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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문익환, 김주석을 설득하다

늦봄 방북 20주년을 맞아

 

 

이승환 李承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집행위원장. 논문으로 「2000년 이후 대북정책 담론 연구」 등이 있으며, 저서로 『민족화해와 남남대화』(공저) 등이 있음. sknkok@paran.com

 

 

올해는 늦봄 문익환(文益煥, 1918~94) 목사 15주기가 되는 해이고, 또 그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한 시기로 평가되는 평양 방문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기어이 가고 말거야 이건/잠꼬대가 아니라고”(「잠꼬대 아닌 잠꼬대」). 평양을 방문하던 그해의 첫새벽에 썼던 싯구 그대로, 늦봄은 1989년 3월 25일 정경모(鄭敬謨), 유원호(劉元琥)와 함께 방북했다.

 

 

늦봄의 통일사상

 

늦봄이 방북하자, 당시 정권과 대부분의 언론은 그를‘색깔이 의심스러운 위험한 인물’이라고 하거나,‘소영웅주의적, 감상적 통일주의자’등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노태우정부는 문익환의 방북을‘우리 정부의 협상력을 파탄시키고 북한의 대남공작에 놀아난 것’이라면서,1 실정법 위반을 명분으로 그를 구속하고 새로운 공안정국을 일으켜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빌미로 삼았다.

당시 언론과 정권이 만들어낸 이러한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늦봄의 방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통일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통일사상은 그가 왜 방북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기본 배경이 된다.

1989년 방북 당시 그의 통일관은‘민주화와 통일은 하나다’‘통일은 민족해방의 완성이고 민족자주의 성취다’‘통일의 주인은 민(民)이다’라는 세 명제로 요약된다.2 문익환의 이 세 명제는 각각 별개의 것이라기보다 서로 연결된 하나의 논리였다.

그는 통일이 민족사의 정통성 회복운동이자 곧‘민족해방운동의 완성이고 민족자주의 성취’라 보면서, 그런 의미에서‘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민족의 부활은 민중의 자각과 해방을 향한 노력, 즉‘민중의 부활〓민주’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결론은‘통일은 곧 민주’이고‘민주는 민(民) 주도’이므로‘통일 역시 민 주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민 주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은 결코 관을 밀어내자는 말이 아닙니다. 관은 어디까지나 민의 뜻을 받아 민과 함께 민을 앞세우고 민에 밀리면서 통일의 문을 향해서 걸어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민을 배제하고 관이 독점한 관 주도하의 통일운동이 불통일운동이었다는 것을 지난 45년 민족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3

이러한 문익환의‘민 주도 통일사상’에 비추어볼 때, 그의 방북은‘소영웅주의’가 아니라‘통일논의의 정치사회 독점’을 무너뜨리기 위한 실천적 돌파였고,‘민의 통일운동’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몸을 내던진’투쟁의 일환이었다. 즉 그의 방북은 통일논의가 정치사회의 전유물일 수 없다는‘민의 독립선언’이었던 것이다.

 

 

왜 방북했는가

 

문익환의‘민 주도 통일사상’이 방북이라는 구체적 결단으로 이어진 계기는‘분신정국’으로까지 불렸던 당시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분신, 투신이었다. 그는 분단, 반공의 깜깜한 절벽 앞에서 몸을 내던지는 젊은이들을 보며,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 자신이 목숨을 내걸고 방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민’이기 때문에 지난 40년간 허송세월만 한 당국자들간의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당국자들이 만나면 쌍방이 각자의 권익을 유지하고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 때문에 줄다리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의 집권층은 이 줄다리기를 하다가 40년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 아닙니까? 적어도 저는 그런 줄다리기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김주석도 저와는 줄다리기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180면) 그래서 자신이 앞장서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게 되면 “젊은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민주와 통일을 쟁취해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역사는 그의 믿음대로 전개되었다.4

또한 늦봄은‘통일은 하나가 되어 더욱 커지는 것이고, 커지기 위해서는 사소한 생각의 차이, 제도의 차이,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여겨, 이를 위해 남쪽에서 투쟁했듯이 북쪽에 가서도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 늦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에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어느 한편을 이롭게 하고 한편을 불리하게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 왔습니다.”(124면) 그는 이 말의 뜻을 남쪽의 정부와 국민의 마음을 전달해서 남쪽에 대한 북쪽의 신뢰를 이끌어내고, 북쪽의 진의를 알아 남쪽에 전달함으로써 북에 대한 남쪽의 신뢰를 회복시키려는 것이라 설명했다.

이런 방북 취지를 살리기 위해 그는 방북기간 내내 4·2공동성명(문익환 목사가 방북하여 허담 조평통위원장과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에 언명된 대로‘남북이 소아(小我)와 고집을 버리고 대승적인 입장에서 단합’할 것을 특히 강조했다. 문익환 스스로 말하듯이 북에 가서 이 말을 하는 것은 결국‘북쪽이 양보하라는 것’이었다.(135면)

 

 

평양에서 무엇을 논의했는가

 

늦봄은 평양에서 두번에 걸쳐 8시간 동안 김일성 주석과 대화를 나눴다. 주제는 크게 다섯가지로서, ① 한시적·과도적 교차승인 수용 ② 연방제의 점진적·단계적 추진 ③ 정치·군사회담과 경제·문화교류 병행추진 ④ 팀스피리트훈련 등의 정세와 상관없이 남북대화 지속 ⑤ 통일 장애요인으로서의 주체사상에 대한 문제제기 등이었다. 이것들 하나하나가 전부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고 늦봄이 생각하기에 대부분 북이 양보하고 이해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과도적 교차승인’문제는 늦봄이 김일성에게 던지려던 최우선순위의 질문이었다. 그는 교차승인이 영구분단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고, “그 보증은 민중에게 있다. (…) 교차승인은 군비축소와 긴장완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143면)이라며 김일성을 설득했다. 김일성의 대답은 “기본적으로 두개의 조선을 만들려는 분열주의 책동이기 때문에 절대로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확고한 거부였다.5

문익환의 설득은 당시로서는 아무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1991년 신년사에서 “우리는 유엔에 들어가는 문제도 (…) 하나의 의석으로 가입하는 조건에서라면 그전에라도 북과 남이 유엔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사실상 유엔 남북 동시가입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입장변화를 반영하여 같은해 9월 북한은 유엔 남북 동시가입을 결행했다. 유엔 동시가입은 북한 스스로 남한정부의 실체를 인정하고‘법적 분단’의 공식화를 수용한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하나의 조선’이 아니라 남북의 공존과 국제무대에서의‘교차승인’추진이라는 방향으로 북한의 정책이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늦봄이 뿌린 씨앗은 단지 싹을 늦게 틔웠을 뿐이었다.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

 

이어서 늦봄은 김일성에게 남과 북 사이에는 불신과 적대감이 깊기 때문에 연방제 추진도 남과 북의 자치정부가 군사와 외교까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단계를 두는 점진적 추진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북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 안의 실현은‘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말에 김일성은 완전히 설득되었고, “좋습니다. (연방제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협상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합의했다.(144면)

늦봄은 이 합의를 북쪽이 남쪽 정부의‘체제연합’안에 다가오게 만든 것이라고 판단했고, 자신이 한 일이 북한 통일정책을 전환시킨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남쪽의 통일방안에 북쪽의 동의를 얻어낸 일”(145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정치·군사회담과 경제·문화교류를 병행하자는 늦봄의 주장이 처음에는 강하게 거부당했다. 병행추진이 항구분단을 전제로 한 독일식 교류라는 반론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늦봄은 “민중을 믿읍시다. 다방면에 걸친 회담과 교류는 정치·군사회담에 좋은 압력이 됩니다”라면서 김일성을 설득했다. 이 두마디에 김일성은 “좋습니다. 동시에 추진하도록 합시다”라고 간단히 수긍했다.(146면)

경제·문화교류 병행추진 역시 늦봄이 남한정부의 정책적 입장을 크게 의식한 주장이었고, 김일성은 늦봄과의 협의를 통해 남한정부의 주장에 사실상 동의한 셈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의 통일원장관 이홍구(李洪九)조차 “북한이 모든 문제, 정치·군사를 비롯해서 교류협력에 대한 모든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남북 고위당국자회담의 전망이 밝아질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6

늦봄은 내친김에‘팀스피리트훈련이야 하건 말건 남북간 회담을 중단 없이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이는 대북 핵선제공격을 포함하는 팀스피리트훈련의 성격상 북이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늦봄이 제기한‘어떠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남북대화 지속’이라는 입장은, 합의가 이루어진‘다방면의 교류 병행추진’원칙과 더불어 이후 민간과 당국을 막론하고 남북관계의 기본원칙이 되었다. 그는‘남쪽 민의 입장을 바탕으로 북의 입장을 존중하는 방향에서’남북관계의 기본틀을 처음으로 정립한 것이다.

 

 

남쪽 국민의 마음을 전달하다

 

마지막으로 늦봄은 북한의 주체사상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통일의 저해요인으로 심각하게 문제되는 것은 주체사상입니다. 이제 주체사상도 그 강조점이 인민에게로 옮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148면) 수령 중심의 유일지배체제와 개인숭배 이데올로기가 통일의 저해요인이니 인민을 중시하는 주체사상으로 돌아가라는‘행간’은 즉각 읽혔다. 김일성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그렇지요. 주체사상도 인민에게서 온 거지요”라고 응답했다.(149면)

그후 문익환은 1992년 헌법개정으로 주체사상과 관련된 자신의 주장을 북한이 사실상 수용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번 방북 때 수령 중심의 주체사상을 인민 중심의 주체사상으로 바꿔달라고 했어요. 그후 (북한)헌법이 그렇게 바뀌었지요.”7 실제로 북한의 1992년 헌법개정이 늦봄의 주체사상에 대한‘충고’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 헌법개정에 인민대중 중심의 주체사상을 강조하고 유일지배의 권력구조를 완화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다.

1989년 방북 당시의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

1989년 방북 당시의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

김일성은 문익환과의 두번에 걸친 장시간의 회담에서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졌다. 그것은 “남한은 정말 통일을 원하는 겁니까?”라는 질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체제연합’은 실질적으로 북이 제안하고 있는 연방제 통일방안에 매우 가까이 접근되어 있습니다.”(170면) 문익환의 이 대답은 김일성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김일성은 즉각 비서에게 명령을 내렸다. “노태우 대통령, 김대중 총재,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 김수환 추기경, 백기완 선생 등 누구나 집단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오면 만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오늘밤으로 방송하시오.”8

이것으로‘남쪽의 정부와 국민의 마음을 전달해서 남쪽에 대한 북쪽의 신뢰를 이끌어내고, 북쪽의 진의를 알아 남쪽에 전달함으로써 북에 대한 남쪽의 신뢰를 회복시키려’했던 문익환의 방북 목표는 최소한 절반은 달성된 셈이었다. 그는 진정을 가지고 남쪽의 정부와 국민의 마음을 전달함으로써 김일성의 정상회담 추진 결심을 이끌어냈다. 한국 정치사회에서 그것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가장 정확히 이해한 이는 당시 야당총재 김대중(金大中)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은 이유가 어찌되었건 우리 남한정부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문목사가 갔을 때, 김일성이 처음‘노태우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고 대통령 호칭을 붙였고, 또 조자양(趙紫陽)에게 같은 얘기를 했다. 이것은 굉장한 변화이다. 그러면 이를 재빨리 잡아서 언제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을 하자고 제안해야 하지 않는가?”9 이런 김대중의 지적에 대해서 통일원장관 이홍구는 “정상회담의 중요성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전혀 바뀐 것이 없다. 따라서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생긴 것을 절대 정부가 가볍게 생각해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밝힌다”라고 답변했다.10 늦봄을 구속한 노태우정부조차 그의 방북이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점을 인정해 상당히 중시하는 입장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2공동성명’의 역사성

 

1989년 3월 25일 방북하여 4월 3일까지 평양에 체류한 문익환은 김일성과의 두차례 회담 결과를 문서화해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문익환-허담의‘4·2공동성명’이다. 이 공동성명은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문익환 목사의 입장을 각각 병렬한 장문의 전문과 9개항의 합의로 구성되어 있다. 9개항의 합의 중 주목할 부분은 제1항과 제3항, 제4항이다.

제1항에서는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을 재확인했다. 이것은 남북당국 사이에서 체결된 7·4공동성명을 남쪽 시민사회가 재확인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문익환의 말대로, 7·4공동성명은 국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남북 집권층의 합의만으로 서명·공식화되었지만, 4·2공동성명은 조평통을 대표해서 허담 위원장이 서명하고 남측의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대표해서 그가 서명함으로써 7·4공동성명을 실질적인 국민 동의의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180면)

제3항에는‘정치·군사회담 추진과 (…) 동시에 이산가족 문제와 다방면에 걸친 교류와 접촉을 실현하도록 적극 노력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정치·군사회담과 경제·문화교류 병행추진의 합의를 담고 있다. 4·2공동성명에 담긴 이‘다방면의 교류 병행추진’은 2000년 6·15공동선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6·15공동선언 제3항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과 제4항‘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 활성화’는 4·2공동성명의 제3항을 나누어놓은 셈이다.

제4항은 문익환·김일성 사이에 합의된 점진적 연방제 추진에 관한 것으로,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남과 북이 통일의 기본원칙에서‘공존’그리고 추진방도에서‘점차성’에 처음으로 합의한 역사적 조항이다. 4·2공동성명 이후 남과 북의 통일방안은 모두‘공존’과‘점차성’의 원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북한은 1991년 신년사에서 “연방제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도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이래,‘느슨한 연방제’혹은‘연방제 일반’으로 자신의 입장을 변화시켜왔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결국 6·15공동선언 제2항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했다”는 합의로 이어졌다.

6·15공동선언 제2항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남의 연합제와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에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대목이다. 이는‘국가연합’을 분단고착론이라고 비판하던 북한의 입장변화를 의미했고, 그 변화는 바로 4·2공동성명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4·2공동성명은 7·4남북공동성명의 계승이며 동시에 6·15공동선언의 전편이라는 역사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특히 내용적 수준에서 보면 6·15공동선언은 사실상 4·2공동성명을 기반으로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문서는 역사적 맥락을 같이한다. “쌍방의 합의의 결과는 나라의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적 양심을 지닌 남과 북의 어느 누구에게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리라는 확신을 표명한다”라는 4·2공동성명의 마지막 문장은 6·15공동선언에 대한 하나의 예언이었던 셈이다.

4·2공동성명은 기본적으로 남한의 권력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전면에 나서서 만들어낸 남북합의문이다. 즉 4·2공동성명에 반영된 문익환의 입장은 남한 시민사회가 축적해온 통일구상의 정화였고, 이것이 남과 북의 당국을 움직여 결국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낸 것이다. 4·2공동성명에 천명된‘공존과 점진성’의 원칙은, 비록 남에서는 일시적으로 거부되었지만, 김대중정부 등장과 함께‘사실상의 통일 추구’라는 내용으로 남한정부의 기본 정책기조가 되었다. 이로써 남한 시민사회의 통일구상은 문익환의 방북이 만들어낸 4·2공동성명의 성과를 바탕으로 남과 북 양 당국의‘차이를 좁히고 공통성을 확대하여’이들을 통일의 문턱으로 더욱 가까이 이끌어왔던 것이다.

 

 

통일운동에 대한 새로운 성찰

 

늦봄은 자신의 방북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 동시에 스스로 인정하듯이, 방북을 통해 새로운 통찰, 새로운 깨달음과 확신을 얻었다.11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방북 성과를 남쪽 정부가 잘 활용해주기를 희망했고, 자신의 새로운 깨달음을 널리 알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늦봄의 그런 희망은 무위로 돌아갔다. 그는 세계 언론의 주시하에‘민족적 치욕을 흠뻑 뒤집어쓰며 무자비하게 끌려갔고’그것이 그의 다섯번째 감옥살이가 되었다.

방북 이후의 새로운 자각과 통찰로 인해 늦봄의 통일운동 인식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겨났다. 그 변화는 우선 반국(半國)이 아니라 한반도 차원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역사적 무게감에 대한 자각으로 나타났다. 그는 “남쪽의 대한민국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에 한 시민으로서 책임있는 생을 살아가는 동시에, 북쪽의 모든 민족(문제)도 나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77면) 이런 자각 덕분에‘민 주도’에 대한 그의 시야도 당연히 한반도 차원으로 변모했다. “북쪽의 민의를 키우는 데도 주력해야 돼. 북의 하향적이고 다소 획일적인 사고를 임수경 대표가 얼마나 많이 바꾸어놓았는지를 보면 북의 민의를 키우는 데 남쪽의 민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지.”12

변화의 또다른 축은 그때까지의 통일운동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통일운동에서‘중립성의 원칙’과‘합법성의 원칙’을 새롭게 강조했다. 명망가 중심, 북의 논리와 사상에 경도된 통일운동으로는 남한의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를 이끌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통일운동이 남한정부만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투쟁적일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제는 남과 북의 두 정부를 동등하게 중재하면서 통일을 선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13 그래서 그는 “(통일운동은) 남북한 당국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합니다. 북쪽과 해외가 남한정부를 비난·공격할 때, 우리도 덩달아 하게 되면 한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건 안됩니다”라며 중립성의 원칙을 강조했다.14

그는 또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합법성 쟁취가 중요하며, 그래야 대정부 비판도 힘을 얻게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합법성 쟁취와 함께 여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통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론입니다. 김영삼정권도 여론에 민감합니다. 여론 확산노력이 모든 사회운동의 밑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15

아울러 그는 통일운동에서는 관의 한계가 분명하므로‘민 주도’라는 입장을 확고히 견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통일운동에서 민과 관은 상호관계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관이 민을 배제해서도 안되지만, 민이 관을 배제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단체, 시민운동단체와 우리 재야통일운동, 나아가서는 정부까지 하나의 운동으로 묶어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16 이런 입장에 따라 그는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민의 운동을 광범위하게 실천하고 이를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새로운 통일운동체를 제안했다.

문익환이 제기한‘새로운 통일운동체’의 중심점은 사실‘정부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과의 연대방식 변화에 있었다. 그는‘새로운 통일운동체’는 남·북·해외의 연합이라는 강한 조직형태보다 사안에 따라 연대하는 좀더 유연하고 느슨한 연대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쪽이 고려연방제에서 느슨한 연방제로 전진했듯이 통일운동체도 형식적인 연합체에서 실질적인 연대체로 새롭게 발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17

문익환의 이‘새로운 성찰’은 무엇보다 당시‘북의 논리와 사상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전통적 통일운동의 일부 흐름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였다. 동시에 그는 남의 민이 북, 해외와 관계맺는 방식이 교조와 형식주의에 빠질 것이 아니라, 느슨하다 하더라도‘실질적 연대’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고, 그런 점에서 그의 새로운 통일운동론은 교조와 형식을 강조하는 북이나 남의 일부 통일운동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했다.

방북 이후 문익환이 새롭게 강조한 또다른 문제의식은 바로‘통일을 위한 시급한 준비’의 필요성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통일운동이 통일운동의 자유를 쟁취하는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면 이제는 정말 통일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통일을‘민족을 통합하는 지속적인 과정’으로 여기고 그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 곧 통일이라고 인식했다. 즉 그가 말하는 통일은 완성이 아니라‘과정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통일이 임박했다고 생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7천만 겨레가 통일 이후를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몸서리치게’되었다. 그래서 문익환은 생애 마지막 옥살이에서 풀려나자마자‘통일맞이 7천만겨레운동’을 제창했다. 불행하게도 이 운동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늦봄이 남긴 것

 

늦봄의 방북과 그가 제기한 통일운동에 대한 새로운 성찰은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현재’다. 그는 통일의 기본원칙(공존)과 방도(점차성)를 제시하고 남과 북을 설득했으며, 이로써 6·15공동선언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또 남쪽 민중의 마음을 전달하여 북의 정상회담 결심을 이끌어냈으며, 유엔 동시가입과 교차승인, 다방면의 교류 추진, 헌법개정과 권력집중 완화 등 북한의 엄청난 변화를 추동했다. 그는 통일운동에서 민의 주도성을 선언하고, 남의 민이 걸어야 할 통일운동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그것은 중립성과 합법성의 확보 그리고 형식과 교조를 벗어난‘실질적 연대’였다. 이런 것들은 우리 통일운동이 현재 여전히 마주한 문제들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년간 남의 민간통일운동은 문익환의 방북과 완벽히 하나의 연대기로 묶여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룩한 이 모든 것이 그 자신의 통찰력과‘섬김’의 실천을 통해 얻어졌다는 점이다. 그는 어떤 사상이나 이론에 경도되지 않았고, 교조에 기울지 않았으며, 자신이 직접 뛰어다니면서 만난 민중의 현실을 바탕으로 반공주의와 분단국가주의를 극복하고 마침내 한국 통일운동의 사상·실천적 정점에 서게 되었다. 그는 통일운동을‘압도적 다수의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했으며, 그런 맥락에서 초지일관 노력했다. 그는 탈냉전기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이 세계적 탈냉전을 기회로 삼아 남측 당국을 최대한 유연화하고 그를 바탕으로 명실상부한‘압도적 다수의 대중적 통일운동’을 실천하려 했다.

또한 그는 민주화운동을 통해 성장한 남쪽 민의 시야에서 북과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를 가장 치열하게 탐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남의 민주화운동으로 얻어낸 사상·실천적 성과를 어떻게 통일운동에 접목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것은 동시에 북의 민을 강화하기 위해 남의 민이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통일은 민주이고 민주는 통일이기 때문에.

늦봄 방북 이후 20년, 그동안 남북관계는 많은 변화와 곡절을 겪었다. 현재의 남북관계는 이명박정부의‘북한 무시정책’과 북의‘정치군사합의 무효화’선언 등으로 나날이 악화일로에 있다. 상황은 한국전쟁 이래 최악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심각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이 권력의 안녕에는 별로 나쁘지 않다는 식의 태도가 역연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관은 어디까지나 민의 뜻을 받아 민에 밀리면서 통일의 문을 향해 걸어나가야 한다’는 늦봄의 외침을 새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민의 길’은, 정부가 하지 않더라도 민이‘백두산으로 가고 한라산까지 오는’일을 멈추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늦봄이 누누이 강조하듯이, 분단의 기득권 위에 안주하려는‘남쪽의 모든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함과 동시에 북쪽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데서 나온다.18

현실은 어렵고, 늦봄이 남긴 과제들은 아직 미완성이다. 그러나 그의 방북으로 시작된 거대한 변화는 통일이라는 미래를 향해 확고히 나아가고 있다. 그가 말한 통일의 예언은 여전히‘현재진행형’이며, 죽음 이후에도 그의 꿈과 성찰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새롭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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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안당국은 늦봄의 방북을‘북한의 공작에 의한 적지 잠입’으로 규정하고, 늦봄과 함께 방북한 정경모와 유원호 두 사람을‘북한공작원과 그 지령을 받은 자’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늦봄은 방북 당시 많은 문서의 초안을 썼던 정경모에 대해‘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의 글’이라며 감탄했고, 귀국길까지 함께해준 유원호에 대해서는 매우‘마음 든든하게’생각하고 있었다.
  2. 문익환의 통일론으로 흔히‘3단계 연방제론’등이 언급되지만, 그는 통찰력과 실천으로 이론을 돌파해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론보다 그의 통찰력있는 통일관이 훨씬 큰 힘을 지녔다.
  3. 문익환 「상고이유서」, 『문익환전집』 제5권, 사계절 1999, 236면. 이후 「상고이유서」에서 인용한 부분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하며, 『문익환전집』(『전집』)에서의 재인용은 권수와 면수만 밝힌다.
  4. “내가 방북하고 수경이가 방북하면서 분단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젊은이들이 죽을 필요가 없어진 거예요. 만약 갔다 오지 않았으면 1년 반 동안 얼마나 많은 학생이 죽었을지 모르는 일이에요. 그런 의미에서‘조금 더 기다리다 갔다 왔어야지’라는 지적은 전혀 당치 않은 논리입니다.” 인터뷰 「민주화가 통일이고 통일이 민주화」, 『평민연회보』 제10호, 1990.12.20, 『전집』 제5권 419면.
  5. 문익환 「가슴으로 만난 평양」, 한승헌선생 화갑기념문집 간행위원회 엮음 『분단시대의 피고들』, 범우사 1994, 577면.
  6. 1989년 5월 23일자 국회 외무·통일상임위원회 속기록.
  7. 인터뷰 「민족운동과 민중운동도 하나이지요」, 『사회평론』 1993년 4월호, 『전집』 제5권 455면.
  8. 「가슴으로 만난 평양」 586면.
  9. 1989년 5월 23일자 국회 외무·통일상임위원회 속기록.
  10. 같은 속기록.
  11. 「가슴으로 만난 평양」 592면.
  12. 인터뷰 「신앙과 운동이 하나 되는 기독교운동 전개」, 『한국외국어대 학보』 1993.3.23, 『전집』 제5권 450면.
  13. 대담 「분단 50년은 우리 민족의 수치입니다」, 『민주화의 길』 1991년 3-4월호, 『전집』 제5권 435~36면.
  14. 인터뷰 「통일을 맞이하는 민의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정세연구』 1994년 2월호, 『전집』 제5권 503면.
  15. 같은 글 506면.
  16. 「전교조신문과의 대담」, 『전교조신문』 1993.8.31, 『전집』 제5권 480면.
  17. 「통일을 맞이하는 민의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502면.
  18. 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삼민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