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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S. 알린스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아르케 2008

촛불 이후를 고민하는 운동가들의 필독서

 

 

조효제 趙孝濟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hyojecho@skhu.ac.kr

 

 

조효제_급진주의자를위한규퀴즈 몇가지로 글을 시작하자. 업튼 씽클레어의 『정글』(The Jungle)에 나오는 시카고 빈민가에서 주민운동을 시작했던 직업혁명가는? 힐러리 클린턴이 대학 졸업논문으로 다뤘던 인물은? 버락 오바마가 시카고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했던 단체에 영감을 준 정신적 대부는? 미국 역사에서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에 비견되는 현대의 선동가는? 나온 지 30년 가까이 되지만 아직도 중판을 거듭하고 있는 베스트쎌러를 쓴 미국의‘현직’시민운동가는? 답은 쏠 알린스키(Saul D. Alinsky)이다. 그가 타계하기 한해 전인 1971년에 낸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Rules for Radicals, 박순성·박지우 옮김)이 이제야 우리말로 나왔다. 알린스키는 살아생전에도 숱한 화제를 뿌렸지만 그의 명성(또는 악명)은 사후에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지금도 『아메리칸 데일리』(American Daily), 『아메리칸 싱커』(American Thinker) 같은 미국 우파언론들은‘공산주의자’또는‘공산당 동조자’였던 알린스키의 사상적 후예인 오바마를 경계해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평자는 최근 한국에 유학 온 필리핀 학생에게서 그곳 시민사회에서도 알린스키의 지역운동모델을 바이블처럼 받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알린스키가 왜 그리 중요한가? 그것은 그가 현대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사회에서 대단히 독창적이고 인상적인 사회운동을 실천하고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운동론을 정리해서 남겼기 때문이다. 그를 간단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굳이 표현한다면‘체제내 운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경지를 열어젖힌 사회운동가’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가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비사회주의 좌파 지도자”라는 평을 듣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10면). 그는 정치적 현실주의자로서 언제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우리에게 다그친다. 사람들이‘해야만 하는’각도가 아니라, 사람들이‘하고 있는’각도에서 세상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 세상은 이익으로 움직여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변혁운동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린스키가 보기에 세상은‘가진자’(Haves),‘못가진자’(Have-nots),‘조금 가지고 있지만 더 갖고 싶은 자’(Have-a-little, Wants mores)로 이루어져 있다. 가진자는 지키고 싶어하고, 못가진자는 바꾸고 싶어한다. 그런데‘조금 가지고 있지만 더 갖고 싶은 자’, 즉 중산층은 정신분열증에 걸릴 지경이다. 더 갖고 싶어서 세상을 바꾸는 것에 찬성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몫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다. 수적으로 제일 많은 중산층은 따라서 걱정이 끊이지 않는 집단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도 수단과 목적을 이리저리 재고, 좌고우면하느라 행동이 제일 굼뜨다. 그러나 중산층을 배제하고는 혁명을 이뤄내기 어렵다. 알린스키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한다. 활동가, 혁명가, 조직가들은 중산층의 이런 약한 고리를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알린스키 병법’이라고 불리는‘수단과 목적’에 관한 11대 규칙이 등장한다. 얼핏 마끼아벨리를 연상시키는 주장들이지만 전설적인 테제답게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의 수준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첫째 규칙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수단과 목적의 윤리에 대한 사람의 관심은 이슈에 대한 그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반비례한다”(69면).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을 다룰 때엔 도덕심에 충만해서‘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따위의 사치스런 우문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린스키는‘이 특정한 목적이 이 특정한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만이 활동가에게는 유일한 질문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이런 식으로 책의 전반부는‘알린스키표’이론을 다루고, 후반부는 그의 경험을 야전교범처럼 정리해놓았다.

평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현실주의, 비(非)주지주의, 경험주의, 실용주의의 특징을 가진 앵글로쌕슨형 급진운동의 한 전형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문제가 있는 현장에 달려가 주민들을 직접 조직하고 그 지역에서 끝장을 보는 운동모델이다. 이런 식의 행동에서 이론이나 이념은 뒷전이다. 알린스키에게 근본진리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민중에 대한 믿음뿐이다. 이때‘진리’는 미리 주어진 게 아니라 민주적 행동 속에서 사람들이 발견해나가는 어떤 유동적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알린스키식 접근이 우리 같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과연 얼마나 적용 가능할까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국가적 의제와 중앙정치형 구심력을 둘러싼 거시적 투쟁에 익숙한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알린스키는 대단히 도전적인 그리고 패러다임에 관계되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중운동을 급진운동으로, 시민운동을 개량운동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일반 시민운동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의 체제내적 급진성을 강조한 그의 입장은 하나의 대안모델로 고려될 수 있다. 추천사를 쓴 오재식(吳在植)의 회고에 따르면 알린스키는 1971년에 일본과 한국을 잠시 방문했다. 그는 일본사회에서 차별받으며 살고 있던 가난한 재일교포들의 동네를 방문하여 그들을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의 집에서 쥐를 다 잡아서 차에다 싣고 토오꾜오의 긴자(銀座)거리에 가서 다 풀어놓으시오. 거리의 잘난 사람들이 놀라면‘뭐 그렇게들 놀라시오. 우리는 이들과 같이 사는데요’하시오”라고 말이다.(16면) 과연 알린스키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은 씌어진 지 오래된 책이지만 이 땅에서의 현재적 의의가 적지 않다. 촛불집회를 염두에 두고 읽더라도 논쟁적인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예컨대 다음 구절은 어떤가. “일단 싸움이 시작되어 어떤 전술적 행동이 채택되면, 갈등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너무 오래 끄는 갈등은 지겨운 일이 된다.”(231면) 촛불을 처음 밝혔던 청소년들을 상기시키는 부분도 있다. “나는 현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젊음의 가장 귀중한 부분 중 하나인 웃음을 꼭 간직하기 바란다. (…) 함께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들인 웃음, 아름다움, 사랑 그리고 창조의 기회를 일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37면) 내년이면 알린스키 탄생 100주년이다. 촛불 이후의 시민사회운동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함께 토론하면서 읽어야 할 사회운동론의 고전이다.

사족. 장왕록-장영희, 이윤기-이다희처럼 문학에서는 아버지와 딸이 함께 작업한‘부녀공역’의 사례가 있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일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