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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상섭

이상섭 李相燮

1961년 경남 거제 출생.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02년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소설집 『슬픔의 두께』 『그곳에는 눈물들이 모인다』가 있음. lsangsup@hanmail.net

 

 

바닷가 그 집에서, 이틀

 

 

야, 이상만! 너 운전 초보지? 혜주가 계속 신경 거슬리게 잽을 날리는 중이다. 졸지에 즐거워야 할 길이 삐걱대고 있다. 그대도 인생 초보시잖아요? 혜주의 입에서 핏, 소리가 터진다. 꼴에 뿔난 성질 더 건드렸다간 돌아가자고 난리를 피울 것 같다. 이쯤 해서 분위기 뒤집어야겠다. 내가 슬쩍 눙친다. 그러게 급한 성질머리 좀 죽이시든가 하지 않고는. 니가 웅덩이에 빠진 게 내 잘못이야? 발밑부터 확인했어야지, 장마철인데. 그렇다고 웅덩이에 차를 대는 기사새끼가 어딨어? 아, 씨발. 차 밑에 있는 웅덩이를 내가 어떻게 다 아냐? 그러니까 확실히 살펴보고 차를 세워도 세워야지! 이렇게 팽팽하게 나가다간 내가 먼저 열 뻗쳐 돌아버릴지 모른다. 안 그래도 날씨마저 한 짜증, 하는 중인데. 할 수 없다, 내가 저 성깔이 더러워서라도 참아줘야지.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동만이 잡아 멋진 휴가 보낼 생각이나 하자. 그래도 혜주는 지지 않고 깐죽거린다. 그럼, 그게 휴가야? 사냥이지. 괜히 긁어 부스럼이다. 거참, 되게 까칠하게 구네. 그럼, 처음부터 따라나서지 말든가. 누가 먼저 가자고 했는데? 니가 먼저 고민이 눈처럼 폭폭 쌓여 미치겠다고 했잖아! 그런 기분을 누가 먼저 잡쳤냐고! 아, 알았다, 알았어. 미안하게 됐다. 그래도 잘못했단 소리는 끝까지 안하네, 미친놈이? 그게 그거지. 아냐, 미안하다는 말과 잘못했다는 말은 달라. 어째서?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미안하다고 해선 안되는 거지. 나 참, 여자애가 성깔 하나는 타고났다. 그게 뭐 다르다고 저리 똥고집일까. 저런 애를 뭐가 좋다고 달고 나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때부터 내 머리가 이상했는지 모르겠다. 혜주는 더이상 입방아 찧기 싫다는 듯 창밖만 내다보고 있다. 빵빵, 하는 소리가 울린다. 뒤에 왜건 한대가 바짝 붙어 있다. 여차하면 추월할 기세다. 안 그래도 열선 뻗쳐 죽겠는데 저것까지 개지랄이다. 저런 새끼는 내가 아무리 초보라도 용납을 못하신다. 액셀을 힘껏 밟는다. 주행거리 18만킬로미터를 넘어선 낡은 엑센트 자동차가 부르르 떤다. 서서히 알피엠이 오른다. 와우, 스릴 짱이다. 달리다 보니 눈앞에 속도감시 카메라가 나타난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딱지가 날아와도 내 몫은 아니니까. 더 힘껏 밟는다. 한참 달린 후에야 뒤를 살피니 왜건이 보이지 않는다. 샛길로 빠졌거나 추격을 포기한 모양이다. 그제야 속력을 늦춘다. 한소끔 소낙비가 내렸지만 햇살이 장난 아니다. 덥다 못해 뜨거울 정도다. 에어컨은 켜나 마나다. 등허리로 수십마리 벌레가 단체로 이동하는 것 같다. 혜주는 여전히 벌레 씹은 표정이다. 괜히 마음이 켕긴다. 청바지에 자꾸 눈길이 간다. 바지에는 황토색 물무늬가 오롯이 돋아 있다. 근데 그 무늬가 이전부터 웅덩이에 빠져 지낸 것처럼 혜주에게 딱 어울린다. 부러 만들려 해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달릴수록 자동차는 더 헉헉거리는 기분이다. 엔진 소리 때문에 큰 소리가 아니면 대화조차 불가능할 지경이다. 전화 오잖아! 갑자기 혜주가 소리친다. 씨디 보관함에 놓아둔 휴대폰이 깜빡이고 있다. 누군지 좀 봐줘. 내가 왜? 아, 씨발. 지금 초보께서 좆나 운전중이시잖아. 혜주가 마지못해 인상을 구기며 휴대폰을 낚아챈다. 그러더니 화면의 발신자 번호를 확인하며 내게 디민다. 받아, 준수 선배! 그래? 그럼, 그냥 둬. 보랄 땐 언제고 이젠 또 왜 놔두래? 아, 니기미. 뻔히 알면서 그러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끝난 듯 혜주가 쏘아본다. 초보에 이젠 도둑운전까지 하셔, 이 미친 잡놈께서? 할 말이 없다. 인정한다. 하지만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은 하기 싫다. 쪽팔리게 남자가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휴가비 털린 것도 존심 파팍 구겨가면서 겨우 말했는데. 준수 형이야 똥줄이 타든 말든 우리의 여정은 계속되어야 한다. 눈앞에 수용포 마을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드디어 사냥터다. 마을은 길 아래로 휘어진 해안을 따라 들어서 있다. 집들은 이제 막 파도에 떠밀려온 듯 질서가 없지만 그런대로 한번은 봐줄 만하다. 초입으로 들어선다. 생각보다 경사가 심하고 길도 좁다. 씨발, 길이 왜 이리 좆같냐? 내가 이렇게 만들라고 했어? 왜 나한테 시비야? 말을 말아야겠다. 대화가 계속될수록 분노 게이지만 치솟는다. 차는 바다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만 같다. 신경이 쭈뼛쭈뼛 선다. 허락 없이 몰고 나와 차까지 박살내놓았다가는 준수 형에게 난타 공연을 당할 거다. 제기랄, 손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땀이 밴다. 혜주에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까지 들킬까 봐 그것마저 신경 쓰인다. 드디어 선창이다. 선창 주변에는 작은 배들이 묶여 있다. 동만이 없으면 어쩔 건데? 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따지고 든다. 집에 간다고 했으니깐 있겠지. 없으면? 없으면 찾아서라도 인간 개조 확실히 시켜놔야지, 씨발. 꼴값을 떠셔요, 미친놈께서. 눈앞에 마을회관이 보이고 그 곁에 물건을 파는 구판장도 보인다. 회관 앞 공터는 제법 널찍하다. 저기 가서 녀석의 집이나 확인하자. 이 몸께서는 꼼짝 못한다는 거 알지? 혜주는 진지모드 작동중이다. 차를 세운 뒤 혼자 터벌터벌 가게로 향한다. 가게 안에 졸라 괴상하게 생긴 영감탱이가 앉아 있다. 꼭 외계생명체 같다. 그는 손님이고 뭐고 밀려오는 더위가 더 성가시다는 듯 부채질에만 열중이다. 생수 두병을 쥐고 영감 앞에 주소를 내민다. 영감이 턱을 올려 세운다. 장동마이 갸는 와 찾노? 예, 볼일이 있어서요. 무슨 볼일? 까다롭게 구는 영감탱이다. 생긴 것도 외계인 같은 주제에. 할 수 없이 내가 몇마디 보태자 영감이 입을 연다. 그라만 여서 저짜 모티로 가. 갯가 마지막 철제 대문! 그게 끝이다. 영감은 선풍기 머리채 낚아채기 바쁘다. 니미럴, 무슨 저런 싸가지 쌈 싸먹은 주인이 다 있다냐그래. 생수병을 쥔 채 밖으로 나오니 혜주가 서 있다. 날씨가 이래서 금세 새까만 흑인 되겠다고 까탈을 부리더니 왜 납셨냐? 미친놈, 너 마중 나온 줄 알아? 혜주의 눈길이 머문 바다 위에 나비가 날고 있다. 혜주는 노랑나비만 바라본다. 마치 날개 달린 꽃이라도 본 꼴이다. 헌데 가만 보고 있자니 꽁하던 표정의 그녀가 아니다. 저게 바다 냄새에 살짝 맛이 가셨나. 분위기 파악도 할 겸 부러 흰소리를 쳐본다. 혹시 너 온다고 환영 나온 거 아냐? 혜주가 마빡을 구기며 되쏜다. 꿀값도 없어 여기까지 온 주제에 계속 꼴값이셔요. 괜히 무안해진다. 어째 저리 분위기를 모를까. 하긴 그러니 그 졸라 흔한 대학생 될 생각도 않겠지. 준수 형네 호프집에서 알바 뛸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얼마 가지 않아 길이 툭 끊기며 해안이 펼쳐진다. 끝집이라, 그러면 저 집 같은데? 그제야 혜주도 길게 목을 뽑는다.

 

몇번이고 인기척을 냈지만 개소리뿐이다. 이 집구석엔 개새끼들만 사는 모양이네? 내가 빈정거려도 개는 짖어댄다. 그런데 소리가 이상하다. 컹컹이나 멍멍도 아닌 먹먹,이다. 그 바람에 이 몸까지 먹먹해지는 기분이다. 아버지한테 잔소리를 먹을 때 먹먹해지던 것처럼. 혹시 이 자식 눈치 채고 튄 거 아냐? 내 말에 혜주가 이죽거린다. 그깟 돈 몇푼에 줄행랑을 쳐? 영영 안 볼 짜식도 아닌데. 일단 작전상 철수하고 요앞 선창가에서 망이나 때리자. 혜주가 버럭 언성을 높인다. 이 꼴로 선창엘 가자고? 그럼 어떡해, 아무도 없는걸. 생각하는 게 바늘구멍이 따로 없다니까. 혜주가 문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간다. 잠시 뒤 대문에서 삐이익, 소리가 난다. 어어?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혜주가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야, 근데 대문이 잠기지 않은 건 어떻게 알았냐? 내가 뒤따라가며 묻자 혜주가 턱짓을 한다. 마당 구석에 개집이 보인다. 그 앞에 온몸이 허연 개가 노려보고 있다. 엉덩이를 깔고 앞다리를 세운 꼴이 세상의 단맛 쓴맛 다 본 영락없는 노인이다. 가축이 집에 있는 한 절대 문을 잠그지 않아. 그건 또 왜 그러냐? 이 구제불능의 초딩 같으니라구. 그럼 먹이는 어떻게 처먹냐? 저렇게 묶여 있는데도? 넌 이웃집엔 왜 사람이 산다고 생각해? 개는 낯선 사람이 다투는 게 재미있는지 짖지도 않는다. 확실히 영악한 놈이다. 혜주가 안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한다. 그 꼴이 제법 노련해 보인다. 대문이 열려 있다면 안에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지금 한창 낮잠에 빠져 있을 수도.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다. 계십니까? 장동만! 실례합니다. 주무십니까? 안에 아무도 없어요? 다양한 장단으로 합창을 해도 쥐새끼 소리 하나 없다. 할 수 없이 현관문을 당겨본다. 대문과 달리 굳게 닫혀 있다. 확실히 비었네. 니미럴, 이제 어쩐다냐? 혜주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핀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개집으로 향한다. 그녀가 다가가자 개가 머리를 곧추세우고 혜주를 쳐다본다. 그사이에 나는 집 주변을 살핀다. 생각보다 집이 아담하다. 동백나무며 대문 앞에 꽃대를 올린 산나리도 졸라 예쁘다.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뜬금없이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 씨발, 이래선 안되는데. 휴가까지 와서 이게 뭔 쓸데없는 생각이람. 혜주가 열쇠꾸러미를 쥐고 서 있다. 어, 어디서 찾았냐? 잘 봐, 개밥그릇이 몇갠지. 그러고 보니 밥그릇이 두개다. 두갠데 하나는 왜 엎어놓았겠냐? 내가 눈을 씀벅이자 혜주가 입을 연다. 열쇠를 감췄다는 건 멀리 출타를 감행하셨다는 거지. 혜주는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듯 당당하게 문을 딴다. 그러더니 먼저 안으로 들어선다. 혜주의 대갈빡 굴리는 게 여간 아니다. 인문계와 실업계는 다르다고 염병을 떨더니 역시 인문계답다. 같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좋다. 일단 집에서 기다리자. 그러면 녀석이 올 것이다. 동만이만 만나면 휴가는 본게임에 접어들 수 있다. 설령 동만이를 못 만나도 상관없다. 어차피 녀석의 부모에게 받아내도 받아내고 말 테니까. 그때 휴대폰이 눈치없이 운다. 씨발, 또 준수 형이다. 사정없이 전원을 꺼버린다. 우와, 에어컨도 다 있네? 혜주가 탄성을 지른다. 내가 봐도 실내가 어촌 집답지 않게 깔끔하다. 마치 주인의 꼼꼼한 성격을 보는 듯하다. 정갈한 가구와 배치들, 게다가 현대식으로 개조한 부엌은 휴양지 펜션에 도착한 것만 같다. 주인의 조심스런 성격을 닮았는지 안방 문도 조용히 열린다. 정면에는 문갑이 놓였고 그 위에 차곡차곡 정리해놓은 약상자와 봉지들도 보인다. 젊어서는 밥힘, 늙어서는 약힘이라더니 아예 약을 재놓고 사는 양반들이구만. 내 말에 혜주가 눈살을 찌푸린다. 이 정도의 약이면 부모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심각하단 거야, 이 미친 분아! 그럼, 부모 약값으로 훔쳐갔을 수도 있으니 나더러 도둑놈과 붕우유신이라도 하란 얘기야? 내 말에 혜주가 이마에 갈매기를 띄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반대편 방으로 향한다. 예상대로 녀석의 방이다. 책상 위의 사진액자 속에서 동만이가 웃고 있다. 마치 그를 놀리듯 천연덕스러운 웃음이다. 캭, 녀석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다. 녀석은 내가 찾아올 줄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녀석이 내 성질머리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제 녀석이 나타나면 얼굴을 완전히 리모델링해버릴 거다, 씨불남! 야, 잘됐다. 이 자식 올 동안 여기서 죽때리자. 내 말에 혜주는 딴청이다. 난, 우선 몸부터 씻을래. 다리가 썩는 기분이거든. 혜주가 욕실 앞에서 서둘러 바지를 벗는다. 엉덩이에 앙증맞게 걸려 있는 팬티가 보인다. 노란색이다. 마치 좀 전에 본 바다 위를 날던 나비, 그 나비가 날아든 것 같다. 혜주가 힐끗 돌아보더니 소리친다. 바지나 빨아서 널어, 볕 좋을 때 마르게! 갑자기 열선 뻗는다. 내가 네 옷을 왜 빨아! 운전을 그따위로 하신 미친놈이 누구신데? 또 그 소리. 그래, 이렇게 나오는 이상 일단 참자. 하지만 그냥 고분고분할 순 없다, 명색이 사내새끼가. 야, 넌 문 닫을 줄도 모르냐, 기집애가? 그래도 혜주는 문 닫을 생각은 없이 휘파람만 불어젖힌다. 바지를 거머쥔 채 마당으로 나선다. 마당가에 수도꼭지가 있는 걸 봤으니까. 거실로 돌아올 때까지 욕실의 노랫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열린 욕실문 틈으로 혜주의 엉덩이와 가슴이 드러났다 숨기를 반복한다. 저게 꼭 나를 놀리는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치고 들어갔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혜주의 지랄 같은 꼭지가 또 돌 수 있으니까. 열없이 녀석의 방으로 건너온다. 책상 서랍이고 간이장롱을 살펴도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다. 그 흔한 구형 MP3플레이어도 안 보인다. 거실로 나와 넉장거리를 한다. 가동되기 시작한 에어컨 성능 죽여준다. 더위가 금세 가시는 듯하다. 장거리 운행 탓인지 눈이 뻑뻑하고 하품이 절로 터진다.

 

발소리가 난다. 이어 스테인리스 그릇이 뒹구는 소리도 요란하다.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밖으로 나선다. 개집 앞에 웬 노파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누구시죠? 노파가 놀랐다는 듯이 휙 돌아본다. 아니, 묻는 총각은 대체 누고? 노파의 표정이 딱딱하다. 아, 예. 전 이 집에 사는 동만이 친군데요. 동마이? 네. 집에 놀러 오라고 해서 왔는데 보이질 않네요. 그라몬 이짝으로 피서 온 기라? 난 옳다구나 싶어 고개부터 끄덕여 보이고는 호기롭게 되묻는다. 근데 식구들은 죄다 어디 갔나요? 요즘 이 양반들이 대중이 없어. 할매가 시도 때도 없이 앓아싸서. 노파는 끙, 소리를 내며 무릎을 편다. 앞에 놓인 그릇에 개밥이 수북하다. 노파는 제 할 일은 다했다는 듯 대문 쪽으로 향한다. 혜주가 바깥 동정을 살피다가 웃으며 말한다. 노인네들 안 오면 완벽한 민박집이네. 혜주의 웃는 꼴로 보아 기분이 조금 풀린 모양이다. 헌데 혜주의 웃음이 야릇하다. 성깔도 죽었으니 이쯤이면 대시해도 까탈을 부릴 것 같지 않다. 좋다. 어차피 빈 집, 분위기도 띄울 겸 필 왔을 때 한번 붕 뜨는 거다. 혜주의 귀에 기쁜 소식이라도 퍼넣듯 속삭인다. 야, 우리 지금 한 게임 뜰까? 빅 싸이즈야. 혜주는 여관에서와 달리 내게 퉁바리를 날린다. 알아서 해결해. 화장실로 직행하든지, 제 풀에 지쳐 작아질 때까지 참선을 하든지. 어, 이게 아닌데. 여전히 기분이 다운상태인가? 그렇다고 내친걸음 물릴 수 없는 법. 그래, 누가 이기자 해보자. 그녀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다. 그러자 혜주가 몸을 돌리더니 눈에 힘을 싣는다. 야, 이상만. 내가 아무 데나 가랑이 벌리는 거 봤어? 잠시 머쓱해진다. 이런 상태라면 한판 떠도 내 거시기만 좆나 고생할 게 뻔하다. 기분 왕창 구겨진다, 니미럴.

 

개 짖는 소리가 난다. 도둑커피를 한창 마시던 중이다. 나와 혜주는 서로 눈치를 살핀다. 차문 닫는 소리가 일더니 잠시 뒤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혜주가 눈짓을 한다. 마지못해 엉덩이를 들고 밖으로 나선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대문의 그림자도 길게 늘어졌다. 하따, 날씨 한번 쥑이주네. 영감님 안에 기슈? 개집 앞에 웬 중년 사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희한하다. 오늘따라 오는 사람마다 왜 죄다 개집 앞에 모인다냐. 어, 영감님 아들인가 보네? 옳거니, 말하는 꼴로 보아 동네 주민은 아닌 모양이다. 왜 그러쇼? 부러 거드름을 피우며 묻는다. 거 왜 전번에 영감님 말한 것처럼 해주겠수. 애지중지 키웠다니까 대신 내가 손해보고 몸에 좋은 약재 팍팍 넣어 고아줄 테니깐 약발 받으면 이리로 전화라도 한번 때려주슈, 헤헤. 사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처바르며 명함까지 건넨다. 개가 사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사정없이 짖어댄다. 변함없이 먹먹, 하는 소리다. 조용히 안해? 나는 부러 주인처럼 큰소리까지 친다. 허어, 요놈 조상이 서당 먹물을 먹고 살았나 보이. 소리 한번 요상시럽네. 사내는 주저없이 개의 목줄을 잡아챈다. 동물도 사람을 알아보는 것일까. 아니면 사내에게서 풍기는 냄새 탓일까. 목줄이 잡히자 개는 더 요란하게 짖는다. 그러더니 애원하듯 나를 집요하게 바라본다.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린다. 개는 끌려가지 않으려 버틴다. 어허, 요놈이 이 집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면 효도해야지! 사내는 개를 냉큼 안아올린다. 개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잽싸게 돌아선다. 잠시 뒤 엔진 소리가 나고 이내 소리는 멀어진다. 주위는 다시 고요해진다.

 

밤이 깊다. 혜주와 나는 나란히 차 안에 앉아 있다. 주인 없는 집에서 밤까지 새울 순 없어 나온 길이다. 주인이 나타나면 다시 쳐들어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둠이 짙어져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후회가 인다. 동만이 이 새끼는 왜 문자까지 씹어제껴? 이럴 줄 알았으면 저녁까지 충전하고 나오는 건데, 씨. 덩달아 혜주도 왕짜증이다. 이대로 계속 죽칠 거야? 이왕 참은 거 조금만 더 기다려. 이젠 거의 팔십프로는 우리 펜션이니까. 주인도 없겠다, 돈 들 일도 없겠다, 이처럼 기막힌 경우가 어디 있을까. 차라리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그때 혜주가 솔깃한 말을 뱉는다. 야, 술 땡기는 데 이왕이면 한잔 꺾으면서 잠복근무라도 때려, 씨발. 이건 너무 밍밍하잖아! 그래 맞다. 까짓것, 이왕 휴가를 위해 나선 길 아닌가. 조금 빨리 분위기 띄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동만이야 어차피 눈앞에 있으니 그물만 던지면 그만이니까. 좋아. 분위기 화끈하게 업시켜 보자구. 우리는 차를 몰고 가게로 향한다. 대신 오늘은 전부‘깡’으로 마시는 거다? 혜주가 가게로 들어서기 전에 불쑥 내뱉는다. 그대 쪼대로 하셔요. 혜주는, 작정이라도 했는지 정말‘깡’소주에 새우깡, 감자깡, 고구마깡만 골라잡는다. 가게 주인은 평생을 그렇게 살기로 작정했는지 여전히 무뚝뚝하다. 진짜 밥맛이다. 가게를 나온 우리는 선창가 가로등 아래 다시 차를 세운다. 가로등 불빛이 바다 위에 기름처럼 떠서 일렁거린다. 상현달도 보인다. 장마철에 모처럼 보는 광경이다. 강소주를 마신다. 번갈아가며 병나발을 불자 금세 취기가 오른다. 달빛 탓일까. 아니면 빈속에 마신 술 탓인가. 우리의 몸은 금세 달과 함께 둥둥 떠올라 일본을 지나 아프리카까지 나아가는 기분이다. 혜주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연다. 야, 우리 심심한데 진실게임 한번 깔까? 혜주의 혀가 어느새 살짝 꼬여 있다. 조금이라도 쌩깐다거나 구라치면 안주 없이 나발 불기, 어때? 나쁜 제안은 아니다. 어차피 남아도는 건 시간. 어떻게 보내든 보내야 한다. 조오치, 바로 플레이 걸어. 그럼 시작한다. 너, 왜 독립군 생활 하냐? 첫 질문치고는 너무 빡세네, 씨. 진실대로 말하면 되잖아, 짜샤. 집에 가기 싫어서. 왜? 잠시 침묵이 흐른다. 말을 하려니 어째 좀 쪽팔린다. 하지만 게임이라니 답은 해야 할 것 같다. 아버지 땜에. 아버지가 어쨌길래? 그건 일급비밀이라 말하기 곤란해. 씨불남, 처음부터 규칙 어기고 나서시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과 구라는 달라. 뭔가 감춘다는 건 상대방을 속이는 거야. 숨기는 게 전부 상대방을 속이는 건 아냐, 상대방을 배려하는 거지. 너하고 계속 이빨 까고 싶지 않아. 빨랑 술이나 처마셔. 어쩔 수 없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다. 다음 질문! 혜주가 다시 말을 잇는다. 왜 너만 질문해, 씨발녀야! 나중에 너도 하면 되잖아, 씨불남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새우깡에 풀어버린다. 아삭아삭. 소리가 제법 날카롭다. 너, 왜 쌔고 쌘 직업이 육지에도 많은데 선원 됐어? 먹고 자는 게 완전 공짜거든. 그래서 뭍과 물을 오가는 양서류 생활을 힘들게 자청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힘든 건 아냐. 그렇게 돈 모아서 뭐하려고? 집 사려고. 집 사서 뭐하게? 남 눈치 안 받고 맘껏 떠들며 살고 싶어서. 집 사고 나면? 그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살 거다. 뭐 하고 싶은데? 운반선 같은 작은 것 말고 졸라 큰 배 몰고 먼 바다를 항해하고 싶어. 그게 쉬워? 쉽진 않으니까 고민중이지. 아버지 얘기 좀 해줘. 일급비밀이라고 했잖아, 인마! 내 거친 목소리에 혜주가 잠시 말을 잃는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연다. 넌 내가 막산다고 생각해? 그럼 아니냐? 난 씨불남들 생리를 조사중이야. 넌 왜 남자를 조사하고 다니냐? 남자란 잡것들을 믿지 못하겠으니까. 믿지 못하게 한 그 잡것들의 이름은? 둘인데? 그럼, 둘 다 이름을 대. 말 못해! 이름 따윈 두번 다시 입에 담고 싶지 않으니까. 씨발, 너도 진실을 숨기고 있잖아. 혜주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넌 누굴 정말 사랑해본 적 있어? 아니. 누굴 잊으려고 노력해본 적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랫말 같다? 그딴 거 집어치우고 대답이나 해, 짜샤! 사랑한 적은 없지만 사랑하게 된다면 열나 사랑하고 싶어. 그래? 열나 사랑하면 얼마나 잊는 게 힘든 줄 알아? 내가 눈을 치떠도 혜주의 말은 계속이다. 난 애새끼까지 낳을 각오였어. 그런데 그 새낀 안 그랬어. 아빠처럼 무책임한 놈이었지. 니네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너도 아버지 얘긴 안했잖아, 쌔꺄! 성질 한번 더럽다. 나 또한 입 섞기 싫어 바다만 바라본다. 차 안은 한동안 정적에 휩싸인다. 간간이 술병 홀짝이는 소리가 일 뿐이다. 파도 소리가 슬쩍슬쩍 옆구리를 건드린다. 나쁜 분위기는 아니다. 혜주의 눈치를 살핀다. 참 난감하고 이상한 애다. 하지만 혜주의 그런 화끈한 성격이 마음에 든다. 아니면 오늘같이 가슴 까발릴 기회도 없을 테니까.

 

야, 강혜주! 재미난 얘기 하나 해줄까? 응, 하고 혜주가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제법 술에 취한 모양이다. 한 장애인이 지하철 선로 위로 떨어졌어. 지하철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선로 밑만 내려다보며 발만 동동 굴렀지. 혜주가 눈망울을 키운다. 그때 기차를 기다리던 대학생 한명이 가방을 내던지고 뛰어들었어. 불쑥 혜주가 말꼬리를 잡아챈다. 씨발, 하필 대학생이냐? 왜, 대학 다니는 친구년들이 또 내장 뒤집디? 아, 몰라 씨발. 하던 얘기나 계속해! 알았어. 어쨌든 그 대학생이 장애인을 무사히 구출해냈어. 헌데, 문제는 그새 노트북에 지갑 든 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거야. 혜주가 또 나선다. 스토리 뻔해지네, 그래서? 어떤 검정색 점퍼를 입은 남자가 가방을 열어보고는 잽싸게 튀는 게 CCTV에 잡혔지. 그게 공중파를 탔고. 혜주가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감아간 그 새끼 완죠니 봉 잡았네. 근데 그 얘길 왜 해? 그 남자를 내가 잘 알거든. 혜주가 뚫어져라 나를 바라본다. 그 남자, 젊은 나이에 아내와 사별했대. 암이었다나 봐. 재혼도 않고 혼자서 열심히 자식들 키워왔는데 아이엠에프를 맞아 직장까지 잃었고. 혜주가 침을 삼킨다. 하루살이 일용직으로 겨우 먹고사는데 하필 퇴근길에 자기 앞에서 일이 벌어진 거지. 사람들은 선로 쪽으로 몰려가 있지, 막내 생각은 나지, 순간적으로 눈깔 뒤집힌 거지. 막내가 왜? 그 잡것이 컴퓨터 느리다고 바꿔달라고 생떼를 썼거든, 사는 꼴 뻔히 알면서. 혜주는 아무 말이 없다, 창밖만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이. 나도 모르게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술병에 저절로 손이 간다. 그제야 혜주가 나직이 입을 연다. 미안해. 뭐가? 새끼라고 욕해서. 괜찮아. 나도 처음엔 TV보며 아버진 줄 모르고 좆나게 욕했으니까. 혜주가 느닷없이 소리치며 입을 연다. 야, 이상만. 나도 재밌는 얘기 해줄까? 어떤 인간이 있었어. 엄청나게 술만 마시고 무책임이 도를 넘은 괴짜였지. 그 인간은 손에 돈보다는 몽둥이를 쥐고 들어오는 날이 더 많았대. 헌데 그런 개 버릇을 가진 작자가 물건 하나는 끝내줬던지 씨발녀까지 생긴 거야. 여자가 가만있었겠어? 당연히 이혼을 요구했지. 그때 아마 애가 여섯살인가 그랬대. 내가 불쑥 끼어든다. 이건 정말 형편없이 잘못하신 개잡놈 이야기네. 혜주는 피식 웃더니 계속 말을 잇는다. 미안하다와 잘못했다를 이제 제대로 이해했네. 근데, 재밌는 건 그 개잡놈께서 제 핏줄이라고 딸한테 연락한 거야. 구라 까는 건지 몰라도 미안하다면서 한번 보고 싶다고. 혜주는 깊은 눈길로 바다만 바라본다. 그래서 넌 어떡할래? 모르겠어, 씨발. 혜주가 머리를 뒤흔든다. 그런 다음 혜주는 눈을 지그시 감아버린다. 나는 딱히 해줄 말을 찾지 못해 그녀의 손만 끌어당긴다. 바다 위엔 별들이 수북하다.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은 채 앉아 있다. 더없이 포근한 느낌이다. 그때 혜주가 갑자기 소리치며 나선다. 야, 우리 필 팍 꽂히는데 여기서 한 게임 뜰까? 갑작스런 말에 어리둥절해진다. 근데 여긴 좀 불편하지 않겠냐? 욕실보다야 훨 낫잖아. 혜주가 먼저 바지를 벗기 시작한다. 나도 서둘러 바지를 벗는다. 내 거시기가 벌써 빵빵해져 터질 지경이다.

 

눈을 뜨자마자 주위부터 살핀다. 거실이다. 그제야 간밤의 축제를 집까지 이은 것이 떠오른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는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구석에는 밤새 우리를 지켜보기라도 한 듯 빈 술병들이 꼿꼿하게 서 있다. 주위에는 과자부스러기가 어지럽다. 혜주가 보이지 않는다.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복숭아 통조림처럼 꿀럭거린다. 미치겠다. 이런 적이 별로 없었는데. 축제 분위기는 정말 캡이었다. 우선 냉장고부터 연다. 물을 마시니 한결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동만의 방에도, 안방에도 혜주는 없다. 대문 밖으로 나선다. 늦잠을 잤는지 햇살이 장난 아니다. 이 정도의 더위라면 바로 바닷물에 뛰어들어도 될 것 같다. 하늘은 장마철이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맑다. 해변 갯바위에 앉아 있는 혜주가 보인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미동이 없다. 먼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언제 저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어젯밤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혜주가 그렇게 가슴 아린 계집애인 줄 몰랐다. 천천히 바다로 향한다. 가까이 가도 혜주는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냐? 짐짓 시치미를 떼고 묻는다. 혜주가 나직이 입을 연다. 그냥 바라보는 중이야.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생각이 좆나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 같아서. 어쭈, 외계어 같은 소리 하네. 혜주가 돌멩이를 주워 바다로 던지기 시작한다. 얄랑이는 물결에 닿자 퐁,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마치 휴대폰 문자 뜨는 소리 같다. 혜주는 바다에게서 무슨 답장이라도 기다리는 것처럼 돌을 던지고 또 던진다. 덩달아 나도 돌멩이를 던져본다. 생각보다 흥이 나지 않는다. 야, 우리 바다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직접 확인해볼까? 내가 먼저 윗옷을 벗어젖힌다. 지켜보던 혜주가 입을 연다. 난 수영은 잘 못해.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물속에 들어가는 게 두려웠거든. 그래서 웅덩이에 빠져 그 지랄을 떠신 거야? 그만해라, 이상만! 혜주가 입매를 일그러뜨린다. 한꺼번에 세수며 샤워까지 작살내버리는 거다! 아침 날씨라 그런지 바닷물이 차갑다. 그래도 견딜 만하다. 너도 어서 들어와, 기분 짱이다! 혜주는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한다. 들어와, 내가 죽어도 네 생명은 끝까지 지켜줄 테니까! 독수리 오형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말은 그렇게 해도 혜주는 싫지 않은 모양이다. 혜주가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온다. 물결이 허리까지 닿자 헤엄을 치기 시작한다. 근데 저건 무슨 수영 자세람. 버터플라이? 아니다. 웅덩이에 빠진 나비가 빠져나오려 허우적거리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몸에 묻은 이물질을 털어내려는 발악 같기도 하다. 큭큭, 웃음이 터진다. 혜주가 이내 가쁜 숨을 내쉰다. 그러더니 근처의 갯바위에 올라앉는다. 혜주가 숨을 고를 동안 나는 배영 자세로 물살 위에 눕는다. 드러눕고 보니 하늘이 온통 파랗다. 천천히 팔을 젓는다.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다. 한동안 그런 느낌이 좋아 배영을 즐긴다. 그러다가 부르르 떨리는 어깨도 달랠 겸 혜주 곁으로 간다. 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이곳이 이상하게 점점 마음에 들어. 어?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했는데. 그럼 너도 뭔가 확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 거야? 그럼, 우린 통하는 게 많잖아. 통하는 게 뭐 있냐? 혜주는 시큰둥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다지 싫은 기색은 아니다. 생각해봐. 우선 둘 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 그렇고. 이혼과 사별은 다르지. 둘 다 나이도 같고. 생일은 달라. 둘 다 사랑을 간절히 원한다는 점. 난 그렇지 않은데? 둘 다 꿈꾸는 중이고. 난 꿈도 꾸지 않는 애늙은이야, 엄마가 될 뻔도 했고. 그래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점은 같을걸? 그만해, 씨발! 혜주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일어선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 어째 귀여워 보인다.

 

욕실에 들어간 혜주는 나올 기미가 없다. 젖은 몸으로 거실에서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와 그런지 대갈통은 맑다. 하지만 배는 고프다 못해 쓰리다. 어서 씻고 라면국물이라도 마시면 좋겠다. 성님, 인자 왔능교? 낯선 소리가 나더니 더럭, 현관문이 열린다. 마을 전체가 경로당 분위기더니 이번 방문객도 노파다. 그런데 어제 왔던 노파가 아니다. 노파는 낯선 사람을 보자 아래위를 훑는다. 대체 젊은이는 누고? 이런 일을 몇번 당하자 대답하기 짱난다. 동만이 친군데요. 아하, 난 성님이 온 줄 알았더이 막내아들 친구였구먼. 그라만 아까 갯가서 헤엄치던 양반이라? 예, 하고 나는 마지못해 억지고개까지 끄덕여 보인다. 그래 밥은 묵었는가? 아뇨, 아직요. 멸치 그물에 오늘따라 딴 괴기가 몰려들어 몇마리 가이꼬 왔어. 갓 잡아 싱싱하이 째져 묵어봐. 보이 처자도 같이 온 것 같으이. 노파는 내 앞으로 생선이 든 그릇을 불쑥 내민다. 그러더니 상대방 사정은 아랑곳 않고 곧장 돌아선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그제야 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욕실 문을 열고 나온다. 이게 뭐야? 보면 모르냐.‘바다의 보리’라는 고등어 선생이시지. 그래? 그럼 라면 대신 이걸로 조져볼까? 쌩까기는. 너 생선조림이나 할 줄 알고 하는 얘기야, 지금? 양서류께서 그것만 다듬어주신다면야 못할 것도 뭐 있냐. 깐에 여자라고 나서는 꼴이라니. 지가 언제 이런 음식이나 해봤을라고. 하지만 혜주는 작정한 듯 팔을 걷어붙이고 개수대 앞으로 간다. 좋다, 두고 보자. 나로서야 생선 손질은 이미 운반선 생활에서 이골이 나게 얻은 내공이니 손해볼 것도 없다. 혜주가 냉장고를 열고 양념을 찾아 설치더니 본격적인 요리작업을 서두른다. 개수대에 나란히 서 있으니 어째 신혼부부 같다. 아, 이렇게 살고 싶어 아버지는 집을 갖고 싶었던 것일까. 아버진 먼저 보낸 어머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요리를 대신 했을까.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린다. 아, 씨발 내가 왜 이러나. 정신을 차리니 구수한 냄새가 실내를 장악하고 있다. 나중에 집주인 양반도 먹게 왕창 해버렸다, 씨발. 설마 욕먹진 않겠지? 혜주가 착한표 공주처럼 히죽거린다.

 

여전히 동만의 휴대폰은 꺼져 있다. 녀석의 행방이 지금처럼 궁금하기는 처음이다. 동만이 이 새끼는 정말 어디로 잠수를 탄 걸까. 혹시 우리가 온 거 다 알고 있는 거 아냐? 내가 되받아친다. 안다고 노인네들까지 쎄트로 잠수 탔겠냐? 그냥 휴가 갔다가 오는 길에 다시 들러. 휴가비는 어쩌구? 있는 것만 쓰면 되잖아. 남은 돈으론 하루 방값도 모자란다구. 혜주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구긴다. 아, 씨발. 그럼 어떡할 거야? 할 수 없지, 좀더 기다리는 수밖에. 누구를? 이왕 이렇게 된 거 누구든 무슨 상관있어? 하여튼 대책 없는 양서류라니깐. 난 이제 갈 거다, 너 혼자 기다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난감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무작정 죽치고 있을 수도 없다. 혹시 주인 내외한테 사고가 난 거 아냐? 혜주가 날카롭게 되쏜다. 아예, 돈 때문에 생사람까지 잡고 있네, 미친놈이. 답답하니깐 하는 소리 아냐, 씨발. 혜주는 다시 가방을 꾸린다. 떠나려니 아쉽다. 모처럼 동행한 혜주와의 추억을 여기서 쫑내야 한다니. 야, 우리 온 김에 진짜 마지막으로 섬 일주나 한번 할까? 혜주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혹시 녀석을 우연히 맞닥뜨릴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휴가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그때, 대문 앞에서 트럭 멎는 소리가 난다. 이번에는 또 누구람. 차문 닫는 소리가 나고 발소리가 들려온다. 밖으로 나와 보니 어제 왔던 사내다. 사내는 양손에 약제박스를 들고 있다. 하따, 영감님 급하실까 서둘렀네요. 어르신은 또 안 계슈? 아뇨, 아직요. 아, 그래요. 사내는 마루에 약상자를 내려놓는다. 이게 뭡니까? 뭐긴, 개소주죠. 사실 녀석이 비곗덩어리라 이런 식으로 장사하다간 망하기 십상입죠. 하지만 개업인사로다가 손해 무릅쓰고 드리는 거니깐 담에 보약 지을 때는 꼭 우리 흑염소집을 애용해달라 이겁니다, 헤헤. 사내는 볼일이 끝난 듯 이내 돌아선다. 몹시 서두르는 꼴이 꽤나 바빠 보인다. 사내가 떠나고 우리는 마루에 놓인 약상자만 뚫어져라 내려다본다. 갑자기 뇌리에 쌈박한 생각이 스친다. 야호, 쾌재를 부르자 혜주가 입을 내민다. 잘 먹고 잘 쉬고 공짜 민박까지 했는데 물건까지 감으실려구? 지금 우린 돈이 필요하다구. 돈이 없으니까 휴가도 접어야 할 처지잖아. 혜주가 시큰둥하게 말한다. 그럼, 그걸 어쩌려고? 뻔하지, 따라오기나 하셔!

 

억지춘향 격으로 앉은 혜주는 말이 없다. 제법 높은 건물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인파도 꽤 많다. 이윽고 혜주가 입을 연다. 야, 근데 이걸 사기는 해? 그야 중탕집이라면 만드니깐 당연히 사겠지. 혹시 중탕집이 그 남자네 집밖에 없는 거 아냐? 야, 넌 여기가 시로 승격된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몰라서 그러냐? 시장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눈앞에 대형 건물이 줄줄이 서 있다. 잘 살펴봐. 혜주가 갑자기 소리친다. 저기 있네! 혜주 말대로 흑염소 전문이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걸려 있다. 중탕집 근처에 차를 세운다. 유리문 안쪽에 주인인 듯한 남자가 부지런히 오가는 게 보인다. 생각보다 젊다. 야, 아무래도 네가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아. 혜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정색을 한다. 미친놈. 미인계 쓰는 거야, 지금?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팔아야잖냐. 더군다나 네가 나보다 캐릭터 잡기도 편하고. 혜주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좀 봐달라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남자 주제에 꿀리고 싶지는 않다. 일단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지켜보기로 한다. 잠시 뒤 혜주가 작정한 듯 거칠게 차문을 민다. 성질머리 하나는 진짜 지존이다. 파이팅! 등 뒤에 대고 외쳐도 혜주는 거들떠볼 생각도 않는다. 혜주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 주인이 알은체를 한다. 혜주가 뭐라고 하자 주인이 고장난 로봇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혜주는 다시 애원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주인 사내가 잠시 난감해하는 듯하더니 팩 하나를 거머쥔다. 맛까지 본다. 주인이 이윽고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혜주는 계속 말하고 주인 사내는 도리머리만 친다.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혜주는 포기한 듯 약상자를 든 채 돌아선다. 잔뜩 뿔이 난 게 확실하다. 그녀가 차에 앉기도 전에 묻고 든다. 뭐라 그래, 저 새끼가? 그녀는 대답 대신 팩부터 쥐어뜯는다. 뭔 탕제를 넉넉히 넣었다는 게 꼭 짜장면 국물 맛이 난댄다, 씨발. 너도 한번 먹어봐. 나는 약봉지에 입을 갖다댄다. 맛이 이상스럽기는 하다. 약보다 물이 더 많으니 사겠어? 아, 그래도 니기미 약은 약 아냐? 혜주가 인상을 구긴다. 내가 말한다. 니미, 중탕집이 어디 여기 하나뿐이냐. 다른 중탕집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몇군데 더 돌아봤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해동식품처럼 맥이 탁 풀린다. 이제 더이상 파는 거고 뭐고 귀찮아질 지경이다. 더운 날씨마저 한 부조 톡톡히 한다. 혜주가 힘없이 투덜거린다. 아, 씨발. 이제 어떻게 해? 방법은 원위치밖에 없네 뭐. 가져온 걸 되가져가자고? 그럼 이딴 약을 싣고 가서 뭐 하게. 그런다고 훔친 걸 도로 갖다놔? 혹시 아냐. 또 그사이에 동만이 새끼가 와 있을지. 없으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혜주의 입이 서너발은 튀어나와 있다.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있다. 우리는 흠칫 놀라고 만다. 마당에 철거 직전의 가로등처럼 웬 노인이 서 있기 때문이다. 대비까지 든 걸 보니 동만이 아버지가 확실하다. 혜주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묻는다. 이제 어떡할 건데? 어쩌긴, 그냥 밀어붙이는 거지. 그렇다고 우리가 나쁜 짓 한 건 아니잖아. 그럼, 이 개소주는 뭐고? 이거야 주려고 도로 가져왔잖냐. 내가 먼저 대문으로 들어선다. 인기척을 느낀 영감이 돌아본다. 꾸뻑 인사부터 댕긴다. 혹시 동만이 아버님 되시나요? 동마이 친구들이가? 예. 동만이 만나려고 왔더니 집에 아무도 없어서요. 그래서 집에서 기다戹더나? 예, 갈 데도 없고 먼 길이라 돌아가자니 엄두가 나야 말이죠. 그라만 집에서 푹 쉬제, 날도 더분데. 안 그래도 쉬다가 섬 한바퀴 구경하고 오는 길인걸요. 영감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연다. 이, 잘혔네. 그라고 잘 왔어. 어여 그늘로 들어서. 예, 근데 동만이는 안 왔나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 병원 한본 찾아오고선 함흥차사니. 혹시 갈 만한 곳은 모르시나요? 모리지. 어디를 싸댕기는지. 연락할 만한 데는요.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망할눔이 밥은 묵고 댕기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이라. 병원서 할망구는 지 뒈질 건 생각도 않고 막내 생각만 하고…… 낭패가 따로 없다. 이제 어떡한담. 갑자기 머리통이 깨질 것 같다. 어여 들어가. 아뇨, 저흰 이제 가야죠. 말을 뱉고 보니 아차 싶다. 이게 아닌데, 휴가비며 우리 처지를 얘기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꼬이고 말았다. 햐, 이거 오늘따라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미치겠다. 그양 보내면 내가 서분해서 안돼. 밥이라도 묵고 가. 아, 아닙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너무 늦어서요. 허어, 고것참. 덕분에 나만 끼니 호강을 했구먼. 영감이 혜주를 넌지시 바라본다. 혜주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꺾는다. 사실 다시 온 건 이걸 깜빡해서요. 이기 뭐라? 어떤 사람이 전해달라고 부탁한 건데 차 안에 두었다가 그만. 동만의 아버지는 내막은 모른 채 건네는 물건만 바라본다. 약이구먼. 예, 어떤 사람이 어르신네와 약속했다고 집의 개를 끌고 가 만든 겁니다. 우리 개를? 네, 저기 키우던 개를, 하고 말하다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도저히 눈을 믿을 수 없다. 중년 사내가 끌고 간 개가 떡하니 개집 앞에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틀림없는 그 개다. 혹시 개를 다시 구입하셨나요? 원래부터 있던 개를 뭐 한다꼬 다시 사?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혜주도 믿기지 않는지 눈만 홉뜨고 있다.

 

우리는 한동안 차 안에 앉아서 머리만 싸쥐고 있다. 야, 이건 씨발 셜록 홈즈를 불러와야겠다, 뭐가 이렇게 정리정돈이 안되냐? 혜주가 말꼬리를 잡는다. 차근차근 추리해보자구. 너 그 자식한테 받은 명함 있지? 응, 주머니 어디에 있을 거야. 우선 그쪽으로 전화부터 걸어보는 거야.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결번이라는데? 다시 걸어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 뻔하네. 왜 있잖아, 겨울철에 농가 전선줄을 끊어가거나 곡식을 가마니째 싣고 가거나 교문을 뜯어가는 그런 놈들. 혜주의 말을 껌처럼 되씹어본다. 사내가 어딘지 미덥지 못한 인상이긴 했다. 그럼 개는? 당연히 도망쳐 온 거겠지. 잘 생각해봐. 혜주가 계속 말한다. 너, 그 개소주 마실 때 뜨거웠냐, 차가웠냐? 차가웠지. 원래 개소주를 바로 뽑아오면 뜨겁단 말야. 여름철 개 값이 올라가니깐 슬쩍 속인 거지. 요즘 웬만한 촌구석 노인네도 티브이는 보거든. 그러니깐 확실히 믿게끔 해놓고 속였다? 알아채지 못한 것이 원통해 어금니에 힘이 실린다. 동만이보다 먼저 칼침을 맞아야 할 짜식이 따로 있었네. 내 이 개잡놈을 그냥! 참아, 어차피 우린 손해본 거 없으니까. 왜? 생각해봐, 이 돌머리야. 그 새끼가 재주 부리려다가 개소주에 개까지 잃었으니 누가 이익이냐? 하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그 짜식이 나타날걸. 아니, 나타나기 쉽지 않을 거야. 사기 친 게 들통났는데 현장에 다시 돌아올 것 같아? 적어도 대갈빡 굴리는 놈이라면 당장 자리를 뜨지. 듣고 보니 혜주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우린 어쩌냐? 어쩌긴, 휴가야말로 게임오버지. 동만이 이 새끼도 못 만났는데? 어차피 동만이네 집에서 휴가 보냈잖아. 게다가 저 개소주에, 바다도 실컷 바라봤고. 뒷좌석에 놓인 개소주에 눈길이 간다. 한 상자는 어른 가져다주라며 건네는 바람에 마지못해 실은 것이다. 그래도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잖아. 그때 뿅, 문자 뜨는 소리가 난다. 준수 형이다. 이크, 큰일 났다. 니기럴, 이쪽으로 온다니. 이 와중에 형까지 내면 복잡하게 만드네. 갑자기 머리통에 수백개의 물음표가 떠다닌다. 그렇다고 앉아서 잡힐 수는 없는 일. 일단 튀고 보자. 모가지 쥐어잡힐 때 잡히더라도. 재빨리 시동을 걸고 출발을 서두른다. 혜주는 내 속도 모르고 창까지 내리며 지랄이다. 사실 처음 이 바다 바라봤을 때 끔찍했어. 근데, 이젠 안 그래. 까짓것, 속아줄래. 속은 셈 칠래. 속아도 얻는 건 있을 테니까. 혜주의 말을 들을수록 내 머릿속은 점점 먹먹,해진다. 차는 마을길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선다. 혜주는 이번에는 아예 창밖으로 상체까지 내민다. 야, 상만아. 바다가 왜 이리 보기 좋니? 너도 그러니? 마치 더러운 웅덩이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것 같다야. 어쭈, 이것 봐라. 하는 짓이 가관이다. 미친년처럼 양팔을 쫙, 펼치더니 야호, 소리까지 지르고 저 난리다. 정말 대략난감이다. 근데 이상하다. 그런 모습을 자꾸 보자니 마음이 짠해진다. 혜주의 모습이 마치 하늘을 날아오르려는 한마리 나비 같기만 하다. 은근히 마음 바뀐다, 니기미. 까짓것, 같이 날자. 날아서 일본을 지나 아프리카대륙을 지나 저 우주까지 확, 가버리는 거다, 씨발! 힘껏 액셀을 밟는다. 차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덩달아 개소주까지 혜주와 한 팀이 되어 몸을 흔든다. 아무래도 저 녀석 꼴로 보아 혜주 아버지한테나 보내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