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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시선과 시선

 

김사과 스타일, 무모함인가 새로움인가

 

오창은 정여울

 

 

자기애에 갇힌 테러리스트

 

오창은(吳昶銀)│문학평론가 longcau@daum.net

 

 

‘한국문학의 과도한 휴머니즘이 싫다.’

2005년, 문단에 앳된 얼굴을 내밀었던 김사과의 외침이었다. 한국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과잉 해석해 표현한 것이겠지만, 기성문단에 대한 도전적인 출사표였다. 실제로 그의 등단작 「영이」는 기묘한‘광기’가 행간에 넘실거린다. 자아가 분리되면서 서로 충돌하는 독특한 서사 속에서 독자는 인간 무의식에 잠재하는 어두운 내면을 감지했으리라. 그의 첫 작품에는 세상을 향한 날선‘대결의식’이 곧추서 있었다.

김사과는 최근 한국문학에 매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80년대생 작가군(김애란 김유진 정한아 최진영 한유주 등) 중에서도 가장 어리다. 또한 정한아와 더불어 단편집보다 장편소설을 먼저 선보인 야심만만한 작가이기도 하다. 80년대생 작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방식대로 새로운 소설 문법을 만들려고 고투하는데, 그중 김사과의 소설은‘독기를 머금은 내면세계’를 개성적으로 버무려냈다.

장편 『미나』(창비 2008)는 김사과가‘한국문학의 휴머니즘을 배반’하기 위해 들고 나온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김미나가 아니라 이수정이라는 사실에 비춰볼 때,‘미나’라는 제목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러한 전도된 설정은 자아(이수정)와 또다른 자아(김미나)를 뒤섞어‘대립’을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포석이다. 미나는 수정이 닮고 싶어하는 거울이자, 다른 면모를 지닌 수정의 또다른 자아이다. 수정은 미나가 대안학교로 떠나버린 후, 새로운 거울을 만들거나 거울 없는 독립적 자아가 되어야 했다. 이때 소설이 새로운 거울을 만드는 것으로 귀착되면, 그것은‘청소년 드라마’가 되고 만다. 만약 독립적 자아 형성을 위해 고투하는 과정을 그리게 되면, 그것은 전통적 의미의‘성장소설(교양소설)’로 나아간다. 하지만 『미나』는 이 두가지 길 모두를 가로지르며 질주한다. 이 소설에 대한 찬성과 반대는 바로 이 부분에서 갈린다. 『미나』의 질주를 스타일로 읽어낸 이들은‘혁명’이라고 칭송하고, 극단적인 일탈로 독해한 이들은‘테러’라고 거부한다.

작가의 창조적 의지가 적극적으로 발현되는 가상의 세계에서는 그 어떤 상상도 가능하다. 검열 없이 표현할 수 있는 것도 패기어린 젊은 작가의 특권이다. 문제는 그 세계가 어떤 감수성을 표현했으며,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했는가이다.

먼저 이 소설의 중요한 스타일로 고평되고 있는 언어의 문제를 살펴보자. 『미나』는‘청소년들의 대화법’을 그대로 활용해‘언어적 개성’을 획득하려 했다. 실제로 소설에서 수정, 미나, 민호 등의 대화는 반짝이는 활력과 적절한 비약으로 약동한다. 반면 대화문이 아닌 서술체의 문장은 현재형의 딱딱한 지문처럼 읽히거나, 작가의 지루한 방백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대화문의 속도감있는 전개에 비해, 서술문에서 급제동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장편의 호흡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소설의 구성은 장편서사를 견디기에는 골격이 허술하다. 좋은 장편소설은 성격화된 각각의 인물들이 다른 세계관을 드러내며 충돌한다. 『미나』의 도입부에는 수정, 미나, 민호가 등장해, 인물간의 안정적인 삼각구도를 예고했다. 하지만 초반에 주요인물로 제시되었던 미나는 수정의 또다른 자아처럼 기술되고, 민호는 부수적 인물로 밀려나고 말았다. 오직 수정만이 내면성을 갖춘 인물로 설정되어 인물의 성격화가 단조롭다. 결국 『미나』는 다양한 인물의 성격화에 실패하고, 수정의 혼란과 과잉된 자의식만 남게 된 것이다.

김사과는 이 소설의 씨앗이‘서울에 사는 한 여고생이 친구를 살해’라는 한줄의 흥밋거리 기사에서 뿌려졌다고 밝혔다. 씨앗은 입시지옥으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교육씨스템 비판을 거름삼아 수정이라는 인물을 무럭무럭 키워냈다. 수정은 “학급문집을 위한 설문조사에서 커서 가장 성공할 거 같은 친구에 삼년 연속 일등”(298면)을 할 정도로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일상적 삶은‘뒤틀린 반항’일 뿐이다. 그는 수시로 남자친구를 갈아치우고, 담배를 피우고, 충동적으로 쇼핑을 한다. 이러한 수정의 모습은 허구적‘실재’이기보다는 과장된‘로망’에 가깝다. 로망은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 허망하게 붕괴되고 만다. 독자들이 수정의 모습에 비판적 거리두기도, 동정적 동일시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수정의 내면적 고통이‘잘난 여고생’의 고뇌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장장 50여페이지에 이르는 소설의 결말 부분은‘의도된 충격’으로 전체의 서사를 뒤흔든다. 수정이 미나를 살해하는 파국적 결말을 위해 작가는 일종의 써스펜스 기법을 활용했다. 작품 중간에 나오는 고양이 살해 장면이나, 수정과 민호의 불길한 대화는 예측 가능한 파국의 전조였다. 작가는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의외성과 악마성 때문에 소설의 도입부에서 “이것은 장난이다. 이것은 장난이다. 이것은 장난이다”(10면)라고 세번에 걸쳐서 픽션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납득되지 않는 부분은‘살해된 미나’가 어떤 의미있는 결말을 환기시켰는가이다. 작가는 바로 이 부분에서‘반휴머니즘 소설’을 의도했던 듯하다. 문제는 휴머니즘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휴머니즘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나』는 충격을 주었지만,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지는 못했다.

누군가는 이 소설이‘극단적으로 정직’하다고 평했다. 나는‘극단적으로 무모’하다고 평하겠다. 또, 문학평론가 강유정(姜由楨)은 해설에서 이 소설 속 인물인 수정을‘이어폰을 낀 혁명가’라고 했다. 나는 수정을‘자기애에 갇힌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겠다. 나는 이 소설에 반대한다. 하지만 이 작가의 결기와 재능에는 찬성한다. 젊은 작가는 첫 장편을 통해 자신이 감지하지 못했던 결핍을 드러내며, 오히려 자신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 『미나』의 결핍은 김사과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젊은 김사과에게 필요한 것은‘반휴먼의 윤리’이다.

 

 


구원 없는 희생제의, 그 끔찍한 악몽의 세계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선생님들이 친구 자살한 거, 밖에 말하지 말랬어요. (…) 어제까지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말고 공부만 해라? 내가 자살해도 똑같겠죠.”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2008년 4월 15일 특목고 학생의 자살소식을 접한 같은 학교 학생의 인터뷰(『오마이뉴스』 2008.4.21)다. 모의고사 석차를 전교생에게 공개하는 학교, 그때마다 상처받는 아이들, 유서조차 없이 자살하는 아이들의 소식은 이제 너무 빈번해서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이 아이들에게 성장은 곧 자본주의 질서에 성공적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내가 자살해도 똑같겠죠.” 이들은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친구의 자살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는 학교가 곧 이 거대한 사회의 축소판임을. 십대에 이미 세상의 진실을 철저히 깨달았기에 이들에게 더이상 아름다운 성장소설은 불가능하다.

『미나』는 언뜻 <여고괴담> 씨리즈의 공포와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사건의 충격을 합성한 텍스트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나』는 그 둘의 충격과 공포를 합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파괴적인 욕망의 지형도를 그린다. 수정은 P시의 사교육시장이 배출해낸 최고의 기린아다. 수정이 80년대 모범생과 다른 점은 사랑 없는 연애와 감동 없는 문화적 체험을 향유하는 21세기형 소비패턴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이다. “학생의 삶은 파괴적이며 황폐하기 때문”(23면)에 가끔 휴식이 필요하며, 그 휴식은 바로 애정 없는 연애놀이와 신용카드를 통한 무감각한 소비다.

여고생 수정의 발은 택시이고 영혼은 신용카드이며 어머니의 목소리보다 가까운 것은 MP3 플레이어의 전자싸운드다. 그녀의 영어작문은 완벽한 문법과 논리를 갖췄지만 아무런 정서적 감응이 없다. 그러나 아무런 논리적 오류가 없는 수정의 작문은 언제나 최고의 점수를 받는다. 수정은 자본의 논리(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산출물을 쟁취하는 효율성과 속도의 논리)를 신체 깊숙이 각인한 싸이보그가 되었다. 수정의 둘도 없는 친구 미나는 수정 같은 모범생은 아니지만, 수정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인문학적·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나다. 수정과 미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지루한 고교생활을 자유분방한 놀이문화 즐기기 전법으로 버텨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미나의 친구 박지예가 자살한다. 죽기 전 아무도 그녀의 마지막 전화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 죄책감과 충격에 시달리던 미나는 결국 세 과목의 시험에 모두 백지를 내고 자퇴한다. 평화롭던 수정과 미나의 삶에 불가해한 타자(친구의 자살)가 나타나자 미나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수정은 그런 미나에게 기이한 배신감을 느낀다. “수정은 미나의 지예가 아니라 미나의 슬픔을 질투하기 시작한다”(35면). 한번도 자신의 세계 바깥을 넘본 적 없는 수정은 타자의 상처 깊숙이 자신의 생살을 부대끼는 미나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 수정은 “무감하여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완전하며, 스스로 자라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순결”(26면)한 영혼이기에. 완벽한 숫자와 직선, 오류 없는 문법과 논리의 세계야말로 수정이 이해하고 체화한 세계의 전부이기에. 유일한 친구였던 미나가 영원한 타자로 멀어져가는 순간, 수정이 구축했던 세계의 완벽성은 해체된다. 수정에게는 미나를‘삭제’하는 것이 자신의 완벽한 세계의 매트릭스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너무나 인간적인’미나는 미노타우로스처럼 신비롭고 괴기스러운 타자가 되어버리고, 수정은 공동체의 응원을 받지 못하는 고독한 테세우스가 되어 미노타우로스를 제거하는 끔찍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신화 속 테세우스와 달리 수정이 속한 세계는 그 자체가 공동체의 사랑과 의무로 결속되지 않은, 완벽히 고립된 개별자들의 닫힌 세계이다.‘미나〓진화한 미노타우로스’는 나약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신비로서, 타락한 테세우스가 저지르는 끔찍한 살육의 희생양이 된다. 신화 속 테세우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동체의 평화와 안위였지만, 수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미나의 죽음으로 인해 더욱 끔찍하게 어두워진 세계다. 이 작품은 묵시록의 어조처럼 명징하고도 선언적으로 이 세계가 끊임없이 수많은 수정들을 양산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고 못 박는다. 수정의 현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예감하는 통합적인 시점과 시제는 김사과의 거침없는 문체로 소름끼치게 형상화된다. 이러한 사교육시장의 욕망의 메커니즘이 무한반복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여고생이 친구를 살해하는 일‘따위’는 일회성 기삿거리로 전락한다.

『미나』는 근래 발표된 소설 중에서 10대들의 감수성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의 문체적 힘이기도 하다. 형용사나 부사의 수식이 최대한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인물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교란시키는 공격적 문체는 이 소설을 결코 단순한‘10대들의 대반란’으로 머물지 않게 한다. 『미나』는 이 세계가 99퍼센트의 수정‘들’과 1퍼센트의 미나‘들’로 진화중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인식을, 재기발랄한 그리하여 더욱 소름끼치는 문체로 형상화한다. 수정의 공격성은 그녀가 10대‘다운’순수를 나름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형상화된다. 미나와 예전처럼 노닥거릴 수 없게 된 수정은 “우주가 나를 싫어하셔”(68면)라는 귀여운 멘트로 독자를 웃기지만, 바로 그 상큼한 수정이 “너의 정신을 치료해주려고”(276면) 치밀하게 준비한 식칼로 친구의 육체를 난자하는 것이다. 김사과는 비슷한 또래의 김애란(金愛爛)보다는 훨씬 과격하면서 한유주(韓裕周)보다는 훨씬 경쾌하다. 김사과는 윗세대의 어느 작가로부터도 계보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한국소설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을 목격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 기존의 모든 가치판단의 저울을 멈춰버리는 텍스트가 있다. 그토록 옳다 믿었던 신념도 그토록 그르다 밀어냈던 가치도 망각시키며 우리가 지켜왔던 한줌의 도덕을 무색하게 하는 텍스트가 있다. 수정은 외계에서 온 괴생명체가 아니다. 수정은 우리 사회가 충실히 빚어낸, 우리 사회가 원하는 지배적인 가치관을 좀더 빨리 좀더 명민하게 구현해낸‘성공적’싸이보그다. 사랑 없이 연애하라, 이해 없이 소통하라, 열정 없이 욕망하라. 그러면 완전한 평화와 풍요가 기다릴지니. 『미나』의 메씨지는 더이상 반어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미나』는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시간의 상징이며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구원 불가능성의 메타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