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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에 부쳐 | 한국
신생
중심 아닌 중심으로 남기를
구모룡 具謨龍
『신생』 편집위원 kmr@hhu.ac.kr
『창작과비평』 창간 40주년을 부산의 『신생』 그리고 『오늘의 문예비평』 동료들과 함께 축하합니다. 저는 지금 『신생』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며 후배들이 편집하는 『오늘의 문예비평』에는 개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축하의 자리인지라 함께 인사하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제게 『창비』는 학창시절 등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특히 제게 오래 각인된 기억은 이 잡지가 1980년 여름호로 강제 폐간된 사건입니다. “다시 암흑의 시대로 가는구나.” 우리 모두가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걸쳐 대학을 다닌 우리는 참 불행한 청년들이었습니다. 79년 10월항쟁에서 희망의 싹을 찾았던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80년 5월 광주를 지나면서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때 『창비』도 폐간된 것입니다.
요즘 와서 가끔 4·19세대와 5·18세대의 정신구조에 어떤 유사점은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경험유형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럼에도 4·19세대가 훨씬 유연하고 지속적이라는 느낌을 갖습니다. 이러한 느낌의 가장자리에 『창비』가 있는 셈입니다. 80년대 후배세대들을 보면서 이따금 저는 우리야말로 ‘잃어버린 세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창비』에 대한 존경심은 이러한 생각이 들 때 더욱 커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창비』의 불행이 제게 행운이 된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평론이라고 쓴 것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난 뒤, 부산에서 무크지 『지평』에 관여하게 된 것인데, 『창비』 폐간에 이어 무크지시대가 열리면서 제가 문학활동을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저에게 『지평』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데 큰 버팀목이었습니다. 『창비』에겐 미안하지만 저는 무크지시대라는 이 역설적 공간에 대한 기억이 늘 새롭습니다. 제가 『창비』 복간 이듬해 ‘현단계 민족문학의 상황과 쟁점’(1989년 여름호)이라는 주제의 지상토론에 출석하여 제 입장을 밝힐 수 있었던 것도 『지평』에서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저는 그 시대를 저의 문학적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밀양 사람인데 촌사람 근성을 여전히 버릴 수 없는가봅니다. 달리 세계화가 어렵다고 할 수 있을까요? 민주화 이후 과거를 지우고 가볍게 열린 세계를 향해 날아가려는 분위기에도 저는 이상하게 우울했습니다. 아는 이가 그리 많진 않겠지만 90년대 ‘오늘의 문예비평’이라는 비평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제가 ‘근대성’ 문제에 대한 천착을 거듭 주장한 까닭도 이러한 시대의 우울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제게 출구를 열어준 것은 『창비』의 동아시아담론이었습니다. 부산의 한 국립대학 교양과정부에 재직하면서 1996년에 제가 전국 최초로 동아시아학과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창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과가 만들어지고 난 얼마 뒤 부산에 강연차 오신 최원식 선생께 저는 “선생님 탓이니 책임지십시오”라고 투정을 한 적도 있습니다. 동아시아학은 제게 여전히 어려운 대상이지만 제가 조금씩 세계를 배워가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요즘 『창비』에 기대하는 것은 ‘주변부적 시각’에 대한 것입니다. 저와 친구들이 혼신으로 관여하고 있는 『신생』 또한 주변부적 시각으로 삶과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이 아니라 중첩된 경계들을 주변의 위치에서 복합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가끔 『신생』이 근본생태주의로 치우치는 것은 아닌가 비판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생태주의조차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해석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주변부적 시각 안에 포섭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창비』는 한국사회의 담론의 중심이면서 중심이 아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중심부의 유혹을 물리쳐주기 바랍니다. 저는 『창비』가 주변부 잡지 『신생』을 주목하고 있는 사실을 압니다. 50년, 아니 60년 『창비』를 고대하면서 『신생』 또한 정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