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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끝나지 않은 전쟁

김원일 소설집 『오마니별』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바리데기와 흔들리는 세계체제-황석영론」 「나를 향한 주파수-서유미론」 등이 있음. netka@paran.com

 

 

“내가 태어난 한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되어 땅에 사는 친지에게 가호를 보낸다는 전설을 믿지. 당신 부모님도 별이 되었을 거야.” 김원일(金源一)의 데뷔작 「1961 알제리」(1966)의 한 대목이다. 이것은 전쟁고아 출신 주인공이 알제리의 낯선 항구도시에서 만난 베르베르인 매춘여성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였다.(『김원일 중단편전집 1』, 문이당 2005, 14면) 그런데 그로부터 40년쯤 뒤 이‘거짓말’은 진실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단편 「오마니별」(2005)은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안나 리와 조평안이라는 이름으로 헤어져 살았던 이수옥, 이중길 남매의 감격적 재회를 그린 작품이다. “엄마가 숨을 거둔 겨울밤이었다. (…) 천지강산에 우리 둘만 남기구 아바지가 오마니 데빌구 하늘에 가서 별루 떴어. 저기, 저기 오마니별 보여?”(52면) 백치노인 조평안은 어린 시절 누이에게 들었던‘오마니별’이야기를 기억해냄으로써 자신의 이름과 가족을 되찾는다. 이야기 또는‘거짓말’의 힘에 의지해 전쟁의 상처를 견디고 진실을 회복한다는 역설. 이것이 김원일 소설 40년의 요체다.

알다시피 김원일 문학의 세 꼭짓점은 분단, 가족 그리고 기독교적 구원의 문제다. 북파공작원 출신들의 잊혀진 삶을 복원한 「임진강」이나 북한선교 활동을 취재한 「카타콤」 등이 보여주듯 소설집 『오마니별』(강 2008) 역시 이 꼭짓점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표제작 「오마니별」이 그렇듯 분단의 상처 자체보다 그 상처를 극복하는‘이야기의 권능’을 부각하는 데에 더 많이 기울어 있다. 그것은 작가가‘분단문학’의 건재를 억지로 변호하려 들기보다 분단문제를 소설화하는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이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용초도 동백꽃」으로부터 실마리를 풀어보자.

이 작품은 액자식이다. 용초도의 어느 식당 겸 민박집을 찾아든 김노인과 이 집 주인인 과부 민이네 사이의 만남과 대화가 3인칭 관찰자 시점의 바깥이야기로, 김노인이 이곳 용초도에 오게 된 경위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안쪽이야기로 전개된다. 김은 한국전쟁 당시 이곳 용초도 인민군 포로수용소의 국군 행정병이었다. 린치에 시달리는 친공포로들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끼던 김은 수용소 내에서 일어난 폭동의 아비규환을 틈타 인민군 군관 송시혁을 탈출시킨다. 그는 김의 연인인 송순임의 오빠였던 것이다. 체제와 사랑 사이에서 서슴없이 후자를 택했던 김이 옛 연인을 만나기 위해 5년마다 한번씩 용초도 동백꽃을 찾는다는 설정은 물론 신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객관적 역사를 알리바이로 하는 이 설화적 사랑이야기를‘소설 자체의 메타포’로 받아들인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김노인이 전하는 이야기의 내용에 상관없이 이야기하는 김노인(작가)과 그 이야기에 매혹당하는 민이네(독자)의 관계가 오히려 작품의 핵심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민이네의 대사가 생기발랄한 구어인 데 반해 김노인의 대사가 느린 문어투라는 점 또한 주목대상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김노인과 민이네 사이의 교감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소설을 쓰는 작가와 그 소설에 홀린 독자 사이의 정서적 연대에 관한 비유담으로 이중공명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결말의 여운은 일품이다. “시원함과 섭섭함이 섞갈리는 묘한 감정에 목이 잠겨”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민이네에게 김노인은 “벙거지를 들썩하며” 말한다. “내 안 죽고 살아 있다면 오년 후 그때 또 오겠어여. (…) 또 헛걸음치더라도 반드시 꼭 올 거여!”(123면) 그러나 작가의 육성이기도 할 이 자신에 찬 약속 뒤에는 그만한 무게의 쓸쓸한 비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 약속이 굳센 것일수록 둘 사이의 교감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예감 또한 커지기 때문이다. 기억의 공유를 바탕으로 한 체험적 교감은 시간의 채찍 앞에 무력하다. 이 소설이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전쟁의 비극에서 꽃핀 사랑의 서사가 아니라 시간의 파괴력 앞에 전율하고 있는 노작가 김원일의 내면풍경이 아니었을까?

통영지방의 경주 김씨 집안 3대의 이야기를 한국근대사의 축소판으로 제시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도 이같은 맥락을 깊이 의식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글로 쓴다면 서책으로 한권 분량은 착실히 될”(184면) 이야기를 1인칭 구술회고로 압축한 이 작품은 「용초도 동백꽃」과 달리 듣는이의 얼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간간히 “자네” 또는 “배운 사람”으로 지칭되는 그는 과연 누구일까? 힌트는 제목에 있다.‘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 화자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고 청자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둘 중 어떤 경우라도 청자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남기는 존재, 그러니까 작가일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을 이야기의 커튼 뒤에 숨김으로써 이야기 자체를 전경화하고 있는 것이다. 「용초도 동백꽃」이 작중인물 김노인을 빌린 작가의 자기객관화 시도라면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작가의 자기은폐를 통한‘이야기’의 객관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작가란 무엇인가’혹은‘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안으로 물고 있다. 이쯤 되면 작가 김원일에게 이런 물음들이 육박해 들어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과 자신의 세대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리라는 예감 때문일까?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한 「화가의 집」이 열쇠다.

이 작품은 자기가 눈으로 본 것만을 그대로 그리는 어느 귀머거리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알레고리로 작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말하기 위한 우회로다. 몇장의 그림 말곤 세상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이 화가의 적막한 죽음은 요컨대, 세계를 모사(模寫)했을 뿐 창조하지는 못한 자의 죽음이다. 돌이켜보면 『오마니별』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의 모사자들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 상처를 공유하고 위로할 뿐 그 상처의 근원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주어진 분단현실의 세계는 그만큼 압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오마니별』에 임리한 소설가적 자의식의 흔적들은 분단현실의 모사적 소설화가 지닌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초도 동백꽃」이 쓸쓸히 암시하듯 분단현실의 소설화 자체가 치유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그‘기억의 공동체’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원일은 어느‘분단문학자’의 적막한 죽음을 목격했던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패착이 아닌가. 분단현실의 소설화가 치유력을 발휘하던 시대에 황혼이 찾아왔다고 해서 분단현실이 극복된 것도 아닐뿐더러 그가 일군 문학세계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패착의 원인은 작가가 분단현실의 극복 가능성보다 분단이 개인들에게 남긴 상처를 소설화하는 데만 무게를 둔 탓이 아닐까? 지금이야말로 분단극복의 통일문학을 개척할 절호의 기회다. 상처는 과거지만 분단모순은 현재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나 할 일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