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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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대 金成大

1972년 강원도 인제 출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재학중. ksdgod@hanmail.net

 

 

 

제5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외 4편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날마다 나비의 무늬를 읽으면서

서부음악을 듣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채식을 주로 하는 편이지요

우연히 상추에 붙은 나비 알을 먹고 나선

나도 모르게 뒤꿈치가 들려요

그럴 땐 빠리나 서귀포가 생각납니다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어떤 날은 터널이 계속 이어지기도 하지요

터널 저쪽엔 비가 오기를 바라지만

터널 그리고 터널, 뿐이지요

물잠자리의 날개와 독버섯의 얼룩이

눈앞에서 맴돌아요 그럴 땐

아주 먼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어집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책방에 갑니다

거기서 사랑의 묘약을 찾은 적이 있어요

부끄럽게도 마음이 설레었던 거지요

그렇지만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1는 걸 믿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박쥐들과 부릅뜬 부엉이들이

나의 행운을 뜯어먹으러 달려들 거예요

 

가끔 꿈속에서 운 날 아침은 눈이 맑습니다

그럴 땐 눈 위에다 예쁜 나비를 새기고 싶어요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날개가 접혔다 펼쳐지겠지요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언제 한번 놀러 안 오시겠어요?

 

 

 

물옥잠

 

 

그녀들이 하얀 발을 내밀었고

나는 번갈아 핥아주었다

왼발의 여자에게선 복숭아향이 났고

오른발의 여자에게선 장마비 냄새가 났다

새빨간 매니큐어의 밤

발톱들이 무척이나 반짝거려 먼 별들도 비출 듯한데

그녀들은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서

물옥잠에 대해 말했다

주렁주렁 꽈리를 튼 혹과 꽃들의 전

성기에 대해

부레가 부푸는 늪의 밤에 대해

그녀들의 말은 스펀지처럼 가볍고 구멍이 많았지만

귀기울여 듣다보면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철새가 날고 풀벌레가 울고 수초들이 자라

나의 방은 고요한 습지로 변해갔다

물옥잠의 자맥질에 밤은 깊어가고

그녀들의 발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나는 달빛을 번갈아 핥으며

새벽이 벗겨질 때까지 그녀들의 상상 속에 머물렀다

 

 

 

일월식물원

 

 

삼거리에 용달차가 멈춘다

얼기설기 묶인 가구들이 잠시 기울고

액자 속 사진에서 머리칼이 휘날린다

저 이삿짐의 주인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낙향한다고

함부로 단정지어본다

국도는 매일 고만고만한 차들을 고만고만한 속도로 실어나른다

하루를 기점으로 순환하고 있는 걸까

이 삼거리는 세트장인지도 모른다

나는 꽃과 나무를 돌보는 역할을 한다

주기적으로 새순과 어린 나무들이 실려오고

아무도 그들의 생일을 기념하지 않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신생아실처럼 들끓는다

내가 그리 비중있는 배역은 아닌 것이

그들은 스스로 잘 자라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의 손질과 이동을 도울 뿐이다

 

시절이 새초록해지면 아이들이 소풍을 온다

도시락을 흔들며 목련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함께

삼거리를 건너온다

아이들은 나무를 흔들고 꽃을 쥐었다 놓지만

나는 내버려둔다

천적들은 서로를 아름답게 한다고 어딘가에서 읽었다

아이들은 꽃을 닮고 꽃은 아이들을 닮고

그런 밤이면 달무리가 겹으로 서고

삼거리에 초승달과 그믐달이 함께 뜬다

 

 

 

빨래하는 여자

 

 

모서리에 난 창으로 햇살과 햇살이 섞인다

여자는 세제를 넣으며 생각한다

그래 너무 기울어졌던 거야 상처마저 비스듬하도록

그런데 그 상처들은 다 어디로 새나갔을까

어느 틈에 단단한 솔기가 풀리면서

상처받지 않겠다는 마음까지 풀어지고

 

빙글빙글 드럼 속에서 색색 꽃들이 피고 지고

엉킨 흔적들이 흔적을 지운다

가만 보니 흰 빨래도 섞여 있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진 속의 얼굴

그때 내 표정은 떨리지 않았는데

어째서 배경만 번졌던 것일까

그의 손이 떨렸던 걸까

 

탈수는 늘 힘겹다

물기를 짜내고 건조해지려면, 가벼워지려면

온몸을 악다물고 덜덜 떨어야 한다

한번 끊어진 실은 다시 이어도 매듭이 남는다

눈으로 안 보이더라도 손으로는 느낄 수 있다

옹이진 기억들로 피로를 느낄 때

세탁기가 멈추고 음악이 흘러나온다

 

여자는 나비처럼 가벼운 손짓으로 빨래를 넌다

구겨지거나 뒤틀리지 않도록

작은 빨래도 탈탈 정성스레 편다

숨겨둔 열정이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다만 잔설처럼 남은 햇살이 좋아서라고

그건 외로움이 아니라 심심함이라고

 

 

 

월롱역

 

 

오래된 창고는 비밀스럽다

창고를 에워싼 갈대들이 수런거리고

꽃들은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

눈 뜨고 자는 달개비 앞을

발꿈치 들고 지나는 달빛

먼지 쌓인 비밀이 달빛에 살짝 드러난다

이따금 기차가 지나가면서

추억을 완행 연주하고

바람은 한소절씩 베어넘긴다

 

언젠가는 비밀도 곰팡이 핀다

비밀을 지키려는 생각도

다시 들추길 바라는 마음도

언젠가는 곰팡이 핀다

타다 남은 양초처럼 뭉툭해진다

달을 희롱하듯

달이 꽃을 희롱하고 꽃이

달을 희롱하듯

한시절 놀았으면 그뿐

 

창고에 걸린 달빛이 촛불처럼 떨린다

잠시 푸른곰팡이에 귀기 어리는 듯하지만

저 달에 단풍 들면

곧 기차도 뭉툭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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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야의 판화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