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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시선과 시선

 

문태준을 읽는 두가지 방법

문태준 시집 『그늘의 발달』

 

홍용희

강정

 

 

‘그늘’의 역동성을 위하여

홍용희(洪容熹)│문학평론가

 

 

초점_문태준_그늘의-발달

문태준(文泰俊) 시집 『그늘의 발달』(문학과지성사 2008)은 제목에 명시된 대로 발달된‘그늘’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다. 어느 때보다 그의 시편들은 무겁고 느리고 어둡고 고요하다.‘그늘’의 음역은 음(陰)적 기운의 표상으로서 양(陽)적인 밝은 빛의 음역과 상반되는 내향적이고 수렴적이고 정적인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이것이 창작방법론에 적용되면 현실적 삶의 고통, 억압, 결핍에 직접 대응하여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내면화하여 정서적 울림과 촉기로 풀어내는 미적 양식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우리 시사에서 김소월, 김영랑, 서정주, 박재삼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전통 서정시의 계보와 깊은 친연성을 지닌다. 첫시집부터 그늘들이 오래 머물러 사는‘수런거리는 뒤란’에 시적 거점을 마련한 문태준의 시세계가 전통 서정시의 감각과 음조를 짙게 띠는 까닭은 이러한 문면에서 이해된다.

이와같은 그의 시적 특성은 1990년대 중반에 등단한 그와 비슷한 또래의 비교적 젊은 세대의 시적 성향과 뚜렷하게 변별되는 자리에 놓인다. 이른바‘미래파’시를 포함한 엽기, 환상, 질병, 兒스, 이미지 과잉 등을 거침없이 탐닉하는 새로운 경향의 시편들과는 대조적이다. 이들 새로운 시적 경향이‘드러난 차원’의 현상적인 질서에 거점을 두고, 양(陽)적 기운이 주도하는 직접성, 공격성, 실험성, 논리성에 치중하는 데 반해, 그는‘그늘’의 미의식을 통해‘숨은 차원’의 이면적 질서와 감각에 치중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시적 중심음을 이루는‘그늘’의 구체적인 실체와 작용원리는 무엇인가? 그에게‘그늘’은‘눈물’과‘슬픔’으로 얼룩진 신산스러운 삶의 일상을 감당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그는 스스로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다고 진술하기도 하고 “슬픈 시간을 기록하”는 자신의 모습을 “나는 엎드린 그늘”(「그늘의 발달」)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그늘’의 미의식은 비관주의와는 뚜렷하게 변별된다. 비관주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의 들뜬 토로와 탄식으로 치닫기 쉽지만,‘그늘’의 미의식은 안으로 깊어져서 “그늘이 그늘을, 그늘의 생활이 그늘의 생활을”(「덜컥도 없이 너는 슬금슬금」) 껴안고, “밤이 밤의 뜻으로 깊어지”(「아무 까닭도 없이」)는 과정의 직시로 나아간다. 그래서 그의 시세계에는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이제 오느냐」) 말들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그의 시세계에서‘그늘’의 미의식은 서로 대립되는 의미나 이미지가 얽히고 엇섞이는 모습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막 눈물이 돌기 시작하는 곳/그곳으로/날아오는 새와 날아오는 구름/그곳으로부터/날아가는 새와 날아가는 구름”(「장님」)이나, “우리는 이 화분을 들고/앞서고 앞서서 가거나/늦추고 늦추어서 갈 뿐”(「화분」) 같은 반대 일치의 역설이 전개된다. 이와같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교호결합하는‘엇’의 형식은 판소리나 탈춤 등 전통민예의 멋의 근원이며 감동의 근원지로 자주 나타난다. 이 점은 문태준 시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그의 시적 역동성과 미감을 절묘하게 배가시키고 아울러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환기한다. 삶의 근원적인 존재 원리나 이치는‘엇’의 역설적 정황과 문법을 통해 적절하고도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해명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같은 “그늘”의 미의식과‘엇’의 형식은 문득‘텅 빈 없음’을 열어놓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에서 “늦가을을 제일로/숨겨놓은/늦가을 빈 원두막”(「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이거나 “물의 시간도 흙의 시간도 아니요, 완고함도 유순함도 아닌”“뻘구멍”(「뻘구멍」) 등의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대체로 “당신과 나 사이”의 소통의 “숨골”(「숨골 생각」)로 작용한다. 그의 시세계에서‘텅 빈 없음’은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없음, 활동하는 없음, 생성과 소통의 산 공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문태준의‘그늘’의 미의식이‘텅 빈 없음’의 소통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은,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이 교차 생성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없음의 공간이 내적 지향의‘그늘’의 미의식을 외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정적이고 근원적인 그의 시세계가 구체적인 현실세계와 활발히 교호함으로써‘그늘 깊은 밝음’의 차원을 열어갈 가능성으로 파악된다. 이때 그의 시적 음역은 정과 동, 이면과 현상, 수렴과 확산의 성향을 동시에 아우르는 역설적인 통합의 차원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세계가 여기에 이를 때, 지나치게 드러난 차원의 현상에만 치중하는 근자의 새로운 경향의 시편들에 생산적인 반성적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혼동’이라는 말에서 어떤 오해를 느꼈던 걸까

강정(姜正)│시인

 

 

이 글은 사뭇 거칠고 솔직한 고백이 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 위태로운 솔직함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짧은 소양에 기인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시와 시인을 둘러싼 세간의 풍설들에도 일정정도 탓이 있다. 이를테면 내가 생각하는 시의 위의(威儀) 및 존재양태와 세간의 그것이 사뭇 불균등하다는 사실에 기초한 모종의 갈등이 상존한다는 소리다. 지극히 개인적인 갈등이고 답이 즉각 뽑혀나올 수 없는 사소하고도 난삽한 변증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밝혀놓지 않으면 문태준의 시에 대해 그 어떤 해석이나 평가도 나로선 불가능하다. 그러니 시인이여 그리고 독자들이여, 이것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을 거쳐 한 시인에게 에둘러 전하는 수줍은 객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숙지하시라.

시는 대체로 무지몽매와 촌철살인 사이에서 가냘프게 진동하는 언어의 전방위적 떨림이라고 나는 규정한다. 그 떨림은 때로 균질적이어서 삶과 세상에 대해 특정한 입장과 시각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어라 확정할 수 없는 자아의 균열상태 및 그로 인한 언어의 파탄상태로 드러날 경우도 있다. 이른바‘질서와 혼동’이랄 수 있는 두 지점이 공존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한 시인의 시에서 이것은 특정한 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시인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공유한다. 요컨대 대상에 대한 혼미한 시각을 일정한 언어적 율격 안에서 순화시키는 방식, 또는 세계에 대한 전면적이고도 특정한 견해를 온몸으로 밀어붙여 모종의 언어도단 상태까지 다다르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것을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전자를‘평화와 겸손’, 후자를‘전쟁과 광기’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식적 구분은 시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역설을 밝히기 위한 조야한 분류에 불과할 뿐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문태준의 시적 방법론과 특질을 나누기 위해, 그리하여 모종의 시사적 맥락 안에서 부득불 문태준과 양립하게 된 또다른 시인들의 입장을 옹위하기 위해 이런 도식을 전제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고백건대 그것은 일정정도 사실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문태준에 대해, 더 정확히 말해 소위‘문태준 씬드롬’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나만의 지점을 찾을 수가 없다.

“혼동이라는/그 말에/큰 오해가 있음을 알았다/혼동이라는/그 말로/나를 너무 내세웠다”(「혼동」). 문태준의 네번째 시집 『그늘의 발달』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오래 눈길이 머무른 건 아마도 그의 시가 기본적으로 노정하는 결곡한 심사에 갑갑증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앞서의 분류법을 근거로 말하자면, 문태준은 방만한 마음의 전쟁상태를 피하지도 비껴가지도 않으면서 꿋꿋한 인내와 자기집중으로 견디는 시인이다. 그건‘혼동’을 피하는 게 아니라 전면으로 긍정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미망과 허위들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적어도, 내가 이전까지 읽었던 문태준의 시에선 그렇듯 속 깊은 긴장이 그가 가진 진짜 신묘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 시집의 기저 또한 크게 다르진 않은 지점에서 씌어졌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인용한 시를 보다가 이상한 울렁임, 공감도 반감도 아닌, 또는 그것들을 모두 포함한 미묘한 감정적 북받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페이지를 넘겨 다른 시편들을 훑다가도 식도 끝에 뭐라도 걸린 듯 자꾸 이 구절로 되돌아와 뭔가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혹여 문태준의 최근 시적 태도가 발원하는 심정적 기원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라는 잠정적 결론이 이어졌다. 요컨대 문태준이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바깥에서 그렁그렁한 눈망울만 커다랗게 뜨고 있는 듯 여겨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문태준은 언어를 착한 농부가 소 부리듯 한다. 언어를 혹사시키거나 강제하지 않고 언어 스스로의 성정과 속성을 배려하여 유순하게 하나의 밭을 고르게 한다. 그는 인간의 감정적 혼동과 욕망에서 한발짝 떨어져나와 세계의 충만한 순리에 겸허하게 응대한다. 그렇게 씌어진 언어들은 몸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안으로 삼킨 채 살며시 떨어뜨리는 눈물방울처럼 뜨듯하고 곡진하다. 그런 이유로 그는 만인에게 위안을 주고 스스로도 위무받는 질박한 언어의 신탁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럼에도 그가 불현듯 “나를 너무 내세웠다”고 한발 더 빠지려는 순간, 그의 타고난 곡진함에 선뜻 공감하기 어려워진다. 이유는 우습게도 문태준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어떤 독법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를 이해 못해서, 공감할 수 없어서, 그의 시가 내 삶의 지평과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묵묵히 언어의 밭을 갈며 지긋이 눈을 내리깔고 있어서가 아니다. 한명의 독자, 한명의 시인으로서 나는 문태준 시에 기본적으로 공감하고 찬탄하지만, 또 바로 그런 똑같은 이유 탓에 나는 이른바‘문태준식 서정’의 일방적 돋을새김에 딴지를 걸고 싶기도 한 것이다. 이를테면 문태준의 초지일관한 시세계보다는 그것을 소구하는 전반적 상황에 대한 모종의 편견과 강압이 불시에 환기되는 듯해 심사가 불편해진다는 소리다. 세상은 어쩌면 모든 감정의 수난, 슬픔의 정점, 절망의 둥치와 세계의 미만한 폭력성과 맞서 그 자신을 소리치기보다 진중하고 사려깊게 세계의 근원적 원환에 대해 숙고하는 걸 더 권장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문태준은 존재할 법한 훌륭한 시인임에 분명하나, 그와 많이 다르지만 그에 준할 법한 또다른 시인들을 이해하는 독법에 대해 세상은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 세상 어느 곳에 평화가 있다면 그것은 또다른 어떤 곳의 전쟁과 폭력에 대한 알리바이로서만 성립 가능한 법이다. 문태준의 시적 스펙트럼과 교묘히 맞물리거나 급박하게 비틀리는 무수한 시들이 지금 이곳에서 불연속적으로 씌어지고 있다. 독자는 그 현란하고도 까마득한 시의 별자리에서 스스로의 미망에 잠깐 동안 눈멀 필요가 있다. 이건 비단 시의 문제를 넘어 삶의 본원적 질서에 대한 내 나름의 원색적 단견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로선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