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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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수

박희수 朴熙秀

1986년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yupscp@gmail.com

 

 

 

삼면화(三面畵)

 

 

그때 우리는 그 교회에서 어떤 그림을 봤다. 그림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어머니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이 정확히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부자지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인간의 크고작은 변이형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그 위를 채우고 있는 흰 물감의 불투명한 광채가 그 얼굴을 온통 훼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로버트 히어리나스포스 『결혼식의 죽음』

 

병든 사람들에게

병과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병력 편성: 결심점-우군 중요 첩보-저지선-연대 초월 지점-교전수칙-디셉션 플랜(Deception Plan)-의명(依命)-제병 연합-장차 작전

 

결심점

 

두 눈을 감고 눈을 떴다.

 

환한 빛이 보였고 그건 기만이었다.

 

첫번째 시험을 이겨내자 어둠이 몰려왔고

 

혈관 속이 데워지기 시작했다.

 

우군 중요 첩보

 

3일 낮 12시경 안성에서 남쪽 15km근방 국도 위로 검은 승합차가 달려갔다.

 

이진석(26세, 무직)은 거기 타고 있었고 매시간 조금씩 더 위험한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목적지에 차가 도착하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차문을 열었고

 

검은 석탄가루가 붉은 내장처럼 차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지선

 

파도를 보고 울었다.

모래가 맑은 물 속에서 흩어졌고

그때마다 조금씩 더 고통스러웠다.

 

어디선가 막힌다면

그제서야 내 이름을 말할 수 있을 텐데.

 

꿈을 적어놓고 군홧발로 밟으며

내가 나를 조금씩

괴롭히고 있었다.

 

겨울은 불구의 이름이었고

얼린 피 나뭇가지 끝 가득히 차오르는

달밤을 맞이하고 싶었다.

 

연대 초월 지점

 

바람의 병력(病歷), 텅 빈 골목길에서 어두운 내가 가벼운 나를 앞서나갔다. 손에 잡히는 게 없어서 닥치는 대로 붙잡히는 모든 것을 어둠이라고 불렀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듯 검은 하늘에 흰 달이 떴고 그건 쥐씨(氏) 일가가 오늘 모두 죽었다는 뜻이었다. 태양이 저물며 산등성이에 알을 하나씩 남겨두고 사라졌고 거기서 별들이 깨어났다. 어린 쥐들이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교전수칙

 

그림자가 나를 병들게 했다

그러니 그림자가 나를 덮어주리라

 

물이 나를 병들게 했다

그러니 물이 나를 적셔주리라

 

비어 있는 모든 물잔을 바라봤고

물잔은 신기하게도 모두 속이 비어 있었다

 

시간이 나를 늙고 지치게 했다

그러니 시간은 나를 그냥

내버려두리라

 

디셉션 플랜(Deception Plan)

 

고아원의 아이들은 즐거운 얼굴로 거짓말을 하거나 즐거운 얼굴이라는 거짓말을 한다. 어린애들을 길들이던 나무 막대기는 칠판 옆의 옷걸이에 걸려 따뜻한 햇살 속에서 길이 든다. 아름다운 아카시아나무 밑의 향기, 현기증을 앓으며 봄이 몇번 피를 쏟았고 담벼락 뒤편의 신음소리가 모두 들리지 않는 고요한 오전이었다. 산부인과 가는 길의 순이는 봉고차 뒷좌석에서 어린 손을 자꾸 만지작거리며 국도변의 황량한 풍경을 마음속에 끌칼로 새겼다.

 

의명(依命)

 

날이 흐려졌다

청동을 두드려 만든 하늘은

서서히 녹이 슬고

피가 강에 섞여 떠내려온다

 

꿈과 기억

팔다리가 잘린 채

떠내려온다

 

…밤하늘의 별빛은

유연한 기총소사(機銃掃射)

은하수 위로 흘러가는

흰 뼈의 구름

 

이슬이 뚝뚝 흘리는 꿈

반짝거리며 아무 데로나

주사위의 눈에 눈을 맞추며

피 흐르듯 다가오는 아침

 

자기를 잡아먹고

피 묻힌 입으로 웃자

웃자, 피를 마시며

자기 살점을 묻힌 입술로

 

파도를 보고 울었다

 

제병 연합

 

윷 묶듯

손가락을 모으고

허공에 던졌다

 

차가운 성좌(星座),

손톱들이 부서지며

흩어져내렸다

 

우리는 공수〔神語〕를 받았다

 

그리고, 장차 작전

 

꾸밈없이 웃었다

맑은 물은

핏줄 속을 가득히 채우며 찰랑거렸다

 

두 눈을 뜨고

눈을 감았다

 

환한 빛이 보였고 이번에도 기만이었지만

조금 더 머무르기로 했다

 

거대한 어둠이 몰려왔고 그건 거의

눈부신 광선처럼 보였다

 

두번째 시험을 이겨내자 어떤 목소리가

높고 단단한 목소리로

크게 웃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빛이 왔다.

 

 

 

행복한 음악

 

 

어린 동자승, 주지스님 따라 계곡 갔다가 맑은 물 속 흐르는 업을 보고 깜짝 놀란다. 경을 외지 못해 졸던 계절은 그해 겨울의 선율이었고 눈 쌓인 대숲이 탁, 분별 꺾으며 만들던 화음이었다. 예끼 이 녀석, 전생에 무엇이었길래 이리 말을 안 듣는고? 스님, 스님, 난 전생에 계곡물이 콸콸 흐르는 물소리였어. 어린 부처가 웃는다. 그리고 폭설(暴雪), 절이 완벽하게 고립된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총무가 핸드폰으로 여기저기에 연락을 취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동자승은 경내에 가만히 앉아 풍경 끝에 맺히는 이슬을 멍하니 바라본다. 한방울의 맑은 음악은 자기 속에 주위의 모든 세상을 담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화톳불 가에서

 

 

그날 저녁

화톳불 가에서; 잔 속의 숨결처럼 일렁이는 불꽃

서로를 퍼내며 어둠의 깊이를 재었다

잔이 벽을 긁고 갈 때 아, 소리 질렀다

그날 저녁

화톳불 가에서

 

그날 저녁

화톳불 가에서; 배신하는 삶, 예술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다, 둘은 서로를 위한 존재라고

침상 위에서 포개지는

한쌍의 남녀처럼

 

바람에 취해 흔들리던

깊은 수목이었을 때-그때 너를

지탱할 수 없었고

 

뜨거움 삭히며 서로

열어갔다 찬바람, 살며시

좁은 화로 속으로 불어들어왔다

 

그날 저녁

화톳불 가에서; 잔 속의 호흡처럼 일렁이는 불꽃

서로 퍼내는 물살 속에서 자맥질했다

벽에 물이 차오를 때 아, 소리 질렀지만

결국 담담히, 식은 재처럼.

 

그날 저녁

화톳불 가에서

 

 

 

물고기들의 힘으로

 

 

오늘은 가물치의 날. 물의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내는 손가락들이 모두 굵은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고 있었다. 깊은 물이끼 속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이 속닥거리다가 밝게 터졌다. 집에 돌아가는 길, 물푸레나무와 담쟁이가 교미하며 엉켜들어간다. 소용돌이가 휘말리고 뱀이 서로 감기는 그 모습을, 차마 쳐다볼 수 없어 눈을 가렸다. 때로 새의 깃털은 나선형으로 떨어진다 그렇지 않은가, 그 떨어짐의 나선형은 끌칼처럼 네 안구를 조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하수도에서 물이 넘치는 날 낮은 것들이 높은 곳으로 솟아오른다 그렇지 않은가, 낙엽이 몇 범람 위에 떠서 가장 낮은 곳의 한계를 지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럴 때 아이들은 맨홀 구멍에서 물나팔꽃이 피어난다고 말하곤 했다. 그날 너의 누이는 아비 없이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물고기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날 너는 네 누이의 맨살 위에 손을 댔다가 화급히 물러서야만 했다. 끓는 물처럼 네 누이의 배는 제 속에 든 것들을 삶아내고 있었다.

 

 

 

심사평

 

올해도 상당수의 수작이 있었다. 청년실업이 심각함은 물론, 갈수록 경제가 어려워지는 때이지만‘인간’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문학에의 갈증이 여전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간 위로가 되기도 했다. 올해도 예·본심을 통합해 진행했다. 예심은 응모작들을 세명의 심사위원이 나누어 읽고 5~10명씩을 1차로 선했다. 그후 본심에서 그 작품들을 꼼꼼히 돌려 읽었다. 17명의 본심 대상작 중 「사과」 외, 「밥상」 외, 「삼면화」 외, 「탁탁탁」 외, 「손톱 깎는 날」 외, 「메를린-x 301호 캡틴 록의 표류일지」 외, 「바라나시 4부작」 외 등 7명의 응모자가 남았다.

예심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느낌을 먼저 전한다. 전체적으로 수작이 적지 않았지만 엇비슷한 느낌의 작품들이 많았다. 이것은 시의 소재나 배경의 유사성으로 가시화되는데, 시에 등장하는 배경이 전지구적이라는 것은 해외여행이 일반화된 오늘날의 생활상과 정보공유의 확대로 말미암은 것이니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국적 지명과 소재의 단순 차용 정도일 뿐 시적 활력을 얻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게임이나 장르소설 등의 영향으로 보이는‘우주’와‘외계’의 출현도 잦은 편인데, 이런 상상력이 독자적인 개성을 획득하기보다 현실과의 접점이 부재한 관념의 노출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자기 얘기의 부재라는 측면으로 연결되는데, 자신만의 경험과 사유가 체화된 시보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채록해놓은 듯한 시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적이었다. 개성이 사라진 유행은 시적 진정성이라 할 마음의 역동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자기 사유와 경험에서 우러난 참신한 상상력의 부재는 대학생다운 패기와 신선함을 떨어뜨리고‘잘 만든 기성품’같은 작품을 양산하는 법이니 각별한 경계가 필요한 대목이었다.

본심에 오른 7명은 모두 수작이라 할 만한 좋은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작품간의 편차가 크거나 기성품의 세련됨이 지나친 작품들이 먼저 제외되었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들의 손에 남은 것은 「삼면화」 외와 「바라나시 4부작」 외였다. 두 사람 모두 분출하는 시적 에너지가 강렬한 문제작들이어서 심사위원들은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다. 시적 완성도와 안정감은 떨어지지만 분출하는 에너지, 패기만만한 호흡과 사유에서 양자 모두 우리 시의 새로운 미래를 예견해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고심 끝에 우리는 「삼면화」 외를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했다. 「바라나시 4부작」 외의 개성이 아까웠지만, 자신의 사유를‘시적’사유로 전환하는 방법에 대해 좀더 모색한다면 조만간 어느 지면을 통해서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전한다. 첨언하자면, 시가 길다는 것이 그 자체로 문제될 것은 아니지만 시적 긴장과 언어의 내적 필연성을 살피며 호흡을 좀더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 상상력에 접목된 사회성이 현대와 고전의 절묘한 호흡을 타고 있는 수상자가 보여줄 미래의 시가 무척 기대된다.

조정권 이문재 김선우

 

 

 

수상소감

 

첫 트임은 고통스럽습니다. 감추었던 것을 겉으로 트는 일은 통각과 옵니다. 몸 둘 바 모르는 마음과 함께, 은밀한 것을 드러내 보이는 첫 대면의 낯섦과 공포가 있으니, 올봄에 핀 꽃들은 더 아파 보이겠습니다.

여기 뽑힌 제 글들은 결함과 약점이 많은 것들입니다. 어떨 때는 추상에 치우치기도 했고, 어떤 곳에선 호흡을 놓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 담긴 어떤 지향성 덕분에,‘오늘’의 모습이 아니라 어떤‘내일’때문에 이렇게 수상의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심사위원분들의 사려에 우선 부끄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영예는 잡된 글 중에서 그나마 쓸 만한 것을 골라준 서정연과 박세형의 안목에 먼저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어두운 식견으론 평작과 태작도 분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글을 길러준 토양이자 리듬 훈련의 사관학교가 되어준 시속 동인들에게 그다음 영예가 돌아갑니다. 그들에게서 크고 유장한 것과 작고 섬세한 것을 두루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강병철, 김기일, 김현동 모두 감사드립니다. 새로 들어온 이광욱과 김민조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자폐의 오랜 기간 글의 유일한 독자가 되어주었으며 깜냥껏 정성껏 글을 읽어준 진흙에겐, 수상을 고기로 치자면, 척추를 주고 싶습니다. 무대에서 말을 쓰는 감각을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되고픈 열망을 일깨워준 인문극회 사람들에겐 몸을 바로 세우는 네 다리를 주어야 합니다. 글·이론·감수성에서 알게 모르게 많이 영향을 받은 문학회 사람들에겐 온기를 보하는 털과 가죽을 주어야 합니다. 특히 김경래는 그걸로 옷이나 하나 해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입신양명에서 거리가 멀어지는 문학의 길을 늘 경계하신 아버지는 이 길에 대한 회의와 적의를 제게 주셨습니다. 그 덕택에 저는 항상 어지럽고 방탕한 데 떨어지는 것을 경계할 것입니다. 차가운 정신의 뇌와 물러서지 않는 뿔을 드립니다. 모국어를 주신 어머니, 피와 몸과 마음을 주신 어머니껜 피가 담긴 심장 외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 뒤에 거기 무슨 맥박이 남는다면 그건 여전히 모두 동생의 몫입니다. 따뜻한 유년을 만들어준 친가·외가 식구들, 특히 성당에 다니시는 외할머니 그리고 절에 다니시는 친할머니껜, 나머지 살과 뼈를 다 발라 드려야 합니다.

이제 남겨진 것은 오로지 허세와 치기의 한치 혀뿐이니, 이게 유일한 제 몫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깨진 세상을 한꾸러미 다시 묶어주는 그런 글.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장황한 소감문을 접고 다시 침묵과 음악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희수