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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시적 상상력, 근대체제를 겨누다

신동엽 40주기에 부쳐

 

오창은 吳昶銀

문학평론가,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 평론집으로 『비평의 모험』이 있음. longcau@hanmail.net

 

 

1. 종교와 예술 그리고 법열(法悅)

 

한 기이한 죽음이 신동엽(申東曄, 1930~69)의 산문 「금강잡기(錦江雜記)」(1963)에 담겨 있다. 이 산문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종교가 역사적 공간인 금강(錦江)과 어우러져 설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글의 전개방식에도 사건의 결과를 미리 제시한 후 그 원인을 하나하나 밝혀나가는 미스터리 기법을 활용했다.

「금강잡기」가 품고 있는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1960년 즈음의 어느 새벽, 백제의 고도 B읍(부여)에 천지를 울리는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어제저녁까지 맑았던 하늘이 갑작스런 뇌성벽력으로 조화를 부린 것이다. 새벽잠을 설친 사람들은 아침에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천둥 번개가 있기 바로 전에 세 여승(女僧)이 나란히 금강으로 걸어들어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여승들은 경주의 절에서 재강습(再講習)을 받고 자신들이 소속된 무량사로 향하다, B읍의 유서 깊은 고찰에서 여독을 풀던 중이었다. 그들은 관광객을 상대하는 사진사, 사탕장사와 어울려 농담도 주고받으며, 강가에서 조약돌을 주워 자신들의 바랑에 가득 채웠다. 마지막 날에는 절의 주지와 사진사를 청해놓고 과자와 호콩을 나누며‘내일 새벽 일찍 첫 버스로 떠날 예정이니 없으면 간 줄 알아달라’고 작별인사까지 했다.

다음날 새벽, 여승들은 “조약돌들이 가득 담긴 무거운 그 바랑 주머니들을 어깨에 걸머져 허리에 꽉 졸라매고 귀신도 모르게 조용히 일렬로 늘어서서 강의 중심을 향하여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 들어갔”다.(348면, 이하 인용면수는 『신동엽전집』, 창비 1989) 그런데 이 장면을 마을의 사공이 보고 이들을 구하려 소리를 지르자 무서운 뇌성벽력과 함께 소나기가 십여분 동안 몰아쳤다.

이 기이한 동반자살(혹은 동반열반)을 바라보는 신동엽의 태도는 경건하다. 그는 “이승 저켠 피안의 세계에 무엇을 보았길래 세 사람이 동시에 서쪽 하늘을 향해 합장하고 행렬지어 한가닥 미련 없이 점점 깊어지는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극적인 죽음 앞에 위대한 예술에서와 같은 법열(法悅)”(349면)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신동엽은 이 사건에 압도당한 듯하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은 경이로운 체험이었고, 상상을 뛰어넘는 상황전개로 인한 심리적 충격이었다.

신동엽이 “나는 요새도 가끔 그 세 여승의 죽음을 생각하면 종교·예술이 지니는 어떤 지상의 자세 같은 것을 그들의 마지막 행렬에서 느끼게 된다”(같은 면)고 말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종교와 예술을 동일한 맥락에 놓고 예술을 고민한 시인이었다. 신동엽은‘시는 세속에 몸을 섞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따스한 감성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인생과 세계의 본질을 통찰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그였기에 “멀고 먼 그 겨냥을 향해 아무 잡티 없이 달려가는 빠른 화살”(같은 면)처럼 피안의 세계로 떠난 세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는 양가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세 여승에게 겸허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세상사에 초연한 그들의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 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신동엽은 종교와 예술 사이를 견디며 시의 길을 걸어갔다. 마치 세 여승이 합장하고 행렬을 지어 물속으로 걸어갔듯, 1960년대의 험한 세파 속으로 몸을 밀고 나아갔다.

신동엽은 한 글에서 시인이란 모름지기 “민중 속에서 흙탕물을 마시고, 민중 속에서 서러움을 숨쉬고 민중 속에서 민중의 정열과 지성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0년대의 시단 분포도」 379면) 그는 시와 종교를 같은 높이의 단상 위에 놓으면서도, 시정(市井)의 감각을 강조해 현실에 몸을 바짝 붙이려고 했다. 그렇기에, 1960년대와 불화하면서도 그 극복을 위해 체제에 갇히지 않는 시적 상상력의 날개를 넓게 펼쳤던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신동엽이 꿈꾼‘다른 세상’과‘민주주의적 열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보고자 한다.

 

 

2. 반체제를 넘는 비체제적 상상력

 

등단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1959)는 신동엽의 시인정신이 농축되어 있는 원형질의 시다. 이 시에는 자연과 소통하는 인간을 향한 시인의 염원이 주제의식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것은 근대화된 세계 혹은 대지의 힘을 망각한 세계에 대한 강한 질타를 포함한다.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는 1950년대 한국시의 주류적 흐름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듯한 작품이다. 한국 시사(詩史)에서 어느 시인의 등단작이 이토록 긴 호흡을 감당하며 대지와 우주를 오가는 낙차를 견뎌냈던가? 우주를 이야기하는 듯하면서도 세속의 아픔을 감싸안은 이 시는 읽는이의 감성을 묵직한 시혼(詩魂)으로 뒤흔들어놓는다.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 시임에도 시 전체를 관통하는 통렬한 기운은 도도하다.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는 신동엽 시정신의 원석이 갈무리되어 있는 시로 평가할 수 있다.

서화(序話)와 후화(後話)를 포함해 8장으로 구성된 이 시의 화자는 전쟁의 화신이었던 강한 남성, 모든 기운을 흡수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염원하는 여성, 그리고 삶의 원초적 원리 속에서 발화하는 시적 화자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은 대지와 교접하며 벌거벗은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고, 인간 삶의 토대인 자연의 에너지에 자신을 의탁해간다. 특히 제5화에서 기존의 현실에 대한 전복적 태도가 압축적 언어로 표현되었다.

 

가리워진 안개를 걷게 하라,

국경이며 탑이며 어용학(御用學)의 울타리며

죽 가래 밀어 바다로 몰아 넣라.

 

하여 하늘을 흐르는 날개처럼

한 세상 한 바람 한 햇빛 속에,

만 가지와 만 노래를 한 가지로 흐르게 하라.

 

보다 큰 집단은 보다 큰 체계를 건축하고,

보다 큰 체계는 보다 큰 악을 양조(釀造)한다.

 

조직은 형식을 강요하고

형식은 위조품을 모집한다.

 

하여, 전통은 궁궐 안의 상전(上典)이 되고

조작된 권위는 주위를 침식한다.

 

국경이며 탑이며 일만년 울타리며

죽 가래 밀어 바다로 몰아 넣라.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제5화 전문

 

가까운 곳만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해도 갇힌 존재일 뿐이다. 가까운 곳과 먼 곳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어디로 향할지 가늠이 된다. 그렇다면 이 시의 화자는 어떠한가? 그는 가까운 곳만 볼 수 있는 사람도, 가까운 곳과 먼 곳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도 모두‘안개 속에 갇혀 있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는 안개 밖에 있는 것이다. 안개를 걷어내지 않으면, 모두들 금기(禁忌)의 국경에 갇혀 있고, 위로만 솟은 탑 속의 수인(囚人)들이며, 기존의 체계를 고수하려는 이데올로기적 학문에 시야가 막힌 존재들일 뿐이다.

시적 화자는 하늘의 뜻과 닿아 있는‘하나의 도(道)’를 염원한다. 그것은 “한 세상 한 바람 한 햇빛 속에, 만 가지와 만 노래를 한 가지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 도(道)는 지배계급이 위계적으로 만들어낸 모든 집단, 조직, 체계를 거부한다. 더불어 동의에 기반하지 않은 권위와 전통도 거부한다. 이러한 지배질서는 “죽 가래 밀어 바다로 몰아 넣”어야 하는 급진적 전복의 대상이다. 과연 시적 화자가 궁구하는‘하나의 도’는 무엇일까? 그것은‘왕궁(王宮)과 통치권’에도 아랑곳없이 자연과 밀착한 자립적 삶을 의미하리라. 경쟁으로 이룩된 체계가 아니라, 상호 부조와 협력에 의해 유지되는 공동체사회가‘하나의 도, 하늘의 도’에 근접한 삶일 것이다.

신동엽은 경쟁의 논리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체제 밖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엄존하는 현실에 균열을 내려 했다. 존재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불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전복했다. 자본주의에 반대하여 사회주의 등을 상상한 것이‘반체제’라면, 신동엽의 태도는 기존의 체제 바깥을 지향한‘비체제적 상상력’이라 일컬을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그는 자유롭기 위해 시인이 되었고, 시인이 되어 “우주밖 창을 여는 맑은 신명”과 “태양빛 거느리는 맑은 서사의 강”을 열망했다.(같은 시, 後話)

신동엽은 분단체제하에서 가해지는 이데올로기적 폭력에도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체제 안에 있으면서도 체제 밖을 상상했기에 끊임없이 제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신동엽이 동시대의 분단체제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자본주의적 근대와 갈등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시 「진달래 산천」(1959)은 그 대표적인 예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에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진달래 산천」 부분

 

이 작품은 신동엽이 벗 구상회와 함께 부소산 장군바위에 올라 우연히 보게 된 시신(屍身)에서 착상했다고 한다. 봄날의 진달래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 붉은 빛에 역사에서 이름없이 스러져간 이들의 아픔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신동엽은 그 누구도 거두지 못한 시신에서 역사의 폭력을 상기하고 진혼곡을 읊었다. 그는 죽은이의 그리움을 되받아‘불 붙는 꽃죽’으로 소생시켰다. 그의 진혼은 이데올로기를 아우르는 것이었고, 남과 북의 체제로 소환되지 않는 경건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의 엄혹한 반공주의 서슬에 그의 시는 날카롭게 베여 상처를 입었다. 문제가 된 구절은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산으로 갔어요”였다. 이 구절에서 빨치산의 형상을 읽은 반공주의 문인들이 신동엽을 용공으로 내몬 것이다.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육신의 구속이 아니다.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검열이고,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검열이 파생시키는 내적 검열이다. 체제 바깥을 상상하며 문학언어로‘다른 삶’을 구상하는 시인에게‘내적 검열’은 치명적 억압이다. 그의 작품에 가해진 삭제나 용공시비는‘내적 검열’을 강요한 수난이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신동엽은 4·19혁명을 맞이했다. 신동엽이‘4월의 시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4월은 갈아엎는 달」 「껍데기는 가라」 같은 시를 창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4월혁명의 감격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해 세계와 당당하게 맞서는 시인의 의지를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시인의 견결한 대결의식은 1960년대 분단의 억압 아래서는 감히 쓸 수 없었던 다음과 같은 싯구도 가능하게 했다.

 

반도는,

평등한 노동과 평등한 분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그 위에 백성들의

축제가 자라났다.

 

늙으면 마을사람들에 싸여

웃으며 눈감고

양지바른 뒷동산에 누워선,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남겼다.

 

반도는

평화한 두레와 평등한 분배의

무정부 마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그 위에 청춘들의

축제가 자라났다.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

-「금강」 137~38면

 

모든 체제는 그 바깥을 공포의 이미지로 덧칠한다. 체제 밖으로 배제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보여줌으로써 체제의 정당성을 웅변하려 한다.‘배제와 포섭’은 합법화된 체제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남북 분단상황에서 체제 바깥은 바로 이적(利敵)이었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가보안법의 막강한 위력도‘체제 바깥을 금기시’하려는 정치권력의 의도와 관련이 있다. 신동엽의 시는 남과 북의 체제를 동시에 넘어서는‘이상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체제를 뛰어넘고 있다. 그는 자유로운 시인으로서 발화하고 있으며, 아나키스트적 상상으로‘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억압적 체제 아래에서 의로운 사람은 수난자의 길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신동엽은 체제 바깥에 자리잡은 고집스런 선지자의 이미지를 감당해야 했다. 그는‘비체제적 상상력’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기에, 이단자이며 수난자였고, 가끔은 선지자로 호명되었다.

신동엽은 어떻게‘비체제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시적 울림을 창조해낼 수 있었을까? 몇가지 단서는 있다. 그는 문단제도 바깥에서 문학질서로 진입해온 이방인이었다. 그는 지방 출신이었고, 체계적인 문학수련을 한 문인지망생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삶도 신산하기 그지없었다. 수재들만 진학한다는 전주사범에서 동맹휴업에 가담해 퇴학처분을 받았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인공(人共) 치하에서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을 맡아 좌익노선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좌와 우를 넘나들며 분단의 폭력을 몸으로 견뎌야 했다. 여기에다 전주사범 재학 시절 그가 읽었던 아나키즘 사상도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의 아나키즘 사상가 끄로뽀뜨낀(P. Kropotkin)의 『상호부조론』은 그의 세계관에 깊이 개입한 듯하다.

 

 

3. 민주주의와 농민공동체

 

그렇다면 신동엽이 상상한‘다른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1960년대 한국사회는‘민생고 해결’과 경제성장이 지배담론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이 성장·발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조국근대화론’이 당면과제로 제시되었다. 박정희정권은 자본주의적 경쟁을 숙명화해 적자생존 방식의 사회씨스템을 재구축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근대적 경제성장이 추진되는 것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은 많았다. 하지만 근본주의적 태도를 취하며 근대화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는 지식인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쟁의 원리에 기반한 근대 산업화의 논리를 편 근대주의자들은‘상호부조’라는 윤리적 가치를 통해 농민공동체를 옹호하는 이들을‘시대에 뒤떨어진 전통주의자’로 매도했다. 근대주의자들은 윤리·생명의 가치보다는 경쟁의 원리에 입각한 경제성장을 최우선과제로 간주했다. 이러한 지배담론의 흐름 속에서 신동엽은 정면으로 체제를 거스르는 시적 발언들을 토해냈다.

그는 “앞마을 뒷마을은/한 식구,/두레로 노동을 교환하고/쌀과 떡, 무명과 꽃밭/아침 저녁 나누었다”는 역사 속‘생활의 시대’를 예찬했다. 그 시대에는 “왕은,/백성들의 가슴에 단/꽃”이었고, “군대는,/백성의 고용한/문지기”였다.(「금강」 136면) 이상적인 세계로 역사 속의 과거를 낭만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 삶의 원리는 상호부조를 버팀목으로 삼고 있다. 반면 근대는 자본에 대한 인간의 예속이며, 민중에 대한 착취를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누구였던가, 무엇에 당선만 되면

다음날 당장 미국에 건너가

더 많은 동냥, 얻어올 수 있다고 장담했던

정치 거지는,

 

내 진실로 묻노니 그대들이 구걸해 온

동냥돈이, 단 한번만이라도 농민들의

밥사발에, 쌀밥으로 담겨져본 적이 있었는가.

-「금강」 141면

 

자본주의체제에서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로 고착화되어 있다. 대의민주주의는 정당이나 대리인에게 권력을 위임함으로써 운영되는 원리다. 문제는 위임받은 권력이 임의로 행사되고 있지는 않은가와 민중이 직접‘대의제’를 통제할 수 있는가다. 견고한 지배체제 속에서 대의민주주의는 지속적으로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제도화되어왔고, 피지배계층에게는 폭력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제, 민주주의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소규모 자치·자립 공동체는 고사 직전에 이르렀다. 시민사회의 자발적 연대도 자본주의가 재생산하는 소비주의적 욕망에 대항해 위태로운 균열을 간신히 견디고 있다. 신자유주의 아래서의 자유는‘개인의 자유’가 아니라,‘자본이 자유롭게 개인을 착취할 수 있는 자유’일 뿐이었다. 국가기구도 자본의 자유를 위해 동원되는 상황을 한미FTA와 금융자본의 횡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자본에 의해 농락당하는 생태와 생명 그리고 정의로운 먹을거리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다. 생명의 근간을 돌보지 않는 권력은 그것이 비록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폭력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생명을 영위할 수 있는 근본적 토대인 농촌사회를 새롭게 성찰하는 것, 이를 위해 민주주의의 근간인 자주적 개체들의 공동체적 연대를 복원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신동엽은 대의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중의 생명권을 위협했는가를 폭로하며 그 제도 자체를 거부한다. 더 나아가 지배질서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비폭력이 아닌 대항폭력을 적극적으로 의미화하고 있다. 그 대항폭력을 위한 거대한 서사가 바로 「금강」(1967)이다. 신동엽은 농촌에 대한 경멸, 농민에 대한 무시가 어떤 파국을 불러올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금강」은 단지 역사적 사건의 서사화가 아니다. 「금강」은‘생명의 근간을 다루는 농민을 멸시’한 권력의 파국에 관한 이야기이고, 생태위기에 처한 지구의 미래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다.

근대 산업화에 대한 적극적 거부의 감성은 「서울」(1969)이라는 시에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초가을, 머리에 손가락 빗질하며

남산에 올랐다.

팔각정에서 장안을 굽어보다가

갑자기 보리씨가 뿌리고 싶어졌다.

저 고층 건물들을 갈아엎고 그 광활한 땅에

보리를 심으면 이 이랑이랑마다 얼마나 싱싱한

곡식들이 사시사철 물결칠 것이랴.

 

서울 사람들은

벼락이 무서워

피뢰탑을 높이 올리고 산다.

 

내일이라도 한강 다리만 끊어 놓으면

열흘도 못가 굶어죽을

특별시민들은

과연 맹목기능자(盲目技能者)이어선가

도열병약(稻熱病藥) 광고며, 비료 광고를

신문에 내놓고 점잖다.

-「서울」 부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근대화의 성과에 매혹되어 있을 때, 신동엽은 근대가 아닌 인간의 역사에 눈길을 던졌다. 그 역사 속에는‘비천하다고 간주되었던 삶’들이 있었고, 어둠 속에서도 움트는 생명의 의지가 약동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민중이라는 이름의 우리’가 면면히 삶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은 농민의 감성으로 도시를 바라보며 도시화를 풍자한 작품이다. 신동엽은 국가나 시장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농민적 자치공동체를 구상했다. 그의 관점을 단지 전통적 세계관을 고수하는 고집스런 관점으로만 볼 수는 없다. 쌀을 제외한 곡물의 자급률이 25%에 지나지 않는 지금의 한국사회가 어떻게 민주주의적이고 자주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겠는가? 공동체의 먹을거리를 공동체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식으로든 외부세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농업은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힘을 빌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다. 그래서 남산 팔각정에 올라 서울을 굽어보다 서울에 보리씨를 뿌리고자 하는 화자의 태도는 도시와 근대에 대한 대결적 의식을 표현한다. 반면 도시민들은 자연과 대결하려는 태도를 보이는데,‘벼락이 무서워 피뢰탑’을 세우는 것이 그 예다. 농촌과 자연이 생명의 근원임을 애써 무시하는 서울특별시민들은‘벼락을 무서워할 뿐 농민 무서운 줄’은 모른다. 시적 화자는 그 무감각이 도시에서는 필요도 없는‘도열병약 광고며 비료 광고’가 신문에 등장하는 것에 빗대 풍자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판을 넘어 다른 미래를 상상했을 때, 신동엽의 시는 어떤 구체성을 띠고 있을까? 「산문시 1」(1968)이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散文詩 1」 전문

 

이 시는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1968)과 더불어 통쾌하고 흐뭇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유토피아적 상상으로 출렁이는 이 시에는 일체의 억압적 권위를 거부하는 시인의 정신이 곳곳에 스며 있다. 딸과 백화점에 칫솔을 사러 나온 대통령, 삼등열차를 타고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그 어떤 신분적 위계도 없이 사람을 대하는 서울역장의 모습이 이채롭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은 있지만 그 어떤 억압적 권력도 소유하지 않은 봉사직(奉仕職) 정치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세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와 러쎌, 헤밍웨이와 장자를 읽는 노동자들이 필요하다. 더불어 대통령의 이름은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히 꿰고 있는 농민들의 문화적 역량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힘에 굴종하지 않고 그 어떤 폭력전쟁도 용납하지 않으려는‘배짱 든든한 국민들’의 결연함도 요구된다.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정의로운 권력은 민중의 역량(puissance)에서 나온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그 역량은 제도화된 권력의 산물이 아니라 권력의 이면에서 권력을 움직이는 민중의 자발적 힘이기도 하다. 제도화된 권력은 너무도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지만, 민중의 역량에 기반을 둔 권력은 지속적인 재생 가능성을 갖고 있다. 신동엽이 꿈꾼 세계도 민중의 역량에 기반을 두고 도달하는 이상사회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상사회가 한국사회에서 구현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시인은 시 속에‘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서울역장’‘반도의 달밤’같은 싯구를 새겨놓았다.

일각에서는 신동엽의 시가 민족주의적이기에 1960년대적 상황에서만 의미있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뿌리에 대한 애정 없이 나의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내 존재에게 베풀어진 가족, 내 땅, 내 이웃에 대해 충실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 미덕이다. 대부분의 사랑은 이러한 미덕을 통해 유지된다. 신동엽의 시에‘조국’이라는 시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애국주의(쇼비니즘)’로 보는 것도 문제다. 신동엽은 어떤 조국, 어떤 국가여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풀뿌리 민중의 자립과 자치에 기반을 둔 평화로운 공동체의 구성을 염원했다. 이러한 자립과 자치의 원칙하에서 신동엽은‘외세의 침략과 간섭’에 대해 그토록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동의를 기반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운영되면서도 평화주의적인 공동체는‘경쟁이 아닌 상호 보살핌과 베풂을 향한 윤리적 노력’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서로간의 보살핌 속에서 가능하다면,‘그 베풂에 대한 보답’은 삶에 부과된 의무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적 미덕과 삶의 의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감성을 갈취하는‘국가기구’의 허구적 이데올로기다. 정치권력의 편파적 이익은 은폐한 채 민족주의·애국주의를 선동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뿌리에 대한 진지한 애정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어떤 방식으로든‘풀뿌리 민중의 자치와 자립’에 기반을 두지 않고는 구현될 수 없고, 진정한 자치와 자립은 평화와 공존을 위한 세계적 연대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신동엽이 시 「아사녀」(1960)에서 4·19를 노래할 때‘알제리아 흑인촌’‘카스피해 바닷가 촌아가씨 마을’을 호명한 것도 이러한 민중적 연대를 상상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신동엽은 “자기에의 내찰(內察), 이웃에의 연민, 공동언어(共同言語)를 쓰고 있는 조국에의 대승적 관심, 나아가서 태양의 아들로서의 인류에의 연민을 실감해 봄이 없이 시인(詩人)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7월의 문단」384면)라고 강조해서 말했던 것이리라.

 

 

4. 불가능한 것을 꿈꾼 ‘진정한 시적 지성’

 

신동엽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선우휘(鮮于煇)씨의 홍두깨」(1969)라는 산문을 써서 체제에 갇힌 어리석은 이들의 편견을 질타한 바 있다. 이 글 또한 자신이 김수영(金洙暎)을 추모하며 쓴 「지맥(地脈) 속의 분수(噴水)」(1968)에 대하여 선우휘가 비판을 하자, 그에 대해 반박한 것이기도 하다. 선우휘는 「현실과 지식인-증언적 지식인 비판」(『아세아』 1969년 4월호)에서 신동엽의 글이‘혁명을 선동하는 사회주의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듯이 내몰았다. 신동엽은 그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석가와 시인’이 등장하는 일화로부터 시작했다. 마치 이 산문은 「진달래 산천」의‘빨치산 논란’과 선우휘의 공격을 동시에 상대하려는 의도로 씌어진 듯 읽힌다. 더불어 이 산문은 신동엽이 남긴 마지막 산문이기에 그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석가와 한 사람의 시인이 세상을 주유하고 있었다.

어느 날, 월남땅을 지나다, 얼굴이 앳된 한 미국 병사의 주검과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한 여자 베트콩의 주검을 보았다.

석가와 시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합장하고 앉아 그 두 주검의 이마 위에 명복의 기도와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그들은 일어나 길을 떠났다.

국민학교 학생과 수사관이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제가끔 자기 선생님과 자기 상관에게로 달려간 것이다. 빨리 일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선생님, 저기 베트콩의 주검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어요, 수상해요.” 또는 “상관님, 저기 미국 병사의 주검을 보고 서럽게 우는 놈이 있어요. 틀림없이 백색(白色)인 것 같아요!”

-「선우휘씨의 홍두깨」 394면

 

문학(시인)과 종교(석가)를 동반자로 등장시켜, 세상의 고통을 위로하려는 풍경이 이채롭다. 신동엽은 시인의 역할에 대한 소명의식이 남달랐다. 그는 “성서나 불경, 수운(水雲)의 『동경대전(東經大典)』(…)을 시라고 믿고 있다”고 했으며, 그것들이 “민중에게 짙은 구원의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다”고 주장했다.(「詩人·歌人·詩業家」 393면) 그 구원의 그림자를 가늠하기 위해 근대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인간의 원초성을 발굴하기 위해 역사를 유영했다. 그에게 시는 “궁극에 가서 종교가 될 것”이며, “철학, 종교, 시는 궁극에 가서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시인정신론」 372면) 그렇기에 속세가 이념적으로 구분한 미군 병사와 여자 베트콩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들은 모두 체제의 폭력이 낳은 상잔(相殘)의 희생양이고, 죽었기에 구원받을 여지가 생긴 피안의 존재들이다. 그런데 여전히 체제는 미숙한 국민학생과 수사관으로 하여금 현세의 잣대로 문학과 종교마저 억압하려 했다.

신동엽이 세상을 떠난 이후 40년이 흘렀다. 그는 고절한 옛 언어를 시어로 다루어 「아사녀」 「진이의 체온」 「수운이 말하기를」 등의 시에서 역사와 현실을 대비시키는 상상력을 자극했고, 민중주의적 시각에 기반을 두어 창작한 「주린 땅의 지도원리」 「4월은 갈아엎는 달」 「껍데기는 가라」 「종로5가」 등에서 곧고 단단한 지식인의 면모를 발산했다. 그런가 하면 「별밭에」 「산에 언덕에」 「원추리」 「담배 연기처럼」 같은 시를 통해 가슴 적시는 서정의 세계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시정신은 갑오농민전쟁을 그린 장편 서사시 「금강」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신동엽은 역사 속에 몸을 깊숙이 적셔 민중의 간절한 염원을 서사화한 한국 시인지성의 한 전범이었다. 이러한 면모 덕분에 1960년대라는 시대상황에 비추어‘민족시인’‘저항시인’으로 의미화되어왔다.

역사적 평가는‘현재성’의 맥락에서 다시 가늠되고 기술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기술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문학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정 정치적 맥락이 개입되면, 역사서술 자체가 투쟁의 영역이 되곤 한다. 실제로 신동엽은 1970년대 이후 민족문학담론의 전형 역할을 감당한 시인이었다.‘민족시인’이라는 호칭은 그의 시에 바친 문학사적 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1990년대 즈음부터‘민족주의를 둘러싼 논란의 표적’이 되었다. 때로는 폐쇄적 민족주의의 주창자로, 때로는 상상된 민족 이야기의 시적 구현자로 간주되었다. 이념의 잣대로 평가된 시인의 시세계는 축복일 수도 있지만, 특정 시기에는 재앙이 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신동엽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가 논자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요동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그의 시세계가‘우리’를 강조함으로써 타자를 배제하는 배타적 면모를 보인다고도 하고, 민족주의에 갇혀 있어 폐쇄적이라는 비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는 1990년대 이후 광범위한 영역에서 세계화의 영향으로‘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고,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도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의 증가로‘다문화적 감성’이 중시되는 시대적 분위기와도 연관되어 있다. 게다가 신동엽의 시는 농민적 감수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어, 도시화율이 81.5%(2005년 기준)에 이른 현상황에서 전통적 세계관에 얽혀 있는 듯 읽히기도 한다.

신동엽의 문학사적 위상 변화는 김수영에 대한 문학사적 고평과 대비할 때 더 명료해진다. 모더니스트에서 출발해 현실주의자로서 번뇌했던 김수영은 경계에 선 시인이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모더니스트들에 의해 문학주의적 성취로 높이 평가되었고, 리얼리스트들 사이에서는 현실인식의 치열성으로 인해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다. 김수영은 1990년 이후에도 너무 자주 소환되는‘리얼-모더니스트’인 반면, 신동엽은 점점 누추해져가는‘민족주의 리얼리스트’로 간주되는 실정이다. 과연 신동엽의 시세계를 둘러싼 이러한 문학사적 평가는 온당한가? 시인의 시세계는 역사적 맥락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특정 논점에 따라 임의로 마름질하고, 특정 부분만 부각해 박음질해서는 안된다. 신동엽 4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작업이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동엽은 체제 바깥에서 체제를 낯설게 바라본 시인이었다. 분단이데올로기와 반공주의가 옥죄던 1960년대에, 그는 현실을 체제의 대립으로 바라보지 않고 풀뿌리 민중의 입장에서‘다른 세계’를 상상했다. 그 세계는 자립과 자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공동체였고, 생명에 대한 성찰을 통해 도달한 삶의 근원으로서의 농민 공동체, 자주적 공동체였다. 폐쇄적 민족주의라는 틀에서‘민족시인으로 호명되었던 신동엽’은 이제 “시란 생명의 발현이다”라고 주장한‘시인 신동엽’으로 다시 읽혀야 한다. 그는 “가로막힌 장벽이 없”(383면)고, 행여 있더라도 그것을 “넘어서서 다른 차원에로 진입”(378면)할 수 있는 선지자가 바로 시인이라고 했다. 모두가 근대화를 한국사회의 미래로 규정하던 시기에, 신동엽은 비체제적 상상력으로 경쟁의 논리를 넘어선 사회를 그려냈다. 불가능한 것을 꿈꾼 시인 신동엽이야말로‘진정한 시적 지성(知性)’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