 그 전달된 사실을 화자의 의도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장치가 있으며, 이를 수사학에서는 논증요소라고 부른다. 한문 같은 고전어가 이 논증요소에 최소한으로만 의지하는 데 비해 문어의 구속력을 적게 받으며 발전한 한국어에서는 이 논증요소의 힘이 매우 강해서, 조사와 술어의 어미 하나하나가 모두 논증적 기능을 지닌다. ‘키는 크다’와 ‘키가 크다’가 다르고, ‘키가 크다’와 ‘키가 크더라’가 다르지만, 전달되는 사실은 모두 ‘키의 큼’이다. 서정주(徐廷柱)가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이라고 읊을 때, 왜 ‘인제’가 돌아와야 할 시간인가를 따지기는 매우 어렵다. “인제는”에서 ‘는’의 힘은 그렇게 강하다. 정서적 논증력은 논쟁을 가로막는다. 논쟁적이지만 논증적이 아닌 김수영의 시쓰기는 “인제는”과 같은 마술적인 정서장치의 후원이 없다. 마찬가지로 사실의 무게가 어떤 주관적 정서의 개입으로 가벼워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에서, 먼 것은 멀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먼 것이며, 우는 사람은 울 것 같은 심정에 복받치는 사람이거나 제 울음을 어디에 보여주려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그리고 단순히 우는 사람이다. 「孔子의 생활난」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몽상이나 죽음과 유사한 것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음이다. 이 먼 거리, 이 울음, 이 죽음은 사실인 것처럼 이미 논증된 사실이 아니라, 항상 논쟁을 기다리고 야기하는 사실이다.
김수영의 시어를 그의 현실인식과 결부시키는 일은 새삼스럽지만 그만큼 정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김수영이 현실을 천착했다는 말은 부족하다. 그는 현실만 보았고, 그것도 매우 좁은 현실만을 천착했다. 그는 단 한편의 여행시도 쓰지 않았으며, 자연경관에 관한 길고 깊은 관상보다 그에게 더 낯선 것은 없다. 그의 시는 종로를 비롯한 서울 거리와 그 외곽 동네들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는 양계장을 경영했지만 그것은 가내공업이나 진배없었고, 곁들여 채마밭을 일구기도 했지만 거기에 지속적인 정성을 바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농사꾼이 바라보듯, 다시 말해 그의 시대에 이 땅의 거의 모든 사람이 바라보듯 바라보지 않는다. 「거대한 뿌리」가 증언하듯 그의 마음속에도 전통의 깊은 뿌리가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자신이 체험한 현실을 그 정서의 전통에 끌어다 붙이는 일은 그에게 금지된 것이나 같았다. 자연에 대한 감정은 어디서나 민족감정과 엇물려 있기 마련인데, 그렇기에 더욱 이 감정은 「屛風」에서 말하듯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인 “설움”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에게 땅에 떨어진 눈은 겨울 산촌의 아늑한 풍경과 연결되지 않았고, 봄에 돋는 새싹은 친구의 사무실이 사무실인 것만큼만 새싹이었다. 그는 눈과 새싹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았고,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처럼 눈이라고, 새싹이라고 말했다.
모든 속절없는 감정에서 차단된 이 언어는 그만큼 사물에 육박할 수 있겠지만, 그 언어로 쓴 시가 어떤 서정에 닿기 위해서는 그만큼 절박한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 육체밖에 가진 것 없는 노동자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이런 핍진한 언어는 오직 지금 그 자리에서 얻어낸 서정으로만 한편 한편의 시에 자양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쉽게 도취적 마비를 일으키는 방언의 힘, 시적 아어(雅語)들에 가라앉아 있는 서정의 앙금, 속설의 과장과 청승, 공기나 물처럼 아무나 뽑아 쓸 수 있는 불가적·도가적 언어의 약속된 지혜, 이런 언어적 괴력난신의 협력은, “이제 나는 광야에 드러누워도/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나를 발견하였다”(「曠野」)고 말하는 시인에게 바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시인이 드러누우려는 궁핍한 현실의 맨땅은 또한 시와 관련하여 이론을 가장한 모든 풍문들, “너무나 많은 나침반”과 함께, 안이하고 헛된 서정을 벗어버린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삶의 현재 상태와 곧은 언어에서(또는 언어에서만), 풍문의 “산보다” 높은 자기 “육체의 융기”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가 현실을 발견한다는 말은 현실이 지닌 시적 힘을 발견한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이는 용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해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할 수 없이 메마른 현실에서 어떻게 준동하는 힘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힘이 거기 있기나 한 것일까, 있다 한들 거기서 어떤 감동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현대 시인’으로서 “첨단의 노래”(「序詩」)를 부르려 한 사람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김수영과 같은 시대에 그림을 그렸던 박수근(朴壽根)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현실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어느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박수근도 전후 독재치하의 가난한 현실에 밀착하여, 근근하게 살아가는 농민과 소상인들의 삶을 그렸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 화가의 음울하면서도 아늑한 회색 톤과 양식화된 기하학적 선은 보는 눈을 매혹시켜, 현실을 세월의 먼지 속에 가려진 먼 옛날의 풍경처럼 바라보게 한다. 현실은 예술적 기억술의 세계로 바뀐다. 같은 시대와 그 이후까지, 말에서 의미를 제거하고 시에서 이미지를 지우려 했던, 그래서 누추한 현실의 부스러기조차 남겨두려 하지 않았던 김춘수(金春洙)에 관해서도, 적어도 그 효과의 면에서는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김현승(金顯承)이 쓴 시에서라면, 거기에 현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늘 견고한 결정체로만 남게 되며 세상의 온갖 절규는 까마귀의 울음 같은 외마디 소리로 압축된다. 현실은 그 누추함을 잃으면서 생활력과 운동력도 함께 잃는다. 김수영은 현실을 예술로 순치하거나 다스리려 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이 점에서 그는 당시 모더니즘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다른 문인·예술가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러나 확연한 대비는 같은 고뇌를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다른 전망을 가지고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다. 김수영을 난해 시인으로 불리게 한, 특히 『달나라의 장난』 시절의 ‘꼬인 문맥’은 최소한 그 발상법에서는 박수근의 회색 톤과 같은 것이었다. 현실을 가감없이, 그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하는 이 난삽한 문형을 통해 김수영은 메마른 말들이 서로 충돌하여 얻게 될 진폭에 내기를 걸었다. 그는 「풍뎅이」의 한 구절을 이렇게 썼다.
너의 이름과 너와 나와의 關係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소금 같은 이 世界가 存續할 것이며
疑心할 것인데
이 구절을 산문으로 풀어 읽는다면, 아마도 ‘너의 이름을 알고 너와 나의 관계가 규명될 때까지 나는 그것을 알기 위해 의심할 터인데, 그때까지 이 세계는 소금과 같은 불모의 상태로 지속될 것’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난삽함은 진술의 순서가 바뀐 데서 우선 비롯하는데, 이 뒤바꿈은 풀어 쓴 말에서처럼 ‘까지’ 같은 허사가 반복되는 것을 막아 말을 긴장시킬뿐더러, 소금같이 황량한 세상의 상태와 의심과 고뇌에 사로잡힌 화자의 심경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상태와 심경이 일치되는 이 순간이 바로 김수영에게는 불모의 현실에서 앙양된 감정 하나를 추슬러 올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地球儀」의 첫 연은 다음과 같다.
地球儀의 兩極을 貫通하는 生活보다는
차라리 地球儀의 南極에 生活을 박아라
苦難이 風船같이 바람에 불리거든
너의 힘을 알리는 信號인 줄 알아라
비교의 조사 ‘보다는’의 앞뒤에 놓인 비교의 대상이 한쪽은 명사이고 한쪽은 명령형 동사이다. 이 문장은 그 자체로서 북극축이 망가진 지구의의 허술함과 그 흔들거림을 모사하는 동시에, 현실을 천착하면서도 거기에 붙잡히지 않음으로써, 삶을 흔들어대는 고난의 막강한 힘을 오히려 시적 서정의 원기로 삼으려는 시인의 의지를 은유한다. 시인에게 황량하고 불행한 사물은 있어도 불모의 상태로 고정된 삶은 없다. 김수영의 난삽한 문장은 현실을 지우는 자리가 아니라 현실이 운동하는 비밀을 어렵게 감지하고 그 시적 힘을 선동하는 자리이다.
박수근의 회화에서 사물의 형태를 정돈하고 평면화하는 기하학적 선 혹은 김현승의 시에서 사물을 결정화(結晶化)하는 이미지를 김수영에게서는 그 순결한 말이 대신한다. 김수영만큼 관념적인 시, 정확히 말해서 관념을 설파하고 관념 아래 숨는 시를 증오했던 사람도 드물다. 만들어진 관념을 사물에 들씌우는 일은 사물을 모욕하는 일이며, 현실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생각의 싹을 막아버리는 포기행위의 일종이다. 정서의 안일한 장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념을 앞세우는 일이 없는 김수영의 언어는 그 의미를 바로 그 자리에서 손색없이 드러내는 그 성질에 의하여 벌써 어떤 사물, 어떤 현상을 절대적으로 지시하는 관념어의 가치와 자격을 얻는다. 「헬리콥터」에서 헬리콥터는 은유도 상징도 아닌 단순한 헬리콥터일 뿐이지만, 수직으로 날아오르는 무쇠덩어리라는 그 존재 자체로 어떤 누추한 삶도 가볍게 떠오르는 순간이 있으며 그것이 새삼스러울 수 없다는 깨달음을 지시한다. 『달나라의 장난』에 수록된 시 「눈」에서 “땅에 떨어진 눈”은 어떤 관념이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도로 하얗고 완전히 비생명적인 눈일 뿐이기에, 그것을 보는 시인에게 기침을 하건 가래를 뱉건 생명의 증거를 촉구할 수 있는 힘을 누린다. 그리고 이 힘은 그의 시편들이 읽는 사람에게 특별하게 깊은 인상을 심는 바로 그 힘이기도 하다.
선율이 드높고 색채가 영롱하여 귀와 눈을 즐겁게 하지만, 시집을 덮고 나면 읽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지는 시들이 있다. 그것은 김수영의 경우가 아니다. 「봄밤」이나 「瀑布」 같은 시, 「巨大한 뿌리」나 「사랑의 變奏曲」 같은 시를 진지하게 읽고 나서 잊어버리기는 어렵다. 현실을 투명하게 드러내기에 오히려 어떤 정신성을 띠는 말들은 감각에 뚜렷한 인상을 남기고, 그 운동하는 힘을 이해하기 위해 바쳤던 노력은 다시 읽는 사람의 마음을 되울려 제 삶을 성찰하게 한다. 하나의 사상이 탄생한다.
이 말은 그러나 사물을 순결하게 지시하는 일에서 하나의 관념을 들어올리기까지 그 길이 순탄치 않았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김수영의 강렬한 시에서, 불모의 현실을 열고 사상이 하나 탄생하는 자리에는 늘 그만한 크기의 논리적 결락이 하나 있다. 이를테면, 「絶望」이란 제목을 지닌 두번째 시에서, 풍경과 곰팡이와 여름과 속도와 졸렬과 수치가 모두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듯이 절망이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딴 데에서”에서 오는 바람과“예기치 않은 순간”의 구원을 전망할 때, 시가 주는 감동은 ‘어디서’ ‘언제’ ‘어떻게’라는 의문과 함께 온다. 더 나아가서는 바람과 구원의 가능성이 이 질문의 능력과 구분되지 않는다.
시 「現代式 橋梁」은 세대의 차이에서 오는 사고의 갈등과 그 화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자는 한강에 놓인 다리를 지나면서 그것을 세운 일제와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의식을 떠올리며 불편해하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다리는 다리일 뿐이다. 다리는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 있었기에 그것이 ‘부자연스러울’ 까닭이 없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
그러한 速力과 速力의 停頓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敵을 兄弟로 만드는 實證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은 다소 과장되고 갑작스러운데다 그 내용이 확연하게 서술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실증을 조롱이나 아이러니라고 보기에는 시에 쓰인 말들이 전체적으로 진지하다. 나이 든 시인이 젊은 세대로부터 그 나이에서 오는 자신감을 받아들인다.1 그래서 역사를 모르는 젊은 세대들이 다리를 순진하게 건너갈 때, 역사의 굴욕을 알고 있는 시인은 같은 다리를 이제 그 순진한 나이의 자신감으로 건너가게 된다. 실제로 화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회고적 쓰라림과 새로 건설해야 할 역사에 대한 실천의지이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실증”은 이렇게 추론되는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감동에 있다. 그것은 “희한한” 것이며 형언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 이 깨달음과 감동은 다른 세대에 대한 이해나 식민지의식의 극복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역사에 감춰진 그 비밀스런 변전에 대한 예감을 아우른다. 다리는 이제 비로소‘최신식’교량이 되어, 상징적이라고나 말해야 할 넓이와 높이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
‘귀거래사’ 연작의 여덟번째 시 「누이의 방」에서, 시인은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는 누이의 방에 감탄한다. 시인이 “너무도”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예쁜 장식품들과 외국배우의 사진들과 과채와 꽃들이, 운동을 갈망하는 시인의 방식과는 달리, 평면을 지향하여 정돈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질문으로 시를 끝낸다.
역시 平面을 사랑하는
킴 노박의 사진과
國內小說冊들……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누이야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김수영은 자기 시대의 한국소설을 폄하하고 있는가. 어조로 보아서는 그렇다. 그러나 시인은 똑같은 질문을 두번 하는데, 이 반복에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숙고의 의미가 들어 있다. “국내소설책들”은 ‘문단 사람’의 하나인 김수영이 보기에 ‘내가 쓴 것이나 그 녀석들이 쓴 것이나’ 식의 평가를 벗어나기 어렵겠지만, 그것들이 엄연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도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소설들은 누이의 방과 그 평면에서부터 벌써 그가 등을 기대고 살아야 할 “광야”의 맨땅을 형성하고 있다. 저 무의식적 폄하와 이 놀라운 발견 사이에 김수영식의 상징적 ‘귀거래’가 있다.
이렇듯 김수영의 시는 논리가 결락된 자리에서 그 의미와 서정을 상징적으로 확장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의 상징은 없다. 시의 상징은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세계를 가정한다. 이 세계보다 김수영에게 더 낯선 것은 없다. 그 세계에는 어떤 깊고 무한한 지혜에 의해 설계된 자연과 시간이 있고, 자연 사물 하나하나와 인간사회의 제도와 풍습 하나하나가 서로 그 설계의 비밀을 교환한다. 자연현상과 인간의 내심에서 이 비밀의 상형문자를 발견하고 그것을 다시 언어로 표상하는 상징기호는 우주 만물이 그 비밀과 표상의 자리를 서로 교환하면서 조응하는 어떤 체계 안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지니기 마련이다. 근면의 개미와 나태의 베짱이, 간지의 여우와 허영의 까마귀 따위처럼 어떤 심오한 명상의 승인도 없이 임의적으로 조작된 알레고리는 그 체계에 편입될 수 없다. 그것은 기껏해야 단편적이고 찢어진 상징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알레고리는 적어도 그 단편적 형식에서만은 김수영의 시에서 하나의 의문을 발판으로 삼아 예기치 않은 힘을 솟구쳐 올리는 논리적 결락의 자리와 다르지 않다. 벤야민(W. Benjamin) 같은 사람이 보들레르(C. Baudelaire)의 시에서 발견해내는 또다른 개념의 알레고리처럼, 김수영에게서 논리가 불충분하게만 표현되는 자리는 부동한 현실의 설명할 수 없는 운동을 포착하고, 다른 삶, 그러나 오직 이 삶 속에 있는 다른 삶을 미리 바라보고 표현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이 삶 속에 벌써 존재하면서도, 그 존재를 믿게 할 수도 보여줄 수도 없을 정도로 다른 삶의 미진한 상징이며, 미래에만 확연하게 설명될 수 있는 역사적 진실의 알레고리이다. 김수영은 「사랑의 變奏曲」에서 이렇게 썼다.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瞑想이 아닐 거다
시간 속에 잠재해 있는 온갖 능력들이 사랑의 힘으로 폭발할 저 미래는 아들의 눈에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당연한 현실일 터이지만, “잘못된 시간”의 아버지는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의 힘으로 개화될 아들의 시간을 ‘그릇되게’, 논리적 결락의 형식으로밖에는 명상할 수 없다. 결락의 알레고리는 무지이면서 동시에 그보다 더 큰 확신이자 그 확신의 용기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명상이 적확한 것이었다 말할까. 서툰 것이었다고도 말할까. 사실을 말한다면, 시인은 요령이 없는 점쟁이도 영특한 예언자도 아니다. 그가 저 찬란한 미래를 묘사할 때 그는 바로 자신의 시가 발휘하는 운동의 힘도 함께 묘사하고 있다. 그에게서 이 삶으로부터 다른 삶을 개화시키는 “사랑”은 이것에서 저것을 이행하는 시의 명철한 실천력과 다른 것일 수 없다.
김수영은 시의 모험이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고 덧붙였을 때, 그는 자신의 시적 알레고리에 대해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삶에서 알 수 없는 다른 삶을 실천하는 일에서, 온갖 구구한 설명이 그 논리의 결락을 채워줄 수도 없을뿐더러 자유를 이행하는 그 모험의 능력이 될 수도 없다. 설명은 ‘실증’을 기다리는 현실의 미묘한 힘을 다른 삶의 높이에서 통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삶에서 실증된 지식으로 이 삶을 봉쇄하기 때문이다. 필연의 맥락에 갇혀 과거로만 현재를 설명하는 모든 이론적 이해는 우리를 위로하거나 한탄하게 할 뿐 실천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순결한 과거를 미래에 던져, 뜻있는 삶의 기초를 설파하는 모든 교의들도 막연한 동경의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알레고리는 저 목적론적 세계관이 장치한 본원성이나 본질성의 심연에 함몰되지 않으며, 논리적 설명이 무기로 삼는 필연성의 고리에 붙잡히지 않는다. 길들여진 언어의 정서적 후원도, 명쾌한 이론의 안전한 권력도 바라지 않았던 김수영은 현실의 언어로 현실을 진솔하면서도 절박하게 그리는 가운데 다른 삶을 전망하고 끌어당기는 알레고리를 바로 이 삶에서 발견했다. 그는 현실을 사는 것으로 다른 삶을 실천했으며, 이 삶의 그림으로 현실의 밖을 그렸다. 그는 현실을 직설했지만, 그가 맨땅에 내던진 말에는 심정의 특별한 깊이가 아닌 것이 없고, 위대한 용기가 아닌 것이 없고, 영원한 활력이 아닌 것이 없다. 진정한 초월이 거기 있으며, 김수영의 진정한 현대성이 거기 있다.
김수영은 우리 시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시에 시적으로 된 말을 모은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이 시적 힘을 지니도록 시를 썼으며, 이 점에서 그는 자유시의 이상을 실천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시적인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일상의 대화와 나날의 일기, 신문기사와 술자리의 흥분된 토론에서 거두어들인 것 같은 시의 말들은 하나같이 사물의 속내를 짚어 그것과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감정이 맺는 관계를 예민하게 드러내고, 어떤 의문을, 어떤 욕망을, 어떤 성찰을, 어떤 전망을 거기서 솟아오르게 함으로써 유례없이 강력한 시정을 형성했다. 그에게 시는 소란한 현실 위에 걸리게 될 예쁘고 평화로운 액자도 아니었고, 삶의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찾아가는 망명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 현실로 발견하는 일이자 그것을 정신화하는 일이었고, 현실의 확장이자 그 전복이었다. 현실을 시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시를 추출하고 현실을 시로 끌어올리는 이 능력은 곧바로 우리 문학에서 모더니즘과 사실주의를 연결시키는 힘이 되었다. 현대파들은 종족적 자연정서와 농경적 생활정서를 떠나서도 “도시의 피로”와 마모 속에서 비범한 시정이 앙양되는 실증을 거기서 보았으며, 사실주의자들은 한 사회를 분석·고발하고 건전한 인간관계를 갈구하고 전망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감정이 시적 서정과 다른 것이 아님을 거기서 알았다. 시적 감수성과 심미감의 폭이 문득 넓어졌다. 이제 아무리 난폭하거나 실망스러운 현실도, 아무리 조야하고 생경한 언어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과 깊고 감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시가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심미감이 확장되었다는 말은 그것이 세련되었다는 뜻도 포함한다. 배척의 원리에 기초하지 않는 이 새로운 심미감은 무정한 현실의 외관에 모험의 길을 내고, 정돈될 길 없는 사물들이 균형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더 큰 세계를 육체의 감각 속에 펼쳐놓는다.
김수영은 우리 시에서 지적인 것의 개념과 용도를 바꾸었다. 그는 알려진 지식체계의 진실성을 다시 한번 증명하기 위해 또 하나의 실험 데이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 한번 사물 앞에서 놀라고, 그 놀라움을 저 지혜의 말로 위무하는 절차, 다시 말해서 발견과 정돈의 기승전결은 그의 시에 없다. 마찬가지로 평론가가 알아서 말하게 될 것을 미리 써놓는 식의 암묵적 공모의 시쓰기가 그에게 용서될 수는 없었다. 김수영이 말하는 ‘온몸으로 시쓰기’의 본뜻도 거기 있다. 지식체계에 복무하기를 거부하고 탈주의 모험을 감행하는 그의 시가 말끔하고 지적으로 숙련된 외관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 현대시의 한쪽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지성주의 현대파들은 시 속에 혼란의 장소인 몸의 노출을 바라지 않았다. 『달나라의 장난』이 출간될 무렵부터 한 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몇년 후 책으로 묶여 나온 송욱(宋稶)의 『시학평전(詩學評傳)』은 보들레르 이후 프랑스의 현대 상징주의를 대거 소개하면서 이른바 ‘발레리의 불꽃같은 지성’을 한국시의 나아갈 길로 추천하고 있지만, 랭보(A. Rimbaud)의 시에 대해서는 침묵했으며 그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랭보의 반항과 모험 그리고 그 동력이 되었던 육체적 감각의 혼란을 불편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 두려움이 여전히 한국시에 남아 있다는 것은 각종 문학상의 수상작이나 공모의 당선작을 보면 알 수 있다. 김수영은 다른 방식으로 지적이었다. 그는 쉽게 정합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기존의 체계적 지식으로 해명할 수 없는 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당해낼 다른 삶을 육체적 감각과 마음의 감동으로 우선 실천하려 했다. 모든 체계의 억압으로부터, 자신이 쓰고 있는 시로부터도 탈주하는 김수영의 시는 이렇게 해서 존재의 변모를 사회적 변혁과 일치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시에서 지식 개념의 혁신은 은유와 상징 개념의 쇄신으로 이어진다. 김수영은 세상을 안온하게 설명해줄 지식체계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전사(前史)적이건 신화적이건 황금시대를 알지 못했으며,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역사, 이른바 ‘봉인된 시간’이나 오리엔탈리즘을 경멸했다. 그에게 세계는 섭리의 상징이 아니었던만큼 시를 보증해주는 초월적 시선 같은 것은 없었다. 자연은 그에게 다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가 요구하는 은유 하나하나를 얻어내기 위해 그때마다 현실에 지성과 감각을 바닥까지 투자해야 했다. 그것은 사실 은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삶을 살면서 벌써 실천하고 있는 다른 삶의 한 모서리였으며, 마비된 현실 속에서 기필코 감지되어야 할 운동하는 현실의 기미였다. 그는 다른 삶을, “완전한 공허를 끝마치고” 피어나는 “견고한 꽃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을 파편의 형식으로, 다시 말해서 알레고리로 체험했다. 그에게 현실을 핍진하게 그린다는 것은 그 변화와 운동의 알레고리를 발견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자동차’라고 써도, ‘가옥’이라고 써도,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자동차이자 가옥이면서 동시에 다른 삶을 향한 고매한 정신의 알레고리였다. 현실이 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도 이렇게 영예로워진 적이 없으며, 말이 제 본뜻을 가지고 이렇게 강한 힘을 뽐낸 적이 없었다. 김수영이 후기식민주의의 문화적 침탈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거기서 얻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은유를 염두에 두지 않고도 현실에 은유적 힘을 부여했으며, 알레고리를 만든다는 생각도 없이 알레고리를 살았다.
김수영이 이행했던 특별한 일을 이렇게 열거하고 보면 그 자체로 한국시의 새로운 활력을 요약하는 말이 된다. 군사독재의 암울한 장막이 걷히고, 남북관계에 새로운 물꼬가 트인 이후 한국의 젊은 시인들은 현실을 기피하지 않으며,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혼란스럽게 보이는 것은 김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말과 사물의 다기한 힘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현실에 등을 돌린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현실에서 들어올릴 수 있는 가능성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김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사소한 것들에 주의를 흩뜨리면서도 현실이 시적 가치를 띠는 계기에 정신과 감각을 집중한다. 그들이 가볍고 변덕스럽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교양의 틀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모한 모더니스트로 폄하되는 것은, 김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모험을 모험의 지식으로 뒤쫓는 모험가들, 저 아류 모험가들의 안전한 모험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인들은 한때 자신들을 ‘미래파’라고 부르려 했다. 미래파라는 이름은 여러가지로 불편하지만 그 말이 빈말은 아니다. 시가 미래를 전망하는 지점은 현실이 은유적 힘을 얻는 알레고리적 계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쩌면, 김수영이 보기에는,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뛰는 날에 사는 것이겠지만 여전히 “도시의 피로”에서 배운다. 그들은 현실이 가볍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말로 현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김수영의 능력이었으며, 시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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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발간 『김수영 전집』은 초판과 개정판에서 모두 이 시의 제2연 첫머리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反抗에 있지 않다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에 있다
아니 信用이라고 해도 된다
그러나 김수영의 원고를 살필 기회가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은 “저 젊은이들의 나이에 대한 사랑”으로 바꿔 읽어야 뜻이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