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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동북아 군비경쟁과 국제시민사회

 

 

정욱식 鄭旭湜

평화네트워크 대표. 저서로 『21세기의 한미동맹은 어디로?』 『핵무기: 한국의 반핵문화를 위하여』(공저) 등이 있음. wooksik@gmail.com

 

 

1. 동북아지역의 군비경쟁 격화

 

21세기 들어 전지구적 군비경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10년간 세계 군사비 총액은 무려 45%가 늘었다.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경제난과 기후변화, 빈곤과 질병, 식량과 물 부족으로‘인간안보’가 위협받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국가들은‘국가안보’를 미명으로 군사비를 늘리는 데 여념이 없다. 동북아는 바로 그 중심에 있다. 6자회담 참가국인 남북한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2008년 한 해에만 쓴 군사비 합계가 9700억달러에 이른다. 이는 전세계 군사비의 70%에 육박한다. 비록 이 가운데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미국의 군비증강의 중요한 원인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미국이 군사안보의 중심축을 아시아-태평양으로 이동시키고 있고 이것이 중국 등 동북아 국가의 군비증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북한의 핵개발 못지않게 6자회담 참가국 모두의 군사비 지출과 군비경쟁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군비경쟁은 상호 불신과 안보딜레마를 격화하면서 동북아에서 우발적 무력충돌 가능성을 높이고 유사시 대규모의 인적·물적 피해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 첨예해지는 군비경쟁은 이미 21세기 국제질서의 핵심변수로 등장한 미·중관계의 불확실성을 고조시키고, 미·러간의‘제2의 냉전’도 재촉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비롯한 중일, 한일, 한중관계 역시 군비경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거둬내지 못하고 있다. 군비경쟁은 이러한 양자관계뿐만 아니라 미일동맹 대(對) 중러협력체제 혹은 한·미·일 남방 3각체제 대(對) 북·중·러 북방 3각체제 사이의 군사적 대결구도를 재촉하는 물리적 이유가 된다. 아울러 막대한 예산이 소모적인 군비로 낭비됨에 따라 환경, 복지, 교육 등 각국 내부와 지역적·지구적 문제 해결에 필요한 예산상의 제약을 가져온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동북아 군비경쟁이 각국의 안보딜레마를 심화하고, 이러한 안보딜레마가 또다시 군비경쟁을 격화하는‘악순환’이 구조화된다는 점이다. 안보딜레마의 정의를 “자신의 안보를 증진하기 위해 취한 조치가 상대방의 반작용을 야기해 오히려 자신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상황”이라고 할 때, 안보딜레마가 반드시 군비경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안보딜레마를 느낀 행위자가 자신의 추가적인 군비증강이 군비경쟁을 격화해 자신의 안보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하면, 자제나 협상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북아 현실은 정반대로 전개되어왔다. 상호 불신과 군비경쟁이 잉태해온 안보딜레마가 군비증강 노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어온 것이다. 특히 외교적으로는 관계개선을 모색하면서도‘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군비증강을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동북아 6개국이 정도와 성격의 차이는 있지만 이른바‘양면전략’(hedging strategy)을 외교안보전략의 근저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동북아에서 군비경쟁이 격화되는 이유는 대단히 복잡하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패권경쟁 분위기, 미국과 러시아 간 전략적 갈등관계의 부활, 동북아 역내국가들 사이의 역사와 영토문제, 중·일간의 라이벌 의식, 각국 내부에서 점증하는 민족주의 경향, 대만문제가 상징하듯 내부와 외부의 모호한 경계, 중국과 러시아의 경제성장으로 군비증강에 필요한 물적 토대 확보, 한반도 평화통일 프로쎄스에 대한 주변국들의 동상이몽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특히 국가 내부의 정당성 결핍에 따른 내부의 불만을 외부를 향한 대결적 자세로 상쇄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는 동북아에서 군비경쟁을 종식할 수 있는 환경이 대단히 열악함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동북아 평화의 앞날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선‘군사패권주의’를 추구한 부시 행정부가 퇴장하고‘다자간 협력’을 내세운 오바마 행정부가 등장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미국발 금융위기가 동북아를 포함한 전세계 경제위기로 확산되면서 군사비 동결과 군축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6자회담 역시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구축을 중장기적인 목표로 설정하면서, 일방주의와 군사동맹으로 점철된 동북아 질서의 재편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동북아 평화군축으로 이어질지는‘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바로 여기에 국제시민사회가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해야 할 까닭이 있다.

 

 

2. 군사비 폭등과 군비경쟁 격화

 

얼마나 써왔나

동북아 군비경쟁의 양상은 6자회담 참가국들인 남북한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군사비 지출 추이에서 잘 나타난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2008년 연감에 따르면, 2007년 세계 총군사비는 2005년 불변가격 기준으로 1조 3990억달러로서 10년 전보다 45%나 늘어났다.1 미국이 45%를 차지한 것을 비롯해, 중국 5%, 일본 4%, 러시아 3%, 한국 2% 등이고, 이 통계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북한은 0.3% 수준이다. 그러나 SIPRI의 경우 중국, 러시아의 군사비를 그 나라 정부의 발표치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에, 이들 국가의 실질 군사비는 정부 발표치의 1.5~2배 정도 된다. 이에 따라 2007년 동북아 6개국의 군비지출은 1990년대 중반보다 2배가량 높아졌고, 6자회담 참가국들이 전세계 군사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65% 수준에 도달했다.

 

군사비

 

이처럼 6자회담 참가국들의 군사비 비중이 높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미국에 있다. 2001년 출범과 함께 군사비를 대폭 늘려온 부시 행정부는 2003년 4500억달러, 2005년 5200억달러, 2007년 6200억달러를 넘어, 임기 마지막 해인 2009년에는 7100억달러가 넘는 군사비를 기록하고 백악관을 떠났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임기 8년간 무려 4조 3천억달러를 군사비로 지출했다. 이는 클린턴 행정부 8년보다 2배나 높아진 수치이다.

미국보다 규모는 작지만 중국, 러시아, 한국이 최근 매년 10% 안팎으로 군사비를 늘려온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국은 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지난 20년간 두자릿수로 군사비를 늘려왔으며, 2007년과 2008년에는 각각 17.8%, 17.6% 늘려잡았다. 그 결과 2008년 군사비가 중국정부 공식 발표로는 570억달러, 구매력평가기준(PPP)과 은폐된 비용을 계산한 미국 국방부 추정치로는 1500억달러에 달한다.2‘강한 러시아’를 천명하고 나선 러시아 역시 급격히 군사비를 증액하고 있다. 러시아는 뿌찐 집권 이후 매년 20% 안팎으로 군사비가 늘어나, 2008년 정부 발표 군사비는 400억달러고 실질 군사비는 700억달러 안팎으로 추정된다.3 한국도‘자주국방’을 천명하고 나선 노무현 대통령 임기 동안 국방비가 크게 늘었다. 출범 첫해인 2003년 182억달러였던 것이 매년 8~9%씩 늘어나 임기 마지막 해인 2008년에는 250억달러까지 치솟았다.

이에 반해 동북아 군비경쟁의‘주범’처럼 거론되어온 북한과 일본의 군사비는‘정체 내지 감소’추세다. 1990년대 들어 지속적인 경제난에 직면해온 북한은, 약간의 등락은 있지만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인 20억달러 안팎으로 군사비를 유지해왔다. 또한 일본도 국방비를 GDP대비 1% 미만으로 유지한다는 재정운용 원칙에 따라 2003년 448억달러를 정점으로 441억달러(2005년), 437억달러(2006년), 434억달러(2007년)로 점차 감소하는 추세다. 일본은 이처럼 군사비 증액은 자제하면서 병력과 재래식 무기 감축으로 최첨단 무기체계 획득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동북아 6개국의 군사전략과 전력증강

21세기 초엽 한국의 군사전략은 북한의 위협, 주변국과의 관계, 한미동맹 재편 등 크게 세가지 요소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지난 20년간 북한보다 10배나 많은 군사비를 쓰고도 여전히 북한보다 군사적인 열세에 있다는 이유로, 2010년까지 북한에 대한 독자적인 억제력 확보를 목표로 육·해·공군력 및 정보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일본 등 주변국에 대해서도‘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군비경쟁도 불사하겠다는 태세다. 또한 2012년 4월로 예정된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 등 한미동맹 재편 역시 군비증강의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핵심적인 전력증강 내용으로는 F-15K를 비롯한 공군력 증강, 이지스함으로 상징되는 대양해군 지향, 북한에 대한 지상타격력 강화, 정보력 및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 등이 있다.

북한의 군사전략은 한국·미국·일본 등 군사적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들에 대한 재래식 군사력 열세를 핵무기, 탄도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확보로써 상쇄하고자 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극심한 경제난과 국제적 고립에 직면해온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장비 노후화와 훈련 및 식량 부족으로 전쟁 수행능력이 크게 떨어져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방점을 둬왔는데, 그 의도는 한편으로 군사적 억제력을 확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를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 대미관계 정상화 및 평화협정 체결 등 자신의 정치적·외교적·경제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카드로 활용하는 양면적 성격을 지닌다.

세계 최대 군사강국인 미국의 동북아 군사전략은 압도적 군사력 우위를 달성하고, 동맹재편을 통해 중국의 부상을 군사적으로 견제·봉쇄하며,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분쇄하고,‘테러와의 전쟁’에 미군과 동맹국 전력을 신속하게 투입하는 능력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군사안보전략의 중심축을 대서양에서 아시아-태평양으로 이동시키면서 대규모로 군비증강에 나서고,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재편해 주한·주일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고자 해왔다. 미국은 2010년까지 해군력의 60%를 태평양에 배치한다는 목표를 세워, 미국 본토 서부와 태평양사령부 본부가 있는 하와이, 주일 및 주한 미군기지 등에 해군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아울러 동아시아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을 서두르는 한편, 2006년에 미국 본토에 있던 F-15 전투기 및 B-2 전폭기, 글로벌 호크를 대거 괌으로 이동했고, 2008년초부터는 F-22 전투기도 순환배치에 들어가는 등 공군력 강화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 전력증강의 주된 목표가 되고 있는 중국도 군비증강에 힘쓰고 있다. 중국은 “군비경쟁이나 다른 나라의 군사적 위협에 관여할 의도가 없다”며, 자신의 국방정책은 “본질적으로 방어적”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국가안보와 통합 유지 그리고 통일 실현 및 전면적 샤오캉사회(小康社會) 건설을 위해서는 군사분야의 혁신을 적극 활용해 군 현대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는 미국의 군비증강과 미일동맹 강화, 일본의 평화헌법 수정 움직임과 집단적 자위권 추구, 북한의 핵·미사일문제와 한반도의 불확실성, 영토분쟁과 해양권을 둘러싼 갈등을 주된 우려사항으로 간주하고 있다. 2006년과 2008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중국은 군사력 건설의 목표를 2010년까지 군 현대화의 공고한 기반을 닦고, 2020년경에 중대한 진전을 이루며, 2050년을 전후해 정보화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정보화 군대 양성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4 군비증강의 핵심 내용으로는 러시아 쑤호이-27, 30 등의 전력화, 미사일 방어체제에 대한 대항전력 양성, 잠수함과 구축함 증강 및 항공모함 확보 추진 등이 있는데, 이는 주로 영토분쟁을 비롯한 해양에서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고, 양안사태 발생시 미일동맹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한다.

일본의 재무장도 중국의 군사 현대화 못지않게 동북아에서 초미의 관심사다. 과거 야만적인 식민통치와 이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없었던 것은 주변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우려하게 만드는 역사적 요인이다. 또한 한국과는 독도, 중국 및 대만과는 센까꾸열도, 러시아와는 북방 4개섬을 둘러싸고 갈등관계인데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군사동맹관계인 것은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주변국의 우려를 더욱 증폭시킨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의 재무장이 방어적인 목적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북한과 중국 등 주변국의 군비증강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은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보유 및 일본인 납치문제, 중국의 부상과 군사적 투명성 부족을 동북아의 가장 큰 안보위협으로 인식한다. 또한 러시아의 부활, 주변국들과의 영토분쟁, 동맹국 미국이 중동에 집중하는 것 역시 안보 우려사항으로 분류하고 있다.5 이에 따라 일본은 군사비 증액을 자제하면서도 해·공군력과 미사일 방어능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재무장을 제한해온 법적·제도적 제약을 풀려 하고 있다.

끝으로 강대국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러시아를 보자. 우선 군사전략이‘방어적 성격’에서‘공격적 성격’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러시아는 2000년에 전환기를 맞은 자국의 상황 및 국제관계 모두를 고려해 “러시아의 군사독트린은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것”으로 규정했다.6 그러나 2007년 들어 기존 군사독트린 개정을 추진하면서 공세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세계는 강압적인 행동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며, 자국의 군사독트린이 이러한 필요에 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 단극체제, NATO의 동진 및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 방어체제 배치, 중앙아시아에의 미군 주둔, 미국 주도의‘민주주의 동맹’결성 등을 주요 위협요인으로 지적한다.7 이에 따라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를 무력화해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으면서, 최근에는 전략폭격기의 정찰활동을 재개하고 중국과의 합동군사훈련에 나서는 등 동북아에서도 군사력 및 군사적 준비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21세기 동북아 군비경쟁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최신예 전투기를 비롯한 공군력 강화 경쟁이다. 일본이 F-15J를 보유하자 한국이 F-15K도입을 서두르고, 한·미·일 3국이 F-15 및 F-22와 F-5로의 전력증강을 고려하자, 중국이 이에 필적하는 쑤호이-30을 구매했다. 둘째는 해상전투함 및 잠수함 전력 강화이다. 일본의 이지스함 보유는 한국의 이지스함 도입의 구실로 작용했고,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해군력 증강은 중국의 해군력 증강 명분으로 작용했다. 셋째는 미사일과 미사일 방어체제 경쟁이다. 북한의 미사일 전력 증강은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미사일 방어체제 추진의 빌미가 되었고, 미사일 방어체제 강화는 중국과 러시아의 미사일 전력 증강 및 위성파괴무기 등 대항전력 구축으로 이어졌다. 이는 또한 주변 4국의 우주 군비경쟁으로까지 치달았는데, 대표적으로 중국이 2007년 위성파괴 미사일을 발사하자, 미국도 2008년에 이지스함에서 SM-3 미사일을 발사해 고장난 위성을 파괴했다.

 

 

3. 전환기의 동북아 정세와 오바마의 등장

 

그렇다면‘고삐 풀린’군비경쟁을 제어하고 군축을 도모할 수 있는 반전(反轉)의 계기는 없을까? 냉정하게 볼 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오바마의 미국 역시 강력한 국방력과 동맹체제 유지를 다짐하고, 중국과 러시아는 자신들의 군사비가 미국보다 턱없이 적은데다 군사력 현대화에서도 뒤떨어져 있다고 판단한다. 동북아 질서에 훈풍을 몰고 올 것으로 기대되던 남북관계는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역주행을 거듭하고 있다. 동북아의 문제아로 떠오른 일본이 동북아 평화군축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기대하기도 힘들다. 동북아 역내국가들 사이의 역사교과서 문제와 영토분쟁에서 잘 나타나듯이, 각국의 민족주의 경향 역시 커지고 있다. 게다가 국익이나 정권의 이익을 넘어서 보편적 가치와 공동번영, 협력안보를 추동할 수 있는 동북아 시민사회의 발전수준도 높지 않다.

그러나 반전의 징후와 계기도 발견된다. 우선 6자회담이라는 틀이 있다.‘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부시가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피하고 국제적 압박구도를 만들기 위해 고집했던 6자회담은 동북아 문제 해결의 소중한 토대가 되고 있다.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는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했고, 2007년 2·13합의에서는‘동북아 평화안보체제 실무회의’를 창설키로 해, 간헐적으로 회의를 갖고 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오바마의 등장은 두가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6자회담이 동북아 평화체제로 발전하기 위한 기본전제는 북핵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오바마 행정부는‘터프하고 직접적인 외교’에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또한 오바마의 아시아정책에는 동북아 평화체제 같은 다자적 협력틀 추진이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둘째, 동북아에서 권력재편이 일어나면서 어떤 나라도 질서와 규범을 강제하는 패권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협력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주변 4강’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는 모두 세계에서 종합국력 10위 안에 든다. 더구나 이들 가운데 미국, 중국, 러시아는 핵보유국이자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또한 한국의 국력도 만만치 않은 수준에 도달했고, 북한 역시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일정정도의 발언권과 지렛대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어느 나라도 대외관계에서 일방주의를 고수하기 힘들어지는 동시에, 협의와 타협에 기초한 다자주의의 필요성이 커지는 구조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오바마는 부시처럼‘제국’건설을 시도하기보다 협력적 다자주의와 리더십 회복을 통한 세계전략을 공언한 바 있다. 이는 21세기초에 맹위를 떨치던 강대국간 패권경쟁 경향이 퇴조하고 협조체제가 등장할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셋째, 한반도문제와 함께 동북아의 핵심적인 불안요인으로 거론되어온 양안관계의 해빙무드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진당의 천 슈이볜(陳水扁) 시대에 대만독립 문제로 날카롭게 대립하던 중국과 대만은 국민당의 마 잉주(馬英九) 정부 출범을 계기로 본격적인 화해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같은 양안관계 개선은 동북아 안보딜레마를 푸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력증강 및 한미동맹, 미일동맹 재편과 중국의 군사력 현대화 노선이 충돌하면서 격화된 동북아 군비경쟁의 이면에는 양안문제를 둘러싼 미일동맹과 중국의 날카로운 대립이 존재했다. 그런데 양안관계가 크게 개선되면서 이들 사이의 갈등도 눈에 띄게 줄었다. 이러한 와중에 등장한 오바마는‘하나의 중국’과‘대만 방어’라는 전통적인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경제위기 해결과 국제평화 증진을 위해 중국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전지구적 경제위기의 여파다. 경제위기가 동북아 군비경쟁이나 평화체제의 미래와 관련해 주목되는 점은 세가지다. 먼저 경제성장이 군비증강의 물적 토대라는 점에서 경제위기는 각국의 군사비 증액에도 압박요인이 될 것이다. 또한 2008년 12월 중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융·경제위기는 국가간 협력의 필요성을 크게 증진시킨다. 경제협력이 안보협력으로까지 발전할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경제적 상호 의존성 증대가 안보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동기로 작용하는 경향은 분명 존재한다. 끝으로 동북아 6개국 모두 극심한 경기후퇴, 실업 및 소득감소, 사회안전망 미비로 내부적인 불안이 커지고 있어, 군사비를 동결하거나 감축해 내부문제 해결을 추진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것들은 미완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6자회담에서 동북아 평화안보체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도 힘들어진다. 설사 동북아 평화체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더라도,‘모여서 차 마시고 얘기 나누는 친목모임’수준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양안관계 역시 언제 다시 악화될지 알 수 없으며,‘패권국이 부재한 동북아’가 다자간 협력체제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도 아니다. 내부적 불안요인을 외부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기 위해 더욱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는 나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결국 앞에서 언급한 동북아 평화군축의 가능조건과 환경은 아직까지 가능성에 불과하다.

 

 

4. 국제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

 

부정적 흐름과 긍정적 계기가 교차하는 동북아에서 군비경쟁을 종식하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주체 형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익 혹은 정권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부의 정책결정과 국가간 협상에서는, 의제설정이나 그 이행이 협소해지고 그 결과 역시 보편성을 띠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눈치보기와 책임전가 그리고 상대방 의도에 대한 경계심이 근저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주권을 일부 양도하는 것이 필요한 공동안보와 군축체제를 국가 주도로 구축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결국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국제시민사회에서 나와야 한다.

동북아 평화군축에서 국제시민사회가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는 존재한다. 먼저 각국의 외교안보정책 결정과정에서 여론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날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쏘프트파워’의 핵심은 강제력보다 매력의 힘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인데, 여기서는 결국 여론의 향배가 상당부분 성패를 좌우하기 마련이다. 또한 6자회담 참여국 가운데 어떤 나라도 동북아의 바람직한 미래에 대한 의제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조차 2008년 7월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강연에서 “6자회담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NGO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역할이 요구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세계체제의 변동이다. 오늘날의 세계는‘거대한 그물망’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상호연관성이 대단히 강하고, 국제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행위자의 성격도 다변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세계 경제를 강타한 것처럼 부정적 상호연관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긍정적 상호연관성의 가능성도 잉태되고 있다. 가령 1991년 북미와 유럽의 6개 NGO로 시작된 대인지뢰금지 국제운동은 1997년 60여개국 1100개 이상의 NGO가 참여한 글로벌 캠페인으로 발전했고, 이는 1997년 노벨평화상 수상과 대인지뢰금지협약 체결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네트워크시대에 국제시민사회의 잠재력을 확인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제시민사회는 바로 이러한 지점들을 포착해야 한다. 배타적 민족주의와 국가제일주의로 여론이 변질되지 않도록 공동의 정체성과 비전 마련에 힘을 기울여야 하고, 앞으로 6자회담의 동북아 평화안보체제가‘각국 정부대표들이 모여서 사진 찍는 사교모임’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의제 발굴과 확산, 투영과 실현에 적극 나서야 한다. 또한 “거대한 그물망의 시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은 관계성(connectivity)에서 나온다”8는 점에 주목해 국경을 초월한 네트워크 구축에도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아직 공백상태에 있는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의제와 관련해 국제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분야는 크게 세가지다. 첫째는 한반도 비핵화를 동북아 비핵지대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는 동북아 안보불안의 근본원인 가운데 하나를 제거한다는 의미와 함께,‘한반도 비핵화’와‘조선반도 비핵화’사이의 갈등을 풀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다.9 둘째, 6자회담 참가국들의 군사비 동결이다. 군사비는 군비경쟁의 가장 중요한 지표이자 물리적 토대라는 점에서 군사비를 동결 내지 감축하지 않고서는 확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6자가 함께 군사비를 동결한다면 군비경쟁체제를 군축체제로 전환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셋째는 동북아 평화배당기금(North east Asian Peace Dividend) 창설이다. 6자가 동결하거나 감축한 군사비 일부를 공동의 지역기금으로 축적해 대체에너지 개발과 인적교류 지원 등 공동의 목적에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다.

이러한 의제들을 6자회담에 투영시키기 위해서는 운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직 미약하지만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동북아 군축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필자는 2007년 미국 워싱턴 체류중에 공공정책연구소(IPS)에 제안해 공동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30명가량의 활동가와 연구자가 참여하는‘아시아-태평양 군비동결 캠페인’이 결성되었고,10 필자가 관계하는 평화네트워크는 이 모임을 지원하기 위해 2007년 8월부터 6개월 단위로 1명의 인턴을 파견해 실무를 돕고 있다. 또한 평화네트워크와 아리랑국제평화재단11은‘2008년 광주평화회의: 동북아 평화체제와 국제연대’를 개최해 미국, 일본, 중국, 캐나다, 한국의 참가자들과 심도있는 협의를 했다. 주요 참가자들은 이러한 국제연대를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 이메일과 화상회의를 통해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으며, 올해 5월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IPS가 주관하는 동북아 군축회의 개최를 준비중이다.

또한 전세계 150여개 단체로 구성된 국제평화운동단체인 글로벌네트워크는 작년 7월 2009년 국제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했고, 평화네트워크와 참여연대는 이에 동의하고 국내에 조직위원회를 구성했다. 글로벌네트워크는 1992년 이후 매년 국제평화대회를 개최해왔는데, 지금까지는 모두 미국과 유럽이나 호주에서 열렸을 뿐 그밖의 지역에서 개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따라 4월 16일부터 18일까지 서울과 평택에서 열리는‘아시아-태평양 MD반대와 군축을 위한 국제대회’는 국제군축운동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확산시키고 국제연대를 활성화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다.

‘주변 4강’이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는 것처럼 한국은 주변국에 비해 군사력은 약한 반면, 시민사회의 역동성은 대단히 강하다. 또한 동북아에서 패권을 추구할 의지와 능력은 없는 반면, 군비경쟁과 패권경쟁이 격화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이러한 조건과 환경은 한국 시민사회가 동북아 평화군축을 위한 국제시민사회 네트워크 구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한국 시민사회가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와 세계로 시야를 넓혀야 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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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yearbook2008.sipri.org참조.
  2. 참고로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는 환율과 은폐비용 그리고 구매력평가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중국의 군사비를 정부 발표치의 1.7배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The Military Balance2008 참조.
  3. 러시아 정부가 발표한 군사비와 외부 추정치가 큰 격차를 보이는 이유는 정부 발표치에 군인연금과 예비군 관련예산, 무기 수출소득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러시아의 군사비는 정부 발표치의 2배로 추산된다. 같은 책 참조.
  4. “China’s National Defensein 2006,” www.china.org.cn/english/features/book/194421.htm; “China’s National Defense in 2008,” www.china-defense-mashup.com/?p=2456 참조.
  5. “Defense of Japan 2007 (Annual White Paper),” www.mod.go.jp/e/publ/w_paper/index.html 참조.
  6. “Russia’s Military Doctrine (2000),” www.armscontrol.org/act/2000_05/dc3ma00.asp 참조.
  7. “Russia Revises Military Doctrine to Reflect Global Changes,” RIA Novosti, March 5, 2007.
  8. Anne-Marie Slaughter, “America’s Edge,” Foreign Affairs, January/February 2009.
  9. 한·미·일 3국이 말하는‘한반도 비핵화’는 북핵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의미하는 반면, 북한이 말하는‘조선반도 비핵화’는 미국의 확고한 안전보장, 미국 핵무기의 남한 재반입 및 일시통과 금지, 미국 핵우산의 철수 등 훨씬 광범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핵무기 불사용 약속, 핵무기 재반입 금지 등을 담고 있는 비핵지대는 이러한 개념과 목표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10. 이 캠페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pacificfreeze.ips-dc.org참조.
  11. 이 재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www.aipf.or.kr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