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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

 

이장욱 李章旭

시인, 소설가. 시집으로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장편소설로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있음.  oblako@hanmail.net

 

 

1. 시민과 시인

 

이 글은 지난호 『창작과비평』의 특집 중 주로 시장르에 관련된 진은영(陳恩英)의 논의를 잇는 글이다.‘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지난호 특집의 원론적인 질문에 기초하여 미학과 정치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살피는 일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진은영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문학과 윤리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영원 회귀하는 질문들 그리고 그 대답들”1에 한편의 글을 추가하는 일이 될 터이다.

“발본적인 문제”(5면)를 탐구하고자 하는 지난호 특집기획은 물론 원론의 안이한 반복이 아니라, 오늘의 문학현장에서 명멸하는 다양한 쟁점들을 좀더 근원적인 시각에서 재검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특히 미학과 정치 사이에 개입해 있는 긴장 혹은 (불)연속성에 대한 탐문은 오늘의 시대정황과 관련하여 특집 전반을 관할하는 주요 주제로 읽힌다. 미학과 정치 사이의 그 긴장은 백낙청(白樂晴)의 글에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세상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40면)는 지점에서 발생하며, 한기욱(韓基煜)의 글에서는 “무엇이 새것다운 새것인지를 가리는 문제”(66면)에 연루되어 있다. 이에 비해 진은영의 경우는 최근의 시적 경향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하여 좀더 이론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플라톤적 이상주의에 의거한 교훈주의적 문학관(윤리적 예술체계)과 아리스토텔레스적‘공감’에 기초한 효용론적 문학관(시학적-재현적 예술체계)을 비판적으로 설명한 후 그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로서의 예술”(미학적-감성적 예술체계)을 제시한 랑씨에르(J. Rancière)의 논의에 의거하여‘삶/정치와 문학의 일치’라는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

흥미로운 것은 진은영이 서문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이다. “(80년대의 민중시들에) 깊이 공감했고 그 시대에 그 시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쓸 수 없었다”고 진술한 뒤 그는 이렇게 적는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69면)

하긴 그렇다. 시민으로서의 사회참여가 곧바로 시인으로서의 시로 전이되지는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시의 무엇이 이 전이과정을 방해하는 것일까? 해답은 생각보다 자명한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가 삶의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잠재적인) 모든 부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은 아닌가? 김수영(金洙暎)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온몸’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닌가? 이‘온몸’은 물론 엄숙주의나 감정의 과잉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온몸’은 시가 발생하는 일종의 장소다. 그곳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고 삶의 외부와 내부가 부딪친다. 그것은 미정형의 언어들이 시인의 몸을 통해‘사건’을 발생시키는 공간이 된다.2 표면적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발화, 시인의 몸에 기입된 감각과 정신이 최초의 언어로 육화하는 과정, 그래서 시는 삶 자체의 근저에서 형성된 언어를 요청하는 것이다. 시에‘윤리’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것일 터이다.

우리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으로서 촛불집회에 나간다. 정치적 신념으로서 진보적 정당을 지지하고 보수여당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아직‘정치적인 시’를 쓸 수 없다. 시 외부에 완성되어 있는(이미 알려져 있는) 정치적 메씨지의 반복이나 그 감성적 보완에 그친다면 말이다. 현실정치의 퇴행이 명백한 오늘에조차,‘온몸’을 요구하는 시의‘윤리’는 많은 경우 시민적‘윤리’의 단선적인 시적 변용을 초과하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랑씨에르의 문장을 바꾸어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에는 제 미학이 있고, 시에는 자신만의 정치가 있다. 당연하게도 이 말은 시가 현실정치적인 주제를 다룰 수 없다거나 문학과 정치가 혼융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사정은 거꾸로다. 시는 정치의식의 표층적인 발화를 넘어서서 시로써 갈 수 있는 심층의‘정치’에 닿아야 한다.3

그런데 이것으로 된 것일까? 아직 질문은 더 필요해 보인다. 이 심층,‘시 자체의 정치’는 어떻게 실제의 삶/정치와 만나는가?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자기)분열”에 대해 진은영이, “많은 시인들이 진실된 감정과 자신의 독특한 음조로 새로운 노래를 찾아가려고 할 때 겪는 필연적 과정일 거라고 믿고 싶다”(69면)는 희망을 피력했을 때, 자기분열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 희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의지이며 (동시에) 삶의 형식을 예술적 실천과 연결시키는 형식으로서의 모더니즘”과 함께, “문학 텍스트와 다른 사회적 텍스트의 끊임없는 접합”(83면)이 요청된다는 것. 결론은 이렇다. “삶과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84면)

이 글은 진은영의 이 결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주제항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소위‘새로움’을 근간으로 하는‘현대예술’의 역설적 상황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특히 지난호 한기욱의 문제의식, 즉 “새것다운 새것”의 역사적 조건과 미적 대응에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최근의 문학논의에서 주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다. 둘째는‘삶과 정치를 실험하는 문학’이라는 진은영의 논점을 구체화하여 살피는 일이다. 이를 위해 서구문학사의 몇몇 사례들이 참조될 것이다. 이 논의들은 궁극적으로 “세상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물음”(백낙청 40면)에 연동되는데, 바꿔 말하자면 이는 문학의 자율적 영역이 세계와 만나는 절합지점에 대한 질문에 해당한다. 지난호 특집을 잇는 이 원론적인 논의는 일부‘젊은 시인들’을 둘러싼 우리 시의 다양한 쟁점들에 연루되어 있지만, 소위‘2000년대’라는 좁은 시대구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회적이다. 먼저 현대문학과 예술이 처한 역설적 상황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새로움에 대한 논의가 이와 관련이 있다.

 

 

2. 새로움이라는 역설, 혹은 한계의 체험

 

오늘날 어떤 시인도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실험을 수행하지 않으며, 어떤 비평가도 “전통의 부정만을 강조하는 상투적 의미의 미학적 실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새로움은 언제나 일종의‘조건’이자‘상황’이며 모종의 당대적 (무)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새로움이 추인되는 방식에 대해 지젝(S. Zizek)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새로운 이론은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것으로 치부된다. 다음 단계에서는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언젠가 다른 데서 이미 말해진 것을 단지 새로운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는 논평을 듣는다. 마지막으로는 그 이론의 새로움이 인정받는 단계이다.”4

지젝의 유희적 언급에 우리가 전적으로 동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새로움이 저‘부정적 승인’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보다 많은 새로움들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전도서(1장 9절)의 문장 속으로 사라진다. 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며, 지금 생기는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다. 특히 교환가치(차이)가 지배하는 오늘날의‘새로움’은 “한 거울이 다른 거울에 비치듯이”(벤야민) 저 유구한 것을 반복하는 가상일 가능성이 높다. 주지하다시피, 이미 오랫동안‘모더니즘의 피로’를 겪어온 현대예술의 딜레마가 이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앞의 인용문을 통해 지젝이 의도하는 것은 새로움의 적대자들에 대한 냉소가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새로움’을‘인정’(recognition)의 논리와 단절해내고‘인식’(cognition)의 지평으로 옮겨놓는 것이다.‘인정’의 맥락에서 빠져나와‘인식’의 맥락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단지 세계인식이 중요하다는 식의 범용한 의미는 아니다. 타자의 시선에 종속되는‘인정’과 달리,‘인식’은 담론과 담론 그리고 세계 자체를‘작업’이 시작되는 하나의 대상이자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것은 일종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론이 아닌 예술에서는 어떨까?‘인정’이 아니라‘인식’에 기탁된 새로움이란 어떤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현대예술이 처한 자기모순과 위태로운 딜레마에 대해서 먼저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자기모순과 딜레마야말로 현대예술의 가능성,‘인식’의 새로움이 발생하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역사성과 정치성의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이미 현대예술의 내부에 기입되어 있는 수많은 균열과 역설들을 지목할 수 있다. 가령 깐딘스끼(W. Kandinsky)와 말레비치(K. Malevich) 이래 가장‘현대적인’작업들은 때로 가장 고대적인 것 혹은 원형적인 것을 참조했으며, 앙드레 브르똥(A. Breton)의 초현실주의적이면서 동시에 혁명적인 열정이 히틀러에 대한 쌀바도르 달리(S. Dali)의 기이한 편집증과 동거했던 시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마리네띠(F. Marinetti)로 대표되는 이딸리아 미래주의의 파시즘적 지향과 마야꼽스끼(V. Mayakovsky)가 대변하는 러시아 미래주의의 좌파적 지향이 현대 도시공간의 급속한 변화라는 동일한 씨앗에서 발아했다는 것 역시 부기할 수 있다. 현대예술이 품고 있는 내적 균열들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이보다 긴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번역된 앙뚜안 꽁빠뇽(Antoine Compagnon)의 『모더니티의 다섯개 역설』이 보여준 문제의식은 그런 의미에서 뒤늦게 도착한 감이 있다. 1990년 저작인 이 책의 핵심은 19세기 이래 (미적) 모더니티가 직면해온 다섯가지 역설적 상황을 분석하고 “현대예술의 위대성과 그 퇴폐의 동기들, 새로움의 미학이 처한 논리적 궁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5“단절의 전통은 필연적으로 전통의 부정인 동시에 단절의 부정”이 된다는 옥따비오 빠스(OctavioPaz)의 고전적인 문장을 옮겨 적은 후 꽁빠뇽은 이렇게 말한다. “현대적 전통은 예술을 긍정함과 동시에 부정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 자신의 위대성과 퇴락을 한꺼번에 선포한다.”6

물론 이 모든 모순과 역설들은 (이미 많은 논자들이 참조했듯) 마셜 버먼(M. Berman)이‘현대성의 경험’이라고 명명했던 역사적 맥락에 연동되어 있을 터이다.‘현대성의 경험’이란 무엇인가? “현대적인 삶의 모호성과 모순에 대해서 부단하게 투쟁했던 이들은 현대적인 삶의 추구자인 동시에 적대자”였으며, “이들의 자체적인 아이러니와 내적 긴장은 이들 자신의 창조적인 힘에 대해서 일차적인 원천으로 작용했다”는 진술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논쟁과 진단 속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어온 바 있다.

이미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모더니티에 대한 일반담론을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의 강조점은 좀더 소박하다. 현대예술 혹은 현대적 글쓰기가 내포하는 (진정한) 자기모순과 역설적 상황이 정확하게 현대예술 자체의 존재조건이라는 점이 그것이다.‘차이가 곧 현실’인 상황, 현대 자본주의의 무질서한 변화에 연동된 현대예술의 운명은 이 지점에서 양가적인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그 자신이 근거하고 있는 현대세계의‘용광로’에 휩쓸려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배제하고 저항할 것인가.

이 이분법적 질문에 대해 표준적으로 제시되는 양자택일의 관점과 달리, 이 두 선택지를 상호 배제적인 대립항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스스로를 자신이 발 딛고 선 현대성의 내부로 편입시키고, 바로 그에 의해 현대성의 한계/경계를 적시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보들레르(C. Baudelaire)가 오늘날 현대예술의 기원으로 정초된 핵심적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벤야민은 보들레르에 대한 한 에쎄이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보들레르는) 그들(현대의 군중)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킬 때조차 스스로 그들의 공범자가 된다. 다만 한번의 경멸의 시선을 던져 그들을 무가치한 존재로 좌천시키기 위해 그는 깊이 그들에 연루된다. 그가 거리를 두면서 자신을 군중과 동일시할 때의 이러한 양가성(ambivalence)은 어딘가 불가피한 성격을 띤다.”7 보들레르의 시가 주는 매력은 저 불가피한‘양가성’과 관련되는데, 이 경우 보들레르의‘리얼리즘’은‘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발생’하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아이러니적 상황에서만 존속 가능한 것이 된다.

소위‘새로움’(차이)에 대한 현대예술의 요청이란 이러한 현대예술의 발생적 상황과 필연적인 관련을 맺는다.‘새로움’이 우월적 가치로 승격된 것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모더니티의 성립 과정과 연관이 있다. 과거의 문학과 예술에서‘새로움’은 오늘날과 달리 소극적인 의미만을 지니고 있었다. 상대적으로‘새로움’이라는 가치에 무심했던 과거의 예술이 오늘날의 예술보다 정치적/미학적으로‘우월’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과거의 예술은 대체로 세계에 대한 창조적‘반성’이나‘대응’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제의를 비롯한 신화적 상징체계에 내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과 「사진의 작은 역사」를 비롯한 일련의 글들에서, 대상의 고유성에서 발원하는 무의지적 연상작용으로서의‘아우라’(aura)가 사라진 현대예술에 대해 명료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현대예술에 대한 비판과 희망 사이에서 동요했던 벤야민의 (생산적인) 딜레마는 아우라라는 개념이 지닌 양면적인 성격과 관련이 있다.8

말하자면‘새로움’이 주요한 가치로 승격된 것은 저 고전적 이상, 즉 “미적 초월성과 영원의 이상에 대한” 거부가 현대사회의 발생적 속성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버리는” 지속적인 역동성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 예술이 모든 종류의‘경계’를‘한계’로 전환시키는 지점,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에 대한 열정과 바로 그것에 대한 저항이라는 자기모순적 축이 현실적(넓은 의미의‘리얼리즘적’) 에너지로 전환되는 지점, 이 지점이야말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표준적인 이항대립이 무화되는 바로 그곳이다. 이때‘새로움’이란 말하자면 이‘경계’들을‘경계’로서 지각시키고 그것을‘한계’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최저 조건이다. “한계 체험으로서의 글쓰기”라는 크리스떼바(J. Kristeva)의 명제가 후기구조주의의 비좁은 맥락을 넘어서 쓰일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한계 표시기’로서 문학이 지닌 의의를 지시하는 것일 수 있다. 저‘한계’를 체험하고 실험하는 시인에게 세계와 언어는 구분되지 않고‘동시에’(김수영) 지각된다.

이제 시인은 이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요컨대 그‘폐허’에 내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그것은‘아름다운 영혼’(헤겔)의‘타락’을 스스로에게 용인하는 일이며, 심지어 그것을 요청하는 일이기까지 하다. 이‘타락’은 자신의 삶이 이 세계에 대해 외부적 존재가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을 응시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세계의 타락을 넘어설‘시’를 발생시키기 위한 조건이다. 이것은 위험한 리얼리즘일 터이다. 하지만 이것은 혹시, 불가피한 리얼리즘은 아닌가? 역설과 아이러니를 질료로 삼아 전진하는, 자기 자신의 내적 모순 자체를 전진의 동력으로 삼을 줄 아는, 바로 그러한 시를 위해서는 말이다.

 

 

3. 삶/정치로서의 문학과 그 역사

 

시를 비롯한 문학언어가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에 관여하는 대표적인 두가지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현실에 대한 개입을 전제로 하는‘참여적’방식을 하나의 항으로 상정할 수 있다면, 주류언어와의 대립, 혹은 “자기 자신의 언어 안에서 이방인처럼 되는 것”9을 지향함으로써‘소수문학’의 정치성을 강조하는 방식을 또 하나의 항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선택지는 관례적 언어의 위반을 통해 세계의 틈새 혹은 보이지 않는 실재를 개시(開示)하려는 의지와 함께 오늘날 다양한 문학적 쟁점들을 낳았으나, 우리는 이 두 항의 사이 혹은 외부에 수많은 점이지대가 있음을 알고 있다. 나아가 이 점이지대에서 문학이 삶의 체제 변경 혹은 “감각적인 것의 분배”에 관여하는 다양한 방식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진은영의 글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 두 방식을 넘어서서 실제의 삶/정치와 문학의 결합을 지지하는 장면이다. “문학적 발명품들이 풍부한 (문자)매체적 상상력을 통해 더욱 새로워져서 정치적 전복으로까지 이행할 가능성”(83면)을 강조하면서 그는, 앞서 인용한 대로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는 문장으로 결론을 맺는다. 나는 이 문장을 수사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축자적으로, 그러니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적 언어의 실험이 실제로 삶/정치의 실험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으로 말이다. 현실성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은 뜻밖에 문학과 세계의 접면을 도드라지게 보여줄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정치의 실험’이란 협의의 정치권력 창출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랑씨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도래할 삶의 물질적 틀들과 감각적 형태들의 발명의 측면”10에 해당한다.

그런데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이 명제에도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딜레마가 산적해 있다. 랑씨에르가 말하듯이, 정치와 문학에는 필연적인 간극(자율적 영역)이 있다. 삶/정치와 문학 사이의 저 (불)연속성, 혹은 삶/정치와 문학의 (불)일치는, 역사적으로‘선언’이나‘주장’으로 극복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삶을 실험하는 시’‘새로운 정치를 창안하는 시’가 불가능한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20세기 서구의 몇몇 사례를 빌려 삶과 예술의 관련성이 극도로 일치했던(혹은 일치시키고자 했던) 예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정치와 문학의 접면에 대한 역사적 사례 보고이기도 하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20세기초의 전위들이다. 삶과 예술의 일치를 추구했던 일부 전위들은 가령 낭만주의 시대의 방식과는 반대의 방향을 취했다.11 어떤 전위들은 현실정치의 장 내부로 텍스트를 이끌고 들어가 직접적인 정치예술을 구현하고자 했으며, 어떤 전위들은 예술을 일상적 삶에 편입시킴으로써 삶과 문학 사이의 경계선을 지워버리고자 했다.‘미적 자율성’을 극대화함으로써가 아니라, 정반대의 방식, 즉 미적 자율성의 소멸을 통해 예술을 삶 속으로 무화할 것을 의도했던 것이다. 전위적 실험을‘형식실험’‘기표 유희’등의 피상적 실험과 동일시하는 이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것은 삶과 문학의 순연한 일치라는 또다른 이상주의의 산물이었다. 이 이상주의는 문학예술의 양식(자율적 형식)을 파괴하기를 희망했으며 그 때문에 일부 논자들은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서로 변별적이거나 때로는 대립적인 개념으로 정초하기도 한다. 주지하듯이 이 전위들에게‘박물관’이 상징하는‘부르주아적 감상의 공간’은 예술을 삶에서 분리하는 적극적인 방식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은‘파괴’의 대상이었다.

가령 1920년대 러시아의 전위적 그룹이었던 레프(Lef, 예술좌익전선)의 이념은 예술과 삶 자체의 적극적인 혼융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질적 언어의 창안에서 비롯된 그들의 운동은 시, 소설, 이젤 페인팅 등 전통장르를 부인하고 소위‘삶-건설’(life-building)과‘사실문학’(literature of fact)의 기치 아래 문학언어의 고유한 영토를 삶-정치의 내부로 해소시키고자 했다.12 이 때‘삶-건설로서의 예술’이란 문학이 정치적 변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소박한 참여론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실천을 세계의 변화와 일치시키고 창작자의 삶이 바로 그 변화에 내속되어야 한다는 미적 요청이었다. 이제 예술은 감상의 대상이기를 멈추고 삶 자체가 된다. 극단적인 경우 그것은 “모든 글쓰기를 (삶의) 구체적인 필요들과 결합시키는 것”13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것은‘무목적의 목적성’, 즉 글쓰기의 실제적 목적을 정지시킴으로써만 아름다움이 발생한다는 칸트적 명제의 반대항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920년대에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일시적인 연합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양자는‘부르주아미학’에 대한 적의와 함께 삶/예술의 간극을 무화하고자 하는 미적 이상을 공유했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주의 리얼리즘은‘공적 상상력’의 최대치를 실현했다는 의미에서 소위‘근대문학’의 절정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초기 형태로서 유물론 미학은 집산주의(collectivism)를 근간으로 하는 공동체의 문학이었다. 노동하는 자와 창작하는 자가 일치하는 문학이야말로 보그다노프(A. Bogdanov)가 주도하던 문화집단 쁘롤레뜨꿀뜨(Proletkul’t)의 이상이었다. 이는 아마도 모더니티의 성립 이후 삶/정치와 문학의 일치라는 순정한 이상주의가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쁘롤레뜨꿀뜨의 조직은 광범위했으며 그 탓에 곧 내적 균열을 겪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주도권을 주장하는 그룹‘시월’과 포괄적인 범민중적 연합을 주장한 그룹‘대장간’의 노선 갈등을 거쳐서, 이 조직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국가미학’의 내부로 일원화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실험했던 삶/정치로서의 문학은 주류미학이자 공식미학의 일부로서 사회발전의‘톱니바퀴’가 될 것을 요청받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레프로 대표되는 무정부주의적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연합이 붕괴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삶의 실험과 문학적 실험의 일치에 대한 전위의 기획이 파탄을 맞이한 것은 러시아만의 현상이 아니다. 원인과 과정은 다르지만 세기초의 유럽 전위들 역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일부의 아방가르드는 파시즘에 경도되었으며, 주류화된 또다른 일부는 20세기 중반 이후 (불가능한) 반복과 중성화, 키치화 등에 의해 형질변화를 겪게 된다. 전자의 경우, 이딸리아에서 마리네띠의 미래주의 선언이 노골적으로 내장했던 파시즘적 지향은 마야꼽스끼로 대표되는 러시아 미래주의자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력을 주는 전쟁, 군국주의, 애국심, 무정부주의자의 파괴적 힘, 살상이라는 아름다운 이상, 여성에 대한 경멸을 찬양한다.”(마리네띠) 벤야민의 구분대로, 이‘정치의 심미화’(aestheticizing of politics)는 사회주의 예술의‘예술의 정치화’(politicizing art)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현대적 아름다움’을 절대화함으로써 전쟁과 전체주의 등 대규모로 일어나는‘현대적 참상’에 편입되는 경향을 띤다. 또한 50, 60년대 일부 팝아트들이 창조적‘차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키치화 과정을 겪으며 상품화 경향에 동조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50, 60년대의 모든 전위적 경향이‘바보들의 시장’(꽁빠뇽)으로 전락해간 것은 아니다. 자율성을 무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예술의 최대치를 달성하고자 했던 레프와는 다른 사례로 우리는, 언어 내부의 전위적 실험을 통해 정치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뗄껠의 사례를 참조할 수 있다. 쏠레르스(P. Sollers)가 주도하던 잡지 『뗄껠』(Tel Quel)의 기획, 특히 1968년 이후 마오주의에 경도된 후기 뗄껠의 의의는 문학적 코드의 일탈을‘언제나’정치적인 것으로 확장하여 해석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는 형식주의와 맑스주의의 대립상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였으나 문학적 코드의 일탈과 정치적 일탈 사이의 직접적 등치에는 모종의 비약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글쓰기는 특별한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쏠레르스의 명제에서는 일종의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문자언어는 현실을 언어 속으로 소환하고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현실을‘초래하는 원인’으로 승격된다. 그래서 글쓰기(에크리뛰르)와 정치성의 일치/결합이라는 뗄껠의 명제는 많은 경우 창조적 글쓰기와 언어규범 간의‘전쟁’으로 치환된다. “쓰지 않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체계에 의해서‘씌어진다’”는 쏠레르스의 매력적인 명제는 실상, 쓰는 행위에 대한 주체성의 강조라기보다는 언어적 위반의 절대화에 정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어의 영토에서 진정으로 모든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언어규범의 일탈을 추출해내는 것”이 이 시도의 이상이 된다.14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규범으로부터의 일탈과 정치적 변혁 사이의 절합지점에서 발생하는 불일치, 혹은 언어 자체와 언어에 의해 직접 창안되는 것으로 간주된‘현실’사이의 괴리가 과소평가된 것은 아닌가?

언어규범(상징질서)과 일탈언어(시)의 이원적 대립 속에서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세번째 항목, 즉 저 두 항의 언어들에도 불구하고 외부에 존속하는 세계 자체이다. 중요한 것은 이항대립이 아니라 삼항대립이며, 여기에 개입하는 것은 일종의‘유물론적’사고라 할 만한 것이다. 언어(일탈언어)가 사고(혁명)와 완전한 동일체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 장애물의 절대적인 내재성을 강조하는 방식 말이다.15 현대라는 이름의‘용광로’는 코드의 전위적 일탈을 정치적 혁명성과 등치시키는 비약 자체를 삼켜버린다. 이는 물론 뗄껠의 정치성이 68혁명의 낭만적 속성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학적 이상주의는 정치적 이상주의에 연루되어 있었던 셈이다.

길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유사한 맥락에서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기 드보르(G. Debord)와 라울 바네겜(R. Vaneigem)이 대표하는 1960년대의‘국제상황주의자’들일 것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드보르)와 『일상생활의 혁명』(바네겜)이 대변하는 이 운동이 68혁명의 주요한 고리 중 하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운동은 뗄껠과 달리 텍스트가 아니라 실천 자체로서의‘시’를 추구했다.

“상황주의자들의 탈출구는 먼 후일의 혁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상적 삶을 재창안하는 것이었다. 세계에 대한 지각을 변형시키는 것과 사회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동일한 일이다.” 이 전위적 운동의 모토는 일상생활의 자율적(꼬뮌적) 재조직과 극단적인 반(反)상품화(반스펙터클)였다. 상품화에 대한 저항의 극단성은 가령 책조차 사포로 제본했다는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사포로 만든 책은 옆의 책들을 손상시키므로 서점에 진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상황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이런 극단성이 아니라 “창조성, 자발성, 그리고 시”라는 바네겜의 모토에 있다. 이때‘시’(poésie)는 좁은 의미의 시‘작품’이 아니라 창조적 자발성의 실현 자체를 지시한다. 문학은 반(反)문학이 됨으로써 역설적인 방식으로 구현되는 셈이다. “대부분의 예술작품들은 (진정한 삶의) 시를 배신”하기 때문에 삶 자체의‘시’는 예술을 버리고 떠난다. 바네겜에 의하면, 더이상 예술가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 구성원이‘하나씩의’예술가로서 열정적인 삶의 구성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황주의자들의 이 매력적인 시도는,‘엘리뜨주의적’요소와 당대 자본주의 경제의 호황 속에서 해체의 운명을 맞게 된다.16

 

앞서 살펴본 대로, 정치적 실험과 문학적 실험을 일치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해왔으되 문제는 지속성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 역사적 사례들이 오늘날 반복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많은 경우 그들의 선언은 그 자체가 이미 절정이었다. 그들은 안전한 문화적 세계에 상주하는 대신 위태로운 과잉과 결핍을 감수하며 나아갔으되, 그것은 불가피하게도 파국을 향한 도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경험들을 실패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사례들로부터 모종의 암시와 열기를 느낀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가 아닌가? 명약관화한 답을 제시할 수는 없으되, 그 없음으로써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또한 문학이 아닌가? 백낙청은 지난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문제는 대개가 어떤 정답을 이미 전제하고 출발하거나 쉽게 정답에 도달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을 제대로 물을 때 정답이란 없다.”(18면) 아마도 우리는 이 문장을 뒤집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답이 없는 물음을 계속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라고.

끝으로 이 논의의 핵심적 주제 중 하나인 문학의‘자율성’이라는 오래된 주제에 대해 사족 하나를 덧붙여두기로 하자. 저‘자율성’의 영역을 무의지적 차원에서 지각하는 것은 민감한 시인들의 본능이다. 자율성을 신화화하는 소위 예술지상주의적 태도는 치기만만한 것이지만, 반대로 삶/정치의 내부로 환원될 수 없는 이‘잉여’혹은‘불순물’이 바로 문학의 가치라는 점을 무시하는 것 또한 안이한 일이다. 자율성은 문학이 자신의 지분을 주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문학이 삶/정치에 생산적으로 접속되기 위해 요청되는 모든 것의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4. 성애학으로서의 시

 

쑤전 쏜택(S. Sontag)은 한 에쎄이에서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한 적이 있다.17 해석학은‘해석’행위를 통해 작품을 길들이고 작품의 직접적 지각을 지연시킨다. 해석이란 텍스트의 지각을 유보하거나 연기하고‘의미’라는‘그림자 세계’를 세움으로써 가능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성의 직접성을 강조하는 성애학(erotics)이 필요해진다.

해석의 역사 자체가 인문학의 독자적인 역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쏜택의 말은 물론 현대적 비평행위들에 대한 불만의 표현 이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비평가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대학과 출판제도 자체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해석학(비평)의 과잉이 성애학(문학)을‘임포텐스’상태로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해석학의 결여는 인문학적 성찰의 파탄에 다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쏜택의 말을 비평이 아니라 시가 발생하는 어떤 과정에 대입하고 싶어진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의 해석학이 아니라 세계의 성애학이다,라고 말이다. 시인의 성애학에 대해 김수영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시여, 침을 뱉어라」) 시적 성애학이란 김수영의 이 문장에 내포된 역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의지와 무의지가 혼융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문학적 쾌락이야말로 시적 정치성의 핵심은 아닌가? 이 지점에서 진은영의 매력적인 문장을 다시 읽어보기로 하자. 이것은 확실히 세계에 대한‘해석’이 아니라 이미 세계와의‘성애’를 강조하는 문장이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시인들에게 부과되는‘윤리적 의무’가 아니라, 시인들이 향유해야 할‘권리’자체이다.

 

치안질서 내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자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자들과 직접 조우하는 것, 의회민주주의의 형식으로부터 무질서하게 삐져나오는 정치적 열정의 공간에서 함께 어울리며 엉뚱하고 다채로운 상상력을 발동시켜 보는 것. 예술활동의 모든 시간이 이것들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 없이는, 의미작용을 하는 감성적 조직을 교란시키는 계기를 포착하기 힘들다는 점.(84면)

 

오늘의 구시대적 권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확실히 정치는 퇴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시민의 문화는‘진화’한 것 같다. 축제성과 자발성은‘촛불’의 의미이자 동시에 한계이겠지만, 이 한계가 없으면 촛불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이 지점에서‘촛불’은 문학에 대해 하나의 은유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의‘한계’를 정확하게‘동력’으로 전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런데 앞의 인용문에 이질적으로 끼어 있는 하나의 조건절이 눈에 띈다. “예술활동의 모든 시간이 이것들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구절 말이다. 이 묘한‘잉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의 시인들에게 저 정치적 창조성의 바깥에 마치 잔여분처럼 남아 있는 이 시간은 무엇에 바쳐져야 하는 것일까? 시인들마다 답은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일상 속의 소박하지만 근본적인 깨달음일 것이며, 누군가에게 그것은 문명이 앗아간 인간 정서의 고요한 회복일 것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은 과잉의 상상력과 낯선 환상 속으로의 침잠을 통해 삶의 피폐와 정신의 자유를 확인하는 일일 것이며, 또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은 사유와 언어의 굳은 관절들을 풀어 세계의 두려운 실재와 마주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런 것이다. “의미작용을 하는 감성적 조직을 교란시키는 (시적/정치적) 계기”는 우리 내부의 저 다양하고 이질적인 감각들을 소환하고 그것들을 전제하지 않으면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물론 무차별적인 다원주의가 아니다. 오늘의 이질적인 시적 경향들은 어떤 것이 저 은유적인‘온몸’에 조응하는 것인지를 두고 경합한다. 어떤 시가 제 삶을 떠나 머릿속의 가상을 창안하는 데 머무르고 있는지, 어떤 것이 그것으로 일종의 자기위안에 안주하고 있는지, 어떤 것이 제‘몸’의 외부에 완성되어 있는 틀의 반복에 머물러 있는지를 상호 조명한다. 시의 정치성은 이를 최저 수준으로 하여 발원할 것인데, 그제야 김수영의 역설적인‘온몸’은 (치안의 질서를 넘어서서) 저 축제적이며 자발적인 정치의 장 내부에 온전히 기입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김수영이 적어놓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간신히, 힘겹게, 그러나 정확한 방식으로 말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같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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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앞으로 이 책에서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면수만 기재한다.
  2.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직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은‘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몸’으로 하는 것이다.‘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적)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1981, 250면.
  3. 이 글에서‘정치’는 샹딸 무페(Chantal Mouffe)가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민주주의의 역설』 등에서 구분한‘정치’(politics)와‘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개념적 대립항을 염두에 둔다. 무페에게‘정치’는 제도의 영역이며,‘정치적인 것’은 인간사회에 항상 내재해 있는 존재론적 조건의 층위(즉 갈등과 적대)를 일컫는다. 이‘정치적인 것’의 문학적 번안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할 터인데, 조화로운 합의적 종결의 불가능성(무페의 용어로는‘경합적 다원주의’)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바흐찐(M. Bakhtin)의‘대화’(dialogue) 개념에 상응하는 면이 있다. 언제나 다른 목소리들과의 갈등과 적대(그러므로 수평적인 사랑) 속으로 힘겹게, 때로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투입시키는 시들(가령 김수영, 진이정, 황병승 등)은, 이 문학적 정치성의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4.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147면.
  5. 앙뚜안 꽁빠뇽 지음, 이재룡 옮김 『모더니티의 다섯개 역설』, 현대문학 2008, 235면. 다섯가지 역설적 상황은 “새로운 것에 대한 미신, 미래에 대한 종교, 이론에 대한 집착, 대중문화에 대한 호소, 부정의 열정”으로 요약된다.
  6. 같은 책 8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예술에 대해 제시되어온 그간의 분석들을 추가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수없이 반복된 후기 옥따비오 빠스의 현대성 성찰은 말할 것도 없고, 깔리네스꾸(M. Calinescu) 역시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1977)에서 현대예술을 복합적인 대립 속에서 존재하는 일종의‘위기 개념’으로 정의한 바 있다. 현대성 내부의 고대적 형식으로서‘근대의 서사시’에 주목한 프랑꼬 모레띠(F. Moretti)가 “모더니즘은 다름 아니라 하나의 모순의 장으로 묘사되어야만 한다”는 데 동의했던 것 역시 부기할 수 있을 것이다.
  7. W. Benjamin, “On Some Motifs in Baudelaire,” Selected Writings, vol.4, Cambridge: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 Press 2003, 326면.
  8.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최성만 「현대 매체미학의 선구자,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 선집 2』, 길 2007, 5~34면 참조.
  9. 질 들뢰즈, 펠릭스 가따리 지음, 이진경 옮김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동문선 2004, 67면.
  10. 자끄 랑씨에르 지음, 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 도서출판 b 2008, 39면.
  11. 삶과 예술의 일치 사례가 20세기로 제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술과 삶이 애초에 구분되지 않는다는 기원적 설명은 차치하고라도, 과거 낭만주의시대에도 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경향은 존재했다. 비록 이 시대의 경향은 우리의 논의와는 반대의 방향을 취했지만 말이다. 낭만주의에 고유한 이상주의는 삶을‘예술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예술이 삶을 모방하기보다는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오스카 와일드(OscarWilde)의 말이 상기하듯,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적 감성을 이상적인 상태로 설정하고 삶을 텍스트에 따라 변형하기를 희망했는데, 이는 소위‘행위시학’(poetics of behavior)의 분석대상이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Ju. Lotman, “Poetika by tovogo povedeniia v russkoi kul’ture 18 beka,” Istoriia i tipologiia russkoi kultury, Peterburg: Iskusstvo 2002 참조.
  12. 레프의 선언은 이렇다. “레프는 꼬뮌의 이상에 의한 예술을 지향할 것이다. 레프는 예술과 삶의 건설을 일치시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 레프는 비계급적인 예술은 물론 정치에만 몰두하여 낡은 전통을 답습하는 예술을 타파할 것이다.” “Programma: za chto boretsia Lef?” Literaturnye manifesty, Moskva: AGRAF 2001, 201~11면 참조. 이에 대한 보충적 논의로는, 졸저 『혁명과 모더니즘』, 랜덤하우스중앙 2005, 231~34면 참조.
  13. N. Chuzhak, “Literatura zhiznestroeniia,” Literatura Fakta: pervyi sbornik materialov rabotnikov LEFa, Moskva: Zakharov 2000, 61면.
  14. 쏠레르스의 말은 J. Culler, “‘Beyond’ Structuralism: Tel Quel,” Structuralist Poetic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5, 241면, 264면; 테렌스 혹스 지음, 정병훈 옮김 『구조주의와 기호학』, 을유문화사 1987, 211면 등에서 재인용.
  15. 이 문장은 유물론에 대한 지젝의 문장을 변주한 것이다. “유물론은 사고의 주체적 조정의 바깥에 있는 객관적인 실체라는 최소 명제를 고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고가 스스로와 완전한 동일체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 장애물의 절대적인 내재성(immanence)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주장되어야 한다.”(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혁명이 다가온다』, 길 2006, 53면) 아마도 이러한‘유물론적’사유는 서정성을 둘러싼 근래의 논의에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복하자면, 서정성을 둘러싼 근래의 토론은 ‘전통이냐 실험이냐’라든가 ‘서정적 동일성인가 해체인가’, 혹은 ‘주체냐 탈주체냐’등등의 단순한 이항대립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대립항들의 ‘사이’이며, 여기에 실재로서의 외재적 세계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가령 외재적 대상에 대한 발화자의 서정적 개입 양상이나, 이 개입을 통해 발화자가 자신이 생산한 시적 표상의 일부로 (재)편입되는 아이러니의 양상 등은 서정성 논의의 발전을 위해 좀더 정치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김준오金俊五의 『시론』 등 고전적 저작들에서 이미 반복적으로 상술된 바 있는) 현대적 삶의 파편성에 대해 동일성의 사유가 지닌 의미를 재확인하기보다는, 논점을 좀더 다양하며 현실적인 방향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16. 인용한 문장들은 기 드보르 지음, 이경숙 옮김 『스펙타클의 사회』, 현실문화연구 1996; 라울 바네겜 지음, 주형일 옮김 『일상생활의 혁명』, 시울 2006 등에서 재인용. 상황주의자들의 의의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은 이재원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컬처뉴스』 2007.3.26 참조.
  17. 쑤전 쏜택 지음, 이민아 옮김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