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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민주주의』, 미지북스 2008
한국 민주주의의 좌표를 가늠케 해주는 참고문헌
유시주 柳時珠
희망제작소 부소장 ysj@makehope.org
『포스트민주주의』(Postdemocracy, 이한 옮김)의 저자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는 “추상적인 이론을 지상의 세계로 옮겨오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ⅶ면)는 평가를 받는 영국의 사회학자이다. 나는 한명의‘시민’임을 대통령직 못지않은 엄숙한 공적 신분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그래서 시민으로서의 소양과 덕목을 잃지 않기 위해 평소 이런저런 책을 많이 읽으려 애쓰는 사람이건만, 크라우치의 글은 이번에 처음 읽었다. 그럼에도 나는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스스로를 “유럽인이며 유럽사회에 대한 전문가일 뿐”이어서 한국 민주주의와 관련해 일어나는 여러 궁금증에 “답할 수 없다”(xv면)고 써놓은 것을 보고는 단박에 호감을 느꼈다. 어쩐지 그는 오늘날 한국의 선량한 시민들이 그토록 앙망하는 학자, 즉 모든 연구와 이론은 현실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자신이 발 딛고 선 구체적 현실을 탐구해,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시민들의 길 찾기를 도와주는 학자일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과연 그러한 학자였다.
이 책은 저자가 학자로서 지난 10년간 붙들고 씨름해온 몇가지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연구성과를 하나의 분명한 문제의식으로 꿰어 펴낸 것이다. 그가 “영국의 신노동당정부 주위로 몰려들던 새로운 정치계급”을 보고 불편함을 느끼면서(xvii면), 또는 주 정부의 교육부 고위관리로 일하던 아내를 통해 정부가 “교육부의 일과 학교의 일을 차례차례 민간기업에 넘겨주거나, 공교육이 민간기업에 쉽게 이전될 수 있도록 그 써비스에 대한 인식과 써비스 구조를 바꾸도록 명하는” 것을 지켜보면서(xx~xxi면) 품었던 의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990년대 말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중도좌파 정당들이 집권했는데, 왜 1980년대부터 시작된 흐름, 즉 부유하고 사회적 특권을 가진 자들에게 이익과 권력이 집중되는 흐름이 제어되기는커녕 강화되고 있는가? 유럽의 정당들은 전통적으로 전체 유권자, 지지층 유권자, 평당원, 정당 활동가, 핵심 지도층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의사수렴체계를 갖추고 있었는데 왜 오늘날은 그러한 상호작용의 연결고리들이 왜곡되거나 일그러져가고 있는가? 일정한 수준의 교육, 의료, 사회복지 써비스는 시장에서의 구매력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지위 때문에 당연히 주어지는 보편적 권리였는데, 왜 그것들이 이제는‘민영화’‘민간위탁’‘민간자본 투입 프로젝트’등을 통해 “수혜여건을 갖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으로 바뀌고 있는가? 저자는 이런 의문을 탐색해 논문이나 소책자로 발표했고, 그 과정에서 그 모든 현상들이 구조적으로 얽혀 있음을 통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포스트민주주의’다.
저자가 자신이 분석한 문제적 현실에‘민주주의의 위기’같은 일반적 표현을 쓰지 않고‘포스트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따로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삶의 더 많은 부분을 움켜쥐려고 날뛰는 자본주의 주위에 경계를 치려는 참으로 다양한 주체들의 분투로 점철”된(134~35면) 지난 200년 동안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기업과 그 경영자들이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할 정도의 큰 권력을”(174면) 휘두르고, “시장과 자유경쟁이라는 표어 아래”(84면) 공공성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민주주의의 핏줄인 시민들이‘정치 마케팅’의 소비자로 왜소화되는 일련의 흐름이 특별히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중대한 국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미국을 맹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우발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는”(6면) 것으로서 사실상 포스트민주주의적 현실을 방조하고 있다고 본다. “평등주의적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최대 이상에 더 가깝다고 보는 저자는 “자본주의 기업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정 수준의 사회적 타협”(13면)이 이루어져 복지국가 모델이 정립된 2차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를‘민주주의 시기’(democratic moment)로 파악한다.
‘포스트민주주의’는 시기적으로는 앞서 말한‘민주주의 시기’와 구분되는 개념으로서 “공공지출로 지탱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순환에 기반을 둔 경제”(15면), 즉 케인즈주의체제가 붕괴한 1970년대 후반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시기를 포괄한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자유선거, 복수정당, 정권교체, 자유로운 공개토론 같은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요소는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권력과 부는 정당의 핵심 지도층과 각종 고문, 컨썰턴트, 로비스트로 구성된‘정치계급’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다국적기업 엘리뜨들의 통제권 안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민주주의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복지국가는 차츰 잔여화됐다. 시민의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수혜요건을 갖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노동조합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국가 기능은 야경국가의 성격으로 두드러지게 회귀했다. 빈부격차는 커지고 있다. 세금의 재분배 기능은 줄어들었다. 정치가는 한줌도 안되는 기업가들의 관심사에만 주로 반응하고, 기업가의 특수이익이 공공정책으로 둔갑한다. 가난한 사람은 점차 정치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하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투표도 하지 않게 됐다.(37면)
오늘날 포스트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적 세계화”다. “단적으로 말해, 민주주의는 세계화를 향한 자본주의의 돌진과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47면) 민주주의 시기에는 육체노동자 계급이 조직되어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불평등을 적절히 제어했으나, “최대 민주주의가 사그라들면서” 생긴 정치적 공백을 “제도로서의 기업”이 치고 들어오면서 포스트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도 지적하듯이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가 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이라는 얘기는 “진부한 상투어”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신자유주의 경제가 어떤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정신과 동력을 무력화해나갔는가를 기업, 정당, 정부, 시민사회 그리고 그것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변화를 섬세하게 추적해 보여줌으로써 상투적 이해를 넘어서게 한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포스트민주주의는 경제에서의 신자유주의에 조응하는 정치현상을 일컫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오호라, 포스트맑스주의 시대에도 정치는 여전히 경제의 집약적 표현이다.)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한국 민주주의의 오늘 그리고 앞으로의 진로를 사유할 때 매우 유용한 참고문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서술해놓은‘포스트민주주의적인’갖가지 현실로 말하자면, 한국은 유럽과 미국에 뒤지지 않을 만큼 포스트민주주의적이다.‘CEO대통령’이라니, “정치가를 통치자가 아니라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고객’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열심히 찾으려고 하는 가게주인을 닮은 존재로 환원”(34면)하는 포스트민주주의의 첨단이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정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첨단 아래 놓여 있는‘차이’다. 이를테면 저자는 결론에서 포스트민주주의를 극복할 몇가지 방향을 제시하면서 직접민주주의 강화방안의 하나로 정치학자 필립 슈미터(Philppe Schmitter)가 제안한‘민회’를 소개한다.
민회 제안은, 광역자치단체 또는 기초자치단체 수준으로 확대되어 실시될 때 특별한 가치를 갖는다. (…) 일반적으로 지역에서는 늘 활동하는 운동가가 계속해서 자기 역할을 하고 유착된 기업과 정치가들의 써클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기초자치단체 수준의 포스트민주주의의 문제는 해소될 여지가 꽤 있다.(187면)
그러나 한국의 지역사회는 그와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토호들, 즉 민주주의 이전 시기에 형성된 지역 기업과 정치가들의 유착 써클이 민주화 이후에도 해체되지 않고 남아 포스트민주주의의 주체로 월반(越班)해 있는 형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는 사회적 시민권도, 동심원 구조의 정당도, 보편적 권리로서의 복지써비스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다. 일견‘글로벌 스탠더드’해 보이는 우리의 포스트민주주의적 현실에 홀려 역사적 지층의 그 엄연한 차이를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는 전(前) 민주주의와 포스트민주주의가 결합된‘괴물 민주주의’와 대적하며 민주주의를 완성해가야 하는 것일까? 크라우치가 대답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대답은 결국 한국 민주주의를 재구성해갈 주체인 한국 시민들이 할 것이다. 크라우치처럼 훌륭한 학자들이 도와준다면 그 대답이 더 빠르고 분명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