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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장욱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 시 부문으로 등단.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등이 있음. oblako@hanmail.net
고백의 제왕
고백의 제왕을 부르자.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술자리는 파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두들 흥이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한 해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송년회라기보다는 망년회에 가까웠다.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여기저기서 구조조정이 진행중이었다. 언제나 선량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주던 3기 회장 K는 암에 걸려서 모임에 나오지 못했다. 4기 회장 S는 시의원에 출마한다고 동분서주하느라 나오지 않았다. 대학시절부터 뭇 동료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홍일점J와 그녀의 남편 H는 필리핀으로 아예 이민을 떠났다. 아이 교육을 위해서라고 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이었고 제법 소담한 눈송이였다. 하지만 아무도 감상을 표하지 않았다. 대학시절 소설을 써서 교내 문학상까지 받은 적이 있는 김(金)만이 턱에 손을 괴고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강(姜)과 박(朴)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사 품평에서 내년의 부동산 전망, 애들 교육문제에 이르기까지 맥락없는 화제가 이어졌다. 나머지는 맥주잔을 홀짝거리며 둘의 얘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창밖 골목에서 복사집 주인이 셔터를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살집이 만만치 않은데다 우락부락한 얼굴이어서 겨우 두어평이나 될 만한 공간에 서서 복사를 하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스모선수라고 해도 믿을 만한 외모를 갖고 있었지만 그는 좁디좁은 곳에 서서 하루종일 복사만 해댔다. 허리를 펼 때 보니 몸이 더 비대해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누군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젠 대학가도 옛날 대학가가 아니야, 애들이 학점밖에 모른다잖아.
요즘엔 교수들 평가까지 한다니 말 다했지.
뭘, 그래도 평가는 해야지. 교수들이 철밥통이야?
에이, 그래도 그렇지. 어이, 강사 선생, 어때? 요즘 애들이 강사 나부랭이 얘기를 듣긴 듣나?
시간강사 생활을 접고 최근에 고깃집을 연 김의 얼굴을 바라보며 누군가 물었다. 듣긴 멀. 김이 짧게 대꾸하자 다른 누군가가 덧붙였다. 하긴, 넌 고깃집 분위기가 더 어울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맥없이 흩어졌다.
그리고 또 침묵이 시작되었다. 연말이면 송년회를 해온 우리는 대학시절 서양사 동아리의 멤버들이었다. 곧 회사를 때려치울 거라는 강(姜)이 잠시 호기로운 목소리를 냈을 뿐 나머지는 하나마나한 얘기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변두리 대학가의 호프집에는 손님이 없었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연말 가요제가 열리고 있었다. 가수왕은 누가 되나. 누군가 중얼거렸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임에 나오는 머릿수는 서른줄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올해는 나를 포함해서 겨우 여섯만이 출석했다.
약속시간에 맞춰 출석한 녀석들도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마지막 날에 송년회를 하는 모임이 세상에 어딨나? 보험회사에 다니는 권(權)이 피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하며 추임새를 넣은 것은 출판사를 전전하는 최(崔)였다. 몇몇이 따라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 파장일 모임이었다. 누군가 이민 간 H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아니, 그 새끼는 이민을 가려면 회비를 내놓고 가야지, 그걸 갖고 날라?
H는 모임의 총무였고, 우리는 매년 그의 통장으로 회비를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H는 환송회도 없이 나에게만 전화로 이민 사실을 통보했다. 나, 이민 간다. 이민? 어디로? 응, 필리핀. 그거 은퇴이민 아니냐?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H는 얼버무렸다. 요즘엔 마흔도 되기 전에 소위 은퇴이민을 가는 사람이 있다더니 H가 바로 그랬다. H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때는 H가 관리하던 회비에 대해서는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백만원이 조금 넘을 정도의 소액이긴 했지만 어쨌든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 새끼, 백만원 갖고 잘도 살겠다.
백만원이면 새꺄, 필리핀 운전수랑 식모 서너달 월급은 되겠다.
이민자들 유치한다고 제도 잘 만들어놨지, 영어 쓰지, 물가 싸지, 뭘 바래?
웬만하면 백평짜리 집에 산다면서?
얼만데?
H에 대한 화제는 곧 아파트 시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마도 정치 얘기로 넘어간 후 마지막에는 건강 얘기가 시작될 것이다. 눈 내리는 연말이었고, 망년회였고,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고, 또 한 해가 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고백의 제왕을 부르자,라고.
고백의 제왕?
아…… 그, 고백의 제왕?
그렇지. 녀석이 있었지. 언제부터 모임에 안 나온 거지?
이봐, 고백의 제왕은 우리 모임에 나온 적이 없다구.
아, 아, 그렇지. 나올 리가 없지, 왕따가. 하하.
모두들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불콰해진 얼굴들에 어쩐지 활기가 돌았다. 이제야 뭔가 흥미로운 얘기가 나올 것 같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래…… 나한테 번호가 있던가?
권이 주섬주섬 휴대전화를 꺼내 엄지손가락으로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삑삑 소리가 흘러나오자 몇몇도 기계적으로 제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없는데? 누구, 아는 사람 없나?
권이 고개를 휘휘 돌리며 좌중을 살폈지만 아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J가 고백의 제왕하고 친하지 않았나?
나 참,J는 필리핀으로 떴다니까.
아아, 그렇지.
권이 이마를 쳤다.
아, 있다. 고백의 제왕.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순간 정적이 찾아들었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스쳐가고 있을 것이었다. 고백의 제왕을 호출하면 고백의 제왕은 곧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왜냐하면, 고백의 제왕은 그답게 또 무언가 고백을 해야만 할 테니까. 그것이 제왕의 본모습이니까. 하지만 정말? 한 해의 마지막 날, 모교 앞의 술집으로, 고백의 제왕을? 우리는 자못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고백의 제왕이라는 것은 곽(郭)의 별명이었다. 동아리의 신입생 엠티 때부터 그런 별명이 붙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녀석은 그리 눈에 뜨이는 인상이 아니었지만 자세히 보면 특이한 데가 있었다. 남방 계통의 둥근 두상에 눈이 컸으나 두 눈의 균형이 좀 어긋나 보였다. 키는 평균치였지만 어깨가 좁았고, 말이 많지는 않았어도 목소리는 뭔가에 긁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딘지 친근감이 들지 않는 인상이라고 할까. 하지만 우리는 대학생활을 갓 시작한 새내기들이었고, 무엇보다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관대했다.
서양사연구회답게 엠티 첫날의 저녁답까지는 근세 유럽사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중세 연금술에서 르네쌍스에 이르기까지 선배들의 현학적인 논쟁에 신입생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어달 뒤부터는 산업혁명에서 프랑스혁명까지를, 그 뒤로는 20세기 전쟁사를 공부할 예정이었다. 토론을 마친 후 우리는 대학생답게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강변에 나가 소주를 마시고, 밤이 늦어서야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넓고 휑한 방에 모두가 둘러앉았을 때 누군가 진실게임을 제안했다. 몇몇이 찬동을 표하자 곧바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간단한 놀이였다. 소주병을 휙 돌려 술래를 정하고, 술래는 질문에 따라 진실하게 고백을 해야 했다. 질문은 은밀한 것일수록 좋았지만 질문도 대답도 신입생들답게 아기자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키스는 언제? 남자친구는 몇명이나 있었나? 가장 괴로웠을 때는?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나쁜 일은?
모두들 얼굴을 붉히며 고백을 시작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을 짝사랑했다거나, 현재 남자친구가 없지만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만들 예정이라거나, 고등학교 때 보충수업을 빠지고 아버지 주머니에서 슬쩍한 돈으로 오락실을 드나들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얼마 전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키스를 할 예정이라고 고백한 동료는 좌중의 웃음과 함께 가벼운 야유를 받았다. 자정을 넘기자 모두들 흥겨워졌다.
그때 소주병이 빙글빙글 돌다가 정지했다. 소주병은 곽을 가리켰다. 곽은 저녁 내내 별로 말이 없던 동기 중 하나였다. 곽이 일어나자마자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첫경험은 있나요? 있다면 언제? 까르르 웃음이 흩어졌다. 짓궂긴 했지만 상투적인 질문이었다. 에이, 그건 아까도 나왔던 질문인데? 누군가 질문자에게 가볍게 항의했지만 이미 모두의 시선이 곽에게 쏠린 뒤였다. 곽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곽에 대한 우리 모두의 기억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아, 아, 처, 첫경험이라면, 주, 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환성이 터졌다. 와, 누구랑? 어디서? 곽이 더듬더듬 고백을 계속했다.
주, 중학교 때 집에서 식당을 했어요. 하, 함바집이었는데,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 밥 대주는 일이었습니다. 삼치구이가 인기였고요. 두툼하고 신선한 생선을 썼기 때문에 맛이 최고였는데……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중에 곱상한 분이 있었어요.
모두들 숨을 죽였다.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지만 곽은 뜻밖에 달변이었다. 모두들 이야기에 몰입했다. 세세한 데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곽의 고백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어느날 밤 곽은 식당에 남아 혼자 일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돕게 되었다고 한다. 밀린 설거지를 하고 내일 쓸 식재료들을 다듬어두는 일이었다. 무와 대파 등속을 썰어놓고 털 뽑힌 닭을 솥에 넣어 고느라 주방은 무덥고 어지러웠다. 초복이었다. 곽은 후끈 달아오른 주방에서 아주머니를 도와 일하다가 아주머니의 투실투실한 허벅지를 보게 된다. 땀을 닦는 아주머니의 젖가슴이 흔들리는 걸 곁눈질한 것은 물론이다. 솥 안에서는 중닭 여남은마리가 펄펄 끓고 있었다. 주방의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어느 결에 곽의 손은 곽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곽의 손이 아주머니의 허벅지에 닿은 것이 먼저였는지 아주머니의 손이 곽의 사타구니에 닿은 것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곽과 아주머니는 어느새 엉켜 있었다…… 그런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면 화장실 낙서에서나 볼 만한 내용이었지만, 그때 우리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곽의 묘사가 자세하고 자연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생동감이 넘쳤기 때문일 것이다. 곽의 표정 역시 인상적이었다. 뭔가 어긋나 보이는 곽의 눈매가 조금씩 꿈틀거릴 때마다 우리의 상상력이 자극되는 느낌이었다. 그의 표정은 말과 혼연일체였다. 곽의 이야기가 너무 세세하고 적나라한 나머지, 동기생 하나의 입에서 긴 침이 흘러내리던 광경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곽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곽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 끝에 여자선배 하나가 손을 들어 호기롭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연세가 어느 정도셨나요……? 곽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나 조금은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그게…… 환갑을 좀 넘기신 분이었어요. 아주머니가 옷을 입으면서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폐경이라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사실 전 폐경이 뭔지도 몰랐지만…… 나중에 폐경이 뭔지 알게 되었을 때는……
좌중이 더욱 조용해졌다. 곽이 무심결에 덧붙이듯 말했다.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그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곽이 자리에 앉고 나서 좌중은 잠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진실게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선배 하나가 탁탁 손뼉을 치며, 자아, 이제 술이나 마시지, 하고 선언하듯 외쳤을 때에야,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는 엠티 온 풋풋한 대학 새내기들이 되어 다시 왁자해졌지만, 곽의 그 고백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후 몇몇 동료들이 곽에게 붙인 별명이 바로 고백의 제왕이었다. 반응은 대개 시큰둥했다. 그 정도 이야기라면 남학생들끼리 모인 자취방에서야 흔하다면 흔한 것이었으니까. 그게 음담패설이 아니라 진실게임의‘고백’이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어쨌든 곽의 별명이 굳어지게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우리가 다시 그의 고백 아닌 고백을 듣게 된 것은 그해 봄이 설핏 지나갈 무렵이었다.
아마도‘고전연습’정도의 제목이 붙은 교양과목이 아니었던가 싶다. 초짜임에 틀림없는 그 강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의욕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모비 딕』과 『죄와 벌』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의 고전을 설명할 때 그녀의 입에서는 서구의 이론들이 현란하게 오르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엉뚱하게 느껴지지만, 프로이트 시간에 그녀는‘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발표하라고 학생들에게 주문했다. 발표자로 지명된 것은 곽이었다.
「도스또옙스끼와 부친 살해」라는 프로이트의 글을 요약하던 곽이 자신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아마도 창밖이 어둑해지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비가 내리려는지 탁한 빛깔의 구름들이 창밖을 흘러가고 있었다. 곽의 이야기는 19세기 러시아의 음산하고 음울한 분위기에 힘입어 당시 수강생들의 기억에 생생한 인상을 남겼다.
곽의 아버지는 곽이 어렸을 때부터 두 집 살림을 했다고 한다. 곽의 어머니는 강인한 여자였기 때문에 식당의 궂은일을 혼자 해내면서 곽과 곽의 누이를 키웠다. 하지만 곽의 아버지가 찾아오는 날이면 기이하게도 약하디약한 여자가 되더라는 거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매번 울며 매달렸다. 곽은 그걸 견딜 수 없었다. 그런 것이 바로 여자라는 사실을 나는 진심으로 혐오했습니다,라고 곽은 회상에 잠긴 채 말했다. 그런 인생은 지나치게 솔직한 것이니까,라고도 덧붙였다. 곽이 반복해서 그걸 강조했을 때, 우리는 그런 인생이 어째서 지나치게 솔직한 것인지 의아스러워하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는 거기에 무슨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교단에 선 곽의 등 뒤로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칠판에 드리워져 있었다. 때마침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축축한 공기가 강의실을 떠돌았다.
아버지가 찾아온 어느날, 곽은 부엌에 있던 식칼을 들고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고 한다. 곽은 아버지의 등 뒤에서, 45도 각도로, 아무 말도 없이, 옆구리에 칼끝을 꽂아넣었다. 사람의 가죽은 생각보다 튼튼합니다만…… 그 칼도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으니까요. 곽의 말은 건조하면서도 유장하게 이어졌다. 그 순간에 대한 묘사가 너무 생생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끈적끈적해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려야 했다. 강의실을 메운 침묵 사이로 작은 한숨이 피어났다.
그날 밤 곽의 아버지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만 죽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아예 죽일 순 없었던 모양이지. 곽은 남의 말을 하듯 그렇게 덧붙였다. 표정이 없었고, 창밖에 시선을 둔 채였다. 말을 하면서‘그’나‘그녀’같은 문어체를 쓰는 사람은 곽이 처음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어색한 말투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가 병원으로 실려간 후 그는 텅 빈 마루에 혼자 오래 서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길게 드리워진 제 그림자와 대화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 사건에도 불구하고 곽의 아버지는 곽을 고발하지 않았다. 왜 그가 나를 고발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돼. 고발이라도 했더라면, 그후로도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곽은 결론을 내리듯 그렇게 말한 후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는 어느새 반말을 쓰고 있었지만,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담당강사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몇초 동안 무거운 침묵이 교실을 메웠다. 곽은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천천히 교단을 내려갔다. 팔조차 흔들지 않고 스르르 미끄러지듯 걷는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교실 뒤편에 서 있던 담당강사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서둘러 수업 종료를 선언했다. 곽의 발표에 대해서는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은 채였다.
그날 곽의 고백 아닌 고백은 묘한 감정으로 전환되어 우리의 마음 한켠에 남았다. 거칠면 거칠수록 진짜 인생인 듯이 느끼는 청년 특유의 습성도 거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곽의 가족을 둘러싼 또다른 비극과도 연관이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우리가 듣게 된 것은 곽의 누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느날인가 우리는 곽의 자취방으로 모여들었다. 아마 기말고사 기간이었을 것이다. 곽의 방은 예상대로 좁고 우중충했다. 네명 정도가 앉거나 누우면 빈 공간이 남지 않았다. 허공에는 먼지가 떠다녔다. 형광등 불빛이 흐릿했기 때문에 책의 글자들도 선명히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공부를 작파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자 도시 변두리의 밤공기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인생은 신산했고 사랑은 아득했으며 대학은 생각보다 세속적이었다. 누군가 먼저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슨 열기에 들떠서인지 나는 내 첫사랑 얘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여학생을 고등학교 때 먼발치에서 보게 된 이후 매일 밤 설레었던 일, 그녀가 집에서 나오는 순간을 기다려 그녀의 집이 있는 골목을 지나감으로써 숱하게 우연한 만남을 가장했던 일, 자정이 넘은 시간 그녀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형광등 불빛이 꺼질 때까지 그 골목의 창가에 서 있었던 일…… 등등. 나의 흡연과 음주와 우울이 어떻게 그녀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 시절에 듣던 모든 감미로운 음악들이 어떻게 그녀와 함께 흘러갔는지…… 첫사랑에 대한 나의 고백은 고독하고 우수어린 비애로 가득했을 것이다.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나의 고백을 완성해주었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곽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역시 친구들의 시선을 따라 엉거주춤 곽을 바라보았다. 우리를 둘러보던 곽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누이를 사랑했다, 그것이 곽의 첫마디였다.
곽의 누이는 비관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말 쥐새끼처럼 생긴 얼굴에 쥐새끼처럼 겁먹은 얼굴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이었지,라는 것은 곽 자신의 표현이었다. 비애나 우수 같은 고급스러운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텅 빈 얼굴을 알고 있나?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창문으로 달려가서 저 까마득한 바닥을 향해 뛰어내려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그런 얼굴 말이야. 곽은 우리 뒤쪽의 텅 빈 벽에 시선을 두고 말을 이었다. 이미 괴로움이나 고통 같은 어휘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그런 얼굴이었지.
나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황폐한 표정을 상상하며 곽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날, 손바닥만한 앞마당에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던 오후였다고 한다. 곽의 누이는 툇마루에 앉아 작은 종이상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누이가 사온 노란 병아리 두마리가 솜털처럼 가벼운 봄볕을 받으며 썩어가고 있었다. 한마리에 백원씩 하던 싸구려 생물들이었다. 몇번 쓰다듬자 곧 죽어버린 뒤였다.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이는 썩어가는 생물들에게 시선을 둔 채 곽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왜 사니?
곽은 그 순간 누이의 표정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건…… 말하자면…… 너무 노골적인 표정이었지. 지나치게 순수해서 어떤 질문도 불필요해지는, 그런 상태라고 할까……
그때 곽이 사용한 순수 같은 단어가 우리의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우리가 곽의 말을 다 이해했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어쨌든 표정도 없이 그런 질문을 하는 누이라면 내 마음은 안타까움에 타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곽은 달랐던 것 같다. 곽은 누이 앞에서 낮고 무심한 음성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죽어버려. 죽어버리라구.
그것은 어떤 감정도 품지 않은 목소리처럼 들렸다. 연민이나 증오 같은 감정이 모두 휘발된 뒤의 목소리, 그래서 결국 기체가 되어버린 목소리……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 목소리는 더욱 무거운 돌이 되어 우리의 마음에 얹혔다. 곽의 누이가 그 말을 듣고 어떤 마음이 되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곽의 누이가 정말 자살을 결행한 것은 그 며칠 후였다고 한다. 곽이 덧붙였다.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이미 뭔가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이키려고 하지 않았지…… 그렇게 말하는 곽의 목소리는 이미 모든 것을 속죄받은 살인자처럼 담담했다. 나는 그 순간 곽의 얼굴에서 어떤 쾌감 같은 게 스쳐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그의 얼굴 근육을 마치 잔물결처럼 살짝 흔들고 지나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동아리 회원들 중 곽의 불우한 과거사를 듣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 과거사를 듣고 동정을 표하지 않은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 불우에 대해 동정이나 연민이라는 표현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동경과 혐오가 뒤섞인 다소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차라리 묘한 불쾌감에 가까웠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곽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동아리에서 서양사 공부를 하면서 점점 굳어져갔다.
동아리방에 모여 프랑스사를 공부할 때였다. 1793년 이후 로베스삐에르가 주도하는 공포정치가 쌍뀔로뜨 운동과 연계하여 일만 칠천명을 처형하던 살육의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그 로베스삐에르가 떼르미도르라고 불리는 7월의 어느날 반동정치가들에 의해 처형되던 시기에 대해서였다.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때 곽의 관심사는 어딘지 우리와는 어긋나 있었다. 로베스삐에르의 공포정치가 프랑스혁명의 전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것이 유럽사에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인지에 대해서 그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곽은 로베스삐에르가 단두대에 올라간 그 순간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도망치다가 턱에 총을 맞은 그가 단두대에 올라왔을 때, 누군가 턱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잡아떼어버렸다더군. 곽이 마치 회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에서 피가 뚝뚝 방울져 흘러내렸는데, 그날은 보기 드물게 맑고 화창한 날씨였지. 환한 햇살이 쏟아지는 빠리의 광장, 빠리의 하늘, 태양, 사람들, 사람들…… 곽은 마치 그날의 광장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약간의 침묵이 지나간 후 곽이 말했다. 그리고 탁, 칼날이 목에 떨어진 거지.
곽의 마지막 말에 우리는 일제히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기요띤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는지, 광장의 따사로운 햇살과 몸에서 떨어져나간 목의 대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지엽적이지 않은가? 하고 누군가 정당한 문제를 제기했지만, 우리는 아직 그 광장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제 목을 공연히 쓰다듬기까지 했다. 곽이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기요띤은 원래, 고통 없이 죽음을 맞게 하려고 발명된 도구였다더군……
문제는 이런 이상한 토론이 자꾸 반복된다는 점이었다. 가령 2차대전과 파시즘의 발흥에 대해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토론이 히틀러의 쇠망이라는 절정에 도달할 무렵, 곽이 고개를 비스듬히 꼰 채 끼어들었다. 1945년 4월 29일, 베를린에서 조촐한 결혼식이 있었다더군. 주례는 발터 바그너라는 공무원 출신 병사였어. 우리는 무슨 엉뚱한 얘기냐는 듯 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히틀러와 그의 연인 에바 브라운이 자결하기 하루 전이었고, 자정이었고, 어두침침한 지하 벙커였지. 죽음의 결혼식이랄까. 히틀러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내 에바에게 평생의 사랑을 서약했을 때, 그 지하에는 축축한 공기가 떠돌고 있었지. 신랑 아돌프 히틀러와 신부 에바 브라운의 감정에 스며든 그 공기란……
곽이 회상하듯이 중얼거리자, 다시 누군가가 제동을 걸었다. 잘 어울리는 공기였겠구만. 파시스트다운 멜랑꼴리에 젖어 있었을 테니까. 비아냥이 섞인 코멘트였다. 그러자 곽은 그렇게 말한 동료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발터 바그너는 주례를 끝내고 전장으로 돌아가다가 소련군 총탄에 맞아 비참하게 죽었다더군.
그리고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곽과 우리 사이에 뭔가 알 수 없는 벽이 가로놓여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매사에 이런 식이었으니 곽이 참석하는 토론 모임은 어쩐지 한산해지곤 했다.
우리가 고백의 제왕에 대해 더 깊은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은 우리가 다니던 대학에 가짜 대학생 소동이 있었을 때였다. 가짜 대학생들 중 일부는 도서관에서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때로는 태연히 수업을 들으며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교정은 뒤숭숭했다. 우리 동아리에서도 선배 Y가 가짜 대학생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Y가 문득 자취를 감춘 후, 우리는 비감한 마음으로 술자리에 모여 앉았다. 복학생 선배라고 믿었던 Y는 선량하고 박학한 사람이었다. 특히 중세철학과 연금술과 유대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깊게 말할 수 있는 선배였다. 술자리에서 그는 기독교의 직선적인 시간관이 왜 문제인지를 카발라의 시간관과 비교해가면서 설명하곤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Y는 후배들에게 헌신적이었기에 인기를 독차지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가짜 대학생이라는 건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곽이 입을 연 것은 우리가 침통한 표정으로 침묵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사실은…… 곽의 섬세한 입술이 열리고 다시 고백이 시작되었다. 사실은, 나 역시 가짜 대학생이었지. 우리는 멍한 표정으로 곽의 입을 바라보았다. 곽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자신은 사실 삼수생이며, 재작년에는 가짜 대학생으로 이 대학을 다녔다, 그때는 학적과 직원에게 발각되었지만 학교 측에서도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넘어갔다, 그후 일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했으며 결국 진짜 대학생이 되어 다시 교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내용이었다.
가짜 대학생 신분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곽은 덧붙였다. 그렇게 말한 후 뜻밖에도 곽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인 곽의 어깨가 조금씩 들먹였다. 눈물은 눅눅한 울음으로 바뀌어갔다. 당황한 선배 중 하나가 곽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다 지난 일이고, 지금 진짜 대학생이면 되는 거지 뭐. 안 그래? 누군가 낮게, 씨발, 하고 뇌까렸지만, 선배는 곽의 어깨를 감싼 채 건배를 제의했다. 몇몇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잔을 들었고, 몇몇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또 하나 고백을 하자면, 하고 곽이 말한 것은 좌중의 침묵이 길어진다 싶을 때였다. 이번에는 언제 울먹였는가 싶게 메마른 목소리였다.
Y선배가 사라진 건…… 사실 내 탓이야. 그가 가짜라는 건 교무과에서 일하다가 우연히 알게 됐지.
곽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사태가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무렵 곽은 근로장학생으로 교무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학과명부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Y가 등록된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얘기였다.
곽은 곧바로 Y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Y에게 그대로 전했다. 자신은 아무런 과장 없이 사실들만을 나열했다고 곽은 강조했다. Y는 곽의 얘기를 들으면서 말없이 곽을 바라보았다. 곽 역시 Y를 오래 바라보았다. Y는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곽의 깊고 오랜 침묵이 Y의 입을 막았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평소에 Y를 좋아하던 여자선배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감정을 겨우 억누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건…… 꼭 그렇게 했어야 했니? 조금은 곽을 힐난하는 목소리였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나머지는 그저 침묵 속에서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모두들 곽에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것이 곽의 목소리 때문인지, 곽의 표정 때문인지, 곽의 입에서 나오는 밑도끝도 없는 고백들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팔조차 흔들지 않고 부유하듯 걷는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곽에게 결정적으로 등을 돌리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 사건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필리핀으로 이민 간J는 그 시절, 남학생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던 여학생이었다. 정갈하고 단아한 외모에 천성이 다정해서 남을 챙기는 데 유별난 친구였다. 엠티를 가면 식료품 준비부터 조리까지 모두 그녀의 몫이었는데, 그게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떤 여선배는J의 그런 헌신이 성 역할을 고정시킨다고 정색을 하고 충고할 정도였다. 어쨌든 모두의 사랑을 받던J가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동아리에 나오지 않았다. 몇몇 선배와 동료 들이J를 찾아갔지만 허사였다. 다시 동아리에 나오라고 설득했지만J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의 술자리였다. 지금은 투병중인 K의 생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기생들이 거의 다 모여서 축하주를 마셨다. 하지만J가 화제에 오르자 모두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J는 몇몇 동기들의 연모의 대상이기도 했던 탓이다. 예의 그 고백이 시작된 것은 술이 몇순배 돈 뒤였다. 실은……J가 나오지 않는 것은…… 곽의 입이 열렸을 때, 뭔가 불길한 느낌이 좌중을 압도한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나 때문이다.
그날 곽의 고백은 특별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새까지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다. 곽의 고백에 의하면, 사건은 그해 여름의 어느날 명동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그 여름의 명동에서는 빈번히 시위가 벌어졌지만, 이미 학생들의 시위 참가는 현격히 줄어들던 시절이었다. 곽은 시위에 관심이 없는 회원들 중 하나였는데, 그런 그가 명동에 있었다는 것은 다소 의아한 일이었다. 동료들은 반신반의했지만 그는 학과 소속으로‘출정’을 했다고 말했다.‘출정’이라는 단어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느껴졌던 기묘한 불쾌감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명동 거리의 어느 골목에서 최루탄에 쫓기던 그는 한 여학생과 같이 도망을 치게 되었다고 한다. 경황없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달렸지만 등 뒤에서는 계속 발소리가 따라왔다. 곽은 뒷골목의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게 하필이면 여관 건물이었다고 했다. 안에 들어서고 보니 함께 뛰어 들어온 여학생은 다름 아닌J였다. 유리문 바깥의 골목에서는 헬멧을 쓴 전경들이 타닥타닥 뛰어가고 있었다. 곽과J는 급한 대로 돈을 지불하고 여관방에 몸을 숨겼다.
곽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몇몇은 소주잔을 비웠고 몇몇은 담배를 새로 피워 물었다. 시선은 곽의 입에서 떼지 못한 채였다. 그 뜨겁던 여름의 여관에서 바깥 동정을 살피던 청춘남녀의 뒷얘기는 듣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어느 어름에 곽이‘청춘’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을 때는, 술자리에 있던 모두의 가슴이 묘하게 뒤틀렸다. 곽의 묘사는 여전히 견딜 수 없이 생생했으며, 그럴수록 우리의 질투와 적의 역시 조금씩 끓어올랐다.
곽의 고백에 의하면, 먼저 상대를 끌어안은 것은 곽 자신이 아니라J였다. 곽은J의 그 흰 블라우스와 블라우스의 부드러운 결에 대해서, 형광등 불빛의 조도(照度)에 대해서, 벽지의 물결무늬와 물결무늬 위의 낙서들에 대해서, 그리고 이불을 펴고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의 느낌에 대해서…… 자못 감상적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슬프고 아련한 풍경이었다. 누군가의 목에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그 어름이었다. 여자 동료가 있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테지만, 그때 그 술자리의 수컷들은 곽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여관방의 흐릿한 분위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곽이 결정적으로 우리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그가 스스로 덧붙였던 고백 아닌 고백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임신을 한 거야. 그러니까 그녀가 동아리에 안 나오게 된 건…… 확실히 내 책임이지.
모두들 숨을 멈추었다.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내가 탁,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소주잔을 내려놓는 순간, 먼저 입을 연 것은 얼굴이 붉을 대로 붉어져버린 강이었다. 강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근데…… 이, 씨, 씨발놈아…… 그 얘기를 왜 여기서…… 이런 술자리에서 하는데? 니가 걔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런 데서, 모두들 듣는 데서, 그런 얘기를 하면 안되는 거 아니냐?
모두들 취한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강이J를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강은J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녀석이었지만, 정작 말은 꺼내지도 못한 숙맥이기도 했다. 곽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모든 것은 내 잘못이니까…… 나는 병원에도 같이 갔었고……
곽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술자리는 뒤집어지고야 말았다. 구석에서 잠자코 있던 H가 곽에게 달려들어 술집 바닥을 뒹굴었던 것이다. 강이 합세해서 곽에게 덤벼들었고, 그때 막 교내 문학상을 받았던 김도 뛰어들었다. 나 역시 그 난장판을 향해 몸을 던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때 곽이 저항을 했는지 그냥 맞고만 있었는지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그 선술집 바닥을 어지럽게 뒹굴 때 내가 때렸던 것이 곽이었는지 다른 누구였는지조차 실은 기억이 흐릿하다. 취할 대로 취해버린 우리는 도대체 뭘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격렬함에 휩싸여 서로의 멱살을 잡고 뒹굴었던 것 같다.
그날 우리는 심야의 파출소까지 가서 훈계를 들은 후에야 새벽 거리로 터덜터덜 걸어나올 수 있었다. 야근중이던 늙은 경관은 말끝마다 말이야,를 붙이는 사람이었다. 내가 느이들 애비뻘이니까 하는 말인데 말이야, 차라리 나가서 시위를 하든가 말이야, 술 먹다가 싸움질이나 하고 말이야, 젊은 것들이 말이야,라고 그는 길게 훈계를 늘어놓았다.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의 입에서 연한 술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날 새벽의 하늘이 너무 차고 맑아서, 파출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쉬어야 했다. 곽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후 곽은 동아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도 곽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분위기였다. 모두들 곽에 대한 이야기라면 험악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알 수 없는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의 고백에 이끌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자기 자신에게 탐닉할 때 느껴지는 집중력으로 매번 곽의 이야기를 경청했던 것은, 바로 우리였으니까 말이다. 이제 와서 고백하거니와, 나 역시 곽을 멀리하면서도 곽에게 이끌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동아리 밖에서 곽을 만나 곽과 술을 마시고 곽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어쩌면 즐겼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곽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지껄였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누군가에 대한 흠모나 적의이기도 했으며, 타인이 가진 헛점에 대한 비루한 관심이기도 했다. 곽의 이야기는 건조하면서도 감상적이었고 잔인하면서도 달콤했는데, 그럴수록 나의 고백 역시 더욱 노골적이 되어갔다. 곽의 침묵이 나의 고백을 부추길 때, 나는 쾌감에 몸을 떨며 내 내밀한 모든 것을 곽에게 고백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곽은 우리에게서는 사라졌으되 우리 각자와는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날 곽에게 달려들었던 강과 H조차 때때로 곽과 술잔을 기울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곽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나, 누구나 그의 고백을 듣고 그에게 고백을 하고 있는 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그렇다는 걸 알고 난 뒤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화가 나거나 불쾌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곽과의 관계는 우리가 하나둘씩 군대로 사라지고, 연애를 시작하고, 토익 공부에 열중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누군가는 제대를 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를 떠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 되자, 어느덧 곽은 우리의 기억 속에 희미한 흔적처럼 남게 되었다. 우리는 곽을 잊고 뿔뿔이 흩어져 생활전선으로 떠나갔다.
고백의 제왕은 금세 나타났다. 전화를 끊은 최가 이렇게 말하자마자였다.
이 새끼, 아직도 학교 앞에서 자취한다는데?
정말이지 곽이 호프집 문을 열고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꿀꺽, 침을 삼켰다. 우리 모두는 문득 십수년 전으로 되돌아간 표정으로 곽을 맞이했다. 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에서 걸어나온 듯했다. 어딘지 어긋나 있는 표정도 똑같았고, 뭔가 긁히는 듯한 목소리에도 변함이 없었으며, 팔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다들…… 오랜만이다.
곽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자 취한 우리는 일제히 곽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강의 입이 먼저 열렸다.
이야, 이거 얼마 만인가. 또 고백을 듣게 됐구만.
강은 취해 있었고, 어쩐지 시비조였다. 곽이 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백? 고백이라…… 그렇지. 그런 게 있었지.
곽이 뭔가 회상에 잠기듯 그렇게 중얼거리자, 파장 분위기이던 술자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때마침 누군가 양주를 시켜 폭탄주를 제조했다. 잔이 빠르게 돌았다. 불콰해진 얼굴로 모두들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곽을 향해서인지 자신을 향해서인지 알 수 없는 어조들이었다.
셰헤라자데였지, 우리 고백의 제왕께서는 말야.
취할 대로 취한 전직 강사 김의 목소리였다.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셰헤라자데? 그거, 천일야화의 주인공 아닌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다른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하긴, 이야기야 좋지. 어떨 때는 고백의 제왕이 그립더라니까.
그러자 강이 시비조로 대꾸했다.
그래? 난 생각하기도 싫던데?
마치 곽이 이 자리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혀가 꼬인 목소리들은 맥락없이 이어졌다.
근데, 우리 제왕께서는 늙지도 않네. 아주, 옛날하고 똑같아, 응?
고백을 하다 보면 늙지도 않는 모양이지? 응?
작은 웃음이 일었다. 곽은 흩어지는 목소리들 속에 앉아 말없이 잔을 비웠다. 텅 빈 호프집에 웃음소리가 번져갔지만, 곽은 어딘지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창밖의 눈송이는 폭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거리는 아스팔트 바닥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술자리는 작은 열기에 휩싸여가고 있었다. 곽의 출현이 우리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은 틀림없었다. 선량한 K는 암에 걸려 나오지 못했고, H는J와 함께 이민을 떠났으며, 한 해의 마지막 날이 가고 있었다.
후후, 그런데 사실, 나는 진짜 고백할 게 있어.
권이 잔을 비운 후 말했다. 음모라도 꾸미듯 한껏 낮춘 목소리였다.
H가 사실은, 나한테 백만원을 대신 갚아달라고 하더군.
모두의 시선이 권에게 쏠렸다.
그 새끼, 사실은 회사 돈 횡령하고 튄 거야. 며칠 있으면 수배령 떨어질걸.
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뇌까렸다.
이런 니기미. 아니, 그런 것도 고백이라고 하고 있나? 그건 고백이 아니라 꼰지르는 거 아냐?
좌중에 킬킬거리는 웃음이 번졌다.
그런 거야 다 시시한 얘기고. 실은, 나도 고백할 게 있는데.
최였다. 취한 목소리였다.
나, 실은 이혼한 지 벌써 3년이나 됐다. 이년이 도대체 말을 들어먹어야 말이지.
누군가 비틀거리는 어조로 비아냥거렸다.
내가 다 들었지. 너, 주먹 자주 썼다면서? 응?
하, 그게 참, 한번 쓰니까 계속 그렇게 되더라니까. 말을 안 들으니까 말야.
너 같은 숙맥이 그럴 줄은 몰랐다, 응?
나도 모르게 버릇이 되더라니까, 씨발.
그러자 최의 말을 듣고 있던 전직 강사 김이 뭔가에 이끌리듯 입을 열었다. 원래 술에 약한 녀석이었다.
내, 내가 대학시절에 문학상 받은 소설 말인데.
모두의 시선이 김에게 쏠렸다.
그게, 그게, 사실은 이런저런 소설들을 짜깁기한 거야. 사실 내가 쓴 게 아니라는 거지. 흐흐.
뭐야? 대필인 거야?
대필이 아니라 표절이지, 새꺄.
그런 줄도 모르고 소설가입네 대접해줬잖아? 히히.
다시 킬킬거리는 웃음이 쏟아져나왔다. 웃음은 우리의 기도에서 솟아나와 아무 곳으로나 흩어져갔다. 침이 튀었다.
야, 사실 말이야.
이번엔 강이었다. 폭탄주 잔에 맥주를 따르자 거품이 부글거리며 흘러내렸다.
사실이라, 그래, 사실이 어떤데? 고백 한번 해보지, 응?
사실 말이야,J말이야, 이민 간J.
취한 시선들이 킬킬거리며 강의 입술로 쏠렸다.
내가J를 좀 알거든.
그래서? 그래서?
강은 말을 제어할 수 없는 듯했다. 얼굴 근육이 한올 한올 풀어지듯 씰룩거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좀 뜨거운 관계였지. H가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말야. 흐흐.
야, 이 새끼 이거, 순 나쁜 새끼구만?
이제 걔네 둘이 이민 갔다 그거냐?
야야, 그런 건 고백이 아니라 자랑 아냐? 응?
삿대질까지 해가며 분위기가 소란해졌지만, 이제야 술맛이 난다는 표정들이었다. 곽은 난무하는 말들 사이에 우두커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릿한 표정이었다. 취기 탓인지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곽의 윤곽까지 희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두 눈을 비비고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어쩐지 비감한 기분에 휩싸였다. 곽에게 시선을 둔 채로 내 입이 열렸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나 자신에게조차 엉뚱한 것이었다.
그래, 그래…… 이제 누구…… 살인한 사람은 없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갑자기 찬물을 뿌린 듯 좌중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모여들었다가, 다시 맥없이 흩어졌다. 모두들 불콰한 얼굴인 채였지만, 갑자기 모든 게 시시해져버렸다는 표정들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곽이 중얼거렸다. 희미한, 들릴 듯 말 듯한,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눈 온다.
우리는 일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온다는 얘기를 처음 듣는 사람들이기라도 한 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내리고 있는 눈을.
파장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해가 가고 있었다.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패잔병 같은 기분이 되어 거리로 나섰다. 변두리의 대학가는 고요했다. 종로에서는 곧 새해를 알리는 종이 울릴 것이다. 식당도 문이 닫혀 있었고, 편의점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누군가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대리기사에게 위치를 알렸다. 아아, 여기는, 그러니까, 후문 쪽이고요, 네? 네? 아니, 이 동네에 대학이 하나밖에 더 있습니까? 거기 후문으로 오세요. 후문 몰라요? 아니, 거기, 후문 말이에요. 아니 이 사람이.
휴대전화를 붙들고 언성을 높이고 있는 건 강이었다. 그런 강을 바라보며 몇몇은 엉거주춤 서 있었고 몇몇은 비틀거리며 서로 행선지를 묻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아니, 벨은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휴대전화에서 울렸다. 거의 동시였다. 바지주머니에 있던 내 전화기도 부르르 떨며 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일제히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짧은 문자메씨지였다. 모두에게 한꺼번에 당도한.
우리는 멍한 표정으로 서서 각자의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결국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방금과는 전혀 다른, 침울한 목소리였다.
K가, 결국 떴다는군. 인천 시립병원이라는데.
거리에는 눈이 쌓이고 있었다. 우리의 머리카락도 스륵스륵 젖어가고 있었다.
그렇군. 나한테 온 것도 그거야.
새끼, 착한 놈이었는데.
침묵이 이어진 끝에 누군가가 겨우 내뱉었다.
결국…… 이런 건가.
우리는 엉거주춤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눈은 아랑곳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어둠속에서 무엇인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크고 거대한 그림자였다. 우리는 일제히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스모선수처럼 비대한 몸집을 가진 복사집 주인이었다. 뭔가를 사들고 오는지 손에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복사집 주인은 문득 멈추어 서서 멍하니 서 있는 우리를 훑어보았다. 아는 얼굴들인지 아닌지 헷갈린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역시 그를 아는 체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잠시 망설였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음, 난 내일 지방엘 가야 해서. 인천까지는 좀.
다른 누군가가 그 말을 받았다.
오늘이 새해인데. 새해를 영안실에서 맞아야 하나.
인천이라니, 좀 그렇군.
모두들 말이 없었다. 복사집 주인은 말 걸기를 포기한 듯 우리 사이를 뚫고 천천히 걸어갔다. 곰처럼 부드러운 발걸음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의 몸피 큰 뒷모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눈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희디흰 어둠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리기사가 도착한 후 강이 먼저 떠났다. 쭈뼛쭈뼛 서 있던 최와 박도 택시를 잡아탔다. 누구…… 인천 갈 사람 있으면 조의금 좀 전해주지?라고 말한 것은 김이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김은, 그럼, 하고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택시 안으로 사라졌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권도 어깨를 으쓱한 후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
나와 곽만이 남았다. 우리는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택시가 우리 앞에 와 서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뒷좌석으로 기어들어갔다. 인천 시립병원이요. 나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듯 말하고는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병원에 도착하면 새벽 두시, 문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 새벽 다섯시는 되겠지. 그리고 새해일 것이다.
택시는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서울의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붉은 십자가들이 희고 거대한 묘역을 이루며 빛나고 있었다. 씨발, 웬 십자가가 이렇게 많냐? 내가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뇌까렸다. K의 죽음조차 하나의 긴 고백 같다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K는 이제야 겨우 고백을 끝내고 안식에 든 것인지도 몰랐다. 택시는 내리는 눈 속을 뚫고 서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검은 하늘이 흰 눈으로 가득했다.
차창에 비친 곽은 어둠속에 잠긴 채 소리없이 앉아 있었다. 내 얼굴에 곽의 얼굴이 스르르 겹쳐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곽을 바라보았다. 곽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본 것도 그때였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고백을 시작하려는 듯, 곽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곽의 벌어진 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검고 깊게 뚫린 동굴 같았다. 내 몸속 어딘가에서, 고요한 살의가 솟아나는 게 느껴졌다. 차창 바깥으로는 끝도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