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김사과
1984년 서울 출생. 2005년 제8회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미나』가 있음. dryeyed@gmail.com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나와 b는 쌍둥이다. 아니 진짜 쌍둥이는 아니다. 근데 맨날 붙어 다녔더니 진짜 쌍둥이가 되었다. 우리는 노래도 지었다. 우리는용감한쌍둥이형제엄마배를가르고나온우리엄마는배가찢어져서죽었다네 우리는 어디서나 그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나는 미미 b는 슈슈를 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들의 노래를 싫어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싫어했다. 그러나 괜찮았다. 우리는 아주 명랑했다. 우리는 아주 건방졌다. 우리는 꿈이 있었다. 우리는 온 세상을 다 차지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다 죽일 생각이었다. 옛날이야기다.
*
난 네가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b가 내게 말했다. 첫사랑도 나한테 똑같이 말했어. 내가 말했다. 근데 결국 안 죽었어. 지금도 멀쩡히 살아 있다니까. 아냐 죽을 거야. b가 말했다. 내가 죽일 거야. 어쨌든 나는 그 뒤로 내 첫사랑을 못 봤다.
*
어떤 날 나와 b는 아주 사이가 좋다. 우리는 같은 냄새를 풍긴다. 식당에 가면 같은 것을 시킨다. 같은 빨대를 핥아먹는다.
*
이제 나와 b는 더이상 어린이가 아니다. 어른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다. 아빠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거지도 아니며 부자도 아니고 천사를 본 적도 없고 전쟁을 겪은 적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루하다. 매우 몹시 지루하다. 지루하다. b가 가스등에 돌을 던지면서 말했다. 불이 꺼지고 검은 밤 속에서 불꽃과 연기가 피어났다. 심심하다. 나는 자판기를 부쉈다. 나는 바퀴벌레가 가득 든 커피와 설탕을 바닥에 뿌리고 그 위에 물을 섞어 커다란 커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웅덩이는 아주 달았다. 그 위로 택시가 지나갔다. 택시 바퀴가 커피를 밟고 커피를 마시며 달려갔다. 그날 밤 어디에서나 커피 냄새가 났다. b가 재채기를 하더니 나를 때렸다. 힘이 세지고 싶다. 나는 생각했다. 남자애들처럼 힘이 세지고 싶다. 그렇게 말했다. 권투를 배우자. 그래 배우자. 힘이 쎄지자. 하지만 돈이 없는데. b의 눈썹이 가라앉았다. 네 눈썹은 엄청 이쁘다.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권투선수를 꼬시는 거야. 그러니까 내 이쁜 눈썹으로? 응, 어때? 자신있지. 일주일 뒤 우리는 만났다. b는 전직 유도선수의 뺨을 핥고 있었다. 나는 권투 도장에 다니는 깡패랑 팔짱을 끼고 줄담배를 피우며 길바닥에 침을 뱉고 있었다. 안녕. 안녕. 우리는 인사했다. 전직 유도선수는 머리에 필승이라고 씌어진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깡패는 반짝이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미안, 권투도장이 너무 멀어서 집 근처의 유도학원에 가봤어. b가 말했다. 아냐, 괜찮아. 내가 대신 해냈어. 내가 말했다. 아냐, 걔는 깡패잖아. b는 냉정했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권투할 줄 아세요? b가 깡패에게 물었다. 조금이요. 깡패가 대답했다. 보여주세요. 깡패가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그의 팔에 가득 새겨진 멋진 문신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깡패는 강아지처럼 가볍게 튀어올라 멋진 잽과 훅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두 박수를 쳤다. 전직 유도선수도 브라보를 보냈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예요. b가 전직 유도선수에게 말했다. 전직 유도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다. 뜨거운 기술을 보여주세요. 버터처럼 부드러운 걸로요. 아아. 당신의 기합소리를 내 귀에다가 속삭여주세요.
*
어떤 날 나와 b는 사이가 나빠졌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나빴다. 그래서 나는 깡패와 놀기 시작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깡패와 놀았다. 깡패의 몸은 튼튼했고 문신은 반짝거렸다. 나는 깡패가 좋아졌다. 어느날 깡패가 나에게 본드 부는 법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옷을 다 벗고 나란히 손을 잡고 누워 비닐봉지를 뒤집어썼다. 비닐봉지는 흰색이고 롯데마트라고 씌어 있었다. 우리는 온 얼굴에 본드가 범벅이 되어 이천원짜리 천국으로 갔다. 천국은 티타늄화이트였다. 나는 천국에서 b를 만났다. b는 초콜릿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상자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리를 벌렸다. 깡패가 페니스를 내 몸 속에 밀어넣었다. b가 녹아서 사라졌다. 우리는 동시에 끙,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모두가 대만족이었다. 이천원짜리 천국은 두시간 후 온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작은 문제였다. 깡패가 본드를 또 하고 싶다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
어느날 깡패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기뻤다. 나도 사랑해요 당신을요. 우리는 체리소주를 마셨다. 깡패가 말했다. 나 때문에 당신과 b의 사이가 더 나빠지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너무 미안해요. 괜찮아요,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깡패는 너무 미안했다. 정말 미안했다. 미안해요. 너무 미안해진 깡패는 너무 미안해서 나를 때렸다. 나는 코가 부러졌다. 나는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면서 도망쳤다. 그리고 다음날 마스크를 쓰고 b를 찾아갔다. 안녕. 안녕. b는 나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마스크를 벗었다.
*
우리는 화해했다. 나는 깡패와 헤어졌다.
*
b는 샤넬에서 일했다. 그것은 술집의 이름이다. b는 구찌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커피숍의 이름이었다. 샤넬 옆에는 커다란 공원이 있었다. 공원 꼭대기에서는 서쪽 바다가 내려다 보였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거지와 미친 사람들이 있었다. 할아버지들은 공원 입구에 박정희의 사진을 걸어놓고 절을 했다. 할머니들은 집 뒷마당에다 양귀비를 키웠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샤넬의 화장실에서 쎅스를 했다. 거지들은 맨홀 뚜껑을 훔쳐다 팔았다. 미친 사람들은 맨홀 속에 빠졌다. 어느날 맨홀 속에서 미친 사람이 굶어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불쌍한 미친 사람은 너무 배가 고파 소매 끝을 갉아먹었다. 미친 사람들은 언제나 웃으면서 화를 내고 신발을 잃어버리고 잠바를 세개씩 입었다. 피부병에 걸린 개가 매일 밤 벚꽃나무 밑에 누워 울었다. 매일 밤 나는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b를 기다리며 이 모든 것을 보았다.
*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있으면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지루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너는 어느 대학에 다니느냐. 내가 대답했다. 나는 대학에 다니지 않습니다. 내 딸은 연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씨티은행에서 인턴을 한다. 너는 뭘 하느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내 손자는 하바드와 스탠포드에 동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다. 너는 꿈이 뭐냐. 나는 아무런 꿈도 없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실망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그 개새끼가 미웠다. 언젠가 그 개새끼한테 복수할 거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
샤넬의 사장님은 서울에서 왔다. 서울 이야기를 하도 많이 해서 우리는 그를 서울아저씨라고 불렀다. 서울아저씨는 한달에 한번씩 서울에 갔다. 내가 이번에 서울에 가서는 말이다. 프랑스인과 같은 식탁에서 싱가포르 쌘드위치와 타이거 맥주를 마셨다. 그럴 때 나는 봉주르 꼬망딸레부라고 말한다. 그 정도는 세련된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세련된 서울 시민이 되고 싶다.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
*
문을 열면 풍겨오는 오래된 맥주 냄새와 닭튀김 냄새는 언제나 똑같고 더럽고 푹신한 의자와 썩어서 흔들리는 나무칸막이가 바로 샤넬이다. 저기 카우보이모자를 살짝 눌러쓰고 칵테일 컵을 닦는 아가씨가 바로 나의 b다. 내 모자 이쁘지. 훔쳐왔어. b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할 거야. 내가 대답했다. 뻥치시네. 진짜야 할 거야. 만화책이나 내놔. 그게 니 꺼니. 응, 내 꺼야! 그렇구나 몰랐어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삼번 테이블에서는 멋진 남자가 멋진 여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멋진 남자의 입에서 닭고기가 튀어나와 멋진 여자의 손등에 달라붙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텔레비전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가수는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었다. b가 그걸 보더니 소리를 꺅 지르며 텔레비전을 향해 달려갔다. b는 텔레비전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 새끼야 내 모자를 내놔! b의 머리에 카우보이모자가 텔레비전 속에도 카우보이모자가 있었다. b의 모자는 파란색이었고 텔레비전 속 모자는 빨간색이었다. 사장님 텔레비전에 물을 좀 뿌려도 될까요? 우리는 모두 b가 너무너무 심심해서 그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저 나쁜 자식을 녹여 없애버리겠어. 그때 b와 같이 일하는 남자 고등학생이 가게로 들어왔다. 남자 고등학생은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대신 술집에서 일한다. 누나 거기서 뭐 해요. 남자 고등학생이 이쑤시개처럼 세운 머리를 b에게 들이대며 물었다. 누나 취했구나. 누나는 술주정도 귀여워요. 근데 누나 팬티 보여요. b가 말했다. 너 싸구려 젤 좀 머리에 바르지 마. 고약한 냄새에 편두통이 생기겠다. 누나 전 젤 안 써요. 전 일제 왁스 써요. 니 머리는 마룻바닥이 아냐. 누나 왁스 몰라요? 누나 머리에 바르는 왁스가 뭔지 몰라요? 너 나한테 왜 존댓말 쓰냐. 너 나한테 유감 있냐. 아니에요 누나. 너 나한테 왜 누나라고 부르냐. 너 나한테 유감 있냐. 아니에요. 누나 왜 그래요. 누나. 이 새끼가. 에이 누나 삐졌구나. 누나. 화내지 마요. 싫다. 에이 누나. 남자 고등학생이 b의 팔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남자 고등학생이 주문처럼 누나를 외쳤다.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b는 정말 기분이 언짢아졌다. 기분이 언짢아진 b가 텔레비전에서 손을 떼고 카우보이모자를 바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모두 겁에 질렸다. 그게 다 남자 고등학생 때문이었다. 남자 고등학생은 계속해서 누나라고 말했다.
*
일곱시 반에 젊은 여자가 와서 소주 세병을 마시고 갔다. 여자는 말했다. 나는 스물두살입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재수생입니다. 나는 오늘 학원에 갔습니다. 나는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여덟시 반에 젊은 남자가 와서 소주 세병을 마시고 갔다. 남자는 말했다. 나는 스물세살입니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대학생입니다.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 나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싫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니고 싶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아홉시 반에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와서 소주와 맥주를 열병 마시고 갔다. 여자와 남자는 말했다. 우리는 노래방에서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결혼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고 싶습니다.
열한시 반에 나이 든 남자가 와서 소주 한병을 마시고 갔다. 남자는 말했다. 나는 회사에 다닙니다. 나는 딸이 있습니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내 딸을 미국 대학에 보내야 합니다. 나는 빚이 많습니다. 나는 오늘 회사에 갔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새벽 두시에 술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죽고 싶은 사람 아홉명과 살고 싶은 사람 아홉명 다 합쳐서 아홉명이 샤넬에 왔다 갔다. b가 마지막으로 역시 술에 취한 죽고 싶은 남자를 내쫓고 샤넬의 문을 닫았다.
*
나는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b를 기다리고 있었다. 깡패에게서 전화가 왔다. 깡패는 울면서 내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깡패가 보고 싶었다. 우리는 울었다.
*
나와 b는 오래된 숲으로 소풍을 갔다. 숲에는 연두색 초록색 갈색 빨간색 검정색이 다 있어서 중학생이 열심히 그린 수채화 같았다. 우리는 풀 위에 누웠다. 햇살은 두꺼운 스웨터였다. 햇살은 우유를 듬뿍 넣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다. 햇살은 인적 없는 바닷가의 파도였다. 햇살은 포근하고 사르르 녹고 조용하고 파란색이었다. 스웨터 아이스크림 파도가 우리의 창백한 팔을 쓰다듬었다. 이런 날에는 볕이 잘 드는 창가, 커튼을 활짝 열고 정신이 나갈 때까지 창밖을 쳐다보는 거야. b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졸려서 눈을 감았다. b가 일어났다. b가 숲 속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쓰레기가 너무 많아. b가 중얼거렸다. 비닐봉지종이컵신발밑창비닐봉지또비닐봉지씨발! 나뭇가지에 찔렸어! 그러나 b는 계속해서 열심히 기어갔다. 여기는 어둡고 축축해. 너무 멀리 가지 마. 나는 일어났다. 멀리 안 가. 그럼 나 무서워. 나도 b를 쫓아 기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구멍 난 철조망을 헤치고 깻잎밭으로 들어갔다. 깻잎 냄새가 너무 진해서 숨이 안 쉬어져. 내가 말했다. 깻잎들이 너무 파래서 내가 빨개지는 것 같아. b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가에는 부끄러운 들꽃들이 옆에서 옆으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b는 개처럼 엎드려 킁킁 냄새를 맡았다. 나는 b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쉿! b가 내 입을 막았다. 저기 미친 여자가 이리로 걸어오고 있어. 나는 고개를 들어 미친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웃으면서 화를 내고 있었고 신발이 없었고 잠바를 세개 껴입고 있었다. 과연 미친 여자였다. 여자의 손에는 롯데마트의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쓰레기를 꺼내 비닐봉지에 담고 다시 비닐봉지에서 쓰레기를 꺼내 주머니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은 롯데마트의 비닐봉지였다. 나는 그것밖에 보지 못했다. 나는 깡패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그러자 b가 나한테 미친년이라고 했다. 내가 왜 미쳤어? 나는 소리쳤다. 나는 신발도 신고 있고 울 땐 울고 웃을 땐 웃어. 내가 왜 미쳤어? 나는 잠바를 딱 하나만 입고 있어. 그런데 내가 왜 미쳤어? b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왜 미쳤어? b가 깻잎을 잡아뜯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도둑질이야. 도둑질은 나쁜 짓이니까 훔치는 거야. b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미친 여자를 향해 깻잎을 뿌리며 달려가다가 돌에 걸려서 넘어졌다. 나는 웃었다. 봐, 너는 울다가 웃잖아. 그러니까 미쳤다는 거야! b는 일어났다. b의 앞에 미친 여자가 있었다. b가 미친 여자를 보고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악! 미친 여자가 두 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자가 놓친 롯데마트 비닐봉지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았다. b는 도망치는 미친 여자를 향해 더러운 욕을 퍼부었다. 나는 롯데마트 비닐봉지를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깡패가 보고 싶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내 인생이 너무 좆같다고 생각했다.
*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은 판자촌을 지나 판자촌 옆에 들어선 새 래미안과 새 자이를 지나 편의점에서 가야토마토농장을 사서 나누어 마신 다음 김밥천국에 가서 김밥을 먹었다. 우리는 중국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중국산 플라스틱 젓가락으로 중국산 쏘시지가 들어간 김밥을 중국산 단무지와 중국산 김치와 함께 먹었다. 천국에 김밥천국이 있다고 생각해봐. b가 말했다. 아니면 김밥천국이 진짜 천국이라고 생각해봐. 그것은 중국식 대화였다.
*
나와 깡패는 다시 만났다. 깡패는 전보다 더 쉽게 슬퍼졌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깡패가 살고 있는 뉴타운모텔 203호로 갔다. 택시비는 내가 냈다. 문을 열자 니스 냄새가 났다. 나는 방 한구석에 흰색 페인트통이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깡패를 보았다. 깡패가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본드가 가득 쌓여 있었다. 훔쳐왔어. 우리 형이 철물점을 한다. 깡패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
내가 좋아하는 냄새가 뭐냐 하면... 세탁소 냄새 같은 거... 약국 냄새 같은... 드라이클리닝 냄새... 씰리콘본드 냄새... 에폭시본드 냄새... 스틸본드 냄새... 니스 냄새... 벤젠 냄새... 휘발유 냄새... 나프탈렌 냄새... 바퀴벌레약 냄새... 감기약 냄새... 박카스 냄새... 토끼코크 냄새... 록타이트 냄새... 알테코 냄새... 블리치... 진짜 멋진 블리치 냄새... 신나 냄새... 테라핀 냄새... 매니큐어 냄새... 아세톤 냄새... 바셀린 냄새... 씰리카겔 냄새...
*
내..................................가...............지............................금....................무......슨...................말..........................을.........................하...................그.........................러.....니까................내...........가..................지....................그................러니...................까........................그..............러..........................................니..........까...................내............................가.......하........................................려.........................
*
한달에 한번 서쪽 항구에 중국에서 온 회색 배가 도착했다. 그러면 삼일 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새벽까지 공원에서 떠나지 못했다. 기분이 아주 좋아진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거지 미친 사람들과 다 함께 밤새도록 기분이 좋았다. 어느날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b를 기다리다가 회색 모자를 쓰고 등에는 작은 배낭을 메고 공원을 빠져나오는 깡패를 보았다.
*
그리고 깡패가 본드를 끊었다. 깡패의 눈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깡패는 쉽게 화를 냈고 아주 빨리 말했다.
*
중학교때과학시간에오징어를해부했는데갑오징어고무장갑초고추장선생님이오징어를잡더니눈똑바로뜨고봐라이게오징어의눈이다부르스타스뎅냄비나무도마냄비에물을붓고끓이는데냄새가아주과학실반장엄마가초고추장을만들어와서먹는데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그뒤로나는내가오징어를좋아한다고생각했어그뒤로칠년동안이나진짜좋아한다고오징어를진짜나사실은오징어를싫어하는데진짜오징어오징어오징어지금도오징어만생각하면오징어오징어오징어죽도록화가난다
*
나는 매일 깡패를 만났다. 나는 매일 깡패를 만나서 본드를 불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본드를 불었다. 슬픔도 배고픔도 기쁨도 배고픔도 분노도 슬픔도 실망도 희망도 배고픔도 모두 본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깡패가 나를 샤넬 앞에다가 데려다 주고 검은 자동차가 도착해서 깡패는 그것을 타고 어디로 갔다. 나는 흘러내린 본드처럼 벤치에 딱 달라붙어서 잠바를 세 겹을 입고도 덜덜 떨면서 신발이 벗겨진지도 모르고 재채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무서워져서 꽥꽥 소리 질렀다. b가 나오면 우리는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가 오면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b가 돈을 냈다. 우리는 나란히 버스 뒷좌석에 앉았다. b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b는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모르는 사람에게 웃었다. 그러면 나는 울었다. 왜냐하면 나는 쉽게 슬퍼졌고 아주 천천히 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나 요즘은 잘 기억이 안 나. 나 그래서 요즘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 나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나 까먹으면 어떡하지 걱정이 돼. 니가 나를 까먹으면 어떡하지? 니가 더이상 오늘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더이상 오늘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너는 이거 다 기억할 수 있어? 지금 이거 다 기억할 수 있어? 아까 거울을 봤는데 내가 안 보이는 거야. 그래서 아 이건 꿈이구나 생각했어. 근데 너무 무서운 거야. 그래서 도망갔어. 도망갔는데 이게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하지만 거울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거야. 거울만 있는 거야. 나만 없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런데 그럼 그게 거울인가? 내가 벽을 거울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종이를 거울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건 어쩌면 텔레비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나는 텔레비전에게 외쳤어. 반사. 그러니까 텔레비전이 외쳤어. 반사. 아아 텔레비전은 내 얼굴을 먹고 내 말을 뱉어냈어. 그래서 나는 내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 나는 말했어. 그러자 텔레비전도 말을 했어. 무서웠어. 내가 울고 있는데 갑자기 니가 나타났어. 그리고 니가 내 거울이 되어주겠다고 했어. 나는 웃었어. 그랬더니 니가 웃었어. 내가 머리를 까딱했어. 니가 머리를 까딱했어. 내가 손뼉을 쳤어. 니가 손뼉을 쳤어. 내가 하하하 웃었어. 니가 하하하 웃었어. 내가 왼발을 들었어. 니가 오른발을 들었어. 나는 무서워졌어. 너는 나는 똑같았어. 나는 내가 넌지 니가 난지 몰랐어. 그건 하나도 재미가 없었어. 텔레비전이 고장났는데 재밌을 리가 없잖아. 내가 말했어. 아니 니가 말했어. 아니 내가 말했어. 아니 니가 말했어. 다시 내가 말했어. 다시 니가 말했어. 그리고 내가 말했어. 그리고 내가 말했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어. 아니 그건 꿈이 아니었어. 나는 단지 본드를 불고 거울 앞에 앉아 있었던 거야. 거울에는 내가 비치고 있었어. 그런데 나 거의 십분 동안 아무것도 몰랐어.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거기가 어딘지도 몰랐어. 나는 내가 몇살인지도 모르고 침대 위에 빨가벗고 누워서 노래 부르는 남자가 누군지도 몰랐어. 나는 심지어 한국말도 몰랐어.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그래서 나는 그냥 거울을 쳐다봤어. 하지만 나는 거울이 뭔지도 몰랐어. 거기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어. 본다는 게 뭔지도 몰랐어. 생각을 하려고 했는데 머리가 너무 아팠어. 아니 생각을 할 줄도 몰랐어. 몸을 움직일 줄도 몰랐어. 나는 내 입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았어. 그건 너무 신기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어. 그것도 신기했는데 입에서 떨어지는 게 뭔지 몰랐어. 머리가 너무 아팠어.
*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어. 그 순간에 떠오른 생각은 나도 아니고 침도 아니고 입도 아니고 거울도 아니고 깡패도 아니고 너였어, b.
*
그날은 b가 쉬는 날이었다. 나는 b와 놀기로 했는데 깡패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와 b와 깡패는 다 함께 시립대공원에 가게 되었다. b는 투덜거렸고 깡패는 기가 죽어 있었다. 깡패는 빨간 눈으로 계속해서 코를 풀었고 뭐든지 다섯번씩 말해야 알아들었다. b는 보라색 나일론 잠바에 망사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아주 예뻤다. 나는 반스타킹을 신고 고구마를 먹었다. 날씨가 좋았다. 나는 신이 났다. b가 낮고 음침한 목소리로 박자도 없이 중얼거렸다. 사막에샘이넘쳐흐르리라사막에꽃이피어향내나리라사자가어린양과뛰놀고어린이도함께뒹구는참사랑과기쁨의그나라가이제속히오리라. 우와 그게 뭐야? 찬송가야. b가 음울하게 대답했다. 내가 손뼉을 쳤다. 우와 요새 교회에선 힙합을 하나 보지? 어릴 적에 성가대를 했는데 쏘프라노를 안 시켜주는 거야. b가 말했다. 그때부터 교회에 안 나갔어. b가 음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버스가 멈춰 섰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쓸쓸한 기분으로 텅 빈 왕복 십육 차선 도로를 가로질렀다. 깡패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b의 보라색 나일론 잠바가 센 바람에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나는 웃었다. 깡패는 내가 왜 웃는지 몰랐다. b는 알았지만 웃는 대신 찡그렸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비가 내리다가 공원 관리소 앞을 지날 때에는 웅장한 햇살이 비추다가 주차장을 가로지를 때는 다시 온 세상이 회색이 되었다. 바람은 계속 세게 불었다. b가 코를 풀었다. 우리는 호수를 봐야 해. b가 말했다. 뭐라고요? 깡패가 물었다. 우리는 호숫가에서 도시락을 먹을 거야. b가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요? 깡패가 그렇게 물었다. 우리는 호수를 봐야 해. b가 말했다. 뭐라고요? 깡패가 물었다. 뭐라고요? b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호수가 가까워올수록 바람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b의 잠바가 찢어질 거라고 확신했다. 깡패의 빨간 눈이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너무 추워서 온 얼굴이 갈기갈기 찢어져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너무 추워서. 깡패가 코를 훌쩍였다. 미쳐버릴 것 같아. 그래, 나는 미쳐서 너를 호수에 빠뜨려 죽여버릴 거야. b가 말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깡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구겼다가 폈다.
*
호수는 다이아몬드 모양이었고 초록색이었다. 오리가 길게 자란 갈대 사이를 둥둥 떠다녔다. 우리는 허리를 굽히고 그 아름다운 초록색 호수를 내려다보며 고구마를 먹었다. 그리고 됐다. 가자. 우리는 대공원 휴게실로 갔다. 대공원 휴게실에서는 오줌 냄새가 났다. 우리는 손발을 부들부들 떨면서 차가운 김밥을 먹었다. 의자는 냉장고같이 싸늘하고 김밥은 냉장고 맛이 났다.
*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b는 더욱더 깡패를 미워하고 그래서 깡패는 더욱더 기가 죽었고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너희가 나의 소중한 휴일을 망쳐놓았어. b가 화가 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뭘 잘못한지 몰랐다. 나도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깡패는 계속해서 코를 풀었다. b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깡패를 쳐다봤다. b는 화를 내며 버스에서 내려 계속해서 화를 내며 시끄러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b가 소파에 앉자마자 커다란 검은 파리가 b의 입술에 앉았다. b가 비명을 질렀다. 나와 깡패는 커피를 시켰다. b의 입술에서 쫓겨난 파리는 탁자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느릿느릿 기어다니기도 하고 낮고 느긋하게 빙빙 돌다가 b의 팔뚝에 사뿐히 내려앉기도 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안했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각자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팔뚝에 앉은 파리를 체념한 눈길로 바라보는 b는 힘을 잃은 사자 같았다. 나는 b가 좋았다. 어느 누구보다 더 좋았다. 특히 파리와 함께 있는 b가 좋았다. 물론 깡패도 좋았다. 커피가 왔다. 깡패는 코를 푼 휴지를 재떨이에 넣었다. b가 깡패의 커피에 물을 부었다. 물과 섞인 커피가 탁자 위로 흘러내렸다. 그때 깡패가 놀라운 솜씨로 텅 빈 유리컵 안에다가 파리를 가두는 데 성공했다. 깡패는 약간 수줍게 웃으며 b에게 컵을 건네주었다. b는 굳은 표정으로 컵을 받았다. 고맙다는 말도 안했다. 깡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조금 더 화가 났다. b가 컵에서 파리를 꺼내 한 손에 쥐었다. b의 얼굴에 눈부신 미소가 떠올랐고 동시에 손에 든 파리를 깡패의 커피잔 속에 내동댕이쳤다. 그 불쌍한 파리는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b는 소리내어 웃었다. 깡패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진짜 대단한 친구를 가지고 있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b가 충분히 젖은 파리를 꺼내어 탁자에 내려놓고 날개를 떼어냈다. b는 불쌍한 파리의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밀면서, 자 어디 다시 기어보시지 자, 어디 다시 날아보시지 하고 말했다. 불쌍한 파리는 여전히 등을 대고 누워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나와 b는 똑같이 왼손으로 턱을 괴고 파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너희들의 얼굴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여. 깡패가 말했다. 본드 좀 그만 불어. b가 말했다. 아냐 나 이제 본드 끊었어. 그리고 다른 걸 시작했겠지. b가 고개를 쳐들었다. 너 이제 좀 멀쩡한 사람을 만나. b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지겨워졌다. b가 깡패가 그리고 오늘이 정말로 정말로 지겨워졌다. 나는 말했다. 나는 우리가 다 똑같이 좆같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내가 어째서 너랑 똑같아? 너는 아무것도 안하잖아. 쟤랑 하루 종일 본드만 불잖아. 나는 안 그래. 나는 일을 해. 나는 돈을 벌어. 그래 그렇다. 너는 훌륭하고 나는 거지 같지. 하지만 두고 보자. 결국 다 똑같아질 거야. 결국엔 모두 다 똑같이 좆같아진다. 노력해도 소용없어.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너도 노력하지 마. 일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씨발 우리 다같이 본드나 불자.
*
그거 좋다. 나 본드 되게 많은데!
*
b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척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깡패 때문에 내가 이상해졌다고 소리를 질러서 결국 깡패까지 화가 나게 만들었다. 결국 나와 b그리고 깡패는 모두 다 화가 났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깡패가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b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깡패는 b를 보았다. b는 옆자리에 가서 담배와 라이터를 빌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b는 자리로 돌아와 다시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에 든 담배를 불쌍한 파리의 엉덩이에 갖다 대었다. 파리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와 깡패는 입을 반쯤 벌리고 들리지 않는 비명을 들었다. 파리가 타고 있었다. b는 꼼짝도 하지 않고 담배 한대를 다 태웠다. 파리는 죽었다. b가 마지막으로 탁자에 떨어진 담뱃재를 손으로 문질러서 글씨를 썼다. 맛있게 잘 익었다. 그리고 나갔다.
*
b가 도착한 곳은 샤넬이었다. 나와 깡패도 그랬다. 깡패가 자기는 그만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는 깡패를 못 가게 했다.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b가 너한테 사과할 때까지 가면 안돼. 나는 절대 사과 안해. 안한다잖아 갈래. 안돼 받아내야 돼. 깡패는 아주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가지 않았다. 깡패는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사과해. 나는 b에게 말했다. 꺼져 장사해야 돼. b는 바로 그렇게 말했다. 오늘 문 닫는 날이잖아. 꺼져 장사할 거야. 깡패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의 끝에서 끝까지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걱정되었지만 모른 척하였다. 사과해.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사과해. 꺼져. 사과해. 꺼져. 사과해. 깡패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눈이 갑자기 유난히 반짝거리고 얼굴이 화사해 보였다. 나 화장실에 좀 갔다 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깡패가 경쾌하게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금방 깡패를 잊고 b에게 계속 사과하라고 소리쳤다. 사과해! 그러면 b도 꺼지라고 소리쳤다. 사과해! 근데 갑자기 b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나를 향해 아주 나쁜 웃음을 지었다. 뭔지 알아? b가 그렇게 물었다. 뭔지 몰라. 내가 대답했다. 여기 있던 본드가 없어졌다. b가 필통을 가리켰다. 아주 크고 쌔거였는데. 아니야 오줌 싸러 간 거야. 오줌도 싸고 본드도 불러 간 거지. 아니야. 나는 의자에 앉아 깡패를 기다렸다.
*
깡패는 한참 후에 돌아왔다. 꿈속에서, 꿈과 함께, 내가 절대 볼 수 없는 꿈에 둘러싸여서 깡패는 돌아왔다. 깡패의 눈은 흐렸고 미소는 흔들렸다. 깡패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 심장은 툭 하고 깨져버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년에 깡패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나는 깡패가 내년에는 샤넬의 화장실에서 할아버지와 쎅스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깡패가 내년에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되어도 내가 여전히 깡패를 사랑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내년이 되면 나는 분명히 깡패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깡패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아 이런 생각은 정말 싫다. 하지만 나는 머릿속이 완전히 상한 두부가 되어버린 깡패를 더이상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을 거다. 나는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깡패가 보였다. 깡패가 탁자 위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깡패가 뻗은 손이 손가락 끝부터 작은 나비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끈끈한 꿈에 달라붙은 그의 몸 전체가 커다란 검은 나비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깡패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내가 그에게 뛰어갔을 때 그의 입에서는 상한 크림같이 부글거리는 흰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코피가 콧물처럼 흘러나왔고 그 피는 붉었지만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깡패의 머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사람이나 동물보다는 오히려 망가진 컴퓨터와 같아 보였다. 나는 b를 보았다. b는 한 손에 커다란 맥주잔을 한 손에는 걸레를 들고 있었다. 다시 깡패를 봤을 때 깡패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어떻게 해야 돼? 나도 몰라. 나는 울기 시작했다. 우리가 죽인 것도 아니잖아. b가 말했다. 나는 깡패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옷을 벗어 깡패의 머리에 덮어주었다. b가 서랍에서 커다란 비닐봉지를 꺼내 던졌다. 비닐봉지는 죽은 깡패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어떻게 하지? 해가 지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할까. 싫어. 붉은 노을이 가게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싫어. 그러자 모든 것이 붉어졌다. 나는 b를 보았다. 태워버리자. 그렇게 말했다. 태워버리자. b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하자. b가 눈을 한번 깜빡 했고, 약간 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b가 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렸다. 나는 죽은 깡패를 비닐봉지로 둘둘 쌌다. 우리는 비닐봉지에 싼 죽은 깡패를 술집 뒤 공터 쓰레기장으로 가지고 갔다. 나는 계속 울었고 그러나 열심히 했다.
*
쓰레기장은 아주 컸고 그러나 쓰레기가 다였다. b가 망을 보는 사이 나는 신나를 부었다. b가 종이에 불을 붙여 깡패에게 던졌다. 우리는 물러섰다. 불길이 치솟았다. 그건 붉고,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리고 쓰레기 냄새가 났다. 우리는 타오르는 깡패를 바라보았다. 그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오늘이야말로 정말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또 새로운 깡패를 구해서 놀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일은 오늘만큼도 재미가 없겠지 그리고 모레는 내일만큼도 재미가 없을 거고 그렇게 결국 우리는 정말로 재미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겠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b를 보았다. b의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나는 b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b가 약간 망설이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b가 손바닥을 쫙 폈고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 하나는 썬샤인이었고 하나는 롤링스톤즈였다. 깡패 주머니에서 훔쳤어. 잘했어. 내가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내가 롤링스톤즈를 먹고 b가 썬샤인을 먹었다. 그리고 자 이거. b가 내 손에 다 쓴 토끼코크를 쥐여주었다. 깡패의 마지막 본드였다. 깡패를 기억하자. 그러자.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타오르는 깡패를 바라보았다.
*
소방차가 도착했을 때 나와 b는 완전히 꿈속에서, 꿈과 함께, 우리들만 볼 수 있는 꿈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불은 파란색이었고 노란색이었고 빨간색이었고 또 투명했고 검정색이었다. 불은 햇살이었고 락스타였다. 불은 깡패였고 나였고 b였다. 깡패는 기뻐하고 있었다. 우리는 기뻐하는 깡패를 보며 기뻤다. 우리는 모두를 사랑했다. b와 깡패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게 다 좋았다. 세상은 체리캔디같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때 소방차가 왔다. 즉시 우리는 꿈을 빼앗겼다. 그 불길한 빨간색 자동차가 우리의 꿈에 차가운 오렌지색 호스를 들이댔다. 꿈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그러나 우리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반쯤 타다 만 깡패가 울부짖었다. 나와 b도 울부짖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꿈은 새빨간 악몽이 되어 있었다.
*
다음날 우리는 뉴스에 나왔다. 뉴스를 본 사람들이 우리를 미친년들이라고 욕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또다른 더 미친 년과 더 미친 놈이 등장해서 우리는 금방 잊혀졌다. 우리는 잊혀졌다.
*
b는 샤넬을 그만두고 맨하탄에 다니기 시작했다. 맨하탄의 사장님은 제주도 사람이었다. 맨하탄은 공원에서 아주 멀었다. 나는 다시는 공원에 가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b를 기다렸다. 우리는 계속해서 같이 놀았다. 그러나 더이상 재미있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새로운 깡패를 구하지도 못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늙어갔다. 계속해서 늙어갔다. 이제 우리는 할머니 할아버지 거지와 미친 사람이 될 차례였다. 우리는 할머니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할머니가 되어 뒷마당에 양귀비를 키우고 공원에 가서 할아버지를 꼬실 것이다. 또 우리는 할아버지가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거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거지가 되어 맨홀 뚜껑을 훔칠 것이다. 우리는 미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박정희에게 절하고 잠바를 다섯개씩 껴입고 맨발로 하하하 웃으며 비닐봉지를 모을 것이다. 우리 미친 사람 거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제 공원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말할 것이다. 우리도 한때 재미있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도 한때 날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진짜 나비였다. 우리가 진짜 나비였을 때 우리는 가끔씩 보라색 꽃잎에만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때 우리는 구름을 먹었고 선인장을 껴안았다. 우리는 너무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은 우리를 미워했다. 우리는 진짜 나비였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나비도 아니고 진짜로 웃을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꽃이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꽃은 질 수밖에 없다. 만약 단 한명이라도 꽃이 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면 꽃은 영원하고 우리도 진짜 나비가 되었을 것이다. 깡패는 진짜 깡패가 되어 매일 밤 진짜 좋은 마약을 하고 깡패 형의 철물점은 무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나비가 못 됐다. 깡패는 파리처럼 타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아니 끝까지 타지도 못했다. 그게 우리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